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 이야기 -
그 남자에게 종이 백을 쥐어 줄 때부터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서로가 민망한 분위기에 그저 고개만 까닥거리며 인사를 하곤 얼른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총총걸음으로 걷다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 남자는 아직도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길에 쑥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다시 한 번 더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큰길로 나왔을 때도 아직까지 가슴이 콩닥거려 진정을 시키려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때마침 저 앞에서 택시 한 대가 미등을 깜빡이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 남자를 보려고 정성스레 화장을 했던 것이 아까워 잠시 번화가라도 나갈까 살짝 고민을 했지만 혹시나 누가 날 알아본다면 좋았던 기분이 서글퍼 질 것 같아 다시 언니 집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언니 집으로 가는 길에 조금 전 내가 했던 쑥스러운 행동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좀 더 신경을 써서 만들 걸 그랬네. 맛이 없다고 그러면 어떻게 하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흐뭇했던 기분과 입가에 머물었던 미소는 언니가 했던 말이 떠오르면서 금세 사라져버렸다.
『손님이랑은 절대 안 되는 거야! 남자 만나려면 새로 남자를 만나야지!』
메아리처럼 귓가에 맴도는 그 목소리에 이내 현실적으로 내 상황을 생각했다..
‘그래, 어차피 부모님이 계신 대구로 가면 새 출발을 할 건데. 좋은 기억으로 남기자.’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남자 얼굴에서 보았던 자상한 미소가 택시 창밖에서 환영처럼 보였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음을 비우려고 해도 그 남자에게 전화나 문자가 왔는지 휴대폰에 신경 쓰는 내 모습이 너무 이상해 피씩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시간을 보려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린 것도 아닌데 액정을 확인을 할 때마다 시간만 1분씩 더디게 지나가고 있었고, 그 때 택시는 언니 집 앞에 도착했다.
언니 집 건물 입구 앞에서 조금 혼란해진 머리를 식힐 겸 약간 서성이다 집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침대 위에는 하얗고 큰 베개에 얼굴을 묻은 언니가 여전히 새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침대 앞에 서서 짐짓 인기척 소리를 내었지만 아무런 미동도 없는 언니를 딱한 눈으로 내려 보다, 나 역시 깔깔한 피곤함이 조금 남아 있는 듯 언니 옆에 눕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화장을 다 지우고 잠이 들었을 때, 혹시나 저녁에 만나자고 그 남자에게 연락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시 고민을 하다가 손에 쥔 휴대폰을 슬쩍 봤다.
여전히 문자 한통 없는 그 남자가 괜히 야속했다.
‘설마 연락이 오겠어? 그런데 연락이 왔으면 정말 좋겠다.’
이제 겨우 두 번 밖에 보지 않은 남자의 연락을 바라면서도 연락이 오지 않을 걸 예감하자 가슴이 이상하게 시큰거렸다.
결국 욕실에서 클렌징크림으로 화장을 말끔히 닦아내고 언니 옆에 누워 같이 잠에 들었다.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잠이 좀 깊게 들어버렸다.
한참동안 잠에 빠졌던 것처럼 출근 준비를 하려고 화장대에 앉은 언니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이 뜨였다.
“언니, 출근 준비해?”
잠결에 껄껄한 목소리로 물어보자 조심스럽게 화장을 하던 언니는 화장대 거울로 시선을 맞추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늦게 출근을 하려는 언니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들릴 듯 말 듯 씁쓸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언니는 싱겁다는 듯이 거울 안에서 내 얼굴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그냥 내일 아침에 대구에 갈 거야.”
자그마한 내 목소리에 언니는 화장을 하던 손을 잠시 멈칫하고는 다시 화장을 하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왜? 그 남자가 너 싫다고 그러든?”
“아니, 그런 거는 아닌데 언니의 말이 맞는 거 같아. 손님하고는…….”
언니는 뭔가를 숨기는 것처럼 뜻 모를 웃음을 보이곤 한쪽 눈을 찡긋하며 놀리듯 말했다.
“아까 너 휴대폰에 진동 오던데?”
“정말?”
