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미스터리 풀어낸 윤한택 인하대 연구교수 인터뷰
TV사극 드라마를 즐겨보는 기자는 시대 배경에 주목한다. 대본을 쓰는 작가가 어떤 왕조, 어떤 소재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려 하는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최근 종영한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는 1000여 년 전인 고려 초기를 배경으로 구중궁궐의 권력다툼과 남녀간의 애정을 다루고 있는 판타지성 역사 드라마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광종(재위 949-975년)과 성종(재위 981-997년)은 고려를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로 정비한 업적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성종은 태조 왕건의 유훈을 받들어 북방지역 확보에 힘을 쏟았다. 성종은 거란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서희를 내세워 외교담판으로 오히려 강동6주를 되찾는 등 상당한 치적을 쌓았다. 드라마는 조선왕조에 비해 덜 주목받던 고려시대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신선했지만, 북방 지역 진출에 관심이 많은 요즘의 우리 정서를 드라마에 녹이지 못해 시청률이 그리 높지는 못했던 것 같다.
사실 고려 성종 관련 이야기는 한국 역사학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중요하다. '고려사'에서 전하는 성종 관련 기록에 역사 상식과 맞지 않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990년 7월에 내린 성종의 교서(敎書)다.
"태조(왕건)께서 처음 서경(西京)을 설치하고 종실의 친족을 선발해 인후지지(咽喉之地·매우 중요한 길목)를 지키게 했다. 매년 봄과 가을에 친히 재계하여 제사를 지내고, 오랑캐를 방어해 변방의 국경을 견고하게 했고, 웅도(雄都) 평양(平壤)에 의지하여 우리 조종의 왕업을 공고히 하려 했다. 그 후 성군들께서 왕위를 계승한 후 사직이 안정됨에 따라 때로는 전해온 관례에 따라 직접 서경에 가기도 했고 때로는 신하를 시켜 가보도록 했다. 올해 풍년이 들어 곡식이 잘 여물었으니 10월을 택해 요성(遼城)에 찾아가 선조들께서 정하신 규범을 실행하고 국가의 새로운 법력을 펴고자 한다."
실제로 성종은 이 교서를 내린 후 그해(990년) 10월 서경 즉, 서도(石)로 행차했다. 또 서경 행차 기념으로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포상까지 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설치한 서경을 '웅도 평양' '요성' '서도'라고도 부르는데 이곳들이 같은 곳이냐 하는 것이다. 왕건은 서경을 고려의 수도 개경 못지않게 중시했다. 그는 유훈으로 남긴 훈요10조에서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롭고,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근본이 되니, 마땅히 행차하여 나라의 안녕을 이루도록 하라"고 강조했다.
‘고려사’ 지리지를 참고로 한 고려의 북방 영역
학계의 일반적 정설은 고려의 서경은 지금의 북한 대동강가 평양 일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쪽 평양이 곧 요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요성은 중국 쪽에서도 중국 랴오닝(遼寧) 성 랴오양(遼陽)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곳이다.
'고려사'의 기록대로라면 성종은 왕건이 요양에 세운 서경을 방문했다고 봐야 한다. 이 이상한 교서를 보면서 기자는 '고려사'의 기록이 오기(誤記)이려니 하고 찜찜하게 넘어갔다.
그러다 최근 고려사를 연구하는 윤한택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를 만나게 됐다. 윤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경제의 물적 기반인 토지 제도를 깊이 연구하기 위해 고려대 대학원으로 진학해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고려전기 사전(私田)연구'라는 박사 논문은 한국 고대 토지 문제 연구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그를 만난 자리에서 성종 관련 기록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990년 성종이 행차한 서경은 평양 웅도, 요성이라고 불린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요성은 요동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고요. 성종보다 앞서 고려 광종 때인 972년에 고승 영준(英俊)이 중국에 갔다가 고려로 돌아온 것을 '요성으로 돌아왔다(鶴返遼城)'고 표현하고 있습니다(英俊碑). 이로 보면 요성, 곧 고려의 서경이 요동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봅니다."
강단에 서는 정통 사학자의 발언으로서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사료를 근거로 더 충격적인 말도 했다.
"'고려사' 열전 홍유(洪儒)편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배현경, 신숭겸 등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하던 918년 6월 14일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삼한(三韓)이 분열한 이후 도적의 무리가 다투어 일어나니, 궁예가 어깨를 용감하게 떨치고 크게 소리치며, 드디어 초적을 토벌하고 셋으로 나누어진 요좌(遼左)의 과반을 근거로 하여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였다'고 합니다. 즉 후삼국의 주인공 중 한 축인 궁예가 근거한 곳이 요좌인데, 이곳 역시 중국 요동(遼東)지역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큽니다."
궁예가 나라를 세우고 정한 도읍지가 한반도의 철원 지역이었다는 일반적인 역사 상식과는 동떨어진 말이다. 그러나 문헌에 기록된 '요좌'가 중국 북방지역임은 확실하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항일투쟁을 한 장석영(1851~1929년)이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를 답사한 내용을 수록한 책을 '요좌기행(遼左紀行)'이라고 명명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옛 문헌에 등장하는 방위 개념으로서의 왼 좌(左)는 동(東)쪽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요좌는 곧 요동의 이칭(異稱)이기도 하다.
윤 교수는 이제 고려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고려토지사를 전공했던 그가 지금에 와서야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저는 지금까지 전정(田丁)→사전(私田)→양반전(兩班田)→가령지(家領地)로 이어지는 고려 토지제도의 구조를 실증적으로 확인하는 연구를 해왔습니다. 가문이 영유하는 토지가 가령지라면, 국가가 영유하는 토지가 '영토(領土)'입니다. 경제사적 관점에서 고려의 토지 문제를 연구하다보니 영토 문제까지 연구하게 됐고, 고려국 영토의 범위를 추적하다보니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윤 교수는 최근 '고려국 북계(北界) 봉강(封疆)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이런 연구 결과를 일부 발표한 바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려사는 영토적 관점에서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간 사학계는 이처럼 중차대한 역사적 기록을 단순히 간과한 것일까.
"우리 학계가 서경을 북한 쪽 평양이라고 일찌감치 규정한 이후 이에 대한 엄밀한 고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고려가 지목한 서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지역만을 의미하지는 않았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가 설치한 서경은 '평양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라는 이름으로 최소한 성종 14년(995년)까지는 요동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서경유수(西京留守)라는 이름으로 성종 이후 원종 11년(1270년)까지 운영됐고, 원종 이후 충선왕 즉위(1298년) 때까지는 '동령부'라는 이름으로, 마지막으로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평양부'라는 이름으로 운영됐습니다. 문제는 이름이 바뀌는 어느 시기부터 서경이 한반도 평양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처음으로 태조가 설치한 평양대도호부는 약 80년간 중국의 요좌 지역에 있었음은 분명해보이고요."
윤 교수는 이와 관련한 연구를 한창 진행 중에 있다는 이유로 더 이상의 말은 아꼈다. 윤 교수의 해석을 토대로 성종 관련 기록이 오기(誤記)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졌다. 윤 교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펴낸 '조선사'를 연구 중입니다. 고려 국경을 중심으로 해서 '조선사'가 기술한 내용들만 살펴보더라도 일제 학자들이 고의적으로 누락하거나 왜곡한 사례가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우리가 광복 이후 일제의 한국 관련 연구 결과를 너무 비판 없이 수용한 것은 아닌지요."
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입력 2016-11-08 14:41:00 수정 2016-11-08 15:5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