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일: 2014. 4. 28.
[동영상 내용 요약]
나라라는 것은, 비행기 1등석, 2등석과 같은 것이고, 국민은 각각의 객실 손님과 같다.
1등석은 편안하고, 3등석은 불편하다. 국가가 1등 국가면, 국민은 1등객실 손님이다.
대한민국이 1등국가가 되면, 그 안에서 사는 국민들은 3등국가 국민보다 훨씬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잘 되기를, 복받은 나라가 되도록 해야한다.
우리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당하는 등 수많은 고난을 당했는데,
대한민국은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이루었다.
조선사람들은 외국인의 눈에 게으르고 지저분한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위정자들의 타락과, 탐관오리들의 착취 때문이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모아도, 다 빼앗아 가기 때문에, 아예 일을 할 의욕을 잃어서 게으르게 되었다.
하지만, 탐관오리가 없는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러시아 사람들보다 훨씬 더 부지런하게 일하고,
깨끗하고, 더 잘 살았다.
국가시스템, 국가지도자들이 국민의 의식과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다.
일제 36년의 식민지를 패배의식으로 볼 필요가 없다.
이러한 고난의 기간은 우리를 정신적으로 더 강하고, 성숙하게 만들었다.
해방 후 당시 사회 지도층,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사상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만일 당시에 통일이 되었었다면, 우리나라는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 현재 북한처럼 살고 있었을 것이나,
남북으로 나뉘어지는 과정에서 남한에 자유민주주의정부가 수립되어 지금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분단이라는 과정이 당시에는 큰 아픔과 고통의 기간으로 보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나은 결과를 남겼다.
625는 동족상잔의 아픔이었으나, 이 과정을 통해 미국과 상호안보조약을 맺게되어,
경제력과 국방력이 취약했던 우리나라가 미국의 보호아래 안심하고 경제발전에 전력을 쏟아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경제발전과정에서는 미국와 일본의 도움이 컸다.
미국이 점점 정신적으로 타락하여 쇠퇴하여 가고있다.
중국이 세력을 부풀려 가고 있는데, 미국을 이어 세계질서를 유지할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우리가 이러한 기회를 얻고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 많은이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말하기 전에 스스로 각성해야 한다.
다른 이들에게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게시일: 2014. 4. 28.
제8강 새마을운동을 다시 생각한다.
대한민국 역사, 357∼361쪽
새마을운동에 대한 강의자의 입장: 군사혁명 공약 제3장: 나라의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다. 그 혁명 공약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 새마을운동이었다. 인간개조, 사회개조 작업,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으로 전국이 골고루 전원풍 공업화된 도시로 발전, 서로 의지하며 신뢰하며 협동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박정희의 근대화혁명의 꿈이 그 실천을 본 것.
하나님 소리 섞여 잇지만 제대로된 우리나라 건국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나도 아무것도 모를 때는 주변에서 이승만, 박정희 욕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여러가지 접하다보니까 내가 멍청했구나 하고 반성하며 우익이 됐음다.
아래 동영상 참고해서 보시면 수긍이 갈 겁니다.
이영훈 박효종 교수가 대표로 있는 교과서 포럼이 '한국 근현대사'를 내놓자 좌파 민족주의 진영에서 친일파의 부활이라며 연일 포문을 열고 있다.
"친일파!"는 한국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단어다.
'빨갱이!'라는 말과 비슷해서 일단 라벨을 붙이기만 하면 쉽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일종의 주술이다.
참여정부 과거사 위원회를 통해 남발되었던 바로 그 딱지다.
친일파라면 일진회(一進會)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의 한 기록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갑오경장 이후 동학도(東學徒)의 잔당들은 각지에 잠복하고 있었지만 안으로는 백성들의 화제거리도 되지 않았고 밖으로는 지방대에 탄압되어 아무 횡포도 부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 모르게 부서를 정해놓고 국가의 유사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윤시병 등이 일진회를 창설하자 그들은 사람을 각지로 보내 일어나 호응하므로 10일도 되지 않아 13도의 동학도들이 모두 일어나 혹 진보회라 하기도 하고 혹 일진회 지회로 칭하기도 하였으며 그들을 따르는 사람이 날로 늘어났다." 이 기록을 남긴 사람은 매천(梅泉) 황현이다.
그는 한일합방의 그날 음독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일기 매천야록은 합방전 정세를 누구보다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1930년대의 다른 기록 또한 다르지 않다.
동학의 큰 물줄기 하나가 진보회 일진회로 나아가는 과정을 기술한 자료들이 남아있다.
교과서 포럼이 혁명 아닌 봉기로 규정해 민족주의 진영의 반발을 불렀던 바로 그 동학에 관한 일부 기록들은 이처럼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민족운동 천도교의 줄기를 생각하면 이들 기록에도 적지않은 왜곡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학의 이면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미화할 이유도, 폄훼할 이유도 없다.
무능한 양반 지배층에 고통받던 상당수의 동학 농민들에겐 근대화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일본이 차악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러시아에 비기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문제는 조선의 자력 근대화 가능성이라고 하겠지만 지배계급이었던 유림(儒林)이란 존재는 과연 어떠했나.
사대주의의 총화요 주자학의 거두였던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만동묘(萬東廟)라는 사당을 만들어 놓고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거국적으로 제사 지내왔던 그들이다.
농민들에게서 제사비용까지 약탈해 갔다.
만동묘를 오르는 계단은 유독 폭이 좁고 가파르다.
누구든 기어서 올라가야 했다.
"황제의 위패가 계신 곳이다!" 상상만 해도 숨막히는 장면이다.
이 기괴한 시대착오가 끝난 것은 명이 망하고, 청도 망하고, 병합도 7년이 더 지난 1917년의 일이었다.
한때의 교과서는 이를 일제의 문화침탈이라고 썼다.
그러나 시대착오와 문화침탈, 둘 중 과연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1937년 12월에 발행된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유림 10여명이 야밤에 또 만동묘에 숨어들어 제사 지낸 일을 실로 딱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늘의 탈레반이나 북한처럼 스스로는 더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정신과 물질이 모두 궁벽한 나라였다.
20년대의 동아일보는 학교 교실이 모자라 비어있던 향교에서 공부하려는 학생들을 몰아낸 유림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다.
향교에서 신교육을 하면 "공자님의 혼령이 어지러워 하신다!"는 이유였다.
동아일보는 '유림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이를 개탄하는 긴 사설을 썼었다.
식민지근대화 아니면 또 다른 무슨 근대화가 가능했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자신의 실패에는 눈을 감고 오로지 피해의식만 내세우는 우스꽝스런 민족주의 교과서는 이제 접을 때가 되었다.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겠다는 바보의 아둔함이요 주자학적 고지식이다.
-------------------------------------------------------------------------------------------------------------
김대중의 업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