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래쉬

relief 작성일 09.08.22 23: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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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1965-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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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래쉬 (본명 사울 허드슨)는 서부 햄스테드, 런던, 영국에서 07월 23일, 1965년에서 백인 영국 아버지와 미국 아프리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슬래쉬의 어머니인 올라 허드슨은 데이비드 보위나 수많은 연기자들이나 음악인들을 위한 의상을 제작해주는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닐 영이나 조니 미첼 같은 유명한 음악인들을 위해 라이브 앙상블을 기여하는 예술인이었습니다.

 

슬래쉬는 스테포드 샤이어라는 도시에서 11살까지 키워졌다가, 그의 부모님과 함께 로스 앤젤레스, 켈리포니아로 이주하게됩니다. 그의 부모님들은 별거를 하였으며, 슬래쉬는 주로 그의 어머니와 함께  거주하게됩니다. 그는 “슬래쉬”라는 별명을 가족 친구인 세이무어 카셀(던컨 픽업 제조자 아닙니다 -_-;;)이라는 사람에게서 얻게 되는데, 그 이유가 “그는 언제나 급했고, 이 일하다가 다시 다른 일로 급급하게 가기 마련이었죠”

 

젋은 소년으로서, 슬래쉬는 음악학교 선생님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됩니다.

 

“레드 제플린3 앨범에서의 탄제린은 제가 처음으로 마스터 했던 곡이죠. 저는 학교에서 래스폴 기타를 가지고 있는 선생님이 계셨고 그분은 언제나 크림이나 래드 제플린 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연주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선생님이 연주하는걸 들었을 때 저는 이렇게 말했죠

“그게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에요”

 

그의 친구인 스티븐 애들러와 함께 밴드를 결성하는 것을 결심했을때, 슬래쉬는 배이스 기타를 연주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스티븐이 리드 기타를 하고 싶다고 선언한 데에 있었죠.  슬래쉬는 패어펙스 음악 학교에 들러서는 접수 하는곳에 가서는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베이스 선생님은 로버트 울린 이었습니다. 로버트는 그가 베이스를 배우고 싶다면 자기 스스로의 베이스가 있어야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슬래쉬는 집으로 돌아가서는 그의 할머니에게 여쭈어 보았고 그는 낡아빠진, 단일 줄인 플라맹고 기타를 받았습니다.

 

로버트가 “브라운 슈거”를 귀로 듣고 따서는 연주하는 것을 듣고는 슬래쉬는 기타가 그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후 뮤직에 집중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자퇴했읍니다.

 

롤링 스톤 메거진 기사에 보면, 그가 회상하기를:

 

“나에게 있어 큰 사건이 일어났던 것은 14살 쯤이었습니다. 저는 저보다 더 나이가 많은 여자를 사귀려고 노력했었고, 그리고 드디어 그녀가 마침내 그녀의 집으로 오는걸 허락했었죠. 우리는 놀다가, 대마를 피우고 에로 스미스의 음악을 들었어요. 그 노래는 마치 저를 존나 무거운 벽돌로 친듯한 느낌이었어요. 저는 거기 앉아서는 계속 듣고 들었죠, 그리고는 마침내 여자는 화났었구요. 저는 제가 자전거를 타고는 제 할머니 집에 돌아갈 때 나의 인생이 바뀌었다라는 것을 기억해요. 이제서야 자아를 찾은 것이었죠.

 

1983년에, 슬래쉬는 어린시절의 친구인 스티븐 애들러와 함께 로드 크루라는 밴드를 결성했습니다. 그는 신문에 베이스를 구한다고 광고를 놨었고 더프 멕케간으로부터 연락을 받습니다.

 

건즈 앤 로지스(1985-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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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즈 앤 로지스는 1985년에서 1986년 동안 술집에서 공연을 하면서 큰 활동을 했습니다.

 

그 기간은 그들이 대부분 그들의 옛날 자료(곡)들을 많이 썼기도 한 시절이었는데, “웰컴 투 더 정글이나”. “스윗 차일드 오 마인”, 그리고 “페러다이스 시티”도 포함됐습니다. 그 기간동안, 그들은 몇 개의 메이저 레코드 레이블에서 스카우드 제의가 오기도 했었으며, 그리고 게펜과 정식 계약을 맺습니다. 시작점에서부터, 그들은 절반의 예산을 옷에 썼으며, 나머지는 술과 마약에 썼습니다. 그 해에는 건즈 앤 로지스는 “세계에서 제일 위험한 밴드” 라는 꼬리표가 붙었었죠. 1988년에, 슬래쉬는 회상하기를,

 

“이상한 이유로, 건즈 앤 로지스는 논란을 위한 촉매가 되어왔었죠, 우리가 어떠한 레코드 계약을 얻기도 전에요”

 

15억 카피가 미국에 판매되고, 그들의 앨범인 “에피타이트 포 디스트럭션” 은 데뷔앨범 2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평이 나있습니다 보스턴스의 데뷔앨범 뒤로 말이죠. 1988년에 건즈 앤 로지스는 슬래쉬의 리프와 기타 솔로로 축이 된 곡인 스윗 차일드 오브 마인으로 챠트 1위로 히트를 칩니다.

