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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이승만 아들 이강석 생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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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자살로 비극의 생을 끝내기 전의 이기붕 일가. 왼쪽부터 장남 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차남 강욱.
대한민국 건국 이래 역대 정권마다 이른바 ‘권력의 2인자’가 있었다. 그들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은 누구일까. 단연 이기붕을 꼽아야 할 것이다. 혹자는 1961년 박정희를 도와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후 중앙정보부장과 공화당 의장 등으로 오랫동안 권력을 누린 김종필을 들겠지만, 행사한 권력의 질과 내용, 무게와 영향력을 감안할 때 이기붕에겐 미칠 수 없다.
이기붕이 누구인가. 1950년대 집권 자유당의 실력자(중앙위 의장), 이승만 대통령의 후계자, 민의원(국회) 의장, 이른바 ‘서대문 경무대’의 주인으로 이 나라 최고 권부의 정상 바로 밑까지 올라간 실권자였다.
그는 1960년 봄 이승만 대통령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선거에 출마,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당선됐다가 4·19혁명으로 몰락했다. 더욱이 그는 혁명 8일 후 일가족이 집단자살함으로써 과도한 권력욕으로 파멸한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이기붕의 장남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당시 23세)은 부모와 남동생 강욱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본인도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집단자살 사건을 주도한 이강석이 실제로는 자살하지 않고 비밀리에 목숨을 보전했을 가능성은 없는 걸까. 그가 극적으로 구명돼 극비리에 외국으로 보내져 세계 어디에선가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히 숨기고 살아왔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정광모 선생의 제보
독자는 이기붕 가족이 목숨을 끊은 지 53년이나 지난 지금 왜 새삼 이 문제를, 그것도 이강석의 구명 가능성과 생존설을 제기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필자는 지금부터 20년 전 이강석 구명·생존설을 전해 듣고 놀라움과 호기심에 근 1년 이상 사실 여부를 확인하느라 고심하고 나름대로 전력투구한 적이 있다. 어찌 보면 한낱 ‘기이(奇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뒤늦게나마 이 이야기의 입수 경위와 내용을 알리고 싶어 글을 쓴다.
거기엔 두 가지 계기가 있다. 하나는 올해 2월 작고한 저명한 여성 언론인이자 한국 소비자보호운동의 창시자였던 정광모(1929~2013) 선생과의 약속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당시 정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강석 생존설 관련 취재 메모를 최근 우연히 발견해서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 언론계에 입문한 정 선생은 ‘평화신문’ ‘서울신문’ ‘한국일보’ 기자로 맹활약했던, 당시로선 매우 드문 여성 언론인으로 청와대 출입 여기자 1호였고 한국여기자클럽 초대 회장을 지냈다. 필자는 1960년대 중반 정 선생이 한국일보 정치부 차장이던 시절부터 모시고 함께 일한 적이 있다. 그 후 정 선생이 언론계를 떠나 소비자 보호와 에이즈 예방 및 퇴치 등 사회운동에 전념하는 동안에도 서로 자주 만나 시국 얘기를 나누곤 했다.
필자가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던 1993년 가을 어느 날, 정 선생에게서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단골 식당으로 가니 언제나 쾌활하고 명랑한 그답지 않게 굳은 표정이었다. 정 선생은 “이 위원! 이거 사실로 확인되면 당신은 세기적 특종을 하는 거야”라고 운을 뗐다.
그는 본론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세 가지를 반드시 지키겠다는 약속부터 하라고 요구했다. △이 이야기를 취재하는 동안 비밀로 할 것 △이야기를 전한 사람 본인과 그의 형제, 부모에 대해 일절 묻지 말 것 △취재해서 사실로 확인되면 보도하되, 확인이 안 될 경우에도 이야기의 입수 경위 등에 관해선 훗날 자기가 눈을 감은 뒤에야 밝히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내용이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데다 기자적 호기심이 발동해 ‘약속 준수’를 다짐한 뒤 귀를 기울였다.
정 선생 얘기의 요지는 ‘이기붕 아들 이강석이 살아 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이강석을 직접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놀랐다. 그러면서도 뭔가 허황한 꿈같은 얘기 아닌가 싶었다.
“이강석이 살아 있다”
정 선생이 전해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으로 이민 간 신경숙(가명)이 오랜만에 서울에 들러 며칠 전 나를 찾아왔다. 50대 초반인 그녀는 고교 및 대학교 후배인 데다 예전부터 부모님, 형제들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녀가 유럽 여행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강석을 만났다는 게 아닌가. 3년 전(1990년) 여름 남편과 함께 결혼 후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하던 중 묵고 있던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한 호텔 식당에서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눴는데, 이강석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신 여인이 전한 당시 상황이다.
호텔 식당에서 식사한 후 남편은 여행 스케줄을 문의하러 프런트로 가고 자신은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6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의 동양인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백발 : 실례지만 한국 분 아니신지요.
신 여인 : 맞는데요.
백발 : 저 모르시겠습니까.
신 여인 : 잘 모르겠는데요, 누구신지요.
백발 : 저는 대한민국의 역적(逆賊) 아들입니다.
신 여인 : 역적의 아들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백발 : 저는 과거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을 모시고 살았었습니다.
(신 여인은 이상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백발 남성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럴 수가…. 너무나도 낯익은 얼굴, 귀에 익은 목소리 아닌가!)
신 여인 : 저, 혹시 이강석 씨…이강석 오빠 아니신가요.
(순간 백발 남성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잠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신 여인 : 아니, 부모님을 권총으로 쏘고 자살한 것으로 모두들 아는데 어떻게 되신 겁니까.
백발 : 누군가의 도움으로 동생(강욱)과 대만으로 나와 잠시 머물다 미국으로 가서 숨어 지내며 공부했습니다. LA,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 교포들이 많이 사는 데는 가지 않았지요.
신 여인 : 오래전의 지난 일들인데 이젠 모든 것을 떳떳이 밝히고 살아도 괜찮은 것 아닌지요.
백발 : 아닙니다. 우리 집안은 나라와 국민에게 너무도 큰 죄를 지은 만고의 역적이기 때문에 영원히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살아야지요.
신 여인 : 지금 오빠는 어디서 살고 무슨 일을 하세요? 강욱이도 잘 있는지요.
백발 : 미국에서 삽니다. 동생도 잘 있지요. 현재 ABC방송에서 일합니다.
신 여인 : 저의 형제들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아요. 지금 남편과 휴가여행 중인데…이게 제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이에요. 저에게도 명함 한 장 주세요. 미국에서 자주 연락하고 만났으면 해요.
백발 : 지금 명함이 없는데요.
(이때 남편이 가까이 다가오자 백발 남성은 갑자기 당황한 표정으로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말한 후 서둘러 호텔 밖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신 여인이 전한 ‘이강석과의 만남과 대화’의 전부다.
3년간 묻어둔 얘기
정 선생은 신 여인에게 ‘이기붕 일가 집단자살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정말 이강석이 분명한가’ ‘혹시 과거 경무대에서 근무했던 청년들 중 이강석과 닮은 사람을 잘못 보고 착각한 게 아닌가’ ‘네가 이강석이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분명한 대답이 없지 않았는가’라며 따졌다고 했다. 특히 정 선생은 그가 신 여인에게 ‘역적’ 운운했지만 진짜 이강석이라면 그토록 오랜만에 만난 한국인인데 자살 당시 상황, 양부(養父) 이승만에 관한 얘기 등을 몇 마디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상하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신 여인은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 알았어요. 사람을 잘못 보고 오인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강석 씨와는 양가 아버님이 일제강점기에 미국 유학을 같이 했고, 광복 후엔 두 집안이 자주 교류했으며, 자녀들끼리는 초·중·고교와 대학 때까지 형제처럼 어울려 자랐기 때문에 착각이나 오인을 할 수는 없어요”라고 강변했다고 한다.
아울러 신 여인은 이강석이 머리가 백발이고 얼굴이 늙어 보이는 것 말고는 남자치곤 약간 작은 키와 말씨, 태도 등이 변하지 않았더라고 전했다.
정 선생은 신 여인의 부친과 이기붕이 1920~30년대 초 미국 유학을 했고 광복 후 각기 작고할 때까지 형제처럼 지냈으며, 식구끼리도 각별한 관계였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강석과 만났다는 그의 얘기를 한낱 뜬소리로 여길 수 없었다고 했다. 신 여인도 어릴 때부터 너무나 모범적이고 착실한 사람이라며 거짓말은 아닌 듯하다고 했다.
신 여인의 뒷얘기는 계속된다. 남편에게는 물론 미국으로 돌아간 뒤 친형제들에게 이강석과 만난 얘기를 전하자 모두 놀라면서 절대로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재삼재사 당부하더라는 것이다. 기자들이 집요한 취재에 들어가면 오래 교류했던 집안 사정까지 이것저것 보도돼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누를 끼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 여인은 3년 동안 가슴속에 넣어둔 채 끙끙 앓다 당시 고국 방문길에 정 선생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되, 집안 얘기는 모두 가려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정 선생은 필자에게 “그녀는 내가 아직도 언론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줄 아는 모양”이라면서 “그 집안과 식구들에 관한 것은 약속한 대로 절대 취재도 보도도 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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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83회 생일 축하 케이크를 자르는 이 대통령 부부. 맨 왼쪽이 양자였던 이강석이다.
이기붕과 박마리아
이기붕(1896~1960)은 10세 때 부친이 작고해 홀어머니 밑에서 끼니를 거르며 가난하게 성장했다. 모친의 교육열로 상경해 보성중학과 연희전문에서 수학했다. 보성중학 시절엔 종로 YMCA(기독청년)회관에 나가 이상재, 이승만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가 농장 일, 호텔 일, 접시 닦기 등으로 고학하며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워싱턴에서 허정, 장덕수, 윤치영 등과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도와 ‘3·1신문’을 발간했고 1934년 귀국 후에는 잡화상, 광산업 등에 실패한 후 종로의 대형 요릿집 국일관의 지배인을 지냈다.
부인 박마리아와는 미국 유학 중 만나 약혼한 뒤 1935년 서울에서 결혼했다.
이기붕의 출세길은 광복 후인 1945년 10월 이승만의 귀국으로 열렸다. 윤치영 비서실장의 비서를 지내다 비서실장으로 승진했고, 윤보선에 이어 서울시장(1949년 6월~1951년 4월)으로 재임하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
이승만은 대통령 연임을 위해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킨 후 유공자인 장택상, 이범석을 밀어내고 1953년 원내외 통합자유당의 2인자(중앙위 의장)로 자신의 충복인 이기붕을 내세웠다. 이기붕은 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민의원 의장에 선출된 뒤 이승만에게 초대 대통령의 영구 출마를 보장한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을 억지로 통과시켜 보답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때 부통령선거에 나섰다가 장면에게 패했고, 1960년 3월 15일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박마리아(1906~1960) 역시 가난 속에 교회 전도사인 홀어머니 밑에서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후 주위의 도움으로 개성 호수돈여고를 거쳐 이화여전 영문과에 진학했다. 선교사 아펜젤러의 후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매사추세츠 주 마운트 홀리요크대와 테네시 주 스칼렛대를 거쳐 피바디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다 결혼 후 YWCA 총무로 옮겼고 일제강점기 말 4~5년 동안엔 일제가 내세우는 동조동근(同祖同根)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동조해 식민정책을 찬양하고, 학병과 근로보국대 지원을 독려했다.