화들짝 놀란 내 모습에 언니는 웃음을 피씩 터트리며 화장대 위에 있던 휴대폰을 침대 위로 던져 주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휴대폰을 확인하자 전화 3통과 문자 1통의 기록이 남아있었고 전부 그 남자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휴대폰에 남겨진 그 남자의 번호를 확인 한 순간부터 왜 그렇게도 심장이 떨려오는지 심호흡을 해가며 실눈으로 문자를 확인했다.
『유부초밥 맛나게 먹었다고 전화했는데 안 받으시네요』
긴장했다가 바로 환하게 웃는 내 모습을 언니는 안 보는 척했지만 거울 안에서의 시선은 내 얼굴로 향해 있었다.
“언니, 지금 내가 그 남자에게 전화하면 어떨까?”
언니 눈치를 보며 고민하는 표정으로 슬쩍 물었고 화장을 잠시 멈춘 언니는 한심하다는 듯이 짧은 한숨을 내뿜었다.
“이제 안 만나다면서?”
“그럴까 싶은데…….”
“그러면 하지 마!”
망설이는 내 말투에 언니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굳이 그렇게 잘라서 말하지 않았더라도 내 머릿속에서는 그만하자는 생각이 계속 들긴 했다.
하지만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나도 몰래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언니는 다 바른 연한 분홍빛 립스틱을 내려놓으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자꾸 그렇게 신경 쓰이면 전화해. 네 인생 네가 사는 거니깐.”
그 한마디로 전화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처럼 너무 기뻐서 언니를 등 뒤에서 안았다.
“언니, 고마워!”
뒤에서 포옹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고개를 돌려 보고는 눈썹을 찌푸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년이 미쳤나. 그냥 전화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어이구.”
진정하려고 물 한잔을 들이켜고 침대에 걸쳐 앉아 휴대폰을 양손으로 쥔 채로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자다 일어난 목소리로 들리지 않으려고 통화버튼을 누른 후 신호음이 가는 동안 흠흠 소리를 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던 중 환청처럼 들리던 그의 진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저, 전화, 아니 문자를 하셔가지고…….”
더듬거리는 내 말투가 웃긴지 아니면 내 조바심을 알아채고 놀리려는 지 그 사람 특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네. 전화를 안 받으셔서. 오늘 덕분에 점심 진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아…… 네, 고맙습니다.”
“아니죠, 고마운 건 오히려 제가 고맙죠.”
“아니에요. 대충 만들어서 맛있을까 걱정을 했어요.”
“대충 만든 게 그 정도면 제대로 만들면 여럿 죽겠네요.”
다른 사람이 이런 농담을 했다면 썰렁하거나 지루했을 건데 이 남자의 자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때문인지 다 진심으로 느껴지고 재미있는 유머처럼 들려왔다.
“다음에는 제대로 만들어서 드릴게요.”
“네, 기대 하겠습니다.”
그 남자와 통화하는 내내 목소리가 떨려 나왔고 다른 별 말 없이 그렇게 통화가 끊겨버렸다.
오늘 시간 되면 만나자고 말을 건넬 줄 알았는데 그런 언급조차 없었던 통화가 너무 아쉬워서 짧은 한숨만 폭 쉬었다.
약간의 서운함과 아쉬움에 앉아 있던 자리에서 어리광을 피우듯 발장구를 치며 들고 있던 전화기를 침대 위에 던져버렸다.
여전히 언니는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피씩 웃음을 터트렸다.
- 남자 이야기 -
그녀를 다시 만난 순간 내 예상과 완전히 빗나갔고 헤어졌을 때는 아쉽기까지 했다.
야한 옷과 빨간 립스틱의 전형적인 촌스런 술집 여자 패션으로 다음에 또다시 한 번 더 오라는 접대성 방문으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와 마주한던 순간 귀여운 외모에 어울리는 짙은 청바지와 정갈한 아이보리 색깔의 남방을 입은 모습에 마치 딴 사람인 줄 알았다.
