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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위에 공무원, 규제공화국에 내일은 없다]
<1> ‘복지부동’ 벽에 막힌 규제혁파… 말만 요란했던 역대 정권
'대통령이 콕 집어 말했는데도 안 바뀌더라고요. 겉으로는 완화한다고 하지만 속내는 규제 일변도예요.”
김필수 한국자동차튜닝산업협회장(대림대 교수)은 자동차 튜닝에 대한 정부의 규제 혁파 의지를 느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강조해도 공무원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인 2014년 3월 청와대에서 제1차 규제개혁장관회의가 열렸다. 한창 ‘손톱 밑 가시’ 없애기가 화두였던 시점. 회의에서 장형성 당시 한국자동차튜닝협회장(신한대 교수)이 건의한 튜닝 규제 완화가 테이블에 올랐다. 규제를 풀면 새로운 시장을 열 수 있는 대표적 분야라는 공감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첫 규제개혁회의에서 주요 안건으로 소개되자 국토교통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 유관 부처는 “올해가 튜닝산업 원년”이라면서 산업진흥책을 내며 관련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약속했다. 5000억 원인 튜닝차 시장의 규모가 2020년이면 4조 원으로 커진다는 청사진도 내놨다.
그러나 튜닝차 시장은 여전히 5000억 원 규모다. 규제개혁회의가 열린 뒤 잠깐 동안 튜닝부품인증제 도입, 승인 절차 간소화 등 규제 완화 정책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집권 3년이 지나자 규제 완화 얘기가 쏙 들어갔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정권 초기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공무원이 반짝 규제 완화를 하는 척하다가 대통령의 힘이 빠지면 없었던 일이 되는 공직사회의 관행 탓이다.
김필수 협회장은 “지엽적인 부분만 살짝 규제를 완화하고는 공무원들이 규제를 풀었다고 홍보하는 모습이 반복됐다”며 “오히려 부처들이 새로운 산업에 대해 통제를 강화하고 주도권을 가지려는 행태를 보였다”고 말했다.
○ 아무리 대통령이 외쳐도 규제 두 배 이상 증가
1993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을 질타하며 행정개혁쇄신위원회를 만든 이후 규제 혁파는 정권마다 주요 국정 과제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프랑스 혁명의 기요틴(단두대)처럼 규제를 철폐하겠다”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덩어리 규제를 집중적으로 개선하겠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는 ‘규제 전봇대를 뽑겠다’고 했고, 박근혜 정부는 ‘손톱 밑 가시를 빼겠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 역시 ‘붉은 깃발을 치워야 한다’고 했다.
동아일보DB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신산업은 규제에 발목이 잡혀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규제 개혁을 강조했지만 20년간 등록 규제 건수는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규제개혁위원회가 집계한 한국의 등록 규제 수는 2000년 6912건에서 2009년 1만2905건으로 증가했다. 2015년에는 1만4608건에 달했다. 이후로는 정부가 양적 개혁이 아닌 질적 개혁을 추진한다는 이유로 규제정보포털에 아예 등록 규제 건수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들이 규제 개혁 최전선에 섰음에도 전 세계와 비교한 규제지수는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해 10월 세계경제포럼(WEF)이 평가한 국가경쟁력평가에서 한국의 정부 규제 지수는 138개국 중 79위로 규제가 강한 나라로 분류됐다. 지난 정부 초기와 말기를 비교하면 박근혜 정부는 ‘2013년 79위→2016년 105위’, 이명박 정부는 ‘2009년 98위→2012년 114위’로 순위가 떨어졌다. 대통령의 힘이 줄어드는 임기 막바지로 갈수록 규제가 더 강해졌다는 것이다.
○ 대통령 5명이 말해도 원격진료 규제 못 풀어
대통령의 거듭된 지시에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대표적 규제 중 하나가 원격진료다. 지난해 8월 문재인 대통령은 여야 원내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도서벽지에 있어 의료 혜택을 받기 어려운 환자들을 원격의료 하는 것은 선(善)한 기능”이라며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원격진료도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대통령의 인식은 이미 19년 전에 시작됐다. 김대중 정부는 2000년 ‘지식정보화 사회 구현을 위한 규제 개혁’ 과제 중 하나로 원격진료 도입을 추진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고령화사회 대비 및 신(新)소프트웨어(SW) 시장 육성 방안으로 추진했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도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지시→유관 부처 검토 및 태스크포스(TF) 구성→시범사업→반발→시간 벌기→정권 교체’의 흐름을 누구도 뚫지 못했다.
