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남자 / 사랑하는 여자 (1)

진짜킹카 작성일 22.04.09 13:20:44 수정일 22.04.09 13:2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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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배경으로 글을 적어봅니다.

 

 

 

 2002년 3월 어느 금요일 저녁

 

 

 

- 남자 이야기 -

 

 

“형, 많이 기다렸어요?”

 

“창식아! 왜 이제 오냐? 많이 기다렸잖아.”

 

 

평소에도 그렇듯 무난한 술자리와 무난한 하루로 끝날 것 같은 의미 없는 금요일이었다.

 

솔솔 불어오는 싸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찾아간 술집은 금요일이라서 그런지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머리위로 흩어지는 자욱한 담배연기 사이로 흰 남방에 검은색 앞치마를 입은 앳되어 보이는 여종업원이 다가와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했던 안주가 나오고 창식은 겨울 동안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 아쉬움을 달래려하는지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 소주를 벌컥벌컥 급하게 마셔댔다.

 

그리고 마실 때마다 권하던 잦은 건배에 나까지 조금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창식은 겨우내 하고 푼 말을 지금 다하려는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뭔가 과시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두서없이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결국 테이블 위에 비워진 소주병이 3개가 보일 때는 창식은 눈까지 풀려 있었다.

 

“이제 집에 가자.”

 

“형, 이제 11시인데 벌써 갈려고?”

 

많이 취한 창식은 내 걱정을 주정으로 무마시키려고 떼를 쓰고 있었다.

 

“너 많이 취했는데, 2차 갈 수 있겠나?”

 

“그럼, 옆 동네에 바람 쐬러 가요.”

 

뜬금없는 옆 동네가 무슨 말인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 위치에서 한 블록 옆에 위치한 사창가를 말하는 낌새였다.

 

휘청거리는 창식을 부축하며 술집에서 나서자 또다시 3월의 밤바람이 차갑게 불어왔다.

 

그 찬바람에 창식은 정신이 조금이나마 맑아졌는지 취한 사람 같지 않은 완력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렇게 사창가 입구에 다다랐을 땐 괜히 망설여져서일까, 내 팔을 잡고 있는 창식의 손을 뿌리치고 말았다.

 

이런 장소엔 한 번도 온 적이 없었기에 호기심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창식과 시선이 맞닥트렸을 땐 부끄러워 시선을 피해버렸다.

 

“형, 우리 여기서 2차하고 집에 갈까? 응?”

 

난감한 내 표정에도 창식은 눈치 없이 또다시 떼를 썼다.

 

고집을 부리는 창식의 큰 목소리에 난처하기도 하고 거리를 지나가는 남자들의 뭇시선도 민망해 고개를 숙이고는 겨우 들릴 정도로 소곤거렸다.

 

“그냥 집에 가자.”

 

“승훈이 형. 되게 순진하네!”

 

“그래, 2차 가자! 가!”

 

능청스러운 말에 오기 같은 것이 생겨 짜증 섞어 대답하고는 괜한 긴장감으로 골목 입구를 몇 걸음 내딛었다.

 

그 때 전봇대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머리칼이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여자애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잠옷처럼 생긴 하얗고 투명한 드레스를 입고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지 우리가 다가서는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이내 고개를 살며시 들던 그녀는 내려다보는 우리를 보곤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동그랗게 뜬 눈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그리고 어색하지만 늘 입에 달고 있었던 말투로 명랑하게 말을 건네 왔다.

 

“오빠들, 안녕!”

 

얇은 입술 옆으로 엷은 미소가 퍼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때 창식은 팔꿈치로 허리를 쿡쿡 찌르며 귓속말을 했다.

 

“형, 저 애 마음에 들어요?”

 

입고 있는 투명한 드레스보다 더 여려 보이는 그녀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 창식의 귓속말에 아무런 대꾸조차 할 수가 없었다.

 

큰 눈과 콧날이 선 작은 코는 귀염성 있는 입모양과 너무나 잘 어울리던 그녀는 또다시 환히 웃으며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오빠가 너무 마음에 드는데 우리 집으로 가자.”

 

그녀의 머릿결에서 풍겨오는 향긋한 냄새를 따라 걸어가다 보니 깨끗하게 보이진 않지만 주변이 깔끔히 청소 된 2층짜리 작은 건물에 다다르게 되었다.

