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한국축구의 전도유망한 축구신동이자 축구천재

쿠라라네 작성일 10.02.12 13:4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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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으로 찔러 넣는 정확한 패싱과 천부적인 득점감각' '문전 앞 직접 프리킥은 90%이상 골로 연결시키는 정교한 스핀킥' '게임 리더이자 찬스 메이커이며 스트라이커 이기도 한 축구천재' 그리고 90년대 '한국 축구의 희망'

이상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대략 4년간 그를 따라다녔던 수사다. 과장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장담하긴 어렵다. 특히 직접 프리킥을 90% 이상 차서 넣었는지 못넣었는지는 세어본 적이 없으니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기재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 빨리 시들어버린 그의 축구 인생에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다.

일간스포츠 축구팀 박재영 부장은 그를 두고 이렇게 단언한다.

"비교가 안된다. 잘하는 선수는 많아도 그처럼 '축구 천재' 소리를 들을만한 선수는 흔치 않다. 앞으로도 어렵다."

김병수는 강원도 홍천초등학교에서 처음 축구화를 신었다. 20년전 일이다. 축구를 잘한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돌았다. 미동 초등학교 천명길 코치가 강원도까지 찾아가 그를 스카우트해왔다. 일단 서울로 오자 '신동 났다'는 소문이 더 빨리 퍼졌다. 포항제철 감독이었던 한홍기 선생은 이 '신동'을 대선수로 키워보겠다고 아예 포철축구단 숙소로 데려갔다. 어린 아이 혼자서 외로움을 탄다고 어머니에게 선수단 식단까지 맡기면서 말이다.

어린 꼬마는 포철 연습장에서 포철 선수들과 연습을 했다. 그의 연습상대는 김철수, 박창선, 최순호, 조태천 같은 당시 쟁쟁한 스타 선수들. 어린 아이가 축구를 조금하니까 그저 귀여워만 했던게 아니었다. 훈련 중에 아저씨들 앞에 나가서 개인기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때론 연습 경기에 투입(?)되어 아저씨들을 제치고 골을 넣기도했다.

포항제철 관계자와 한홍기 감독은 이 어린 천재를 외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브라질 유학이 이미 그 시절에 추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교부 (현 교육부) 방침이 걸림돌이었다. 브라질 축구학교에서 축구 공부를 한 기간은 국내 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학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8년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 당시 한국일보 전상돈 기자(현 스포츠투데이 부국장)는 '한국 축구에 김병수 시대가 오고 있다'며 '한국 축구의 약점으로 지적되던 미드필더의 발굴'이라고 대서특필했다.

경신중학교를 거쳐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이미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축구를 잘 알고 하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지고 있던 경기도 그가 들어가면 어영부영하다 스코어가 뒤집히기 일수였다. '김병수는 자신의 리듬에 게임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선수'라는 말처럼 게임을 조율하는 능력에 관한한 그보다 나은 선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부상을 당했다. 체계적인 선수관리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을리 만무였다. 찜질 몇 번에 주사 한 두대 맞고 중요(?)한 경기랍시고 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발 다쳤으면 왼발로만 차라.'는 소리가 그를 그라운드로 떠밀었다. 대학에 진학한 뒤로 뛰는 날보다는 서 있는 날이, 서 있는 날보다는 앉아 있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의 불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축구의 불운이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 그가 고려대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는 단 네 경기. 그 가운데 세 번이 연세대와의 정기전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정기전용 선수였다'고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보면 그는 방치되어 있었다. 아버님이라도 생존해 계셨다면 축구 선수의 두 다리가 그 지경이 되도록 지켜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님은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들에겐 그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다. 수술비를 마련할 수 없었다.

"한 달 이상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쉬는 것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었다. 그러다 경기가 있으면 불려나가 사나흘 연습하고 뛰었다. 91년에는 왼쪽 발목에다 어깨까지 다친 상태에서 경기에 나섰다. 압박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뒤뚱거리며 뛰었지만 어시스트도 하고 결승골도 넣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런 그의 플레이를 두고 '대단한 투혼'이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그 무책임함에 너무나 화가 났다.

청소년 대표를 거쳐 그가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것은 대통령배(현 코리아컵) 대회를 앞둔 89년 6월. 그런데, 당시 대표팀 이회택 감독은 그의 경기 모습을 본적이 없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내내 놀다가 고연전에나 나오는 선수의 경기장면을 어떻게 보았겠는가. '하도 옆에서 김병수 김병수 해가지고 하는 수 없이 뽑았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그러나, 그의 플레이를 본 이회택 감독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 8월 소련과 미국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너는 무조건 이태리에 데려갈테니 이 길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측에서는 차일피일 미룰뿐 일언반구 이야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해 고연전에 출전했다.

"운동하면서 소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딱 한번만이라도 몸이 완전한 상태에서 게임을 해보는 거였어요."

하지만, 그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그의 발목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오른쪽 발목 인대가 1인치, 왼쪽 발목 인대는 0.9인치가 늘어난 상태였다. 90년 1월에 가서야 경찰병원에서 오른쪽 발목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릴적 포철 축구단 숙소에서 만났던 최순호 선배가 수술비 일체를 부담해 주었다. 6월엔 학교측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스쿠바 대학에서 왼쪽 발목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3개월만에 일어났다.

그의 복귀 경기는 다시 고연전. 1년만에 그라운드에 나섰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는 이날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대 2로 고대가 승리. 다음날 스포츠 신문엔 '고대 황금발 김병수 - 비극은 끝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상이 그리 쉽게 고쳐질리 없었다. 부상이 재발한 것이다. 한참을 쉬다가 91년 1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나중엔 다쳐도 감각이 없었어요. 0.6인치가 늘어나면 아주 많이 다친건데 나는 1인치가 늘어났거든요. 삐어도 삔 것 같지 않았어요."

특별한 재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몸도 추스르기 전에 경기에 출전하고, 그러다 같은 부위를 다시 다치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그는 서서히 선수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으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것은 세번째 수술을 받고 꼭 1년 뒤인 92년 1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이었다.
크라머 감독은 처음에 그의 선발을 반대했다. '보지도 못한 선수를 말만 듣고 뽑을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U-17 대표팀부터 그를 지켜본 김삼락 감독의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를 본 순간 세계적인 축구 이론가 디트마르 크라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구인생 50년만에 처음 만난 천재다.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 

 

P.S 요 근래에 맥을 못추는 한국축구  김병수같은 같은 축구천재가 또 한번 나타나길 기원하나

     현실적으로 김병수같은 천부적인 능력의 게임메이커와 스트라이커는 국내서 여간 보기 힘들지만...... 

     또 다가오는 남아공월드컵이 조마조마 하지만.... 김병수만큼의 재능과 역량을 가진 플레이메이킹능력과

     스트라이커자질까지 구비한 이청용,박주영 같은 한국축구 미래이자 인재가 나타나서 흐뭇하네요...      

 

 

(Analog&Lp)

 

 

몇 번 올라왔던거 같기도 한데 영상은 짤린거 같아서 올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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