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위에는 유독 호구 컴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것이 단순히 내 주위만의 일이 겠냐만 일단은 내 주위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호구 컴플렉스란 것이 별게 아니다. 단지 호구가 되는 것을 비상식적인 수준으로 두려워 한다는 것 정도로 간단히 정의해도 될 듯 한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상식적인' 수준에 있지 호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아직까지는 이 모호한 규정이 와닿지 않겠지만, 나는 이 규정에 대한 나름의 근거를 붙여감으로써 그 모호함을 보다 선명한 무엇으로 채색해보려 한다.
음모론을 믿는 사람이나, 음모론 찬양하는 자들을 욕하는 사람이나 결국은 같은 심리적기제 아래서 행동하고 있다. 음모론이라는 것이 기실,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온 것들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즉 음모론적 태도란 내가 우리가 그렇게 믿어왔던 것, 믿고 있는 것들이 사실이 아닐지 모르며, 때문에 나는 그 허위에 속는 바보가 되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은 태도이다. 또 그 음모론자들을 비난하는 자들은 그러한 음모론은 선동이니, 그런 바보 같은 선동에 나는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결국 두 태도는 결국 속지 않을것이며, 나는 그 모질이처럼 속은 무리 안에 속하지 않겠다는 1차원적인 선짓기에 불과하다. 대개 이 병을 앓는 사람들이 심히 요란한 면이 있으나, 내가 이러한 태도를 거부나 배척과 같은 단어로 표현하지 않고 '두려움'이라는 다분히 수동적인 수사로 표현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두려운 나머지 거부하게 되는 행위는, 거부의 의미를 채 스스로 검증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또 거부가 합당한지 이치에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도 전에 이루어지기 십상이라는 점에서,또 그 진실의 정도를 스스로 따져보고 판단할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 참으로 호구에 가까운 태도이다.
이런 탓에 우리 주위에서 그 얼굴을 드러내는 호구컴플렉스는, 역설적으로 진정한 호구로 거듭나는 지름길인 셈이다.
된장녀라는 인간상이 바로 이 호구컴플렉스의 강화시켜주는 도구로서 태어난 관념물인데, 된장녀는 말 그대로 관념물에 가깝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증가함에 따라, 남성에게 독점되오던 사회가치들이 여성들에게 이양되고 있다는 환상, 그 환상에서 오는 두려움이 낳은 방어심리. 바로 그러한 방어심리가 내포된 사회적 결과물이 된장녀,김치녀,보슬아치 등등의 경멸적 수사인 것이다. 물론 나는 우리 사회내의 여성들이 이러한 경향성을 전혀 갖지 않았다고 보지 않으나, 매우 과장된 형태로 부당하게 지어진 혐의라 여긴다. 또 그 근간은 결국 호구컴플렉스가 가진 두려움에 대한 회피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이러한 호구컴플렉스는 결국 못배우고 못가진 남성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것이 당연한데, 그 이유는 그러한 두려움을 누구보다 더 강하게 체화시킨 무리가 그들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에서 짜낸 희생양이 된장녀 따위의 여성혐오적 편견이다.
이것이 단순히 된장녀 따위의 문제에서 그친다면, 대단한 일도 아닐 것이다. 정치의 문제에서도 같은 방식의 심리가 작동한다. 또 각 정당들은 이처럼 빈곤한 대중의 심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부추기고 이용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진보진영의 득세가 종북의 득세라는 인식, 또 진보정권의 대북정책이 북의 핵계발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인식, 이러한 인식은 결국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호구컴플렉스를 자극하여 조건반사적 거부를 이끌어 내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만약 정말 진실이 알고 싶다면, 실제적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옳지 조건반사적인 거부를 하는 것이 옳은가? . 막말로 내가 죽고 살고의 문제가 달린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서도, 인터넷에 유통되는 글 몇자에 선택을 맡길것인가.
내가 여기서 진보 진영을 옹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면, 단지 그러한 모자란 반작용이 종복이니 뭐니하며, 진보에 대해 더 두드러지기 때문이지, 옹호에 목적이 있는것은 결코 아니다. 안녕들 하십니까에 대한 내 입장을 보였을때는 내가 일베충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려본다면, 이러한 평가는 부당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진보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저런 천박한 호구컴플렉스를 보이지 않는가? 더하면 더했다. 매한가지다. 박근혜라는 상징적인물의 기획에 부자들만 먹고 사는 나라가 올 것이다 라는 환상, 서민들의 삶은 더욱 바닥을 치고, 예술과 인간성이 상실된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비관론 또한 결국 호구컴플렉스의 자식들이다.
우리가 이러한 간편함으로 잃어 온것들은 도무지 해아릴수 없이 많다. 진정 호구가 되고 싶지않다면, 그 두려움을 직시하고 실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보여야하는 것이지, 호구라고 여겨지는 편의 반대에 서는 것 만으로는 거듭난 호구가 되는 길임을 알아야한다.
본인이 호구였다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탓에, 호구라 지적하는 손가락을 더 강하게 물어뜯으며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그 눈감고 코무는 싸움이 결국 오유나 일베 따위의 전쟁이 아니겠는가. 애초에 이들의 싸움은 진실이 아닌, 호구가 되지않기 위한 발버둥이니 저렇게 싸우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이 전투를 합리적 이성을 바탕에 둔 공론장으로서 이해하는 순진함은 만용에 가까운 것이다.
그 둘은 사실 같은 배에서 태어난 자식들이다. 애초에 두려워 도망온 도피처인데, 잘못왔으니 돌아가라고 하니 돌아갈리가 있겠는가? 때문에 일베나 오유나 둘이 비벼선 결코 끝나지 않을 전쟁이다. 무척 곤란한 일이 아닐수 없다.
누군가는 여기서 '답은 교육이다' 라는 간편한, 그탓에 매력적이기 까지한 답을 던져줄지도 모른다. 모자라고 두려워하는 것이 비단 교육의 문제이고, 개인의 수준의 문제인가. 모자랄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또 두려워할 수 밖에 없이 강제하는 사회구조, 즉 그들을 옭아매는 계급성, 이데올로기, 공유되는 사회적 습속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거대한 암덩어리들을 잔뜩 개인에게 붙여놓는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이 역류와도 같은 구조의 힘들을 거침없이 뿌리치고 이성의 가치를 증명해낸 소수가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곧, 모두가 그 찬란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 나아가 이루어야한다는 당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는가? 혹 그것이 진리라 하더라도, 그 연유로 그 반대에 서려는 내가 결국 호구의 낙인을 얻게 되더라도, 되려 그것이 이성이 낳을 더 큰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하는 것이 내 흉중의 대답이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