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수사를 둘러싼 야권의 헛발질들 [다람쥐주인님 글]
국정원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은 어제 사건의 핵심인물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해 불구속기소방침을 밝혔다. 이미 경찰수사과정에서부터 수차례 축소?은폐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청와대는 이와 관련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으며, 여당은 아직도 ‘감금사건’ 운운하며 방탄에만 급급하고 있다. 청와대와 여권의 대응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사건을 둘러싼 야권의 대응 역시 부적절하긴 마찬가지다. 국정원사건과 관련해서 최근 있었던 몇몇 야권 정치인들의 ‘헛발질’ 사례를 모아봤다.
<김주당 김한길 대표>
사례1) 김한길 "긴급 기자회견이라며?"
11일 오전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의 골자는 황교안 법무부장관의 해임결의안을 검토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법무부장관 해임건의안 제출은 이미 일주일전에 민주당 국정원 진상조사특위가 ‘최후통첩’이라며 빌표했던 내용이다. 고작 기존의 입장을 ‘재탕’할거면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도 부질없고, 그 앞에 ‘긴급’이란 말을 붙인 의도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여대야소상황에서 법무장관 해임건의안은 실현가능성 없는 공갈포에 불과하다. 전혀 '긴급'하지 않은 내용으로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이다. 문제는 ‘뒷북’과 ‘재탕’에만 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일주일 사이에 원 전 원장 불구속기소라는. 제1야당으로서 좌시할 수 없는 사건이 터졌음에도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대응방안을 마련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이른바 ‘중도지향’을 슬로건으로 내건 김한길 대표의 취임이후 민주당이 더욱 유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야권의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날의 기자회견은 그 우려를 현실이 되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다.
내용없는 기자회견만큼 허무한 것도 없다. 김한길 대표는 이전에도 별 내용없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기자들의 빈축을 산적이 종종 있다. 김 대표는 지난 4월 7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친노니, 비노니, 주류니, 비주류니 하는 명찰들은 다 쓰레기통에 던져버리자”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저런 정치수사로 일관된 내용이 기사화될 이유가 있는지, 나아가 이런 기자회견 자체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었다. 그는 당직을 맡지 않았던 시절에도 종종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특별한 내용이 없는 정치적 수사를 이야기하길 좋아했다. 그가 기자회견의 내용보다는 ‘형식’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안철수 의원>
사례2) 안철수 "엇박자라고?"
같은날 무소속 안철수 의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수사를 담당했던 일선 검찰은 공직 선거법을 적용한 구속 기소가 합당하다고 판단했으나 법무부에서 엇박자를 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보도자료를 받은 대부분의 언론들은 <안철수, 검찰과 법무부 엇박자 심각한 문제>라고 헤드라인을 뽑았다. 이날 안 의원이 배포한 보도자료의 키워드가 ‘엇박자’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저 기사제목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보면 볼수록 이상한 표현이다. 보통 ‘엇박자’라는 표현은 양비론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박자’를 맞추어야 할 책임은 한쪽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도자료는 “법무부가 엇박자를 냈다는”이라며 법무부의 책임을 이야기하는 듯 보이지만, 이미 ‘엇박자’라는 말 자체가 양쪽의 책임이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책임소재가 분명한 사안에 대해 굳이 저런 모호한 표현으로 비난의 대상을 흐려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공직선거법위반 혐의적용-불구속기소>라는 타협안이 발표됐지만, 지난 2주간 황교안 법무장관과 검찰수뇌부가 벌였던 갈등의 양상은 선악의 구도가 선명한 것이었다. 언론과 대중의 비난의 화살은 검찰의 구속기소방침에 반대한 황교안 법무장관을 향해있었고, 이 갈등이 양비론적으로 해석할 여지는 전혀 없어 보였다.
작년 12월 15일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의 꼬리가 잡히자 안철수 후보는 양 후보 모두를 향해 “혼탁선거를 중단하라”고 비난하며 자신의 유세를 중단했다. 이번 보도자료에 적혀있던 ‘엇박자’라는 단어는 당시의 ‘혼탁선거’만큼이나 부적절한 단어선택으로 보인다.
<민주당 조경태 최고의원>
사례3) 조경태 "이분은 소속이 어디?"
헛발질의 하이라이트는 조경태 민주당 최고의원의 입에서 나왔다. 조 의원은 국정원사건과 관련해 지난주 열렸던 비공개 민주당 최고의원회의에서 "이명박 정부시절 일어난 일에 대해 집중적으로 정치쟁점화 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 득이 될 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민주당에 강경한 대응을 자제할 것을 주문했다. 발언자가 누구인지 몰랐다면 영락없이 새누리당에서 나온 발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야당내 여당'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국정원사건을 정치쟁점화 하는 것이 당에 손해라는 특이한 계산법도 이상하지만, 국정원의 선거개입이라는 중대한 시국범죄를 두고 당의 득실관계를 따지려하는 태도 자체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다. 조경태 의원의 발언을 보고 지금까지 왜 민주당이 그토록 국정원사건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해왔는지, 청와대와 여당이 왜 그토록 민주당을 가볍게 대해 왔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이어서 나온 발언은 더욱 참담하다.
"전략전술상으로 민주당은 실용주의적 노선을 지향하며 과거와 좀 다른 행태를 보여야 수권정당으로 갈 수 있다"
실용주의노선과 국정원사건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 국정원사건에 침묵하는 것이 어째서 '과거와 다른 행태'가 되는 것인지 도통 해석이 안된다. 조경태 의원은 지난달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15.65%의 득표율로 2위를 차지해 최고의원으로 선출된 인물이다. 민주당 수뇌부를 이런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국정원사건을 대하는 민주당의 창끝이 무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치적 득실관계에 매몰된 비겁함
언급된 세 정치인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정치가'가 아닌 '정치공학도'의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이라는 중대한 사안을 앞에 놓고도 옭고 그름이 아닌 정치적 득실관계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정치가는 자신의 이성을 바탕으로 그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안에 대해 명확한 가치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들이 비겁해진 이유는 가치판단을 이성이 아닌 계산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야권에는 저런 비겁한 정치공학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야권에는 ‘원세훈 원장 지시?강조사항’을 입수?공개 하는 등 사건초기부터 굵직굵직한 이슈들을 주도해온 진선미 의원이나, 국정원사건과 정권의 정통성의 연계를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정청래 의원같이 강단있는 인사들도 있다. 그러나 제1야당의 수뇌부와 야권의 유력 정치인들이 저마다의 손익계산을 따지고 있는 이상 이런 의연한 정치인들 몇몇의 패기만으로는 상황을 헤쳐 나가기에 역부족이다.
앞서 언급한 세 명의 정치인중 한명은 제1야당의 당대표이며, 다른 한명은 그 당의 최고의원이다. 또 다른 한명은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이면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중 한명이다. 야권의 유력 정치인들이 국정원사건에 대해 저렇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 법무부와 수사기관이 제대로 된 압박을 느꼈을 리 없다. 만약 국정원사건의 전모가 명명백백히 밝혀지지 않는다면 청와대와 여권은 물론 어정쩡한 자세로 일관했던 야권 정치인들에게도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