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실화: 이상한 아르바이트] 올렸던 사람입니다~
정말 있었던 일인데 대부분 안믿으시더라구요
학교 이름하고 실제 커피숍 이름까지 적어놨었는데도 안믿으셔서 ' -'a..
악플도 많이 달렸는데.. 뭐 어쩌겠어요 안믿으셔도 사실인걸요 뭐 t-t
댓글중에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라고 하신분이 많아서
정말로 소설로 써봤습니당 -ㅁ- /
그렇잖아도 글재주 좋단 소리 많이 들어왔는데
친구년이 부추기기도 했고. 재미있을것 같기도 해서
소설로 써봤어요 힛힛
최대한 당시 제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려고 했어요~
잼나게 봐주세용
-실제 지명과 가게 이름, 차 이름 등등은 다 뺐어요
자꾸 저희 학교 홈피까지 오셔서 제 신상을 털려는 분이 계셔서
장소도 개화역 3번 출구로 바꿨습니다~
사실 개화역은 가본적도 없어요~
심지어 개화역은 1,2번 출구밖에 없다네요 ㅋ
저번 글 보신분은 진짜 위치 어딘지 다들 아시죠? ㅋ_ㅋ
이상한 아르바이트를 찾았다
나는 그냥 평범한 여대생이다.
시골에서 혼자 상경해서 힘들게 대학을 다니다 주머니 사정이 안좋아져서 휴학을 했고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아르바이트라도 하려고 인터넷 구인 사이트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pc방, 노래방, 전단지 배포, lcd모니터 조립검사 단기 계약직..
비전도 없고 보수도 짜고 힘들고 짜증나는 것들밖에 없었다.
대학 진학을 반대하는 부모님덕에 거의 모든 학비를 혼자 벌어서 충당해왔던 터라
안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였다.
의자에 반쯤 늘어진 자세로 클릭질만 하고 있던 중 눈에 띄는 구인광고 하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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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보수 20만원 1명]
3월 16일 오후 7시 25분부터 2시간 동안 심부름 도와줄 여성 한분 모집
tel : xxxxx... 어쩌고 저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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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두시간을 일 할 뿐인데 보수가 20만원 이라니..
너무나 파격적인데다 업무 내용이 불확실해서 의심이 갔지만 혹시 몰라서
즐겨찾기에 추가 해 두고는 다시 다른 아르바이트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당장 돈은 급한데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에 드는 일은 보이질 않아서 문득 보수 20만원이라던
그 아르바이트가 떠올라서 즐겨찾기를 다시 열어보았다.
[삭제된 게시물입니다]
30분도 채 안됬는데 왜 벌써 삭제가 되었을까?
아깝단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덜렁 두시간 일하고 20만원을 주는 일은 흔치 않을텐데.
그러고보니 왜 두시간이지?
어째서 여자 한명만 모집 한걸까?
혹시 이런게 원조 어쩌고 하는 그런건가?
별 별 생각이 다 들면서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2시간 20만원 아르바이트..
대체 어떤 일일까 하는 궁금증에 이것 저것 추측하며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그 구인광고의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단지 몇줄의 글을 읽고 넘겼을 뿐인데도 이상하게 그 전화번호가 기억에 남아 있었다는게 신기했다.
평소 기억력 안좋기로 유명한 내 머리가 어찌 이리도 기특한 짓을 했을꼬.
까먹기전에 얼른 휴대전화 버튼을 눌렀다.
대체 어떤일이기에 그렇게 큰 보수를 준다는 건지 너무나 궁금했다.
왠 아주머니가 받았다.
읭.. 잘못걸었네..
그러면 그렇지.. 내 머리가 어디 가겠나. 죄송해요 아주머니~
혹시나 해서 끝자리만 바꿔서 다시 전화를 걸어봤다.
통화 연결음 없는 무미 건조한 뚜- 뚜- 소리가 한참 이어진 뒤 전화기 너머 상대방 목소리가 들렸다.
"네"
짧고 차가운 사무적 말투의 남자였다.
왠지 살짝 긴장이 됐다.
"아르바이트 구한다는 글 보고 전화드렸는데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 아. 네"
하는 짧은 대답이 또다시 들려왔다.
뭐 이렇게 불친절한 사람이 있을까. 마치 '그래서 어쩌라구요?'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냥 끊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어떤 일인지나 들어보자는 심정으로 질문을 했다.
"2시간 일하고 20만원 받는다고 적혀있었는데.. 어떤일을 하는건가요? 아, 참 사람은 구하셨나요?"
긴장했나보다. 기가 눌린건가? 어쩐지 횡설수설 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왜임마 내 목소리가 할머니같냐? 이런 콱..
"...올해 스물 둘 이요"
질문하는 톤이 불쾌했지만 업무상 필요한 질문일지도 몰라서 일단 대답은 했지만 기분이 영 찜짐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수화기에서 다시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그정도면 그럭저럭 되겠네요. 개화역 3번 출구 옆 1층 커피숍으로 오시면 됩니다"
끊겼다.
아니, 그놈이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렸다.
뭐 이런 웃기는 똥싸개가 다 있담? 스물 둘 이라니까 뭐? 그럭저럭 어째?
어떤 일 하는거냐니까 대답은 없고 떨렁 장소만 말하고 쌩이라니..
황당하고 당황스럽고 찝찝했다.
