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라즈블리토

작성일 09.09.03 09: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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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아직 바람은 겨울의 아쉬움을 전하듯 차갑지만

햇빛은 얼굴을 따스하게 감싸안아주는 날씨다.

태양은 큰 콘크리트 건물 위 석조 동상끝에 걸쳐있다.

삼거리의 오가는 차들은 서로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쌩쌩 달릴 뿐이고

커다란 버스들만이 서로 사람들을 태우려 애를 쓴다. 그리곤 태우기를 무섭게 내달려버린다. 학생들이 큰 전공책을 팔에 걸친 채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거리며 수다를 떤다.

큰 책가방을 메고 모자를 쓴 공대생들은 서둘러 발을 움직여 지하도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참 보고 싶던 광경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저 싱글거리며 수다를 떠는 학생들 사이에 나도 껴있었지만 이제는 서둘러 지하도로 들어가는 학생들 사이에 껴야한다.

 

내 이름은 송지형. 올해로 23. 우유부단한 성격에 키와 얼굴도 길을 가다보면 어디서든 볼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 여자친구 없음. 잘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못나지도 않았다. 학교 정문건너편 고시원에 살고있고 kh대 생명과학대학 한방재료가공학과에 소속되어 있으며 이번에 2학년 2학기로 복학을 한다.

 

지난 2년 동안 눈이 좋지 않아 군대를 가볍게 회피한 뒤 공익으로 근무했다. 지루하기만한 2년이란 시간동안 자연스레 학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인지 더욱 반가운 학교이다.

 

"형 뭘 그렇게 기웃거려요, 형이 새내기라도 되는 줄 아세요?"

 

어깨를 툭 치며 한 남자가 말을 건다.

동그란 눈에 빨간 안경테. 여자보다 더 하얀 피부를 가진 눈과 입이 살짝 웃고있는 남자. 전역한지 한달밖에 안된 예비역이다. 남들은 군대에서 새까맣게 타서 오는데 이 녀석은 오히려 전보다 더 하얘진 것 같다.

이 친구의 이름은 김종준. 동아리 후배다. 썩 유쾌한 녀석인대 곱상한 외모답게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낯을 좀 가리는 성격이지만 일단 친해지고 나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것 같은 녀석이다.

 

"여~ 종준이! 내가 마음만은 새내기다 임마"

 

"수강신청은 잘 하셨어요? 전 컴퓨터가 맛이 가는 바람에 피씨방에서 했는데 팝업 차단해놔서 망했어요. 아휴"

 

"야 수강신청 한두번 해보냐 아마추어도 아니고, 형은 이미 계획대로 모든 수강신청을 끝내놓은 상태지!"

 

"형 그럼 이따가 저 좀 도와줘요 제가 저녁쏠께요"

 

저녁이란 말에 눈이 절로 돌아간다.

 

"뭐부터 하면 되냐?"

 

"헤헤 저 아침 강의 있어서 이따가 동방에서 봐요 저 먼저 수업 들으러 가볼께요"

 

종준이가 손을 흔들며 공대로 쏙 들어가 버린다.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준 뒤 캠퍼스 안으로 천천히 걷는다. 오랜만에 맞는 아침햇살이라 그런지 부드러운 느낌이 사뭇 좋다.

살짝 눈을 감고 걸으니 기분이 더 살아난다. 귓속으로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흘러들어온다.

 

'응? 노래? 난 이어폰도 낀적없고 교내방송도 점심때만 해주는대?

왜 노래가 들리지?'

 

의문을 품은 채 눈을 떴다.

그 앞에는 얼굴에 한껏 웃음을 띈채 내 귀에 이어폰을 갖다 대고 있는 여자애가 보였다.

 

"학교에 오니 그렇게 좋아? 복학생은 어쩔 수 없다니까 눈까지 감고 걸어 다니네 이 누나가 학교 구경이라도 시켜줄까? 대신 점심에 맛있는거 사줘"

 

하며 귀여운 눈으로 날 바라본다. 아담한 키에 어깨쯤에서 찰랑거리는 머리가 인상적이고 안경을 써서 그런지 약간 차가워 보이긴 하지만 조그만 눈덕분에 전체적으로 귀여운 이미지가 나는 이친구의 이름은 연신혜.

학교 내에서는 연여사란 별칭을 가질 정도로 털털하며 짖굳은 성격을 갖고 있지만 내가 대학교를 온 뒤 제일 처음으로 사귄 절친이다. 서로 안지는 3년 정도 됐는데 왠지 10년 이상 된 것 같은 막역한 사이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만났으니 한마디 해줘야지

 

"꺼져"

 

기분 좋았는데 그 얼굴을 디미니 고운 소리가 나올 수 없다.

 

"썅 뒤질래?"

 

뭐 이정도 막역한 사이다.

 

"야 음료수나 사줄게 먹고 떨어져"

 

"음료수?? 야 짠돌이가 웬일이냐 사랑원가자!"

 

음료수를 사준단 말에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렇게 우리 둘은 학교 기숙사인 사랑원으로 향한다.

 

이 사랑원은 학교가 직접 운영하는 기숙사가 아니라 사기업에서 운영을 하는지라 시설이 엄청나게 좋은 편이다. 1층에 카페, 문구점, 식당, 미용실, 세탁소, 당구장, 안경점, 치과 등등 정말 없는것 빼곤 없는게 없는 곳이다. 그 대신 기숙사비가 타 학교의 배가 넘는다. 이것이 바로 내가 멀쩡한 기숙사를 내버려두고 겨우 사람 한명 누울 수 있는 공간뿐인 고시원에 틀어박혀있는 이유이다.

 

캔 음료수 2개를 뽑고 신혜에게 하나를 건넨 뒤 휴게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뒤따라온 신혜도 반대편에 털썩 소리를 내며 앉는다.

 

"복학한 기분이 어때?"

 

"음……. 아직 별로 실감이 안나. 파릇파릇한 새내기랑 같이 밥이라도 먹으면 실감이 날것도 같은데 내 앞에는 쭈글한 예비역누님이 앉아있어서 말이지"

 

"죽어! 내가 어딜 봐서 쭈글해!"

 

"농담이지 왜 흥분까지 하고 그래"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며 티격태격하고 있으니 금방 10시가 됐다.

 

"야 나 수업 들어가야 돼 먼저 간다~."

 

인사를 한 뒤 버스정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버스는 금방 와서 사람들을 꾸역꾸역 태우고 한정거장을 지난 뒤 또 꾸역꾸역 내뱉는다.

 

우리학교의 좋은 점이 바로 교내에 버스가 돌아다닌다는 점이다.

캠퍼스가 워낙에 넓은 탓에 웬만한 체력이 아니고서야 그 큰 전공서적을 들고 걸어 다니긴 힘들다.

 

생명과학대 건물 안으로 들어와 계단식 강의장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이 띄엄띄엄 앉아있는걸로 봐선 나같이 혼자 온 복학생들도 좀 있는 것 같다.

 

조금 지나자 교수님이 들어오시고 강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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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20분의 긴 강의가 끝나고……. 난 침을 닦았다.

역시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 교수님의 강의는 살아있는 수면제다.

 

저 교수님의 강의시간에 눈만 뜨고 있어도 a학점 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숙면을 취한 뒤 밖으로 나온 나는 아직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고민에 빠졌다.

 

'이제 뭘한다……. 동아리 방이나 가볼까?'

 

난 '늘사랑'이란 예쁜 이름의 중앙동아리 하나를 들고 있다. 오랜만에 학교에 왔으니 1학년 때의 많은 추억이 서려있는 그곳에 먼저 가보고 싶었다.

 

학생회관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핸드폰을 보니 벌써 1시.

 

엘레베이터에서 내려 동아리 방문을 여니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대구 청년 찬수가 날 반겼다.

 

"요~ 지형이~ 어서 온나 오랜마이네"

 

"찬수! 오랜마이네, 종준인 아직 안왔나?"

 

"응 안왔다"

 

찬수는 나와 동기로 대구남자치곤 쑥쓰럼을 많이 타지만 재치도 있고 잘생겼다. 또 아까 아침에 만났던 신혜의 남자친구이기도 하다. 이 커플도 애기하자면 길다.

 

신혜는 1학년 때는 인기쟁이였다. 남자선배들과 남자동기들이 꽤나 좋아했었던 듯 하다. (이건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최대의 미스터리다.) 그중에 한명이 바로 찬수였다. 하지만 찬수가 마음을 고백했을 땐 이미 그녀는 동아리 남자선배와 사귀고 있었다. 난 그걸 듣고 함께 좌절하며 찬수에게 포기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3년을 버텼다. 3년이 흐른 후 신혜는 그 선배와 결국 헤어진 후 너무 힘들어했고 그런 그녀를 찬수가 옆에서 잘 지켜주었다. 신혜는 그런 찬수의 진심을 알았고 둘은 결국 작년부터 사귀게 된 것이다. 정말 남자라 할 수 있는 찬수다. 이점이 제일 존경스런 놈이기도 하다.

 

"오 형 일찍 왔네요"

 

때마침 종준이가 들어왔다.


난 종준이 수강신청을 도와주었다.

 

"띠링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평소엔 켜진지 꺼진지 확인도 안 되던 핸드폰이 오랜만에 소리를 질러본다. 난 무심히 문자를 확인한다.

 

'전화해라 오바'

 

연여사다. 냅다 찬수 머리에 핸드폰을 던졌다.

 

"억! 뭐야! 아 이런 * 피나는거 아냐"

 

"니 여친이다 임마 전화해봐"

 

머리를 부여잡고 낑낑대던 녀석이 여친이라는 말 한마디에 히죽거리며 핸드폰을 연다. 그런대 왜 내 핸드폰을 여는거냐……. 지 핸드폰으로 할 것이지……. 전화비 아깝게시리

 

"응 알았어 응응~이따봐~"

 

콧소리가 정말 밥맛이다. 옆에서 착한 종준이도 살짝 째려본다.

찬수가 핸드폰을 나한테 던지며 말한다.

 

"지형아 종준아 신혜가 이따가 저녁묵잰다."

 

난 잽싸게 물었다.

 

"신혜가 쏘는거냐?"

 

"개색히"

 

"야 니가 쏘는것도 아닌데 왜 니가 흥분하고 그래?"

 

"신혜와 난 일심동체란 거 모르나? 즉 신혜가 돈이 나가면 내 돈이 나가는거나 마찬가지란 말씀! 억!!"

 

비명과 함께 또 한번 찬수는 머리를 부여잡고 뒤로 나자빠진다. 옆에는 내 핸드폰이 나뒹군다.

 

"나이스샷"

 

종준이가 응원을 더해준다.


시계를 보니 아직 3시. 저녁때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찬수야 나 학교구경좀 하다 올께"

 

"오야 이따가 시간 맞춰 오그라"

 

난 2년이란 시간동안 학교가 얼마나 변했나 궁금하기도 하고 학교에 오면 꼭 가보고 싶던 곳이 있어 혼자 밖으로 나왔다.

 

'오! 예술디자인과 건물이 새로 생겼네.'

 

새로 생긴 건물에 감탄하며 난 어딘가로 향했다. 목적지는 바로 천문대다. 그곳은 학교 내 꽤나 구석진 곳에 있어 인적이 뜸한 곳이지만 나에겐 옛 추억이 어린 소중한 장소다.

 

오르막길을 오르자 천문대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천문대는 여전히 변함없이 서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휑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근처엔 소나무 밑동들만 남아있다.

 

'천문대는 그대론데……. 주위가 왜 이렇지? 예전엔 소나무 향기가 좋았는데 다 잘라버려서 휑하기만 하네…….'

 

난 의아함을 느꼈지만 옛 추억이 어린 곳이기에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그런대 계단끝 부분에 웬 신발이 서있다. 신발이 서있다?? 웬 신발이지? 난 호기심반 두려운 반으로 조심조심 마저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하나하나 오를수록 다리가 나오고 몸이 나오고 얼굴이 나왔다.

 

'뭐지?'


앞서 말했다시피 아직 3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차디찬 바닥에 웬 여자가 누워있다. 설마 죽은 건가? 아니 미약하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걸 보니 다행히 살아있는것 같다. 그렇다면 기절을 했다던지 아니면 잠을 자고 있단 것 인대 저 편안한 표정을 보니 기절한 것 같지는 않다. 난 안심하며 그녀를 살폈다.

