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숲 4화

깡과힘 작성일 09.09.03 04: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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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그 녀석 많이 좋아해? 철이 묻자 진아가 멋쩍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얘기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가 그렇게 좋다고 하는 건지, 그리고 친구로서 녀석을 잘 알기에, 진아가 그런 녀석을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철에게는 씁쓸할 뿐이다.

“친구로서는 정말 괜찮아, 하지만 그 녀석 바람둥이고 선수야. 잘된다고 하더라도 내 생각엔 니가 너무 아까워.”

“그런 건 안 중요해. 그 사람, 분명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픈 것 뿐이야.”

단호한 말투. 철은 체념한 듯 진아를 도와주겠노라고 말한다. 아직도 웃고 있는 진아의 표정에서 칠판이라도 긁고 있는 듯한 불안함이 느껴진다.

 

 너! 왜 그러냐구 도대체! 이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정말 너 없으면 안될 것 같아! 아직, 아직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제발 이러지 말자 은영아... 그저 수업이 끝나서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떤 남자가 그렇게 말하더니 휴대폰을 집어던진다. 그러고는 팩으로 된 마일드 세븐을 꺼내 피우면서 사람들 눈은 아랑곳 하지 않고 울기 시작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같이 슬퍼질 만큼 처량한 모습, 묘한 가슴의 울렁임, 1년 전의 기억이다.

 

 오래 전의 이야기.

 쿵쿵- 쿵쿵-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똑똑- 이라는 의성어를 많이들 쓰지만 철제로 만들어진 문은 아무리 작게 두드리려 애써보아도 쿵쿵- 하는 소리가 날 뿐이다. 문을 열자 하얀 셔츠와(넥타이는 매지 않았지만) 짙은 밤색 자켓을 걸친 준석이 먹을 걸 한아름 들고는 보고 싶어서 일찍 왔어 하고 말해준다. 문을 열어 그 사람임을 확인하기도 전에 담배 냄새와 땀 냄새가 섞인 미묘하게 싫지 않은 불가리 향으로 준석이 왔다고 알 수 있다. 미리 전화라도 하고 왔으면 가볍게 화장이라도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자 조금 부끄러워진다. 소녀 같은 마음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주 조금씩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느끼곤 한다.

불고기를 해 먹고 남은 돼지고기는 야채와 함께 냉장실에 보관하면 안 된다. 야채는 몰라도 돼지고기는 이틀 정도만 지나도 상해 버리기 때문에 한참 후에 먹을 거라면 냉동보관 해야 한다. 몇 번이고 당부 받은 건데도 난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곤 한다. 서른이 넘은 나를 혼내는 듯 귀여운 투정을 부리는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준석은 유부남이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지금은) 애인이다. 몰래 만나는 나에게 가끔은 딸 자랑 까지 하는 뻔뻔스런 남자지만 결혼 할 마음이 없는 내게는 결혼하자는 말 따위가 나오곤 하는 불편한 연애나 스릴 넘치는 불륜보다는 훨씬 더 편한 느낌이다. 그는 때때로 내 방에 먹을 것들을 사와서는 다 먹지도 못할 만큼 요리 해 준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조그만 방에 어울리는 작은 매트리스에 서로 끌어안은 자연스런 자세로 반쯤 누워서 라디오를 듣고는 한다.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면서 라디오에 나오는 팝송을 조용한 소리로 흥얼거리고 있자면 준석이 내 젖가슴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언제부터일까? 감도 높은 스킨쉽에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그의 바람에 응한다. 섬세한 준석의 몸짓에 깊은 흥분감을 감추지 못한 채 기절할 듯한 황홀경에 빠져든다.

 애인이 돌아간 후에 남는 공허함, 누군가는 불편함이라고 느낄 수 있는 그 기분을 즐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라디오를 들으며 조용히 책을 보거나 잠을 많이 잔다. 외로워하기 전에, 생각하면 즐거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면 공허한 마음은 금새 녹아버리곤 한다. 아마도 내가 이상한 성격일 것이다 싶은 기분은 어쩔 수 없지만.

