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양신!!

복수할것이다 작성일 10.08.03 18: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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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8일 대구. 이날 LG에 7대 0으로 이긴 삼성 선수들의 표정은 밝았다. 3연승으로 3위 두산과의 승차를 2경기 차로 유지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최선참 양준혁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는 연방 심호흡을 하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양준혁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저,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양준혁의 전화를 받은 이는 삼성 박덕주 운영팀 차장이었다. 선수 계약과 연봉을 담당하는 박 차장은 양준혁의 전화를 받고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다를까.

 

“거취를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양준혁의 첫마디는 그랬다. 박 차장은 ‘거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박 차장이 침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다른 팀에서 뛰고 싶다면 조건 없이 보내주고, 내년에도 삼성과 계약하길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 방침이다. 만약 현역생활을 접고 은퇴를 결심하면 프로야구 사상 가장 성대한 은퇴식과 최고의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방침이다. 자, 이제 선택은 네 몫이다.”

 

사실 박 차장도 양준혁과 이런 자리를 몇 번이고 하고 싶었다. ‘살아있는 전설’ 양준혁의 주변 상황이 하루가 다르게 안타깝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았다. 다행이었던 건 근간의 양준혁 표정이 더없이 편안했던 것. 오랫동안 침묵하던 양준혁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삼성에서 명예롭게 은퇴하겠습니다.”

 

18년 동안 그라운드를 밝히던 프로야구의 ‘별’이 지는 순간이었다. <스포츠춘추>가 은퇴 후 양준혁을 찾아 솔직한 심경을 들었다.


 


나는 왜 은퇴를 결심했나


7월 26일 은퇴를 발표했다. 갑작스러운 은퇴 발표에 많은 야구인과 팬이 깜짝 놀랐다.

 

은퇴를 결정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잠시 침묵하다가) 지난해 부상이 조금 있었지만, 성적은 좋았다고 자부한다.(주 : 82경기 출전 타율 3할2푼9리, 11홈런, 48타점) 그러나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았다. 사실 이때부터 조금씩 은퇴를 생각했다. 올 시즌 시작 전 ‘웬만큼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주전으로 뛰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아니나다를까 시즌 초부터 주전 경쟁에서 밀렸다.

 

 

주전 경쟁에서 밀렸어도 대타로 나와 좋은 활약을 펼쳤다. 올 시즌 26경기에 대타로 출전해 22타수 6안타 타율 2할7푼3리, 1홈런, 13타점을 기록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 역시 대타로서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타로 나설 기회에서도 번번이 출전하지 못하면서 ‘아, 여기까지구나’하는 감(感)이 왔다.

 

 

 

베테랑 선수들을 만나면 “성적이 좋아야 선배도 체면이 서지, 성적이 나빠 벤치 신세가 되면 ‘영’ 죽을 맛”이라고 한다. 당신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듯싶다.

 

왜 그렇지 않았겠나. (양미간을 찌푸리며) 나도 죽을 맛이었다. 그건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른다. (혼잣말을 하듯) 기분이 참 처참하다. 내가 그래도 최선참이라고 주변에서 보는 분들도 많은데….

 

 

 

그럴 때 가장 힘든 게 무엇이었나.

 

표정 관리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속으로 계속 삭일 수밖에.

 

 

 

‘속으로 삭인다’라,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어쩌겠나. 계속 삭여야지. 도 닦는 기분으로 살았다(웃음).

 

 

 

도 닦는 기분….

 

주전에서 밀리고, 대타 출전도 줄면서 조바심이 생겼다. 마음도 항상 심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눈앞의 현실도 객관적으로 직시하게 되고. 언제부터인가 ‘비록 내가 경기는 나가지 못하지만, 팀에 보탬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배팅볼도 던지고, 슬럼프로 고생하는 후배가 있으면 한마디씩 조언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신변을 정리했다.

 

 

 

당신이 얼마나 은퇴를 두고 고심했는지 잘 안다. 하지만, 6월만 해도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지켜보고서 그 뒤 은퇴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7월 한 달 동안 거의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때 ‘내가 이렇게 1군 엔트리에 머물고 있으면 실력 있는 후배들이 1군에 올라오고 싶어도 자리가 없어 못 올라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는 게 맞지 않나 싶었다. 게다가 은퇴를 발표하기에 타이밍도 적절했고.

 

 

 

타이밍?

 

팀 성적이 나쁘면 아무래도 은퇴하는 나나, 팀이나 초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7월 하순 팀 성적이 원체 좋아 부담이 덜했다. 여기다 올스타전에 출전하면서 모양새도 좋았고. 그래서 7월 18일 광주 KIA 원정을 앞두고 구단 관계자와 만나 은퇴 문제를 조율했다.

 

 

 

그때 구단 관계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

 

서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구단에선 “네가 원하면 다른 팀에 조건 없이 보내주겠다. 현역생활을 더 지속하고 싶으면 내년시즌에도 계약하겠다. 만약 은퇴하면 은퇴식을 화려하게 해주고, 네가 원하면 지도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했다. 여기다 구단에선 “이렇게 선수생활을 끝내면 아쉬우니까 팀이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면 엔트리에 등록해서 마지막을 더 멋지게 장식하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지금도 구단의 극진한 배려에 감사한 마음이다.

 

 

 

은퇴를 결심하고 선동열 삼성 감독을 찾아갔나.