박마리아는 광복 후 이화여대 교수로 복귀한 뒤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측근이 됐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총애에 힘입어 남편을 권력가도로 이끌었다. 이기붕이 권력의 2인자로 승승장구할 때 자신도 이화여대 부총장, YWCA 회장, 대한부인회 회장을 맡아 여성계를 좌지우지했다.
이강석과의 조우
1937년생인 이강석은 서울중·고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957년 서울대 법대에 편입했다가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며 퇴출운동을 벌이자 다시 육사로 갔다가 1958년 8월 육군보병학교 141기 간부후보생으로 훈련받고 소위로 임관했다.
이기붕 부부는 이승만의 83세 생일인 1957년 3월 26일 당시 20세인 이강석을 그의 양자로 입적시킨다. 이승만은 구한말 박모 여인과 결혼해 봉수라는 아들을 얻었으나 미국에 데리고 갔다 요절했고 프란체스카와의 사이엔 자녀가 없었다. 이강석이 양자로 입적해 이승만 내외와 이기붕 부부 등 5명이 경무대에서 생일 케이크 촛불을 끄는 사진을 본 많은 국민은 ‘이기붕 부부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이제 아들까지 바친 게 아니냐’고 비아냥댔다.
필자는 딱 한 번 그와 인사를 나눴다. 1959년 여름 대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을 준비하던 무렵 백기완(백범문제연구소)과 함께 계몽대를 이끌던 고인환 선배와 세종로의 반공회관(현 미국대사관 자리, 4·19혁명 때 소실) 전시실에 갔다가 마주쳤다. 고인환이 “야! 강석아”라고 부르자 소위 계급장을 단 군복 차림의 이강석이 달려와 거수경례를 하며 “선배님, 자주 못 찾았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고인환이 필자를 가리키며 “후배인데 인사해라. 네가 조금 위일걸?”이라고 하자 이강석은 손을 내밀며 “반갑습니다. 어느 대학 다니시지요? 자주 만납시다”라고 말했다. 키가 165~168cm쯤 돼 보였는데, 친부모인 이기붕 부부를 반반씩 닮았고 똘똘하다는 인상을 줬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선거는 여당(자유당), 정부(내각), 권부(경무대)가 장기집권을 위해 경쟁적으로 또는 혼연일체가 되어 치른 사상 최대, 최악의 불법·부정선거였다. 투표시간 종료 후 자유당의 농간으로 투표조차 못한 수천 명의 마산 시민이 ‘내 표 내놔라’ ‘선거는 무효다’ ‘선거 다시 하라’며 평화적 시위를 했다. 경찰이 이들에게 무차별 발포해 약 80명을 살상하자 전국 각지에서 연일 부정선거 항거시위가 일어났다. 정부·여당은 이를 북한의 오열(五列)이 사주한 선동으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에 나섰다.
시국은 날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다시 대규모 규탄시위에 나섰다. 이어 18일엔 고려대생 3000여 명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 ‘발포경찰 엄벌하라’ ‘이기붕은 사퇴하라’며 태평로 국회의사당까지 나가 종일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이날 저녁 경찰의 안내를 받아 학교로 돌아가던 도중 정치깡패들에게 습격당해 수십 명이 중상을 입었다. 다음 날 신문에 이 사실이 특보되자 서울의 각 대학 학생들이 분격해 대대적인 시위에 나섰다.
전국 주요 도시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학생시위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수천 명의 대학생 시위대가 경무대로 돌진하다 경찰의 발포로 수십 명이 살상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학생과 시민의 저항은 계속됐다.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은 사퇴를 선언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 날 아침 경무대로 찾아온 이기붕에게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통고했다. 이기붕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이날 오후 민의원 의장, 자유당 중앙위 의장, 국회의원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선된 부통령’에 대한 사퇴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음 날 낮 서울시내 대학교수단이 선거무효와 발포경찰 처벌 등을 요구하는 시위에 나섰고, 드디어 26일 오전 이승만이 하야 선언을 했다. 장기집권을 획책했던 이승만, 이기붕과 자유당 정권은 부정선거 42일 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이기붕 일가의 행적
이기붕 일가는 두 차례에 걸쳐 피신했다. 제1차 피신은 19일 오후 2시경. 대학생들이 경무대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의 발포로 밀리자 광화문에 운집한 일부 군중이 ‘서대문 이기붕의 집으로 가자’며 몰려갔다. 이기붕과 박마리아, 차남 강욱, 그리고 비서와 경호원 등은 검은색 지프를 나눠 타고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먼저 창동의 검찰총장 별장에 갔으나 전화시설이 없음을 알고 다시 의정부 북쪽으로 차를 몰아 육군 제6군단 본부에 도착했다.
당시 군단장은 강영훈 중장(후에 국무총리 역임)으로 1952년 이기붕이 국방장관 때 경리 및 감리국장으로 재직했다. 강영훈 장군은 이들이 온 사실을 당시 김정렬 국방장관, 송요찬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유재흥 1군사령관에게 보고했다. 20일 밤 김 장관이 전화로 “서울 상황이 안정돼가고 있으니 내일은 귀가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 장군은 21일 아침 윤태호 군단 참모장을 안내역으로 붙여 일가를 서울로 보냈다. 이들은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경무대로 직행, 이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비서들이 주선해주지 않자 불쾌한 표정으로 서대문 집으로 향했다.
제2차 피신은 25일 오후. 이날 교수단 시위로 크게 불어난 군중이 ‘부정의 원흉인 이기붕을 몰아내자’며 서대문으로 몰려가자 일가는 의복과 신발도 제대로 못 갖춘 채 지프를 북쪽으로 몰았고, 밤 9시경 다시 6군단에 도착했다. 이때 군단사령부 일직 사령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금 들어온 서울 미아리 검문소 보고에 의하면 1대당 대학생 20여 명씩 탄 화물트럭 20여 대가 의정부 쪽으로 북상 중이라고 했다.
강 장군은 이들이 이기붕 일가의 행적을 알고 6군단으로 향하는 게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군단사령부엔 전투병력이 거의 없었다. 그는 북쪽으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산하 1개 연대 병력이 주둔한 부군단장 숙소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기붕은 “자네 판단대로 하게”라고 말했다. 밤 10시경 출발하려는데 경무대의 사실상 비서실장 격이자 이기붕의 직계인 박찬일 비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승만이 허정, 변영태, 이범석, 윤치영 등 5명을 다음 날 오전 10시에 경무대로 부르라고 지시했다는 보고였다.
이때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수화기를 건네받은 박마리아가 “다섯 분 중에서 허정, 변영태 씨에게만 연락하라”고 지시하는 것 아닌가.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오랜 측근 원로들을 불러 긴박한 시국 수습 문제를 논의하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연락을 받은 허정과 변영태만 경무대에 들어갔고, 이승만은 수석국무위원을 맡아 국가적 위기를 수습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는 헌법에 따라 국무총리제가 없고 수석국무위원(외무장관)제여서 이를 맡아달라고 한 것이다. 이에 변영태는 사양했고 수락한 허정은 이승만이 하야한 뒤 수석국무위원으로서 대통령권한대행 겸 과도정부 수반, 외무장관으로서 약 3개월 반 동안 헌법 개정과 총선거를 관리해 새 민주정부 수립에 진력하게 된다.
박마리아의 지시는 경무대 비서실을 휘하에 거느리고 대통령 지시도 마음대로 조정하는 ‘서대문 권력’의 막강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만일 원래 지시대로 5명이 모두 들어갔다면 허정 대신 다른 과도체제가 수립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피신, 칩거, 집단자살
이기붕 일가가 부군단장 숙소로 이동한 뒤 트럭 대열의 북상 보고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강 장군의 걱정은 계속됐다. 당시 일선 부대엔 재학 중 입대한 학보병이 많았는데 혹시나 학생시위에 자극받아 연대 내 학보병들이 이기붕 일가에 위해를 가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강 장군은 부군단장 숙소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한 미군 1군단이 더 안전할 것으로 여겼다. 자정 무렵 유재흥 1군사령관에게 보고하자 유재흥은 이에 동의하면서 다음 날 오전 10시 원주사령부에서 긴급 소집되는 고위급 작전회의에 오라고 지시했다.
다음 날 아침 강 장군은 미군 1군단 본부로 갔다. 스토크 군단장은 일본 출장 중이어서 대신 샌더스 참모장에게 보호를 요청하자 그는 “요인 보호는 계엄사령부가 할 일 아니냐”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원주로 갔다.
작전회의는 이미 끝났고 군단장급 장성들은 시국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 장군이 본의 아니게 어려운 일을 맡게 됐다고 위로했다. 이 자리에서 민모 장군은 “지금 팔도강산에 이기붕 의장을 위해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나.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모든 책임을 지고 자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로 망명하는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 무렵 유재흥이 이기붕 의장 신병 처리 방안을 육군본부에 요청하자 오후 4시까지 기다리라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아무런 지시가 없어 강 장군이 군단본부로 돌아가니 부군단장이 전화를 해왔다. 조금 전 경무대 소속 경찰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와서 이기붕 일가를 서울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강 장군이 군사령부 회의에 참석하러 간 사이 군단 참모들이 모임을 갖고 이기붕 일가의 군단 체류가 군단장에게 불이익이 될 것이란 의견을 모아 이기붕에게 떠나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기붕 일가는 이날 저녁 7시경 경무대에 도착, 이무기 비서가 묵고 있는 36호 관사로 들어갔다. 밤에는 본관으로 이승만 내외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별 인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기붕 일가는 이날 밤 거기서 묵은 후 다음 날은 온종일 누구도 외출하지 않고 관사에 칩거했으며, 그다음 날인 28일 새벽 집단자살로 세상을 등졌다.
이에 앞서 이승만은 26일 낮 곽영주 경무관(경무대경찰서장)에게 이기붕 일가를 경무대로 데려오도록 하고, 김정렬 국방장관에겐 이기붕 일가의 미국 망명을 교섭하라고 지시했다. 경무대 경찰관들은 일가를 이날 저녁 데려왔고 김 장관은 27일 밤 주한미국대사관 측과 타결을 지은 후 경무대에 보고했으며, 이 대통령은 다음 날 아침 이 사실을 이기붕에게 알려주려 했으나 자살로 물거품이 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한미 간의 이기붕 망명 합의 내용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뒤따른 의문들
이기붕 일가 자살 후 수도육군병원에 옮겨진 이강석.
