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개봉합니다.
설리.
우리나라에는 좀 더 알기 쉬운 제목으로 개봉했지요.
설리 : 허드슨강의 기적.
2009년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재구성한 영화입니다.
2009년 1월 19일. 오후 세시 삼십분에 승객과 승무원 155명을 태운 비행기가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합니다.
쾌적한 비행이 예상되는 날씨였죠. 적어도 나쁜 징후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륙 2분이 경과되었을 무렵, 이 비행기는 새때와 부딪히게 됩니다.
이 새떼는 양쪽 엔진으로 빨려들어가 엔진을 고장내게 됩니다.
이른바 버드스트라이크.
충분한 고도와 동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엔진이 고장나게 된 상태였습니다.
추락은 예정되어있는 상황이었고, 승무원을 포함한 155명 전원이 사망할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비행기에는 만칠천시간을 하늘에서 보낸 베테랑 기장이 앉아있었고,
침착함과 냉정함을 잃지 않은 채로 상황을 파악합니다.
부기장 또한 대응 메뉴얼과 기체를 체크하며 상황을 파악합니다.
판단을 내려야했습니다.
회항을 할것인가, 근처 공항에 착륙을 할것인가.
관제센터에서는 후자를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베테랑 기장 판단하기에는 충분한 고도와 동력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두가지 모두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자칫 잘못 시도하다간 도심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컸죠.
잠시 정리를 하던 기장은 결정을 합니다.
허드슨 강 위로 착륙을 하기로.
날씨가 좋았다한들 1월의 추운 강물이었고,
잠깐만 실수하더라도 기체가 그대로 강물로 처박힐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장은 확신을 갖고 집중합니다.
그리고 제목 그대로 기적적인 착륙에 성공합니다.
승무원들은 착륙 직후 매뉴얼대로 침착하게 승객들을 밖으로 유도시키고,
이 비행기의 추락을 지켜보던 근처의 배들과 구조대원들은 즉각적인 구조활동에 나섭니다.
구조작업은 신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장은 마지막까지 남은 인원을 체크합니다.
강박적으로 체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체크하던 155명이라는 숫자는 그대로 생존자의 숫자가 됩니다.
아무도 죽지 않고 모두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기적이라고 불릴만큼 훌륭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기장은 영웅이 되어도 모자를테지만,
이 영화는 그런 상황을 처음부터 보여주지 않습니다.
연방교통안전국, NTSB에서는 오히려 무례하다싶을정도의 질문을 하죠.
전날 몇시간을 잤냐는 기본적인 질문부터 술을 먹었느냐, 약을 했느냐, 가정에 문제는 없느냐.
기장 또한 자신이 과연 옳은 판단을 했던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고민을 합니다.
혹시라도 자신이 내린 섣부른 판단 때문에 155명을 필요없는 위험에 노출시켰던 것은 아닌가.
또한 데이터상 좌측 엔진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NTSB의 이야기를 들은 기장은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은 과연 옳은 판단을 했던 것인가.
심지어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에서는 출발지였던 라과디아,
혹은 다른 옵션이었던 테터보로 공항에 착륙할 수 있었다는 결과를 도출해냅니다.
기장은 혼란에 빠집니다.
그리고 공청회에서 이 시뮬레이션 결과를 확인하게 되죠.
결과는 역시 성공이었습니다.
방청석은 술렁입니다.
그렇다면 기장이 틀렸던 것일까요?
사실 이 기장과 시뮬레이션을 하던 조종사 사이에는 가장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기장은 난생 처음 갑작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린 상태였었고,
시뮬레이션 조종사들은 해당 상황에 대한 연습을 한 상태였었죠.
상황에 대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느냐,
버드스트라이크를 당한 직후에 곧바로 회항을 결정한 시뮬레이션 조종사들과 달리
기장과 부기장은 상황판단과 매뉴얼에 의한 해결시도를 거친 직후라는 차이점이 있었죠.
이 점을 고려하여 35초의 딜레이가 주어집니다.
다시 한번 시뮬레이션을 시행합니다.
결과는 모두 실패. 제방에 추락하거나, 도심에 추락하거나.
기장이 옳았습니다.
그는 최선의 선택을 했습니다.
이 영화의 중요한 점은 155명 전원이 생존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155명 전원이 생존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원인이었고, 어떤 결과가 최선이었고, 추후에는 어떻게 대응해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국가기관의 자세입니다.
실제 영화처럼 NTSB의 자세가 고압적이지는 않았겠지만 사고에 대한 조사를 해서 원인을 밝혔습니다.
또한 이 사고의 원인에 대한 조사는 버드스트라이크라는 긴급상황에 대한 매뉴얼로 작성될 것이고,
또 다른 생명을 구할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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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월호를 아직 놓지 못하고 세월호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불편해하는 이유는,
이 사고가 일어났을 때 정부가 보여준 태도 때문입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구조활동에 대한 이해 또한 없었으며,
사고가 일어난 후에는 숨기기에 급급했고, 원인을 밝히기 위한 시도를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사고가 났다는 결과만이 존재한 채, 원인도, 대처도, 추후 수습도 모두 엉망이었습니다.
해경의 해체라는 결정은 상황 해결이 아닌 면피를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내 지인이, 내 자식이, 내 부모의 죽음에 대한 명확한 원인을 알아도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하물며 그 원인조차 명확하지 않고, 국가가 앞장서서 이것을 숨기려고 할 때 유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국민들은 국가의 행동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는데
이제 다 끝났다고, 지겹다고, 정치적이라고 외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세월호가 주는, 그 단어의 불편함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으니까요.
해결될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세월호는 예전에도,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불편한 이름으로 남을겁니다.
아직 생을 반절도 겪어보지 못한 아이들이 생각날겁니다.
정치적인 낙인으로 남을겁니다.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게는 평생토록 그렇게 남을겁니다.
정치적으로 만든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할거고,
원인을 숨기려는 사람들은 다 끝났으니 앞으로 나아가자고 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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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영화에서처럼은 아니더라도 최대한 많은 생존자를 구했더라면.
승무원들이 자신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구조 매뉴얼대로 움직였더라면.
사고발생을 인지한 즉시 구조활동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더라면.
이 재난이 일어난 직후 적어도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그래서 이런 사건에 대한 예방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면.
무엇하나라도 제대로 돌아갔다는 시그널이 있었다고 한다면
세월호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겁게 남아있지는 않을겁니다.
그러니 최소한 스스로 애도나 추모는 못할지언정.
그것을 방해하지는 맙시다.
조롱하지는 맙시다.
인간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