 

구단에 ‘은퇴하겠다’고 말한 다음 날 감독실에 찾아가 말씀드렸다.

 

 

 

선 감독이 뭐라고 하던가.

 

감독님이 현역 은퇴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네 심정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했다.

 

 

 

삼성 김응룡 사장에게도 은퇴 사실을 전했나.

 

전화 드렸다. “어찌하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조만간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언제 미군부대에서 밥 한 그릇 사주십시오”라고. (김 사장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어, 알았어.” 하시더라(웃음).

 

 

 

올 시즌에도 대구구장만 가면 예외 없이 당신의 아버지 양철식 씨를 만날 수 있었다. 경기 종료 때까지 이제나저제나 아들이 출전할까 노심초사하시던 게 눈에 선하다. 부모님께는 언제 은퇴 사실을 알렸나.

 

은퇴 결심하고 바로 말씀드렸다.

 

 

 

뭐라고 하시던가.

 

(조용한 목소리로) 안타까우시니까, “좀만 더 하지.” 하시더라.

 

 

 

가정이다. 만약 올 시즌 정상적으로 출전했어도 타율 2할5푼2리, 1홈런, 20타점만을 기록했을까. 지금처럼 시즌 중 전격 은퇴를 결심했을까.

 

글쎄. (한참 머뭇거리다가) 출전기회가 많았다면 성적이 조금 올라가지 않았을까. 은퇴도 내년 시즌 중반 정도에 했을 것이고. 하지만, 당신 말대로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야구에 확률은 있어도 가정은 없다.

 

 


 

 

대구, 삼성이 주는 의미


#
양준혁이 은퇴를 고민한 건 6월 중순부터였다. 시즌 초 부진하며 선발출전과 대타를 오가던 양준혁은 6월 18일 대구 한화전 이후 한 번도 스타팅멤버에 들지 못했다. 대타로 나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양준혁은 동요하지 않았다. ‘대타자’지만 ‘대타’로 출전하는 걸 창피해하지 않았다. 되레 한 타석이라도 나가는 걸 대단한 기회로 여겼다.

 

하지만, 대타 출전마저도 줄며 현역 지속과 은퇴 사이에서 장고를 거듭했다. 그즈음 양준혁은 현역에서 계속 뛰려고 다른 팀으로의 이적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가 내심 마음에 뒀던 팀은 SK였다. 김성근 SK 감독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2010 올스타전 베스트 10 팬 투표에서 이스턴리그 지명 타자 부문 2위에 올랐다. 홍성흔(롯데)에 밀려 올스타전 출전이 불투명했다. 그러나 감독 추천 선수로 올스타전에 참가하며 올스타전 14회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18년 동안 밟았던 그라운드가 그렇게 새로울 수 없었다. 공교롭게 올스타전이 대구에서 열리지 않았나. 대구팬들 앞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르는구나 생각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런 가운데 경기 중 SK 김성근 감독님이 갑자기 외야 수비를 준비하라고 하셔서 깜짝 놀랐다. 실제로 6회부터 김현수(두산) 대신 좌익수로 출전했다. 하필 외야 뜬공이 계속 내 쪽으로 오지 뭔가(웃음).

 

 

 

그 경기에서 7회 말 타석에 올라 3점 홈런을 쳤다. 당시 당신의 나이가 41세 1개월 28일이었으니 1991년 올스타전에서 기록한 김재박의 37세 1개월을 깨는 최고령 올스타전 홈런기록이었다.

 

이번 타석이 현역시절의 마지막 타석이라고 생각하니 무척 긴장됐다. 최대한 집중해서 좋은 결과를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홈런이 터져 마지막 올스타전을 뜻깊게 치를 수 있었다.

 

 

 

타자들은 ‘대개 홈런은 칠 때부터 감이 다르다’고 한다. 3점 홈런을 칠 때 감이 왔는지 궁금하다.

 

음,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고개를 갸웃하다가) 올 시즌 홈런을 ‘딱’ 1개 쳤다. 그래서인지 스윙했을 때도 이 타구가 과연 펜스를 넘어갈까 의구심이 들었다.

 

 

 

의구심?

 

배트에 맞기는 제대로 맞은 것 같은데 과연 얼마나 날아갈까 싶었다. 그때 홈플레이트에서 외야 쪽으로 바람이 많이 불었다. 그 바람 덕분에 타구가 더 멀리 날아간 듯싶다. 뭐, 운이지. 운(웃음).

 

 

 

올스타전이 끝나고 팬들과 인사를 나눌 때 마음이 뭉클했을지 싶다. 그도 그럴 게 그 경기가 당신 야구인생에서 마지막 올스타전이 아니었나.

 

선수로서는 마지막 올스타전이란 걸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라운드에서 5분 정도 서 있었다.

 

 

 

그 5분 동안 무슨 생각을 했나.

 

‘오늘로 끝인가’ ‘정말 여기까지인가’하는 생각이 드니까 참 기분이 묘하더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명예로운 은퇴로 결론 내렸지만, 원하면 다른 팀으로도 갈 수 있었다. 가뜩이나 삼성에선 당신을 생각해 ‘조건 없이 놔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실제로 입단제의를 했던 구단도 있었는데.