 

아직 앳된 얼굴이지만 큰 눈,  짙고 긴 눈썹, 이목구비가 뚜렷해 강해보이는 인상이다. 볼과 코가 약간 상기되 있는게 조금 추워보였다. 원래 보통사람 같으면 흔들어서 깨우겠지만 별로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난 그 옆에 철푸덕 앉아서 그 여자를 빤히 바라봤다. 가만히 보니 그렇게 예쁘진 않지만 호감이 가는 얼굴이다. 특히 단발보다 약간 짧지만 남자 같이 보이쉬한 느낌이 나는 머리카락이 매력적이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새 학기라 학교에 사람은 많지만 역시 이곳에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저나 이 여자는 왜 여기서 자고 있는걸까?'

 

'우리학교 학생이니까 여기서 자고있겠지?'

 

'몇학번일까?'

 

혼자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몸을 뒤척이며 갑자기 그 큰 눈을 번쩍 뜨더니 얼굴을 찡그린 채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 젠장"

 

첫마디부터 가관이다.

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도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날 바라보며 말했다.

 

"넌 뭐냐?"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그녀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다시 말했다.

 

"밥사줘"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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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녀와 나는 함께 사랑원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어찌된 일이냐고? 간략히 설명하자면 밥을 사달라던 그녀의 말에 난 황당해 하며 아무 생각 없이 신혜와의 저녁약속에 데리고 가는 중이다. 그녀도 군말없이 따라온다. 정말 이상한 여자인것 같다.

내려오다가 왜 그런 곳에서 자고 있었는지 물었더니 귀찮아서 그런건지 사실이 그런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냥' 이라는 아주 짧은 답을 했다. 이것이 그녀를 더 이상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사랑원 앞에 도착하니 종준이와 찬수도 방금 온 듯 신혜와 인사를 하고 있었다.

 

"누나 안녕하셨어요?"

 

종준이가 먼저 신혜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 종준이 넌 어떻게 더 하얘졌냐! 나보다 더 하야잖아! 군대 다녀온 거 맞아? 집에서 2년 동안 박혀있다 온 거 아냐?"

 

"설마요 그런대 옆에 있는 분은 누구?"

 

신혜 옆에는 한 여성이 서있었다.

신혜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이번에 기숙사 방 같이쓰게된 친구야 인사해!"

 

그 친구의 이름은 강아름. 이번에 들어온 새내기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언뜻 봐도 꽤 귀엽게 생긴 외모에 남자들의 로망인 길고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가지고 있다.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했는데 언뜻언뜻 비치는 밝은 갈색의 브로치가 잘 어울렸다.

 

둘이 인사를 하는 동안 신혜가 우릴 발견했는지 소리쳤다.

 

"왔어? 어? 미소도 같이 왔네?"

 

신혜가 내 옆에 있는 이상한 그녀를 가리켰다.

난 의아함에 물었다.

 

"뭐야? 아는 사이야?"

 

"같은 방 룸메이트야. 나랑 아름이랑 미소까지. 우리 3인실쓰자나"

 

미소라 참 예쁜 이름이다. 그런대 어쩐지 성격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신혜도 그녀들의 성격은 잘 모르는 듯 했다. 아직 학기 초라 얼마 전에 방을 새로 배정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역시 새내기란다.

신혜가 우리를 보며 물었다.

 

"그러는 너희 둘은? 아는 사이야?"

 

"아니 전혀."

 

내가 간단히 대답했다.

 

"근대 어떻게 같이와?"

 

"음 말하자면 길다. 그냥 간단히 밥 먹으러 온거야. 그냥 그렇게 알아"

 

"으흠~그래? 그렇구나."

 

신혜이가 왠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별로 기분이 좋진 않지만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우리는 밥을 먹기 위해 사랑원 안에 있는 푸드코트에 자리를 잡았다.

 

물주인 신혜이가 먼저 말했다.

 

"우선 밥부터 시키자! 찬수야 우리 뭐먹을까?"

 

"아! 난 참치비빔밥 묵을끼다. 하하 느그들은?"

 

찬수가 물었지만 다들 대답들이 없다. 종준인 새로 만난 두 여성 때문에 낯을 가리느라 그렇고……. 그 두 여성도 낯을 좀 가리나 보다. 나또한 그 어색한 분위기에 나서기 싫어 조용히 입다물고 있었다. 질문을 던진 찬수만 뻘쭘할 뿐이다.

 

우리는 대충 참치비빔밥으로 통일하고 밥을 가져왔다. 참치비빔밥은 우리 학교 내의 유명한 음식중 하나이다. 23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맛또한 일품으로 kh대에 와서 참치비빔밥을 먹어보지 못한 자와는 kh의 k자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물론 내가 지어낸 말이니 굳이 사실을 확인하는 수고는 덜길 바란다.

 

그때까지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밥만 먹었다. 신혜와 찬수는 그런 우리의 어색한 분위기에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한 표정으로 시종일관 웃을 뿐이다. 그 분위기는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그나마 술을 마시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어색한 분위기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아! 너네한테 우리 동아리 남자들 소개를 안 해줬구나?"

 

신혜는 그제야 생각난 듯 우리 남자 셋을 룸메이트들에게 소개 시켜줬다.

 

"미소야 아름아 이쪽은 내 남자친구 찬수야 잘생겼지! 너네 혹시라도 애한테 꼬리치면 잘 때 머리 확 밀어버릴줄 알아라! 후후 그리고 애는 종준이 07학번이고 너희랑 같은 화공과. 얼마 전에 전역한 아저씨니까 잘해드려. 그리고 마지막 재는 송지형. 좋은 놈은 아니니까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게 좋을꺼야"

 

참 고마운 소개다.

 

간단한 소개가 끝나고 찬수가 건배를 제의했다.

우리는 모두 잔을 들고 건배를 하려할 때였다.

 

"너! 나랑 내기할래?"

 

이상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방금 나한테 너라고 한 건가? 새내기라면 10학번일 텐데 4학번이나 차이나는대 서슴없이 반말을 한다라……. 그러고 보니 천문대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반말을 한 것 같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대답했다.

 

"무슨 내기요?"

 

"뭐긴 술집에서 술내기밖에 더 있어?"

 

"뭘 걸건대요?"

 

"이기는 사람 소원하나 들어주기"

 

음……. 소원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여자애가 설마 남자보다 술을 더 잘 마시겠는가? 내가 술을 일찍 배우진 않았지만 대학교서부터 한시도 술을 손에서 놓은적이 없으며 시험기간엔 술집에서 공부를 했고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면서도 회식자리에 나가 우리기관 최고위직에 계신 사무처장님과 서로 잔에 술을 채우며 특별휴가까지 얻어낸 나다. 절대로 질리는 없다.

 

"좋습니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에요! 그런대 그쪽은 대체 몇살이길래 저한테 말을 놓는거죠? 새내기면 저랑 4학번차이나 나는대요?"

 

"응 나 오수했어"

 

말을 하며 그녀는 소주 10병을 주문했다…….(참고로 나는 빠른 년생이다. 즉 순수한 나이로 따지면 그녀가 나보다 2살 많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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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위엔 소주 열댓 병이 나뒹군다. 여기저기 안주가 흩어져있고 천장에 달린 어두운 조명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내 시야를 어지럽힌다. 벌써 새벽 3시. 이미 같이 온 친구들은 언제 가버렸는지 보이질 않는다.

 

"뭐야 벌써 취한거야? 남자가 이것밖에 못 마셔?"

 

그녀다. 둘이서 마신 소주가 벌써 10병이 넘어간다. 둘이 같은 속도로 마셨으니 최소한 서로 5병씩은 위장으로 넘어갔단 소리다. 그러나 그녀는 취하기는 커녕 얼굴색조차 변하지 않는다.

 

'무슨 소원을 빌라나…….'

 

그 생각을 끝으로 필름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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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다. 창문에 걸쳐진 블라인드 사이로 아침햇살이 서로 경쟁하듯 비집고 들어온다.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머리에 지진이라도 난 듯 지끈거린다. 죽어있는 텁텁한 공기가 내 폐로 들어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다. 주위를 둘러보니 너저분한 이불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전공서적들 어디서 주워와서 이것저것 조립했는지 그 성능을 의심하게 되는 컴퓨터와 밤새 새빨갛게 자신을 덥혔을 전기난로가 눈에 들어왔다. 동아리방이다.


"흠냐"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언제 빨았는지 알 수 없는 너저분한 이불이 미묘하게 위아래로 들썩인다. 난 손가락 끝으로 이불을 집어 조심스럽게 들춰보았다. 그 순간 절망에 빠졌다.

예상했지만 내 옆에는 그녀가 엎드려 자고 있었다. 어제 어떻게 끝이 난건지 확실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딱 한가지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내가 졌다'

 

그렇다 내가 졌다. 분명히 내 마지막 기억엔 그녀가 나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히 내가 진 것이다. 그녀는 깨어나 나에게 약속했었던 한 가지 소원을 말할 것이고 그 소원은 그녀의 행동을 볼 때 나에게 안드로메다행 열차티켓을 특등석으로 끊어다 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우선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야한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동방문을 열고 빠져나왔다. 아니 빠져나오려 했다.

 

"띠디딩"

 

아뿔싸. 난 그때 일생에서 다섯손가락안에 꼽히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동방문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여는 잠금장치가 설치되어있다. 그런대 그 잠금장치가 사람이 빠져 나가고 자동으로 닫힐 때 소리를 낸다는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

 

"동작 그만!"

 

안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소리에 나는 온 몸이 얼어붙었다.

 

"원상복귀"

 

나는 누가 리모컨으로 조정하는 로봇마냥 다시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긁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각오는 했어?"

 

이럴 땐 시치미를 떼는 게 가장 좋다.

 

"각오라뇨?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그런대 제가 왜 여기 있죠? 전 분명히 어제 친구들과 즐겁게 술 한 잔을 하고 방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뭐야 기억 안나? 어제 술내기해서 이기는사람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

 

"네? 제가 그런 약속을 했나요? 제가 술을 많이 마셨나 보네요. 전혀 기억이 안나요. 그리고 내기라뇨? 우리가 내기했다는 증거라도 있나요?"

 

말을 마치고 그녀를 보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단 듯이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내 앞에 들이댔다.

 

'저(지형)는 앞으로 미소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를 어길시 할복을 한다.

 

치밀하다……. 이미 소원까지 말했나 보다. 역시 술이 왠수다.

그나저나 어길시 할복이라니……. 지금 시대가 어떤시댄대 할복이란 말인가 내가 무슨 일본 사무라이라도 된단 말인가? 저건 그녀가 쓴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 쫄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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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한점없는 맑은 날씨다. 그런대 내 머릿속은 그 반대다. 충성을 다한다라……. 난 이제 죽었다.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다행히 오늘은 공강이다.

 

저녁때쯤 일어난 나는 물을 마시고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만졌다.

난 언제나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습관을 갖고있는대 길을 걸을 때도 손에 쥐고 다니며 잠을 잘 때는 머리맡에 놓고 잠을 잤다.

핸드폰은 배터리가 다됐는지 열어도 반응이 없었다.

 

새 배터리로 갈아끼운뒤 핸드폰을 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요란을 떨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모르는 번호다.

 

"여보세요"

 

"쫄따구 10초줄께 나와"

 

"어디...뚜..뚜.."

 

자기 할 말만 하고 끊는다. 나는 빛의 속도로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눌러쓴 채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역시 그녀는 고시원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내가 사는 고시원을 알아냈는지 신기할 뿐이다.

 

"3초 늦었어. 음료수사"

 

"아 그런게 어디 있어요. 어떻게 방에서 여기까지 10초만에 와요 13초만 해도 거의 기네스북감이라고요!"

 

"싫으면 할복을 하든가"

 

"어떤 음료수 좋아하세요?"

 

나는 내가 가끔 싫어질 때가 있다.

 

그녀와 나는 나란히 동방으로 올라갔다. 동방에는 종준이가 컴퓨터랑 놀고 있었다.

 

"어 형 어제 어떻게 됐어요? 누나 안녕하세요."

 

종준이는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기로 했나보다. 그녀는 종준이의 인사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닥거릴 뿐이다. 나도 게슴츠레한 눈으로 종준이를 째려보자 종준인 급히 핸드폰과 지갑을 챙기며 말했다.

