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사실여부와 구원이야기ㅋ

버닝중 작성일 14.04.05 13:3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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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이야기가 많은데 두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일단은 성경의 사실여부, 그리고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천국. 그러니까 구원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1.구약의 사실여부.


사실이 얼만큼의 비율로 섞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상당수 사실이 아닙니다. 끝

그럼 구라냐? 구라는 또 아니에요. 뭔 말인고 하니, 이게 애초에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적 사실을

나열한 역사책이 아니라는 말이죠.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책이에요.

바른 생활책에 영희와 철수가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적고, 친구와 싸우지 말고 싸우면 화해하세요.란 내용을 보고

영희와 철수는 가상의 인물이다. 이 도덕책은 허구에 불과하다. 라고 이야기 하기 시작하면 좀 답답해 지는 거죠


이걸 좀 더 풀어보면 구약성서의 배경에 등장하는 고대 유대인들에게 역사란

자신들의 종교적 진리를 전달하는 걸 역사라고 하지, 사실의 나열을 역사라고 하지 않았어요.

우리와 개념이 달랐던 거죠. 그러니 역사책에 주변에서 나오는 설화나, 사실을 왜곡한 것도 성경에 기록합니다.

중요한건 사실전달이 아니라 어떤 '메세지'를 담고자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 구약을 볼 때는 아 이런일이 있었구나, 사람을 학살하다니 이 살인마! 라고 보는게 아니라

뭔 말을 할려고 이런 이야기를 써놨지? 를 보면 되는겁니다. 햇님 달님을 보고 권선징악을 캐치했다면 거기에서

끝내면 되는 거죠. 굳히 수수의 붉은 색에서 호랑이의 dna를 추출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에요.


예를 들면 창세기 같은 경우, 이거 주변 근동의 설화구조 따온겁니다.

성경의 맨 앞에 있지만 실제로 작성된 순서로는 한참 뒤집니다. 기원전 550년 경에 제사장집단에 의해 작성된 걸로 추측합니다.

바빌론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바빌론은 승리했지만 큰 민족인던 이스라엘의 반란을 두려워해서 많은 이스라엘인들을

바빌론으로 유배시킵니다. 당시 나라간 전쟁은 신들의 대리전이라는 개 풀뜯어먹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은 종교적 믿음이 흔들리고, 자신들이 창조주라고 부르는 야훼는 어떤 신이고 우리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주변의 이야기 구조를 따와서 알려주려고 하던게 창세기에요.


따라서 저자조차 세상이 일주일 안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란 겁니다.

그냥 이야기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신은 세상의 창조주고, 그래서 우리의 근원은 하느님께 있어 + 종교적 가르침들'입니다.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입력창 크기 조절기 시작하면 피차 피곤해지죠.


따라서 종교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얘들이 뭘이야기 하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써놨을까?

라는게 구약을 보는 포인트가 되야하는 겁니다.



2. 천국?


신약에서 천국이란 말이 나오는데, 보통 마태오 복음에서 나옵니다.

비슷한 내용을 다룬 다른 책에선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죠. 히브리 원어로는 '말쿠트 샤마임'이라고 하는데

말쿠트는 '하느님의' 라는 형용사이고 샤마임은 나라, 통치, 다스림, 왕권이 유효한 영역 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한국말 번역은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하늘 나라라고 표현하는데요

마태오는 유대인이었어요. 유대인들은 신의 이름을 직접 표현하는 것을 매우 꺼려했습니다. 불경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야훼라는 글자도 모음이 없이 자음만 있습니다. 발음하는게 불가능하죠. 야훼라는 말은 자음으로만 이루어진 단어에

억지로 있지 않은 모음을 붙여서 발음하는거에요. 이런 유대인에게 하느님 나라 라는 말을 쓰긴 힘들었고 대신

하늘나라라는 말을 만들어 씁니다.


그런데 이게 후대에 오면서 천국으로 굳어져서, 대부분의 문화권에 퍼져있던 착한사람이 가는 사후세계와

연결되면서 마치 죽어서 가는 것처럼 묘사되고, 이는 중세 교회를 거치면서 더 확고해 지기에 이릅니다.


하지만사실 하느님나라라는 개념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에요.

믿음의 대가로 죽어서 가는 보상의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과 가치관적인 차원의 개념이에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시 '말쿠트 샤마임'으로 돌아와 봅시다.


고대 근동에서 성군의 조건은 '버림받은 백성들에게 얼마나 따뜻한 정치를 펼쳤는가'가 기준이 됩니다.

