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남자 / 사랑하는 여자 (4)

진짜킹카 작성일 22.04.11 18: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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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 이야기 - 

 

 

다시 언니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오빠의 나긋하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그냥…… 네가 좋아 질 것 같아.』

 

조금 전 서로의 눈을 보며 대화를 나눴건 장면을 떠올리다보니 가슴 속의 묘한 두근거림이 쉽사리 가라앉질 않았다.

 

하지만 그 남자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 냉정하게 입장 바꿔 생각해봤다.

 

  ‘사실일까? 나에게 호감이 있어 보이긴 하던데……. 정말 내가 그런 일을 했던 여자인 거 알면서도 정말 진심으로 내가 좋다는 말일까? 아니면 정말 날 쉽게 보고 한 번 던져 본 말인데 나만 이렇게 설레는 걸까?’

 

문뜩 떠오른 불안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조금씩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고 잠시 스치듯 입가에 묻었던 미소는 금세 사라져버렸다.

 

지금 내 머릿속은 무척 혼란스러운지 언니 집 부근에 거의 다다랄 때쯤엔 불안한 생각은 사라져버렸고 딱 삼겹살만 먹고 헤어진 것이 아쉽기도 했다.

 

  ‘식당과 바로 두 블록 위에 영화관이 있었는데 영화 보자는 말도 안하고……. 그렇게 내가 그렇게 영화 좋아한다고 말했었는데.’

 

괜히 야속하고 심술이 나서 택시 차창에 입김을 불어 하얗게 만들고『미워!』라고 적었다가 기사분이 백미러로 힐끔 볼 때 바로 손바닥으로 입김 글씨를 지웠다.

 

집에 가는 동안 그 오빠만 떠올렸고 택시에서 내렸을 때 혼란스럽던 생각들은 정연하게 한가지로 모아졌다.

 

결국 지금 이 감정을 믿고 그 남자를 믿어보자는 것이었다. 

 

흐린 밤하늘에서 밤비라도 내릴 것 같아 언니 집으로 종종걸음을 놓을 때 가방에서 희미한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 

 

부랴부랴 가방을 열어 휴대폰 발신 번호를 확인하자 엄마의 휴대폰 번호가 액정에 찍혀있었다.

 

“어, 엄마.”

 

“은주야, 너 언제 오는데?”

 

“아마도 내일 아침에 갈까 싶어.”

 

“이제 오면 아주 오는 거지?”

 

엄마는 내일이면 2년 만에 딸을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조금은 격양된 목소리였다.

 

막상 엄마에게 대구로 간다고 말하고 나니 조금 전부터 가슴속에 맺혀 있던 어떤 답답함과 함께 나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뒤돌아서던 오빠의 뒷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

 

   ‘정말 내가 대구에 가도 그 오빠를 볼 수 있을까?’

 

그 오빠가 여기 포항에 정착을 한 건지 아니면 직장 때문에 잠시만 여기에 있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미처 물어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다시 발길을 옮길 때 손등에 빗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비가 더 쏟아지기 전에 걸음을 재촉했고 언니 집에 도착했을 땐 그다지 빗물에 몸이 젖지는 않았다.

 

불 꺼진 언니 집은 너무 고요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창밖의 봄비 내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부슬거리며 내리는 봄비 소리를 들으며 대구로 가져갈 짐을 하나둘씩 정리를 하려고 큰 가방을 열어 침대 위에 올렸다.

 

웬만한 거는 다 버리고 갈 생각이었기에 가방에서 챙기고 정리해야할 것은 몇 없었다.

 

언니 옷장에 임시로 걸어놓은 내 옷들을 곱게 접어 가방에 넣었고 화장대 위에 올려놓은 모래시계도 한참을 쳐다본 후 가방 안쪽에 쑤셔 넣었다.

 

언젠가 언니는 내 모래시계를 보며 애처럼 쓸모없는 거 수집한다고 잔소리를 했던 적이 있었다.

 

항상 타임머신이 있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여기 오기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줄 곳 했었고 그래서 시간을 뒤집는다는 의미로 모래시계를 너무나 좋아했다.

 

그런 이유를 언니에게 말을 했다면 처량한 서로의 처지에 속상할 게 분명했기에 변명조차 한마디 늘어놓지 않았었다.