정보기술(IT) 선진국 가운데 원격진료를 금지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일본은 2015년 원격의료를 전면 시행했고, 독일도 지난해 원격의료 금지를 폐지했다. 미국은 전체 진료 6건 중 1건이 원격으로 이뤄지고 있다. 신산업 도입 속도가 느리다고 평가받는 프랑스도 지난해 9월 원격진료에도 건강보험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가 미적대는 사이 피해는 고스란히 시장에 돌아가고 있다. 김민준 H3시스템 대표는 2003년 원격 환자 모니터링 서비스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원격진료 규제 때문에 회사의 매출은 대부분 미국에서 나온다. 김 대표는 “공무원들이 말로는 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규제를 완화하는 데 일종의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복지부동’ 벽에 막힌 규제혁파… 벤처 대표의 외로운 싸움
“차라리 ‘하지 말라’고 했으면 이런 피해라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지난달 27일 만난 그린스케일의 설완석 대표(50)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낼 네 번째 탄원서를 작성 중이었다. 그 탄원서 첫 장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설 대표는 기자에게 각 부처 공무원과 주고받은 서류들을 보여줬다. “규제 혁파를 하자는 대통령 뜻에 따라 최초로 임시 허가까지 받은 기술이었다. 그러나 3년 5개월이 지난 지금 내게 남은 건 정식 사업은커녕 공무원 명함 200여 장과 빚 5억 원, 체납 독촉장뿐이다.”
한쪽 벽 가득 채운 공무원과 주고받은 공문 지난달 27일 경기 수원시 광교에서 만난 블루투스 전자저울 업체 그린스케일의 설완석 대표가 2015년 10월부터 각 부처 공무원과 주고받은 공문들을 보며 허탈해하고 있다. 그린스케일은 박근혜 정부의 ‘임시허가 1호’ 기업으로 선정됐지만 약 3년 5개월 동안 관련 기술 규범이 마련되지 않아 빚더미(5억 원)에 앉았다. 수원=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그린스케일이 2015년 10월 미래창조과학부(미래부)로부터 ‘임시 허가 1호 기업’으로 선정됐을 때만 해도 그는 “정부가 나서서 고속도로를 깔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물웅덩이였다.
임시 허가제는 2013년 제정된 ‘정보통신 진흥 및 융합 활성화 등에 관한 특별법(ICT특별법)’에 따라 법적 근거가 없어 사업을 할 수 없던 혁신융합기술의 시장 진출을 도와주는 제도다. 이 제도에 따라 그린스케일을 포함한 네 곳이 임시 허가를 받고 1년간(연장 시 최대 2년) 사업을 시작했다.
블루투스 전자저울인 ‘대풍이’는 농산물을 저울에 올려놓으면 앱을 통해 무게, 산지 정보를 확인하고, 농산물 구매 및 결제를 할 수 있는 정보통신기술(ICT)이었다. PC방을 접고 2011년 창업을 한 설 대표는 2012년 기술 개발을 시작하며 저울 제조를 맡아줄 파트너 기업도 찾았다. 당시 이 기업은 기술에 대한 법적 근거를 요구했다. 현 계량법에는 저울에서 스마트 기기로 데이터를 전송할 때 오류가 생기면 이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법령상 규정이 없어 사업에 어려움을 겪던 설 대표에게 임시 허가제는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임시 허가제의 목적은 허가 기간 동안 정부 관련 부처가 협의해 기술과 서비스에 대한 규율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팔려고 보니 임시 허가는 무용지물이었다. 한 도청에서는 “정식 허가가 있어야만 예산 책정이 가능하다”고 했다.
임시 허가 기간 만료일이 다가왔지만 정식 허가와 기술 기준 마련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공무원은 그때부터 ‘규제 본색’을 드러냈다. 특히 미래부가 소관 부처로 지정한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국가기술표준원(국표원)과 농림축산식품부는 비협조적이었다. 국표원에 여러 차례 공문을 보낸 끝에 얻어낸 답변은 “통신 관련 사안이니 과학기술정보통신부(옛 미래부) 업무다” “국제기준과 동향을 살펴 장기적으로 필요성을 검토할 것” 등이었다.
현재까지도 국표원은 “임시 허가 당시 블루투스 저울에 대한 형식 승인은 받았으니 판매는 문제가 없다. 관련 기술 기준은 검토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답하고 있다. 설 대표는 “산업부 감사관실, 국민권익위원회, 국무조정실, 감사원 등에 소극 행정을 고발했지만 ‘각 부처의 재량 영역이라 조사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 결과 2015년 임시 허가를 받은 기업 4곳 가운데 단 한 곳만 정식 허가를 받았다.
설 대표가 공무원들과 규제를 놓고 싸움을 벌이는 동안 사업의 불확실성이 지속된 그린스케일의 파트너 기업은 함께 사업하는 것을 보류하겠다고 통보했다. 현재 지인의 사무실에서 얹혀살고 있는 설 대표는 “대출금을 갚기 위해 상가 분양 사무소에서 1일부터 ‘알바’를 시작하기로 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특별취재팀
▽팀장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유근형(정치부) 배석준(산업1부) 염희진(산업2부)
김준일(경제부) 임보미(국제부) 한우신(사회부)
최예나(정책사회부) 김기윤 기자(문화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