'평화' 선동으로 공산화된 월남

이단호크 작성일 13.04.27 04: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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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75년 멸망한 南월남을 닮아간다는 우려가 많다.
당시 자유사회인 南월남은 같은 민족인 공산주의 北월맹과 ‘대화하고 협상해서 평화적인 통일을 하자’는 여론이 번져갔다.
소위 ‘反戰·平和(반전평화)’ 여론을 이끌고 간 대표적 집단은 종교인들이었다.
결국 ‘평화’ 슬로건 속에서 南월남은 73년 北월맹과 평화협정을 맺었고 주월미군이 철수했다.
 
  당시 南월남 대통령 티우는 “가난한 北월맹은 10년 안에 망한다”며 자유민주주의 우월성을 자신했다. 현실은 달랐다. 평화협정 체결 2년 뒤 北월맹이 南월남을 기습남침했고 전쟁은 50일 만에 끝이 났다.

통일이 됐다!
그러나 자유통일이 아닌 적화통일이 되면서 南월남 인구 350만 명은 재교육 수용소로 끌려갔고 한 명도 살아나오지 못했다.

적화통일 후 ‘평화’를 외치던 수많은 종교인들은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자들 중 상당수는 北월맹의 간첩임이 드러났다.

  art_1366976981.jpg▲이대용 前주월공사
  아래는 월남 공산화 당시 한국의 공사로 있었던 이대용 前주월공사의 미래한국 인터뷰(2003년 4월5일) 중 일부이다. 10년 전 인터뷰이지만 역사적 사실은 지금도 그래도 적용된다.
  
  -월남 공산화 과정에서 종교인들의 반전평화운동이 어떠했나?
 
  누구나 평화를 사랑하고 원한다. 평화라는 개념이 불교는 자비(慈?), 기독교는 박애(博愛), 유교는 인(仁)으로 불리는 것을 볼 때 종교인들이 평화를 말하는 것은 더욱 당연하다. 70년대 월남에서도 틱찌광(Thich Tri Quang) 승려, 짠후탄(Tran Huu Thanh) 신부가 남월의 구국평화회복반부패운동 조직을 이끄는 등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앞서 평화메시지를 전했다.
 
  - 당시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전평화운동이 베트남 공산화에 어떤 역할을 했나?
 
  73년 파리휴전협정 체결 후 미국 헨리 키신저와 월맹의 레 둑토에게 노벨평화상이 수여되고, 74년 대규모 유전(油田)이 발견돼 75년 80억 달러 규모의 월남 전후복구 및 경제개발을 하기 위한 미국 현지조사단의 입국 등 당시 월남인들은 평화신기루 환상에 들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평화·화해·협력·교류를 강조했고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혹은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다. 반공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인사들은 얼마 안 가서 시체로 발견됐는데 73년까지 연평균 무려 840명이나 암살당할 정도였다.
 
  마침내 북월공산군이 남침총공세를 감행했을 때 반전평화 무드에 젖어 전의(戰意)를 상실한 남월군은 신무기마저도 모두 내버린 채 패주를 거듭했고 미국도 월남이라는 밑빠진 독에 더 이상 물을 붓지 않고 손을 떼고 물러났다.
 
  월남은 당시 세계 4위의 군사대국이었지만 주적(主敵) 개념이 없어진 상태에서 그 누구도 월맹공산군이 남침 총공세를 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고 그것이 결국 국방을 소홀히 하도록 해 월남을 공산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 공산주의자가 평화주의자로 위장한 경우는?
 
  67년 월남에서 대통령선거를 할 때 11명의 대통령 후보가 난립했는데 그중 변호사 출신 쭝 딘쥬(Truong Dinh Azu)가 대표적이다. 그는 “우리 민족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하고 외세마저 끌어들여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피는 흘러 내를 이루고 있다.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북폭(北爆)을 즉각 중지시키고 월북과 대화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연설, 유권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다행히 대선에서는 실패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했는데 결국 그가 거물급 비밀공산 프락치였다는 것이 월남 패망 후인 78년 미국 FBI가 그를 공산간첩협의로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 법정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을 때 밝혀졌다.
 
  당시 그를 용공 친북인사로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자기는 민족주의자이며, 평화주의자이고 진실한 불교도이니 믿어달라고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 최근 촛불시위 등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반미·반전운동이 확대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젊은이들은 혈기왕성해서 좋다. 그러나 경험과 지식은 부족하다. 월맹에 의해 공산화되었을 때 수많은 인사들이 인간개조교육의 명분으로 정치범수용소(형무소)에 잡혀 들어갔고 다행히 틱낫한은 귀국길이 막혀 프랑스로 망명했지만 평화운동에 앞장섰던 종교인들도 대부분 수감되고 처형당했다. 외교관 신분인 나도 5년 동안 불법으로 감금돼 고문당했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야밤에 바다로 뛰어들었는데 이 보트피플의 연인원은 106만 명이며, 이중 11만 명이 남지나해의 물귀신이 되고, 살아서 외국 선박에 구조되어 해외로 망명한 인원은 95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오늘날 한국 젊은이들은 월남 패망과 예멘통일 등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인간사의 모든 것은 역사 속에 있으며 역사의 교훈을 잊어버리면 반드시 망한다.
맹목적인 반미와 친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역사·국가관을 갖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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