더군다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시락만 쥐어주고 갔기에 그 여자가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멍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그녀가 건네준 종이 백을 들고 계단을 걸어 3층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유리문을 밀치며 들어서자마자 조금 전부터 지켜보던 직장 동료들이 배시시 웃으며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받아 왔던 종이 백을 책상위에 얹어 놓았다.
그 때 저 앞에서 얼마 전 관리팀으로 발령 받은 젊은 부장이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와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조금 전 밖에 그 여자 누군가?”
부장이 먼저 사무실 분위기를 띄우려 내게 말을 걸었다.
그 순간 눈치를 살피던 동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내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내 주위에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순간 난감해져 쑥스러움에 목소리가 작게 나왔다.
자그마한 목소리에 입사 동기는 내 뺨 옆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장난기가 발동한 듯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혹시, 숨겨둔 애인인거야?”
“애인은 무슨…….”
말끝을 흐리는 대답에 입사 동기는 내 어깨를 장난스럽게 주물렀다.
“애인 아니면 나 소개 시켜주라. 진짜 귀엽던데.”
동기의 얼굴은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에 얄미운 웃음을 배어있었고, 그 농담처럼 뱉은 말에 나도 모르게 질투가 나서 슬며시 대꾸했다.
“내 애인 맞아.”
질투가 불러온 거짓말에 동기와 주위에 있던 직원들은 기어코 듣고 싶은 대답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동기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내 어깨를 툭 치며 끈질기게 계속 물었다.
“뭐하는 아가씨야? 대학생?”
성격상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하고 하더라도 금방 얼굴에서 표시가 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대학생 맞아.”
동기의 시선을 피해 고개만 살며시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순간 입술이 잠시나마 파리하게 떨려왔다.
그러나 동기는 내 거짓말을 알아채지 못한 듯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종이 백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종이 백에 뭐 들었어?”
“도시락 같은 것이지 싶은데…….”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에 몰려든 동료들은 히죽거리며 짧은 감탄사를 입을 모아 내뱉었다.
“우-워.”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종이 가방 안에서 분홍색 플라스틱 도시락 용기를 꺼낼 때, 또 장난기 가득한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우-워.”
보물 상자의 뚜껑을 여는 것처럼 동료들의 기대에 찬 시선이 도시락 용기에 모아졌고, 용기 뚜껑을 여는 순간 유부초밥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도시락을 건네 준 사람이 신경을 많이 쓴 것처럼 정갈한 모양으로 들어 있었다.
뚜껑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동료들은 유부초밥을 하나씩 집어서 입에 넣기 바빴다.
하나씩 사라져가는 유부초밥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 미안해져서 동료들이 다 먹기 전에 하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깔끔하게 만들어진 모양만큼 맛이 좋았다.
음식을 먹다 보니 조금 전에 다녀간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떠올랐다.
‘그런데 왜 이 도시락을 나에게 줬을까?’
그녀가 다녀간 후부터 계속 그녀의 얼굴과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지었던 여린 미소가 아른거렸다.
그리고 그녀가 마법을 부렸는지 점심시간까지 몇 분 남아있지 않았지만 시간은 정말 천천히 흘러갔다.
그녀에게 전화하고 싶은 생각에 빨리 점심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전화를 받는다고 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되나 고민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시작되었고 주위를 살피며 아무도 없을 때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마치 손에 뜨거운 불덩이를 쥔 것처럼 손에서 시작된 뜨거움은 온몸으로 퍼져나가 순식간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곧장 화장실로 급하게 걸어가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 찬물로 얼굴을 씻어도 뛰는 가슴만은 달래지는 못했다.
촉촉이 젖은 앞머리를 털어내고 거울을 쳐다보며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막상 떨려오는 손가락으로 통화버튼을 눌렀을 때 신호음만 들려올 뿐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폰을 두고 잠시 외출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시 한 번 더 전화를 걸었다.
길게 신호음이 가고도 받지 않는 전화에 여태껏 머리끝까지 차오른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
그 순간 오전에 내 얼굴을 보던 눈가에 눈물이 어려 있던 모습이 기억이 났다.