 

프로 18년 동안 삼성에서만 뛴 게 아니다. 타의에 의해 해태, LG 유니폼도 입었다. 개인적으로 다른 팀 유니폼을 입는 게 낯선 경험은 아니었던 거다. ‘꼭’ 이루고 싶은 대기록도 있었기에 솔직히 다른 팀에서 뛰는 걸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쯤에서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하지 않나 싶었다.

 

 

 

유종의 미라.

 

선수생활을 마무리할 시점에 다른 팀에 가서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게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리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은퇴 시기를 잡지 못하고 다른 팀에 갔다가 되레 역효과를 본 선배들도 많지 않았나. 사랑하는 팀에서 명예롭게 은퇴하는 게 맞는 선택 같았다. 주변의 조언을 구했을 때도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많았고.

 

 

 

만약 삼성을 떠났다면 SK에서 둥지를 틀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SK 김성근 감독에게 선수생활 연장의 뜻을 밝히지 않았나.

 

김 감독님은 야구 대선배이자, 존경하는 지도자다. 올스타전에 출전한 것도 김 감독님의 추천 때문이었던 걸로 안다. 사실 김 감독님께 “이제 은퇴합니다”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선수로 더 뛰지. 왜 은퇴를 하려느냐”고 하셨다. 그래서 저간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삼성에서 널 데려오고 싶어도 보상선수가 만만치 않을 거야”하며 한숨을 내쉬셨다.

 

 

 

삼성에서 조건 없이 놔주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말하지 그랬나.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드렸다.

 

 

 

뭐라고 하시던가.

 

“그래?”하고 깜짝 놀라셨다.

 

 

 

올 시즌을 끝으로 김재현이 은퇴하면 SK도 경험 많은 왼손 타자가 필요하다. 당신이 제격이었는데. 어째서 SK 행을 추진하지 않았나.

 

SK에서 선수생활을 연장할 마음도 없지 않았다. 김 감독 밑에서 야구를 더 배우고도 싶었다. 하지만, 난 삼성을 떠날 수 없었다. 쌍방울에서 백지수표를 내밀 때도 한사코 거절하고 군 복무 먼저 마쳤던 나였다. 왜 그랬겠나. 삼성에 입단하려고 그랬다. 내겐 삼성이 부모님 같은 팀이다. 부모 품에 안겨 마지막을 정리했으니 어떤 의미에선 난 참 복받은 선수지 싶다.

 

 


 

182안타가 모자랐던 2천500 안타 도전

 

# “진짜 목표는 2천 안타가 아니라 개인통산 3천 안타다. 계산해보니까 2007시즌을 기준으로 7년 6개월이 걸리더라. 지금 몸 상태로라면 3, 4년까지는 2006년 정도의 성적을 거둘 것 같다. 문제는 그 이후다.”

 

 

- 2007년 3월 대구에서 양준혁 -

 

 

 


다른 팀으로의 이적을 고려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도전을 중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도전은 단연.

 

개인통산 2천500안타 달성이었다. (나지막한 음성으로) 정말 도전하고 싶은 대기록이었다. 내 한계를 시험하는 좋은 목표였으니까. 182안타를 남긴 상태라, 아쉬움이 컸다.

 

 

 

올 시즌 초부터 정상적으로 출전했다면 내년 시즌 정도엔 달성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고개를 끄덕이며) 가능할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아쉬워하면 뭐하나. 이미 끝난 일이다. 치지 못한 182안타는 야구계에 있으면서 182가지 좋은 일로 보충하면 된다.

 

 

 

당신의 2천 안타는 앞으로 한국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이 생기면 타자들의 명예의 전당 헌액 기준이 될 것이다. 그만큼 대기록임이 틀림없다. 2천 안타 말고 당신이 작성한 수많은 대기록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기록을 꼽는다면 뭘까.

 

개인통산 351홈런도 가치가 있다고 본다. 잘 알겠지만, 난 지금껏 홈런왕을 한 번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개인통산 최다홈런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꾸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자세를 바로 하며) 그래도 안타 빼고 가장 의미 있는 기록을 꼽으라면 역시 사사구가 아닐까 싶다.

 

 

 

같은 생각이다. 18시즌 동안 사사구 1천380개를 기록했다. 미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4할 대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총을 쏘지 않고 적을 제압하는 군인처럼, 스윙하지 않고 1루로 출루할 줄 아는 타자야말로 최고의 타자”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야구에선 초구에 안타를 친 타자보다 5, 6구까지 끈질기게 투수를 괴롭히다 1루까지 출루한 타자가 더 좋은 평가를 받곤 한다.

 

사실 사사구 기록은 눈으로 보이는 기록이 아니다. 안타나 홈런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과거 국내프로야구에선 사사구는 인정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 말대로 메이저리그에선 달랐다. 1999년 선수협 파동으로 어느 팀에서도 날 받아주지 않을 때 미국행을 추진한 적이 있다. 당시 뉴욕 메츠에서 입단을 제의했는데 그때 메츠에서 내 기록 가운데 가장 눈여겨본 것이 무엇인지 아나?

 

 

 

글쎄.