 

잠깐 옛 생각에 명상에 잠실 때 조용히 창문을 두드리는 봄비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모르게 처연하게 보이는 빗물은 유리 창문에 뭉개져 흘러내리고 있었고 오늘 장사도 허탕 칠 씁쓸할 언니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언니 모습도 잠시였고 바로 그 오빠의 얼굴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치, 진짜 순진한지 아니면 바람둥이인지 이 오빠는 집에 잘 들어갔냐는 전화도 한 통 없네. 그냥 내가 먼저 오빠에게 문자라도 해볼까?’

 

자꾸 불쑥불쑥 떠오르는 이 오빠에게 여자인 내가 먼저 연락하는 건 자존심상 허락지 않아 그저 속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울리지도 않는 휴대폰에 신경을 쓰며 짐을 다 챙긴 후에는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을 때 투정 부리 듯 방바닥에 던지곤 괜히 투덜거렸다.

 

또 샤워를 끝낸 후에도 화장대에 앉아 애꿎은 시선만 휴대폰에 던지며 로션과 수분 크림을 발랐다.

 

여전히 연락 한 통 없는 오빠가 야속하지만 계속 생각나서일까, 텔레비전을 켜고 엎드려 드라마를 봐도 무슨 내용인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남자 배우의 나긋한 목소리가 꼭 그 오빠의 목소리 같았고 드라마 남자 주인공의 환한 미소도 꼭 날 보며 웃고 있는 오빠 얼굴 같았다.

 

자꾸만 오빠 생각에 빠져드는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악! 내가 점점 미쳐 가나봐……. 정말로…… 내가 진짜 그 짧은 시간에 사랑에 빠졌나?’

 

고기를 먹은 포만감과 설렘에 긴장까지 해서 그런지 텔레비전을 보던 중에 나른한 졸음이 밀려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얕은 잠에 빠졌을 때 멀리서 들려오는 듯 희미한 벨소리에 눈이 번쩍 떠져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태껏 기다렸다고 드러내 보이는 것처럼 큰소리로 전화를 받고나서 괜한 민망함에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냥 몇 번 벨소리가 울렸을 때 받을 걸 그랬나. 그나저나 내가 이런 면이 있었구나.’

 

오빠를 만나고 나서부터의 행동들을 하나하나가 내가 생각해도 너무 민망해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은주야.”

 

만나서 얼굴을 보며 목소리 듣는 것도 좋았지만 전화 통화만으로 자상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음색도 너무 듣기가 좋았다.

 

단지 내 이름만 불러줬을 뿐인데 마음은 편안해지고 입가에는 나른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응, 오빠.”

 

“잘 들어갔어?”

 

“당연하지, 걱정 됐으면 빨리 좀 전화를 해주지.”

 

오빠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입술을 쫑그리며 투정을 부렸고 오빠 역시 그 모습을 본 것처럼 친근감으로 다가오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내 전화 기다린 거야?”

 

장난을 치려는 오빠의 능글맞은 목소리에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웃음 섞은 애교로 민망함을 숨기려했다.

 

“뭐야, 갑자기 징그럽게 말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질 줄 알았지만 웃음을 거둔 오빠는 무슨 말을 어렵게 꺼내려는지 불규칙한 숨소리를 뿜어냈다.

 

그렇게 한참을 뜸을 들이던 오빠는 심각한 말을 하려다 주저하는 것 같더니 다시금 내 이름을 불렀다.

 

“은주야…….”

 

“왜? 오빠?”

 

쉽게 건네지 못할 말이 어떤 건지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자세히 들어보려고 숨까지 죽였다.

 

잠시 동안 고요한 집안에는 창밖의 빗소리만 서글프게 들려왔다.

 

“그러면…… 대구가면…… 대구가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자꾸만 머뭇거리는 불안한 여운에 괜히 태연한 척 재촉했다. 

 

“응, 말해 오빠. 대구 가면 뭐?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이제 막 입을 열려고 하는 듯 오빠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고 온몸에 돌기가 돋아 오르는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대구에 가면 대구에서…… 일하는 거야?”

 

무방비 상태에서 뜬금없는 오빠 말을 듣고 손가락에 힘이 풀려버려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자꾸 몸이 후들거리고 아련한 현기증과 함께 지분지분 스며오는 눈물에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 오빠에게 이 정도로 밖에 생각 안 되는 여자였구나.’

