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토에서 나온 거짓말 두 가지만 바로잡을게

가자서 작성일 13.09.11 22: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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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토에서 나온 거짓말 두 가지만 바로잡을게  [늙은도령님 글]

 

 

 

선친께서 이승만에 대해서 해주신 얘기의 일부를 전한다. 내 선친은 황해도 해주에서 월남했으며 생존해 계셨으면 85세이다. 선친은 안창호 집안과 친해서 이승만에 대해서 특별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최고의 자리가 아니면 늘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의 지나친 권력욕을 컨트롤 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선친이 북한에 있을 때 안창호 선생과 그의 아들로부터 들은 얘기는 상해임시정부 누구도 권력에 대한 야망으로 가득한 이승만을 해방된 조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를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으로 묶어두는 것이 항일독립운동과 조국 해방에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군인 신분으로 미국에 단기유학 중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귀국하신 선친이 ‘미국에서 이승만이 워싱턴에 있었던 독립협회에서 밀려나자 하와이에서 새로운 독립협회를 만들어 워싱턴 주재의 독립협회를 모함하고 비난을 퍼부었고’ 그의 비열한 공작을 당할 수 없었던 타 독립운동 단체들은 이승만을 수장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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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분토론 화면캡처

이런 내용은 선친이 미국에 유학갔을 때 이승만과 일했던 당사자들에게서 들은 얘기며, 비슷한 내용이 제1공화국에서 제3공화국까지 다룬 각종 서적과 연구, 한국과 미국의 정부자료들에 나와 있다. 이승만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너무나 컸기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하는 부도덕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실제로 독립운동을 한 적이 거의 없으며 미국에서 받은 박사학위와 고위 실세와의 친분을 이용해 원하는 것들을 하나씩 쟁취해나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 주석에 올랐고, 그 지위를 이용해 좌우 진영을 포괄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의 초대 주석에 올랐다. 국무총리에 허헌, 내부부장에 김구, 부주석에 여운형, 외무부장에 김규식, 경제부장에 하필원, 제정부장에 조만식, 채신부장에 신익희가 임명되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상당한 식견과 전문성일 갖춘 이들이었다.

 

 

하지만 인공의 하부조직은 미흡했으며 미군과의 마찰이 잦아지면서 갈수록 힘을 잃어갔고, 당시에 압도적 세력의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던 자생적 공산주의자 정당과 맞섰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힘이 부족했다. 전국적 조직과 행정경험의 부족으로 인해 인공은 지리멸렬해졌으며, 기회주의자 이승만은 친일부역자들이 다수 포함된 정당인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과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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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역사문제연구소의 자료 캡처

 

한민당은 보수우파와 친일부역자, 자산가들로 이루어진 미군의 유일한 파트너가 되었다. 이후 국가의 권력은 인공에서 친일부역자가 다수인 한민당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이때부터 여운형 등 자생적 공산주의(실제는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웠다) 정당과 사회민주주의 정당도 강제로 해체됐고, 인사들은 한 명씩 암살되거나 테러로 보이는 각종 사고로 죽었다.

 

 

이들을 이용해 정권을 잡는데 성공한 이승만이 일제에 부역한 공무원과 경찰의 80~90%를 대한민국 최초의 공무원과 경찰로 고스란히 채용했다. 이는 일본군에 대한 미국의 파단 오류(도대체 미국은 모든 곳에서 오판한다)가 불러온 최악의 비극이었다. 미국의 계획대로 된 것은 베트남전쟁의 확전일 뿐이다. 이를 위해서 돈킹만 사건(한국의 천안함과 비슷함)을 소련에 의해 침몰된 것으로 조작해 베트남전 확대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쉽지 않았고 사상자가 늘어나자 전쟁을 대신해줄 군대가 필요했다. 박정희가 미군을 대신해 전쟁을 하겠다며 다른 국가에 비해 대규모 파병에 나섰다. 하지만 베트남 국민들이 공산주의자인 호치민을 숭상했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하기 전에 베트남이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화학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해 지옥으로 만들었다.

 

 

베트남 참전군인의 고엽제 피해가 여기서 발생했으며, 국토가 만신창이가 된 베트남은 오랫 동안 빈곤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 반면에 한국은 베트남전을 통해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었지만, 너무나 많은 베트남 사람을 죽이고 어린 여자를 건드렸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한 동안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국가적 차원의 보상과 사과가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최초의 단기장교훈련기관인 십자성 출신의 선친은 베트남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베트남에 파견 나갔다 돌아온 동료 군인과 장교들로부터 들은 얘기와 서류로 확인한 것들이 여러 가지다. 특히 한국 군인이 특정 마을에서 베트공에 의해 죽으면 그 마을을 완전히 포위해 주민을 모조리 학살함으로써 다시는 베트공을 도와 한국 군인이 살해되는 일이 없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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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퐁니, 퐁넷 마을 이상의 학살은 참전군인들의 기억에만 있을 뿐이다.

 

이는 베트남 국민들에 대한 확실한 경고였고,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은 후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국인에 대해 극도의 두려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고, 베트공도 한국 군인을 죽일 때 가급적 주민의 도움을 받지 않았고 한국군과의 전투가 가급적 피했다. 베트남전에서 보여준 한국군의 잔인함과 비인도적 행태는 거의 전쟁범죄 수준에 이를 정도라 잔혹했지만 미국의 편에 서있었기 때문에 국제적 질타와 책임을 받지는 않았다.

 

한국 군대가 베트남에서 저지른 죄악은 결코 작지 않으며 전쟁을 치르면서 미군으로부터 대여 받은 M16을 대량으로 국내에 빼돌리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은 베트남 국민의 희생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따라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호치민 동상에 헌화했을 때 아버지의 잘못에 대해 사과했어야 마땅하다. 베트남전은 박정희의 최고업적인 압축성장에 엄청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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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구원의 손길을 받은 일부의 라이 따이한

 

 

일본의 위안부 문제처럼 한국 군인들도 수없이 많은 베트남 여성들을 건드리면서 라이 따이한이라는 수많은 아이들을 낳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국군인들은 이들을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으며 거의 다 방치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파괴했다. 따라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베트남 전쟁의 아버지이자 공산혁명의 국부인 호치민의 무덤에 헌화를 하면서 최소한의 김대중과 노무현 이상의 사과는 있어야 했다.

 

 

아무튼 교학사 역사교과서에서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고 김구의 역할을 줄이고, 친일파들의 행적을 왜곡하고, 베트남전을 미화한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을 넘어 당대의 양국 국민들을 욕보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분명 이승만 정권은 극도로 부도덕했고 부패와 비리로 얼룩졌으며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들이 피신할 때 이용할 한강 다리를 폭파함으로써 자신의 도주에 시간을 벌기도 했다.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그를 미화할 수 있는 것은 극도의 노동착취와 정경유착, 베트남 참전으로 대책 없는 압축성장을 이룩한 것뿐이다. 몇몇 경제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각종 통계자료와 지수, 수치를 근거로 박정희 시대의 압축성장이 허상이었음을 입증한 것도 제법 나와 있다. 필자가 뉴라이트가 만든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분노하는 것에는 이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승만과 베트남전의 미화란 그중에서도 최상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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