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광복 72주년이다.
'똘레랑스(관용)의 나라'라는 프랑스도 과거 나치 부역자들을 '무관용 청산'했는데 우리는 세월이 한 갑자(60년)도 훨씬 지난 오늘날에도 친일파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광복 후 60년, 정부는 뒤늦게-이승만 정권 때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있었지만 위원회가 와해되면서 친일 청산에 실패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특별법(2004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국가귀속특별법(2005년)을 논란 끝에 제정했다.
하지만 '지연된 정의'는 역시 정의가 아니었을까.
일부 의원들의 반대로 어렵사리 통과한 법안. 위원회의 활동 반경은 좁았고 활동 기간도 짧았다.
4년 간의 활동을 마무리하고 '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듬해인 2010년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친일파 168명의 재산을 '일부' 환수했다.
그리고 끝. 이후로는 친일 재산 환수도, 친일 진상 규명도 없었다.
친일 청산이 완벽하게 이뤄져서? 친일 재산이 모두 환수 됐기 때문에? 이 둘 중에 정답은 없다는 걸 사람들은 알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친일 재산 환수는 어려워진다.
SBS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과 소셜동영상 미디어 <비디오머그>는 전방위 추적으로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친일 재산을 파악했다.
우리는 친일재산조사위원회 활동 당시 공개되지 않았던 ‘보고서’를 단독으로 확보해 공개한다.
대표적 친일파인 이완용과 송병준의 재산이 적힌 보고서에 기초해 미공개 친일파 재산을 뒤쫓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은닉된 친일 재산으로 보이는 부동산도 단독 취재했다.
또 당장이라도 환수가 가능할 수도 있는 친일파 재산도 파악해 잇달아 보도한다. 그 첫 편을 시작한다.
●이완용 부동산만 2,200만㎡....여의도 7.7배 규모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는 2006년부터 4년간 활동해 친일파 168명의 부동산 2,457필지를 환수 결정했다.
여의도 면적(2.9㎢)의 약 4.5배인 1300만㎡으로 규모, 공시지가 1,267억 원 상당이다.
짧은 활동기간, 뒤늦은 환수 작업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성과였다.
그러나 SBS<마부작침>이 확보한 당시 조사위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가 환수한 전체 토지는 대표적 친일파인 이완용 1인의 부동산 규모에도 한참 못 미쳤다.
그때까지 역사학계가 추산한 이완용의 부동산은 여의도 면적 5.4배인 1,570만㎡(1,309필지)
그러나 이는 일제 강점기인 1919년 기준 토지대장만으로 확인한 수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마부작침>이 확보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조사위는 전방위로 이완용의 부동산을 파악했다.
한국전쟁이나 경지정리사업으로 토지(임야)조사부(일제시대 작성), 토지(임야)대장이 멸실된 경우, 이완용 이름으로 된 지적(임야)원도까지 확인했다.
이를 각종 사료 등 문헌과 대조 비교하는 과정을 거쳐 동명이인을 제외하고 실제로 이완용이 소유했던 부동산을 가려냈다.
이렇게 확인된 토지를 합치면 이완용의 부동산은 1,801필지에 달했다.
1,801필지는 (필지마다 면적이 다르다. 보수적으로 환산했다) 676만 8,168평. 즉, 2,233만4,954㎡ 크기로, 여의도 면적의 7.7배이다.
조사위가 4년 간 친일파 168명을 대상으로 환수 결정한 전체 토지보다도 1.7배 크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완용과 함께 대표적 친일파인 송병준의 부동산도 실제 알려진 것보다 방대했다.
송병준은 정미칠적(1907년 제3차 한일협약을 주도한 7인) 중 한 사람으로 일제 강점기 당시 중추원 고문을 역임했다.
같은 방식으로 파악된 송병준의 부동산도 당초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303만7,537평(1,004만1,444㎡) 규모였다.
●환수 땅은 전체 부동산의 0.05% 불과...나머지 99%의 땅은 어디로?
여의도 면적의 7.7배가 넘는 부동산을 보유했던 이완용이지만, 정부가 귀속한 건 극히 일부다.
조사위는 지난 2007년 5월 이완용이 1914년 일제로부터 사정받은 전북 익산 낭산면 토지를 시작으로 공시지가 6,961만원 상당의 토지 1만 928㎡를 후손들로부터 환수했다.
보고서가 이완용이 보유했던 것으로 파악한 부동산 2,233만4,954㎡의 0.05%에 불과한 수준이다.
나머지 부동산은 어떻게 됐을까.
미공개 보고서에 따르면, 이완용은 대부분의 토지를 해방 전 매각했다.
그는 토지를 사정 받은 뒤 5년 내에 매각하는 방법으로 부동산의 98~99%를 해방 전 팔아 치웠다.
이미 당시에 부동산을 현금화하는 능력이 탁월한 ‘투자의 달인’이었다.
예를 들어 전북 지방의 땅을 사정 받은 뒤, 해당 지역에 일본인 지주들이 대거 진출해 땅값이 오르면 되파는 식이다.
