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영상의 핵심내용은 한 마디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주문과 요구에 따라 수출경제를 입안했으며, 따라서 그는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60년대의 수출경제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의 관료들과 전문가들이 치밀하게 설계하고 요구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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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민족문제연구소의 프레이저 보고서 동영상의 왜곡된 편집기법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팩트와 허구를 뒤섞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르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불필요한 선동적 표현들은 그 제작 의도를 의심스럽게 한다. 우리는 60년대 초반 시작된 박정희 정부의 수출경제, 그 본모습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미국도 박정희 정부도 예상 못했던 수출 실적
1961년 5.16 군사혁명을 일으킨 박정희 정권은 혁명 1년 만인 1962년, 위기 상황에 봉착했다. 당시 혁명세력들은 경제를 살려 보자는 의기에 충만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있었다.
혁명 1년 후인 62년에는 최악의 흉작이 들었다. 더구나 그 해 말에 시행한 통화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민정으로 이양하라는 야당의 요구는 거세졌고 갈등은 증폭되고 있었다. 故이병철 회장은 자신의 수필집에서 “장차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라고 썼다. 모든 것이 암울해졌고 불투명해졌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지적대로 62년에 박정희 혁명정부가 부랴부랴 급조된 경제개발 계획을 세웠던 것은 사실이다. 프레이저 보고서의 지적대로 당시 이 계획은 미국이 보기에 무리였던 것도 맞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원래 1차 경제 개발 계획에서 기대했던 주요 품목은 감자와 같은 식료품과 담뱃잎같은 비(非)식용자재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혀 기대하지 않은 부분에서 대박이 터졌다. 원재료 제품, 즉 공산품에서였다. 63년 그 해 공산품 수출계획은 640만달러 였으나 실제 수출은 무려 2810만달러나 됐다.
깜짝 놀란 박정희 정부는 1차 5개년 계획을 수정해서 64년 공산품 수출 계획을 1920만 달러로 높여 잡았다. 하지만 공산품 수출 실적은 4,230만달러로 대폭발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서 달러박스가 터졌던 것이다. 그 해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 수출이 1억 불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기적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듬해 65년, 박정희 정부는 이 공산품 수출이 절정에 달했을 것으로 생각해 수출 계획을 3640만 달러로 전년도 실적보다 낮춰 잡았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그해 공산품 수출은 6640만 달러로 약 두 배 가까이 초과해 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면포와 같은 섬유쪽에서도 대박이 터졌다. 760만 달러로 잡았던 잡제품의 수출 목표가 그해 3450만 달러로 대박이 났던 것이다.
1차 경제 개발 계획의 마지막 해였던 66년 박정희 정부는 공산품 수출의 한계치라고 생각한 4300만달러를 목표로 잡았지만, 결국 그 마지막해 공산품 수출은 7360만달러가 됐고, 면포와 같은 잡제품은 목표였던 920만달러를 훌쩍 넘어 5220만 달러를 기록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복구하고 신축한 제철소가 수출대박의 주역
이러한 엄청난 수출실적은 다름 아닌 철강에서 왔다. 그것은 미국도 박정희 정부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당시 제철소는 삼화제철소와 대한중공업공사 두 곳이었다. 6.25때 이 두 곳은 거의 파괴되어 방치돼 있었다. 그것을 다시 복구했던 이는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은 실적 부진으로 있던 삼화제철을 58년 민영화했다. 그 결과 61년 삼화제철은 3기의 용광로를 가동했고 연산 2만1000M/t의 선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54년 대한중공업의 제강업을 재건하기 위해 서독의 DEMAG회사에 50M/T급 평로 1기의 건설을 발주하였으며, 56년말에 준공했다. 뒤이어 57년에는 같은 회사에 연산 12만M/T의 분괴압연시설, 그리고 연산 10만M/T의 중형 압연시설 등을 발주하여 59년 말에 대부분 완공했다.
