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에는 2000년 이후로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게 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이에 대한 증언도 많았습니다.
김일성 사망과 관련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8년 8월 14일 중풍으로 쓰러져서 사진 속 유령이 된 것을 보면 참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남최고위급 회담을 하겠다며 흥분해마지 않던 아버지를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지만 겨우 10년만에 중풍으로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김일성 주석의 죽음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습니다. 1994년 7월9일 낮 12시, 조선중앙방송은 중대방송을 통해 김일성 사망 소식을 전했습니다. 조선중앙방송은 “수령님께서 심장혈관의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다가 겹싸이는 과로로 인해 7월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어 사망하셨다”고 보도했습니다.
당시 남조선 김영삼 대통령과 최고위급 회담을 하기로 결정한 이후 그 어느때보다 건강하고 의욕에 넘쳤던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했던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한 직후 북조선의 최고위급 간부들을 비롯해 평양에서는 수많은 소문들이 은밀하게 나돌았습니다.
이러한 소문들은 모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을 죽였다는 것인데 후에 남조선에까지 전해졌습니다. 남조선의 대중잡지인 ?신동아? 2005년 1월호는 김일성 주석 사망의 진실을 구체적으로 소개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명의 북조선의 고위급 간부들이 김일성 주석의 사망에 대한 진실 소식을 남조선에 은밀하게 전해왔습니다.
이런 저런 통로로 남조선에 전해진 김일성 주석의 사망 진실과 남조선과 미국의 정보들을 종합하여보면 김일성 주석의 사망 진실은 이렇습니다.
우선 1994년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 주석은 매우 건강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건강은 평양의 만수무강연구소와 봉화진료소를 비롯해 세계최고의 수준에서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죽기 3일전인 1994년 7월 5일 재미교포인 손원태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한 100살은 넘어 살 것 같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또 조선중앙텔레비죤도 훗날 김일성 주석이 7월 7일 오전 묘향산 특각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짓고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경제부문 일군회의‘를 지도하는 모습을 방송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건강했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여야 했던 리유는 남조선 김영삼 대통령과의 최고위급 회담 때문이였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오래전부터 김일성 주석에게 좋은 보고만 하고 경제난이나 식량난 등 북조선의 가장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들은 보고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때문에 김일성 주석은 남조선 김영삼 대통령과 만나면 북조선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개방을 하여 북과 남이 협력하면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공상하고 있었습니다. 7월 3일 최고위급 회담 준비를 위해 묘향산에 도착한 김일성은 손수 연설문도 쓰면서 크게 흥분되여 있었고 김정일에게 읽어주기도 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현실을 전혀 모르는 김일성 주석이 남조선의 김영삼 대통령과 만나는 것을 절대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남조선에 라진-선봉을 개방하고 북남 협력도 본격화하게 되면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북조선이 망할 것은 너무나 뻔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북조선의 진실이 남조선과 세계에 공개되면 1980년대부터 북조선의 정치를 독점해온 김정일의 범죄가 낱낱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김정일은 북남 최고위급 회담으로 흥분한 김일성 주석의 전화를 받은 직후 대동강 초대소에 자신의 심복인 김용순, 연형묵, 리용철 등 최고위급 간부들을 불렀습니다.
김정일은 간부들에게 “통일이 중요한가, 사회주의가 중요한가. 누가 한 번 대답해보라”고 하였는데 이때 누군가가 “장군님, 수령님대(代)에 우리는 기어이 통일을 이룩하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김정일은 “저 새끼 내다 쏴 죽이라!”라고 화를 내면서 “지금 통일하자는 놈들은 사회주의를 포기하자는 놈들이야. 동독이 먹힌 것처럼 우리도 당장 흡수되고 말아. 통일, 통일 하는 놈들은 다 노망한 놈들이야!”라고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미 김일성 주석이 묘향산에 가기 전부터 암살할 생각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 주석이 묘향산으로 떠날 때 김일성 주석의 심장 담당 주치의사를 휴가를 보냈고 움직이는 병원이라고 불리는 독일제 최첨단 의료설비도 보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평상시에 심장 협심증을 앓고 있던 김일성 주석은 7월 6일 묘향산에서 북남 최고위급 회담 준비를 위해 당과 내각의 경제일꾼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은 남조선의 김영삼 대통령이 타고 올 철도 건설 문제를 물어보다가 식량난 실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식량난 실태를 전혀 모르고 있던 김일성 주석은 크게 화를 냈고 그날 저녁 김정일에게 전화를 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식량배급을 주지 못한다는 게 사실이야! 내가 인민들에게 쌀밥에 고깃국을 먹이는 게 소원이라고 말한 것이 언젠데 이제 와선 쌀도 못 준다는 거야. 그리고 그걸 나한테 왜 숨겨? 그런 식으로 일하겠으면 최고사령관이고 조직비서고 싹 그만두라!”
