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저앉아 오열하는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가을의 태양은 여름의 것에 못지않게 작열한다. 하지만 따갑지는 않다. 대기가 이미 차갑게 식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가을도 역시 마찬가지다.
스치듯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1년하고도 24일이 지났을 때였다. 여전히 가을이었다.
정류장에서 그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발견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차를 한편에 세워두고는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얼마쯤 가자 그녀도 나를 본 모양이다. 살짝 미소 띤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내가 더 다가서자 애써 태연한척 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 오랜만이야. ”
짓궂다. 나는... 내 안부인사에 그녀가 움찔 반응한다. 동요하고 있었다.
“ 네, 오랜만이네요. ”
의외로 담담한 음성... 그러나 그녀의 손은 빗맞은 강아지 마냥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 어떻게 잘 지냈어? ”
“ 네, 그럭저럭... ”
“ 예뻐졌는걸. 새로! 연애라도 하나? ”
나는 ‘새로’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역시 짓궂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고는 마구 흔들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걸로 봐서는 내 빈말이, 빈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 아니야. 정말 예뻐졌는걸. ”
“ 고, 고마워요. 하지만... 만나는 사람은 있어요. ”
부인하려던 그녀, 내 빙글 거리는 표정에 금세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전에 내 이런 표정을 본 그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 마음을 모두 꿰뚫고 있는것 같아요.‘라고...
“ 그래, 잘 됐군. 축하해. 진심이야. ”
“ ... 네. ”
“ 어디 가는 중이야? 그 사람 만나러? ”
“ 아, 아니요. 번역 청탁 받은 게 있어서요. ”
“ 그렇군. 아, 저기 버스가 오는군. 그럼... ”
“ 아... ”
그녀가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이미 등을 돌렸다. 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 날 밤, 내게 한 통의 짧은 메일이 도착했다.
[ 당신은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사랑 받으려 하지도 않는군요. 누구보다도 사랑을 갈구하면서... 외로운 사람... ]
6년 전, 오늘... 나는 내 사랑을 떠나보냈다. 나를 만나기 전, 9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나를 만난 후, 9년 동안 나를 사랑했던 내 사랑을 잃어버렸다.
차라리 그녀의 손에 다른 사람의 반지가 끼워졌다면 나는 원망과 그리움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행복을 빌며 나 역시 또 다른 삶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했다.
그녀의 가족 중 생존자는 모친 뿐 이었다. 가평의 강변도로를 달리다 급회전하는 트럭을 피해 가드레일을 박고 어둡고 차가운 물속으로 사라졌다.
급보를 받고 달려간 나를 기다린 것은 3일 동안 물에 퉁퉁 불린 그녀의 시신이었다. 영화 속의 가련한 주인공처럼 오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썩은 내와 역겨움에 토악질을 하고 말았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냈을 때, 눈물과 콧물로 범벅인 내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의 모친이 말했다.
“ 너 같은 것은 내 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어. ”
그 순간 깨달았다. 토악질을 하는 동안, 나는 그녀를, 사랑을 잃은 데에 대한 슬픔은 잊고 있었다. 그랬다. 내 안에는 사랑이 없었다. 나는 사랑 받기를,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날, 나는 여전히 똑같은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그녀의 비보를 전해들은 3일 동안은 미칠 것 같은 상실감과 자괴감에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 일과 자신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수 있었다. 정말...
“ 사랑 따위는 개나줘. ”
굽이굽이 흐르는 강가가 훤히 내려 다 보이는 언덕, 그 위에 그녀의 무덤이 있었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내가 7년이 흐른 오늘, 이곳에 왔다. 왠지 안심이 되었다. 생각보다 풍경이 좋은 곳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그녀도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 옆에 앉아서 비닐봉지에서 맥주 두병을 꺼냈다. 생전 그녀가 좋아하던 회사의 상품이었다.
“ 하아, 시원한걸. ”
목을 타고 넘어가는 톡 쏘는 액체가 느껴지자 기분이 좋아졌다. 한참 동안,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그런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머지 맥주 마개를 열었다.
“ 네가 좋아했던 거야. 시원하... 지이...... ”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어라... 뭐지? 눈물...? 이, 이게 뭐야!! 뭐냐고!! 이 끔찍한 고통은 뭐냐고오오오오!!! 누가 도와줘... 숨이 막힐 것 같아. 살려줘... 살려줘...
“ 끄윽, 끄윽... 끄윽... 끅... ”
참을 수 없는 고통,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제발... 누군가가 내 숨통을... 그리고... 터졌다.
“ 으흐흐흐흑... 흑흑... 으흐흐흑... 흑흑... ”
나는 어린 아이처럼 목을 놓아 울었다.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울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만큼 슬퍼서... 가슴이 찢어질 듯 메어 와서 울고 또 울었다. 가슴이 터져라 주먹으로 두드리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나 이 끔찍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동안 나는 이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떠안고 살았던 것이다. 실연... 짧은 단어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을...
‘ 사람의 새끼손가락에는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이 연결되어 있대. 그래서 인연이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실을 타고 만나게 되는 거래. 세상 어디에 있어도... 그게 바로 인연이야. 하지만 끊어진 붉은 실은 다시는 연결 할 수가 없어. 그래서 인연이 소중한 거야. ‘
‘ 우리 둘 중 하나가, 혹은 둘 모두가 이 세상에 없을 때까지 우리의 붉은 실은 끊길 리가 없겠지? 헤헤,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에 내가 너와의 연을 불가피하게 끊는다면... 너는 또 다른 붉은 실로 연결된 사람을 만나야해. 꼭 그래야해...... 근데 너 내가 옆에 있는데도 바람 피면 죽어! ‘
그녀가 했던 말과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때론 웃고, 때론 울며 나는 생전의 그녀와 보내온 세월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그녀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웃을 때마다 살짝 패 이는 보조개를 손가락으로 찌르자 곱게 눈을 흘긴다. 내가 사준 하얀 원피스를 입고 그녀가 좋아하는 벚꽃나무 아래를 함께 걷는다. 둘의 웃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오랜 시간을 지새웠다. 그녀의 무릎을 베고 파란 하늘을 올려 다 본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정이 담긴 미소가 있다. 문득 그녀가 나의 손을 잡았다. 지금까지는 몰랐는데 가만히 보자니 붉은 실이 새끼손가락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 지금까지 행복했어. 정말로... 행복했어. 사랑해. ’
때가 왔다.
‘ 나도... 나도 행복했어. 널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그녀와 내 눈에서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걸린 붉은 실을 끊었다.
나는 깨어났지만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녀를 볼 수 있을까 하는 헛된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꿈은... 그녀와의 인연, 사랑은 끝이 났다. 하지만 내 인연과 사랑은 끝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내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언제일지는 몰라도 다시 그녀를 보게 된다면 붉은 실을 그녀의 손가락에 걸어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랑을 찾아, 또 다른 붉은 실로 연결된 인연을 찾아 떠날 때였다. 이미 해가 진 언덕을 내려오는 내 머리 속에는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