 

출루율이었다. 메츠 관계자가 “아웃되지 않고 1루로 갈 수 있는 타자가 정말 좋은 타자”라고 하더라. 후배들에게 간혹 하는 말인데. (강한 어조로) 나쁜 공을 하나 골라내면 다음 공을 기다릴 수 있지만, 나쁜 공에 손이 나가면 다음 공을 기다릴 새도 없이 더그아웃으로 걸어가야 한다. 그게 야구다. 더구나 야구는 1루, 2루, 3루, 홈을 더 많이 밟아야 이기는 스포츠다. 자기 성적을 위해서 크게 스윙하다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기보다 팀을 위해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공을 기다리는 게 진정한 프로야구 선수의 자세다.

 

 

 

프로생활을 18년을 되돌아보면서 가장 흐뭇한 순간은 언제였나. 2천 안타를 기록했던 순간이었나.

 

(손을 흔들며) 2천 안타 달성? 물론 기뻤지만, 그건 팀을 위해 뛰면서 얻은 ‘덤’이었다. 아무래도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때가 가장 흐뭇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해 데뷔 이후 이어오던 9년 연속 타율 3할이 중단돼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FA 자격으로 다시 삼성으로 돌아온 첫해였기에 개인 기록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선수협 파동 이후 다시는 삼성에 오지 못할 것이란 소문이 많았다.

 

그때 내가 삼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김응룡 사장님 덕분이었다. (뭔가가 생각난 듯) LG에 있던 나를 김 사장이 부를 때 두 가지 이야기를 하셨다. 그게 뭔지 아나? (“모르겠다”고 하자) “외야 수비가 가능하냐”와 “팀의 리더가 될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알았다”고 하시면서 내게 다시 삼성 유니폼을 입히셨다. 그때는 정말 개인 기록보다 팀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고민의 효과는 있었나.

 

참, 그때 후배들을 혼내기도 많이 혼냈다(웃음). 그러나 알게 모르게 팀이 조금씩 변하더라. 팀원들이 하나가 돼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러다 덜컥 한국시리즈 챔피언에 오르니 얼마나 기뻤겠나. (얼굴이 상기되며) 생각해보라. 삼성이 그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에 얼마나 목말랐나. 전·후기 통합우승은 했었어도 한국시리즈 우승은 처음이었으니 당연히 기쁠 수밖에. 개인적으로 학창 시절까지 통틀어서 첫 우승이었다. 아마 죽어서도 잊지 못할 최고의 기억일 거다.

 

 

 

그렇다면 가장 힘겨웠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두말할 필요없이 2000년 선수협 파동 때다.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땐 정말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각오로 뛰었다. 돌아보면 10년이 흐른 지금, 선수들의 권익이 많이 향상돼 보람을 느끼지만, 그땐 정말 참….

 

 


 

"삼성, 올 시즌 한국시리즈 우승 충분히 가능하다."

 

# “그립다 말을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한번”

 

양준혁 선수가 은퇴를 결정하셨을 때,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소월님의 시 구절처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도 되뇌고 되뇌었다고 생각합니다.

 

영남대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의 베테랑 양준혁 선수는 제겐 최고선수이면서도 항상 온 힘을 다하는 선수였습니다.

 

팬의 입장에선 1천500득점(현재 1천299득점), 3천 안타(2천318안타), 400홈런(351홈런), 200도루(193도루) 기록하시는 장면을 보고 싶었지만, 양준혁 선수는 “손뼉 칠 때 떠나라”는 격언처럼 많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명예로운 은퇴를 선언하셨습니다.

 

7월의 첫날, 끝내기 안타를 치고 새색시처럼 수줍은 웃음을 띤 양준혁 선수는 한마디로 항상 푸른 그라운드에서 열심히 치고 달리는 신인(新人)선수였습니다. 하지만, 팬에겐 그 모습이 바로 신인(神人)선수로 비쳐졌습니다.

 

이제 그는 그라운드에서 사라지지만, 푸른 그라운드를 보면 자연스럽게 그가 또 그리워질 것입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당신이 있어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굿바이! 양준혁 선수. 제 젊은 날을 당신의 은퇴와 함께 보냅니다.

 

- 삼성 팬 홍진혁 -

 

 

 


2007년 2천 안타를 기록했을 때 3천 안타가 가능한 선수로 장성호(한화)를 꼽았다. 선구안과 콘택트 능력에서 자신의 후계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했는데. 지금도 장성호가 3천 안타의 주인공이 될 것으로 보나.

 

(장)성호도 부상과 이적으로 굴곡이 많았다. 참 좋은 선수인데…. 안타까운 마음이다. 사실 내가 당신과 인터뷰를 했던 2007년엔 김현수(두산)가 없었다. 지금 김현수를 보면 나보다 타격기술과 마인드가 훨씬 뛰어나 보인다. 특히나 야구에 대한 열정까지 모두 갖췄다. (김)현수는 진짜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거기서 놀아야 할 선수다.

 

 

 

올 시즌 김현수의 타율이 2할9푼7리다. 주변에선 “부진하다”고 난리다. 세상에! 3할에 가까운 타율이 부진하다면 3할 타자 15명을 제외한 수백 명의 선수는 뭔가.

 

현수라고 항상 3할5푼 이상을 칠 수 있나. 한 번씩 좌절도 하고, 슬럼프도 겪어야 대타자가 된다. (목소리에 힘을 주며) 현수는 내가 이루지 못한 2천500안타를 꼭 달성할 선수다. 지켜보라.

 

 


 

당신의 뒤를 이를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꼽는다면 과연 누굴지 궁금하다.