 

"아...하...하... 저 먼저 가볼께요. 약속이 있어서 하하"

 

"약속? 너 학교에 약속 잡을 사람도 있냐?"

 

"후후 없으면 만들면 되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종준이를 보니 예전과 많이 달라진 모습에 군대가 사람을 바꾼다는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부끄러워하며 말조차 잘 하지 못하던 녀석이었다.

 

"그래 아름이랑 잘해봐라. 눈높이 에베레스트를 자랑하는 내가 봐도 예쁘더라."

 

"헉! 형 어떻게?"

 

네가 내 손바닥 안이다. 나는 대꾸할 필요성도 못 느끼며 철푸덕 주저앉았다. 종준이는 놀란 표정을 5분 이상 유지하는 비상한 재주를 보여주며 밖으로 나갔고 나와 그녀가 나란히 앉았다.

 

"왜 부른거에요? 저 오늘 피곤해요"

 

나의 물음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참 길고 가는 손가락이 예쁘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두꺼운 서적 네다섯 권과 실험노트가 보였다.

내가 이래 보여도 눈치가 백단이다.

 

"실험노트 써달라고요?"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맞고를 치기 시작한다.

이럴 땐 내 눈치가 야속하기도 하다.

 

"기본 10장 이상이다. 화학 말고 생물도 있어"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 일 아니란 듯이 말한다.

실험노트를 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실험노트는 한주에 2개씩 실험전과 실험후로 나누어서 실험 전에는

실험내용계획과 그 실험을 설명하기위해 필요한 용어,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공식이나 결과를 적는 것이고 실험 후에는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와 느낀점 등을 쓰는 것이다.

 

말은 쉬워 보이지만 아무리 적게 써도 8장 이상은 나오니 굉장히 지루하고 팔 아픈 과제이다.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두개이다. 지금 써달라는것이 실험전 노트이니 실험후에도 시킬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나는 한주에 4개의 노트를 써야한다. 다행이라면 이 과제는 1학년때 만하고 2학년부터는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군복무를 하기 전에 전과를 한터라 1학년이 듣는 과목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에 듣는 과목중 실험과목이 2개나 있다. 이로써 난 일주일에 8개의 실험노트를 써야한다는 결론이 얻어진다.

 

"저기……."

 

"할복?"

 

그녀의 무표정한 협박에 난 당당히 말했다.

 

"모든 실험 a+의 신화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언제 시켰는지 우리 학교의 명물먹거리인 김박사 치킨을 뜯어먹으며 인터넷 맞고를 치고 있었다. 김박사 치킨은 순살로 만들어 뼈를 바르며 먹는 수고를 덜어주기때문에 시험기간이나 술안주가 필요할 때 모든 학생들의 간식거리로 유명하다. 예전에 김석사였는대 김박사로 학위를 땃다는 전설이 있기도 하다.

 

난 그녀가 주는 치킨을 조금씩 얻어먹으며 실험노트를 작성했다. 방안에는 마우스를 딸깍거리는 소리와 펜의 사각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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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달이 해에게 밀려 그 빛을 잃어 갈때쯤이 되었다.

 

'아 드디어 끝이다.'

 

생물 실험노트의 마지막 점까지 찍은 나는 드디어 끝났다는 환호를 지르며 기지개를 켰다.

가만히 있으니 조용한 적막감이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딸깍거리는 마우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컴퓨터 쪽을 보니 그녀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하긴 지도 피곤했겠지'

 

생각하며 어깨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새근새근 자는 모습이 굉장히 평화로워 보인다. 혼자 기숙사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기다려준 것을 보니 그래도 생각보다 배려심이 있는 것 같다.

 

풀잎의 싱그러운 향기가 그녀에게서 은은하게 베어나왔다.

사방은 조용하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난 빤히 그녀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에게 점점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다.

어느새 그녀얼굴이 코앞. 

나도 모르게 그녀의 볼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헉 일났다.'

 

다행히 그녀는 깊은 잠에 허우적거리고 있는지 미동도 없었다.

만약 그녀가 깨어났더라면 난 저세상행이다. 일단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보니 나도 급격히 피곤해졌다. 원래 난 밤을 잘 새지 못하는 체질이다.

남들 3~4시간씩 자고 공부한다는 고3때도 난 항상 최소한 6시간은 잤다. 그런 놈이 새벽까지 깨있었으니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다.

시계를 보니 지금은 5시. 오늘 수업은 9시니 아직 4시간정도 여유가 있다. 잠깐이라도 자두는 게 좋겠단 생각에 난 조용히 동방을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뒤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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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금요일. 군복무를 할 때는 그렇게 안 가던 시간이 역시 학교에 있으니 정말 쏜살같이 지나간다. 친구와 저녁을 먹은 후 방으로 들어온 난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를 즐기며 노트북으로 웹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띠링!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빨리 확인해주세요."

 

핸드폰이 떠든다. 난 이 소리가 별로 듣기 싫어 거의 매너모드로 하고 지내는데 어쩐지 오늘은 매너모드가 풀려있었나보다.

 

'쫄따구! 내일 아침 9시에 보자'

 

그녀다.

 

평소 하늘이 무너져도 주말에는 편히 쉬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진 나여서 예전 같았으면 바로 거절했겠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왜?'

 

'그냥 나와'

 

지은 죄가 있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귀찮다…….

 

'안돼, 나 내일 약속 있어'

 

'ㅎㅂ?'

 

제길……. 이젠 ㅎ자만 봐도 겁부터 난다. 저번 강의 때 교수님이 새의 활강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고 계셨는데 난 역시 졸고 있었고 교수님의 '그러니까 새의 활!...' 이라는 말에 할복이라는 줄 알고 식겁하며 일어났던 적이 있다.

 

'내일 아침을 내가 살 수 있는 권리를 줘서 고마워'

 

아 역시 반항은 안좋은것 같다. 그래도 일주일동안 나아진 것이 있다면 내가 그녀에게 말을 놓았다는 것이다. 나보다 2살이나 많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4학번이나 선배이고 원래 내 친구들도 나보다 1살씩은 더 많다. 그리고 내가 계속 존댓말을 쓰니 정말 쫄따구가 된 것 같은 자괴감이 들어 한번 큰맘 먹고 그녀에게 말했었다.

 

"야! 아..아니 미소님... 제가 미소님께 말 놓으면 안될까요? 나이는 미소님이 2살 많지만 그래도 제가 4학번이나 선배고...또..제가..."

 

"마음대로 해"

 

그녀는 별걸 다가지고 그런다란 표정으로 날 보며 말했다. 시원스런 그녀의 대답에 난 감동을 느꼈다.

 

"그대신 아이스크림사줘"

 

등가교환의 원칙.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잠시나마 감동을 한 내가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사이 금요일 밤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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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오전 9시 10분. 뾰족한 구두가 방바닥에 굴러다니고 나는 허겁지겁 옷을 입으며 나갈 준비를 했다. 10분이나 늦은 게 아니냐고? 내가 미쳤나? 그녀와 한 약속을 잊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전혀 늦지 않았다. 사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7시에 일어나서 샤워도 하고 왁스도 바르며 한껏 멋을 냈다.

여자가 주말 아침 9시에 만나자고 했으면 그날 하루는 데이트를 하자는 것 아닌가? 참 오랜만인 데이트 생각에 난 들떠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평소엔 잘 입지도 않는 마이까지 걸쳐가며 소란을 떨었다.

 

'역시 마이엔 구두지!'

 

하며 뾰족구두까지 신은 나는 시간에 맞춰 기숙사 밖으로 나갔다.

역시 그녀는 부지런한 성격인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대 그녀가 나를 보더니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나를 보며 이상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웃는지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그녀 복장이 조금 특이했다. 평소에는 청바지에 스니커즈같이 편한 옷차림을 입고 다니던 그녀가 오늘은 그런 복장이 아닌 어디선가 많이 봤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아!'

 

저건 분명 어머니가 등산을 가실 때 입고 다니시던 복장이다. 그런말은 즉 오늘의 목적은 등산!

 

나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옷과 신발을 바꾸기 위해 황급히 방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바탕 소동아닌 소동을 일으킨 후 우리는 수원역으로 향했다.

 

"넌 도대체 무슨생각을 한거야?"

 

그녀가 물었다.

난 얼굴을 붉힌 채 큰소리로 말했다.

 

"야! 등산을 갈꺼면 미리 등산갈꺼라고 말을 해줘야 될꺼아냐! 아침부터 쪽팔리게……."

 

"후후 우리 쫄따구가 누나랑 데이트 할 생각에 쫙 빼입었구나? 그렇구나?"

 

하며 옆구리를 툭툭 찌른다.

 

난 괜히 창피해 무시를 하고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도 역시 구름한점없이 맑은 날씨다. 등산하기에는 딱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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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역에서 김밥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뒤 정상에서 먹을 샌드위치를 싸들고 s대 입구로 향했다. 지하철에는 우리처럼 등산을 하기위해 큰 배낭을 메고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한 커플이 보였는데 우리처럼 등산을 하러 온듯하다. 남자는 훤칠한 키에 송승헌도 울고갈법한 짙은 눈썹, 까맣게 그을린 피부와 겉보기에도 건장한 근육들을 자랑하는게 스포츠를 굉장히 좋아할 것 같은 인상이었고 여자는 현대기술의 힘을 빌린 티가 팍팍 나는 인위적인 미모의 얼굴이었다. 그냥 대충 봐도 부모님이 강남에 빌딩 2~3개는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졸부의 귀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내가 그 커플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그 훤칠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 상냥한 미소를 띤 채 말을 건넸다.

 

"저기 입에 밥풀 뭍으셨는대요."

 

이런 젠장……. 아까 김밥을 먹을 때 눈치없는 밥알 하나가 볼에서 암벽등반하고있었나보다. 난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 알려주지 않은 그녀를 원망스런 눈길로 바라보자 그녀는 킥킥대며 웃었다. 분명 알면서도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것이다.

 

"아 아까 김밥을 먹을 때 묻었나 보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매너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가 나에게 들리라는 듯 작지 않은 목소리로 남자에게 귓속말을 했다.

 

"요즘 저렇게 칠칠치 못한 사람도 있나? 거울도 안보고 다니나봐

안그래 오빠?"

 

순간 이마에 힘줄 두개가 솟았다. 하지만 나 같은 대인배가 그런 사소한 문제로 화를 내선 안된다.

 

"야! 너! 누굴보고 그런 소릴 나불대는거냐? 밥 먹으면 밥풀도 입에 뭍을 수도 있는거지! 넌 그래본적 한 번도 없냐? 얼굴도 다 뜯어고친 주제에"

 

큰소리로 소리치는 그녀다. 사람많은 지하철에서 소리 지르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나대신 화를 내주는 그녀의 모습에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뭐.. 뭐요? 하 나 참"

 

그 여자는 그녀의 막말에 쫄은듯 헛웃음만 칠뿐 반박을 하지 못했다.  남자는 나에게 눈으로 미안하단 뜻을 전했다. 나도 괜찮단 눈빛을 보내주고 그녀를 진정시켰다.

 

"난 괜찮으니까 그만해 지하철에서 그렇게 큰소리로 소리치면 다른 사람들한테 실례잖아"

 

그녀는 웬일로 내말을 듣고 분을 삭이며 참았다. 그 커플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녀와 강남녀는 그렇게 대치상태로 산 입구까지 갔다.

 

우리들은 조그만 물을 2개 사고 산악로로 접어들었다.

 

"이봐요 잠깐만요"

 

우리를 부르는 것 같은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아까 그 강남녀다.

 

"뭐냐?"

 

그녀가 까칠하게 대답했다.

 

"우리 내기할래요? 이 산 먼저 오르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10만원빵 어때요?"

 

"좋아"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내기를 수락했다. 갑작스레 내기가 시작되었다. 난 어이가 없어서 그녀에게 따지려고 했으나 내 몸은 이미 그녀에게 잡혀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그 커플을 얼핏 보니 여자가 재수없는 미소를 흘리며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다.

 

"헉..헉.."