 

가게 안에는 주인처럼 보이는 빨간 립스틱을 칠한 뚱뚱한 여자가 우리를 반겨 주었고 어느새 내 손목을 끌던 그녀는 내 팔을 붙잡은 채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뚱뚱한 여자에게 선 계산 후에는 창식과 함께 서로의 파트너를 따라서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2층은 좁은 통로에 양쪽으로 방문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고 호기심에 두리번거리자 그녀는 내 팔을 잡아끌었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하늘색 방문 앞에 섰을 때, 그 방이 그녀와 내가 들어가야 할 방인 것 같았다.

 

내가 들어갈 방 바로 옆방 앞에서 창식도 그 파트너와 팔짱을 꼭 낀 채 내 얼굴을 건너다보며 히죽거리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형! 금방 나오지 말고 좀 오래 해.”

 

야릿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창식을 그 파트너는 재미있다는 듯이 크게 웃으며 팔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색하게 방문 앞에 그녀와 같이 서 있으니 너무 쑥스러워서 고개를 숙였고 이끌리다시피 방으로 들어섰다. 

 

깨끗이 정리된 침대는 방문 옆 벽 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또 침대 옆에 배치된 화장대 위에는 이름 모를 화장품 몇 개와 모래시계가 놓여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방 구조를 한참을 호기심으로 둘러보던 중, 그녀가 먼저 민망한 듯 말을 꺼냈다.

 

“안 할 거야?”

 

그녀의 어색한 말 한마디에 얼굴 전체가 불에 덴 듯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내키지 않은 목욕을 하는 사람처럼 옷을 천천히 벗는 순간,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 빨리 나와.”

 

옆방에 들어간 지 몇 분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나와서 장난을 치려는 듯 창식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여자 이야기 -

 

고등학교 3학년 때 운송업을 하시던 아빠 사업이 부도가 났었다.

 

그 후에 찾아 든 빚쟁이들 때문에 아빠는 집을 나가고 연락이 끊겨버렸다.

 

남부럽지 않게 살던 우리 집은 한철 벚꽃 잎이 떨어지듯 순식간에 와르르 몰락을 해버렸다. 

 

철없던 그 시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아무런 계획도 없이 20살 때 집을 나왔다.

 

어린 나이에 접한 사회는 어디를 가든지 간에 너무나 냉랭했다.

 

그 시기에 절실했던 돈을 먼저 당겨 준다는 어떤 언니의 달콤한 말에 속아 여기 포항으로 온 지 2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저것 이자가 붙고 또 하루하루를 포기하며 살다보니 인식하지 못하던 사이에 빛은 2,000만원이 되어 버렸다.

 

엄마를 닮아 선천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해 이곳에 왔었지만, 항상 이곳에 온 것을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만큼 후회를 했다.

 

후회는 따뜻한 집을 떠올리게 했고 집을 떠나온 지 2년 만에 한참을 망설이다 엄마에게 안부를 물으려 전화를 걸었었다.

 

2년 만에 들어보는 내 목소리에 엄마는 한참을 흐느꼈다.

 

그 흐느낌을 듣고 있기가 나 역시 너무 힘이 들어 자꾸만 눈물이 났었다.

 

겨우 진정한 듯 엄마는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다며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고는 또다시 감정이 격해졌는지 또다시 울먹였었다.

 

포항에서 어떤 일을 하는 지는 차마 말하지 못한 채, 그냥 빚이 있다고만 솔직히 말하자 바로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그리고 당장 가불금을 보내 준다기에 기다리자 다음날 바로 2,000만원을 통장으로 송금 받았다.

 

그렇게 오늘로써 이 일이 마지막이었다. 

 

막상 집으로 간다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던 차에 바람이나 쐴 겸 골목을 거닐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 쪼그려 앉아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을 했다.

 

   ‘공부해서 대학교에 갈까? 나이가 있으니 그냥 컴퓨터나 배워서 회사 경리나 할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다가 밤바람이 너무 차가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다지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 남자가 어울리지 않는 회사 점퍼를 입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렇게 크지 않는 키에 헤어스타일만 요란한 남자가 옆에 서 있는 남자의 눈치를 살펴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순식간에 일어나 습관처럼 가벼운 호객행위를 했다. 

 

뒤늦게 미처 생각지도 못한 내 행동에 짧게나마 후회를 하며 가게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니 그 남자는 순순히 따라왔다.

 

수백 번은 여닫았던 내 키보다 훨씬 큰 유리문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가게로 들어서자 마담언니는 가식적인 웃음소리를 내며 흥정하기 시작했다.

