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빛이 보인다, 얼마나 다행인가

황제네로 작성일 12.01.07 12: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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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빛이 보인다,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 어느 정도 볼 수 있나.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 시각장애 3급이었고, 2009년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처음 공개할 때 5% 정도 시력이 남아 있었다. 2010년 법적 실명(失明) 판정을 받았다. 현재는 빛에 대한 느낌만 남았다. 누군가 방에 들어와 형광등을 켜면 불이 켜졌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아예 안 보이는 것에 비하면 다행이다."

―실명하기 전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장면은 뭔가.

"그림책처럼 특정 장면이 남아 있지는 않다. 우리 6살짜리 딸 지우의 눈이라든지, 아내와 친구들의 얼굴,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시절의 일상이 머리에 많이 떠오른다."

―딸의 얼굴을 기억하나.

"2006년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얼굴 전체를 볼 수 없었다. 망막색소변성증은 마치 종이를 말아서 눈에 대고 보는 것처럼 시력이 주변에서부터 점점 좁아져 마지막에는 점처럼 보이게 된다. 어렵게 초점을 맞춰 눈을 보면 눈이 보이고, 코를 보면 코만 보이는 식이다. 얼굴 전체는 조합이 잘 안 된다. 마음속으로 딸아이의 얼굴을 그려보지만, 맞는지는 알 수 없다. 보고 싶다."

―2004년에 망막색소변성증 판정을 받았지만, 활동은 계속하지 않았나.

"이 병이 처음에는 야맹증처럼 온다. 진행 속도가 더딘 사람은 평생 아주 조금씩 시력을 잃기도 한다. 나는 진행속도가 너무 빨랐다. 처음엔 주위에 알리지 않고 TV활동을 했다. 하지만 TV 카메라를 놓치는 일이 잦아지고, 자꾸 NG를 내고, 틴틴파이브 멤버들과 안무도 맞추지 못하면서 더이상 숨기는 게 힘들어졌다. 당시 한동안 틴틴 멤버들이 나 때문에 모두 손을 잡고 무대에 오르내리는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 같다.

“중도 장애인이 되면 ‘패닉→거부→분노→수용’이라는 4단계를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겪는다. 평생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지옥 같은 단계라고 하는 세 번째 단계에 3년 동안 머물러 있었다. 내 일상은 술 마시고 누워 있고, 다시 술 마시고 누워 있고, 가끔 기력 있으면 화내고 물건 집어던졌다. 살이 심하게 찌니까 몸 여기저기서 아주 안 좋은 적신호도 켜졌다. 그래서 극단적인 생각도 자주 했다.”

―어떻게 벗어났나.

“폐인처럼 살던 시절 아내가 한 번도 나를 나무란 적이 없다. 나는 그런 아내한테 고마워할 줄도 몰랐다. 그때는 나의 고통만 생각했으니까. 그 시기 아내에게 뇌종양이 찾아왔다. 그리고 종양 제거 수술 후유증으로 왼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앞으로 또 어떤 후유증이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 오라’고 했다. 무슨 말이냐 했더니, ‘곧 실명할 텐데 자기랑 있으면 누워서 아파하는 모습만 평생 기억하게 될 테니, 해외라도 나가서 아름다운 풍경, 아름다운 사람들 만나 좋은 모습 담아 두라’는 것이었다. 사랑은 정말 마음이 아픈 것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금만 마음이 아프다 싶으면 헤어진다. 그러니 평생 사랑을 못하는 것 아닐까. 나는 아내에게서 큰 사랑을 받았다.”

―결혼 직후 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재기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결혼하고 100일쯤 지나 내 눈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았다. 아직 아이도 없을 때여서 나는 ‘이혼하겠구나’ 생각했다. 아내가 출근하고 나면, 빈집에 남아 ‘(아내가) 오늘은 이혼하자고 말하겠지’ 혼자 되뇐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사랑을 아내한테 줘본 적이 없는데….”

―아내의 권유대로 여행은 떠났나.