오기가 생긴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또다시 긴 연결음이 들리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황당하고 불쾌했지만 혹시나 통화가 끊겨버릴걸수도 있으니 최대한 화를 억누르고 조신하게 말했다.
"통화가 끊어졌나봐요 죄송해요. 개화역이라고 하셨죠? 어떤일을 하나요? 준비물 챙겨갈건 없나요?"
왠지 말하는 도중에 끊어버릴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을까. 최대한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속사포처럼 질문들을 던져댔지만
상대방은 또다시 무미건조한 사무적인 톤으로 대답했다.
"평상복 차림으로 오셔서 잔심부름만 해주시면 됩니다"
또 끊었다.
게임에서 진 초등학생마냥 울분이 끓어올라 이미 끊어진 휴대전화에 대고 내가 아는 온갖 욕들을 퍼부었지만
무시당한 느낌에 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그런데.. 가만있어보자..
처음엔 그냥 어떤일인지만 알고 싶어서 전화했던건데.. 난 왜 덜컥 약속을 잡아버린 꼴이 됐을까..
그토록 시간대비 보수가 짭잘한 잔심부름이 대체 뭐길래? 방사능 폐기물이라도 대신 날라야 하나?
아니지.. 커피숍으로 오라고 했지.. 대체 뭘까?
호기심은 이상한 집착으로 변해갔고 어떤 일일까 하는 궁금증에 밤잠을 설치는 묘한 경험을 한 하루였다.
다음날 빈곤한 여대생의 단골 코스인 백화점 아이쇼핑이나 하러 친구와 만난 나는 어제의 일을 친구에게 모두 말해주었더니 친구는 비관적인 반응을 보였다.
"평상복에, 2시간동안, 잔심부름? 뻔하네! 원조구만!"
사람많은 곳에서 원조라며 큰소리치는 친구의 반응에 깜짝놀라 입을 막는다는게 짝! 소리를 내 가며 후려치듯 친구의 입을 틀어 막아버렸다.
어휴 놀래라.. 누가 들으면 내가 원조나 하고 다니는 애인줄 알겠네..
"야! 너 미쳤어? 조용히 안해? 그리구 무슨 원조가 20만원이나 주냐? 말이 되?"
그제서야 친구도 뭔가 이상하다는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빨개진 입술을 어루만졌다.
"왜안되? 20만원 까짓꺼 주면 주는거지.. 아닌가? 그럼 말이 안되잖아 2시간에 20만원 주는 일이 어딨냐? 그냥 *이 장난치는거 아니야?"
그 생각을 안 해 본건 아니었지만 그 말투와 그 뉘앙스.. 뭐랄까? 장난을 치려는 의도였다면 그렇게 별 감흥없이 짧은 말만 하진 않았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재미를 위한 장난이라고 하기엔 통화 내용은 너무나 재미 없었으니까.
그냥 별꼴이라며 넘겨 버리면 그만일것을..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날때마다 내 궁금증은 커져만 갔고 언제부터인가 온통 그 일만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6일 저녁 7시 반 이라고 했었지? 이제 겨우 내일이다.
지난 나흘간 내가 이렇게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였나 싶을 정도로 궁금함에 잠을 뒤척였었다.
그날 통화 이후로 확인차 몇번 더 전화를 걸얼었지만 모두 소리샘으로만 넘어갈 뿐 통화를 할 수 없었기에 반신반의 하면서도 궁금증은 더욱 커져갔다.
당일 저녁 6시 15분.
전철 출입문에 서서 초조한듯 손톱만 만지작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뭔가 인터넷으로 만난 미지의 남자와 소개팅(뭐라더라? 번개팅?)을 하는 자리에 나가는게 이런 느낌일까?
우리집에서 개화역까지는 전철로 20분 거리이다. 그런데도 난 일찍부터 준비하고 멍때리고 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미리 출발 해버렸다.
여지껏 이런적이 없었다. 남자친구가 있던 시절에도 이렇게 일찍 나서본적이 없었고, 강의시간에 늦어도 이렇게 초조해본적이 없던 나였다.
무엇이 날 이토록 초조하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내 안에 내가 모르는 어떤 판타지 세계가 있었고 지금 그것이 발동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6시 33분. 개화역에 도착했다. 약속시간 까지는 무려 한시간이나 남았다. 미쳤나보다. 기다리는게 제일 싫었던 내가 한시간이나 일찍 오다니
한시간동안 뭐하면서 시간 때운담? 미리 가서 기다리자니 왠지 그 남자한테 당한 불쾌감에 대한 보복을 못할 것 같은 요상한 심리가 발동해서
다른곳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정시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나는 일단 출구를 나와 지상으로 올라갔다.
마침 길 건너편 약속장소가 보이는 위치에 햄버거 가게가 있는것이 눈에 들어와서 그쪽으로 향했다. 음료수나 쪽쪽 빨면서 시간을 때울 요량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 원조하러 기어코 나갔냐? *년! 돈받으면 나 반땅 > ㅂ~ !! ]
요년이 요거...
신랄한 육두문자를 퍼부어 주려는데 창문너머로 보이는 길 건너편 약속장소 앞에 셋노란 외제차 한대가 서는것이 보였다.
우와~ 외제차다. 차 참 신기하게 생겼네..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 타고 다니는거람?
신기한 마음에 유리창에 착 달라붙어서 보고 있는데 왠 올백머리의 흰 정장 차림의 남자가 내리더니 커피숍으로 들어가는것이 보였다.