 

그 흥정을 하는 순간에도 사내의 끈적끈적한 시선에 또다시 고민이 되었다. 

 

   ‘괜히 데리고 왔나? 그냥 돌려보낼까?’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심적 동요가 어지럽게 일었지만 발걸음은 습관처럼 내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 방 앞에서도 한 동안 주춤거리며 망설일 때, 내 옆에 있던 남자는 쑥스러운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왔던 첫인상이 좋지 않던 사내만이 우리를 쳐다보며 능글스럽게 웃고 있었다.

 

“형! 금방 나오지 말고 좀 오래 해.”

 

처음 볼 때부터 능글스럽던 남자는 말끝마다 짜증을 돋우게 만들었고, 그 언짢은 기분을 표정으로 내색해도 옆에 서 있는 사내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사내의 얼굴을 살짝 쳐다보며 손목을 잡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침대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내의 표정과 행동 하나하나를 힐끔힐끔 살펴보니 마치 이런 곳은 처음인 듯 했다.

 

마지막 손님이라는 생각에 빨리 내보내고 싶었지만 내 시선에도 어쩔 줄 모르는 남자에게 마냥 재촉을 할 수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은근히 귀여워 그냥 지켜만 봐도 작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안 할 거야?”

 

막상 말을 뱉고 난 후에는 그나마 남아 있지 않는 자존심마저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남자라면 다 그렇고 그런 남자라는 생각이 순식간에 들어 앞에 있는 이 남자마저 삐딱하게만 보였다. 

 

“형! 빨리 나와.”

 

그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짓궂게 외치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그 새끼네. 방에 들어가서 방만 구경하고 나왔나? 뭐 이리 빨리 나와?’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사내는 당황을 했는지 순식간에 바지를 벗었고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나도 몰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와중에 사내와 시선이 마주쳤다.

 

당황하는 나와는 달리 그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빙긋 미소를 보아며 다시 바지를 입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남자의 행동에 멍하니 얼굴만 쳐다봤다.

 

그러자 옷매무새를 바로 잡은 그 사내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한 걸로 치세요.”

 

단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기 때문일까,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 남자의 행동과 말에 끌려 방에서 나가려는 그 남자 휴대폰을 뺏어 쥐고는 내 휴대폰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오빠, 이 번호가 내 번호니깐 나중에 전화해.”

 

내 미소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 사내도 빙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시선은 잠시 동안 얽혀버렸다.

 

 

 

- 남자 이야기 -

 

전날 저녁 창식이 때문에 술을 너무 급하게 마셔서 그런지 회사에 출근해서도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상하게 어제부터 그녀가 계속 떠올랐다.

 

크지 않는 키에 어깨보다 조금 더 긴 머리칼, 동그랗고 슬퍼 보이는 눈과 얇은 입술, 투명한 드레스 등 그런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지금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이 술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언뜻 들었다.

 

‘왜 자꾸 그녀가 머릿속에 계속 떠오를까? 내가 한 동안 여자를 만나지 않아서 그런가?’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틈틈이 계속 물만 마시며 새로 발령 받아 온 젊은 부장의 눈치를 살펴보던 중 휴대폰이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에 누구일까 잠시 생각하다 손에 들린 물을 한 입에 들이켜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빠, 저예요.”

 

“누구시죠?”

 

묻는 말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놀리는 듯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한참 후에야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이름은 안 가르쳐 줬는데.”

 

“네?”

 

“어제 저녁에 전화번호 준 사람인데요.”

 

“아, 네…….”

 

아침부터 계속 떠오르고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던 그녀의 전화에 금세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저 낮에 잠시 시간이 되서 그러는데요. 오빠 회사에 놀러가도 되나요?”

 

계속 생각나긴 했지만 뜬금없이 회사에 놀러온다는 그녀의 말뜻을 곰곰이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우리 회사로 찾아오는 무슨 목적이 있을 것만 같아 꺼림칙했다.

 

만약 오늘 회사로 오라고 했을 때, 그녀의 복장이『나 밤의 세계 여자예요』라고 보이는 패션이면 회사 동료들 보기에 난감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오지 말라고 말하기에는 그녀 입장에서 자기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져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럼, 시간 되면 오세요.”

 

“그럼, 주소 좀 가르쳐 주세요.”

 

기다렸다는 듯이 주소를 묻는 말에도 반신반의 하는 마음으로 일단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쓰린 속에 따뜻한 물만 연신 마셔가며 일을 하던 중이었다.