 

관악산은 그리 높진 않지만 코스가 꽤 긴 편이다. 그 산을 거의 뛰다시피 오른지 벌써 30분 째다. 그 커플은 더 빠른 길로 올라오는 건지 보이질 않았다. 처음에는 정신이 없어서 거의 끌려가다시피 올랐는데 일단 10만원이 걸린 내기라는 것을 자각하자 내가 먼저 앞장서기 시작했다. 10만원이 어느 동네 개이름인가? 땅을 파봐라 10만원이 나오는지. 동네 놀이터에서 꼬마 애들이 흘린 돈을 땅 파서 줍는다 해도 10만원은 안된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을 따라 전국의 산이란 산은 다 가봤을 정도로 등산을 많이 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나라도 산을 뛰어서 오른적은 없었다. 2/3정도 산을 오르자 턱까지 숨이 차올랐다. 그런대 그녀는 얼굴만 약간 붉어지고 땀만 조금 흐를 뿐 호흡도 처음이랑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왠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체력이다. 술을 그렇게 마실 수 있는 이유가 이런 괴물같은 체력을 밑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힘들단 이유로 속도를 조금씩 늦추기 시작하자 그녀가 무심한 목소리로 현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 10만원없다. 지면 니 지갑에서 10만원 나가는거야"

 

'이런 젠장'

 

만약에 지면 오히려 내 지갑에서 10만원이란 거금이 황천길로 떠나는 것이다. 내 다리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상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아얏!"

 

뒤따라오던 그녀의 목소리다.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무척이나 아픈 표정으로 발목에 손을댄체 앉아 있다.

 

"왜그래? 다쳤어?"

 

"아! 제길 접찔린것 같아"

 

아직 녹지않은 눈에 발이 미끄러진 모양이다.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업어"

 

"응?"

 

"날 업으라고"

 

다짜고짜 업으라니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린가.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어 죽을 뻔했는데 거기에 사람 하나를 업으라니…….그녀가 한마디 했다.

 

"너 돈 많냐?"

 

난 그녀를 업고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10여분…….

드디어 정상!

 

그녀를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그 커플은 보이지 않았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향해 빙긋이 웃어보였다.

 

"힘들어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냐? 왜 혼자 실실거리고 난리야?"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도 기분이 좋은지 싱글거렸다.

난 그녀의 접질린 발목이 걱정돼 신발과 양말을 벗기고 발목을 찬찬히 살폈다. 다행히 심하게 접질리진 않았는지 약간 붇기가 있긴 했지만 괜찮았다. 붇기가 가라앉도록 수건에 물을 적셔 발목을 감싸준 뒤 다리를 편하게 놓을 수 있도록 발밑에 가방을 놔주었다.

 

"...고마워"

 

난 순간 얼었다.

 

'방금 그녀가 나에게 고맙다고 말한 건가? 저 입에서 그런 고결한 말이 나올 수 있었나? '

 

난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이미 딴 곳을 보고 있었다.  올라오느라 힘이 들었는지 아니면 정상에 바람이 차서 그런지 그녀의 볼이 빨갛게 물들어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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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여유롭게 거닐고 땅에선 개미만한 자동차들이 뭐가 그리 바쁜지 열심히 왔다갔다 움직이고 있다.

 

난 문득 의문이 생겨 그녀에게 물었다.

 

"근대 오늘 왜 산에 온 거야?"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그냥"

 

역시…….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이상한 여자다.

 

우리는 그렇게 10만원이 생기면 뭘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며 가져온 샌드위치를 나눠먹으며 강남녀 커플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시간... 두시간이 지났다.

 

"아 왜 이렇게 안와!?"

 

그녀가 짜증을 냈다.

 

"그러게 이 산 천천히 걸어서 올라와도 세시간이면 충분히 올라오는데."

 

우리가 두시간 코스를 한시간에 주파하는 기염을 토하며 올라와 정상에서 두시간을 기다렸으니 세시간이 지난 것이다.

 

"오다가 다리라도 부러졌나?"

 

왠지 수상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렇게 또 한시간후……. 그제서야 우리는 깨달았다.

 

'우리가 당했다.'

 

그렇다. 그들은 우리가 먼저 서둘러 산을 오르는 것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산을 오르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네 시간 동안 정상에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쳇 공짜돈 생긴다고 좋아했더니. 어쩔 수 없지 이만 내려가자"

 

그 엄청난 승부욕은 어디로 간 건지 의외로 쉽게 포기하는 그녀였다.

난 아까 질질 끌려가며 바라본 강남녀의 재수없는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그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던 거군…….'

 

하지만 굉장히 핸섬하고 괜찮은 성격의 소유자라고 착각한 그 남자도 우리의 내기를 말리지 않았던 것에 더 큰 배신감을 느끼며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이 설욕을 갚아주기라 다짐하며 내려갈 준비를 하려 일어났다.

 

"아얏!"

 

"왜 그래?"

 

그녀의 조그만 비명에 난 깜짝 놀라 그녀의 발목을 살폈다. 물수건을 풀르자 아까보다 훨씬 심하게 부어있었다.

 

"이런, 혹시 삔거 아냐?"

 

"신경쓸거없어 빨리가자"

 

"신경쓰지 말라니 발목 보니까 코끼리가 와서 친구하자고 할 판인 대, 빨리 업혀"

 

"미쳤냐? 아까는 이기려고 업힌 거야. 내가 아무한테나 쉽게 내 몸을 맡기는 줄 알아?"

 

"웬 몸을 맡겨. 혼자 오버하지말고 업혀"

 

"어라? 내말을 안듣네? 너 나한테 충성을 다하기로 했잖아. 할복할래?"

 

난 괜한 억지를 부리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알았어 내려가서 니가 보는 앞에서 할복해줄테니까 빨리 업혀"

 

"이.. 이런"

 

결국 내가 이겼다. 난 그녀를 업고 천천히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까는 뛰느라 몰랐는데 그녀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게다가 그녀의 머리에서 나는 은은한 샴푸향기가 내 감각을 마비시켰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심장이 내 심장과 함께 울렸고 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별로 힘들단 생각 없이 쉽게 하산할 수 있었다.

 

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가까운 정형외과에 들러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조금 심하게 접찔린것일뿐 삔 것은 아니란다. 난 보란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10만원 공짜돈 얻으려다가 진료비로 5만원 나갔다."

 

"대신 내가 할복하라고 했던거 봐줄게"

 

"야 그건 당연한거 아니냐? 아까 그냥 얼어죽게 내버려두고 올걸 그랬나?"

 

"남자가 째째하게. 알았어. 나중에 내가 술 한 잔 쏜다!"

 

"너랑은 술 마시기 싫은데……."

 

"닥치고 사줄 때 마셔라."

 

"네……."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우리는 학교로 돌아와 헤어졌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샤워도 하지 않고 바로 침대에 누워 곯아 떨어졌다. 아까는 몰랐지만 그녀를 업고 오는것이 꽤 피곤했었나보다. 혹은 그녀가 크게 다치지 않은 것에 마음이 놓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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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종준이!"

 

"오~ 형~"

 

오늘은 목요일. 동아리 개강총회가 있는 날이다. 수업이 일찍 끝난 나는 과제나 할 겸 미리 동방으로 왔고 먼저 와있던 종준이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오랜만인대? 커피나 한잔 할까?"

 

"좋아요. 제가 살게요"

 

"암~ 그래야지. 아 저번에 저녁 쏘기로 한 거 나 아직 안 까먹었다."

 

"아 형 그런 건 좀 까먹어도 괜찮아요."

 

"에이~ 후배가 말한 걸 선배가 까먹으면 섭하지!"

 

농담을 건네며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뽑아든 우리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종준이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곤 불을 붙인다.

 

"너 담배 배웠냐?"

 

"아 네 군대가서요. 잘 피진 않는대 가끔 스트레스 쌓일 때 하나씩 피곤 해요. 형도 하나 피실래요?"

 

"아직도 형 잘 모르냐? 형은 담배 안 핀다."

 

담배를 권한 손을 쑥쓰러운 듯 집어넣은 종준이는 담배를 깊게 피었다.

 

"아름이랑 잘 안되냐?"

 

"헉! 켁켁.. 형 어떻게 아셨어요?"

 

일전에 말했듯 종준이는 무척이나 순진한 녀석이다. 수원 토박이면서 꼭 시골에서 갓 상경한 듯 풋풋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그런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쉽게 얼굴에 드러냈다.

 

"형은 전지전능하다. 형은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형은 너를 구원해줄 수 있다. 형을 믿어라. 헌금은 한달에 10만원만 받는다."

 

그 소리에 종준인 실소를 머금으며 한마디를 툭 털어놓았다.

 

"사실 어제 아름이한테 고백을 했는데요……."

 

또 한 번 담배를 입에 물고 깊게 숨을 마쉰 후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아름인 자기가 예전에 짝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지금 잊어가는 중이래요. 아직은 그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 남아있대요.

그런 마음으로 저랑 사귀면 저한테 너무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응?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말인데…….'

 

난 순간 낯설지 않은 종준이의 말에 깊은 생각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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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내가 대학교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당시. 나도 파릇파릇한 새내기였을 때였다. 처음 동아리에 들어가 동아리사람들과 친해지며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보내고 있었을 때 두 명의 여성이 동아리 방을 방문했다.

 

"안녕하세요. 저 동아리 들고 싶어서 왔어요."

 

가뜩이나 냄새나는 수컷들이 가득했던 우리 동아리방은 그 두 여성을 쌍수를 들고 환영을 했고 더군다나 그 둘 모두 남녀비율 1대9를 자랑하는 외국어대학 스페인어학과 학생들이라니 선배들은 당장 축제라도 벌일 기세였다. 그중 예비역 선배 한명은 자신의 사비를 탈탈 털어 나에게 과자와 음료수를 사오라고 시켰다.

 

'쳇 내가 처음 왔을 땐 김빠진 콜라나 주더니'

 

물론 나도 동아리에 여자 멤버가 생기는 것이 싫지는 않았으나 같은 새내기인대도 갑자기 찬밥신세가 됀 기분에 그 두 여성이 곱게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난 그녀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고 하루하루가 흘렀다.

 

시간은 흘러 대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5월 축제시즌이 다가왔다. 우리 동아리는 올해 새내기들이 많이 들어온 덕분에 처음으로 동아리 주점을 열기로 결정했다. 축제 기간은 일주일이었지만 우리는 축제의 절정! 연예인들의 학교방문이 있는 딱 하루만 하기로 했다.

 

선배들의 주도하에 우리는 차근차근 준비를 했고 이윽고 주점을 열기 하루 전이 되었다.

 

"야 지형아 마트가서 내일 쓸 일회용 그릇이랑 나무젓가락 같은것좀 사와"

 

시간이 남아 동아리방에서 뒹굴거리던 중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되었다.

 

"아 형 저 혼자 그 많은걸 어떻게 들고와요"

 

"그런가? 잠깐 기다려봐"

 

선배는 전화기를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응 나다. 너 지금 시간 있어? 아 다른게 아니라 내일 쓸 일회용 식기같은것좀 사오라고. 내가 오늘 실험발표준비를 해서 시간이 안될 것 같아. 아 그래? 그럼 학생회관 밑에서 기다려 한 놈 더 보낼게"

 

전화를 끊은 선배는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웰컴 투 어색 월드!"

 

왠지 육감이 적색경보를 띄우고 있다.

 

난 선배가 시킨대로 엘레베이터를 타고 학생회관 밑으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오자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띄었다.

 

"안녕?"

 

예전에 들어온 그 두 여자중 한명이 서있었다. 이름은 한정원. 이름만 듣고 처음에는 남잔 줄 알았으나 여자다. 170이 넘는 장신에 새하얀 피부. 빨간 뿔태안경이 인상적이다. 아 하필……. 아까 선배의 사악한 웃음이 생각난다.

 

"가자"

 

그녀에게 딱딱하게 말을 건넨 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5월인대도 불구하고 나와 그녀 사이엔 시베리아기단의 영향을 받는 듯 차가운 칼바람이 불었다. 그런 어색한 기류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우리는 학교를 나섰다.

 

난 이런 분위기가 싫어서 괜히 주위를 둘러보며 딴청을 피웠고 내 시야에 같은 화학실험조 친구 한명이 눈에 들어왔다. 기회는 이때다!

 

"야!"

 

"여~ 지형!"

 

"하하 어디가냐?"

 

난 그 녀석을 붙잡고 정원이에게 말했다.