4월 28일 오전 8시경 이기붕 일가가 집단자살했다는 방송보도가 나왔다. 계엄사는 이들이 새벽 5시40~50분 사이에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 경무대 구내 36호 관사에서 리볼버 36구경 권총(6연발)으로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자살 당시 목격자는 없었으나 자살 이전의 동향과 이후의 상태로 보아 계획적인 자살이 분명하다면서 검시를 끝내고 4구의 유해를 수도육군병원(후에 국군보안사령부 자리)으로 이송했다고 밝혔다. 검시는 군과 일반 의사, 서울지검의 김동호·조태형 검사가 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경무대, 군(계엄사), 검찰과 경찰 소식통들이 전한 내용을 종합한 이기붕 일가 집단자살 경위는 다음과 같다.
경무대 정문을 들어서면 우측은 잔디밭을 지나 본관으로 향하는 길이고, 정문에서 직진하면 후문까지 사이에 차고와 비서들의 관사가 있었다. 자살 장소는 관사 36호실. 오전 5시40~45분 사이에 연발하는 총소리를 듣고 별실에 머물던 이무기 비서가 즉시 경비실에 연락했고, 5시 53분경 경비원이 현장에 왔을 땐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방 안엔 피가 낭자한 가운데 앞에서 볼 때 정면의 긴 소파 좌측에서 우측까지 이기붕-박마리아-강욱이 손을 잡고 앉은 상태로 머리는 모두 뒤로 젖혀져 있었다. 소파 1m 앞엔 이강석이 소파 쪽으로 다리를 뻗고 누워 있었다. 이들은 자살을 결심한 후 이강석이 부친, 모친, 동생을 차례로 쏜 후 자살한 듯하다. 검시 결과 이기붕과 강욱은 왼쪽 가슴에, 박마리아는 머리에 각각 1발씩 총알을 맞았고 이강석은 자신의 복부와 머리에 각 1발씩 쏜 것으로 보였다. 권총엔 탄알 1발이 남아 있었다.
이기붕은 전날 저녁 찾아온 경호원과 운전기사에게 “내 걱정은 말고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도록 하라. 내일부터는 여기에 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 이강석은 사건 발생 10여 분 전 본관 숙직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님(이승만)께서 정말 오늘 이화장으로 가시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6군단에서 돌아온 27일 종일 방 안에서 집단자살을 협의, 결심한 듯했다. 하야를 선언한 이승만 내외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가면 한 가닥 권력 유지는커녕 생명의 보호막조차 완전히 걷힌다는 절망감에 목숨을 끊은 것으로 분석됐다. 부모와 강욱이 수면제를 마시고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이강석이 차례로 쏜 후 나란히 소파에 앉힌 것 같다고 했다. 방 안에선 수면제 병과 알약이 발견됐고, 이강석의 손엔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현장에서 절명한 것으로 발표됐던 이강석은 빈사 상태에서 수도육군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이날 오후 1시경 사망했다고 한국일보(4월 29일자 조간 3면)는 보도했다. 김치열 서울지검장은 “유서나 일기는 없고, 다만 당장 입을 옷 몇 가지와 약간의 일용품만이 남아 있었다”고 밝혔다.
사건 발생 후 한동안 집단자살에 대한 갖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첫째, 이강석이 3명을 먼저 쏘고 나란히 소파에 앉힌 후 자살했다면 3발의 총성이 나고 적어도 3~5분 후 다시 2발의 총성이 나야 하는데 계엄사는 잇달아 5발의 총성이 울렸다고 했다.
둘째, 수면제를 먹게 하고 1발씩 쐈다고 하나 적어도 한 명이라도 총성에 놀라 깨어 어느 정도 저항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셋째, 이강석이 2발을 쏴서 자살했고 머리와 복부 모두 치명상이라는데, 과연 1발을 맞은 후 머리나 복부 등을 다시 쏜다는 게 가능한가.
넷째, 바로 옆 별실에 있었다는 이무기 비서의 행적이 일절 밝혀지지 않았다. 경비실에 보고했다고는 하나 처음 총성이 났을 때 달려가 목격한 것인지, 전혀 들어가보지 않았는지 아리송하다.
다섯째, 제3자에 의한 집단타살설이다. 경무대 내부의 곽영주 경무관 등 이승만의 최측근 또는 충성분자들이 자유당의 숱한 실정(失政)과 3·15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인책(引責) 공세를 예상, 이승만을 보호하려고 아예 이기붕 일가를 제거했다는 주장이다.
장례식이 끝난 후 4대의 영구차는 100여 대의 차량이 뒤따르는 가운데 서울시내를 벗어나 망우리 공동묘지에 도착했다. 이기붕과 박마리아의 유해는 이미 잠들어 있는 외동딸 강희의 묘 위쪽에, 강석과 강욱의 유해는 바로 아래에 안장됐다.
재미동포 기자와 공동 취재
여기까지가 이기붕이 이승만을 승계,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 아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선거를 자행해 부통령에 당선됐다가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절박한 궁지에서 방황한 끝에 일가족 집단자살, 장례식, 매장으로 이어진 상황이다.
그런데 이강석이 살아 있고 신 여인이 그를 직접 만났다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필자는 며칠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국내외로 나눠 취재를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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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이기붕 일가의 자살을 불러온 4·19혁명.
해외 취재 대상국은 당연히 미국이었다. 마침 재미동포 중진 언론인 가운데 뛰어난 활약으로 수많은 특종을 보도했고 탐사보도의 베테랑으로 알려진 친구 박형진(가명) 군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그에게 연락해 비록 한강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 같은 작업이 되겠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번 파헤쳐보자고 제의했다. 예상대로 그는 흥미진진한 소재라면서 당부한 대로 비밀취재와 신원보호는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필자는 재미동포 사회를 통한 은근한 수소문, ABC방송에서의 인물 찾기, 1960년 당시 한국에서 근무했던 전직 외교관 추적, 관련 자료 입수 등을 탐사 방향의 의견으로 제시했다. 박 군은 좋은 생각이라면서 최대한 뛰어보겠다고 답했다. 그는 미국 방송계 인맥을 총동원해 ABC방송 뉴욕 본사를 비롯해 각 지사, 유럽 등 해외지사에 근무하는 동양계 사원들의 경력과 사진 등을 최대한 입수해 면밀히 점검했다. 미국식으로 이름을 개명했을 가능성, 얼굴을 숨기려 앵커나 기자 외에 PD, 카메라맨, 기술인으로 근무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이들에 대한 조사에도 나섰다.
필자는 국내에서 당시 생존해 있던 전 자유당 중진, 이기붕의 측근, 계엄사 고위 장성, 은퇴 외교관, 4·19혁명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에 근무했던 한국 직원들을 상대로 수소문했다. 그때 이미 33년 전 상황이라 대부분 작고했거나 신병과 노령으로 인한 기억력 감퇴 등이 걸림돌로 드러났다.
이강석의 고등학교, 육본 근무(의장대 소속) 시절 친구들도 탐문했으나 뚜렷한 사실 또는 자료를 확인하거나 증언을 듣기 어려웠다. 한 친구는 이강석과 4·19혁명 직후 만남이 끊겼으나 자살 며칠 전 잠시 마주쳤을 때 “차라리 죽고 싶다” “멀리 어디로 떠나고 싶다”라는 말을 하더라고 전했다. 이기붕 측근과 전 자유당 간부들은 대부분 “말하고 싶지 않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기붕이 민의원 의장이던 당시 그의 비서실장을 근 4년간 지낸 한글학자 한갑수 선생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한 선생의 얘기로는 자살 소식을 뒤늦게 듣고 28일 낮 수도육군병원으로 달려갔으나 출입을 금지당했다고 한다. 군용전화로 송요찬 계엄사령관과 통화한 후 들어갔을 땐 이미 시신들을 입관한 상태였다. 오랫동안 모셨던 분들이라 얼굴만이라도 꼭 보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이강석의 시신을 수습할 때 눈알이 자꾸 빠져나와 담당자가 몇 차례 손으로 집어넣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다고 했다.
이강석의 해외 도피 가능성을 묻자 필자가 접촉한 모든 자유당 간부, 이기붕 측근, 계엄사 및 외무부 출신 인사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한갑수 선생은 그렇지 않아도 일가가 자살한 직후 몇 달 동안 ‘가족 전원이 해외로 몰래 나갔다’ ‘집단자살-4구의 관-장례식-매장은 각본이다’ ‘이 의장이 부부의 자살 조건으로 두 아들을 해외로 빼돌리게 했다’는 등의 소문에 시달렸다고 술회했다.
종적 감춘 신 여인
탐문하는 동안 만날 때마다 취재 상황을 묻던 정 선생이 어느 날 전화를 걸어와 신 여인이 전화를 끊고 번호까지 지워버렸다고 전했다. 결국 근 1년 반 동안 소리 없이 전개했던 ‘이강석 찾기’에 대한 반응은 여러 인사로부터 ‘있을 수 없다’는 부정적 의견부터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 ‘끝까지 공개적으로 수소문해볼 만한 소재’라는 격려(?)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모두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참으로 답답했던 것은 국내에 이기붕 일가의 자살, 자살 전 행적, 현장 수사, 검시 등에 관한 기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53년 전 일가가 자살했을 당시의 관련 인사들은 거의 다 사망했다. 정광모 선생도 작고했고 신 여인도 미궁으로 사라졌다. 이강석 형제 생존설이 과연 사실인지, 신 여인이 착각한 것인지도 가릴 수 없다.
만일 이강석이 생존한 게 사실이라면 망우리 묘소는 어떻게 된 사정인지 모를 일이다. 차라리 세상에 ‘이강석 찾기’를 널리 공지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성춘│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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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다] 간편 종합 뉴스?
♡1월 13일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
1. 아베 총리가 본인의 입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라는 야당 의원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한일 외교장관 회담의 발표문에 명기된 사죄와 반성의 문구를 본인 입으로 천명하라는 민주당 의원의 요구에 '박근혜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언급했다'며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위안부야? 어디다 대고 사과하는 건데?...
2. 누리과정 예산 미편성 사태로 우려로만 다가왔던 보육대란이 겨울방학을 마친 어린이집을 중심으로 현실화됐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일부 학부모들은 누리과정 중단 소식에 아예 자녀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공약 보고 지지한 사람들에게 부끄럽고 죄송하지 않나?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말야...
3. 선거를 앞둔 국회 채용 홈페이지에는 대학생 졸업자를 대상으로 ‘인턴, 입법 보조원’을 채용한다는 글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예 보좌관’이라는 경력 증명서 한 장으로 노동 착취, 불합리한 고용 조건을 요구하는 일이 다반사라고 합니다.
선거철에만 납작 엎드리는 인간들 아시죠? 이번엔 절대 표 주지 마세요. 그걸 당연하게 아는 인간입니다...
4. 공정거래위원회가 '삼겹살데이' 등 자체 할인행사를 위해 납품단가 후려치기를 한 혐의를 받고 있는 롯데마트를 상대로 정식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롯데 측은 공정거래조정위의 '48억 원 지급' 결정에 불복한 상태입니다.
싼 맛에 삼겹살 굽는 동안 눈물 흘리는 사람은 따로 있었나 봅니다. 완전 미안하네...