 

휴대폰이 또다시 울려댔고 별 생각 없이 번호를 확인하자 회사로 온다던 그녀의 번호였다.

 

“지금 회사 앞에 왔는데요.”

 

아무 부담 없이 찾아 온 것 같은 청량한 목소리에 제법 당황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별 뜻 없이 쳐다보는 동료들이었지만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 네…… 진짜 오셨네요.”

 

“왜요? 제가 와서 실망인가요?”

 

“아뇨, 피곤하신데 시간까지 내서 오실 줄은 몰랐죠.”

 

“아, 네…….”

 

내 말을 들은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떨려 들렸다. 

 

말끝을 흐리던 그녀에게 혹시나 내가 실수를 했나 싶어 그녀가 있는 곳으로 나가려고 다시금 물었다.

 

“지금 오신 거 맞죠? 어디 계시죠?”

 

“아뇨, 나오시지 마세요. 제가 실수 했네요. 그냥 갈게요.”

 

무언가에 실망한 듯 쓸쓸한 목소리로 돌아간다는 말에 이제는 당황하다 못해 의아하기까지 했다.

 

   ‘진짜 오긴 온 건가? 그런데 왜 갑자기 간다고 그러지?’

 

 

 

- 여자 이야기 -

 

그 남자가 다녀 간 이후부터 별 다른 육체적인 접촉이 없었지만 계속 그 남자가 떠올랐다.

 

육체적인 접촉이 없어서 의아한 기분에 호기심이 생겼는지 아니면 마지막 남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머릿속 한 가득 그 남자의 미소와 행동 하나까지 또렷하게 생각났다.

 

그 남자를 보낸 후 가게에 계속 남아있는 것이 껄끄러워 같이 일하던 언니에게 부탁을 했다.

 

하루나 이틀 동안 언니 집에서 지내자고 부탁을 했더니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언니는 그러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이 지긋지긋한 포항에서 바로 집에 가는 것 보단 왠지 하루 이틀을 더 있고 싶었다.

 

언니보다 먼저 집에 들어가 풋잠에 들었을 때, 새벽 늦게 들어온 언니는 많이 피곤한지 미동도 없이 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쳐다 본 벽시계는 아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침대 아래에 등을 기대고 앉아 어제 입력을 해 놓은 그 남자의 번호를 보며 전화를 할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아침 일찍 전화하면 그 남자가 껄끄러워 할 것 같아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전화하기로 마음먹고 언니 집을 나섰다.

 

운동 삼아 언니 집 인근에 있는 동네 시장을 거닐던 중, 유부초밥 재료들이 자꾸만 눈에 걸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재료를 샀다.

 

장을 보는 중에도 혹시나 그 남자가 내게 전화를 했을까 휴대폰도 자주 쳐다봤지만 액정에는 그냥 시간만 보였다.

 

시장에 다녀왔는데도 언니는 세상모르고 곤히 자고 있었다.

 

침대에 올라가면 흔들거리는 느낌에 언니가 잠에서 깰 것 같아 침대 밑에 앉아 문득 벽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쯤이면 그 남자 전화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휴대폰을 쥐는 순간부터 이상하게도 심장이 자꾸만 떨려왔다.

 

용기를 내려고 숨을 크게 두어 번 내뿜었다.

 

그리고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가슴까지 당기곤 두 손 모아 쥔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하지만 용기가 부족했는지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바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또다시 한참을 망설이다 여러 번 전화를 걸고 끊기를 반복한 후에는 고민까지 했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셨던 거 같은데 날 기억하려나? 그래! 그 남자가 날 기억 못하면 바로 집에나 가야겠어.’

 

아쉬울 것 없다는 생각에 세뇌가 된 듯 용기가 생겨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막상 신호음이 들려오자 눈이 저절로 질끈 감겼고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번에는 눈이 저절로 떠졌다.

 

“여보세요?”

 

들려오는 그 남자의 목소리에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동안 가만히 숨죽이다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무슨 말을 하려해도 마땅히 뭐라고 할 말이 없어 마냥 밝게만 말했다.

 

“오빠, 저예요.”

 

“누구시죠?”

 

역시나 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듯 한 대답이었지만 심장은 계속 두근거렸다.

 

긴장한 목소리를 감추려고 의미 없는 웃음소리만 흘리다가 용기 내어 다시 말했다.

 

“이름은 안 가르쳐 줬는데.”

 

“네?”

 

“어제 저녁에 전화번호 준 사람인데요.”