이런 방법으로 부동산 대부분을 일본인 지주 4명에 매매한 것으로 확인됐고, 나머지 땅은 광복 이후 후손들이 차례로 매각했다.
이완용은 부동산 매매 이외의 방법으로도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
1909년 콜브란 전차회사 보조금 횡령 사건이 그 중 한 사례다.
미국인 콜브란이 전차회사를 설립할 때 고종이 보조금 100만원을 내렸는데, 이 중 40만원을 이완용이 착복하는 등 횡령액이 110만원에 달했다.
한국은행에서 제시한 기준(쌀 기준)으로 환산하면 220억 원이 넘는다.
또 고종의 내탕금(임금의 개인재산) 40만원을 횡령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부정축재를 했고, 매년 연봉으로 2억 원을 챙겼다.
이완용의 현금 자산은 보수적으로 파악해도 1920년대 초에 약 300만원(현시가 600억원대)에 이르렀다고 조사위는 파악했다.
사료로 확인되는 현금과 은행 예금만 합친 액수로 이완용 일가가 보유한 부동산과 재산을 합치면 더 늘어난다.
이완용 일가는 토지를 일찍 처분해 현금 자산을 보유하면서 해방 이후에도 큰 타격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일각에선 이완용의 재산을 수천 억 원대로 추정한다. 액수도 액수지만, 환수된 게 거의 없다.
●광복 후에도 이완용 부동산 16만㎡ 확인
현금엔 꼬리표가 없다. 이완용의 현금을 후손들이 얼마나 나눠 가져갔는지 파악이 힘들어 국가로 귀속시키도 힘들다.
다만 환수의 여지는 남아 있었다. 광복 이후에도 이완용 일가 명의로 남아있던 부동산이다.
일부는 조사위가 환수했다. 환수하지 못한 부동산을 추적했다.
<마부작침>은 특히 이 중 일부를 아직도 이완용 후손이 소유하고 있는 사실을 밝혀냈다.
광복 이후까지 이완용 일가가 가지고 있던 부동산은 <마부작침>이 확인한 것만 16만6,182㎡이다.
<마부작침>이 실제 지번을 확인한 뒤 과거 토지대장에 기초해 ‘이완용 일가 소유’로 확인한것만 포함시킨 수치다.
이 토지는 서울 종로구, 충남 아산시, 전북 익산시 등 다양한 지역에 대지, 전, 임야 형태로 광범위하게 분포해 있었다.
이 중 경기 용인시 처인구에 위치한 4만8천평 규모의 부동산이 대표적이다.
대부분이 임야지만, 부동산 가치는 수십에서 수 백 배 상승했다고 지역 주민들은 말한다.
문제의 땅 바로 옆에 사는 주민 A씨는 “이 근처에 산 지 50년이 넘었는데, 그 때보다 부동산 가격이 족히 50배는 뛰었다”고 말했다.
해당 토지는 광복 이후에도 이완용의 증손자 이 모 씨가 보유하고 있었다.
●이완용 친일 재산 의심 부동산 확인.."증손자가 현재도 소유, 매각 못하고 이민 간 듯..환수 가능성 높아"
용인시 처인구 부동산 상당 부분은 1970년을 기점으로 제3자에게 넘어갔다.
일부는 1971년 임 모 씨에게 매각됐고, 79년에 다른 이 모 씨, 83년에 한 사학재단 소유로 순차적으로 변경됐다.
비슷한 위치의 다른 땅도 세 차례 매매 과정을 거쳐 지금은 김 모 씨의 소유로 돼 있다.
대부분이 매각이 됐지만, 여전히 이완용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이 발견됐다.
제3자에게 매각한 땅 바로 근처에 위치한 각 198㎡, 298㎡ 크기의 부동산이다.
합쳐서 496㎡ 크기의 자투리 땅은 이완용의 증손자 이 씨가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다.
증손자 이 씨는 이완용의 손자인 이병길의 아들이다.
이병길 역시 중추원 참의를 하는 등 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반민족행위자다.
남은 부동산은 당초 친일파 이병길이 소유했다가 아들 이 씨(이완용의 증손자)에게 넘겨졌다.
부동산의 일부는 제 3자에게 매매됐고, 일부는 여전히 이 씨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제 3자에 팔지 못하고 남은 땅으로 추정된다.
증손자 이 씨는 1990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 시가 30억원 상당의 서울 서대문구 일대 토지를 돌려받아 되팔기도 했다.
아직도 이완용 증손자가 보유한 용인시 땅은 크기가 작지만, 정부가 나서 소송을 제기해 친일 대가성을 입증하면 환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마부작침>은 증손자 이 씨의 주소지로 적힌 서울시 강북구 주택을 찾아갔지만, 이 씨는 살고 있지 않았다.