이러한 토대에서 제선, 제강, 압연으로 이어지는 철강산업의 기본 줄기가 국민적 산업으로 확보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제철산업의 구조가 70년대 포항제철로 이어졌고 포항제철은 이후 우리 산업의 심장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성과가 민족문제 연구소가 주장하는 것처럼 미국의 관료들의 치밀한 계획과 요구에 의했던 것인가?
당시 미국이 한국 경제에 자문을 해준 것은 맞다. 그 방향은 ‘자유무역’과 ‘대외 개방’이었는데 미국은 2차대전 승리후, IMF와 GATT의 자유무역 체제에서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하며 달러를 기축통화화 하던 때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실 미국은 한국 뿐만 아니라 유럽과 동남아 등, 거의 미국과 우방인 국가들 대부분의 경제 정책에 이러한 개방과 자유무역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고 그 수단으로 차관과 같은 경제적 지원을 제공했다. 한 마디로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에 대항해 미국은 '자유진영'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배경은 1945년 승전국인 미국이 일본의 공산화를 막고자 경제 지원과 함께 군국주의 재벌을 해체하고 자유화를 추진했던 연원으로 올라갈 수 있다. 미국은 1948년, 서유럽에 대한 소련의 공산주의화 압력을 막고자 경제 지원인 마샬플랜도 추구했다.
여기에는 1948년 미국의 경제협력법(Economic Cooperation Act)이 중요했다. 미국은 서유럽의 경제의 재건을 체계화하고 원조 자금의 흐름을 감독하기 위해 수혜국들에게 4개년 경제 재건 계획을 입안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따라서 미국의 경제지원과 함께 공산화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도 유럽도 미국과 긴밀한 협조체계하에서 경제 재건 계획을 제출하고 자문을 받아왔다는 이야기다. 박정희 정권만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 박정희 정부를 수출경제로 인도했던 것은 미국 관료가 아니라 기업인들
그렇다면 민족문제 연구소의 주장대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이 시키는대로' 했을까?
결과적으로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이 요구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제시한 개방무역과 자유화의 방향이 옳았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사실 박정희에게 가장 많은 자문을 했던 사람들은 미국 관리나, 교수들이 아니라 기업인들이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천우사의 전택보와 삼성그룹의 이병철이었다.
그래서 당시 전경련 사무총장 김입삼은 63년에 박정희정부가 추구해야 할 급무에 대해 “이 나라 수출산업 촉진을 위한 時利와 地利는 갖추어져 있다. 이에 예지와 협동을 가미하여 결실을 기할 따름이다.”(金立三自傳, 186쪽)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렇듯 박정희 정부가 기업과 민관협력체제를 구축했던 배경에는 민족문제 연구소의 주장대로 1962년 통화개혁의 실패 경험도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당시 군인들이 5.16 혁명 직후였고 경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63년 수출정책이 제대로 맞아 떨어졌고, 앞서 지적한 바처럼, 이승만 대통령이 복구해 놓은 삼화제철과 대한중공업공사등 2대 제철소의 철강과 합판 등이 예기치 못한 수출 대박을 내고 섬유 수출이 가세하면서 우리 경제의 완전한 기틀이 잡힌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이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미국과 협조체계 안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기업인들을 믿고 따라간 것이었다.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과 경제 문제를 논의할 때 일부러 반대하거나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측면들이 있다. 그것은 당시 미국이 약속한 경제 지원 이행을 압박하고 협상조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전략이었던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인용하는 프레이저 보고서엔 "박정희 대통령은 다루기가 쉽지 않다"라고 기록되었던 것이다.
80년대 이후 모든 정권의 경제발전은 바로 박정희 정권의 수출주도, 그것도 철강과 공업의 기반하에서 이뤄졌다. 그러한 박정희 정권이 초기 5.16 혁명후 전전긍긍했던 위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모두가 주장했던 수입대체 산업이 아니라 과감한 수출정책 때문이었고, 그 수출정책은 다름 아닌 이승만 정권이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100년 앞을 내다보며 닦아 놓은 제철 산업 기반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오늘 우리가 박정희, 이승만 이 위대한 두 대통령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