 

음, 보자. 먼저 박석민은 김동주(두산) 이상으로 클 선수다. 다만, 잔부상이 많아서 참 안타깝다. 정말 부상만 없으면 대단한 선수가 될 재목인데. 채태인도 자질이나 성격면에서 무척 좋은 선수다. 야구 기술도 무척 뛰어나고. 하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 이런 게 조금 아쉽다. 내가 봤을 땐 지금보다 훨씬 잘할 수 있는데 조금 정체된 기분을 느낀다고 할까.

 

 

 

정체?

 

(채)태인이 보다 앞선 길을 왔기 때문에 후배들의 현재가 정확히 눈에 보인다. 지금 삼성의 중심타자라고 해서 멋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프랜차이즈 스타나 대타자가 되려면 리그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정도의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그래 이대호, 홍성흔(이상 롯데)급은 돼야 정말 성공했다는 소릴 들을 수 있는 거다.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해주는데. 요즘엔 너무 많이 하니깐 잔소리 같기도 하고(웃음). 조동찬, 최형우도 삼성의 미래를 짊어질 좋은 후배들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후배들이 야구실력만큼이나 야구 열정도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야구 열정이 나와서 하는 말이다. 야구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어도 후천적인 노력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는 종목이다. 야구 열정이 성적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인가.

 

아무리 소질이 뛰어난 선수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대선수가 될 수 없다. 사람들은 대선수가 그냥 나오는 줄 알지만, 그 길은 정말 험난하고 고달프다. 그 험난한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나침반이 돼주는 게 바로 열정이다.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이승엽(요미우리)이다.

 

 

 

음.

 

(이)승엽이는 오늘 4타수 무안타를 치면 정신이 ‘확’ 도는 스타일이다. 경산볼파크에서 저 혼자 남아 새벽 3시, 4시까지 배팅연습을 했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치며) 그거다. 그런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최고의 자리에 오른 거다. 그래서 내가 항상 내리는 야구의 정의도 ‘연봉은 열정 순’이라는 거다.

 

 

 

그러나 야구는 열정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당연하다. 열정 다음은 준비다. 타율 2할8푼 타자들을 보라. 그런 선수들은 세고 셌다. 3할 타자가 되려면 남과 똑같이 해선 안 된다.

 

 

 

요즘 선수들은 상대팀 전력분석에 열심이다. 따지고 보면 ‘야구는 실수를 얼마나 줄이느냐’의 싸움 아닌가.

 

내 경우는 달랐다. 나는 상대를 분석하기 전에 나를 먼저 분석했다. 내 장단점을 완벽하게 알면 어떤 투수가 나와도, 설령 랜디 존슨이 나와도 안타를 칠 수 있다. 난 항상 슬럼프에 빠지면 비디오를 보며 내 단점이 무엇인지 분석했다. 모니터를 통해서도 나오지 않으면 왜 안 맞는지 고민하고 스스로 처방을 내렸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고 변신을 거듭했던 게 42살까지 살아남은 배경이 되지 않았나 싶다.

 

 


 

대타자에게 가장 두려운 라이벌은 상대 투수가 아니라 세월이란 생각이다. 많은 지도자가 “나이가 들수록 배트 스피드가 느려져 부진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배트 스피드가) 떨어지긴 한다. 그러나 안타는 배트 스피드로만 만드는 게 절대 아니다. 안타는 기술로 치는 거다. 시계의 장인(匠人)들이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져 시계를 못 만드나. 저마다 나이를 극복하는 노하우가 있는 거다. 그런 말엔 별로 동의할 수 없다.

 

 

 

지난해 당신과 만났을 때 “이제는 팬을 넘어 세대를 위해서라도 계속 야구를 하고 싶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바로 당신과 같은 40대 중년을 두고 하는 말이었는데.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실력보다 나이로 그 사람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남아있다. 언제부터인가 나이로 평가받는 게 참 부담스러웠다. 그런 까닭인지 40살이 넘어서도 잘할 수 있다는 걸 실력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 또래인 40대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지만, 그게 어디 나 혼자서 될 일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은퇴의 기준을 듣고 싶다.

 

(한참 생각하다가) ‘팀이 나를 필요로 하느냐, 안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언젠가 팀이 날 필요로 하겠지’하는 자세로 버티고 있으면 이건 진짜 팀에 짐만 될 뿐이다. 팀에서 선수를 짐으로 생각할 때 선수는 미련없이 팀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

 

 


양준혁의 꿈 "감독이 되면 유쾌한 야구를 하고 싶다."

 

# 양준혁이 은퇴 후 과연 삼성 사령탑을 차지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양준혁은 야구 천재 중 한 명이었다. 대다수 스타감독이 현역시절 뛰어난 성적을 보여주지 못했던 점을 상기할 때 지도자로서 양준혁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도자가 되려면 팀을 정확히 분석하고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코치생활부터 차근차근 지도자 수업을 받은 비스타 선수 출신 감독들의 성공 확률이 높은 것이다.

 

결국, 양준혁이 먼 훗날 삼성의 사령탑을 맡으려면 그 스스로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키워야 한다.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해서 감독이 될 순 없는 일이다. 많은 팬은 양준혁의 앞으로의 길을 주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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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진로에 대해 많은 분이 궁금해한다. 일단은 지도자의 길을 걸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되지 않겠나. 일단 내가 삼성 코치가 되면 얘들은 죽은 거다(웃음).

