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키는대로 했을 뿐? 국정원직원 기소유예 단상 [다람쥐주인님 글]
<고문기술자 이근안>
“나는 국가가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다. 나도 피해자다” - 고문기술자 이근안
‘나쁜 권위에 대한 복종’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는 인류사의 오래된 난제이다. 잘못된 명령을 내린 ‘권위’를 처벌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명령을 실행한 ‘복종'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특히 상명하복이 최고의 도덕으로 여겨지는 군대나 유사군대(ex:정보기관)의 명령체계 아래서 벌어진 ‘복종범죄’는 권위적인 사회에서 쉽게 동정을 얻는다.
국가가 ‘복종범죄’를 단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어제 대한민국의 검찰은 이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결정을 내렸다.
'복종'이 범죄를 사면하다
14일 검찰은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의 주모자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수사은폐사건을 지휘했던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불구속기소하면서 이종명 전 3차장, 민모 전 심리전단장, 김모 심리전단 직원 등 3명, 외부 조력자 이모씨 등에 대해서는 전원 기소유예처분을 내렸다. 기소유예란, 혐의사실은 인정되나 정상을 참작해 ‘봐주겠다’는 뜻이다. 검찰이 밝힌 기소유예의 변은 그들이 "원 전 원장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는 점"을 감안했다는 것이다.
고문의 잔악함이나 (위와 같은)이후의 진술로 볼 때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행위는 형식적으로는 복종(服從)이었으나, 내면적으로는 권력을 향한 추종(追從)이기도 했다. 원세훈 원장의 명을 따랐던 국정원 직원들의 행위 역시 복종과 추종, 그 사이 어디쯤인가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의 구분은 국가범죄의 피해자들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피해자 앞에서 명령자와 수행자는 <국가>라는 이름의 한몸일 뿐이다.
검찰은 어제 '복종'이 범죄를 사면해 준 사례를 남겼다. <원세훈 원장과 그의 지시를 따랐던 직원들의 관계>는 <전두환과 이근안의 관계>와도 같다. 고문혐의로 도피끝에 검거된 이근안은 법정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의 검찰이 이근안에게 "그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죄를 묻지 않았다면 검찰은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미셀 푸코, 허버트 켈만, 스탠리 밀그램 등 많은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이 '복종에 의한 범죄'의 심각성에 대해 지적했다. 대부분의 국가범죄는 명령자가 아닌 그것을 실행하는 ‘복종자’들의 손에 의해 자행된다. 2차대전중 벌어진 유대인학살은 명령을 내린 히틀러의 손이 아닌 단지 그의 명령에 따랐던 수천 수만의 나치대원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나치대원들은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600만이 살해된 홀로코스트에 대해 최고명령자인 히틀러만 처단하면 충분한가? 만주 731부대에서 이루어진 끔찍한 생체실험에 대해 최고 명령자인 도조 히데키만 처벌하는 것이 옳은가? 그저 '전두환의 국가'로부터 받은 명령을 따랐을 뿐인 이근안을 풀어줘야 하는가?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면 이 세상의 수많은 관료들이 영혼없는 부품으로 전락했을 것이며, 수없이 많은 '복종을 가장한 범죄'들이 판을 쳤을 것이다.
<15일 장진수 전 주무관 트위터>
검찰이 휘두르는 마법의 지팡이
어제 검찰이 내린 괴상한 결론은 뜻밖의 억울한 이들을 만들어냈다. 민간인사찰사건으로 기소돼 힘겨운 법정싸움을 벌이고 있는 장진수 전 주무관은 이번에 기소유예결정을 받은 국정원 직원들과 거의 같은 혐의-위법적 지시를 따른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대기발령상태에서 1심과 2심 모두 징역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에서도 집행유예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공무원 옷을 벗어야 한다.
민간인사찰사건은 '윗선'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던 총리실 직원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마찬가지로,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은 원세훈 원장의 위법한 명령을 충실히 따랐던 직원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장 전 주무관은 사건 윗선의 지시에 따라 증거를 인멸했을 당시 지시의 위법함을 알고 있었다고 시인했다. 각종 게시판에 야당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달았던 국정원 직원들 역시 명령의 위법함을 몰랐을 리 없다.
장 전 주무관은 양심적 내부고발로 자칫 수박겉핥기로 끝날 뻔 했던 민간인사찰사건의 전모를 밝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내부고발자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해 직을 상실할 위기에 놓인 그가 위법적인 지시를 묵묵히 수행했던 국정원 직원들이 기소유예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봐도 장 전 주무관과 국정원 직원들의 혐의에서는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다. 한국의 검찰이 같은 법조문을 놓고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데 익숙한 조직이란 걸 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민망스럽지 않은가. 세련되지 못한 검찰의 '차별'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흥미진진해진 원세훈 재판
어제 대한민국 검찰은 원세훈 원장의 지시를 받았던 '복종범죄자'들을 풀어줌으로써 공무원의 ‘위법한 명령에 따를 의무’를 인정했다. 그들은 국정원 직원들이 저지른 위법행위의 중대함보다 상명하복 문화의 '미덕'을 더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어떤 국가기관의 범죄자라도 <명령-복종 관계>만 입증한다면 처벌을 면할 수 있다. 만약 나치대원들이나 731부대원들이 대한민국 검찰의 손에 맡겨졌다면 그들은 정상참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제 검찰의 논리대로라면, 만약 원세훈 전 원장이 자신도 다른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한다면 그 역시 풀려날 수 있다. 원 전 원장에 대한 법정재판이 흥미진진해진 이유다.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의 최고 명령권자가 누구였는지 밝히는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