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환
1980년대 중반 대학가 주체사상 교범이었던 <강철서신>의 작가로 국내에 주사파 이론을 처음 소개한 인물이다.
김 씨는 1986년 11월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그 후로는 1989년 2월부터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서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을 지내는 한편,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실무위원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1년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과 접선, 반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공작금 20만 달러를 받아서 돌아왔다. 이 공작금으로 서울대 82학번 동기인 하XX, 박XX과 함께 민족민주혁명당(이하 민혁당)이란 주체사상 지하혁명당을 조직하고, 학생운동, 통일운동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당시 김영환, 하XX, 박XX3인이 중앙위원으로 조직의 핵심지도부였으며 이석기는 경기남부위원장으로 서열 5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1991년 김일성을 만났을 때부터 생긴 주체사상에 대한 회의와 1994년 이후 고난의 행군을 보면서 북에 대해서 실망하고 1997년 민혁당을 해체하려 시도했으나 하XX과 이석기는 이에 반발했다고 한다. 이후 민혁당은 1999년 일제히 검거되면서 와해되었다.
김 씨는 그러나 1995년 무렵부터 심경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 주체사상에 대한 자신의 오류를 시인하는가 하면 1998년에는 <시대정신>이라는 잡지를 창간해 김정일 정권 타도투쟁을 제안하기도 했다. '좌우 대합작론'이나 '한반도 전쟁불사론' 등 극우에 가까운 주장도 내놓았다.
1997년 10월 이후 독일, 중국 등지에 체류하던 김 씨는 언론인 J 씨를 통해 국정원의 신변보장 약속을 받고 7월 말 귀국했으나 조사과정에서 돌연 <말>지를 통해 국정원의 간첩단 사건 조작의혹을 제기한 뒤 8월 18일 해외로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국가정보원은 김영환 씨가 1989년 7월 북한 공작원에 포섭돼 노동당에 입당한 뒤 '관악산 1호'라는 암호명으로 밀입북, 민혁당 조직 등의 활동을 해 왔다고 밝혔다. 김 씨는 그 후 1989년 4월 지하조직인 '반제청년동맹'에 가입한 뒤 중앙위원으로 활동했고 1990년 4월부터는 이 조직의 총책으로 활동했으며, 그에 앞서 1989년 7월 북한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뒤 1991년 밀입북한 뒤 간첩활동을 했다고 밝혔다.
한편 김영환은 1999년 사상전향문을 쓰고 공소보류로 석방됐다. 1990년대 말 주체사상에 회의를 느끼고 전향해 북한 인권운동가,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으로 변신해 활동해 오다, 2012년 3월 29일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에서 일행들과 탈북자 관련회의를 하던 중 중국 공안에 국가안전위해죄로 체포됐으며, 그 동안 단둥시 국가안전청에 구금돼 있다 114일만에 풀려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영환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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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씨에 대한 설명 요약.
1.
김영환이라고 우리나라 대학가에 85년 주체사상을 처음 퍼뜨린 학생운동의 전설이자 주사파(NL)의 대부인 사람, 1991년 당시 북한에 남파간첩이랑 잠수정타고 가서 노동당 입당까지 했음.
(통진당 이석기가 경기남부위원장으로 서열 5위 정도니까 김영환은 ㄷㄷㄷ)
2.
근데 김일성 두 번 만났는데 만나서 주체사상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니까 주체사상을 만든 김일성도 제대로 대답을 못하는 것에 크게 실망.
1997년 민혁당을 해체하려 시도했으나, 하XX,이석기 등의 반발로 실패. 이후 1999년 사상 전향문을 쓰고 완전 전향.
3.
2014년 통진당이 해산될 때는 헌법재판소에 증인으로 나와 자신이 만들었던 전민련에서 활동했던 통진당 인사들의 행적들을 3시간에 걸쳐 증언함. 이 사람의 증언이 통진당 해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함.
(박그네가 이정희에 대한 보복으로 통진당을 해산시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ㅋㅋ)
4.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으로 변신해 활동해 오다, 2012년 3월 29일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에서 일행들과 탈북자 관련회의를 하던 중 중국 공안에 국가안전위해죄로 체포됐으며, 그 동안 단둥시 국가안전청에 구금되어 고문까지 받음.
현재도 북한을 민주주의로 변화키기 위해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