 

"아 정원아 미안한대 먼저 가서 물건 고르고 있을래? 내일 실험 때문에 이녀석하고 얘기 좀 하고 금방 갈께"

 

"응 그래."

 

그녀도 어색한 분위기가 부담됐는지 쉽게 수긍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간 뒤 난 친구와 이런저런 애기를 하고 20분정도 후에 그녀를 뒤따라갔다.

 

금방 마트에 도착한 나는 안으로 들어가 일회용 식기가 있는 코너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먼저 와서 이것저것 고르고 있어야 할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식품코너를 봐도 없고 위층에 의류매장까지 샅샅이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혼자 벌써 다 사갖고 간건가? 그 많은걸 혼자 들긴 힘들텐데'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심부름을 시킨 선배의 문자였다.

 

'010-****-**** 정원이 휴대폰 번호다. 길을 잃었단다. 전화해서 찾아'

 

어이가 없었다. 학교에서 마트까지는 고작해야 걸어서 15분이면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는 거리다. 초등학생들도 이정도 거리면 길을 잃진 않을 것이다. 그런대 길을 잃었다니.

 

'그나저나 길도 잘 모르면서 순순히 먼저 간다고 한걸 보면 그정도로 나랑 어색한 분위기가 싫었던 건가?'

 

난 전화기를 들고 선배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고 곧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지형인대. 지금 어디야?"

 

"아... 미안... 근대 여기가 어딘지 잘 모르겠어."

 

"주위에 큰 건물같은거 있으면 알려줘봐"

 

"음.. 큰 건물은 없고 무슨 공원같아. 벤치같은거 있고 농구골대도 있고 놀이터도 있어."

 

이 근처의 공원이라면 하나뿐이다. 아는 선배의 자취방이 그 근처라 자주 신세를 진나는 그 장소를 기억해 냈다.

 

"어딘지 알겠다. 내가 그쪽으로 갈께. 농구골대 근처에 앉아있어"

 

"응.. 미안"

 

전화를 끊은 후 공원으로 향했다. 여기서 얼마 멀지 않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공원끝쪽 농구골대 아래 그녀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마치 네 살짜리 꼬마애가 길을 잃고 엄마를 찾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웃으면서 다가갔다.

 

"찾았다. 길치!"

 

"아!... 미안..."

 

"괜찮아 자 이거 마셔. 불안했지?"

 

나는 마트에서 산 캔 커피를 건네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정말 미안해……."

 

"괜찮다니까. 그럴수도 있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사실... 나 중고등학교때도 학교가는 길을 잘 못 찾아서 매일 아빠가 차로 데려다 주셨어."

 

난 그녀의 왠지 다가서기 힘든 인상과는 달리 서투른 면을 보며 예전에 경계했던 마음을 풀고 서슴없이 대하기 시작했고, 그녀도 불안했던 마음이 놓여서인지 생각보다 말도 많이하고 사소한 말에도 크게 웃어주기 시작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전화번호도 알고 친해질 수 있었고 주점을 하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하루에 문자 백통도 넘게 주고받았을 정도였다. 친해지고 보니 그녀는 꽤나 귀엽고 자상한 성격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에게 조금씩 기울어 가는 내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방학시즌이 가까워지면서 시험기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같이 공부를 했다. 배가 고프면 치킨도 시켜먹으며 시험을 준비했고 드디어 나는 마지막 시험 하나를 남겨놓고 있었다. 이 시험만 보면 여름방학에 돌입하고 난 집이 있는 인천으로 올라가기로 되어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와 더 이상 쉽게 만날 수 가없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음에도 난 그 생각 때문에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내 마음을 보여주기 힘들꺼야, 절대 후회하긴 싫어'

 

난 마음을 굳게 먹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지형아."

 

"공부하는대 미안, 잠깐 나와서 음료수 한잔하자 공부도 쉬엄쉬엄해야지"

 

"그럴까? 잠깐만 기다려"

 

난 먼저 기숙사 앞으로 가서 음료수 캔 2개를 뽑은 후 그녀를 기다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가 나왔다. 캔 하나를 건네준 뒤 말했다.

 

"산책이나 할까?"

 

"그래"

 

우리는 천천히 산책삼아 천천히 걸었고 이윽고 인적이 드물어 조용한 천문대에 도착했다. 우리는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이곳이 높은 곳에 위치해서 그런지 학교야경이 훤히 보여서 분위기가 꽤 좋았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와 오늘 보름인가봐. 달이 정말 동그라네."

 

"그러게 엄청 밝다."

 

난 그녀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입을 열었다.

 

"정원아. 나 하고싶은 말이 있어……."

 

난 잠시 뜸을 들였다.

 

"이런 말 처음 하는거라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뭐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

 

역시 말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용기가 필요한때이다.

 

"나 정말 네가 좋다."

 

말했다!

 

갑작스런 고백에 그녀는 놀란 토끼마냥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바라봤다. 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잔뜩 긴장했다. 아직 별로 덥지 않은 6월인대도 내 등줄기에는 굵은 땀방울들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처음에 놀란 눈으로 날 바라 봤지만 이윽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무표정한 얼굴로 달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형아 나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내일 너 시험이잖아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일찍 쉬어, 나 먼저 들어갈게"

 

말을 마친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한 강풍 앞의 거미줄마냥 긴장되었던 마음이 급격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난 왠지 허탈한 기분에 달을 보며 남은 음료수를 단숨에 비웠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랗게 빛나는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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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난 시험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원래는 그날 인천으로 올라갈 예정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답을 듣기 위해서다. 고백을 한 뒤로 그녀와의 사이는 급속도로 어색해졌다. 그렇게 그녀도 마지막 시험을 앞둔 전날 우리는 같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나는 자료열람실에서 빌린 책을 읽고 그녀는 공부를 했다. 그렇게 몇 시간 후…….

 

'툭'

 

뭔가 내 머리를 쳤다. 무슨 일인지 알기 위해 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렇다. 책 몇페이지 넘기고 바로 몽환의 세계로 빠져버린것이다. 난 어렸을 적부터 책 몇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항상 잠에 빠져버리곤 했다. 주위사람들은 이런 날 보고 kh대에 입학한 것은 하늘이 내리신 기적이다 뭐다 해서 합격당시 여러 예비 고3 어머니들이 날 찾아와 손을 어루만지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잡담은 이만하고 난 내 머리를 친 것의 정체를 알기위해 주위를 돌아보며 시야를 밝혔다. 옆에 있던 그녀는 언제 나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언제 나갔지?'

 

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기 위해 책상을 봤다. 거기엔 내 머리를 친 범인인 것 같은 편지 한통이 자리잡고 있었다. 난 그 편지를 보자 갑자기 불안해 휩싸이기 시작했다. 자세를 고쳐 잡고 난 조심스레 편지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꺼내 펼쳤다.

 

편지지에 써져있는 글을 보고 처음 들은 생각은

 

'참 글씨 못쓰네…….'

 

예상대로 정원이가 쓴 편지였다. 대부분 내 또래 여자애들은 예쁜 글씨를 쓰려고 글씨를 작게 쓴다던지 자기 나름대로 노력을 다하던데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이 삐뚤빼뚤한 글씨를 보자니 머리가 다 아팠다. 이건 아마 내 왼손으로 쓴 글씨보다 약간 나은 정도의 글씨였다.

하지만 그런 글씨를 보고 있자니 그녀의 인간적인 면을 또 하나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글씨는 이쯤해 두고 천천히 편지를 읽어나갔다.

 

'지형아. 네가 나를 좋아한단 말을 들었을 땐 정말 기뻤어. 이런 나를 좋아해줘서 너무 고마워. 하지만 네 말을 듣고 난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 사실 나 예전부터 좋아하던 사람이 있어. 그런대 지금은 그 감정이 이루어 질 수 없단 걸 깨닫고 그 사람을 잊어가는 중이야…….

그러던 중 너의 마음을 듣게 된 거고……. 지금 이런 상태로 내가 너를 좋아하면 그건 너한테 너무 못된 짓을 하는 것 같아. 너는 모르겠지만 나 자신한테는 도저히 내가 용서가 안 될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이해해줄수 있지? 우리 정말 좋은 친구잖아. 다시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 정말 미안해.' from 정원

 

난 나락에 떨어지는 듯 한 기분을 느꼈다. 난 곧바로 방으로 돌아와 짐을 챙기고 인천으로 올라왔다. 학교에 있으면 뭔가 큰일을 벌일 것 같이 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쓰디쓴 아픔을 느끼며 이틀을 지냈다. 그녀에게는 연락도 없고 나또한 그녀에게 연락할 자신이 없었다. 밥도 안먹고 이틀을 보낸 나를 보면서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셨는지 내 방에 들어오셔서 왜그러는지 묻기도 하셨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을 먹지 않은지 삼일 째, 오후가 되자  집에 친구가 찾아왔다.

그 친구의 이름은 김상열.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지만 서로 오래전부터 알고지낸 사이마냥 첫 만남부터 편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낸 친구다. 이 친구는 상대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보고 정곡을 찌르는 비상한 말재주를 가져 가끔 처음만나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곤하지만 알고보면 굉장히 인간적이고 털털해 금방 친해 질 수 있는 친구다. 가끔 보이는 수준급의 몸개그를 통한 바보같은 모습은 그 친구의 또 다른 매력이다. 부모님이 내가 걱정이되서 불렀나보다.

 

"야임마! 뭐하냐!"

 

"웬일이냐"

 

"웬일이긴! 인천에 올라왔으면 형님한테 먼저 신고를 해야지! 빠져가지고 이게"

 

이 친구는 인천에서 초, 중,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까지 i대로 간 순 토종 인천사람이다.

 

"뭔 헛소리야. 인천이 니땅이냐?"

 

"몰랐냐? 내땅인거?"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인사를 건넨 그는 컴퓨터 책상에 딸린 의자를 끌고 와서 등받이를 양손으로 감싸고 턱을 괜 채 앉았다.

 

"실연이라도 당했냐? 뭐 그리 풀이죽어있어"

 

"……."

 

"설마 진짜 실연당했냐?"

 

역시 비상한 재주를 가진 놈이다.

 

"임마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께 걱정 끼쳐서야 쓰겠냐? 얼른 밥이나 먹어라 형님이 술 한 잔 살께"

 

나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일어나 말했다.

 

"꽃등심안주 아니면 안먹는다."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니 몸뚱이에서 꽃등심 없어지는 줄 알아라."

 

 

 친구와의 술한잔후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그녀를 잊어보고자 시간을 바쁘게 보내기 시작했다. 해외로 여행도 다녀오고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쉴 틈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고 덕분에 점차 마음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여름방학의 중반, 나는 동아리 엠티에 참석하기 위해 대천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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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하는 태양아래 열이 오를대로 오른 아스팔트는 자기만 뜨거울 수 없다는 듯 사방으로 뜨거운 기운을 내뿜었고 가끔 불어오는 바람조차 뜨겁고 텁텁한 공기를 몰고 와 실로 여름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날씨였다. 그런 날씨 북적북적한 휴가인파속에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같은 동아리니 그녀 또한 엠티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인사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그녀를 잊기 위해 하루하루 쉴 새 없이 시간을 보낸 내가 왠지 더 초라해지고 허탈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녀도 분명히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나를 대하는 걸 보면 꽤나 용기를 낸 것이리라.

 

"그럼! 밥 먹을 시간도 못챙길정도로 바빠 죽는 줄 알았어! 아오 근대 너무 날씨가 더워서 말이지……."

 

나 역시 그녀의 용기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큰소리로 활기차게 대답했다. 그녀 역시 그런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모든 동아리 사람이 모이길 기다린 후 우리는 방을 잡고 옷을 갈아입은 후 차가운 파도가 반겨주는 바다로 몸을 내던졌다. 그렇게 신나게 노는 동안에도 나는 힐끗 힐끗 그녀를 쳐다봤다. 역시 그녀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평소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물장난을 쳤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나도 왠지 안심이 되었다.

