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중정, 박근혜의 국정원

가자서 작성일 13.10.22 16: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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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중정, 박근혜의 국정원  [오주르디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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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은 국가정보기관을 정권유지의 선봉대로 활용해 장기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박정희가 치른 세 번의 대선(직접선거)과 유신독재 개헌은 중앙정보부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식적인 선거조직은 공화당이었지만, 정치선동과 정치공작으로 부정선거를 획책하며 선거를 견인한 건 중정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자행한 6.8부정선거, 4.27공작선거

 

박정희 정권이 자행한 가장 추악한 부정선거는 1967년 6월에 치러진 총선(6.8부정선거)과 1971년에 있었던 제7대 대선(4.27공작선거)이었다. 40여 년 전 사건이지만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국정원 대선개입, 부정선거 의혹과 상당히 닮아있다. 

 

수단과 방법에서는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내용과 질을 따진다면 그때를 능가할 정도로 교활하다. 혹자는 12.19 부정선거 의혹이 전 정권과 관련된 일일뿐 박근혜 정권과는 무관하다고 강변한다. 잘못된 주장이다. 정권 재창출을 위해 두 세력이 철저하게 하나로 뭉쳐 선거를 치렀다는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이다. 

 

40여 년 전과 지금이 어떻게 닮아 있는지 살펴보겠다. 먼저 6.8부정선거. 4.19 민주혁명을 촉발한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가 무색할 만큼 타락하고 부패한 선거였다. 중앙정보부가 선거 전반을 지휘했고, 박정희는 전남 목포에 내려가 국무회의를 여는 방법으로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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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부정선거로 치러진 6.8총선/1967>

 

부정선거 덮기 위해 간첩단 사건 터뜨려

 

당시 김형욱 중정부장이 동원한 부정선거 수법은 무지막지했다. 주민 동원과 금품 살포는 부정의 축에도 들지 못했다. 중복투표, 대리투표, 강제 공개투표, 올빼미표, 투개표 조작 등 전대미문의 수법이 동원됐다. 

 

6.8총선을 이토록 악랄한 부정선거로 치러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중임제한에 걸려 당시 헌법으로는 더 이상 출마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또 다시 집권을 하려면 헌법개정이 반드시 필요했고, 이를 위해 국회 의석 2/3을 여당인 공화당이 장악해야만 했다.  

 

3선 개헌에 필요한 의석 2/3를 확보하기 위해 감행한 것이 바로 6.8부정선거다. 중정의 공작선거로 박정희 정권은 국회의석의 74%를 장악할 수 있었다. 야당은 호헌선인 59석에 크게 미달하는 45석을 얻는데 그쳤다. 야당과 시민단체, 대학생 등이 6.8총선을 선거쿠데타로 규정하고 재선거를 주장하자 중정은 총선 한달 뒤 대규모 간첩사건을 터뜨린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다. 중정은 윤이상, 이응로 등 세계적인 예술가와 학자들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북한과 손잡고 적화통일을 꾀했다며 공안 공작을 폈다. 6.8부정선거 논란을 ‘동백림사건’으로 물타기하기 위해서다. 막가파식 공작정치와 서슬 퍼런 독재권력 앞에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야당의 시민들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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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 개헌으로 다시 출마한 박정희에 맞서 선전한 김대중/1971(사진출처: 블로거 아이엠피터>

 

공작선거의 백미 ‘4.27대선’, 돋보인 김대중의 선전 

 

개헌선 이상 의석을 확보한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안을 변칙 통과시킨다. 이어 박정희는 1971년 제7대 대선에 출마했다. 이때도 중정의 활약은 눈부셨다.

 

이후락이 이끄는 중정은 야당 후보인 김대중의 호남보다 영남지방의 유권자 수가 월등이 많다는 점을 최대한 이용할 목적으로 선거를 ‘지역감정’ 프레임으로 몰아간다. 박정희를 ‘신라 대통령’으로 선전하고, 선거 3일 전에는 호남 사람이 영남 물품에 대해 불매운동을 한다는 흑색 소문을 퍼뜨린다. 

 

투개표 조작은 극에 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투표구인 서울 마포구 동교동 투표함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전체가 무효 처리되는 등 황당한 일이 많았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항간에는 ‘박정희가 김대중을 이긴 게 아니라 중정이 김대중을 이긴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했다. 

 

선거에 이겼지만 박정희에게는 극히 불안한 승리였다. 야당 후보와의 표차가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중정을 앞세운 공작선거, 정부조직이 총동원된 관권선거로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후보와의 표차는 94만표에 불과했다. 

 

끝내 종신대통령 개헌까지, 그 중심에 있었던 중앙정보부

 

3선으로 헌법상 마지막 임기를 시작한 박정희. 헌법을 대폭 손질하지 않는 이상 더 이상 집권은 꿈 꿀 수도 없었다. 또 공정선거로 치러졌다면 대선에서 사실상 자신을 이겼을 지도 모르는 김대중을 제거하는 것도 종신집권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결국 1972년 10월 계엄령을 발동해 국회를 해산하고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 대통령 간선제, 의회 권한와 국민기본권 대폭 축소 등을 골자로 하는 유신독재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듬해인 1973년 8월 중정은 박정희의 숙적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 납치극까지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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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독재헌법에 의해 탄생한 체육관 거수기 대통령>

 

중정과 국정원. 이름만 다를 뿐 기능은 똑같다. 정권 연장을 위해 선거 공작을 자행하는 것까지 그대로 대물림돼 온 셈이다. 중정은 박정희 정권을 위해서, 국정원은 박근혜 정권을 위해서 선거 공작에 앞장섰다. 

 

박정희는 중정을, 박근혜는 국정원을

 

박근혜 정권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전면에 등장한 게 국정원이다. 광범위한 정치 개입은 물론 댓글과 트위터로 대선에 불법 개입했을 뿐 아니라 NLL 대화록 공개, 서울시청 직원 간첩사건 조작 등 고비마다 정치 공작을 펴며 국면의 중심에 서 왔다.

 

‘도덕성’ 흠결을 이유로 들어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악랄한 언론플레이를 통해 찍어내더니, 이번에는 특별수사팀장을 수사에서 배제하는 전대미문의 수법으로 윤석열 지청장을 밀어냈다. 국정원이 대선 때 대규모로 트위터에서 공작을 벌인 증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은 철저하게 국정원 편을 들고, 청와대는 국정원의 만행을 허용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SNS에 박근혜 후보 후원계좌까지 홍보하는 글을 올릴 정도로 국정원과 박 정권은 대선 때부터 긴밀하게 공조하는 관계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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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부정선거와 4.27공작선거의 중심에는 박정희의 청와대, 공화당, 그리고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12.19부정선거 의혹도 마찬가지다. 그 중심에 청와대, 새누리당, 그리고 국정원이 있다.

 

국가정보기관을 동원한 부정선거와 공작선거의 DNA가 40년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제18대 대선에 다시 발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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