 

1988년, 건즈 앤 로지스는 “g n’ r lies”를 발매합니다. 이 앨범은 비록 8개의 곡 밖에 없지만(4개는 이미 내놓은 상태였었구요), 5억 카피나 팔리게 됩니다. 4년 이후로, 건즈 앤 로지스는 “유즈 유얼 일루젼” 이라는 앨범을 내놓습니다. 이 앨범은 건즈 앤 로지스가 음억적인 방향을 바꿧다는 것을 제시해주기도 합니다. 더 예술적인 그리고 더 드라마틱한 곡을 포함합니다 “노벰버 래인” 이나 “에스트래인지드” 같은 곡들 처럼 말이죠.

 

액슬이 좀더 프로그레시브 적인 장르를 얻기 위한 욕구를 표현 했을때, 슬래쉬와 더프는 그들의 전통적인 사운드로 유지하자고 반대했습니다. 펑크/블루스기반인 하드록 밴드처럼 말이죠.

 

1991년, 밴드는 “유즈 유얼 일루젼 1” 그리고 “유즈 유얼 일루젼2” 앨범을 발매 했습니다. 1991년, 건즈 앤 로지스는 28개월간의 유즈 유어 일루젼 투어를 착수 했습니다. 그들의 새 앨범을 광고하기 위해서기도 했지만요. 투어가 거의 끝날 무렵, 슬래쉬는 귀화했으며, 미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건즈 앤 로지스 이후(1996-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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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즈 앤 로지스를 떠난 이후로, 슬래쉬는 그의 사이드-프로젝트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더 스네이크 핏으로 1998년까지 몇 번의 투어를 하고는 해채 했지만요. 10년 이후, 슬래쉬는 본인이 스스로 같이 곡을 하고 싶은 사람을 고를 만큼의 세션 음악인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음악 레코딩을, 엘리스 쿠퍼, 인세인 클라운 포세, 로니 우드, 배드 컴패니, 칩 트릭, 레이 찰스 그리고 스티비 원더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말이죠.

 

1990년, 슬래쉬는 마이클 잭슨에게서 그의 신보인, 데인져러스에 같이 일해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슬래쉬는 2개의 히트 싱글을 연주 하게되는데, “블랙 올 화이트” 그리고 “기브 인 투미”

입니다. 그는 또한 뮤직 비디호 후자 부분에 나오기도 했었구요. 몇 가지의 조건으로, 슬래쉬는 잭슨과 함께 무대위에 섰으며, “블랙 올 와이트”를 댄인져러스 세계 투어를 할 때 연주 하기도 했습니다.

 

슬래쉬와 잭슨은 1992년과 1995년 mtv 뮤직 비디오 어워드즈에 같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슬래쉬는 1995년 히스토리 앨범의 “d.s.”를 기타로 연주하기도 하고, 1997년 블러도 온 더 댄스 플로어 리믹스 앨범인 “모핀” 또한 연주했습니다. 2001년에는 슬래쉬는 마이클 잭슨 30주년 스페샬에서 잭슨과 함께 무대위에 서서는 잭슨과 함께 “블랙 올 화이트” 와 “비트 잇”을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1995년, 퀀틴 타랜티노는 슬래쉬에게 잭키 브라운이라는 영화 사운드 트랙에 몇 곡정도 기여해 줄것을 요구했습니다. 몇 개의 곡은 스네이크 핏의 곡과 같은 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영화애서도 들을 수 있구요.  

 

1996년, 슬래쉬는  마르타 산체즈와 함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사운드 트랙에 들어갈 플라밍고 영향이 있는 곡인 “옵세션-컨페션” 이라는 곡을 협력해서 만듭니다. 곡은 스무스 재즈 라디오 스테이션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요. 그 해 후로, 슬래쉬는 카보 산 루카스시, 멕시코에 있는 새미 헤이거의 클럽인 카보 와보에서 엘리스 쿠퍼와 같이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공연은 그 해에 ‘어 피스트풀 오브 앨리스’ 라는 제목으로 녹음되고 발매되었습니다.