 

해질 무렵까지 물놀이를 즐긴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저녁 준비를 했다. 저녁메뉴는 엠티의 단골메뉴 삼겹살! 저녁이 되자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한여름 밤의 더위를 식혀주었다. 거기에 갓 구운 삼겹살을 얹은 큼지막한 상추쌈을 한입 먹으니 지상 낙원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푸짐한 저녁을 먹은 우리는 곧바로 술자리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는 웃음소리로 가득해지고 여기저기 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아마 하루 종일 물놀이를 하느라 다들 피곤한 차에 술을 마시니 취기가 빨리 오른 모양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이 몇 잔만 더 마시면 바로 골아떯어질 것 같았다. 대학교에 들어와 처음 온 여름엠티인대 이렇게 빨리 잠을 잘 순 없다. 그리고 먼저 잠들면 나에게 어떤 봉변이 닥칠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난 고등학교보다 심한 장난으로 익히 알려진 대학엠티문화가 두려웠다.

 

난 한창 무르익은 술자리에서 일어나 술이나 깰 겸 바람을 쐬러 바닷가를 거닐기 시작했다.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고 빠져나가며 내 발을 살짝살짝 간지럽혔다. 시원한 그 느낌이 싫지 않아 눈을 감고 천천히 걸었다.

 

"지형아."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난 감았던 눈을 뜨고 뒤를 바라봤다. 그녀였다. 그녀도 꽤나 취했는지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 정원이구나."

 

그녀는 내 옆에 나란히 발을 맞추며 같이 걷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여름엠티 정말 재밌는 것 같아. 내가 기대했던 대로야"

 

"그렇지? 나도 너무 재미있어서 하루 먼저 가야된다는 게 너무 아쉬워"

 

그녀는 어머니 생신이 껴서 내일 먼저 올라가 봐야 한단다.

 

"어쩔 수 없지, 어머니 생신이신대 하나뿐인 딸이 곁에 없어서야 되겠어?"

 

"응……. 네 말이 맞아"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바닷가를 걸었다. 

 

오랜 적막을 먼저 깨뜨린 건 그녀였다.

 

"그런대 지형아"

 

"응?"

 

그녀는 말을 시켜놓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땠다.

 

"너 혹시 아직도 날 좋아해?"

 

순간 눈앞이 아늑해짐을 느꼈다. 한껏 취기가 올라와 제정신도 아닌 상태에서 그것도 너무 갑작스레 그런 질문을 받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맨정신이었으면 백번이고 '당연하지'

라고 대답했을 질문이다. 하지만 입에 철장을 달아놨는지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애들아~!"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듯한 큰 소리에 우리는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동아리 여선배중 하나가 뒤에서 우리를 부르며 황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그분역시 취하셨는지 달려오는 상태가 휘청휘청 보는 사람이 더 안쓰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달리기를 꽤나 잘하시는지 순식간에 우리앞으로 다가왔다.

 

"술먹고 바다 들어가면 안된대 헤헤, 정원아 우리 빨리 돌아가서 한잔 더 하자 빨리"

 

선배는 정원이를 끌고 가면서 말했다.

 

"지형아 너도 빨리와!"

 

"네 선배 술만 깨고 금방 갈게요"

 

그렇게 대답한 나는 멀어져가는 정원이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다음날 예정대로 정원인 우리보다 하루 먼저 집으로 돌아갔고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여름엠티는 끝나갔다. 그 후에도 우리는 예전처럼 친구로 재미있게 지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엔 여전히 그녀가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이런 관계마저 깨질까봐 두려워 그 마음을 깊은 곳 어딘가에 꽁꽁 묶어 숨겨두었다. 단지 그냥 옆에서만이라도 그녀를 보고 싶었다.  2학년이 된 후 난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한 후 다음해부터 군복무를 시작했고 그녀도 나와 같은 시기에 휴학을 한 뒤 다음해에 스페인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렇게 우리는 2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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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아.., 아 아냐 어디까지 말했지?"

 

종준이의 말에 나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지금 종준이의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전의 내 모습과 딱 겹쳐졌다. 난 조용히 말했다.

 

"그 애도 아마 지금 자기가 사랑하던 사람과 이뤄질 수 없음을 깨닫고 꽤나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을꺼야. 네가 정말 아름일 좋아해 줄 수 있다면 그 상처를 바로 네가 아물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건 너만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닐까? 뭐 간단히 말하자면 절대 포기하지 말란 말이야.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그녀에게 고백 한 후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다.

 

 

"……."

 

종준이는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손가락 끝에 아슬아슬 하게 걸쳐있는 담배불씨가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종준이와 이야기를 마친 후 동방으로 내려오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보다 모르는 얼굴들이 더 많으니 이번에 새내기들이 많이 들어왔나보다. 창가에는 내가 충성을 다하는 그녀도 보였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보인다. 하지만 옛 기억을 되살린 후 그녀를 보니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다.

 

우리가 들어오자 곧 동아리 회장이 일어나 말했다.

 

"자 모일사람은 다 모인 것 같으니 개강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잠깐만요~~옷!"

 

사람이 많아 답답해서 동방문을 열어놨는대 열려진 문사이로 복도를 메아리치며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급히 뛰어오는 듯 빠른 발소리가 들리고 곧 익숙한 실루엣이 문 앞으로 튀어나왔다.

 

"헥..헥...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 익숙한 실루엣의 정체를 눈으로 확인 한 순간 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 정원이누나!"

 

옆에 있던 종준이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순간 패닉상태로 빠져들었다.

분명 그녀는 스페인으로 어학연수를 갔다고 들었다. 그런대 지금 여긴 한국. 그녀가 여기 있으면 안되는거 아닌가? 아니 여기 있을 수가 없잖아! 혼란스러운 머리를 가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상태는 상관없다는 듯 그녀는 빈자리에 들어와 앉았고 개강총회는 시작되었다.

 

개강총회는 각자의 소개로 시작되었고 올해 우리 동아리의 목표를 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회장이 일어나 말했다.

 

"자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모두 뒤풀이 자리로 이동하겠습니다. 마을로 이동해주세요"

 

마을은 우리학교사람들이 학교 바로 옆에 붙어있는 작은 술집골목을 부르는 애칭이다. 우리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삼삼오오 흩어져서 마을로 향했다. 나는 종준이와 이런 저런 애기를 하며 학관을 나와 걷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정원이가 뛰어왔다.

 

"야! 송지형! 너 나한테 인사도 안하냐?"

 

화를 내고 있었지만 귀여운 말투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내 눈과 가슴이 편치 않았다. 그녀를 좋아하는 그 마음이 여전히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내가 그랬나? 미안……."

 

난 어색하게 대답했고 그녀는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흥 내가 2년동안 보고싶지도 않았나보지? 난 얼마나 니가 보고 싶었는데!"

 

순간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농담은... 그런대 언제 한국에 들어온거야?"

 

"아, 얼마전에. 헤헤"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 이번학기 복학을 위해 미리 한국에 들어온 듯 했다.

 

"아 그랬어...? 뭐 어찌됐건 빨리 가자, 애들 기다린다."

 

나는 괜스레 발걸음을 빨리 했고 정원이와 종준이도 서둘러 뒤따라 왔다. 그때 난 갑작스런 정원의 출연에 정신이 팔려 뒤쪽 새내기 무리 중 한명이 날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술자리에서도 새내기들은 얼굴을 잘 몰라 어색하다며 내 옆자리를 고집하는 정원이 때문에 무척 난처했다. 곧 술자리는 무르익어 대학가 술문화의 꽃인 게임으로 이어졌다. 스타트게임은 스피드한 진행이 매력인 눈치게임! 1부터 숫자를 부르며 마지막 숫자를 외치거나 두 사람 이상이 동시에 같은 숫자를 외치면 걸리는 게임이다. 마지막 숫자는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숫자로 정한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난 특히 이 게임에 약하기 때문이다. 만약 게임에 지는날엔 500cc맥주잔에 가득담긴 소맥을 한번에 원샷을 해야 한다. 어떤 정신나간 자식이 소맥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맥주잔 안에는 맥주가 거의 들어있지 않은 듯 맑은 색을 띄며 청아한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잔을 채우고 있는 대부분의 술이 소주란 소리다.

 

"하나!"

 

눈치 빠른 선배 한명이 먼저 선수를 친다.

 

"둘!"

 

대담한 새내기 한명이 소리를 질렀다.

이쯤에서 한번 외쳐…….

 

"셋!"

 

아 늦었다. 그렇다면

 

"넷!"

 

"넷!"

 

동시에 소리가 울렸다. 난 절망했다.

 

'아……. 이게임은 정말 어려운 것 같아. 그나저나 하나는 나고 다른 하나는 누구지?'

 

난 이 게임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나와 같은 운명을 하게 된 사람을 보려 얼굴을 돌렸다. 아뿔싸……. 그곳엔 낙담하고 있는 정원이가 있었다. 우린 서로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봤고 그런 우리를 향해 새내기들이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러브샷! 러브샷!"

 

이 녀석들 새내기 ot에서 제대로 배우고 왔나보다.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녀가 먼저 말을 했다.

 

"나 러브샷 처음하는거다……. 너! 영광인줄 알아!"

 

'내가... 처음?'

 

우리는 새내기들의 성화에 못이겨 러브샷을 했고 난 그녀의 말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원샷을 했다. 원래 술이 약하지 않은 나조차 이 소맥은 넘기기가 힘들었다. 대충 잔을 비우고 그녀를 보니 그녀는 깨끗이 잔을 비우고 머리위로 잔을 세우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

 

그리곤... 그대로 쓰러졌다…….

 

잊고 있었다. 그녀는 소주 한잔도 여러 번 끊어마실정도로 술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난 갑자기 쓰러진 정원이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새내기들에게 말하며 그녀를 업었다.

 

"내가 동방에 데려가서 재울 테니까 신경쓰지 말고 계속 놀아."

 

난 그녀를 업고 술집을 나왔고 이때까지도 나를 쳐다보고있는 한 쌍의 눈동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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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뭐 이렇게 무거워."

 

역시 키가 커서 그런지 아니면 술에 취해 몸을 축 늘어뜨려서 그런지 동방으로 오기까지 평소 같으면 10분이면 오는 거리를 30분이나 걸려 도착했다. 난 그녀를 반듯하게 눕힌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술때문에 기절을 한건지 어떤 건진 잘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기엔 아주 깊은 잠에 빠진 듯 새근거렸다. 난 조용히 그녀 얼굴을 바라봤다.

 

지난 2년동안 보고 싶었던 얼굴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2년동안 그녀를 생각하며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이번엔 꼭 잡고 싶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대 막상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나자 망설여졌다. 얼마전에 나타난 한 사람 때문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사람 때문에 2년동안 기다려온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누가 문을 열려는 듯 동아리문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고 한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사람은 바로 내 마음을 흔들고 있는 주인공이었다.

 

"아 미소야……."

 

내가 나온 뒤 뒤따라 나온 모양이다. 그녀는 다짜고짜 물었다.

 

"죽을래?"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난 당황했다.

 

"뭐..뭐 왜 그래?"

 

"몰라서 물어? 둘이 무슨 사이야?"

 

그녀는 옆에 곤히 잠들어 있는 정원이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재차 물었다.

 

"무슨사이긴 우린 1학년 때부터 엄청 친한 친구사이였어."

 

"짝!"

 

내 얼굴이 오른쪽으로 90도 돌아갔다. 뺨이 얼얼해지며 화끈거린다. 하지만 그런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그녀의 말이 들려왔다. 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눈뜬 장님인줄 아냐? 뭐? 엄청 친한 친구사이? 지금 나랑 장난하냐?"

 

그녀는 새빨갛게 충열된 눈으로 소리쳤다.

그녀의 강력한 손바닥에 난 순간 생각이 멈췄고 이성을 잃은 입은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장난? 내가 지금 장난하자고 너랑 얘기하는 걸로 들리냐? 지금 우리가 연인사이라도 되는 줄 아나본대 그래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연인사이라고 치자. 니가 뭔데 우리 사이에 참견인대? 너야말로 나랑 무슨 사이라도 되는 줄 아냐? 너랑 나랑 만난 지 고작 2주도 안됐어. 니가 날 알기나 해? 내기에서 져서 해달라는거 다해주고 오냐오냐 해줬더니 정말 내가 네 꼬봉이라도 되는 줄 아나보지?"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입이 닫혔다.

그녀는 충격이 큰 듯 아무소리도 하지 못하고 충열된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큰 소리를 내며 울 것 같은 눈이었지만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굳게 닫은 그녀의 입술은 절대 눈물을 허용치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곧 뒤돌아 나가버렸다.

 

난 그녀가 나간 뒤에도 한참이나 서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한거지?'