 

 

 

어떤 방법으로?

 

하루 스윙을 1천 개 이상씩 시키든 뭘 하든 방법을 찾을 거다. 방법은 분명히 있다. 홍성흔을 봐라. 지금 ‘펄펄’ 날지만, 그 친구도 사람이다. 누구든 방법을 찾고, 노력하면 인간 이상의 능력을 펼칠 수 있다. 일단 시작하면 사람은 뭐든 하게 돼 있다. 그걸 안 해서 문제지.

 

 

 

‘하면 된다’라는 새마을 정신이 떠오른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가장 어리석은 야구선수는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선수’다. 타격은 꾸준함이 생명이다. 하다가 안 될 때는 데이터를 수시로 보면서 자신을 연구해야 한다. 내가 의사라고 치자. 몸이 안 좋을 때 무턱대고 치료하는 거 봤나?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 그에 맞는 방법으로 치료할 때 병이 고쳐지는 거다. ‘하면 된다’는 생각 속에 어떻게 할지를 연구하는 게 최상의 방법이다.

 

 

 

만약 타격 지도자가 된다면 어떤 방식으로 지도하고 싶나.

 

단기간에 타율을 올리는 건 ‘요령’이고, 진정한 선수로 키우는 것은 ‘정성’이다. 야구는 미세한 감각을 중요시하는 스포츠다. 배팅할 때마다 순간의 느낌이란 게 있다. 그 느낌을 선수와 코치가 서로 이야기하면서 고민을 해결해야 한다. 단순히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해봐!’가 아니라 ‘이러 이런 방법이 있는데 한번 해보고 네 느낌을 이야기해봐라. 그래서 네게 맞는 방법을 찾으면 그걸로 밀고 나가라’하는 식으로 지도하고 싶다.

 

 

 

현역생활 동안 생각나는 타격 지도자가 있나.

 

(한마디로) 나는 없다. 난 항상 스스로 고민하면서 길을 찾았다.

 

 

 

혼자 길을 찾을 수밖에 없던 이유라도.

 

내 윗세대 지도자들은 어쩌면 틀에 박힌 세대였는지 모른다. 과거 내 타격폼을 가리켜 “개폼이다.” “저렇게 치는 게 무슨 선수냐”고 혹평하는 지도자가 많았다. 되레 미국이나 일본 타격지도자들이 엄지손가락을 추어올리며 “당신 타격폼이 교과서다”라고 말했다. 나는 내 길이 있는데, 그 길을 억지로 자신의 틀에 꿰맞추려던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부득이 나 혼자 외로운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1993년 삼성 입단 후 수많은 감독과 함께했다. 당신도 먼 훗날 감독이 될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감독이 있다면 누굴까.

 

김응룡 사장님과 김성근 감독님이다. 김 사장님이 해태(KIA의 전신) 감독이시던 1999년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됐다. 당시 김 사장님이 ‘딱’ 한마디만 하셨다.

?

“1년만 쓰고 다른 팀으로 보내주겠다”였다. 결국, 약속을 지키셨다. 다음 해 LG 유니폼을 입었으니까. 2001시즌이 끝나고 FA로 풀려 오갈 데가 없을 때도 김 사장님이 날 삼성으로 불러주셨다. 정말 어려웠을 때마다 도와주신 분이다.

 

 

 

음. 비슷한 맥락인데. 지금도 항상 잊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가 들려주신 말씀인데 ‘충직한 개는 주인에게 한번 충성을 맹세하면 물지 않는다. 그러나 더 충직한 개는 주인을 향해 짖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누가 아닌가. 남자는 누군가 자신을 알아줄 때 존재 가치를 느낀다. 내겐 김 사장님이 그런 존재다. (물한잔을 마신 뒤) 김성근 감독님은 내게 ‘공 한 개도 허투루 보내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을 가르쳐준 분이다.

 

 

 

김 감독과는 언제 함께 뛰었나.

 

2001년일 거다. 그때 LG에서 1년 정도 함께 있었다.

 

 

 

처음엔 둘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던 걸로 안다.

 

(옛 생각을 떠올리며) 그거 아나. 한번은 내가 구단 버스를 타지 못하고 숙소까지 뛰어온 적이 있다.

 

 

 

그때도 대선수였던 당신이?

 

김 감독님이 “너 인마, 버스 타지 말고 숙소까지 뛰어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라운드에서의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때 속으로 ‘뭐, 저런 양반이 다 있나’싶었다(웃음).

 

 

 

이런.

 

하지만, 오래지 않아 감독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미워서 그러신 게 아니라 대선수가 됐든 후보선수가 됐든 야구를 대하는 자세가 잘못되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벌을 내리는 분이란 걸 알게 된 거다. 야구를 바라보는 깊이를 봤을 때 김 감독은 확실히 일반 사람들하고 다른 분이셨다.

 

 

 

하지만, 그런 김 감독의 야구를 비난하는 이들이 지금도 많다.

 

SK 야구를 보자. 개인적으로 SK 야구는 모든 면에서 앞서가는 야구라고 본다. 특히나 김 감독님과 선수들의 정신자세를 보면 배울 게 정말 많다. 10대 0이든 0대 10이든 SK 선수들은 한순간도 흐지부지하는 법이 없다. 어떤 분들은 “SK는 9회 10대 0에서도 투수를 바꾼다”라고 뭐라 하시는데 난 충분히 김 감독님이 이해가 된다. 왜냐? 김 감독님의 스타일과 지향하는 야구를 알기 때문이다.