혹시 저남자 드라마에서나 보던 재벌 뭐 그런거? 내가 만나는 사람이 혹시 저 남자는 아니겠지? 나 오늘 재벌집 며느리되나? 캬하하핫!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던지 벌써 뇌기능이 퇴하되는 지경에 이르렀던지 둘 중 하나가 분명했다. 그것보다 왜 내가 저집 며느리가 된다는거지?
한숨이 푹 나왔다. 이게 다 친구년이 정신 빼놓았기 때문이다.
질풍같은 손가락 놀림으로 국어사전,전자사전,세계육두문자사전,네이놈검색, 기타등등에 있을법한 모든 욕을 문자에 담아 친구에게 어여삐 날려줬다.
속이 다 후련하네.
7시 30분.
시계를 봤다. 아직도 약속 시간까지는 20분이나 남았다. 슬슬 긴장이 풀어지고 하품이 나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구경, 핸드폰 만지작 거리기, 거울보기 등등 지루한 시간 때우기를 하고 있을 무렵 문자 한통이 왔다.
[ 출입문 오른쪽 끝 창가 ]
그남자 번호였다.
문자도 참으로 무미건조했다.
창가 자리에염~ 따위는 바라지도 않지만 이런식으로 보낼 필요까진 없지 않나 싶었다.
시간이 됐다. 5분 전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커피숍앞에 도착하니 다시 긴장되기 시작했다.
대학 면접볼때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는데.. 남자친구랑 첫키스 할때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는데..
뭔가 위험한 세계에 발을 딛는것 같은 비장함 마저 감돌자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7시 30분을 알리는 케로로 알람소리가 울려퍼지자 결의에 찬 표정으로 커피숍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시선은 오른쪽 창가 자리 쪽으로!
세상에나.. 이게 무슨일이란 말인가. 창가쪽 구석 자리엔 방금 전 본 외제차를 타고 온 흰 정장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동안 밤잠을 설치며 다시보고 돌려보고 뒤집어보고 또 본 벌리에서생긴일 이며 국화꽃을든남자며 온갖 드라마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진짜 재벌일까? 옷도 비싸 보이는데.. 무슨 책을 보고 있는거지? 혹시 영자신문? 키도 커 보이고 멀끔하니 잘생겼네.. 어떡해~!!!
혹시나 잘못 안건 아닐까 해서 커피숍을 둘러보았지만 다들 짝짝꿍 커플들만 있을 뿐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흰 정장의 그남자 뿐이었다.
급 흥분한 나는 커피숍 화장실 문을 밀치고 들어가 급하게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꿀리지 않게 보여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왠지 한숨이 나왔다. 내가 지금 뭐하는거람. 소개팅도 아니고.. 돈 많아 보이니까 설레발 치는 꼴이라니
내가 이렇게 골 빈 아이였나 싶은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치만 나도 여자인지라.. 심장이 벌렁벌렁한건 어쩔 수 없나보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자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밖으로 나와 그 남자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은채로 잡지책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빳빳한 얇은 책을 보면서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저기.. 전화 드렸던 아르바이트생인데요.."
아.. 실수했다. 조심스럽게 말을 건낸 것 까진 좋았는데 나 스스로를 한낮 알바생 따위로 도장 찍어버리는 말을 해버렸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내 얼굴을 쳐다봤다. 아주 무표정하고도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다.
그리고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없이 손바닥을 펼쳐보이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2~3초 정도의 짧은 정적이었지만 빤히 나를 쳐다보는 그 순간이 왜 그렇게도 뻘쭘하고 창피하던지.
죄 지은것도 없는데 죄인이 된 것 마냥 잔뜩 위축 되서는 쭈뼛쭈뼛 거리며 자리에 가서 앉았다.
펄렁거리는 치마를 입고 간 터라 자리에 앉아 치마며 옷매무새를 고치고나서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나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듯 책만 응시한 채 뭔가를 계속 끄적이고 있는 남자의 차갑디 차가운 모습이 재수없기도 하면서도 왠지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뭘 어찌 해야 하나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문득 내가 책보는 남자 얼굴이나 쳐다보러 온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기.. 제가 할 일이 뭔가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여전히 한 템포 느리게 천천히 나를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에 몸이 얼어붙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늦으셨네요"
짧게 한마디를 하고는 시선을 다시 책으로 옮기는 남자.
"7시 30분까지라고 써있던것 같았..는...데.."
왜 나는 갑자기 죄인이 되버린걸까? 학생주임 선생님께 혼나는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25분까지 입니다"
여전히 차갑고도 비수같은 날카로운 말이 날아왔다.
원래 여자는 좀 늦고 그런거에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소개팅 나온것도 아니고..
왠지 뭔가 대꾸 했다간 눈빛으로 레이저라도 쏠것 같은 분위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책만 응시하고 있는 남자 앞에서 죄인마냥 숨죽이고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데 커피숍 종업원이 와서 내 자리에 커피 한잔을 내려놓고 갔다.
난 시킨적이 없는데? 그러고보니 남자 앞에도 똑같은 커피가 한잔 놓여있었다.
종업원이 세팅한 그대로, 손을 댄 흔적조차 없다. 이남자는 커피숍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 저 자세로 미동도 없이 책만 보고 있었나보다.
여전히 눈동자만 굴리고 있던 나는 너무나 불편한 이 순간을 어떻게든 넘기고 싶어서 괜한 헛기침 한번 하고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는 다시 물었다.
