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체포했던 경찰, 고엽제전우회 앞에선? [다람쥐주인님 글]
<아저씨들 전쟁났나요? 출처:오마이뉴스>
"전두환 체포하러 왔다"
어제와 그제 전두환 씨의 연희동 사저 앞에 군복을 입은 남자들 수백 명이 집결했다.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전두환 씨를 '체포'하러 나타난 것이다. 수십대의 차량에 나눠타고 등장한 그들은 현역 못지않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광경을 연출했다.
그들이 그곳에 나타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부정축재와 추징금미납에 대한 분노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전두환 씨가 집권당시 미국에 대한 고엽제 소송을 방해한 것에 대한 분노때문이다. 언론들은 주로 추징금미납쪽에 포커스를 맞췄다. 그러나 "고엽제전우 우롱한 전두환은 자폭하라"라고 적힌 현수막의 내용이나 그들의 입에서 나온 발언들을 종합해 볼 때 고엽제전우회가 그곳을 찾은 목적이 전자보다는 후자 쪽에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엽제전우회 권순진 강원도지부장은 “전두환 정부가 고엽제 소송 참여 권유를 묵살해 한국 고엽제전우회가 피해배상을 받을 길이 없어졌다. 정부는 전 전 대통령 일가의 재산을 전액 몰수해 고엽제 환자를 위한 의료연구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연희동을 찾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물론 전두환 일가의 재산이 환수된다 해도 그돈이 거기에 쓰일 리는 없다.
고엽제전우회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사용한 고엽제(枯葉劑)로 인해 피해를 입은 참전군인들의 모임이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베트남 참전 군인들은 미국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미국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내 1984년 1억8000만달러를 배상받았다. 한국 고엽제 피해자들도 뒤늦게 1996년 소송을 냈으나 미국 법원은 원고 패소 판결했다. 고엽제전우회는 1984년 전두환 정권 당시 정부가 일방적으로 한국인 고엽제 피해자의 존재를 감춘 탓에 배상 기회를 놓쳤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억울한 일이다.
이들이 연희동을 찾은 이유는 '정의감'보다는 '억울함'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추징금미납규탄에 포커스를 맞춘 언론들의 태도는 적절하지 않다. 이들의 억울함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언제고 원하는 방식으로 집회를 열 자유가 있다.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연희동을 지키는 경찰의 일관되지 못한 경호 태도다.
<작년 1월 25일 경찰에 연행당하는 이상호 기자>
기자에게 수갑 채웠던 경찰 이번에는?
작년 1월 25일 MBC이상호 기자(현재 GO발뉴스)는 전두환 정권 시절 고문을 받았던 김용필 씨와 함께 전두환 씨의 자택을 찾아갔다가 취재를 제지하던 경찰에 의해 수갑이 체워진 채 연행됐다. 경찰측은 "이상호 기자 등이 Y의경을 폭행해 공무원의 전직 대통령의 경호 및 경비에 관한 정당한 직무를 방해했다"며 고소했고, 검찰은 그에게 징역 10월을 구형했다.
당시 현장에서 취재를 시도하던 사람은 이상호 기자와 카메라맨 단 두명 이었고 이 기자는 "전두환 씨를 취재하러 왔다"고 방문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초소를 지키고 있던 경찰은 이 기자를 몸으로 50m나 밀어내며 완력을 사용했고 공부집행방해를 이유로 수갑을 채워 경찰서로 연행했다. 이후의 상황은 다음 글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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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현장을 지휘하던 박준규 고엽제전우회 수석부회장은 "어제 전두환을 체포하려고 했는데 못했다. 비록 오늘 비가 오지만 여기에서 집 앞을 지키면서 호시탐탐 체포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나오기만 해봐라, 당장 체포하겠다"라며 으름장을 놨다.
수백명의 남성들이 떼지어 군복을 입고 뛰어다니는 모습은 전두환 씨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그들이 예전처럼 가스통이라도 동원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17일에도, 18일에도 고엽제전우회 시위대는 아무도 연행되지 않았다. 그들은 7월 4일까지 매일 오전 이같은 위협적인 시위를 벌이겠다 공언했지만 경찰은 이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대략 이런 분들. 2008년 MBC 사옥 앞>
경찰의 유치한 피아구분법
작년 1월 경찰은 이상호 기자를 체포했던 이유를 '경호업무'때문이라 밝혔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찾아온 두 명의 남자와, 떼지어 군복을 입고 나타난 500명의 남자들. 당신이 전두환이라면 둘 중 어느 쪽에 더 위협을 느꼈겠는가? 경찰의 이상한 '경호기준'에 고개가 갸웃거린다.
경찰이 고엽제전우회를 연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난 1월 이상호 기자를 체포했던 자신들의 대응이 비정상적이었음을 자인한 셈이다. 경찰이 그들을 연행했어야 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상호 기자의 체포가 과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굳이 고엽제전우회의 사례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단순한 취재를 목적으로 찾아온 기자에게 수갑을 체워 체포했던 경찰의 태도는 분명 비정상적이다.
검찰은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이상호 기자에게 징역 10월을 구형했으나 재판부는 심과 2심 모두 "직무집행을 방해할 정도의 폭행을 했다고 보기도 어렵고,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이에 불복, 지난달 사건을 대법원에 상고하며 지리한 법정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작년 1월 이상호 기자는 체포되기 얼마 전 '장자연 사건 국정원 개입을 경찰이 알고도 모른채 했다'는 보도로 경찰을 곤혹스럽게 했다. 언제나 살아있는 정권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보도로 권력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이상호 기자가 경찰에게 눈엣가시였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반면 고엽제전우회는 애초 설립목적과는 달리 사실상의 관변단체로 활동해온 조직이다. 이들은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질 때마다 현장에 나타나 시위를 방해하는 역할을 해왔다. 유명한 '가스통 할아버지들'이 바로 그들이다. 지난 2008년 6월 13일 고엽제전우회는 "광우병을 빌미삼아 정부를 타도하거나 전복시키려는 세력이 뒤에 있다"며 가스통을 차량에 매달고 MBC사옥 앞에 나타났다. 가스통으로 경찰을 위협하고 촛불시위대를 폭행했던 당시에도 그들은 아무도 연행되지 않았다.
2008년 가스통보다 촛불에게 더 큰 위협을 느꼈던 경찰은 5년 뒤에도 군복입은 500명의 남성들보다 손에 펜을 든 한 명의 기자를 더 두려워한다. 당시 경찰이 가스통보다 촛불을 더 무서워했던 것은 가스통은 '아군'의 무기이며 촛불은 '적군'의 무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이번에도 500명의 '전두환 체포단'과 이상호 기자 사이에서 확실한 '피아구분'을 했다. 자국민을 상대로 피아구분을 하는 경찰의 태도에서 오싹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