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교_시무 7조 상소에 답한다(시인 림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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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너의 상소문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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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이 엿보이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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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생업에 일념하도록 평안한 정사를 펼치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하고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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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가 다망해 상소에 일일이 답하지 않는다만, 너의 ‘시무 7조’가 내 눈을 찌르고 들어와 일신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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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만백성이고 온 우주라 내 너의 가상한 고언에 답하여 짧은 글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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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로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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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문장은 화려하였으나 부실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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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를 흉내 내었으나 삿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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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헌법을 들먹였고 탕평을 들먹였고 임금의 수신을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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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을 논함에 내세운 너의 전거는 백성의 욕망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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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보다 실리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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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보다 이성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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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치수의 가시성에 빗댄 재난지원금의 실효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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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그럴 듯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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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도하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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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했으나 혹세무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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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파에 갇혀서 졸렬하고 억지스러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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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와 당위를 구분하지 못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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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의견을 혼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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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진실과 너의 진실은 너무 멀어서 애달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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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닿을 수 없이 처연해서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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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정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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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왕들의 어전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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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의 출신이 거칠고 칼을 내세워 말하는 시기에는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려 따르고 아첨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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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이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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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벌귀족과 권문세가들이 왕권을 쥐락펴락 위세를 떨칠 때에는 일치된 하나의 의견이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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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떠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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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흑과 백만 있는 세상을 원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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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분란하지 않고 편전에서 분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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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 분분하고, 저잣거리에서 분분한, 그 활짝 핀 의견들이 지금의 헌법이 원하는 것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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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명분에 치우쳐 실리를 얻지 못하는 외교를 무능하다고 비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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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 나라가 지금도 사대의 예를 바치고 그들이 던져주는 떡과 고기를 취하는 게 실리라고 믿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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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명분이란 게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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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백성에 대한 의리를 말하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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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의 자존과 주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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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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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힌 친구가 있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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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할 줄도 용서를 구할 줄도 모르는 그 친구에게 진심어린 사죄를 바라는 일이 화해를 해치는 일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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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몇 푼 받고 합의하고 아무 일 없던 듯이 친하게 지내는 것이 네가 생각하는 정의이고 실리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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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명분은 의의 살아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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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깃덩이가 아니라 치욕에 분노하고 맞서는 게 나의 실질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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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에게 위임받은 통치의 근간이다. 너희의 평상어를 빌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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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백성의 실리는 돈이 아니라 가오에 있지 않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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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지지 않으려 버티고 있으니 너도 심지를 꿋꿋하게 가다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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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백성의 욕망을 인정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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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그 백성은 어느 백성을 말하는 것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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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도 더 가지려고 탐욕에 눈 먼 자들을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퉁 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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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백성은 집 없는 자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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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쫓겨날지 몰라 전전긍긍 집주인의 눈치를 보는 세입자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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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투기 물건이 아니라 가족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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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값이 풍선처럼 부풀고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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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채씩 집을 사들여 장사를 해대는 투기꾼들 때문에 제 자식들이 출가해도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할까봐 불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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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감에 분노하고 상심하는 보통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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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는 핍박받고 절망하고 노여워하는 그들을 향해 있고, 나는 밤마다 그들의 한숨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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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지금 이 정부가 이성적이지 않고 감성에 치우쳐 나랏일을 망치고 있다고 힐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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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말하는 이성과 감성의 의미를 나는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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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마리의 양을 모는 목동이 한 마리의 양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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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마리의 양을 돌보지 않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는 목동을 두고 너는 이성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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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워하는 그 긍휼한 상심이 너에겐 감성이고 감상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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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그것이 지극한 이성이고 마땅한 도리라 여겨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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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마리를 찾지 않는다면 아홉 마리가 곧 여덟이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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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남은 양이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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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마리가 너일 수도 있고, 너의 가족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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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내팽겨 칠 것이냐. 나는 너를 끝까지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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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의 대의이고, 나의 실리이고, 나의 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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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온갖 조작된 풍문이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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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찌라시가 진실로 둔갑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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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리는 매일 욕을 먹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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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철주야 정사에 여념이 없는 나의 일꾼들도 시시비비를 불문하고 싸잡아 비난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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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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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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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깨우치고 식견을 가진 너희 같은 지식인들이 그 가짜에 너무 쉽게 휩쓸리고 놀아나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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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는 스스로를 망치는데 쓰이지만, 섣부른 부화뇌동은 사악하기 이를 데 없어 모두를 병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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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경계하듯이 너도 너를 삼가고 경계하며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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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백성의 한숨을 천명으로 받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