 

사방은 정원이가 숨 쉬는 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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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동방에서 자고있는 정원이를 혼자 둘 수 없어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큰 사건을 겪은 뒤라 그런지 마음은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은 지 오래다. 곧 새벽이 다가왔고 오늘은 웬일인지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또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 뒤척이며 깨어났다.

 

"아우...머리야……."

 

"일어났어?"

 

"지형아 나 물좀줘"

 

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인상을 찡그리는 그녀에게 물을 건넸다.

목이 많이 탔던 듯 그녀는 조그만 생수 한 병을 한 번에 비워냈다.

 

그녀의 모습에 미소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었다.

 

"아... 죽겠네... 지형아 어제 어떻게 된거야?"

 

"기억 안나? 너 소맥 한잔마시고 완전히 뻗었어."

 

"정말? 아후... 왜 그랬지...근대 왜 넌 여기있는거야?"

 

난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흥. 몰라서 묻냐? 니가 뻗으면 챙겨줄 사람이 나밖에 더있냐?"

 

"헤헤. 고마워. 그럼 그때부터 쭉 여기있었던거야?"

 

"응"

 

"에이... 만나자 마자 못볼꼴부터 보였네……."

 

"뭐 어때 우리사이에"

 

내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자 그녀도 금방 환히 웃었다.

 

"세수라도 하고와. 해장하러가자."

 

"응!"

 

밝게 대답한 그녀는 동방에 비치된 비누를 가지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구나…….'

 

우리는 밖으로 나와 근처 해장국집에서 해장국을 먹은 뒤 헤어졌다.

 

난 방으로 돌아와 바로 침대와 몸을 합체했다. 강의가 하나 있긴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머릿속은 온통 미소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다. 하지만 밤을 샌 나는 피곤했던지 난 금방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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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서산으로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에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정말 오랜만에 잘 잔 것 같다. 제일 머릿속이 복잡한 이때에 잠을 설치기보다 더 푹 잘 수 있는 내가 더 신기할 따름이다. 간단히 세면을 한 뒤 머리를 털며 핸드폰을 봤다. 문자한통이 와 있었다.

 

'문자 보면 바로 연락줘!'

 

정원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를 만날 기분이 아니다.

핸드폰을 침대에 던지려던 찰나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찬수.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도로 침대에 던졌다. 핸드폰은 두 번 정도 더 울린 뒤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난 조용히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키고 습관처럼 메신저에 접속했다. 미니홈피를 열어보니 인터넷을 하지 않은지 꽤 되서 그런지 방명록에는 여러 사람들의 흔적이 보였다. 난 특별히 할일도 없고 하니 방명록을 하나하나 읽어갔다. 우선 종준이가 쓴 글이 보였다.

 

'형 저 그 사람 진짜 좋아해요. 저 포기하지 않을꺼에요. 형 항상 고마워요!'

 

내 얼굴엔 살며시 미소가 어렸다.

 

그밖에도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 인사 모르는 사람들의 광고글...

무심히 마우스 휠을 아래로 돌리는 중 한 사람의 이름에 마우스가 고정되었다. 이미소...

 

어제 내가 내뱉었던 말들이 생생히 되살아나 귀에 꽂혔다.

'어쩌자고 그런 말들을 내뱉은거지…….'

그러나 지금 후회해봤자 이미 쏘아진 화살이다. 

난 씁쓸한 마음을 안고 그녀가 쓴 방명록을 읽어내려갔다.

 

"쫄따구! 이 몸이 여기에 글써주는걸 영광으로 알아라! 동방에 써져있는 주소보고 몸소 찾아왔으니 말이야ㅋㅋ 너 근대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냐? 모르지? ㅋㅋㅋ 오늘은!! 바로 이 몸이 귀빠진 날이시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무~지 기분이 좋아ㅋㅋ 이따가 개강총회서 보자!"

 

방명록을 쓴 날짜를 보니 바로 어제... 하필 그녀의 생일에 그런 말들을 하다니…….

저승사자가 와서 내 팔을 잡아끄는 기분이 들었다.

혼자 낙담하여 머리를 움켜잡고 좌절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야! 송지형!! 내다 임마!"

 

찬수다. 전화를 안받자 방까지 찾아왔나보다.

 

"그렇게 쳐서 문 부서 지겄냐?"

 

"그러길래 왜 전화는 안받는대? 손가락이라도 부러졌나?"

 

난 시답잖은 그의 농담에 썩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됐고, 근대 여기까지 왜 온건대? 뭐 급한일이라도 있냐? 급한 일이 아니라면 니 가운데 손가락이 부러지는걸 니 눈으로 보개 될 거야"

 

"까칠하긴, 니 어제 정원인 잘 데려다 줬나?"

 

"아 동방에서 재우고 아침에 해장국 사 먹이고 들여보냈어. 왜? 정원이 얘기냐?"

 

"하여간... 눈치빼면 시체인 놈. 맞다 정원이 말인데. 스페인에 있는 대기업에 대학생 인턴으로 들어갔다더라. 그래서 4학년은 스페인에 있는 대학에 다닐껀가봐. 이번에 학교온건 그것 때문에 서류정리 하려고 온 거고. 근대... 니 괜찮나?"

 

1학년 때 정원이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대충 아는 찬수는 정원이의 소식을 접하자마자 나에게 뛰어온 것 같다. 난 급히 정원이에게 전화를 걸며 밖으로 뛰어나왔다.

 

"여보세요?"

 

내 전화를 기다렸던 듯 금방 전화를 받았다.

 

"너 어디야"

 

"나 지금 외대야"

 

"거기 꼼짝말고 기다려!"

 

"무슨?..지형.."

 

난 바로 전화기를 끊고 외대로 달려갔다. 떠난다는 말이 사실인지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멀리 그녀가 보였다. 핸드폰을 한손에 든 채 의문스런 표정으로 서있었다. 곧장 그녀를 향해 뛰었다.

 

"헉헉... 야! 너... 사실이야?"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겠단 표정으로 말했다.

 

"응? 뭐가? 왜 그래? 뭐가 사실이란거야?"

 

난 간신히 숨을 고르고 다시 물었다.

 

"너! 스페인에서 인턴으로 취직했다는거!"

 

그녀는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며 대답했다.

 

"아... 그거.... 들었나 보구나. 응... 사실이야."

 

난 급격히 다리에 힘이 빠져나가는걸 느꼈다.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앉았다.

 

"사실...이구나……."

 

"미안... 어제 말해주려고 했는데……."

 

난 애써 웃으며 괜찮은 척 말했다.

 

"괜찮아. 잘됐네 스페인에서 취직까지 하다니. 맨날 공부 안하고 놀러만 다닌 줄 알았더니 가서는 공부 열심히 했나보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지……."

 

"그래... 그렇구나……."

 

웃고있었지만 내 웃음이 억지라는 건 지나가는 지렁이라도 알 지경이었다. 그녀도 내 표정을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형아! 나 먹고 싶은거 있는데!! 같이 가자!"

 

"응?"

 

갑자기 밝아진 그녀의 목소리에 놀란 나는 그녀가 팔을 잡아끄는 바람에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학교 근처에 있는 술집. 1학년 때 그녀와 친해진 후 자주 와서 술을 마시던 곳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소주는 한잔도 잘 못 마시지만 이곳의 칵테일 소주는 두병도 너끈히 마셨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도 보지 않고 주문을 했다.

 

"아주머니 저희 만두부대찌개랑 칵테일소주 주세요. 레몬맛으로요."

 

그녀는 주문을 한 뒤 나를 보고 싱글거리며 말했다.

 

"나 스페인에 있을 때 여기서 칵테일소주 진짜 먹고 싶었다? 너 기억나? 왜 우리 여기서 그거 마시다가"

 

"아! 보관함!"

 

난 처음 그녀가 왜 이곳에 데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으니 문득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바로 보관함. 이 가게안쪽 구석 벽에는 특이하게도 지하철에나 있을법한 물건보관함이 있었다. 지하철의 그것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조그만 책 한권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이 보관함은 연인이나 친구들끼리 자신들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넣어놓는 이색적인 보관함이었다. 우리도 예전에 이 가게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 보관함을 보고 추억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각자 그 당시 가지고 있던 물건을 하나씩 넣고 보관했던 걸로 기억한다.

 

"너 아직도 보관함 열쇠 갖고 있어?"

 

나의 물음에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내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의 두 번째 손가락 끝에는 조그만 열쇠가 흔들거렸다.

 

나는 열쇠를 가지고 보관함에서 예전에 넣어뒀던 물건들을 꺼내 탁자에 내려놨다. 100원짜리 동전 하나와 보라색 펜 하나가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기억나? 넌 우리가 만난 2006년을 기념하려고 2006년이 새겨진 100원짜리 동전을 넣었었잖아. 난 이 펜을 넣었고."

 

"까먹고 있었는데 이제 기억나네. 근대 넌 왜 펜을 넣은거야? 그때에 펜을 넣은 이유는 듣지 못한 것 같은데?"

 

"음~ 그건... 비밀!"

 

"엥?"

 

비밀이라 말하며 '절대 말해줄 수 없어'라고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난 피식 웃으며 방금 나온 칵테일 소주를 채웠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건배나 하자. 우리 오랜만이지?"

 

"응. 정말 오랜만이다 헤헤"

 

그녀의 귀여운 웃음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그녀가 스페인으로 떠난다해도 난 지금 이 순간이 좋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과 같이 있는 이 시간이 좋다.  

 

우리는 이런 저런 애기를 하며 술을 마셨다. 그녀의 미소에 취한건지 아니면 잔잔한 술기운에 취한건지 미소에게 심한 말들을 내뱉고 괴로워하던 마음이 점점 무뎌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밤은 깊어만 갔다.


보름이 흘렀다. 오늘은 정원이가 스페인으로 떠나는 날이다. 그녀가 다니는 학교는 4월부터 새 학기가 시작하니 조금 일찍 스페인에 가서 이것저것 준비를 해야 하는 모양이다. 그녀가 한국에 있는 동안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 사람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준 것 같아 눈앞엔 정원이가 있을 때에도 그 사람이 떠오를 때가 많았다.

 

오늘 난 그녀가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공항까지 마중을 해주기로 했다.

 

"응 알았어. 공항에서 보자."

 

그녀의 전화를 끊은 뒤 준비를 끝낸 후 나가기 위해 신발장을 열고 신발을 꺼냈다. 문득 신발장에 놓여있는 뾰족구두가 보였다. 미소와 등산을 갈 때 잘못알고 처음 신었던 구두다. 그녀는 보름째 아무 연락이 없다. 내가 먼저 그녀에게 연락을 할 자신은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그녀의 얼굴을 볼 자신도 없었다.

 

난 고개를 한번 저은 후 신발장을 닫고 공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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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

 

"잘있어, 가서도 연락할게."

 

"응, 건강 잘 챙기고 한국 들어올 일 생기면 꼭 말해줘."

 

그녀와 작별인사를 했다. 그래도 정말 좋아했던 사람이 떠난다니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그녀는 마주 손을 흔들며 게이트 안으로 향했다.

 

하지만 역시 난 그녀가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안으로 향하는 것을 본 뒤 난 곧바로 발걸음을 돌려 나오려했다. 그때였다.

 

"지형아!"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날 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내 앞에 멈춰서서 말했다.

 

"쳇! 들어가는것도 안보고 가냐 이 매정한 놈아!"

 

"미안……."

 

난 아무 생각없이 대답했다.

 

"자 이거 받아"

 

그녀의 손에는 조그만 열쇠가 들려있었다.

 

"우리 보관함 열쇠야. 이따가 가서 열어봐"

 

내가 그 열쇠를 바라보고만 있자 그녀는 내 손을 들어 열쇠를 꽉 쥐어 주었다.

 

"지형아. 우리 정말 좋은 친구지?"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만큼 좋은 친구도 세상에 없을걸?"

 

난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녀의 웃는 표정이 어쩐지 슬퍼보였다. 

 

"그래, 나 진짜 갈게. 잘있어"

 

그녀는 말을 한 뒤 대답도 듣지 않고 게이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난 잠시 손을 펴 그녀가 쥐어준 열쇠를 쳐다본 뒤 곧 주머니에 집어넣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와 방에 멍하니 앉아있을때 찬수가 찾아왔다.

