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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은 잘못된 미곡정책과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경찰이 득세해 전국적으로 국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이런 국민들의 반발속에 조선공산당은 10월 1일 대구에서 대구 10·1 사건일으켰다.
대구 10·1 사건 이후 1946년 10월 3일 조선공산당과 근로인민당 등의 활약 이전에, 지원인력의 선동 없이 군민들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났다.
10월3일 오전 9시 당시 선산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인 박상희(박정희 대통령의 친형이자 현대통령의 큰아버지)가 이끄는 2000여 명의 군중은 구미경찰서를 습격하고 모든 기능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경찰서장 등 경찰관 16명을 유치장에 감금했다. 또 구미 면사무소를 습격해 양곡 135가마를 탈취했다. 이들은 서장과 서원의 가옥은 물론 선산군 내 요인의 집을 모조리 파괴했다. 구미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인민재판을 실시하였다. 구미에서는 시위대가 경찰서를 접수하여 간판을 파괴하고 선산인민위원회 보안서라는 간판을 내걸고 서장 이하 20여 명을 구속하고 인민재판을 실시하던 중 군부대와의 교전 끝에 경찰청사에서 퇴각하였다. 무기를 탈취한 40여 명의 군중은 선산군청도 습격했다. 이때 2천명의 시위대는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면서 구미경찰서와 군청을 접수했다.
G-2 보고서에 따르면 경북도의 총 피해액은 4억원, 경찰측 인명피해는 보안대(경찰보조원 및 마을 자경대원)를 포함해 사망 80명, 행방불명 및 납치가 145명, 부상이 96명으로 집계됐다. 시위대의 피해에 대해서는 사망 48명, 부상 63명, 체포 1503명으로 집계했다. 대부분 습격을 받은 관리거나 우익인사인 민간인 사상자수는 사망 24명, 부상 41명, 납치 21명[출처 필요]으로 집계됐다. 소총 204자루, 권총 11자루, 탄약 2688발이 탈취 당했으나 회수된 것은 소총 118자루, 권총 3자루, 탄약 1035발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회수되지 못한 무기가 뒷날 빨치산의 전신인 야산대의 무기로 탈바꿈하게 된다.
@..누가 누구보고 빨갱이래~ 빨갱이니 좌파니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보면 아주 코미디여~
누구는 이런 어그로 끌 줄 몰라서 안끄나~? 서로가 기분이 더러워지니까 안끄는거지
@@..죄.. 죄송합니다ㅡ,.ㅡ;; 주동자 표시를 xxx로 해놔서 대구를 깐 것으로 오해 하신거 같네요.. 지역보다는 주동자를 문제 삼은거였습니다... 주동자가 박상희.. 박정희 대통령이 존경했다는 친형님이자 현 대통령의 큰아버지입니다.. 검색해보니 짱공유에서는 박상희에 대해서 거의 올라오지 않았더군요.. 자꾸 좌파니 빨갱이니 하길래 이 사건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