"제가.. 뭘하면 되나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들고 있던 커피잔을 놓칠뻔했다.
뭔가를 물어보면 한참 뒤에 반응을 보이곤 했는데 이번엔 말이 떨어지자 마자 반응을 보인것이다. 아니면 내가 커피를 마실때부터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지.
"그냥 앉아 계시면 됩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 하고는 내가 내려놓은 커피잔을 테이블 중앙으로 끌어다 놓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치 '누가 너 더러 이 커피를 마셔도 된다고 허락했느냐?' 라는듯한 환청이 들리는것 같았다.
뻘쭘함과 당혹감과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얼굴에서 화산이라도 폭발한것 마냥 새빨갛게 달아오르는게 느껴졌다.
책을 읽는 흰 정장의 말끔한 남자와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잔뜩 기 죽은 쪼끄만 여자애 하나. 그리고 내 앞에는 없는 커피잔 두개.
시선 둘 곳도 없고 숨소리 내는것도 조심스럽고 누가 땡 해주길 기다리는 꼬마 아이마냥 미동도 없이 있으려니 죽을맛이었다.
왠지 옷 스치는 소리만 내도 버럭 화를 내거나 경멸에 찬 눈빛으로 '훗 버러지같은 서민' 따위의 촌철살인을 날릴것 같은 강렬한 기에 눌려있었다.
그냥 앉아 있으라니.. 누구 다른사람이 오기로 한걸까?
100년같은 시간이 지나고 남자가 시계를 한번 쳐다보더니 양복 안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선금입니다"
짧은 한마디를 하고는 마치 동영상을 처음으로 돌린것마냥 다시 아까의 자세로 돌아가 책을 응시하며 끄적이는 남자.
뭐라 대꾸할 타이밍을 놓친 찜찜한 기분으로 눈치만 보다가 조심스럽게 봉투를 집어 들고 안을 확인 해 보니 10만원 짜리 수표가 들어있었다.
성금? 불우이웃 돕기 할때 내는 그거? ..는 아니겠지.. 왠 선금? 보수 20만원중에 10만원을 먼저 주고 끝나면 나머지 10만원을 주겠단 소린가?
눈빛만으로도 사람 여럿 죽이고도 남을 것같은 차가운 이 남자가 아무것도 한것 없이 앉아만 있는 쌩판 처음보는 내게 건낸 빳빳한 10만원 짜리 수표다.
그냥 먹고 도망가면 어쩌려고 선뜻 내미는거지? 왜 하필 수표지? 위조 수표? 혹시 csi에서 봤던 독이 발라져 있는 수표?? 한순간에 패닉상태에 빠졌다.
신이시여.. 울던 아이도 빵끗 웃게 한다는 돈봉투를 눈 앞에 두고도 외계 운석이라도 발견한것마냥 갸우뚱 거리는 이 가녀린 소녀를 구원하소서..
인생을 살면서 돈을 받으며 이렇게 찜찜한적이 있었던가.
'그냥 주시니까 감사히 받을 뿐이에요' 라는 표정으로 조심조심 돈봉투를 가방에 넣은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까의 꾸부정한 자세로 돌아가 다시 눈치만 살폈다.
대체 누가 오기로 했길래 이렇게도 안오는건가 싶어서 시계를 살짝 보니.. 세상에나.. 이제 겨우 7시 38분.
억만금 같은 시간이 흘렀건만 겨우 8분밖에 지나지 않았단 사실에 문득 생각난 '돌아보니 학창시절 참 빨리 가더라', '서른살 되는거 눈 깜짝 하면 금방이야' 따위의 거짓말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시선 둘 곳이 없어 괜히 컵 닦는 종업원만 몇번 흘끔거리며 봤더니 눈이 마주친 종업원이 갑자기 이쪽으로 다가왔다.
"뭐 필요한거 없으세요?"
으악! 안되요 안되요 지금 말 걸면 당신은 살해당할지도 몰라요! 이사람은 마피아 두목이라구요!
혼자만의 삐딱한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는 내 서글픈 눈망울에 영문을 몰라 하는 종업원의 얼굴이 쏟아져 들어왔다.
긴장한 나는 남자를 힐끔 쳐다봤지만 남자는 미동도 없이 책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빨리 이 오묘하고도 뻘쭘한 삼각관계(?) 상황을 종료하고 싶었다.
"물.. 한잔 주세요"
속삭이듯 나즈막하게 이야기한 나는 빨리 이 선량한 종업원이 악마의 소굴에서 탈출해 자신의 일터에서 안전하게 목숨을 부지하기를 바랬다.
그래요.. 나는 이미 악마에게 붙잡혀 버렸답니다. 하지만 날 동정하진 말아줘요. 스파이더맨이 나타나서 날 구해 주겠죠.
어색한 침묵과 극도로 불편한 자리는 사람의 정신세계를 들었다 놨다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부슬부슬 눈발 섞인 비가 내리기 시작한 저녁시간 시내의 한 커피숍엔 책을 읽는 흰 정장의 남자와 펄렁펄렁한 치마를 입은 꾸부정한 여자애와
그 앞에 놓인 물 한잔과 주인 잃은 커피 두잔만 덩그러니 있는 진풍경이 30분째 이어지고 있었다.
"오시기로 한 분이 많이 늦으시네요.."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밑바닥에 남아있는 용기를 쥐어짜며 수명과 맞바꾼 한마디였다.
남자는 여전히 책만 응시한 채 의외로 빨리 입을 열었다.
