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9차례 25시간 인터뷰했던 기자가 발견한 ‘노회찬의 조각들’…
“높은 것을 요구하니까 그에 맞춰 더 조심해야 한다”
평소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꾼다”고 말한 노회찬은 첼로 연주가 수준급이었다. 이상엽그가 무심하게 세상을 떠난 7월23일 저녁. 퇴근길에 청와대 정문 앞을 지나는데 귀에 익숙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중략)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진보의 애국가’로도 불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문득 ‘그는 이 노래를 얼마나 많이 불렀을까?’ 하는 엉뚱하고도 부질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고는 2013년 1년 동안 9차례 25시간 동안 인터뷰했던 때가 떠올랐다.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을 내기 위한 인터뷰였다. 학생운동에서 시작해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으로 나아간 첫 세대인 그의 여정이 원고지 1900장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고민했는지 보여주는 ‘작은 조각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교육·문화에 푹 빠진 부모님
시인 이찬 노회찬(魯會燦)의 작명은 애초 문학적이었다. ‘노회찬’의 ‘찬’이 북의 시인 이름에서 따와서 그렇다. 함경도가 고향인 그의 아버지는 총각 시절 ‘이찬’(李燦)이라는 북의 시인을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나중에 결혼해서 남자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 이름에 ‘찬’을 꼭 넣겠다고 생각했단다. 그 덕분에 그는 피란지 부산에서 ‘회찬’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의 아버지가 제일 좋아했다는 이찬 시인은 아버지와 동향(함경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핍박받는 민중의 수난과 고통을 노래했지만, 좌절된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절망해 비관적 낭만주의 시를 쓰기도 했다. 해방 뒤 북한에서 ‘혁명시인’으로 추앙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징병에 끌려가는 기차에서도 낭만파 시인 하이네의 시집을 읽었을 정도로 ‘문청’(문학청년)이었다. ‘운동권’ 시절 그는 그런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크게 실망했단다. “지금 조국이 침탈당해 징병 가는 마당에 그런 말랑말랑한 시를 읽다니…”라고 중얼거리며 말이다.
“두 분(부모님)은 다른 분들과 좀 다르게 교육과 문화 쪽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서너 살 때인 50년대에 가끔 두 분이 오페라를 보러 갔다더라. 그때 우리 집은 방이 한 칸이었다. 그것도 길거리 사글셋방이었다. 내가 어릴 때 일주일에 한 번씩 영화를 보러 갔다. 아버지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해 집에 작은 암실을 만들었다.”
첼로의 운명 아들은 아버지를 닮기 마련이다. 학창 시절 영화와 연극, 음악회, 국전 등을 챙겨서 보러 다녔고, <현대문학> <월간문학>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 문학 전문지들도 구독할 정도로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심지어 중학교 때부터 부산시립교향악단과 국립교향악단 첼로 수석 연주자에게 첼로 과외까지 받았다. 첼로가 인간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악기라는 점이 그를 매혹시켰는지 모른다. 고교 재학 때는 이화여고 등에서 초청받아 연주하기도 했다. 클래식에도 심취한 그는 한때 음대 진학도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혁명’을 꿈꾸면서 첼로는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집에 두고 가끔 켰지만 노동운동을 시작하며 부산의 친구 집에 오랫동안 방치한 것이다. 그렇게 첼로를 잊고 지내다 진보정당 정치가로 활동하던 2000년 즈음 다시 첼로를 찾았다.
“첼로를 팽개치다시피 했다. 클래식이 어딨어? 운동가요만 불렀다. 공장지대 자취방을 전전하며 첼로를 갖고 다니는 건 말도 안 됐다. 그런 환경뿐만 아니라 의식에서도 그걸 거부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데…. 그때는 무조건 혁명이라.”
자유인·문화인·교양인
교과서 2008년부터 트위터를 시작한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 자기가 지향하는 가치를 ‘자유인·문화인·교양인’이라고 적었다. 이것은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교훈’(敎訓)이었다. 보통 교훈은 고리타분하고 계몽적인데 그의 학교는 제법 세련된 교훈을 새겨놓았던 것이다. 그는 “이 학교에서 내가 가져갈 것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느 설문조사에선가 ‘살아오면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교과서”라고 대답했다. 그는 신학기 때마다 받은 교과서를 일주일 만에 다 독파할 정도로 교과서를 좋아했다. 게다가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함께했던 선생님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할 정도로 ‘학교’에 대한 추억도 좋았다. 엄혹한 시절에도 학교만은 정의와 양심, 민주주의 등 공적 가치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보고 ‘좀 괜찮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으면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험하게 데모하고 감옥 가고 노동운동하고 용접하고, 또 정치를 해도 그렇게 특수한 정치를 하고 사느냐?’고 얘기한다. 그러면 저는 그 얘기에 ‘죄송하지만 저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살고 있다’고 응수한다.”