 

오빠의 말 한마디에 초라해진 내 자신과 쓸쓸한 배신감에 눈물줄기가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려 턱 아래로 떨어졌다.

 

가슴이 미어지는 잔인한 한 마디에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그래! 나 대구 가서 일 할 거야! 그래서 뭐 나 싫다고? 안 볼 거라고?”

 

말라버린 꽃처럼 바스러지기 쉬웠던 내 감정은 오빠의 말 한마디에 한줌의 가루가 되어버렸다.

 

너무 가슴이 아파서일까, 울음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단지 눈물이 하염없이 흐리고 컥컥거리는 소리만 입에서 맴돌 뿐이었다.

 

“어…… 그, 그게, 아니고…….”

 

“오빠. 나 피곤해서 자야겠어. 전화 끊자.”

 

무척 당황했는지 떠듬떠듬 말을 꺼내는 오빠에게 흐르는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태연한 척 했지만 이미 내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있었다.

 

아무리 닦아내도 멈추지 않던 눈물은 흐르는 대로 남겨둔 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를 끊어도 왜 그렇게 가슴이 아파오는지, 침대에 엎드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는 순간 그때서야 울음이 터져버렸다.

 

창밖에 내리는 봄비소리는 서럽게 흐느끼는 울음소리에 묻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마치 2년 전 처음 여기 올 때처럼 그렇게 펑펑 울다가 잠이 들었다.

 

 

 

 

- 남자 이야기 -

 

 

고기를 먹을 때 싱그러운 미소로 은근슬쩍 영화이야기를 꺼내던 은주와 영화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도 너무 늦었고 내일 대구로 가려면 챙겨야 할 짐도 있을 것 같아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영화를 보러 가자고 말 했으면 보러 갔을까? 또 자기 같은 여자는 밤늦게 돌아 다녀도 된다는 생각을 한다고 슬퍼했을 건 아닐까?’

 

같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괜한 아쉬움에 도로가를 서성거리자 택시 한 대가 미등을 깜빡이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차창에 빗방울이 한 방울씩 엉겨 붙기 시작했다.

 

   ‘어? 비가 오네. 은주도 우산 없지 싶은데…….’

 

은주가 조금이라도 비에 젖을까 신경이 쓰이던 중,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에서 진동 느껴졌다.

 

아마도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은주도 내 걱정에 전화를 했던 거 같아 기분 좋게 수신번호를 확인했다.

 

하지만 휴대폰 액정엔 창식의 번호가 찍혀있었다.

 

“형, 황금 같은 토요일 날 뭐해요?”

 

“뭐하긴 밥 먹고 술 마시고 집에 가는 길이지.”

 

“벌써 술 드셨구나? 비도 오고해서 한잔 하자고 전화 했는데…… 한잔 하러 나올래요?”

 

“아니, 그냥 머리가 복잡해서 집에 가서 쉴래.”

 

“뭐가 그리 복잡해요. 여자 문자예요?”

 

궁금하다는 듯 농담처럼 슬쩍 넘겨짚는 말이었지만 은주를 본 적이 있는 창식이라서 그런지 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 어떻게 알았어?”

 

“복잡한 거면 돈 문제랑 여자 문제 밖에 더 있겠어요? 킥킥.”

 

창식의 놀리는 것처럼 들리는 웃음소리는 마치 누구를 만났는지 알고 있다는 듯 들려왔다. 

 

“또 그렇게 웃네. 그렇게 웃지 마라. 건방져 들리니깐.”

 

괜히 정색을 하며 짜증을 부리자 창식은 주눅이 든 눈치였다.

 

그러나 창식은 오기를 부리듯이 크게 한 번 더 웃고는 궁금하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누구랑 데이트 했는데요?”

 

“너 아는 사람이야.”

 

창식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반갑게 소리쳤다.

 

“아! 대구에서 지수가 올라온 거죠?”

 

대구에서 잠시 만났고 결국에는 도망치듯이 피해 포항까지 오게 만들었던 지수라는 이름이 들려오자 한동안 지워졌던 그녀의 얼굴이 지난 기억과 함께 되살아났다.