"아무도 안옵니다"
아무도 안온댄다.
뭐? 아무도 안온다고??
그럼 지금까지 누군가 오길 기다리고 있던게 아니었단 말인가?
말인 즉슨, 그 누군가가 오기만 하면 이 죽을만큼 어색한 침묵도 깨어질 것이란 내 자그마한 환상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라는 뜻이렷다.
혼란스럽고도 혼란스러웠지만 호랑이 굴에 이미 들어온 이상 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 남자는 내가 온 뒤로 몇마디 밖에 하지 않았고 마시지도 않는 커피를 놓고 책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앞으로 나온 커피를 내가 한모금 마시자 이미 다른사람이 주인이란 것 처럼 커피잔을 멀직히 떨어뜨려놨다.
그리곤 선금 10만원을 주고는 '내가 할 일은 앉아만 있으면 된다' 라고만 할 뿐, 30분째 아무 대화도, 아무 심부름도 시키지 않고 있다.
당연히 누군가 오기로 했기 때문에 기다리느라 침묵하는 중일거라는 내 추측은 보기좋게 빗나가고야 말았다.
다시 또 깊은 패닉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세상 천지에 [비오는 초저녁에 커피숍에 앉아서 미동도 없이 숨죽이고 가만히 두시간동안 앉아있으면 20만원을 줍니다] 라는 알바가 어디있느냔 말이다.
정신없이 패닉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 대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그 누구도 나에게 '아무말 말고 조용히 숨죽이고 미동도 없이 앉아있으십시요' 라고 한 사람은 없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난 10만원의 선금은 이미 받았고 난 앞으로 1시간 30분동안 시간만 때우면 나머지 10만원도 받게 된다.
내 스스로 지례 겁먹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런 결론에 다다르자 뭔가 막힌것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고 긴장도 풀어지며 움츠렸던 어께가 펴지기 시작했다.
기죽을 필요 없는것이다. 이 남자는 이유가 어쨌든간에 나에게 요구하는건 '그냥 앉아만 있는것' 뿐이다.
아마도 헤어진 여친에게 '나 새 여친 생겼소~' 라고 보여주며 질투를 유발하려는 생각이던지 뭐 그딴것이겠지. 내가 알 바 아니다.
애초에 이런 재벌향기 풀풀 날리고 다니는 남자가 나랑 엮일 일도 없거니와 오늘만 지나면 두번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일테니 난 그저 시간때우며 앉아있다가 돈만 챙기고 자리를 뜨면 그만인 간단한 상황인 것이다.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어께를 한번 펴고는 게임의 룰을 이해했다는 듯한 썩소를 지으며 물을 한잔 시원하게 들이켰다.
'훗. 가소로운녀석. 관심없는 척 해 봐야 소용없어. 너 차였구나? 그래서 여친한테 복수하려고 지금 이러는거지? 돈 많은 놈들은 별짓을 다 한다니까 참네'
'그러고보니 너 아까부터 책장 한번 넘기질 않더라? 책은 읽긴 하는거니? 그 끄적거리는거 그냥 낙서질이지? 책 보는 척 하면서 여친 언제 지나가나 손목시계만 보고 있는거 아냐? 귀여운 녀석 후후'
판도가 뒤집힌 게임에서 승기를 거머쥔 것 마냥 난 한없는 여유와 자신감에 휩싸였다.
"여기 녹차라떼 하나 주세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팔팔해진 나는 들으란듯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커피를 주문하고는 남자에게 '내 커피 따위 내 돈으로 사먹어주지' 하는 미소를 날렸다.
하지만 맥빠지게도 남자는 여전히 무반응에 관심없는듯 책만 응시할 뿐이었다.
어디 얼마나 쭉빵한 여자한테 차였길래 이런짓까지 하나 싶은 마음에 남자의 행동을 주목하며 창밖에 지나가는 여자들 하나하나를 체크하는 재미에 빠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창밖을 보고 있는데 성형수술로 떡칠을 했는지 사이보그틱한 얼굴에 이기적인 몸매에 명품으로 도배를 한 여자가 두리번 거리고 있는게 보였다.
'이거거든! 대박 딱걸렸어! 저여자구나!'
아니나 다를까 미동도 없던 남자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기 시작하는것이 아닌가.
고작 저런 여자 때문에 이런짓까지 하는구나 싶어 약간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쯧쯔.. 인생 다 그런거지 뭘. 이 누나는 니 맘 다 이해한다. 불쌍한것 쯧쯧..'
길가에 버려진 강아지를 쳐다보는것 마냥 동정어린 눈빛으로 남자를 응시하고 있는데 남자가 자신의 옆자리에 놓인 쇼핑백을 느닷없이 나에게 건냈다.
"갈아 입으세요"
남자는 쇼핑백을 나에게 건내고는 다리를 바꿔 꼬고 앉아서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쇼핑백을 건내받고는 벙찐 표정으로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되물었다.
"네.. 네?"
갈아 엎으세요? 갈아 마시세요? 뭐라고 했니 너?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오세요"
남자는 책을 응시한 채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갈아 입으라니 뭘?
쇼핑백을 열어보니 왠 옷이 한벌 들어있었다.
지금 뭐하자는거니?
왜? 내 옷차림이 저 여자한테 보여주기엔 너무 서민적이다 이거냐?
어이없고 황당했지만 어차피 선금도 받았고 이 기회에 재벌들 입는 비싼 옷이나 한번 입어보자는 생각에 쇼핑백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뭐람?