혹시나 그 때 나도 모르게 실수를 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지만, 도대체 어떤 실수였는지 기억해내지 못하고 아쉬움으로 구내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여느 토요일처럼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일주일 마감과 함께 일이 마무리가 되었다.
회사를 나서면서 같이 퇴근하는 동기의 눈을 피해 다시 한 번 더 전화를 했다.
하지만 내 전화를 일부러 피하는 건지 여전히 받질 않았다.
혹시나 실수를 했을까, 괜히 마음을 졸이며 그녀를 만났을 때 온갖 상황을 곰곰이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전화를 하면 안 받을 수는 있겠지만 문자로 보낸다면 한번쯤은 읽어 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려 했지만 마땅히 글귀가 떠오르지 않아 몇 번을 쓰고 지우고 또다시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름도 모르는 아가씨에게 막상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에는 적당한 문구가 생각이 나질 않아서였다.
일부러 전화를 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부초밥을 건네줬던 것을 문구로 넣으면 그녀도 별 뜻 없이 감사히 받았던 걸로 알 것만 같았다.
『유부초밥 맛나게 먹었다고 전화 했는데 안 받으시네요』
문자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퇴근을 하면서도 초조하게 이름도 모르는 그녀의 답장만 기다렸다.
어느새 집에 도착을 했지만 문자를 보낸 지 1시간이 지나도록 그녀에게서 답장이 없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씁쓸히 쳐다보다 내 행동에 어이가 없어서 피씩 웃음을 터트렸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옷을 풀어 헤치고 샤워를 하려고 욕실로 향했다.
한참을 샤워하던 그 때, 물줄기 소리에 묻혀 휴대폰 벨소리가 작게나마 들려오는 것 같았다.
혹시 그녀가 전화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샤워 꼭지를 잠그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휴대폰 벨소리가 분명했다.
오랫동안 울린 벨소리가 끊길까 마음을 졸이며 거품까지 달고 거실로 뛰쳐나왔다.
“여보세요?”
“저, 전화, 아니 문자를 하셔가지고…….”
애타게 연락을 기다리던 그녀의 목소리였다.
약간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귀엽게 들리기도 했고 연락이 왔다는 안도감에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 멍청하게 들리지는 않았을지 걱정을 하며 시선을 돌렸을 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에서 거품이 하나둘씩 터지는 게 눈에 보였다.
휴대폰을 든 채로 다시 욕실로 들어가 왼손으로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오른손으로 수건을 쥐고 거품을 닦던 중에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면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만 같아 작은 웃음소리를 섞어 말했다.
“아, 네, 전화를 안 받으셔서. 오늘 덕분에 점심 진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아…… 네, 고맙습니다.”
도시락을 주고도 되레 고마워하는 모습과 귀여운 말투에 유쾌하다 못해 묘한 설렘까지 느껴졌다.
그녀가 말할 때 대꾸를 하면서 오늘 만나고 싶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려고 했지만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은 대화가 끊이지 않게 웃음소리를 섞어 호응을 하면서 만나자는 말을 꺼내려고 마음을 졸였다.
“대충 만든 게 그 정도면 제대로 만들면 여럿 죽겠네요.”
그러나 오늘 만나자는 말이 목구멍에서만 맴돌며 입 밖으로는 왜 그렇게 나오질 않는지 미칠 지경이었다.
“다음에는 제대로 만들어서 드릴게요.”
“네, 기대 하겠습니다.”
만나자는 말을 꺼낼 기회를 엿보다가 생각 없이 뱉은 말에 순간 당황했다.
‘기대 한다는 말을 왜 했을까……. 너무 매너 없이 또 해달라는 말로 들리진 않았을까?’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도망치듯 전화를 끊고는 소파에 털썩 앉아 고개를 젖혀 천정을 봤다.
그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한심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욕실에 들어가서 제대로 씻고 나온 후엔 소파에 앉아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켜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여자에게 데이트를 요청하는 것이 이렇게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길게 숨을 내뿜고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만남을 구걸하려고 시끄러운 텔레비전까지 꺼버렸다.
그리고 익숙하지 못한 가슴 떨림으로 통화 버튼을 누른 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신호음이 세 번도 울리기 전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귀여운 목소리가 밝게 들려왔다.