 

1997년, 슬래쉬는 알앤비 그룹인 블랙 스트리트의 히트 싱글인 “픽스”를 락 버전으로 들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2003년 그는 페이버드 네이션스 라벨에서 발매된 야드버드의 컴밷 레코드 버드랜드에 참여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앨범에서 “오버, 언더, 사이드 웨이스, 다운”에서 리드 기타를 맡기도 했었습니다.

 

2003년 초, 슬래쉬는 또한 이라크에서 일어나는 전쟁반대시위를 위한 “피스 온 더 비취 (말 그대로 해변가에서 반대운동 하는거죠 -_-a)”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그곳에서는 에드 코왈치크를 보컬로 존 래논의 “이메진”을 공연 했습니다.

 

 

2000년, 슬래쉬는 그의 두번째 솔로 앨범을 발매하기 위해 슬래쉬스 스네이크 피트를 다시 결성하기로 했으며 앨범명은 “에인트 라이프 그랜드” 입니다. 앨범은 차트에서는 순조로웠지만습니다. 플래티넘까지 도달하고요. 더 스스로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 슬래쉬는 2000년 여름에 ac/dc와 함께 광범위한 세계 투어를 하기로 착수했습니다.

 

2002년엔 더프 멕케건과 매트 소럼과 함께 랜디 카스틸로를 위한 자선/추모 공연을 했습니다. 그들이 아직도 건즈 앤 로지스때의 공감대가 있다것을 알아채면서, 그들은 새로운 밴드를 같이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밴드는 슬래쉬, 맥케건, 그리고 소럼과 이전 벅 체리 맴버인 케이스 넬슨 그리고 조쉬 토드입니다.

 

나중에는 더프는 조쉬와 케이스가 밴드와 궁합이 잘 맞지 않는 다는 말을 하고, 리듬 기타에 데이브 쿠쉬너를 그리고, 오랜 조사끝에 스톤 템플 파일럿 싱어인 스캇 웨일랜드를 넣습니다.

 

2006년, 슬래쉬는 1970년 뭉고 제리의 히트 싱글인 “인 더 썸머 타임”을 커버한 키보디스트 데렉 쉬레니언의 솔로 앨범인 슬러드 오브 더 스네이크(빌리 아이돌도 보컬로서 참여한) 에 게스트로 참여합니다. 비디오는 또한 이 곡에서 슬래쉬, 빌리, 그리고 데렉을 보였습니다.

 

 

벨벳 리볼버와 그리고 미래 (2003-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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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 리볼버는 프로젝트 밴드 형태로서 시작하게 됩니다. 

 

슬래쉬, 더프 멕케건 그리고 매트 소럼이 새로운 리드 싱어를 찾아야 하는 모험적인 사업이었습니다. 초기에는 리듬 기타에 이지 스트래들린과 같이 일했으며, 그리고 그들은 롤링 스톤을 위한 오프닝 제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슬래쉬, 더프 그리고 맷은 공연보다는 리드 싱어를 찾길 원했고, 이 이후로 이지는 점점 참여하지를 않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전에 멕케건과 “로디드”에서 같이 일한 데이브 쿠쉬너를 리듬 기타로 정합니다. 수 개월 간, 4명은 리드 싱어로서 잠재성이 있는 데모 테입들을 듣습니다.

 

몇 개월 후, 슬래쉬와 맴버들은 거의 포기할뻔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스톤 템플 파일럿이 내부 붕괴가 됨으로서 리드 싱어인 스캇 웨일랜드에게 오디션을 볼 기회가 생깁니다. 벨벳 리볼버와 스캇이 그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을 알아보고, 스캇은 공식적으로 2003년에 벨벳 리볼버에 가입합니다.

 

벨벳 리볼버는 그 해에 여름 때에 공연을 하면서 그들의 첫 싱글이자 영화 “더 헐크” 사운드 트랙인 “셋 미 프리”를 발매합니다.

 

2004년 06월, 그들은 첫 스튜디오 앨범인 콘트라 밴드를 발매합니다. 앨범이 더블 플래티넘으로 되고 슬래쉬가 다시 주류로 되어 19개월의 투어는 계속 되었습니다.