오늘날 말로 하면 소외계층에게 따뜻한 정책을 시행하는게 성군의 조건이라는 거죠.

말쿠트 샤마임은 성군이 사람이 아니라 신의 레벨에서의 선정입니다. 따라서 이 하느님 나라의 통치 방식은

소외받은 이들에 대한 사랑이죠. 예수님이 전생에 걸쳐 비유를 통해 가르친게 바로 이겁니다.


'소외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가 네가 가서 이웃이 되어 주고,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네 삶까지고 함께 나누는 이웃이 되어 주어라.'

만약에 자신이 이대로 살고 있다면 하느님 나라의 통치 방식대로, 하느님 나라의 통치 안에서 있는 것이죠.

즉, 하느님 나라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선 "하느님 나라가 여러분 가까히에 와 있습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얼마나 가깝습니까. 본인이 실행만 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여기에 필요한게 있어요. 하느님 나라의 속성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중에 진주상인의 비유가 있는데요 내용은 세단계로 이루어 집니다.


1.진주를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과 높은 가치게 크게 놀랍니다.

2.진주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정리하여 팔아치웁니다.

3.세인들의 비웃음과 뒤따르는 위협을 무릅쓰고 그것들을 손에 넣는다.


;이것들을 보면 완성될 하느님 나라라는 가치를 알아보고 깨달았을 때(1), 이 놀라운 발견 앞에 취해야 하는 태도는

과거의 생활방식을 포기하는 것이죠(2). 그리고 새롭게 찾아낸 하느님 나라의 가치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3)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해야되는 것은 이웃사랑이 가지는 가치와 자신에게 주는 행복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실 기독교는 사회유지 프레임 이상의 역활을 하지 못합니다. 일단은 남을 사랑이라는 가치에 동의할 수 있어야

구원의 시작이겠죠. 그리고 그 가치에 동의했다면 이전의 하느님 나라와 어긋나는 생활 태도는 포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태도로 살아갔을 때 개인에게는 고통이 고통이 아니게 되고, 사람과 죽음은 크게 의미가 없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행복함과 평안함(구원)을 얻게 되는 게 기독교의 구원관입니다.


물론,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는게 아니에요. 인정하지만 역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습니다.

묵시록에서 "주님 빨리 오십시오" "오냐 곧 가마. 조금만 기다려라"라는 식으로 완전한 구원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끝 맺을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현재, 현실을 버리고 사후에 집착하는 태도를 지양시키기 위해 이렇게 끝맺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보통 천국에 대한 선입견과, 기독교의 구원관을, 테레사 수녀를 예로 해서 비교해 보죠.

 

 천국

하느님나라 

 구원이란 무엇인가?

'믿음'가진 신자가 죽어서 가는 보상의 장소 

 하느님 나라를 삶으로 살아갈 때 얻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

천국/하느님 나라란 무엇인가? 

 내세적이고 장소적인 장소적 개념

 개인의 행위와 깨달음(가치관의 수용)이 필요한 

차원적 개념

 어떻게 하면 갈 수/살 수 있는가?

삼위일체나 이런 교리를 믿고, 십계명을 잘지킨다. 

 진주상인의 비유처럼

가치관을 받아들이고(깨닫고)실행했을 때.

 그 때의 보상은?

 테레사 수녀는 믿음을 가지고 가르침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으니

그 보상으로 구원받아

천국에 갈 것이다.

 평생을 수녀복과 성경을 전재산으로, 종교조차 다른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살았는데, 외부에서 보기엔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산 것 처럼 보이나 하느님 나라를 깨닫고

삶으로 살아낸 것을 보아

아마 보인은 물질적인 것으로 보상할 수 없는

참 평화와 행복안에서 살았고

내세에도 그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관을 이렇게 볼 때, 사실 타 종교의 구원관도 인정이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게 행위적인 개념이라면, 하느님의 통치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하느님 나라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거죠.

산골자기에 살면서 지금 왕이 누군지 몰라도 그 나라에 살고 있다면 그 나라 백성인 것처럼요.


그래서 천주교에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교회밖의 구원에 대해 약간은 인정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적 포용주의'(Christocentric Inclusivism)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는 절대적이며 보다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다른 종교들은 덜 완전하거나

부분적으로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인데요.


천주교 역시 여전히 기독교 특유의 배타성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습니다만, 약간의 인정은 두고 있습니다.

조금 덜 공격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우리 방법이 구원받는 완전환 진리라고 믿는데, 

너네 거는 우리가 확신은 못하겠다. 그런데 뭐 방향성만 잘 맞으면 구원받을 수도 있지'라는 입장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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