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운동의 본진(本陣)이라 불리는 민주노총의 투쟁과정은 일본 최대 노동단체였던 총평(일본 노동조합총평의회)이 걸어 간 몰락의 길과 닮았다. 춘투(春鬪)를 통한 불법파업과 폭력시위, 미군철수 주장과 반자본주의, 반정부 이념투쟁의 행태가 그렇다.
김명환 명지전문대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민주노총은 매년 임단협 갱신기에 산업별로 임금투쟁을 통일해 공동투쟁을 전개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이는 총평이 파업일정표에 따라 전개했던 춘투와 닮은 것이다. 민주노총 산하 전교조가 벌인 교원근무평정 반대투쟁도 반세기 전 일본 총평 산하 일교조가 전개한 교원 근무평정 반대투쟁 전술과 일치하고 있다고 김명환 교수는 지적한다.
민주노총은 산별노조 전환을 추진하면서 노사관계 선진화라고 포장하지만 사실은 계급적 단결을 위한 계급적 연대투쟁의 일환일 뿐이며 일본 총평의 강령초안 취지와 같다는 점도 흥미롭다. 아울러 민주노총은 사업평가를 하면서 투쟁기록이 저조할 경우 무사안일을 경계하며 강력한 투쟁을 촉구한다.
파업 없는 노사관계 안정이 투쟁 의미 부족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노총 지도노선은 노동조합을 사회주의 수립을 위한 기간부대라고 규정하며 투쟁으로 일관한 총평의 계급투쟁 노동운동 노선과 유사하다.
그렇기에 소멸된 일본 총평의 과거 노동운동 역사를 뒤돌아보면 민주노총의 미래가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짐작할 수 있다.
반자본주의 노동운동세력 ‘총평’의 흥망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군정은 일본 민주화정책의 일환으로 3천여명의 정치범을 석방했다. 아울러 미군정은 노동조합을 장려했다. 전후 해방 분위기를 타고 일본노동은 기업을 단위로 조직화되기 시작했으며 좌파노동세력이 주도하는 경영권 접수투쟁이 번져나갔다.
노조의 경영권 접수투쟁은 공산주의 혁명의 일환이었기에 우파는 1946년 85만명이 참여한 ‘총동맹’(일본노동조합총동맹)을 결성해 좌파 노동운동에 맞서게 된다.
우파진영의 노조가 결성되자 곧바로 일본 공산당의 지도하에 좌파노동세력은 같은 해 산별회의(전일본산업별노동조합회의)라는 대항조직을 결성했다. 당시 소속회원은 110만명이어서 일본 노동운동은 좌파진영이 우세한 형태로 구축됐다.
노동에 우호적인 전후환경에서 공산당의 혁명운동 모체로 결성된 산별회의는 계급투쟁 노동운동 중심에 섰다. 산별회의는 조직 내부에 뿌리박은 당세포를 통해 공산당이 지배했으며 분규가 일어나면 공동투쟁을 전개해 총파업으로 확대시키고 다시 정치투쟁으로 변질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관공노조 임금투쟁(1946년)의 경우 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정치적 요구를 추가해 정부를 압박한 다음 ‘내각타도, 민주인민정부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총파업 정치투쟁으로 몰고가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산별회의가 주도하는 총파업 정치투쟁은 미군정의 개입으로 좌절되는 상황을 맞이했다. 과격노선에 반대하는 세력 이탈이 늘어났고 좌파조직은 소수파로 전락했다.
1946~47년의 노동운동은 미군정의 폭력파업 단속에 맞서 더욱 강도를 높여 응원파업을 부추기며 전 산업차원 파업으로 확대시키는 전략을 반복했다. 목적은 정치적 인민궐기대회를 통해 미군헌병과 충돌하는 등 사회혼란 조장이었다.
총평은 노동단체임을 표방하고 출범했지만 행동은 정치투쟁으로 일관했다. 1951년 2차년도 총회에서 총평은 대미종속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선동했다.
그러한 아젠다로 단독강화 반대·강화조약 비준반대·미일안보조약 반대·안보조약개정 반대·미군사격장설치 토지접수 반대·미군비행장확장 반대·미군사기지 반대·원수폭 금지운동 등 반미투쟁에 조직노동을 약 10년간 동원했다.
생산성 향상 운동에 무너진 강성노조운동
총평이 결정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55년부터였다. 당시 일본에는 전후 부흥 차원에서 일본 생산성본부가 출범했고 생산성향상운동이 시작됐다. 총평은 이에 대한 생산성·합리화 반대투쟁으로 맞섰다.
총평은 생산성향상운동에 대해 ▲노동의 초과이윤 착취 ▲임금인하 ▲감원 ▲노동운동 탄압 ▲노동조합 분열을 책동하는 것이라며 반대했고 이를 임금투쟁 춘투와 연계해 ‘합리화·감원반대’ ‘노동강화반대’ ‘생산성운동타파’ 투쟁과 연계했다.
이러한 총평의 비타협적 노동운동은 계속될 수 없었다. 1973년 유류파동은 총평의 계급투쟁 노선의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 경제가 고임금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총평을 지도했던 일본 공산당은 1976년 13회대회에서 총평의 강령을 수정했다. 즉 ‘프롤레타리아 집권’에서 ‘노동자계급의 권력 확립’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을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으로 각각 수정했던 것이다. 일본 총평의 해산은 일본 경제의 성장이 계속되면서 임금상승과 함께 가시권에 들어갔다.
조합원들의 불만이 높아져 간 것이다. 결정적 계기는 1976년 2차 유류파동에서 왔다. 일본 정부가 강력한 구조조정을 시행했던 것이다. 총평은 여기에 무기력했다. 과거 총평의 투쟁력을 높이 평가해서 ‘옛날엔 육군, 지금은 총평’이라고 했던 말은 1976년 총회에서는 ‘시골 소방단’이라는 자조로 바뀌었다.
1980년 이후 총평내 우경화 바람이 불면서 춘투 대신 무파업 단체협약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주적 해결이 늘어나고 임금인상도 물가상승률 수준에 머물기 시작했다.
마지막 춘투는 1986년에 있었다. 당시 춘투에서는 임금인상 대신 감세와 근로시간 단축, 주휴2일제 실시 등 정책제도 요구로 타결이 이뤄졌다. 그것은 1955년 총평 주도로 시작된 춘투의 종언에 다름이 아니었다.
결국 중도파가 주도한 일본노동조합의 대동단결이 성사됐고 노선별로 갈라섰던 각 노조의 전국조직은 해산됐다. 총평은 마지막으로 자진 해산했다. 그 결과 일본의 좌파계열 노조는 전체 노조의 10%에도 못미치는 수준으로 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