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나는 안녕치 못하다

조영란 작성일 13.12.15 14: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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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신지 묻는 그 말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춰 섰다. 멈춰선 이유는 단지 그 표현이 굉장히 도발적이라는 점, 그리고 아주 약간은 매력적 수사로까지 보였다는 점에서였다. 분명한 것은 내가 그 글을 모두 읽었을 때는 도무지 안녕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단은 글쓴이의 선동적인 문체에 한번 놀랐고 그 문체에 깊이 공명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다시한번 놀랐다. 끝으로 시종일관 글 속에서 흔적을 드러내는 그자의 진정성과 진지함에 몸서리 칠 정도로 놀랐다. 그 탓에 도무지 안녕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안녕들 하십니까>란 글 자체가 다분히 선동적으로 쓰였고 편향적이기 때문에 내용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 내용자체가 애초에 없기 때문에 내용에 대해선 언급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때문에 내가 다소간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은 그 글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그의 의도와 태도, 그리고 그 글이 낳을 법한 사회적 효과 정도가 될 것이다.

벌써부터 조건반사적인 분노를 느낄 누군가를 위해 내 나름으로 해줄 수 있는 배려란 내가 진보이며 그 중에서도 진보일 것 같다는 매우 사소한 이야기뿐이다. 그 탓에 오늘의 대한민국에 분명히 문제가 있음에 통감하고 있다. 허나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글이 그 문제를 드러내는 방식에는 상당한 유감을 느끼는 바이며, 막말로 우리가 남이가 하며 반색할 일일지도 모르나, 그 글이 낳을 암울한 미래가 점점 뚜렷해지는 것을 확인하고 있는 지금 나는 ‘마! 우리 남이다’ 외며 선을 그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대자보를 붙여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분명히 공적인 행위이다. 공적인 행위는 그 의도가 선량한지, 또 얼마나 투명하고 진실한지와 별개로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 일상에서는 대개 그 의도가 선량하다면 그 결과가 비록 부정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관용과 사랑으로 보듬어 주곤 한다. 허나 그 결과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만큼 공적인 행위라면 그러한 태도를 잠시 유보하고 냉정하게 결과를 따져 책임소지를 묻는 것이 옳다. 착한 정치인은 사회에 긍정적인 결과를 보다 많이 남기는 정치인이지, 서민의 아픔에 깊은 공감을 하되 눈물만 흘려주고 똥 싸놓는 그런 정치인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공적인 행위는 응당 의도보다는 결과를 따져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뭐 얼마나 결과가 나쁘냐고 물을 수도 있을테다. 그래 정말로 나쁘다고 답하련다. 저글로 수많은 대학에 연쇄적으로 대자보가 붙었고,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서울역까지 행진했는데 이보다 더 좋은 대자보가 어디있을쏘냐 하고 따질 수도 있다. 그래 그럴수도 있다. 내가 무서워하는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이토록 안전한 사회가 도래했다. 분노가 충분히 차오를 만큼 분노할 수 없게 만드는, 처절한 슬픔은 겪지도 못하게끔 미리 나서 막아 시덥 잖은 위로를 던져 주는 이토록 안전하고 친절한 사회가 온 것이다. 안녕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안전함 때문이지 무시무시한 박근혜 정부가 아닌 것이다. 이 안전함이 더 견고해지는 시 발점이 바로 이 대자보가 될 것만 같다는 불안한 기우 때문에 안녕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섹 스는 없고 자위만 넘치는, 죽은 듯 누워 사는 잠자는 사회, 바로 그 사회가 머지않았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좋지 않냐는 의미에서 본다면, 이러한 사회를 보다 앞당겨 놓은 대자보의 주인에게 감사의 뜻을 밝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대자보를 읽었을 때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것은 그 글의 내용이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인가를 확인 하는 것 이고, 그 다음의 행동은 일련의 사실 아래 깔린 본질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가 생략된 채로 추동된 행위는 대부분 무용하고 위험하다. 우리가 입이 닳아 헐도록 욕하는 일베가 바로 이러한 사고경로를 통해 행동을 이끌어 내는 대표적인 집단이다.