“여보세요.”
“전데요.”
“네, 알아요.”
내 전화를 기다린 것처럼 해맑은 목소리에 용기가 솟았지만 조마조마한 건 마찬가지였다.
“저, 오늘 도시락 잘 먹었는데…… 그래서 제가 보답으로 저녁을…….”
전화기 너머에서 까르르 웃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옆에 누가 있는지 휴대폰을 막고 어떤 사람과 웃으면서 대화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네, 그럼 오늘 저녁 사주세요.”
“그런데…… 오늘은 일을 안 나가시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신경 쓰이세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화가 난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에 또 무슨 실수를 한 것 같아 무척이나 당황했다.
“아뇨…… 그런 거는 아니지만…….”
“오늘은 일 안 나가니깐! 저 만나실 거예요? 안 만나실 거예요?”
“당연히 만나야죠.”
상냥하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갑게 변해버린 그녀와 얼떨결에 번화가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왠지 마음은 불편했다.
‘내가 또 무슨 실수를 한 건가? 실수를 한 것 같은데…….’
- 여자 이야기 -
그 남자가 나를 놀리려는지, 아님 눈치가 없는 건지,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마저 자꾸 건드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 남자의 말 한마디에 눈물이 글썽거렸지만 언니 앞에서 실망한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언니가 내 얼굴을 확인하기 전에 눈물을 씻어내려고 바로 욕실로 씻으러 들어갔다.
세수를 하고 거울 안의 내 모습을 봐도 여전히 눈시울은 빨갛기만 했다.
‘그래, 오늘 만나보고 영 이상한 사람 같으면 여기서 끝내리.’
그 남자에 대한 마음을 굳히는 중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일하러 간다. 오늘 데이트 잘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은 후에야 슬그머니 욕실 밖으로 나와 언니가 앉았던 화장대에서 간단한 화장을 했다.
그리고 청바지에 진한 분홍색 후드티를 가방에서 꺼내 입고는 긴 머리에 고불고불한 머리끈을 머리에 묶은 후에야 나 역시 집을 나섰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약속 장소에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그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남자를 멀리서 바라보자 청바지와 체크남방을 입은 모습이 회사복보다 더 어울렸다.
나를 기다리며 시계를 보는 모습에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상한 사람이면 오늘 보고 안 볼 건데 심장이 왜 이리 뛰지?’
그 남자에게 다가갈수록 심장이 더욱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그 남자가 보이지 않는 건물에 몸을 숨겨 떨려오는 심장이 진정하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약간이나마 떨림이 진정 된 것 같아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다시 확인하곤 그 남자의 모습을 슬쩍 훔쳐봤다.
약속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남자는 마냥 기다리기만 할 뿐 독촉 전화조차 하지 않은 채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그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다시 손거울을 꺼내 머리칼을 매만지고 그 남자 앞으로 도도하게 걸어갔다.
주위를 살피던 그 남자는 그때서야 나를 발견한 듯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그 남자 앞으로 다가가 방금 도착을 한 것처럼 말을 건넸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그 남자 입술 옆으로 순식간에 엷은 미소가 퍼져가고 있었다.
나 역시 그 남자의 귀여운 거짓말에 미소가 전염되는 듯 내 입술 옆으로 엷은 미소가 점점 번져갔다
‘치, 거짓말! 오래 기다렸으면서. 이 사람 제법 귀엽네.’
“저 안 그래도 저녁을 사 주신다기에 아무것도 안 먹고 나왔어요.”
“아, 그래요? 잘 하셨어요. 그래야 제가 뭘 사 드리든 보람이 있죠.”
이 남자도 급히 나온다고 메뉴를 정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고 오늘따라 삼겹살이 먹고 싶었다.
옷에 고기 냄새라도 배면 이 남자에게 민망할 것 같아 조금 망설이다 쑥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저 오늘 고기 먹고 싶은데…….”
고기가 먹고 싶다는 말에 그 남자의 얼굴에서 난처한 그림자가 스치듯 지나갔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조그맣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무슨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고른 치아 몇 개를 살짝 보이며 웃었다.