 

 

 

김 감독이 지향하는 야구를 안다라, 그게 뭔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야구다. 팬들에게 끝까지 온 힘을 다하는 야구를 보여주는 거다. 그게 진정한 프로 아닐까. 점수 차가 크게 벌어졌다고 대충 야구하면 그걸 본 관중이 다시 야구장을 찾겠나. 결국, SK 야구는 관점의 차이라고 본다.

 

 

 

당신이 차후 지도자가 되면 같은 야구를 지향할 참인가.

 

다른 건 몰라도 ‘10대 0’이 되도 공 하나하나에 혼을 싣는 야구를 하고 싶다. 야구는 이닝이 최종 마무리돼야 결과를 안다. 아무리 점수 차가 커도 실책이 나오는 등 언제든 전세가 뒤집힐 수 있다. 만에 하나라도 뒤집힐 확률이 있다면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해야 한다고 본다.

 

 


굿바이! '푸른피의 전설' 양준혁

 

# 양준혁은 시즌 중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선언과 함께 1군에서 말소됐다. 한국야구위원회(KBO)규약에는 ‘시즌 중 은퇴 시 잔여연봉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삼성은 양준혁의 잔여연봉을 모두 지급할 방침이다.

 

“양준혁이라면 그런 고민을 할 필요도, 해서도 안 되는 선수”라는 게 삼성의 일관된 입장이다. 과거 삼성은 은퇴 선수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줬던 팀이다. 은퇴 선수치고 “두 번 다시 대구로는 눈도 돌리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은 선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김재하 부사장(단장)이 프런트의 중심이 된 뒤 과거의 반목과 아쉬움은 사라졌다. 김재걸, 김한수(이상 삼성 코치)는 화려한 은퇴식과 함께 지금도 삼성맨으로 활동 중이다. 삼성은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은퇴식을 준비 중이다. 당연히 주인공은 양준혁이다.

 


 

올 시즌 우승 후보 가운데 삼성을 꼽는 이들도 많다. 확실히 팀 색깔이 지난 시즌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올 시즌 우리 팀은 상당히 강해졌다. 김상수, 이영욱, 오정복 같은 신인급 선수들과 조동찬, 조영훈 등 중고참 선수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특히나 이들 선수가 대개 발이 빠르다. 이제는 SK나 두산에 견줄 만큼 우리 팀도 기동력이 생겼다. 선 감독님도 그런 점에 주목하시는 것 같고.

 

 

 

선 감독의 선수기용에 대해 아쉬운 점은 없었나.

 

선수기용은 감독의 고유권한이다. 후배들을 선호하시는 것 같지만, 거기에 대해 토를 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데로 팀이 잘 운영되도록 도움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 어떻게 보나.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지금 투수진이 안정된 상태고, 타선도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팀 색깔 자체가 확실히 바뀌었다. 여기다 수비까지 안정되지 않았나. 김성근 감독님이 우리 팀을 SK의 강력한 라이벌로 꼽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 같다. 물론, 많은 후배가 큰 경기 경험이 없어 그게 단점이지만, 젊으면 젊은 대로 패기가 있으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진)갑용이가 워낙 후배들을 잘 리드해 그 점도 안심이 된다.

 

 


 

어느 삼성 관계자가 그러더라. “양준혁이 결혼해 가족이 있으면 머리도 식히는 차원에서 외국 연수도 다녀올 텐데, 나이 드신 부모님만 계셔 본인도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다”고 말이다. 지금껏 당신과 정말 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결혼 이야기는 물은 바가 없다. 하지만, 오늘은 작심하고 묻고 싶다. 진작 결혼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나.

 

(헛기침을 하며) 허허. 어디 결혼이 내 마음대로 되나. 안 되면 안 되는 데로 살아야지(웃음).

 

 

 

결혼할 기회도 더러 있지 않았나.

 

왜 없었겠나. 하지만, 인연이 안 되고 때가 맞지 않아 결실을 보지 못했던 것뿐이다. 야구에만 집중한 까닭도 있고. 이제는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참이다.

 

 

 

잦은 부상과 나이 때문에 많은 야구선수가 약물의 유혹에 빠지곤 한다. 당신도 그런 유혹을 한두 번은 받았을 듯싶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야구가 진짜 안 되거나 의욕이 없을 때, 그런 유혹에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다. 과거 금지약물, 이런 개념이 없을 때 주변에서 “몸에 좋다”며 그런 약물을 권한 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생각을 바꿨다.

 

 

 

어떻게?

 

당연히 하면 안 되는 거란 걸 어렴풋이라도 알았기 때문에 죄다 사양했다. 금지약물 개념이 확실해졌을 땐 더욱더 조심했다. 왜냐? 18년 동안 공들여 쌓아둔 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프로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삼성 유니폼을 입고 명예롭게 은퇴하자’라고 다짐했기 때문에 그런 유혹들을 물리치는 것도 내 입장에선 무척 쉬운 일이었다.

 

 

 

먼 훗날 어떤 선수로 기억되길 바라나.

 

(먼 하늘을 바라볼 뿐 말이 없다) ….