5. 채용 마지노선 평균 나이는 남성 30세·여성 28세로 조사됐습니다.
실제로 설문에 응답한 기업의 절반은 '나이를 이유로 탈락시킨 지원자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 나이 먹도록 여태 뭐했냐?’ 이건가? 그 나이 먹도록 당신들이 원하는 스팩 쌓았지 뭐 했겠습니까...
6. 응급실에 실려 온 국내 교통사고 환자들을 대상으로 안전벨트 착용 여부와 관련한 사망 위험도를 분석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운전자와 동승자는 교통사고에 따른 사망위험이 안전벨트를 맨 사람보다 각각 12배, 6배나 높다는 분석입니다.
아시다시피 보시다시피 장난이 아니죠? 차에 타는 순간 안전벨트는 습관처럼 착용하는 걸로~
7. 한일 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를 둘러싸고 국내 논란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정부가 최근 피해자들과의 개별 접촉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외교부 관계자는 이제 시작 단계로 계속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시작부터 잘못됐어 이 사람들아~ 첫 단추 잘못 꿰면 어떡해? 처음부터 다시~
8. 서울 중구가 2년여 전 서울시와의 이견으로 추진하지 못한 박정희 가옥 연계 역사문화공원 사업을 올해 자체 예산으로 재개합니다.
완공은 2018년 목표로 총사업비는 314억 원으로 추정됩니다.
예산 부족이라고 여기저기 아우성이더만... 이럴 때 보면 참 여유만만 보기 좋습니다요~ 이렇게 얘기하면 진짠 줄 알겠지?
9. 카페베네가 미국 메릴랜드 주에서 프랜차이즈 허가 없이 가맹점 계약을 체결했다가 메릴랜드 주 검찰청으로부터 행정 제재를 받았습니다.
카페베네가 프랜차이즈 영업을 즉시, 그리고 영원히 중단하라는 내용입니다.
국내에서 하던 갑질이 해외에서는 안 통했던 모양입니다. 새는 바가지 아무 데나 들이대지 좀 말지 그랬어~
10. 1972년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집안에서 화투를 쳤다는 이유로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남성이 무려 44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계엄사령관의 포고령이 위헌 무효라는 판단에서입니다.
무슨 고전 ‘유머 1번지’ 보는 것 같지 않아? 그때는 그랬답니다...
11. 미국 교포들의 한국 국적 포기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처음으로 2,000건을 넘었는데, 대부분 '군대 문제' 때문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가수 유승준만 욕할게 아니라니까... 권리만 누리고 의무는 방기하는 인간들... 나빴어~
12. 부산경찰청이 ‘무한도전’에 출연한 형사들에게 표창장을 수여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실제 범인을 체포한 것과 연예인을 잡은 것을 같은 격으로 보느냐는 지적 때문입니다.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줬다는 이유였을 겁니다. 평소에도 친근하고 즐거움을 주는 경찰로 탈바꿈하시길...
13. 부동산 거래 활성화와 담뱃세 인상 덕에 지난해보다 세금이 17조 원 더 걷혔습니다.
담배 세수는 처음으로 10조 원을 넘어섰습니다.
자기 몸을 희생해가면서 담배 피시는 애연가 여러분이 애국자이십니다. 감사합니다~~
14. 이화여고 역사동아리 ‘주먹도끼’ 학생들이 기금 4,200만 원을 모아 소녀상을 건립했습니다.
할머니들을 위해 배지를 판매하고 기금 모금을 하며 행동으로 역사를 배웠다고 전했습니다.
그러게... 역사는 밀실에서 쑥덕이며 자기 좋은 대로 만드는 게 아닌데 말이야... 애들한테 뭐 좀 느끼는 거 없수?
15. 남의 나체 사진을 인터넷에 공개했더라도 촬영 당시 피해자가 스스로 찍은 사진이면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셀카의 위험성이 이런 데도 있는 모양입니다. 근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16. 대부업체 직원이 현금 수백만 원을 차 트렁크 위에 올려둔 채 운전하다 돈이 도로에 흩뿌려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현금 600만 원이 도로에 뿌려져 잃어버린 490만 원을 찾는 중이라고 합니다.
고리로 받은 이자만큼 날아간 건 아닐까? 페이 백~
17. 당분 함량이 높은 탄산음료를 하루에 한 캔만 마셔도 내장 지방이 쌓여 비만 등 각종 성인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고 합니다.
탄산음료나 가당 음료를 자주 마시는 사람은 이러한 음료를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에 비해 내장 지방이 30% 정도 더 생기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트림하면 다 빠지는 게 아니었어... 그래도 햄버거, 피자에는 콜란데 말야...
18. 최근 열쇠 둔 곳을 깜빡하거나 문 잠그는 것을 잊는 등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는 것은 뇌의 일부분이 졸고 있기 때문으로 나타났습니다.
뇌 전도를 통해 전기적 활동을 측정하자 어떤 부분은 잠들고 어떤 부분은 깨어 있는 것으로, 피곤해지면 사람이 깨어있어도 몇몇 뇌 세포는 쉽게 잠든다는 것을 확인됐다고 합니다.
피곤하면 쉬셔야 실수를 안 한답니다. 피로 회복에는 쉬는 게 최고인데... ㅠㅜ
19. 전북 김제의 한 돼지사육 농가에서 접수된 구제역 의심 신고에 대해 방역 당국이 구제역 확진 판정을 내렸습니다.
올겨울 들어 발생한 첫 구제역 사례이자 지난해 7월 이후 6개월만으로 구제역 위기 단계는 '관심'에서 '주의'로 한 단계 격상됐습니다.
무슨 바이러스가 이 추운 겨울에 창궐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의 피해가 없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요...
20. 한국노총이 ‘9·15 노사정합의’의 전면 파기를 선언했습니다.
민중 총궐기 단 하루 집회로 최소 1,097명이 경찰에 소환됐습니다.
중국 상하이증시가 작년 9월 이후 처음으로 3000선이 붕괴됐습니다.
국방부가 대북 확성기 방송의 기대효과가 있다고 전했습니다.
보증금 9억 원의 초호화 실버타운의 대기자가 줄 섰다고 합니다.
미군이 이라크 모술의 IS 금고 시설을 폭격해 막대한 현금이 잿더미로 변했답니다.
리오넬 메시가 통산 다섯 번째로 FIFA 발롱도르 수상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오늘도 강추위가 이어진다고 합니다.
중부 지방에는 살짝 눈 소식도 있습니다.
운전 조심하시고 감기도 구제역도 조심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일도 사랑도 건강도 예방이 최고라는 것 잊지 마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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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아무도 이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않네요. ROME2
저는 이 게임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올해 최고의 기대작은 GTA도 아니고 심시티도 아니었고, 바로 로마 2 입니다!지금 까지 나온 정보라고 합니다 -다음 : 디스 이즈 토탈워 펌1. 지방 시스템 개선 하나의 지방은 지방의 수도인 주도와 하위 거주지로 구성됨. 지방은 57개, 거주지는 183개. 한 지방에 포함된 여러 거주지들은 모두 건물을 지을 수 있고, 세금을 걷을 수 있으며, 서로 다른 공공질서를 가짐.(한 거주지가 행복하지 않더라도 다른 거주지는 행복할 수 있음.) 같은 지방에 포함된 거주지들이라도 서로 다른 팩션들이 차지할 수 있음.예컨데 주도를 먹는다고 해서 그 지방에 딸린 여러 거주지가 한번에 점령되진 않음. 이전의 자원 개념은 거주지로 통합됨. 1-A 일일히 거주지를 클릭해서 건물을 짓는 이전의 방식 대신 지방에서 여러 거주지의 건축을 한번에 관리할 수 있음1-B 거주지마다 공공질서가 다르지만, 최종적으로는 지방 단위로 계산된다고 함. 만약 반란이 일어난다면 가장 공공질서가 낮은 거주지에서 일어나게 됨.1-C 플레이어가 한 지방에 딸린 거주지들을 모두 점령하면 지방에 속한 거주지 전체에 포고령을 내려 거주지 전체에 효과를 줄 수 있음. 영상에서 확인된 바로는 문화 수치가 존재하고 포고령을 통해 문화를 전파할 수 있음.1-D 모든 거주지마다 공성전을 치뤄야 할 필요는 없음. 제작진은 게임이 공성전 축제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마도 주도에서 공성전이 벌어지고, 나머지 거주지들은 회전으로 처리되지 않을런가 싶습니다.1-E 육상 외에도 해역 개념이 새로 추가됨. -> 전작들에서 모드를 통해 다들 경험해보셨겠지만, EB같이 지역수 무지막지하게 많은 모드들 플레이하다보면 턴 넘길때마다 건축완료창이 십여개씩 우수수 떴었죠.공공질서도 도시별로 따로따로 관리해줘야 했었고. 이런 부분의 불편함을 많이 해소하고, 개별 도시들의 관리를 넘어서 더 제대로 된 지역관리를 지원하는 것 같습니다.엠토나 쇼토에서도 이런 시도가 참 좋았는데 제대로 개선하는 것 같네요. D에서 볼 수 있듯 모든 거주지에서 공성전을 치룰 필요가 없는 것도, 모드들을 하다보면 경험할 수 있는 짜증나는 공성전들을 줄이려는 시도로 보이구요.설명으로는 주도가 거대한 도시, 그외 거주지는 목책을 두른 마을같은 느낌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발표된적이 없는 문화수치가 이번 영상에서 눈에 띄었는데요.문화수치라.. 제작진들도 헬렌 짱개들이 스텝에서 팔랑크스를 뽑아내고 팔라바 마적떼들이 지중해에서 카탁 아처를 뽑던 이전작들의 어색-_-함을 확실히 인지한 것 같습니다.후술할 내용이긴 합니다만 문화 승리와도 연관되는 개념이 아닐런가 추측해봅니다. 어찌되었건 의외로 이게 이번 토탈워에서 가장 인상깊은 시스템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그렇게 되길 바라구요. 해역 시스템은 아마 엠토부터 등장한 무역로 약탈의 연장이 아닐까 싶군요. 엠토부터는 함대로 적의 무역로를 점거하면 적의 수입을 막고 그중 일부를 약탈할 수 있었죠.아무래도 제작진들이 원하는건 초반 카르타고가 로마의 미칠듯한 해역 봉쇄에 시달리게 해서, 카르타고 플레이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포에니 전쟁을 재현하게 만들거나 하는 그런거겠져. 뭐 제대로 구현된다면 말이지만.. 아 빼먹었는데 거주지가 공격받을시 도시 규모와 건물에 따라 수비군이 증원되는건 엠토, 쇼토2와 같습니다.또한 거주지 증축이 돈/식량만 있으면 가능했던 쇼토2나 엠토와는 달리 롬토, 미토처럼 인구수에 따라 증축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되돌아갔습니다. 2. 전투 시스템 변화 2-A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와 그리스 호플리테스의 차이를 둘 것이라고 함.2-B 전투 애니메이션은 현실적인 문제로 1대1을 고수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주변 유닛을 모두 계산에 넣음. 따라서 많은 적과 마주한 유닛은 (비록 전투애니메이션은 1대1로 표시되지만) 더 빨리 죽음.2-C 원거리 공격이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강화되며, 상대방과의 거리에 따라 데미지가 다름.2-D 방패는 예전처럼 따로 수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방패의 특성에 따라 갑옷방어력과 근접 방어력을 높여줌.예를 들어 팔랑크스가 장비한 방패는 가슴 언저리에서 거의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갑옷 방어력에 합산되지만, 갈리아 전사가 장비한 방패는 한 손에 들고 자유롭게 움직여가며 싸웠으므로 방어기술을 더 높여줄 것임.방패 보너스가 전방과 좌측에만 적용된다는 점은 이전과 동일함.2-E AP(방어구 관통)는 예전처럼 적의 방어력을 무조건 절반으로 깎는 특성이 아니라,아예 새로운 능력치로 편입되어 무기마다 고유한 AP 수치를 가짐. AP는 또다른 공격력 수치로서 방어구를 무시하고 들어가는 데미지임.예를 들자면, 갈리아인의 장검은 높은 공격력을 가지지만 AP데미지는 거의 없으므로 중장갑 유닛에게는 비효율적임.반대로 도끼는 낮은 공격력을 가지지만 높은 AP데미지를 가지므로 중장갑 유닛에게 더 효율적일 것임.2-F 쇼군2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가위-바위-보식 상성이 유지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함.