“아니, 어떻게 떠나나. 하지만 떠난 거나 다름없었다. 비록 아픈 모습이긴 했지만 그렇게 이야기해주는 아내의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재기하기까지 다른 계기는 없었나.

“천안에 산다는 한 40대 남성이 자기 눈을 나에게 기증하겠다고 연락해온 적이 있다. 그분은 근육병 환자였다. 사지를 못 쓰고, 갖고 있는 것은 눈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 듣고 울었다. ‘저는 받지 못합니다. 첫째 아직 안구 이식은 현대과학으로 불가능합니다. 둘째 저는 이미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저한테 세상을 보는 눈을 주셨습니다’ 이런 말을 서로 나눴던 것 같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하나를 잃고 나머지 아홉 가지를 가진 사람인데, 그분은 아홉 가지가 없고 하나만 있는 사람이다. 요즘 세상은 90원 가진 사람이 100원을 만들려고 10원 가진 사람의 돈을 탐내는 세상이지 않나. 그런데 나는 10원밖에 없는 사람이 90원 가진 나보고 100원 만들라고 도와주는 상황이었으니…. 그 일을 겪고 난 후 나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갔다.”

―뭐가 다른 세상인가.

“사람들은 나더러 ‘실명 이후 표정이 더 밝아졌다, 더 멋있어졌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나는 사람들과 같은 세상에 살지만 동시에 또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내가 사는 세상을 다른 사람들은 못 산다. 그러니 표정이 밝을 수밖에 없다. 나에게 용기를 주신 모든 분에게 보답하고 싶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운동을 시작했고, 20㎏을 감량했다. 내 가치관은 바뀌었다. 영화 ‘록키’에 보면 ‘이기느냐 지느냐, 내가 상대방을 얼마나 때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많이 맞더라도 얼마나 용기 있게 링 위에서 버텨내느냐가 중요하다’는 대사가 나온다. 성공이 아니라 멋지게 사는 게 중요하다. 나는 딸에게 멋진 아빠가 되고 싶다.”

시각을 잃으니, 마음이 보이더라

이동우가 주연하는 연극 ‘오픈 유어 아이즈’는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게 된 한 시각장애인이 다른 사람이 갖고 있던 물건이나 신체에 손을 대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이코 메트리’ 능력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눈이 보일 때는 몰랐던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무대 위에서 주인공은 “내가 도대체 왜, 저는 다시 보고 싶어요, 아직 보고 싶은 게 많아요”라고 신(神) 앞에서 절규하거나, “앞이 안 보이는 게 어떤 느낌인 줄 알아? 평생 장애인으로 사는 게 어떤 건 줄 알아?”라며 공격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주인공의 모습은 내내 이동우의 모습과 겹쳐졌다.

―연극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뭘 할까, 하모니카를 배워볼까, 구슬을 꿰어볼까, 고민이 많았다. 나는 계원예고 연극과를 나와 서울예대에 진학했다. 10대부터 연극 무대에 대한 동경을 안고 살았다. 개그맨 생활을 할 때도 그랬다. 처음 데뷔했을 때는 돈에 묻혀 연극과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연극을 할 수 있겠다 싶더라. 혼자 생각을 많이 했다.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되고 행동은 현실이 됐다. 내가 그런 말 하고 다니는 것이 연극계 사람들한테도 흘러들었던 것 같다. 대학로의 젊은 연출가가 마침 시각장애인의 삶을 다룬 연극을 한 편 해보고 싶었는데,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와서 시작됐다.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사장도 ‘하고 싶으면 한 번 해 보라’고 기회를 줬다.”

―주인공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게 뭔지 모르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점, 중도 실명을 겪었다는 점,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는 점, 그리고 어쨌거나 행복해졌다는 점이 닮았다.”

―사이코 메트리 능력은 실제로 시각장애와 관련이 있나.

“해외에서 시각장애인에게 일부 의학적으로 보고된 사례가 있다고 한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범죄자 검거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고 들었다.”