“네, 그럼 우리 고기 먹으러 가요.”
그 남자가 걸어가는 옆에 서서 따라가던 중, 언니에게 평소에 하던 습관처럼 팔짱을 낄 뻔 했다가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첫 데이트부터 그것도 첫 만남부터 팔짱을 끼면 날 너무 쉽게 볼 것 같아.’
이 남자는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아는 사람이라 더더욱 날 조심하게 만들었다.
- 남자 이야기 -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진 그녀의 목소리에 괜히 신경이 쓰였다.
처음 볼 때부터 오늘 오전까지 대충 입은 옷과 회사 점퍼를 입은 모습만 보여 줬었다.
그래서일까, 색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몇 벌 없는 옷을 고른다는 것이 시간이 제법 지났다.
청바지에 아끼던 남방을 입고 약속시간에 늦을까 싶어서 택시를 타고 나갔다.
다행히 약속시간보다 15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시간이 1분 1초가 지나갈수록 그녀가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는 생각에 기다리는 시간마저 마냥 즐거웠다.
휴대폰에 찍힌 시간은 드디어 약속시간을 넘어갔지만 아직은 그녀가 보이질 않았다.
‘그래, 원래 여자는 조금 늦게 나와야 매력이지.’
기다림의 따분함도 긍정적이고 즐거운 상상에 묻혀 버렸고, 하릴없이 어정버정하던 사이 어느덧 시간은 10분이 지났다.
그녀에게 어디쯤 왔는지 물어보려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너무 재촉하면 또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몰라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기만 했다.
‘설마? 아까 목소리가 우울하던데 안 나오는 건 아닐까?’
좋지 않은 상상들이 날카롭게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던 순간부터 기다리던 즐거움은 순식간에 답답함으로 바뀌었다.
그 순간 누가 나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드는 순간, 저 앞에서 그녀가 웃으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에 손을 흔들며 웃어보였고 그녀의 표정은 걱정과 달리 밝아보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녹아버릴 것 같은 따뜻한 시선을 내 얼굴에 고정 시킨 채 다소곳이 걸어오던 그녀는 귀여운 목소리로 내 귀를 자극했다.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저 안 그래도 저녁 사 주신다기에 아무 것도 안 먹고 나왔어요.”
넌지시 살펴본 그녀는 말갛게 보이는 눈빛이 예상과 달리 상처받고 우울했던 그런 모습은 아닌 것 같았다.
“아, 그래요? 잘 하셨어요. 그래야 제가 뭘 사 드리든 보람이 있죠.”
“저 오늘 고기 먹고 싶은데…….”
그녀의 고기가 먹고 싶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어떤 의미로 해석을 해야 할지 몰랐다.
‘고기? 도대체 어떤 고기지? 설마 삼겹살 이런 것일까? 아니면 레스토랑에서 먹는 그런 고기일까? 만약 삼겹살로 내가 알아들었으면 자기를 삼겹살 수준으로 봤다고 실망하는 건 아닐까?’
내 대답을 기다리듯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그녀에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일단 대답부터 했다.
“네, 그럼 우리 고기 먹으러 가요.”
내 옆에서 나란히 걸을 때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옆모습을 몰래 훔쳐봤다.
묶여 있는 머리칼 아래의 흰목과 뺨 옆으로 갸름한 옆모습에 조금씩 설레고 있었다.
슬쩍 본다는 것이 넋이 나간 듯 계속 쳐다보게 되었고, 보면 볼수록 정말 예쁜 대학생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녀는 옆모습을 쳐다보는 걸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부자연스럽게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 아가씨가 그런 쪽에서 일하지 않고 애인처럼 팔짱을 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과 함께 그녀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여태 고민하던 것을 더듬거리며 실토했다.
“저 사실…… 조금 전 고기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어떤 고기를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그녀는 내 말이 뜬금없이 들렸는지 놀란 듯이 눈을 뜨곤 이내 아주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웃음이 가시지 않은 다정한 미소로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꼈다.
“제가 잘 아는 삼겹살집이 있어요. 그리로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