 

 밤에 일하는 여자는 쓰레기라고 놀림 받는다. 젊을 때에는 수도 없이 그렇게 생각했지만 돈벌이 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다. 스무 한 살부터 10여 년, 난 금요일과 토요일에 한해서 몸 파는 일을 하고 있다. 가끔씩 젊었을 때 좀 더 좋은 직업을 구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이내 지금의 일에 만족하고 혼자 웃는다.

처음 준석을 만나게 된 것은 손님과 접대하는 여자의 관계였다. 커다란 테이블이 있는 노래방에서 시바스 리갈과 병맥주, 그리고 싸구려 과일 안주를 늘어놓듯이 깔아 놓고는 내가 해주는 접대를 받는 둥 마는 둥 베르사체 양복을 입고 롤렉스시계를 한 대머리 아저씨에게 쩔쩔매고 있는 그의 모습이 조금 우스워 보였다. 2시간쯤 지나자 대머리 아저씨는 나보다 다섯 살 어리고 몸매도 좋은 여자애랑 2차를 나갔고 나 역시 그와 2차를 나가기 위해 준비 했다.

“모텔, 단골집으로 안내 해 드릴까요?”

“휴~ 일하기 힘들죠? 저런 대머리 아저씨 한 번 접대하기도 이렇게 힘든데 아가씨는 고생 많겠어. 들어가서 쉴래요? 아니면 간단하게 한 잔 할래요? 난 술 배가 고픈지, 보쌈이 땡기네. 하하하.”

사실 대머리 아저씨가 같이 간 여자애와 나에게 꾀 많은 양의 팁을 줬고 2차비용도 계산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은 이 길로 퇴근을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들어가서 쉴래요? 하는 말보다 간단하게 한 잔 할래요? 하는 말에 묘한 가슴의 일렁임을 느낀다.

“둘 다 해도 되는데, 우리 집 갈래요 아저씨?”

준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내가 뱉은 말에 스스로 놀라 그 보다도 더 멍청한 표정을 지어 버린다.

“아하하, 이거 참. 집에 돼지고기 있어요? 나 보쌈 잘 만드는데.”

냉장실에 있는 돼지고기를 본 준석은 이거 다 상해서 어떻게 하냐며 귀여운 투정을 부렸고 우리는 야식집에서 보쌈을 시킨다.

 여자 혼자 사는 방, 화장품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매트리스 위에는 며칠 전에 입었는지도 모를 옷가지가 가득하다. 빈 플라스틱 병에는 담배꽁초가 꽉 차 있고 방 안에서는 화장품의 진한 향을 무시하듯 쾌쾌한 냄새가 난다. 어지러운 방 가운데 신문지를 깔아놓고는 보쌈 안주에 새벽까지 술을 먹었다. 언제 취했는지 잠이 들어 버렸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 집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난 작은 매트리스 위에서 소녀처럼 누워 있었다. 술을 꾀 많이 먹었음에도 머리에 지끈거림이 없었고 얼마 자지 않았는데도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 맡, 예쁘게 접어진 메모 한 장. 그 사람이 놓고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어쩐지 바로 읽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 담배를 한 가치 피운다.

 그리고 얼마 후 준석과 나는 불륜이라는 이름의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26년이 지난 지금, 그 때 진아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왔다. 하나뿐인 딸이 철없는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에는 일말의 의심도 들지 않지만, 이제 와서 준석이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저 바람둥이 선수 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생각과 상상이 펼쳐져 나가더라도 내가 준석을 사랑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기에 그 사람이 정말 날 사랑했는지 그저, 그것이 아직도 궁금할 뿐이다.

 

 

 

 

 

ps///

 

사실 이번 화는 엄청 더 길게 쓰거나 2화 이상 분량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전체적은 스토리 흐름 상 진아 어머니 이야기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되어 여기까지만 썼어요

 

아마 연재가 끝나거나 엄청 심심할 때 외전 비슷한 느낌으로 이 부분을 쓸 것도 같네요

 

술 먹고 막 쓴거라 틀린 부분 많을 것 같은데 담에 고칠게요-_-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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