 

"여~ 뭐하고 앉아있냐?"

 

난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멍하니 앉아있었다.

 

"왜이리 넋이 나갔나? 정원이때문에 그러냐? 아 쉐끼 사내자식이 그런 일로 넋이 나가고 그래, 밥이나 묵으러 가자"


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니가 쏘는거냐?"

 

"아 이 개색히"

 

찬수와 난 밥을 먹기 위해 기숙사 푸드코트에 갔다. 밥을 먹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한산한 분위기였다.

 

찬수에게 말했다.

 

"난 제일 비싼걸로 먹을래"

 

"닥치고 사주는대로 쳐 묵으라."

 

역시 내 친구다. 그는 제일 싼 참치비빔밥 두 그릇을 들고 왔다.

우린 푸드코트 중앙에 놓인 대형티비를 보며 열심히 밥을 비볐다. 티비에선 8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신입앵커인지 가끔씩 말을 더듬었는대 우린 그걸 보며 웃으면서 농담을 주고 받았다.

 

"야 너 사투리도 이제 많이 안쓰는대 앵커나 해라, 목소리도 좋자나 내가 생각하기엔 저 앵커보다 니가 훨씬 나을 것 같다."

 

"동감이다. 쟤 왜 저렇게 말을 더듬나?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 뉴스진행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때였다. 그 어설픈 신입앵커 가슴팍 밑으로 빨간 바탕에 속보 자막이 나왔다.

 

'대한항공 스페인행 비행기 운행 중 추락, 현재 확인된 사망자 201. 생존자 無'

 

화면은 곧바로 넘어가 불이 붙어있는 비행기 앞쪽부분을 비추고 앵글을 옆으로 팬닝했다. 화면에 보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주위엔 구급차로 보이는 차들이 즐비했고 소방차들도 여러 대 있었다.

주황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난 불길한 예감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를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찬수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스페인행이면... 정원이!"

 

설마 그럴리가 없다. 저 비행기는 정원이가 탄 비행기 일리가 없다.

정원이는 분명 스페인에 도착해 입국수속을 밟고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믿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화면을 계속 주시했다.

 

화면은 쉴 새 없이 넘어갔고 곧 확인된 사망자 명단이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 그 화면에 나오지 말아야 할 나와선 안 될 석자의 글자를 볼 수 있었다. 한정원... 글자는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내 눈엔 모든 것이 멈춰있는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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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그녀의 화장을 끝내고 돌아오는 버스안이다. 굵은 빗줄기들이 창가를 두드린다.

 

처음 그녀의 장례식에 갔을 때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그녀가 활짝 웃고있는 영정사진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다가와 떠나는 자신을 왜 잡지 않았는지 물을 것 같았다.

 

그 사진을 보고 있으니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 세상이 날 버린 것 같았다. 그자리에서 당장이라도 뛰쳐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삼일 밤을 샜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지금 주저앉으면 그녀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장례절차가 끝날 때까지 두 눈으로 끝까지 지켜보고 그녀의 가족과 인사를 한 후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와 검은 넥타이를 풀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사방은 어두웠고 주위엔 빗소리 외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시간이 죽어있는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눈뜰 힘조차 없었다. 쾅소리를 내며 머리가 책상을 때렸다. 아프지 않았다. 난 그 상태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허리에서 적색경보가 울려 난 눈을 뜨고 몸을 세웠다. 여전히 어둡고 조용했다.

 

난 한숨을 크게 쉬고 뿌예진 눈을 비비고 시야를 확보했다. 삼일동안 비어있던 방안은 지금의 내 심정을 보듯 난잡하게 어질러져있었다. 난 천천히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옷은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넣어놓고 신발은 신발장에 넣어뒀다. 책상 또한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어질러져있다. 펜들을 정리하고 노트북도 닫고 여기저기 정리를 했다. 그러다  문득 책상 귀퉁이에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열쇠였다.

 

그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주고 간 열쇠... 그러고 보니 자신이 떠난 후 보관함을 열어보란 말이 떠오른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난 그 술집에 가기 위해 대충 샤워를 한 후 모자를 쓰고 술집으로 허둥지둥 뛰어갔다.

 

보관함을 열자 조그만 편지봉투가 눈에 띄었다. 난 그 편지를 조심스레 꺼내든 후 방으로 돌아왔다.

 

모자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편지봉투를 뜯었다. 예쁘게 접힌 편지지를 꺼내 열어보았다. 작지만 하나하나 정성스레 쓴 듯 아주 예쁜 보라색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 지형아? 나야 정원이

 

내 글씨 예쁘지? 나 진짜 글씨연습 많이 했다. 내가 얼마나 고생한지 넌 아마 모를걸? 이거 저번에 보관함에 넣어뒀던 보라색 펜으로 쓰는 거야……. 저번에 이 펜 넣어둔 이유... 비밀이라고 했잖아? 사실그땐 아무생각없이 펜을 넣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이 편지를 쓰려고 보라색 펜을 넣어놨던것 같아 이렇게 되고 보니 꼭 엄청난 운명같지 않아? 헤헤

 

음... 아마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난 아마 스페인으로 날아가고 있거나 도착해서 새 학기를 준비중이겠지…….

 

이번에 한국 들어온 것도 그것 때문이니까... 너도 알지?

 

뭐 서론은 여기까지하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할께

 

나 사실 이번에 한국 들어온 거... 그거 때문만은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면 너 때문에 들어온거야. 넌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2년 동안 나 정말 네가 보고싶었어. 너랑 같이 놀았던 때도 그립고 너랑 같이 술 먹던 것도 그립고 그리고 무엇보다 네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어…….

 

그래서 나 한국에 오자마자 너한테 고백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 왜 그런 줄 알아? 네 옆에는 이미 내가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었거든…….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 하긴 내 연기실력이 워낙 뛰어나니까 말이야 하하하!

 

개강총회때 기억나지? 나 술 먹고 뻗은 날. 사실 나 스페인와서 술 엄청 늘었다? 스페인 술들이 엄청 쌔자나……. 그래서 그런지 이제 소주정돈 가볍게 비울 수 있는 경지를 이뤘지. 그런대 왜 그날 그렇게 쉽게 뻗었냐고? 바로 그거야 바보야……. 너랑 단 둘이 있고 싶어서 뻗은 척 한거야……. 그 자리에 날 아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 그래서 분명히 너라면 날 챙겨줄꺼라고 생각했어. 역시 내 예상은 딱 들어맞았지. 너는 뻗은 날 업고 동방으로 옮겼지.  (너 근대 한숨 엄청 쉬드라? 내가 그렇게 무거워?? 야 나 키에 비하면 엄청 가벼운 편이야! 그날 창피해서 계속 얼굴 빨개진 거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떨린다야...)

 

아무튼 그렇게 내 계획대로 너와 단 둘이 있게되서 난 기뻤어. 그런대 왜 안깨어 났냐고? 니가 날 물끄러미 쳐다봤잖아……. 나 사실 그때 엄청 두근두근거려서 내 심장소리가 너한테 들리면 어쩌나 걱정 무지 했다? (난 키스라도 할 줄 알았지? 이 순진한 자식! 나같이 예쁜 얘가 아무 저항도 없이 누워있는대...) 아무튼 날 쳐다보기만 하는 네가 한심스러워서 막 놀래켜 줄려고 그랬어. 그러던 찰나!

 

그 애가 들어오더라……. 미소라고 했던가? 그 애와 네가 하는 대화를 어쩔 수 없이 듣게 되었어... 미안... 고의로 그런 건 아니야. 용서해줄꺼지? 아무튼 너희 둘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 이미 너와 그 아이사이에 내가 낄 틈은 없었어. 그 얘가 나간 뒤에도 난 일어나기가 뭐해서 계속 잠든 척 했던거고... 네가 내 옆에서 한숨도 못잔것도 알아…….

역시 그 애한테 내뱉은 말들이 잠도 못잘 정도로 후회돼서 그런거지?

 

한국에 있는 동안 너에게 고백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추억을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너한테 고마워……. 난 충분히 2년 동안 널 그리워한 대가를 받은 기분이야... 스페인에 가서도 우리 추억 기억하면서 나 열심히 해서 네가 '아 그때 내가 왜 저렇게 멋진 여자를 잡지 않은 거지?'라고 후회할 정도로 멋진 여자가 될 거야. 그때가서 후회해도 이미 늦은거 알지?

 

지형아. 마지막으로 친구로서 부탁 한가지만 할께...

그 미소라는 애... 정말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말은 조금 험할지 모르겠지만 그 말 속에도 너를 좋아하는 감정이 뭍어나와서 난 금방 알 수 있었어. 그러니까 네가 먼저 그 애한테 손을 내밀어. 그런 애들은 성격이 워낙 강해서 먼저 굽히는 성격이 아니거든……. 아마 너의 말에 그 애는 엄청나게 큰 상처를 받았을꺼야. 아직 연락 한번 없지? 그것 봐…….

 

나 때문에 그 애가 오해를 한 거잖아. 그것도 너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그러니까 네가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는거야. 그 애는 너를 좋아하는마음 때문에 말을 한 건대 넌 그런 그 애의 마음을 깨트린 거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나중에 한국에 돌아올 때 정식으로 여자친구라고 그 애를 나한테 소개시켜줘야 한다? 알았지? 안그러면 그땐 정말로 내가 널 뾰족한 하이힐로 발등을 찍어버릴테니까 각오하고!

 

이만쓸께. 지형아. 꼭! 행복해야돼!

 

from. 너의 진정한 친구 정원이가.

 

편지를 다 읽었을 땐 내 두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편지지의 보라색 글자들 위로 툭 툭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귀여운 목소리가 귀에서 재잘거리는 것 같다.

 

그때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핸드폰 진동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신혜다.

 

"훌쩍..."

 

"우냐?"

 

"훌쩍..."

 

"사내자식이 울긴 왜 울어. 나와 슬플 때 혼자 있으면 더 슬퍼져 우리랑 술이나 한잔 하자."

 

"니가 쏘는거냐?"

 

세상이 두쪽나도 확인은 해야한다.

 

"찬수가 사겠지"

 

"아 왜 또 나야"

 

전화기 너머로 찬수의 불평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난 눈물을 닦으며 피식 웃고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려"

 

신혜와의 통화로 진정이 된 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신혜와 찬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도 정원이와 친했던 친구들이다. 속으론 많이 힘들겠지만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날 위로해 주려고 하는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다.

우리는 술집으로 향했다.

 

"기운 내 자슥! 니가 축 쳐져있으니까 우리가 더 힘빠진다 자슥아."

 

찬수가 위로를 건넸다. 난 힘없이 가운데 손가락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썩소를 날렸다. 우리는 정원이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 추억들이 다 떨어져 갈때쯤이었다.

 

가게 문 쪽으로 우연히 시선을 돌린 난 낯설지 않은 사람이 들어오고 있는것을 볼 수 있었다. 미소였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우리 테이블로 걸어왔다. 무척이나 화난 얼굴이다. 그녀가 오자 신혜이가 말했다.

 

"내가 불렀어. 대충 얘기 들었는데 너라면 분명히 미소한테 먼저 연락 안할 것 같아서. 나 같으면 너 반쯤 죽여놨을테지만 마음착한 미소라서 그나마 다행인줄 알아~ 찬수야 우린 이만 일어나자."

 

신혜는 같은 방까지 쓰면서 아직까지 미소의 성격을 잘 모르나보다. 찬수와 신혜는 우리만 내버려 두고 사라졌고 그들이 사라지자 미소는 반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둘 사이엔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성격답게 미소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난 문득 정원이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만! 말하지마."

 

난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런 분위기의 날 처음 보는 그녀는 당황했는지 열려던 입을 도로 굳게 닫았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미안. 정말 미안해. 그날 내가 너에게 했던 말들은 내 진심이 아니었단 걸 믿어줬으면 좋겠어…….

 

사실 그날 나 자고있는 정원이 모습에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때 문득 니 얼굴이 떠올랐어.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 때문에 내 마음이 흔들렸다는건 확실해. 이런 나... 용서해 줄 수 있어?"

 

내 말을 끝까지 들은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무표정한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특유의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나하고 술내기해서 니가 이기면 용서해줄께!"

 

난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니가 이기면?"

 

그녀는 나의 조심스런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니랑 나랑 사겨야지"

 

알 수 없는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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