이런 극단적인 상성은 쇼군2의 특징이지 롬2의 특징은 아니라고 함.2-G 가시선 시스템이 추가됨. 모든 유닛은 시야 밖의 유닛을 볼 수 없고, 시야는 지형과 건축물에 따라 제한됨. - > 공언한 내용들을 보면 하나같이 흠잡을 데 없는 내용입니다. 개인적으로 엠토의 전투AI는 매우 실망스러웠지만쇼군2에서 (공성전을 제외하면) 적절한 인공지능을 보여줬던 만큼, 이번 작품도 전투ai 수준이 기대됩니다. 방패 수치를 따로 두지 않은 덕분에 오히려 여러 가지 유형의 방패를 구현할 수 있게 됬다는 점이 꽤 마음에 듭니다.EB모드에서 팔랑기타이들이 얼굴만한 방패 하나 들고 있던걸로 방패방어력 5 받아서 미치도록 안 죽던걸 떠올려 보면..반대로 AP는 따로 수치화시킨 덕분에 표현력이 늘어난 경우네요. 확실히 이전작들의 AP개념은 뭔가 애매하긴 했죠.이제 투구 방어력만 따로 나와주면 더할나위 없을텐데.. 가시선 시스템을 통해 지금까지 많이 홀대받았던 유닛들을 돌아보게 할 계기가 될 거 같아서 많이 기대됩니다. 특히나 헐벗은 투창기병, 투창병 이런 애들 떠올려 보세요. 역사속에서는 지역의 사신으로 군림했던 분들이 사람 대접은 커녕 유닛 대접도 못 받았져...드디어 얘들한테도 뭔가 쓰임새가 생기지 않을런가 싶습니다ㅠㅠ 3. 군단 시스템 3-A 더 이상 개별 유닛이 돌아다니는 모습은 볼 수 없음. 모든 유닛은 군단에 속하며 군단은 장군이 구성함.3-B 구성된 군단은 고유한 엠블럼과 이름, 전통이 부여됨. 전통은 최대 10개까지 플레이어가 직접 만들어나갈 수 있음.(쇼토2에서 보인 장군의 특성 트리와 비슷할 듯.) 군단은 장군, 유닛과 마찬가지로 랭크를 가짐. 플레이어의 군단 하나가 전멸하더라도 그 군단의 전통을 물려받은 군단을 창설할 수 있음.3-C 군단에 유닛을 충원할 때 군단은 소집 모드로 들어가며, 그 턴에는 움직일 수 없음. 또한 군단은 한명의 장군이 이끌고 있고, 장군이 사망하더라도 다른 장군으로 충원되므로 군단 전체가 사라지는건 아님.3-D 군단은 켐페인 맵 상에서 '공격태세' ' 방어태세' '매복'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음. 공격 태세인 군단은 이동력이 증가하며, 방어태세인 군단은 방어물과 야전 성채를 설치할 수 있고(군단이 같은 곳에 머무르면 방어물을 설치할 수 있는 포인트를 얻음), 매복은 지나치는 적을 기습할 수 있음. 태세 변경에는 한 턴이 소요됨.3-E 이외에도 강행군 태세, 습격 태세를 지정할 수 있음. 강행군 태세는 이동력이 2배, 습격 태세는 주위를 약탈해 유지비를 절감할 수 있지만 아군 영토에서 시행시 지역의 불안정을 높임.(위의 공격/방어/매복과 용어만 달라지고 실질적으로 같은 내용인지, 추가적으로 넣은 개념인지 불확실함.)3-F 만일 부대가 "강행군"중에 적에게 공격당할 경우 공격자는 전장을 선택할 수 있음.(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았어요.) 또한 방어자는 자신의 보급행렬을 지켜내야 하고, 공격자는 보급행렬을 와해시키는것만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음.3-G 군대는 한 턴을 소모해 선박을 건조함으로서 스스로 수역을 건널 수 있음. 적 선박을 나포할 수는 없음.3-H 육전과 해전이 동시에 진행되며 상호간에 간섭이 가능함.3-I 국가의 힘에 따라 최대 보유 가능한 군대수가 제한될 것이며 따라서 군대 하나하나가 소중해질 것임. * 장군은 기존 쇼군2에서 큰 변함이 없는 듯. 전투 이겨서 경험치 쌓고 스킬 찍고. 다만 최대 랭크가 10이 됬다네요. -> 연재하는 분들을 보면 시스템 상으로는 그런거 없-_-어도 임의로 20카드 꽉 채운 군단을 만들어서 이리저리 끌고다니는 롤플레이를 즐기는 분들이 많죠.저도 EB에서 마케도니아로 트라케 애들 꽉꽉 채운 군단 맹글어서 엄한 스페인으로 원정보내면서 재미지게 놀았거든요. -.-a 그런 작은 소재미들을 CA가 놓치지 않고 잘 잡아냈습니다. 사실 그것보다 좋은건 더이상 민병대나 헐벗은 병종 2~3카드가 국경선에서 깔짝깔짝거리면서 불안정 높이고 전투걸면 도망치는 화딱지나는 광경을 안 봐도 된다는 겁니다.쇼군2에서도 기껏 적 회전에서 작살내면 패잔병들 2~3카드가 돌아댕기면서 도시주변 자원 쑥대밭 만들어대는게 짜증났죠. 아주아주 매우매우요. 문제는 이 군단 시스템이 헬라스나 라틴인들, 그외 기타 땅에 발붙히고 사는 분들하고는 잘 어울리는 반면에 팔라바 마적떼같은 유목민들하고는 그닥 어울려뵈지 않는다는건데..어떻게 될런지 잘 모르겠네요. 뭐 그런거까진 신경 안쓰고 그냥 나올거 같긴 합니다만-_- 전반적으로 자금을 모으기 힘들어지는 것, 그리고 플레이어가 많은 수의 유닛을 가지기 힘들어져 큰 전투 한번이 세력의 향방을 결정짓게 만드는 것이 미디블2 이후 작들에서 보여준 CA의 일관된 행보입니다.엠토도 무역로를 제외하면 미디블2보다 돈이 많이 빡빡한 편이고, 쇼군2의 경우엔 무역로 다 먹어도 롬토나 미토만큼은 절대로 안 벌리죠.전반적으로 구작들이 초중반을 지나면 지나치게 쉬워졌던 것을 반면교사로 삼는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롬2도 그런 흐름을 따라갈 것 같습니다. 육해공..공은 아니군요-.-; 하튼 육전/해전을 합친건 그을쎄요.. 손 세개 달린것 같은 플레이를 일상적으로 하는 괴수 분들이면 모를까 저는 우익의 기병을 컨트롤하면 좌익의 보병대가 뚫리는 인간이라-_- 해전까지 컨트롤할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네요.충각도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던데, 이번에 공개된 나일강 전투 파노라마를 보면 충각전술을 시도하는 톨레미 전함과, 전함에 타고 있는 로마군을 투석으로 공격하는 육상의 프톨레미 군을 보실 수 있습니다. 4. 외교 4-A 엠토, 쇼토와 마찬가지로 외교관은 없음. 마주친 모든 팩션과 외교 가능.4-B 이전 작들에서처럼 상대방과의 관계를 수치화시켜서 표현하되, 표현 내용이 좀 더 세세해짐. 또한 AI가 플레이어가 다른 팩션들에게 보인 태도들을 기억함.(깡패같이 굴면 나중에 피본다고 하네요.)4-C AI에게 "돈내놔라" 수준에서 벗어나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지원을요구할 수 있으며, 상대방이 거절할 경우 이유를 말한다고 함. - > 뭐 그닥..일찍이 구현되었어야 할게 이제사 구현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영상을 보면 외교창에서 문명 시리즈의 향기가 짙게 납니다. 역시 배울건 배워야죠.롬토와 미토, 그리고 초창기 엠토의 미칠듯한 외교 퀄리티를 떠올려보면 뭐가 나오던 이전작보다 못하다는 악평은 못 할거 같아요.-_- 엠토도 패치 한 이후부터는 칭목칭목하면 상대도 칭목칭목해줬고, 쇼군2의 외교도 다른 전략시뮬레이션들과 비교해보면 그럭저럭 봐줄만한 수준은 됬죠.큰 기대는 안 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즈질이 되어서 나올 거 같지도 않습니다. 제작진들 말로는 기대하라고 하는데, 엠토때 속은게 가슴에 좀 큰 상처를 줬어야져-_- 외교 부분만큼은 무념무상입니다. 5. 켐페인 켐페인은 기본적으로 117개 팩션, 500개의 육상 유닛, 1년 1턴(계절 구현에 적합한 방법을 찾고있다고는 하는군요), 시대적 배경은 제정 초기까지이며 지리적으로는 박트리아까지입니다.플레이 가능 팩션은 현재 로마-카르타고-아르베니-수에비-마케도니아-이집트-파르티아-폰투스-에페이로스-스파르타-아테네-이케니 12개 팩션이 공개됬고, 이 중 그리스계 3팩션은 예약구매자용 DLC팩션입니다.켐페인 맵에서의 자연적 손실(ex-쇼군2에서 겨울이 되면 적 영토의 병사들이 죽어나갔던 것)은 여전히 유지됩니다. 5-A 모든 팩션은 문화, 군사, 공학의 3가지 테크트리를 가지며, 테크트리는 문화별로 나눠짐5-B 모든 팩션은 문화적 승리, 경제적 승리, 군사적 승리 3가지 승리조건을 가짐.5-C 모든 팩션은 팩션 내부의 3가지 하위 팩션중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됨. 로마가 3가문으로 나뉘는 것처럼.5-D 야만족 팩션은 자신의 문화권에 속한 부족들을 통합하는 것이 주된 목표가 됨. 또한 통합에 성공한 야만족 팩션은 부족명이 아니라 더 상위 개념으로 표기되는 듯.(스웨보즈가 게르만 부족들을 모두 통합하면 게르만이 되는 식.) 부족들을 통합하는 수단으로는, 1. 외교적인 수단 2. 군사력을 통한 정복 3. 다른 문화권의 팩션들을 때려잡음으로서 권위를 얻음의 3가지 방식이 있음.5-E 로마는 '원로원', '원로원 임무', '원로원에서의 영향력' 등 롬토1에서 볼 수 있던 정겨운 개념들이 부활.5-F 로마 플레이어는 암살 등의 정치적 공작을 행해서 다른 가문에 우위를 점해야 하며, 다른 가문의 원로원 의원을 장군으로 지명해 원로원에서의 영향력을 감소시킬 수 있지만,장군이 된 다른 가문의 일원이 군사적 성공을 거두고 로마로 진군함으로서 위기에 빠질 수도 있음. 단, 이전과는 달리 플레이어가 다른 가문과 연합해서 원로원을 공격하거나, 혹은 다른가문의 군사적 진군에 맞서 원로원을 수호할 수 있음.5-G 플레이어는 군사쿠데타로 (시민의 불행을 감수하며) 제정을 수립할 수도, 공화정을 지킬 수도 있음.(어감상으론 공화정 쪽이 어려워 보이는데 확신은..)5-H 다른 팩션들은 원로원이 없더라도 부족 의회 등 그에 상응하는 기관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정치 요소를 가짐.5-I 한번 캠페인맵에서 생성된 전투 맵은 다음 전투 때도 똑같은 지형으로 그대로 유지됨.5-J 도로는 건설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양 지점의 발전상태에 따라 자연스레 발전함 -> 이집트로 문화적 승리를 하려면 대체 어째야 하는걸까여? 문화승리를 거둘때 쯔음엔 지중해 서쪽 끝에서 저 멀리 동방까지 파라오식 눈화장을 즐기게 되는 걸까여? 정말로 알수가 없어요...하튼간 문화적 승리가 추가됬습니다. 혼돈의 카오스입니다. 다른건 어찌되었건 괜찮은데 토탈워에 문화승리라니! 문화승리라니! ...뭐 다른 내용들을 보면 괜찮습니다. 특히 문화권이 같은 플레이 불가능 팩션들을 외교적으로 통합 가능하게 만든건 괜찮아 보이네요.외교로 세력을 통합할 수 있다는건 쇼토2의 DLC인 사무라이의 태동과 비슷한 형식이 될 거 같고, 권위를 얻는 과정이 좀 궁금하긴 한데 토탈워니까 전투 잘해서 군단병을 철근같이 씹어먹으면 되겠죠 뭐. 하여간 팩션들이 내부적으로 3가지 갈래로 나뉜 것, 내부적으로 롬토1의 원로원과 흡사한 정치체가 추가되고 정치 시스템을 전면에 내건 것은 환영할만 합니다.기존 토탈워 시리즈의 내정은 사실 수박 겉핥기 느낌이 너무 들었죠. 토탈워가 점점 더 매니악해지는건 반길만한 일이에요.사실 요새 캐쥬얼한 전략시뮬 게임들은 다 저 멀리서 산소호흡기 떼고 삼도천 건널 날만 기다리고 있거든요. 마지막으로 도로는 미묘하네요. 건설 요소를 모두 없앨 것 같지는 않은데.. 6. 아무래도 좋은 기타 등등의 것들 A- 유닛의 키 차이가 구현됨. 기본 키를 167cm로 두고 부대원간, 민족간 키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B- 칼집은 없습니다. 넣기 귀찮다네여..C- 요원은 챔피언, 스파이, 사제로 나뉜다고 합니다. 요원들은 다시 문화별로 세분화되서 서로 다른 특수능력을 가지구요. 챔피언은 암살, 방첩, 군대의 사기증진을 맡을 거라고 합니다.이거 그냥 닌자 기능 추가된 매츠케죠 매츠케. 스파이는 예전같을테고, 사제는 뭐 예언 하고 그런다는데..맵핵이라도 보여주는 걸까요? 헬라스 신들은 참 대단합니다.D- 유닛명칭은 다 영어 기준입니다. 대사도 다 영어로 하고 팩션명도 영어권에서 통용이 쉬운 명칭 우선이라네요.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한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한 배려라고 합니다.이번에는 인게임에서 들을 수 있는 대사좀 신경쓴거 같은데..전 영어듣기하곤 거리가 먼 사람이라-_-여러모로 아쉽네요. 자막이 지원될거같진 않으니.E- 처음 공개된 카르타고 공성전처럼 제작진이 신경써서 디자인한 도시는 30여개랍니다.F- 역사적 인물은 적당히 등장한다고 합니다. 카이사르, 미트리다테스는 나오고 저 멀리 동방 아자씨들은 소외되려나 걱정도 되고..G- 도시 뷰는 안 나온댑니다. 이건 좀 아쉽네요.H- 불타는 돼지, 군견은 나온댑니다. 음;이건 캠페인 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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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5.18관련 누가 올린자료 모았던것중에 하나