찬란한 명품 옷은 어디가고 희한하게 생긴 요란 찬란한 구질구질한 청바지 하나에 민소매 티셔츠 한장 떨렁 들어있는게 아닌가?
차라리 지금 내 옷이 더 큐티하고 엘레강스해 보일텐데 이건 뭐 집안에서 입고 뒹굴거릴듯한 수수하고도 노멀한 그것 아닌가.
뭐가 뭔지 꼬여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여러 드라마를 섭렵 해온지라 오만가지 추측을 조합해본 결과
'내가 전에 만나던 그녀는 청바지에 민소매 티셔츠를 즐겨 입었었지..' 뭐 이런거 아니겠는가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참 이 남자 재벌계의 찌질이 인가 보다. 그렇게 차인 여친한테 복수가 하고 싶었을까.. 이런짓까지 하고..
일단 건내받은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긴 했으나 바지는 살짝 타이트 해서 불편했고 이 차가운 겨울 끝자락 날씨에 민소매 티셔츠 딸랑 한장이라니..
창피한건 둘째치고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까짓꺼 20만원 벌면 감기 주사 한방 쿨 하게 맞아주지! 하는 생각에 당당하게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남자 앞에 서서 패션쇼 모델 마냥 포즈를 잡고는 '나 어때~?' 하는 표정으로 미소를 날렸으나..
남자는 힐끔 한번 쳐다보고는 손짓으로 앉으라는 신호만 보낼 뿐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남친한테 토라진것 같은 기분이 되어서는 입이 삐죽 나온채로 자리에 앉아서 남아있는 커피만 후루룩 후루룩 거리며 마셔댔다. 일종의 작은 반항이랄까.
"아직 날씨가 추운데 이런 옷 입으려니 민망하네요. 뭐 그래도 괜찮아요. 실내니까 그렇게 춥지도 않고 남들이 봐도 뭐 윗옷 벗고 있는 것이겠거니 생각 하겠죠? "
지금쯤 아마 창밖의 옛 여친은 이 남자와 나를 발견 했으리라는 생각에 괜히 혼자 자연스러운 애인 모드를 연출해야겠단 생각에 쓸데없는 수다를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듣고있긴 한건지 여전히 미동도 없는 남자였지만 기왕에 돈 받고 애인대행 비스무리한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니 돈 받은 값은 해야 겠지.
이런 저런 수다를 혼자 토해내다 문득 창밖에 여자는 어떤 표정일까 몹시 궁금했다.
가방에서 콤팩트를 꺼내어 화장을 고치는 척 하면서 거울을 통해 살짝 창밖을 살펴봤다.
아무도 없었다.
콤팩트를 내려놓고 '나는 창밖 풍경을 보는 여자에요~' 라는 듯한 얼굴로 자연스럽게 창밖을 살펴봤으나..
역시 아무도 없었다.
실패했나? 뭔가 열받은 여친이 들어와서는 남자와 대판 싸움이라도 벌어지길 내심 기대했건만.
아마도 이쪽을 발견하지 못했던지 발견하고도 그냥 가버렸나보다.
상황종료. 끝났다. 평생 기억에 남을 독특한 알바가 끝난것이다.
아마도 오랫동안 재미있는 추억으로 간직되겠지.
"이제 끝난거죠? 저 집에 가도 되요?"
난 할만큼 했다는 듯이 약간은 거만한 짜증섞인 말투로 물었다.
남자는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직 40분 남았습니다"
8시 45분. 7시 25분 부터면 2시간 뒤인 9시 25분까지는 40분 남은게 맞긴 하다.
상황 종료됐는데 그냥 좀 일찍 보내주면 안되나.. 쳇 돈도 많으면서 쪼잔하기는.
"그래도.. 그분 그냥 가신것 같은데.."
약간 실망한듯한 말투로 칭얼거리자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배배 꼬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순간적으로 얼음이 된 묘한 자세의 내 모습을 누군가 디카로 찍어놨다면 연락해줬으면 한다.
그 우스꽝스런 장면을 내 컴퓨터 배경으로 해놓고 싶을 지경이다.
"무슨 말씀 입니까?"
남자는 무표정하면서도 뭐 이런게 다 있나 하는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것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뭐지? 이 남자는 진심이것 같다. 진심으로 내 말이 무슨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그럼 지금껏 나 혼자 헛다리 짚고 쌩쑈를 하고 있었던건가?
불쌍한놈 쳐다보듯 한것도? 혼자 *년마냥 수다 떤 것도? 화장 고치는 척 한 것도 모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이게 다 그놈의 드라마중독 때문이다.
다시 온 몸이 굳기 시작했고 꾸부정한 자세로 돌아가게 되었다. 불안과 초조가 밀려왔다.
이 모든게 내 쌩쑈에 불과했다면 이사람은 대체 날 여기 앉혀놓고 뭘 어쩌자는 걸까
왜 두시간동안 앉혀놓고만 있는것이며, 이 옷은 또 왜 갈아입으라고 한 것이며, 테이블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커피 두잔은 대체 뭐란 말인가
csi를 그토록 열광하며 봤건만 앞뒤를 짜 맞추려고 해봐도 도저히 이 남자의 목적을 모르겠다.
망상은 극에 달해 19금의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난 지금 브레지어 위에 얇은 민소매 티 한장만 딸랑 입고 전혀 모르는 남자 앞에 앉아있다.