 

 

 

2천 안타의 사나이? 아니면 만세 타법의 타격 천재? 그도 아니면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

 

(천천히 입을 열며) 그저 1루까지 열심히 뛰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바람치곤 다소 평범하다.

 

평범? 글쎄. 난 지금까지 야구를 하면서 한 번도 걸어서 1루까지 간 적이 없다. 평범한 땅볼이나 짧은 안타라도 1루를 100m 달리기하듯 전력 질주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그렇게 뛰면 얼마나 우스워 보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뛴 줄 아나?

 


당신 입으로 듣고 싶다.

 

야구선수는 안타를 치면 2루까지 가려 노력하고, 2루타를 치면 3루까지 도전하고, 3루타를 치면 홈까지 파고들려는 투쟁심이 있어야 한다. 뭐든지 한 베이스 더 가려는 야구가 고급야구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야구는 심판의 ‘콜’이 있을 때까지 다음 상황은 아무도 모르는 거다.

 

짧은 직선 안타를 쳤는데 그게 실책이 돼 2루까지 진루하고, 평범한 내야땅볼을 내야수가 갑자기 팔이 아파 송구를 제대로 못 해 1루까지 출루할 수 있는 게 야구란 말이다. 야구는 진짜 그런다. 혼자 미리 판단해? (단호한 표정으로) 천만에! 어떤 변수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온 힘을 다해야 한다. 나는 1루까지 전력 질주해 상대 내야수가 송구실책을 하게 하는 게 진정한 프로선수라고 본다.

 

 

 

그라운드가 복싱의 링처럼 느껴진다.

 

나는 경기에 뛸 때 매 순간 링 위에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15라운드까지 다 뛰고 쓰러질지언정 정말 야구장에 나가면 죽을 힘을 다해 그 경기를 위해 온 힘을 쏟아부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야구는 133경기를 치르는 대장정이다. 전체 시즌은 감독이 운영하는 거고, 선수는 다음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경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18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나.

 

(강한 어조로) 그렇게 해왔다고 자부한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온 거다. 어쩌면 하루, 하루, 하루를 정말 ‘죽기 살기’로 살아왔기 때문에 부상도 덜 했고 팬에게도 어필한 게 아닐까 싶다.

 

 

 

이제 그 무거운 짐을 벗을 때가 왔다. 은퇴 뒤 진로를 묻는 이들이 많다.

 

올 시즌까지는 1군을 따라다니며 후배들을 위해 조언자가 될 작정이다. 물론 주업은 배팅볼 투수다(웃음).

 

 

 

삼성은 ‘팀이 포스트 시즌에 오르면 엔트리에 양준혁의 이름을 올리겠다’는 방침이다.

 

구단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참 고마운 제의였다. 하지만, 한 달 가까이 쉬면 실질적으로 경기 감각이 상당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때 가서 다시 구단과 논의해야겠지만, 지금으로선 후배들한테 그것 역시 양보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한다. 내 꿈은 포스트 시즌에서 화려한 끝을 맺는 게 아니라 팀의 우승이다.

 



그렇다면 올 시즌 후는?

 

국외 연수를 다녀오고 싶다. 일본 쪽을 권유하는 분들도 있지만, 내 성향상 미국 쪽이 낫지 않나 싶다. (잠시 머뭇거리다) 정말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정말 하고 싶은 것?

 

야구장을 알아보고 있다.

 

 

 

무슨 야구장?

 

처음 하는 이야기인데…사실 유소년과 사회인 야구선수들을 위한 야구장을 지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다. 잘 아는 선배와 아버지처럼 따르는 분이 도와주고 계신다. 잘하면 두 곳에서 야구장을 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야구로부터 수많은 혜택을 받았으니 이제 야구에 빚진 은혜를 되갚을 차례지 싶다. 대한민국 야구발전에 작은 부분이라도 꼭 이바지를 하고 싶다.

 

 


 

그동안 야구 때문에…행복했나.

 

야구하면서 그간 사건·사고도 많았다. (갑자기 기자를 바라보며) 행복했느냐고? 그럼 내가 묻겠다. 나 때문에 야구팬들이 행복했을 것 같나.

 

 

 

말이 필요한가. 당신의 은퇴 소식을 들었을 때 에펠탑 하단부에 박혀있는 모든 너트들이 풀린 것처럼 허무한 감정을 느꼈다는 분들이 상당수였다.

 

그런가. 그럼 난 야구 때문에 행복했던 게 맞다. (눈시울을 붉히며) 난 정말 행복한…선수였다. 

 

 

 

 


양준혁은 과거 해태팬과 LG팬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빼놓지 않았다. 그는 "나를

 

응원해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며 "제2의 인생에서도 꼭 성공하겠다"고 다짐했

 

다(동영상=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이름 : 양준혁(梁埈赫)


생년월일 : 1969년 5월 26일


체격 : 188cm / 95kg


이력 : 대구상고-삼성-해태-LG-삼성


프로입단 : 1993년


통산성적 : 개인통산 2천131경기 출전, 타율 3할1푼6리, 2천318안타, 351홈런, 사사구 1천380개, 1천389타점, 1천299득점, 193도루


수상이력 : 1993년 신인왕, 1993년 타율왕, 1994년 타점왕, 1996년 타율왕·최다안타왕, 1998년 타율왕·최다안타왕, 2001년 타율왕1996~1998, 2003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 2001, 2006~2007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 2003 골든글러브 내야수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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