―극 중 주인공은 시각을 잃는 대신 다른 감각이 생긴 것인데, 본인도 혹시 그런 체험을 해봤나.

“시각을 잃으면 소리에 굉장히 민감해진다. 그것이 소머즈처럼 초자연적으로 잘 들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리가 가진 느낌이 이전과 달라진다. 지난 가을 가족들과 서울 근교로 1박2일 나들이를 갔다. 아침에 일어나 열어둔 창틈으로 새소리가 들렸는데 한꺼번에 6가지 종류의 새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확인해보니 실제로 6종류의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눈을 뜨고 살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이다. 요즘 연주 음악 듣는 것이 재미있다. 클래식도 좋다. 소리 하나하나가 다 들린다.”

―감각이 달라지는 것인가.

“약간 섬뜩할 수 있지만, 우리가 눈을 뜨고 대화할 때 눈으로 보는 것이 많기 때문에 현혹되는 것도 많다. 사기꾼이 남을 속일 때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좋은 시계를 차서 신뢰를 주고, 머리도 가지런하게 빗어넘긴다. 화려한 말솜씨, 눈초리, 시선처리, 손동작, 옷매무새 이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연출되어서 우리 눈은 현혹된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은 보고 싶어도 못 본다. 말소리에 100% 귀 기울이고 집중해야 한다. 이 사람이 진실을 이야기하는지 거짓을 이야기하는지 파악이 빠르다. 한숨 소리만 듣고도 이 사람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지겨운 것인지, 기쁜 것인지 알아차린다. 시각장애인에게 사기 치는 것은 좀 힘들 것이다.”

―마음을 읽을 수도 있겠다.

“소리에 집중하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 예의도 갖춰야 하고 부스럭거리는 소리, 한숨소리, 하품하는 소리까지도 어떤 의미일까, 나에게 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일까 집중해서 들어야 된다. 5분만 집중해서 듣다 보면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알 것 같을 때가 많다.”

―실명을 겪으면서 인생을 보는 관점에 변화가 생겼나.

“어떤 사람들은 삶이 아름답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추악하다고 하는데 나는 직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경험한 삶은 위험천만한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은 계단에서 조금만 부주의해도 위험하지 않나. 하지만 위험하기 때문에 사랑해야 하고, 운동해야 하고, 설계해야 하고, 항상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겸손해야 한다.”

―삶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인가.

“아니다.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긍정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부정적인 면도 많기 때문이다.”

―연극에서 행복을 많이 이야기했는데, 과거와 지금 행복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나.

“예전에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행복을 보지 못한 채 허공에 대고 손을 허우적댔던 것 같다. 지금은 내 주위의 행복이 보인다. 다만 어떻게 항상 행복하겠나. 여전히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고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숙제가 생기고 그런 것을 풀어가는 것이 내 하루하루다.”

꿈은 사라지고…나를 서글프게 하는 것들

실명 이후 걸려서 넘어지고 부딪히는 것은 그의 일상이 됐다. 인터뷰 도중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면서도 그는 누군가 반쯤 열어둔 휴게실 문에 부딪혔다. 몸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사라질 새가 없다. 가끔씩 상처가 심하게 날 때 ‘언제까지 이렇게 넘어지고 부딪치고 다쳐야 하나’하는 생각에 서글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기도 했다.

―만약 지금 당신에게 한 시간만 더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지금 당장보다 나중에 한 시간 달라고 하고 싶다. 그러면 우리 딸 웨딩드레스 입고 시집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지금 당장은 안 봐도 된다. 얼마 전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아, 우리 딸내미 나중에 시집갈 때 내가 그것도 못 보는 거야’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다른 건 다 못 봐도 상관없는데 그건 꼭 보고 싶다.”

―습관 때문에 힘든 경우는 없나. 옛날 앞이 보일 때의 습관들 말이다. 사고로 신체 일부를 잃은 사람들이 겪는 ‘환상통’처럼 남아 있는 감각의 기억 같은 것이 있나. 꿈에선 주로 무엇을 보나.