 

군대 가기 전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 할 때 만났던 첫사랑, 나를 무척이나 따랐던 첫사랑의 동생 지수, 군대에서 이별을 통보하던 첫사랑, 그리고 끝까지 나를 기다려주었던 지수, 번갈아가며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지수를 잠시 만났지만 집착하는 성격이 감당도 안 되었고 시집간 첫사랑이 한 번씩 나와 부딪기는 것을 껄끄러워하기에 일방적으로 지수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도망치듯 포항으로 온 기억도 스멀스멀 떠올랐다.

 

여기 포항에 있는 동안에도 지수는 가끔씩 우리 부모님 집을 방문해 안부 인사를 하거나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종종 안부전화를 하는 듯 했다.

 

그런 사실을 아는 창식은 당연히 지수와 데이트를 했던 걸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창식이 알만한 내 주위의 여자는 지수 밖에 없었기에 한참을 머뭇거리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아니, 지수가 아니고…… 너와 같이 갔었던 그 집 기억나?”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창식은 아무 말이 없었고 순간 깜짝 놀란 듯 불안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형! 설마…… 그 창녀랑 만난 거예요?”

 

창식의 황당하다는 듯이 내뱉는 말투보다 입에서 나온 창녀라는 말이 듣기가 더 껄끄러웠다.

 

“응, 그냥 간단하게 만나서 한잔 했어.”

 

“그런 년들은 남자에게 들러붙어서 돈 같은 거 뜯으려고 접근 하는 거예요!”

 

“그런 여자가 아닌 것 같던데?”

 

“형! 잔말 말고 만나지마요!”

 

“안 그래도 그 여자애 내일 대구에 간다더라.”

 

답답하다는 듯이 큰소리로 다그치던 창식은 대구에 간다는 말에 진정이 됐던 것 같았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처럼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대구로 팔려 가는가 보네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곳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가불금 때문에 여기저기 팔려 간다고 하더라고요.”

 

잘 알지도 못하는 은주였지만 팔려간다는 창식의 말에 깜짝 놀라 가슴이 쿵쾅거렸고 신경은 날카로워졌다.

 

“그런 거…… 아닌 것 같았는데?”

 

“그런 거 아니면 멀쩡한 여기 두고 왜 대구로 가겠어요?”

 

태연하게 말하는 창식의 말이 제법 설득력 있게 들려왔다.

 

머리는 점점 복잡해지고 가슴은 답답해져 일단 전화를 끊고 멍하니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씩 내렸던 비는 어느새 고일 정도로 많이 내리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천천히 집으로 걸어가다 보니 하늘에서 맘껏 뿌리는 비를 맞아서 그런지 마음은 지독하게 아픈데 의식은 점점 명료해졌다.

 

   ‘그래, 일단 대구에 왜 가는지부터 알아봐야겠다. 만약 팔려가는 거면…… 정말 팔려가는 거라면…… 내가 돈을 좀 빌려주면 그나마 괜찮을까? 얼마 정도가 그녀에게 필요할까? 전화상으로 물으면 오해는 하지 않을까?’

 

순진한 대학생처럼 보이던 은주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밟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창식과 통화하기 전에는 집으로 가면서 비가 오는데 잘 들어갔는지, 혹은 자기 전에 문자를 하라든지, 이런 달콤한 말들을 전하고 들으려 했었다.

 

그러나 창식과 통화 후에는 가슴이 너무 아프고 머리는 혼란스러워 은주에게 전화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비에 흠뻑 젖은 채 집에 도착해서도 씻지도 않고 바로 소파에 앉아버렸다.

 

그리고 식당에서 수줍게 고백하던 은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참을 젖은 몸으로 소파에 앉아 천장만 쳐다보다가 일단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이내 망설이며 휴대폰을 놨다가 다시 들었다 반복하면서 답답함에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내일 간만에 대구 부모님 집에 가보자. 은주랑 같이 대구로 가면서 슬그머니 물어보는 거야.’

 

여전히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곤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내 전화를 기다렸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아주 밝은 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도대체 왜? 이렇게 가슴이 아파오는 걸까? 이제 겨우 몇 번 보지 않았는데…….’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떼고 낮은 목소리로 은주를 불렀다.

 

“은주야…….”

 

“왜? 오빠?”

 

여전히 애교스럽고도 해맑은 목소리를 들으며 들이마신 숨은 근심이 되어 뿜어졌다.