수구세력의 주장 1. 5.18은 김대중 정권때부터 민주화운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 5.18은 1988년에 가동된「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거치면서 노태우 정부 때 처음「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공식 인정 받았다. 1988년 국회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규명에 나섰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438896 ● 1993년 5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5.13 담화, 1995년 12월 5.18 특별법 제정, 1997년 4월 12.12 5.18 사건 신군부 유죄판결 확정, 1997년 5월 정부의 5·18민주화운동기념일 제정을 통해 민주화운동이란 평가가 확고해졌다.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209892&mobile&categoryId=200000431 수구세력의 주장 2. 5.18 최초 사망자는 20일 저녁 사망한 경찰이다? ● 5.18 최초 사망자는 1980년 5월19일 오전 3시 사망한 청각장애인 김경철이다. ● 5월 18일 희생된 김경철씨는 공수부대에 의한 대표적인 과격진압 사례였다. 청각장애로 인해 말까지 할 수 없었던 김씨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05981 ●김경철씨 사망자 조서http://i49.tinypic.com/32zkyh1.jpghttp://i46.tinypic.com/2v9x0u1.png ●19일에는 김경철씨 이외에도 김안부씨도 공수부대로부터 구타당해 사망했다. http://i47.tinypic.com/6tjy2w.png 수구세력의 주장 3. 광주시민이 먼저 무장해서 계엄군에 발포했다? ●1995년 검찰,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계엄군이 시민보다 먼저 발포했다. 계엄군은 1980년 5월 19일 오후 5시 광주고 부근, 5월 20일 밤 11시 광주역 일대,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에서 발포했으며, 시민이 본격적으로 무장에 나선 시점은 전남도청 발포가 발생한 다음으로, 21일 오후 2시부터다. ●(1995년 7월 검찰발표)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는 5월 19일 오후 5시께 광주고 부근에서 있었던 바 (중략) 20일 밤11시께 3공수여단이 광주역 일대에서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으며 (중략) 시위대가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위) 최세창 제3공수여단장은 각 대대에 M16소총 실탄을 배부해 장착토록 지시했다. 당시 광주역에 투입됐던 이모 하사는 과거사위와의 면담에서 "지원 병력을 막아선 시위대를 향해 발포가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오후 1시경 비극의 전남도청 앞 발포가 자행됐다. 계엄군이 시위대에 밀리자 공수부대 중대장 이상 및 일부 하사관들에게 실탄이 분배됐고, 시위대가 밀고 들어는 장갑차에 11공수여단 무전병이 사망하자 집중 사격이 시작됐다. 당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계엄군 중 일부는 위협사격을 가했지만 일부는 조준사격을 했고, 특히 인근 광주관광호텔 옥상 등 주변 건물에 저격병이 배치돼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과거사위는 "계엄군 사상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총상에 의한 부상자나 사망자는 없었다"고 밝혔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0034698 수구세력의 주장 4. 5.18 당시 시위대원이 장갑차를 조종했는데, 일반인이 어떻게 장갑차 조종을 할 수 있나? ●광주 시민이 조종했던 장갑차는 KM900(CM6614)이다. KM900은 궤도장갑차가 아니라 차륜식장갑차이며, 핸들이 달려있어 조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당시 버스기사, 트럭기사도 시위에 많이 참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광주 시민의 KM900 장갑차 운전이 불가능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수구세력의 주장 5. 5.18 당시 광주교도소가 습격당했다고 하던데?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있으며, 두 도로의 옆에 바로 붙어있는 통행이 빈번한 교통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21일부터 3공수여단은 호남고속도로와 광주-담양 도로 사이에 위치한, 광주교도소를 주둔지로 삼아 도로를 봉쇄했다. 제3공수여단은 교도소 주변 500m~1km 떨어진 도로 위에 바리케이드 설치하고, 무장여부와 관계없이 통행하는 차량에 무차별 발포했다. 정리하면, 제3공수여단이 도로를 타고 외부로 빠져나가려는 차량에 발포한 것이지, 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한게 아니다. http://i50.tinypic.com/2ms2h3d.jpg (가운데 운동장이 보이는 건물이 광주교도소) ●(광주교도소장 한도희) 시민군이 80년 당시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면 교도소 주변에 시체가 있어야지 어떻게 도로에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시 교도소에는 3공수여단 병력이 중무장하고 있어서 교도소 습격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엄군이 시 인근 지역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무차별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64241 ●(1995년 12월 검찰 현장조사 결과)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간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위치, 시외곽으로 빠져나가려던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다수의 교전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와 무관한 시민들이 도로를 지나다 매복병사들로부터 사격을 받았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22900329101009&ed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5-12-29&officeId=00032&pageNo=1&printNo=15638&publishType=00010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위) 외곽도로 봉쇄작전 중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12.12 5.17 5.18 보고서 100쪽> 수구세력의 주장 6. 꼭꼭 숨겨져 있던 무기고에서 어떻게 무기를 탈취할 수 있었나? ●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와 파출서의 예비군무기고에서,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무기고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수구세력의 주장 7. 시위대가 쓰던 카빈에 맞은 사망자가 계엄군이 쓰던 M16에 맞은 사망자보다 많다? ●제5공화국의 국방부는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88명이 폭도 자신들의 난동으로 죽었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제5공화국 국방부는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현존하는 5.18 사망자에 대한 검시자료는 보안사가 작성한 "광주사태 검시참여보고", 광주지검이 작성한 "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 , 광주시청에서 작성한 "광주소요사태 사망자 조서"로 3가지가 있다. 카빈 사망자만을 따져보자면, 보안사 검시 자료는 카빈 사망자 21명, 광주지검의 검시 자료는 26명, 광주시청 검시 자료는 12명이다. 세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카빈에 의한 총상으로 분류된 사망자는 8명이다.(1)보안사 검시자료 -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중 참고자료 부분> (2) 광주시청 검시자료 - <국가기록원>(3) 광주지검 검시자료 - <광주광역시 5.18 민주화운동자료총서 20권> 수구세력의 주장 8.1991년 윤기권의 월북은 북한이 배후조종했다는 근거다? (화려한 휴가의 주인공이 월북했다고 왜곡하기도 함) ●윤기권은 1962년 전북 정읍 출신으로, 1980년 광주 대동고등학교 학생이었다. 5.18의 충격과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1991년 3월 월북했다. ●윤기권은 5.18 당시 신원이 확실한 고등학생이었으므로 북한이 파견한 간첩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윤기권이 5.18에서 대단한 역할을 맡은 것도 아니다. 5.18 주역들의 집단 월북도 아니고, 단 한명이 월북했다고 5.18에 참여한 시민 전체를 매도할 수 없다.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5&no=290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5&no=289 수구세력의 주장 9. 북한이 5.18을 광주인민봉기라고 부르고, 매년 5.18 기념식을 여는게 의심스럽다. ●북한은 5.18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남조선인민봉기), 6.3항쟁(남조선청년학생봉기), 6월항쟁(6월 인민항쟁), 부마항쟁(10월 민주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운동을 모두 기념한다.(괄호 안은 북한에서 부르는 명칭)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8&aid=0002065002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232746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이라고 왜곡하여 북한 주민에 대한 선전수단으로 삼는다. 북한에 있을 때 5.18 등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http://www.rfa.org/korean/in_focus/nk_518-05182009134816.html 수구세력의 주장 10. 5.18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설을 주장하는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의 증언이 있다. ●5.18 당시 광주에 침투했다는 북한군의 숫자, 침투경로, 퇴각경로, 귀환인원이 매번 달라지고 일관성이 없다. ●임천용은 2006년 8월 한국논단과 인터뷰에서 서해안 쪽으로 450명이 침투하고, 3분의 1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특히 절반은 군복을 입고 계엄군 쪽에 침투하고, 절반은 시민군 쪽에서 활동했다고 말했다. ●2006년 12월 기자회견에서는 1개 대대가 침투해서, 3분의 2가 귀환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2008년 임천용은 뉴스한국과 인터뷰에서 서해안과 동해안으로 각각 1개 대대씩 침투해서 절반이 귀환했다고 말했다.(참고: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는 300명으로 구성됨)1. 한국논단 인터뷰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83002. 2006년 기자회견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19&aid=00000175573. 뉴스한국 인터뷰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k2007021120301185542 수구세력의 주장 11. 