근 1년간 일베의 진격에 많은 시민들은 놀라고 역했다. 나는 여태 몇 개의 글로써 일배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비춰오곤 했지만, 그렇다고 일베를 똥 구더기 쓰레기 집단으로 여기고 폐기매장하자는 그들에 대해서도 단 한번 같은 편이라 생각한 바 없다. 대자보의 주인공처럼 무모한 어투로 한마디 하자면 일베는 단지 우리 사회의 노골화에 불과하다. 굳이 그들과 우리가 차이가 있다면, 없이 산 탓에 좀 더 무지하고 좀 더 천박하여 그 곳에서 굴러먹고 사는 것 뿐이니, 우리도 태생적으로 그들과 다른 신분인 양 새침하게 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일베의 방식대로 행동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질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물론 병 신도 병 신 나름이다만, 일베는 스스로 병 신임을 자처한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더 나은 병 신일지 모르겠다.

일베사태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라고는, 악취 풍기는 쓰레기 통에 돌을 던지는 것이 도덕적일 것이라는 요상한 환상이다. 일베를 욕하는 것이 합리적 시민의 징표인 듯 너나 나나 일베를 사회악으로 그려내고 가슴 깊숙한 분노들을 기어코 꺼내어 그들에게 던지곤 한다. 일베는 불쌍한 자들 중에서도 필요이상으로 더 불쌍한 자들이지, 비난하며 도덕성을 고취할 만큼 악한 자들이 아니다. 불쌍한 자들을 욕하는 것이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시민의 자질이라면 우리 사회의 일반도덕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적을 제대로 알아야 함에도 그 적이 일베인 양 우리에게 남아있던 작은 분노마저 쏟아내고 소비해버렸다는 것, 그 사이 우리의 진짜 적을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버렸다는 점. 이것이 일베가 주는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그 교훈이 충분치 못한 탓에 오늘도 안녕치 못한 것 아닌가.

그러니 우리에게 기대되었던 것들이란 일베 식의 생략된 사고로 잃어온 것들을 다시금 회복하고, 이번만큼은 신중한 행동을 보여 시민사회의 계몽을 증명했어야 하는 것이다.

대자보을 퍼 나른 페이스북 페이지에 좋아요를 누르며 일종의 도덕적 행위를 한다는 망상과 합리적 시민으로 거듭났다는 일종의 종교적 의식들이 나는 정말로 무서운 것이다. 오늘 날의 행위는 모두 패션화 되어 가고 있다. 나의 정체성을 증명하고 보완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그럴듯한 한마디, 핫하고 간지나는 입장만 얻어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내 정체성을 덧입히기에는 일베는 충분히 구리기에 일베를 욕하는 쪽에 서는 그런 패션화된 행위들이 일베식 극단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그 탓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정말로 무력하고 무용하다. 광우병 국면에서 응축된 분노가 한순간 타오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이 사회는 제자리를 되찾아 갔던 것처럼 무용하고 무용한 거세된 행위들이 남발하여 진짜 힘을 쓸 기회는 점점 사라질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총알을 다시한번 과감히 쏘아버린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올바른 적을 찾는다 하더라도 남아 있는 총알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거세된 행위, 생략된 사고, 가슴만 뜨거운 반쪽짜리 열기로는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이토록 대단하고 찬란해보였던 대자보가 안타까운 진실을 더 강하게 더 비참하게 확인 시켜줄 일만 남았다. 안녕하냐는 물음에 그토록 쉽게 공명하던 이들은 얼마가 지나면 더 쉽게 회의하고 더 쉽게 분노한 탓에, 진짜 분노할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단지 점증하는 분노,긴장,적대심을 아주 손쉬운 형태로 해소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그뿐이다. 코레일 파업은 잘먹고 살던 자들이 덜먹고 살게 된 탓에 분노한 것이지, 사회의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한 선량한 행위가 아닌 것이다. 그런 이해적인 파업에 공명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 얼마나 부끄러운 대학생의 모습이고 또 안녕치 못할 일인가.

어느 누구의 머리 속에서는 집단지성이 꽃피는 거룩한 이 공간이, 내 눈에는 영화 메트릭스에서나 봤음직한 다닥다닥 죽은 듯 누워 잠자는 고요한 곳으로 보이는 것은 비단 나의 회의 탓인가 ? 대학의 열기가 뜨겁다고 이토록 난리인 와중에 내가 선 이 곳은 정말로 냉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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