친일조사위 관계자는 “증손자 이 씨는 과거 소송을 통해 돌려받은 땅과 기존에 가지고 있던 땅을 처분해 현금화 한 뒤 1980년대 말 캐나다로 이민을 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문제의 땅은 팔지 못하고 남은 것으로 보이는데, 친일파 이병주가 소유했다가 넘긴 것이라면 친일 재산일 가능성이 높다"며 "작은 땅이라고 하더라도 정부가 나서 친일 재산이 확인되면 적극 환수해야 한다 "고 말했다.
이 밖에도 해당 땅이 있는 마을주민 B씨는 “이 곳(용인 땅)이 이완용의 땅이었다는 건 오래 전 어른들에게 들은 적이 있다”며 “지금은 다 매매가 됐다고 하는데 일부는 후손들이 몰래 남겨둬 이완용 일가 묘소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를 토대로 <마부작침>은 일대 산을 뒤져 이 씨 가문의 무덤을 찾았지만 역사학자를 통해 “해당 묘는 이완용과의 직접적 관계가 낮은 다른 이 씨 일가 묘로 보인다”는 답변을 얻었다.
서울 도심의 금싸라기 땅 126㎡도 광복 직후에도 이완용 일가가 소유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한 여행사 소유의 대형 빌딩이 들어선 서울 인사동의 토지. 현재 공시지가로 1㎡당 1,700만 원이 넘는 이 땅은 광복 이전엔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 소유였다.
이항구 역시 정부가 발표한 친일파이다.
이 땅은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에 바로 인접해 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이항구의 아들, 즉 이완용의 손자 이병주가 소유한 것으로 옛 토지대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같은 해 5월 땅 주인은 이병주에서 최 모씨로 넘어가는데, 이후 5차례 소유권이 변경된 뒤, 지금은 한 여행사 명의로 돼 있다.
해당 토지에서 직선 거리로 5미터 정도 떨어진 또 다른 인사동 토지 역시 이병주가 소유하다 1947년 함 모 씨에게 매매됐다.
경기 용인, 서울 인사동 토지 모두 반민특위가 1949년 해산되지 않았다면 손쉽게 국가로 귀속할 수 있는 땅이었다.
송병준의 부동산도 파악했다.
<마부작침>이 옛 토지대장을 추적해 광복 이후에도 송병준 일가가 보유한 부동산 6만 7081㎡를 확인했는데, 이 역시 조사위에서 환수하지 않은 토지다.
경기 이천군, 강원도 철원군 일대에 분포해 있다. 1953년 서 모 씨에게 4,100평(13,554㎡)이 판매된 것을 시작으로, 71년까지 제 3자에게 순차적으로 매각됐다.
●“친일파는 죽었지만, 친일 재산은 남아있다”
<마부작침>이 추적한 이완용, 송병준의 부동산은 모두 국가로 귀속되지 않은 친일파 재산들이다.
‘미완의 환수’는 예정된 결말이었다.
친일재산조사위는 현실적 한계로 토지를 파악하고도 환수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친일파 재산은 문화재, 현금, 땅 등 동산과 부동산을 망라해 다양했지만, 조사위는 우선 부동산만 대상으로 삼았다.
부동산이 비교적 추적이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전체 토지가 아닌 토지대장으로 확인된 부동산으로 한정됐다.
6.25, 경지정리사업 등으로 소실된 토지 대장은 제외된 것이다.
또 토지대장으로 확인됐더라도, 또 다른 현실적 한계로 대상지는 줄어들었다.
친일재산귀속법 1조에 적힌 ‘선의의 제3자를 보호하고, 거래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구문과 ‘활동 시한 4년’이 제약이 됐다.
법 제정 이전 매매된 토지까지 환수하면 ‘재산권 침해이자, 거래의 안전성을 훼손한다’는 이유에서 애당초 조사 대상지에서 제외된 것이다.
결국 관련법이 마련된 2005년 당시 친일파 후손들이 보유했거나 그즈음 매각한 땅만 환수 대상으로 삼았다.
결국 환수 결정된 건 친일파 소유 재산 중 일부, 그 일부 중 일부로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장완익 친일재산조사위 사무처장(현 변호사)은 “근거법을 두고도 지속적으로 위헌 시비를 제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헌법적 문제에 부딪히지 않는 선에서 환수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며 “법 시행 당시 후손이 보유한 재산을 환수하는데도 4년의 시간이 부족했다”고 당시 어려움을 전했다.
이준식 친일재산조사위 상임위원(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광복 60년이 지나서야 시작한 환수 작업으로 친일 재산 일부라도 귀속한 건 상징적 의미가 있고,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라며 “다만 미환수 친일 재산으로 후손들이 지금도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 건, 역사정의 실현에서 분명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 친일파 재산 관련 영상, 사료, 그래픽 등이 포함된 더욱 상세한 기사는 ( http://mabu.newscloud.sbs.co.kr/20170814/ ) 에 접속하면 볼 수 있습니다.
권지윤 기자 (legend8169@sbs.co.kr)
박원경 기자 (seagull@sbs.co.kr)
분석: 안혜민·홍명한
디자인/개발: 임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