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의 꿈에 갑자기 주호민 씨가 등장했습니다.
아무래도 그간 주호민 씨가 출연한 각종 방송을 재미있게 보아왔던 터라, 그에 관계된 최근의 이슈를 쭉 좇아오며 사건에 대해 고민해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처럼 화제 전환이 빠른 시대엔 이미 이것도 철 지난 뉴스가 되어버렸을 지도 모르겠네요.
꿈에서 주호민 씨는 저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과 함께 작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감옥이긴 했지만 사람들 사이는 어떤 학원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각자 자기 소개를 하고 인사를 나누는 분위기였습니다. 몇몇 사람이 자기 소개를 했고 주호민 씨는 늘 그러던 대로 센스있는 위트를 섞어 주변을 웃음짓게 만들더군요.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스스로에게 처지에 조금은 냉소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주변을 배려하고 자기 역할에 책임을 다하는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는 듯한 이야기를 한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 태도는 평소에 방송을 보며 느꼈던 주호민 씨에 대한 저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고, 그런 사람이 감옥에 있었다는 것은 최근의 사건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꿈이란 참 신기하네요.
최근에 주호민 씨에게 일어났던 일은 저에게 참 안타까운 마음을 크게 납깁니다. 자폐아인 주호민 씨의 아들도, 그런 아이를 사랑으로 키워야만 하는 주호민 씨 부부도, 그리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특수아동을 가르치는 특수교사의 상황도 모두가 안타깝습니다. 스승과 제자, 학부모와 선생으로 만난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오해가 쌓이고, 서로의 삶을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안타깝습니다. 개별적인 사람으로 볼 때, 이들 중 누구도 나쁜 사람은 없었던 셈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중 한 사람인 김동인의 소설 중에서 <송동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송동이는 한 집안안의 3대를 주인으로 모셔온 충직한 하인이었습니다. 첫번째 주인은 고아가 된 어린 송동이를 데려와 그를 자식처럼 대해줬습니다. 첫번째 주인의 아들이자 송동이의 두 번째 주인이 된 2대는 송동이와 함께 자라 그를 벗처럼 대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2대 주인은 병으로 일찍 죽어버리고, 3대째 주인은 아직 장난감을 좋아하는 어린 아이였고, 집안의 어른은 1대의 부인과 2대의 부인만이 남았습니다.
송동이는 2대의 죽음으로 어두워진 집안 분위기를 밝게 하기 위해 노력했고, 3대 주인을 위해 장난감도 사주며 지극 정성으로 그들을 모셨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집안에 2인조 강도가 들었습니다. 다행히 바깥의 수상한 기척을 느낀 송동이가 빠르게 대처해서 강도를 쫓아냈고, 그 중 한명은 사로잡았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뺨 몇 대 때리고 쫓아냈었겠지만 그가 자라는 동안 시대가 많이 변했고, 경찰서라는 것이 생겼기 때문에 송동이는 경찰을 불러 강도를 감방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송동이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어두웠던 집안의 분위기가 살아났고 송동이의 기분은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송동이가 집을 비운 사이 도망갔던 강도 중 한 사람이 동료를 경찰서에 넘긴 일에 대한 보복으로 집안에 들어와 아직 어린 아이인 3대째 주인을 죽여버립니다. 송동이가 돌아왔을 때 모든 일은 끝나버렸고, 집안의 희망이었던 3대 독자를 잃은 주인 할머니와 아씨는 오히려 송동이를 원망합니다. 그때 잡은 강도를 뺨이나 몇 대 치고 놓아줄 것이지, 왜 경찰에 넘겨서 일을 이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었냐는 것입니다. 송동이는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을 원수 취급하는 집안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 하여 결국 평생을 모셔오던 집안을 떠나게 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강도가 아닌 송동이를 원망하는 집안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근대적 제도를 들여오는 십수년 동안 세상이 빠르게 변했고, 강도를 잡으면 경찰에 넘겨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과, 강도를 잡고 뺨 몇 대 때리고 보내면 된다는 과거의 인식이 공존하던 때에, 무엇이 맞고 틀리고는 그야말로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똑같은 행위가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저는 같은 사건이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일이 오늘날 더 빠르게, 더 짧은 간격으로 일어난다고 생각되고, 주호민 씨의 사건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입니다.
서이초 교사의 안타까운 일이 있기 전(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국에서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일어나는 아동학대 사건이 큰 이슈로 떠올랐던 일이 있습니다. 스스로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영유아들이 부모가 없는 사이 교사들로부터 학대를 받고, 이를 의심한 학부모가 어린이집(유치원)의 CCTV를 확보하거나, 녹음기를 들려보내 아동학대의 정황을 발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와 부모의 입장에 서서, 아동을 학대한(아마 이 시기에도 억울한 교사들이 많았으리라 짐작됩니다.) 어린이집 교사들에게 분노를 했고, 자신의 아이가 그런 상황에 처해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론의 관심은 ‘교육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아동 학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서이초 사건 이후 여론의 관심은 ‘교육장에서 일어난 일을 빌미로 삼은 학부모의 갑질’로 변했습니다. 물론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하거나, 무엇 하나가 옳은 것은 아닙니다. 한 사건을 보는 관점이 다양화되면서 편향적인 시선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을 줄여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완벽한 사람도, 완벽한 부모도, 완벽한 교사도 없습니다. 누구나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면 감정적으로 변할 수 있고 평소와 다른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주호민 부부의 행위도 그렇고, 교사의 다소 감정적인 언행도 그렇고, 그들의 이후 대처도 그렇고 모든 것이 사실 조금만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옳다고 여겨지던 일이 하루 사이에 틀린 일로 변해버리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통신이 발달하고, 그로 인해 이슈의 전파가 빠른 시기에는 정말 문자 그대로 하루아침에 하나의 사건을 보는 태도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이것을 두고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 짓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일이 주호민 부부의 잘못이냐, 교사의 잘못이냐, 혹은 누가 먼저 잘못을 했느냐, 누가 더 큰 피해를 끼쳤느냐 등등을 따지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이 안타깝고, 그들 각자는 누구도 악마화될 만큼의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습니다. 그저 각자의 역할과 시선에서 사건을 이해하려 했고 스스로를 지키려 했을 뿐입니다.
이 사건에 가해자가 있을까, 가해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감당해야 할만큼의 대가를 치르는 중인 것일까? 많은 생각이 드는 일입니다. 꼭 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홍상수의 영화 제목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가치 판단의 기준이 너무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 살고 있고, 오늘 옳다고 믿고 던진 돌이 내일은 내 죄의 증거품이 될지도 모르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느끼는 이 시대의 모순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