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우~... “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나슬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항상 밝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바로 이 시간, 혼자가 된 이 때야 말로 그녀가 진정으로 긴장을 풀 수 있었던 것이다. 매니저가 운전하는 벤이 입구 쪽으로 사라지자, 그녀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앞으로 보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들어가, 뜨거운 욕조 속에 한시라도 빨리 몸을 담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자 절로 걸음이 빨라지는 그녀였다.
“ 저기... ”
쉴 생각에 아무런 생각 없이 걷던 그녀의 등 뒤에서 낯선 남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불현듯 불길한 생각에 무시하고 달려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이미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피곤에 절은 얼굴을 금세 바꾸며 입가에 미소마저 띄우는 그녀. 허나, 곧 그 표정이 굳어지고 말았다. 낯선 사내 네 명이 복면을 쓴 체, 서 있었던 것이다. 혹시 몰래 카메라인가? 그녀는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그런 기미는 없었다. 게다가 몰래 카메라라도 이건 정도가 심했다.
“ 무, 무슨 일이죠? ”
“ 이쪽으로 와서 사인 좀 해주세요. 나슬씨. ”
사인을 해달라는 사람들이 복면을 했다?
“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제가 너무 피곤하네요. 매니저 오빠가 잠시 편의점에 갔으니
곧 그 분을 통해서 드릴... “
수상한 사람에게 ‘당신 수상해!’ 이렇게 말할 정도로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내들은 점점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 야! 장난해? 이 쌍년이... ”
“ 그냥 차에 빨리 태우자. 야! 너 소리 지르면 죽여 버릴 거야! ”
한 사내가 거칠게 욕설을 퍼부으며 자신의 말이 위협이 아니라는 듯, 품 안에서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을 꺼내들었다. 지하 주차장에는 VCR이 설치되어 있다. 시간을 끈다면 분명히 경비원이 발견하여 조치를 취해줄 것이다. 이대로 끌려갔다가는 무슨 짓을 당할지는 뻔했다. 나슬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연예계 생활을 하기 전부터 운동을 꾸준히 했고 지금도 별 다른 일이 없다면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아차! 하고 말았다. 지금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내딛기 전이라면 신발을 벗고 뛰었을 텐데... 역시나 내딛는 순간, 발목을 접질리며 측면으로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상당한 통증과 충격이 왔지만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며 일단 바닥을 기었다. 힐을 벗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그녀의 뒷목에 충격이 왔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느새 다가온 사내 하나가 잡아 당겼던 것이다.
“ 놔! 아악! ”
비명을 지르며 뿌리치려고 했으나, 사내는 오히려 힘껏 잡아당겼다. 뒤로 끌려가며 그녀가 바닥을 뒤굴렀다. 치마가 말려 올라가자, 사내들의 눈빛이 욕정에 불타올랐다. 나슬은 머리카락을 잡은 손을 힘껏 깨물었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충격을 받은 그녀가 축 늘어졌다.
“ 이 개 같은 년이... ”
손을 깨물린 사내가 씩씩 거리며 발을 들어 그녀의 복부를 걷어차려고 했다. 그 때...
“ 야, 시끄러. ”
어디선가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 뭐, 뭐야!? ”
나슬을 습격한 네 명은 사내들이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맞은 편 기둥, 어두운 곳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평범한 외모에 전신에 검은 색 옷을 걸친 사내였다.
“ 너,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
“ 시끄럽다고. 이것들아. ”
나슬은 혼미한 상태에서도 그 남자의 말에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라는 심정이랄까?
“ 뭐? 이 미친 새끼가... ”
그건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한 사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욕설을 내뱉었다.
“ ... 미친... 새끼? ”
검은 옷의 사내가 조용히 욕설을 되풀이 했다.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지, 사내들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천천히 그가 걸어 나왔다.
“ 그래, 이 미친 새끼야! ”
한 명이 기가 죽지 않으려고 했는지 역시나 또 욕설을 퍼부으며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 나왔다. 그 순간, 검은 옷은 사내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로우킥을 날렸다. 그것은 정확히 욕설을 퍼부은 사내의 왼쪽 정강이에 틀어박혔다. 중심을 잃은 사내의 몸이 공중에서 돌았다. 그것을 또 다시 오른 쪽 어퍼를 날리자, 반대편으로 또 다시 기울어졌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사커킥이 복부에 작열했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이뤄진 일이었다.
4~5미터를 나가떨어진 사내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 ... 미친 새끼? 죽을라고... ”
천천히 욕설을 내뱉으며 검은 옷은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빛을 마주한 나슬을 습격한 사내들이 경직되고 말았다.
“ 튀, 튀자! ”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사내도 뒤따라 달렸다. 그러나 나슬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던 사내는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당황하여 우물쭈물하던 그가 손에 들린 칼을 들어 나슬의 목에 들이댔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 다, 다가오지 마! 그, 그어버릴 거야! ”
그러나 검은 옷은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참을 수 없는 공포가 엄습했다.
“ 다, 다가오지 말라고! 이 미친 새끼야! ”
“ ... 그어. 새끼야! ”
“ 뭐? 뭐!? ”
“ 말 두 번, 시키지 마! ”
나슬은 어이가 없었다. 인질이 된 상황도 그랬지만, 정작 눈앞의, 저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태도가 더욱 그랬다. 아니 열불이 터질 지경이었다.
“ 너, 너 뭐야! ”
결국 참다못한 그녀가 소리를 빽 질렀다.
“ 너!? 너, 나 알아? ”
“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그으라고? 날 구해 주려던 게 아니야? ”
“ 내가 왜? ”
‘내가 왜?’ 라니... 그녀는 한창 뜨고 있는 배우였다. 특히나 얼마 전에 찍었던 드라마 한 편으로 그녀는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배우였던 것이다. 게다가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만능 엔터테이너는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그녀를 모르는, 아니 젊은 남자들의, 만인의 연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라니...
하지만 그녀는 선 듯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 저, 저, 저 그럼... 정말 이 사람이 날 해쳐도 괜찮다는 말인가요? 제가 누군지
모르세요? ”
“ ... 말장난 그만해. 너 가 누구든,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
“ 그, 그럼! 왜 이 사람들하고 싸우는 거 에요!? ”
“ 욕 했잖아! ”
이 쯤 되자, 그녀는 할 말이 없어졌다.
“ 야, 그래도 걱정은 마. 복수를 확실하게 해 줄게. 네 몸에 상처를 입히며 저 자식은
내가 확실하게 죽여줄게. 경찰이 와도 널 구하려고 했다고 하면 되잖아. 안 그래? “
더 할 말이 없어지는 나슬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녀를 인질로 잡고 있는 사내에게는 확실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몸이 떨려왔다. 아무래도 눈앞의 저 자식은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정말 정당한 방법(?)으로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칼을 내려놓고 도망친다면 봐줄까?
‘ 아! ’
순간적으로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덕분에 팔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나슬의 뺨이 살짝 베이며 피가 흘러내렸다. 놀란 사내가 칼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 캭!! ”
“ 아? 아, 이, 이건 아냐! 이... 이건... 아니, 난 칼을 버리고... ”
“ 나이스! ”
갑자기 신이 났는지 검은 옷의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왔다. 그리고 멋지게 공중을 날아 이단 옆차기를 했다. 곧 사정없이 가해지는 매질을 끝으로 인질범의 의식은 멀어지고 있었다.
‘ 아, 아니야... 난 항복하려고 했다고... ’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도 사내는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