 

투어가 끝나고 그와 그의 밴드 맴버들은 그들의 2번째 앨범 작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긴 휴식 기간을 가집니다. 2007년 07월, 벨벳 리볼버는 아슬아슬하게 갈채를 받은 “리버티드”를 내놓습니다,

 

멀티 플래티넘 데뷔작의 후속으로 말이죠. 그들의 2번째 앨범 이 후로, 벨벳 리볼버는 2번째 투어를 시작합니다.

 

2008년 03월 20일, 스캇은 그들의 관객들에게 이것이 벨벳 리볼버의 마지막 투어라고 선언합니다. 멧 소럼은 그 다음날 자신의 홈페이지에다가, 밴드의 상황에 대해 올리고 말하길 “전날밤 누가 기쁘지 않았는지 알거에요” 그리고 “이 업계에서의 몇 몇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른다고” 라고 했습니다.

 

스캇은 blabbermouth.net에 대꾸는 글을 올리기를 “ 첫 번째로, 미국에 있는 내 가족의 사생활은 그가 알바가 아니에요, 그는 진짜로 관계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성숙하지 못해서니까요, 애들은 냅둬요. 그리고 다른 입장에서 경험해 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아요.” 라고 적었습니다. 2008년 04월 01일 스캇은 벨벳 리볼버로부터 공식적으로 탈퇴했습니다.

 

2006년 05월 31일, 슬래쉬는 보컬에 롭 좀비, 리듬기타는 건즈 앤 로지스의 또 다른 기타리스트인 길비 클락, 베이스에 앤트렉스인 스캇 이안, 그리고 드럼에 머틀리크루의 드러머인 타미 리와 게스트에 키스의 기타리스트 에이스 프렐리와 같이 갓 오브 *더라는 곡을 합께 연주 하기로 했습니다. 이 행사는 vh1 락 아너 어워드 쇼에서의 슈퍼 그룹 키스를 위한 추모공연이었습니다.

 

슬래쉬는 또한 게임인 기타 히어로3: 레젼드 오브 락에서의 조종 가능한 케릭터로도 나왔습니다. 그가 이 게임에 대해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게임 표지에서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007년, 슬래쉬는 파울리나 루비오와 함께 히트 라틴 싱글인 “나다 푸에데 캄비아르메”를 같이 공연 하기도 했습니다. 2007년 03월 12일, 슬래쉬와 벨벳 리볼버는 락앤롤 영예의 전당에 올라감으로서 반 헤일런에게 추모 공연을 바칩니다.

 

슬래쉬는 2007년 09월 18일에 출판 된 니키 식스의 자서전인 “ 더 헤로인 다이어리스: 어 이얼 인 더 라이프 오브 어 쉐터드 락 스타”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크루 페스트에서 기타도 같이 연주했습니다.

 

2007년 10월 30일 자서전인 “슬래쉬”가 판매 되었습니다. 앤쏘니 보자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슬래쉬는 또한 hbo 책과 다큐멘터리인 더 블랙 리스트 vol.1에도 나올것이며 케랑 메거진에서는 슬래쉬가 에이스 프렐리의 다음 솔로 앨범에 참여한다고도 했습니다.

 

슬래쉬는 3번째 벨벳 리볼버 앨범을 녹음 하려 했으나 보컬인 스캇 웨일랜드가 탈퇴해 시간적인 문제가 있어서 솔로 앨범부터 녹음 하기로 했습니다. 슬래쉬는 솔로 앨범을 혼자서 스튜디오에서 일하는게 “배변” 같다고 했으며 혼자서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솔로 앨범에 각 곡마다 다른 보컬들을 집어넣으려 하고, 앨범에는 데려올 보컬들의 리스트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미 같이 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비록 누가 할건지에 대해서는 말을 하기를 거부한 상태지만요.

 

소문에 휩싸인 게스트 보컬들은 슬래쉬의 가까운 친구들인 레니 크라비츠, 세바스찬 바흐, 엘리스 쿠퍼 그리고 빈스닐이며 또한 과거 건스 앤 로지스 친구들인 이지 스트레들린과 더프 멕케건입니다. (액슬은 기대한 나는 바보란 말인가 ㅠ_ㅠ)

 

2009년 06월 30일, 슬래쉬는 그의 첫 솔로 쇼를 노르웨이 콰트 페스티벌에서 공연했습니다.

그의 밴드는 기타에 존5, 프랭키 페레즈, 베이스에 크리스 체니, 그리고 드럼에는 제이슨 본햄, 키보드에는 테디 안드레아디스로 구성되었고 스페샬 게스트로는 오지 오스본과, 펄기, 그리고 론 우드가 나와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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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허접한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__);;;; 슬간지 형님은 언제나 슬간지 ㅠㅠ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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