이 전화를 계기로 김정일은 김일성 주석을 암살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즉시 자신이 가장 믿는 특수부대에 명령을 내려 헬리꼽터로 묘향산으로 침투시켰습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김일성 주석은 7월 7일 다시 경제일군들의 회의를 열어 북남최고위급 회담을 위한 토의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김정일 조직비서가 군량미라도 내놓겠다고 했으니 철도공사를 반드시 끝내라”고 지시를 하고 오전 회의를 끝냈고 오침에 들었습니다.
평양에서 묘향산의 오전 협의회 소식을 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곧바로 협의회 참가자 전원을 평양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식량난 실태를 보고한 철도상에게 “군량미는 내가 눈뜨고 살아있는 한 통일전쟁을 하기 전까지는 단 한 알도 꺼낼 수 없다”면서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7월 7일 오후 다시 회의를 하려던 김일성 주석은 30여명이나 되던 간부들이 대여섯 명밖에 없는 것을 보고 “내가 늙었다고 무시하는 거야! 다들 어데 갔어?”하고 물었습니다. 부관이 김정일이 불러서 모두 평양에 갔다고 대답하자 김일성 주석은 “그렇게 됐구만”하고 주눅이 들어 한참이나 허공을 노려보았습니다.
아들 김정일에 대한 분노와 회한으로 고심하던 김일성 주석은 7월 7일 저녁 김정일에게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1997년 6월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발행한 장편소설 ‘영생’에서도 7월 7일 오후 10시에 김일성과 김정일 두 사람이 전화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전화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은 소설에서처럼 정상적인 전화를 한 것이 아니라 최후의 감정싸움을 하였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아들인 김정일과의 마지막 전화에서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난 김일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전화가 있은 직후 김정일은 미리 묘향산에 침투해 있던 특수부대에 명령을 내려 김일성 주석을 암살했습니다. 결국 김일성 주석은 1994년 7월 8일 령시를 전후한 시간에 묘향산에서 아들 김정일에 의하여 암살되였던 것입니다.
이때 김일성 주석을 죽인 특수부대는 헬리꼽터를 타고 철수하는 과정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낸 또 다른 특수부대의 헬리꼽터에 의해 격추되여 모두 사망했습니다.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세계최고의 정보탐색 능력을 가진 남조선의 주한미군의 탐지기(레이더)가 1994년 7월 7일 밤부터 8일 새벽사이에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출발한 헬리꼽터 3대를 탐지했다는 것입니다.
북조선에서의 소설과 기록영화, 강연회 등에서는 7월 8일 새벽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낸 헬리꼽터 1대는 폭우속에 추락하고 두 번째 헬리꼽터는 김일성 주석을 평양으로 호송해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보도에서 언급되지 않은 나머지 한 대의 헬리꼽터가 바로 묘향산에서 김일성 주석을 암살하고 철수하던 특수부대의 헬리꼽터를 공격하여 격추시킨 제3의 헬리꼽터인 것입니다.
이처럼 북조선의 절대권력자로 50여년간 통치하던 김일성 주석은 아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넘겨주고 송시까지 써바치며 아부했지만 결국 그 아들에게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직후 평양의 고위간부들 속에서는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였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7월 9일 김일성 주석이 심장쇼크로 사망했다는 ‘의학적 결론서’를 발표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경호를 담당한 2호 호위총국에 비밀지시를 내려 김일성 주석을 경호하던 1호 호위총국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하였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애도기간을 100일에서 1년으로 다시 3년으로 늘린 것은 김일성 주석에게 충성한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일성 사망 애도기간에 3명 이상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을 금지하여 자신을 반대하는 김일성 충성세력의 쿠데타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 김일성을 죽이고 빼앗은 권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애도기간을 3년으로 정했는데 이 때문에 대규모 식량난으로 3백만명이 굶어죽었습니다. 결국 김정일은 아버지까지 죽이고 권력을 빼앗고, 빼앗은 권력을 지키려고 3백만명을 굶겨죽였지만 10년만에 중풍으로 자신도 죽음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상으로 김일성 주석 사망의 진실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