왜 이 옷을 입기 전에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왜 망설이지 않았을까?
이 남자는 변태가 분명하다. 책장을 전혀 넘기지 않는 저 책도 그렇고, 뭔가를 끄적거리는 느끼한 손놀림하며..
몰래 내 몸 구석구석을 힐끔거리며 혼자 만족해 하고 있는 변태가 분명하다.
어딘가 소형 카메라를 숨겨놓고 찍어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계속 여기 앉아 있어야 하나? 2시간이라는 시간은 혹시 날 납치하려는 동료가 도착할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속셈인가?
그래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안심시키려고 미리 10만원을 선금으로 준것인가?
모든게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자 황급히 가방으로 가슴을 가리기 시작했다.
사방 천지에서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울음이 터질것 같았다. 내가 미쳤지 *년이지 고작 20만원 벌자고 여길 오다니
왠지 저 종업원도 한패같다. 뒷자리에 앉아서 끊임없이 수다를 떨고 있는 저 커플도 다 한통속 같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창밖에 성형 떡칠한 여자도 한패였을것이다. 동료들이 곧 도착한다는 신호를 주려고 접근했던것 같다.
분명 그 여자가 나타나자 마자 이 남자는 나에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었지..
모든것이 맞아 떨어진다. 22년의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가보다. 엄마가 마구 보고싶어졌다. 무서워서 소리지를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현명하게 행동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아주 천천히 눈치채지 못하게 1mm 씩 움직여서 휴대폰을 테이블 밑으로 가져가 문자버튼을 눌렀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 내리는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혼자 착각에 잘 빠지는 나지만 그게 죽을죄는 아니지 않는가? 제발 이게 꿈이길 간절히 빌었다
마지막으로 문자를 받은게 친구였기에 답신문자 전송하는 것 쯤이야 안보고도 할 수 있다.
'살려줘 경찰 신고'
오타가 안나길 빌면서 손가락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조심 조심 문자를 작성하고 전송버튼을 누르려던 찰라
"이리 주세요"
남자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전송버튼만 누르면 됐는데...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신고하려고 했으니 난 살아서 엄마를 보긴 다 틀렸다.
나도 모르게 강아지 소리 비슷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쇼핑백 이리 주세요"
눈물이 쏙 들어갔다. 다행히 걸리진 않았나보다.
난 애써 아무일 없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손으로 쇼핑백을 건내주면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맞춰 전송버튼을 잽싸게 누르고 휴대폰을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았다.
완벽했다. 전혀 눈치 못챘으리라. 애써 미소 지으며 친구가 문자를 받고 제발 경찰에 신고해 주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쇼핑백을 건내받은 남자는 품에서 지갑을 꺼내어 만원짜리 열장을 반으로 접어 쇼핑백에 잘 넣고는 다시 나에게 건냈다.
"나머지 10만원입니다"
남자는 책을 가방에 넣고는 pda같이 생긴것을 꺼내어 뭔가를 계속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동료와 연락을 취하는것이 분명했다. 다음 행동으로 옮기라는 지시겠지..
친구의 신고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 지금 빨리 기회를 봐서 도망가지 않으면 모든것이 끝날것만 같았다.
초조하게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난데없이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엉덩이 밑에서 말이다.
긴장이 극에 달한 나는 마치 내 전화가 아닌양 두리번거리며 어색한 연기를 했다.
남자는 특유의 무표정하고도 차가운 시선으로 날 한번 쳐다보더니 전화를 받으라는 듯이 제스쳐를 취했다.
망했다. 이미 내 전화인것도 알고 있는 눈치다. 울음이 목까지 차올랐다. 죄송하다고 살려달라고 싹싹 빌고만 싶었다.
하지만 차가운 이 남자에게 그런 얄팍한 짓은 전혀 통하지 않을것 같았다.
나는 억지 웃음을 웃으며 엉덩이 밑에서 살짝 휴대폰을 꺼내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친구였다.
경찰에 전화하랬더니 나한테 다시 전화한걸 보니 내 문자를 장난으로 받아들인게 분명했다.
목청이 기차 화통 억만개를 삶아먹은 이 지지배의 전화를 지금 받았다간 내가 문자를 보냈던것도 모두 탄로날 것이며
내 명만 단축할 뿐임이 분명했다.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년...
"아~ 얘는 왜 자꾸 전화하는거야 깨진지가 언젠데~"
나는 떨리는 목소리와 떨리는 손으로 말도 안되는 어색한 연기를 해댔다.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던 구원자의 절대 받을 수 없는 옘병할 전화..
짜증내는 척 어색한 연기를 하며 나는 전화기를 꺼버리는 시늉을 하며 메너모드로 돌렸다.
만에 하나 신고할 기회가 생기면 가차없이 119를 누르리라는 굳은 다짐과 함께.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저기.. 저.. 화.. 화장실좀.. 다녀와도.. 될..겠습.. 니다..?"
울음 참으랴, 공포 짓누르랴, 정신 챙기랴, 연기 하랴.. 내 뇌는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못하나보다.
되도않는 이상한 한국어를 어눌하게 내뱉고는 '나 지금 화장실 안가면 여기서 싸버릴꺼에요'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누군가에게 화장실 허락을 받아내길 손꼽아 기다린적은 없었다.