 

방금 뱉은 말에 심장은 조금 전보다 더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저런 걱정도 되었다.

 

   ‘이 남자가 내가 먼저 전화를 한다고 날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뜬금없는 내 전화에 제법 당황한 것 같은 그 남자는 떨떠름하게 대꾸를 했다.

 

그런 대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시장에 가기 전부터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저 낮에 잠시 시간이 되서 그러는데 오빠 회사에 놀러 가도 되나요?”

 

그 남자가 잠시 생각하는 듯 뜸을 들였고, 그 망설이는 짧은 시간조차 자존심이 상해버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저 남자랑 내가 그런 곳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도 저리 고민할까?’

 

괜히 전화 했었다는 생각이 들 때,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시간 되면 오세요.”

 

비로소 회사에 오라는 말을 들었지만 한참을 뜸을 들이던 그 남자 때문에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통화를 끝냈을 때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자리에 서 있었고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상쾌해진 기분으로 자는 언니가 깨지 않게 조용히 부엌으로 걸어갔다.

 

장을 봤던 재료를 꺼내 유부초밥을 만들 준비를 하자 내 기억에서 잊어버린 줄 알았던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잠시 후 그 콧노래에 언니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식탁 앞으로 다가온 언니는 식탁 의자에 앉아 유부초밥을 만들고 있는 내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안나야, 뭐해?”

 

“보면 몰라? 유부초밥 만들어.”

 

“유부초밥? 그냥 라면이나 끓여먹지 무슨 유부초밥이야?”

 

언니는 나를 엉뚱하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그 시선을 모른 척 피해버렸다.

 

“아, 그게…… 유부초밥 만들 일이 좀 있어서.”

 

언니는 여전히 이상하다는 듯이 곤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내 얼굴과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기분이 좀 좋아 보이네?”

 

“당연하지. 어제로써 이젠 그 일을 안 해도 되니깐.”

 

언니는 유부초밥을 만드는 내 옆으로 다가와서 먹음직스러운 초밥을 한 입에 넣고는 잠에서 덜 깬 듯 손등으로 또다시 눈을 비볐다

 

“그래. 축하한다. 안나야. 난 언제쯤 나갈 수 있을까…….”

 

언니의 처지를 잘 알기에 그 어떤 위로도 해주기가 어려웠다.

 

“참, 안나야! 이제 여기서 나가면 안나라는 이름은 잊고 살겠네? 그러고 보니 네 본명은 뭐였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응, 은주…… 김은주.”

 

여기서는 가명을 써야 한다기에 안나라 불리고 있었고, 그렇게 너무 오래 불린 탓인지 한동안 잊고 지냈던 김은주라는 이름으로 새 삶을 산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언니와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유부초밥을 거의 다 만들었다.

 

완성된 유부초밥은 네모란 플라스틱 용기에 담았고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종이 가방 중에 가장 예쁜 거에 넣었다.

 

그런 내 행동을 유심히 보던 언니는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 도시락 남자에게 주는 거야?”

 

“응.”

 

“누구?”

 

“아, 그냥 좀 친한 손님…….”

 

말끝이 흐려지는 대답에 언니는 흥분을 했는지 언성을 높였다.

 

“안나야! 손님이랑은 절대 안 되는 거야! 남자 만나려면 새로 남자를 만나야지!”

 

큰소리로 다그치는 언니에게 조용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물거렸다.

 

“뭐, 사귀고 그런 거 아니야. 그냥 한번 만났을 뿐이거든…….”

 

언니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버리자 언니는 더 크게 언성을 높였다.

 

“그런 거도 아닌데 도시락을 바치고 난리야! 그것도 아침부터!”

 

“그냥 그 사람은 왠지 달라 보여서…….”

 

도시락을 담은 종이 가방을 쳐다보며 살짝 미소를 짓는 내 모습에 언니는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곤 욕실로 향했다.

 

문 닫힌 욕실에서도 아니나 다를까 또 언니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다 똑같은 거 몰라? 알만큼 아는 년이..”

 

언니의 잔소리에 나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이 대답을 했다. 

 

“그냥 오늘 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냥 집으로 갈 거야. 맞다 싶어도 갈 거지만…….”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언니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언니의 눈치를 보며 외출을 하기 위해 침대 위에 옷 몇 벌을 펼쳐 놓았다. 