탈북자 단체의 5.18 증언집 "5.18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는 신빙성이 있나? ●탈북자들이 북한에 있을 때 5.18 상황을 생중계로 지켜봤다는 증언이 이 책의 포인트다. ●탈북자가 북한에서 5.18 당시 광주 상황을 TV를 통해 생중계로 봤다는 주장 : 1980년 당시 기술로 송신소, 중계소 하나없이 광주에서 수 백km 떨어진 평양에 생중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탈북자가 북한 TV에서 여자만 골라 도끼, 칼로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는 주장 : 5.18 민주화운동 당시 사망한 여자는 11명에 불과하며, 모두 M16 총에 맞아 사망했다. ●탈북자가 북한 TV에서 전기톱으로 머리를 갈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는 주장 : 머리가 전기톱에 갈려 죽은 사람에 대한 검시기록은 없다. 머리에 총상을 입어 사망한 시신 사진을 왜곡한 것이다. 수구세력의 주장 12. 5.18 당시 북한군이 활동했다는 것은 북한 사람, 탈북자 사이에서 상식이다? ●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인 탈북군인협회 회장은 5.18 북한군 침투설을 주장하는 자유북한군인연합에 대해 "탈북군인협회와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일하는 방법이 달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 특히 보여주기 사업, 이벤트성 사업 등은 지양해야 한다. ‘북한 보급창고 등을 까고 나오자’ 식의 선동적이고 과격한 활동이나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 등도 현실과 맞지 않다."고 비판한 바 있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수구세력의 주장 13.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을 기리는 비석이 북한에 있다? ●뉴데일리는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 사진을 게재하고, 김주호 박사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해 비석이 5.18과 관련있다고 보도했다. 사진 속의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은 우리나라의 현충탑처럼 북한에서 시군마다 하나씩은 있는 흔한 비석이다. 북한의 노동신문은 "김정일이 베트남전쟁에서 희생된 비행사들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다가 이국땅에 묻혀있는 그들을 조국에 데려다 인민군영웅 렬사묘에 안치하도록 하신데 대해 뜨겁게 회고했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 다른 사건에서 사망한 인민군과 관련된 비석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2355393 ●김주호는 어떤 문건과 비석의 명단에 있는 사망자 명단을 비교해서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비석과 5.18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하기 위해서는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을 공개해야 한다. ●비석 사진에 5.18과 관련있는 문구가 없으며, 비석과 5.18과 관련성을 밝혀준다는 문건의 존재도 불확실하다. 따라서 김주호는 북한의 아무 비석 사진을 가지고 5.18과 관련있다고 왜곡한 셈이다.--------------------------------------------------------------------------------------------------------------다른 사이트에서 올라온 자료인데이거 하나면 전부다 해명된다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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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광주에 관련하여
본 문서에서는 1980.5.17까지의 정치적 배경과 각종 소요사건에 관한 내용들은 다루지 않았다.*아래는 5.18 광주사태에 관련된 몇가지 사건을 시간 순으로 나열한 것이다. 1980년 4월 29일, 김대중이 주도하는 ‘국민연합’은 ‘민주화촉진국민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선포와 함께 불법적인 장외투쟁을 전개..1980년 5월 22일은 김대중 선생이 강제로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기 위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이 계획은 김대중 홍위병들이 극비에 추진하고 있었으며, 5월 16일 이화여대 강당에서 그 모의를 하던 홍위병들 중 몇명이 경찰에 검거되고 나서야 우리 정부는 그 사실을 알았다.(그냥 참조만 하기를. 김대중 석방 사건. 서울의 봄. 그리고 대통령 선거 및 헌법 개정을 둘러싼 극심한 정치적 갈등. 김영삼. 김대중. 김대중의 소요사태 선동등 5월 17일까지의 사건은 매우 복잡함.)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포고 제10호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겼으며 중요 대학에 계엄군이 주둔함에 따라 극심했던 학원소요는 진정되어 전국이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광주지역만큼은 격렬한 시위사태가 지속되었다. 전북 금마에 있던 7공수 2개 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 1개 대대씩 진입하여 31사단장인 전남출신 정웅 소장의 작전 지휘 하에 들어갔다. 정동년 등 5.18 고소자들은 신군부가 특별하게 광주에만 공수부대 2개 대대를 보냈다고 주장하지만 계엄포고 10호에 의해 배치된 공수부대 현황을 보면 광주에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1공수여단 소속 4개 대대는 연세대, 서강대, 홍익대에 배치했고, 5공수 소속 4개 대대는 모두 고대에 배치했고, 11공수 소속 3개 대대는 모두 동국대에 배치했고, 13공수 소속 2개 대대는 성대에, 9공수 소속 3개 대대는 서울대 중앙대 숭전대에, 7공수 4개 대대는 전남대, 조선대, 전북대, 충남대에 각 1개 대대씩 배치했다. 고대에 4개 대대, 동국대에 3개 대대, 성대에 2개 대대가 배치되었던 것에 비하면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 1개 대대씩을 배치한 것은 당시 계엄사가 광주를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나마 7공수 2개 대대는 겨우 600명 수준에 불과했다.1980년 5월 18일 오전 9시경, 7공수여단 제33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전남대 정문에 2백50여 명의 대학생이 몰려와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방 속에 숨겨온 돌을, 부동자세로 서 있는 공수대원들에 던져 7명의 공수대원들에 피를 흘리게 하는 부상을 입혔다. 공수대가 학생들을 향해 진격하자 학생들은 미리 예정한 대로 광주의 중심가 금남로와 충장로 쪽으로 도주하여 파출소를 파괴하고 불태우며 경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경찰들은 도망가기에 바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광주에서 의외의 사태가 발생하자 최규하 대통령은 매우 빠르게 움직여 이날 12시에 대국민성명을 발표했다. 나라 사정은 어려워 가는데 광주시위가 불순한 정치세력들에 의해 유발되어 점점 악화돼 가고 있으니 진정하라는 경고와 당부의 뜻을 전한 것이다. 시위가 난폭해짐에 따라 경찰로서는 도저히 폭력 시위를 당해낼 수 없게 되자, 안병화 전라남도 경찰국장은 전라남도 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출동을 요청했다. 이와 동시에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역시 분주하게 움직였다.1980년 5월 18일 오전 11시에 전남대생 1백 명 가량이 광주역에 모여 30분을 기다려도 학생회장이나 학생운동권 리더가 안 보이자 모인 이유를 몰라 모두 뿔뿔이 흩어지려 하던 찰나 누군가가 "경찰이 박관현 회장을 죽였다"고 큰 소리로 유언비어를 외치며 학생들을 선동했다. 박관현 회장은 그때 여수로 가고 있는 길이었음에도 모두 그 유언비어에 감쪽 같이 속았다.1980년 5월 18일 처음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가 등장하였을 때는 광주 경찰이 죽인 것처럼 말이 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웠고, 2007년에 제작된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민우가 진우(박관현)의 피 흘리며 축 늘어진 시신을 어깨에 둘러멘 장면의 포스터로 흥행에 성공하였으며, 거의 모든 관객이 이 거짓에 속았다.1980년 5월 18일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에게 전남대와 조선대에 주둔중인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시내로 출동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써 시위진압 임무는 오후 4시경부터 31사단장 정웅에게 넘어갔다. 공수대의 특성과 시위진압 작전에 서투른 정웅은 공수부대 2명의 대대장들에게 시위대를 쫓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모든 길목을 막고 주동자를 전원 체포하라는 무모한 명령을 내렸다. 기계와 같은 공수대원들은 하늘같은 2성 장군이 내린 명령에 따라 오후 4시경부터 4-5명 단위로 쪼개져 시내의 주요 길목을 차단했다. 대규모 시위대는 4-5명 단위로 서 있는 계엄군을 향해 돌과 화염병 등으로 공격을 했고, 수적으로 열세한 처지에서 피를 흘리게 된 계엄군 병사들은 보복 심리에서 무자비할 정도로 진압봉을 휘둘렀다.광주시내에는 첫날부터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의 씨를 말리러 왔다거나 여학생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등 기상천외한 유언비어들이 나돌았고, 이 거짓 유언비어를 듣고 흥분한 시민들은 점점 더 많이 중심가로 모여들어 시위대가 공수대원들에 매 맞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더 많은 유언비어가 확대 재생산되어 시위대의 규모를 순식간에 키웠다. 악성 유언비어는 분노와 폭력을 유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으며 광주의 첫날에 퍼진 유언비어는 아래와 같았다.{{'화려한 휴가라는 명칭 하에 데모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벌써 40명이 죽었다.''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을 이틀씩이나 굶기고 술과 환각제 등을 복용시켜 광주에 투입했다.''공수부대원이 임신한 여자의 배를 대검으로 찔렀다.''죽은 시민을 불도저로 밀면서 처리하는 과정이 TV에 나왔다.''대검으로 시민의 머리 가죽을 벗겨냈다.'}}특히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의 씨를 말리러 왔다는 종류의 유언비어는 묵은 지역감정에 불을 댕겨 광주시민들을 분노시켰다. 시위대가 갑자기 1,000여명 단위로 불어나 한일은행 및 도청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면서 자정까지 해산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 15명, 경찰관 310명이 부상을 입었고, 계엄군은 시위학생 615명을 검거했다. 진실이 위와 같은 데도 광주사태의 주모자요 영웅이라는 윤상원은 10시 30분경 불온서적을 취급하는 녹두서점 김상집씨에게 전화를 걸어 “전대 정문 앞인데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무차별살상하고 있다”며 정반대로 이야기했고, 이 거짓말은 녹두서점을 통해 전국 대학가 운동권으로 퍼져나가 그대로 대자보로 제작되어 대학가 벽보에 붙었다. 5월 19일, 윤상원이 민주투쟁회보 이름으로 뿌린 삐라는 아래와 같은 글귀로 시작 된다."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며,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 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 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의 젊은 학생들이 그렇게 소리 높여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바로 유신 잔당과 전두환 일파들입니다. 