인간의 몸은 뇌가 지배한다고 했던가. 정말로 당장이라도 오줌을 싸버릴것 처럼 방광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얼굴까지 빨개지며 출산의 고통보다 더 한 배뇨의 고통이 찾아왔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화장실을 허락 해 준다면 이 세상 모든 화장실을 직접 맨손으로 청소하며 평생을 바치리라 다짐했다.
남자는 웃는건지 비웃는건지 모를 웃음을 살짝 지어 보이고는 말했다.
"다녀오시고, 이제 가셔도 됩니다. 수고하셨어요"
남자는 책과 펜등을 가방에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가라고? 가도 된다고? 정말? 진짜루? 감사합니다! 아니 근데 왜? 왜 가도 되는거지?
다녀오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어나려던 나는 이제 가도 된다는 말에 [일어나지도 앉지도 않은 오묘하고 미묘하고 요상망측한 자세]로 똥그란 눈만 껌벅 거리며 남자만 쳐다 볼 뿐이었다.
"그 옷은 선물로 드리는거니까 챙겨가세요"
대꾸도 못하고 굳어있는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젠틀한 미소를 날리고는 유유히 커피숍을 빠져나간 남자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뭐가 어떻게 된거람?
무슨일이 있었던거지?
난 누구지..
여긴 대체 어디니...??
긴장이 풀리자 현기증이 일어나면서 다리에 힘이 확 풀어졌다.
대충 찢어놓은 창호지 쪼가리 마냥 팔랑팔랑 힘없이 주저앉아서 생에 최 장시간 정신줄을 놓고 멍한채로 있던 나는 안도감에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곳엔 내가 없었다.
창피고 뭐고 생각할 경황도 없이 대로변 커피숍 창가에 반쯤 누운채로 서럽게 엉엉 울어대는 민소매 차림의 체구 작은 여자애가 있을 뿐이었다.
지금도 친구들과 그 이야기를 할때면 온갖 추측이 난무하지만 어느정도 대략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 남자는 아마도 패션디자이너나 뭐 그런게 아니었을까 싶다.
보고 있던 책은 아마도 패션관련 무슨 책이었을 것이고 끄적거린것은 나를 모델로 뭔가 디자인 영감을 떠올리고 있었던것 같다.
전화상으로 나이만 물어본것도 목소리와 나이만 알면 체형을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이 있긴 한데.. 뭐 그런것 까진 자세히 모르겠지만 어쩐지 수긍은 간다.
정말 디자이너들이 평소에도 자주 그런 황당한 알바를 시키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냥 그 남자가 괴짜였거나 특이한 디자이너였을지도 모른다.
왜 그런것 있지 않은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는 예술가(?)들이 독특한 발상 전환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고 뭐 어쩌고 하는 그런거.
아마도 그런것의 일종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괴짜 디자이너. 이렇게 생각하면 흔치않은 흰 정장차림이었던 것도, 말없이 차가웠던것도, 선물로 준 그 옷을 입혀봤던것도 모두 수긍이 간다.
아마 본인이 디자인한 옷이었으리라. (물론 그 후로 다시 입은적은 없다. 입고 싶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도 있다.
왜 주문하지도 않은 커피가 알아서 나와서 내 자리에 놓였을까?
그 남자는 왜 내가 그 커피를 한모금 마셨더니 정색을 하며 뒤로 빼 놨을까? 자기 커피는 입도 안댔으면서..
그리고 그 남자는 왜 하필 알바시간을 2시간으로 제한했을까?
이 일이 있은 후에 나에게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첫째로. 친구들의 술안주 거리로 내 이야기가 질리도록 씹힌다는것.
둘째로. 드라마 오타쿠에서 벗어났다는것.
셋째로.. 남자친구가 생겼다는것 ㅋㅋ 인터넷에 올린 이후로 어떻게 알았는지 꽤나 학교에 퍼졌던 모양이다.
평소에 나에게 호감이 있었다는데 내가 휴학했다는걸 알고 물어 물어 연락이 온 뒤로 만나게 되었다.
나더러 돈밝히는 된장녀라는둥 악플도 많았지만
된장녀같은건 나랑 거리가 멀다. 시골에서 고등학교까지 자라와서 물질적 풍요에 그다지 집착하지도 않을 뿐더러 수수하고 털털한 그냥 평범한 여대생일 뿐이니
오해 없길 바랄 뿐이다. 된장녀는 나도 혐오하는 생물이다 = ㅗ=
단지 드라마틱한 판타지에 푹 빠져 있던 철없는 꼬맹이로 봐 줬으면 좋겠다 히히
이젠 더이상 망상과 착각속에 빠져 지내지 않고 건전하고 발전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단지 두시간의 헤프닝이 나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성장의 밑거름이 된것 같아 나름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치만 그런일을 또 겪으라면 극구 사양할꺼다. 한번이면 족하니깐..
ps : 그 남자에게 다시 전화 해서 물어보면 속 시원히 알것 아니냐는 댓글을 읽고 정말 다시 연락 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친구들과 상의 끝에 그냥 연락 안하고 묻어두기로 했어요.
솔직히 그때 충격아닌 충격이 너무 심하기도 했던 터라 연락하기 꺼려지는것도 사실이고
그냥 지나간 추억 정도로만 생각해야지 너무 파고들어서 모든걸 알아버리면 재미 없어질것 같은 그런 느낌?
이해 하시려나 ^- ^;
아무튼 이젠 그냥 좋은 추억거리로 남겨놓고 싶어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응~
필터링은 아마도 [미/친] 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