‘존재이전’과 용접 과거 운동권 대학생 출신들이 노동현장으로 가는 것을 ‘존재이전’이라고 했다. ‘위장취업’을 그렇게 철학적으로(사실은 낭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국의 지식인 계층이 운동을 실천하는 방식이었던 존재이전 규모는 상당했다. 구해근 미국 하와이대학 사회학과 교수는 책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세계 역사상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렇게 대량으로 노동현장에 가서 노동자가 되는 사례는 없었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그는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나아간 ‘실질적인 노동운동 1세대’였다. 존재이전을 위해 그가 준비한 것은 용접이었다. 처음엔 ‘선반이냐 용접이냐’를 놓고 고민했다. 하지만 용접이 선반보다 배우는 과정이 두 배나 짧다는 장점을 적극 헤아려 용접을 최종 선택했다. 보일러, 철도차량 등을 만드는 업체에서 3년여 동안 용접을 했다. 주위에서 용접을 제법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노동운동을 하는 동안 이동수, 최형기, 김명시 등 옛날 독립운동을 했던 여성들의 이름을 가명으로 썼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저한테 ‘경기고 나온 사람이 왜 노동운동을 해?’라고 했다. 나는 그것은 괜한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반에서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이 60명 중 6명이었다. 우리 나이가 가장 뜨거웠던 시대를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진보의 세속화 전략
옛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2007년 7월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들의 점거농성 때 경찰의 강제 연행에 맞서 서로 팔짱을 낀 채 버티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한국자유총연맹 삼성 엑스(X)파일 뇌물검사 명단 공개로 의원직을 상실한 그가 절치부심 끝에 선택한 곳은 서울 노원병이었다. 노원병에 처음 왔을 때 보수단체인 한국자유총연맹에서 행사에 참석해달라고 요청했다. 참모들은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다”며 말렸지만 그는 “그분들도 지역 주민인데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대거리를 한 뒤 행사에 참석했다. ‘정치인은 대중과 소통하고 호흡해야 한다’는 상식을 실천한 것뿐이다.
그 뒤로 6·25참전유공자회, 대한상이군경회, 전몰군경미망인회 등 각종 보수단체가 주최하는 행사에도 꼬박꼬박 갔다. 재향군인회 행사에는 제 발로 갔더니 주최 쪽에서 오히려 떨떠름해하더란다. 이런 행보를 두고 일부에서는 “표에 환장해서 진보가 별 군데를 다 간다”고 힐난했다. 이에 그는 이렇게 반박했다.
“그분들의 태반은 서민이다. 그분들의 아픔과 경험을 인정해줘야 한다. 6·25 때 총 맞아 죽은 사람이 친척으로 있는데 얼마나 아픈 일이냐?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공격이나 과도한 색깔론 등에 과감하게 맞서 싸워야 하지만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다 피해자들 아니냐? 그들과 관련해 더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세속화 전략 2008년 총선에서 서울 노원병에 출마했을 때 한 당원의 부모는 그에게 “당선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가 당선되면 현실정치 문제로 세속화할 가능성이 있어서 당선되지 않고 투사로 계속 남아주기를 바란 것이었다. ‘현실정치가 노회찬’이 아닌 ‘진보운동가 노회찬’을 원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감하게 진보정치가 더 세속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진보의 세속화 전략’을 주문했다. 정파패권주의, 이상과 현실의 분절, 운동과 정치의 혼재, 폐쇄적인 조직문화와 대중 검증 회피, 북한 무비판주의, 최대강령주의, 이념지향주의, 도덕적 우월의식과 선민의식 등 낡은 운동권적 진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에게 ‘무능’과 ‘분열’이라는 한국 진보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전략이었다.
“진보는 이상과 현실이 분절돼 있다. 내가 진보정당이 더 세속화되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이 거리가 좁혀져야 함을 의미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기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정치는 엄연한 하나의 현실이고, 그리고 진보주의자의 기본 덕목은 실사구시다. 그래서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을 이해하고, 현실 위에서 현실을 바꾸는 게 진보주의자의 덕목이라면 정치와 진보는 양립해야 한다.”
진보는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진보의 도덕 그는 유서에서 드루킹 쪽으로부터 4천만원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후원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고 고개를 숙였다. “잘못이 크고 무겁다”거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 대목에서는 그가 자신을 얼마나 엄격하게 대하는지가 잘 느껴진다.
필자가 그에게 “진보는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나?”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하면서 “진보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진보에 부족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현실성, 현실적 힘이다”라고 일갈했다. 진보에 도덕이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지만 도덕은 진보정당이 추구할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도 말했다.
“그런데 진보세력의 도덕적 결함에는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엄격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억울하다고 하면 안 된다. 그것도 하나의 현실이니까 인정해야 한다. 부정이나 비리의 경우 진보세력에는 훨씬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이쪽도 저쪽도 돈봉투를 받았으면 똑같은 죄인데 이쪽에서 받으면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억울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높은 것을 요구하니까 그에 맞춰서 더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도덕을 과시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이 대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가 여느 정치인들처럼 뻔뻔할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됐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활동해온 한 동지는 장례식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돈 받은 사실을 유서에는 쓸 수 있을지언정 주변 사람들에게는 직접 얘기할 수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