“시각장애인은 꿈을 꾸지 않는다. 내 경우 실명 이후 점점 꿈 횟수가 줄어들더니 나중엔 아예 꾸지 않게 되더라. 평소에 시각적인 자극이 없으니 그 감각에 대한 기억 자체가 옅어지는 것 같다. 어쩌다 한 번 꿈을 꾸면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꿈속에서라도 조금 보니까. 그런데 나중에는 그것마저 없어진다. 처음 듣는 이야긴가?”

―가끔씩 서글퍼지는 때는.

“방송국에서 과거 친하게 지냈던 연예인이 앞에서 오면 매니저가 살짝 ‘앞에 누가 온다’고 이야기를 해준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가 못 본다는 것을 아니까 그냥 지나쳐 버리면 굉장히 서운하다. 내가 부담스럽나? 더 이상 인간관계 유지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이 들면 서글퍼진다.”

―원래 ‘마당발’ 계열 아닌가.

“섭섭한 사람도 생겼지만, 실명하고서 가까워진 사람들도 많다. 한젬마씨 같은 경우 샤갈 전에 나를 초대해 일일이 그림을 읽어준 적이 있는데, 아마 눈을 뜨고 있을 때도 내가 샤갈의 그림을 그렇게 자세히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방송인 정재환씨도 정말 고마운 분이다. 많은 분의 도움과 성원을 받고 산다.”

―운동은 꾸준히 하나.

“나는 하나를 잃어버렸다. 남은 것들을 잘 지키기 위해 운동을 빼놓을 수 없다.”

―2010년에 ‘5%의 기적’이라는 책도 출간했다.

“집에서 방송 준비하면서 짬짬이 글을 쓴다. 그것은 기록이 아니라 기억이다. 그냥 두서없이 쓴다. 점심 때쯤 나와서 오후에 방송하고, 끝나면 대학로에 가서 연극 준비하고, 강연도 다닌다.”

―일상에 큰 변화는 없나.

“예전처럼 살려고 노력한다. 동료 배우들과 형제처럼 지내고, 소주도 한잔씩 한다. 나는 바깥으로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장애인들은 행동의 폭이 좁아지면서 성격이 날카로워진다. 몸이 불편하니까. 그리고 날카로운 성격 때문에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면 안 되는데… 남들 생각해서가 아니라 본인을 위해서라도 이겨내야 한다. 자꾸 짜증 내면 사람들이 떠나간다. 그래서 좀 짜증이 나고 화가 나도 참아야 하는데 막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한다.”

―다른 시각장애인용 지팡이와 달리 당신의 지팡이에는 작은 벨이 달렸다.

“내가 달았다. 이게 없으면 지팡이로 다른 사람을 건드릴 때마다 ‘죄송합니다’라고 해야 한다. 자꾸 ‘죄송하다’는 말을 하면 위축되고 움츠러든다. 그래서 나는 사람 많은 곳에서 앞사람을 쳐도 ‘실례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자전거포에 가서 이 벨을 달았다. 사람 많은 곳에 가면 벨을 울리면서 다닌다.”

―안경을 벗고 눈을 보여줄 수 있나.

“집 밖에서는 벗지 않는다. 안구가 함몰되지는 않았는데 시력이 없어진 뒤 눈에 초점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대화할 때 상대방이 어색해한다.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쓴다.”

―앞으로의 계획은.

“지금 하고 있는 연극 정말 크게 사랑받고 있다. 시류에 타협하지 않고 말초신경을 자극해 감동을 주려 하지 않고 우리가 가진 진정성을 전달하기 때문에 반응이 좋다. 이것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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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잃으면 최소한 반은 얻나보다;;;

 

진짜 주옥같은 문답이 아닐까 싶어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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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각장애를 가지게된 과거 틴틴파이브 맴버 '이동우'씨 인터뷰 내용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1/06/2012010601599.html

조선일보가 좋은 일했네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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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용 투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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