 

어떤 것을 입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무난하게 청바지와 어울리는 의상으로 코디를 하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설 때는 또다시 언니의 잔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고, 그 잔소리가 내 등을 밀어내는 듯 밖으로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간만에 느껴보는 나른한 늦은 아침의 햇살과 냄새가 참 좋다는 걸 느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도시락이 담긴 종이 백을 들고 큰 도로가로 걷는 중에 또다시 나도 몰래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잠시 후 택시 한 대가 내 앞을 막아섰고 타자마자 그 남자가 가르쳐 준 주소를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보여 주었다. 

 

“학생, 여기로 가면 되는 거지?”

 

학생이라는 호칭에 기분이 좋아져 기사 아저씨의 얼굴을 룸미러로 힐끔 보며 귀엽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저 학생으로 보여요?”

 

기사아저씨도 운전 중에 룸미러로 내 얼굴을 슬쩍 쳐다보며 털털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왜? 대학생 아니야? 혹시 고등학생은 아니지?”

 

기사아저씨의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앙증맞은 목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아저씨도 참. 저 대학생 맞아요.”

 

기분 좋게 아저씨와 몇 마디 주고 받다보니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시락이 든 종이가방의 끈을 양손으로 꼭 모아 잡은 채, 그 남자가 일하고 있는 건물을 아래에서 위로 쭉 훑어보았다.

 

회사 담벼락 안쪽에는 열로 심어져 있는 개나리가 2년 동안 내내 겨울이었던 나에게 계절을 가르쳐 주려는 듯 화사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개나리가 보이는 담벼락으로 몇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에게 막상 도시락을 건네 줄려니 너무 긴장이 되었다.

 

신호음은 왜 이리 오랫동안 울리는지 괜스레 초조했고, 그 와중에 남자의 자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회사 앞에 왔는데요.”

 

“아, 네…… 진짜 오셨네요.”

 

내가 바랐던 것과 전혀 다른 시큰둥한 반응에 너무 실망스러워 순간 울컥했다.

 

“왜요? 제가 와서 실망인가요?”

 

“아뇨, 피곤하신데 시간까지 내서 오실 줄은 몰랐죠.”

 

달갑지 않은 듯 생각 없이 뱉은 그 남자의 한마디가 개나리 꽃잎 같이 화사했던 내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피곤? 난 밤에 일하니깐 그리고 남자를 상대하니깐 항상 피곤하다는 그런 뜻인 거야?’

 

설레던 내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조각들이 온몸에 여기저기 박혀버려 무척이나 아팠다.

 

“아, 네…….”

 

“지금 오신 거 맞죠? 어디 계시죠?”

 

너무 아파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눈가가 젖어버리고 말았다.

 

“아뇨, 나오시지 마세요. 제가 실수 했네요. 그냥 갈게요.”

 

울먹이는 목소리에 그 남자도 실수를 느낀 것처럼 허둥대며 무슨 말을 했던 것 같았지만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 번 터져버린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내려 손바닥으로 눈을 막은 채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다시 겨울로 돌아가 찬바람을 맞은 것처럼 온몸이 떨려왔고, 그러던 중 봄기운 같은 인기척과 함께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살며시 얹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남자가 급하게 내려와서 그런지 숨을 약간 헐떡이며 서 있었다.

 

뒤돌아 선 나를 보며 그 남자는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내 얼굴과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의 움직임은 제법 놀란 듯 했다.

 

짧게나마 그 남자의 얼굴에 자그마한 미소가 번졌지만 내가 눈치 챌까 바로 감춰 버렸다. 

 

그리고 미안한 표정인지, 당황한 표정인지, 모를 모습으로 그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뇨, 그냥 바쁘신 거 같아서.”

 

“아, 네…….”

 

막상 그 남자가 앞에 있으니 서먹서먹하게 서 있기가 민망해서 유부초밥이 든 종이 백을 내밀었다.

 

“식사를 안 하셨으면 점심 때 드시라고 제가 좀 만들어 봤어요.”

 

그 남자에게 종이 백을 내밀 때 그 남자의 회사 건물 3층에서 남자 몇 명이 얼굴을 창밖으로 내밀며 쳐다보고 있었다.

바람에 실려 휘파람 소리도 얼핏 들리는 것 같았다.

 

휘파람 소리가 나는 그 곳을 쳐다보며 남자는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였고 다시 나를 쳐다볼 땐 어제처럼 서로의 시선이 또다시 얽혀버렸다.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 그 남자의 화사한 미소에 조만간 중독될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봄은 이미 시작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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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삼아 올려봅니다. 매일 같이 하나씩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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