 

“그러면…… 대구가면…… 대구가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두근거림에 해야 할 말들은 입안에서 웅얼거렸다.

 

은주가 숨죽이며 내 입에서 나올 말들을 기다리는 그 짧은 적막감이 흐르는 동안 시계의 초침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왔다.

 

“응, 말해 오빠. 대구 가면 뭐?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은주는 괜찮은 척 말하는 듯했지만 목소리엔 긴장이 가득 섞여있었다.

 

“대구에 가면 대구에서…… 일하는 거야?”

 

은주 손에 들려 있는 휴대폰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아주 큰 실수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은주의 반응에 무척 당황한 내가 오로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름을 불러보는 것이 전부였다.

 

“은주야…… 은주야, 은주야! 은주야!”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은주의 울음소리도, 요란한 초침 소리도, 거세게 내리는 빗소리도, 그 어느 것도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얼떨떨하게 있을 때 그제야 슬프게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나 대구 가서 일 할 거야! 그래서 뭐 나 싫다고? 안 볼 거라고?”

 

목소리만 들어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슬픔에 젖은 은주의 모습이 선명했고 뒤늦게 수습하려고 내뱉은 말도 여전히 입안에서 맴돌았다.

 

“어…… 그, 그게, 아니고…….”

 

그저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내 뜻과 다르게 은주는 서러움에 흐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색을 전혀 내지 않으려는 불안한 고요함이 은주가 울고 있다는 걸 확신시켜주었다.

 

   ‘지금 내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잠깐 동안 서로가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는 무겁고도 쓸쓸한 침묵이 감돌았고 이내 희미한 울음이 섞인 은주의 목소리가 고요한 침묵을 깨트렸다.

 

“오빠. 나 피곤해서 자야겠어. 전화 끊자.”

 

먼저 전화를 끊은 은주의 우울한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도는 듯해 한참동안 휴대폰을 귀에서 떼지 못했다.

 

그렇게 전화가 끊기고도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창밖에 내리는 빗줄기만 멀거니 쳐다보았다. 

 

은주가 지금 어디에 있는 줄만 안다면 바로 달려가서 자초지종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집조차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있어도 마음이 편치가 않아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만 계속 갈 뿐 그녀는 전화를 받질 않았다

 

젖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체온에 옷이 말라갈 때까지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만 쳐다보았다.

 

처음 봤을 때 은주의 모습도 기억이 났고, 부끄럽게 내밀던 도시락과 도시락은 건네주던 그녀의 빨갛게 변해버린 얼굴도 모두 생생하게 기억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전 팔짱을 끼며 나를 잡아끌던 은주의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금방 숨을 멎을 것 같은 답답함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을 거라고 예감을 하면서도 조마조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참을 신호음이 울렸을 때 예상과 달리 휴대폰 받는 소리가 났다.

 

“은주야! 은주야!”

 

아무리 다급하게 이름을 불러도 은주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은주야, 미안해……. 내가 본의 아니게 은주에게 흉한 마음의 상처를 줬나보다.”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숨소리만 내던 은주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미안해 오빠? 나 같은 년은 원래 여기에도 있다가 저기에도 가고 그러는 거야! 알겠어?”

 

“오빠가 무조건 미안하고…… 내일 같이 대구에 가자.”

 

또다시 은주는 흐느끼는 숨소리만 내며 아무 말 없이 내 말만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은주를 의지가 될 수 있는 나긋한 목소리로 달래려고 했지만 마음 같지 않게 다급하게 말이 나왔다.

 

“대구에 가면서 내가 다 설명할게.”

 

“그래! 나 같은 년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서 간다는 거야?”

 

은주는 겹겹이 쌓인 울분을 또다시 터트렸고 그 목소리가 너무나 처량하게 들려와 나 역시 목이 메어버렸다.

 

“아니…… 진짜…… 진짜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 같단 말이야. 지금 내 가슴이 이렇게 아픈 걸 보면…….”

 

아무 말 없이 내 말을 듣던 은주는 그 어떤 결심이 선 듯 낮고도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오빠……. 내일 같이 대구 가자.”

 

오늘 만난 장소에서 오전 9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을 땐 긴장이 한순간에 탁 풀려버렸다.

 

다시 멍하니 시선을 옮긴 창밖에는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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