죄 없이 학생들과 시민들이 수없이 죽었으며 지금도 계속 연행당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이 있는 한 동포의 죽음은 계속될 것입니다."1980년 5월 19일 뿌려진 이 삐라의 내용은 5월 18일에 대한 내용이었을 것이며, 5월 18일의 실제 상황과 이 삐라 내용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5월 18일 공수대가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고,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른 적이 없었건만 윤상원은 첫날부터 이처럼 거짓 선동하는 삐라를 살포했던 것이다.1980년 5월 19일 광주사태가 확대일로로 치닫자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중장)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1개 공수여단의 추가 증원을 요청했다. 1980년 5월 19일 계엄사는 광주에서의 시위가 불길처럼 확산되고 시위양상이 격화일로를 치닫자 1개 공수여단을 더 증파하기로 하고, 정호용 특전사 사령관과 의논하여 최세창 장군이 이끄는 3공수여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후, 18:00시에 2군사령부에 3공수 5개 대대를 작전통제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23:08분에는 3공수여단에 광주투입 명령을 하달했다. 1980년 5월 19일 17시경, 광주시위대에 에워싸여 고립된 11공수 장갑차 뚜껑 위에 시위대가 불타는 짚단을 계속 올려놓았다. 그 열을 이기지 못한 소위가 뚜껑을 열고 나와 비조준 사격을 하였다. 불타는 장갑차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위목적에서 비조준사격을 한 것이다. 이것이 5.18광주사태 전과정을 통틀어 최초의 발포였다. -["5.18관련사건수사결과",검찰보고서,1995년 7월 18일,197-216쪽]-1980년 5월 19일 23:00시, 정웅 사단장은 기밀실에서 예비군훈련단장, 최웅 11여단장, 96연대장, 경찰국장 등과 작전회의를 했다. 익일인 5월 20일 오전에 증파되는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전남대를 기점으로 하여 전남도청의 서쪽을 담당하고, 11공수여단 3개 대대는 조선대를 기점으로 하여 전남도청의 동쪽을 담당하되 과잉진압을 자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3:40분, 2군사령관은 도시게릴라식 난동 행태에 대비하여 대대단위 기동타격대를 보유하여 과감하게 강타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충정작전지침을 하달하고 이적행위자는 단호하게 조치하고 선량한 학생과 시민은 보호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건물의 셔터를 내리게 하여 시위대가 도시게릴라식으로 건물을 이용하여 공격하지 못하게 할 것, 바둑판식으로 분할점령 할 것, 시위대 10명 이상이 모이지 못하도록 할 것, 총기 피탈자에 대해서는 엄중 처벌할 것 등의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1980년 5월 21일 무장시위대에 의한 광주교도소 무력습격이 있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 있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장갑차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시민군 사망자만도 28명에 달했다.1980년 5월 21일 폭도들은 20사단 지휘부를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무전기와 공용무기가 탑재된 위엄 있어 보이는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했고, 곧바로 일사분란하게 흩어져서 당일 12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산재한 38개 무기고를 일시에 습격했다.1980년 5월 21일 폭도들이 탈취한 무기는 카빈, M-1, 기관총 등 5,403 대, 소화기탄약 288,680발, 수류탄 270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 폭약 2,500여 상자, 뇌관 35만개, 4만여m의 도화선 등이었다. 779대의 차량이 탈취됐고, 이들 779대는 군용으로부터 탈취한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로 구성됐다. 정규군 2개 연대 규모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부근에서 발생한 총격전에서 사망한 민간인에 대한 통계는 95년 7월 18일자, 검찰의“5.18관련사건수사결과”105-106쪽에 33명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33명의 사망자 중 20명은 자상 등 다른 원인에 의해 사망했고, 13명이 총상에 의해 사망했다. 총상 13명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다.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70%가 시민군이 소유한 카빈소총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계엄군에는 카빈소총이 일체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무고한 시민을 쏘는 시민군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광주폭동 전과정을 통해 계엄군이 소지한 M-16에 의해 사망한 시민이 36명뿐이다. 이 중 12명은 신원미상자이다. (북한특수군 시체들일 가능성을 제기.) 그리고 그 36명 중 28명은 시위대가 6차례에 걸쳐 교도소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좌익수 170명을 포함해 2,700명의 수용자들을 해방시키려다 죽은 사람들이다. 날짜별 사망자 통계는 이러했다. 5월 18일에는 사망자가 없었다. 5월 19일에는 노동자 및 양화점 점원 2명이 타박상으로 사망했다. 5월 20일에는 7명, M-16 1명, 카빈 2명, 타박상 4명이다. 5월 21일에는 61명, 카빈총 16명, M-16 30명이었고 나머지 15명의 대부분은 타박상이고, 일부 기타 총상 및 자상이 있었다. 5월 22일에는 29명, 차량사 5명, 카빈 5명, M-16 16명 그리고 나머지 3명은 기타총상이다. 5월 23일에는 20명, M16 14명, 카빈 1명, 타박 2명, 기타총상 3명이다. 5월 24일에는 12명, M-16 8명, 카빈 1명, 타박1명, 자상1명, 기타총상 1명이다. 5월 25일에는 사망자가 없었고, 5월 26일에 타박상 1명이 발생했다. 마지막 날인 5월 27일에는 26명, M-16이 22명, 카빈1명, 화상1명(윤상원), 기타총상 2명이다. 카빈총 사망자를 날자 차례 별로 보면 0. 0. 2,16,5,1,1,1,0,0,1이고, M1-6 사망자를 날짜 차례별로 보면 0,0,1,30,16,14,8,0,0,22이다. 시내격전이 가장 치열했던 21일에 시민은 M-16에 의해 30명, 카빈에 의해 16명이 사망했다. 시민군 총에 시민이 맞아 사망한 것이다. 5월 21일은 양측 모두 이성을 잃고 감정이 극에 달해 있을 때이며, 군이 30명의 시민을 쏘는 동안 시민군도 16명의 시민을 쏘았다. 또한 5월 21일에는 10여정의 M-16이 이미 파탈되어 있어 M-16 사망자 모두를 군에 전가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날 시민들은 61구의 시체에 대해 분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20% 이상은 차량사고에 의한 사망한 사람과 시민군이 쏜 총에 의해 사망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전체 기간 중 차량사는 12명, 카빈사는 26명이다. 이 38명(23%)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군이 책임질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엄군이 시내를 완전히 떠나 있었던 5월 22일부터 26일 사이에 발생한 사망자 61명(37%)은 주로 시민군이 군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따라서 이 37%의 사망자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시민군이 져야 할 것이다.1985년 5월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광주사태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95-103쪽에는 사망자들에 대한 총상 분석 자료가 있다. 신원이 확인된 학생 및 민간인 사망자 152명 중 총상 사망자는 116명, 76.3%가 총상 사망자다, 총상 사망자 116명 중 36명이 M-16 총상이고, 80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이다. 즉 총상 사망자 중 69%가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인 것이다. 특히 시위대공격이 가장 치열했던 5월 21일 사망한 시민들을 보면 계엄군이 없는 곳들에서 많이 발생했다. 당시 계엄군은 도청앞과 전남대에만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이 끼어들 수 없는 급박한 전투 상황 속에서 총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신분을 확인할 수 없다. 위험한 작전지역에 나타나면 누구나 총구에 의해 오해를 받을 수 있고 피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5월 24일(토) 09:55분, 호남도로 광주인터체인지(IC) 부근에서 부대로 복귀하던 31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2/29)이 무장시위대의 사격에 응사하면서 고속도로로 진행하던 중 이를 시위대로 오인한 전교사 예하 기갑학교 병력이 오인사격을 가하여 96연대 소속 사병 3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2명과 군인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오후 효천역 부근에서는 매복하고 있던 전교사 보병학교 병력이 이동 중에 있던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하여 선두 장갑차와 후속 트럭에 90미리 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키고, 이에 63대대가 응사를 하는 과정에서 63대대 병력 9명이 사망하고 63대대장 등 군인 33명과 마을주민 3명이 총상을 입었다. 한국군이 한국군을 쏜 것이다. 이렇듯 전쟁터에 배치된 총구는 한사람 한 사람의 신분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억울하게 피해를 당했다는 말은 성립해도 계엄군이 일부러 광주시민만을 골라서 쏘았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5월 22일부터 26일에 걸쳐 시민군이 외곽으로 쫓겨난 계엄군을 일부러 쫓아가서 총으로 공격하다가 피해를 입은 이 61명에다 차량사 및 카빈사 38명을 보태면 99명(60%)이 된다. 전체 사망자의 60%에 대해서는 성격상 그 책임이 명백하게 시민군에 있어 보인다. 여기에 기타총상이 9명도 보태야 할 것이다. 기타총상이란 시민군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AR기관총, CAL50 기관총, M1소총 등 다양한 종류의 화기들이다. 계엄군에겐 오직 M-16만 있었다. 기타총상을 여기에 더 보태면 군이 책임질 수 없는 죽음이 108명(66%)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이 108명의 죽음에 대해 계엄군은 억울한 누명을 써온 것이다. 진압 직후의 계엄사 발표로는 교도소 전투에서 사망한 민간인이 28명, 부상자가 70명이라 했다. 계엄사측은 또“시내버스, 군경 차량 등을 마구 탈취한 폭도들이 시위를 선동하는 과정, 무기탈취를 위해 이동하는 과정, 그리고 음주운전 및 과속운전 등으로 인한 전복이나 충돌하는 과정에서 3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탈취한 소총, 수류탄 등 무기류 취급 미숙으로 인해 1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라남도 인들을 위해 계엄군이 지켜주던 도청 그리고 전남대로부터 살인적인 공격을 받다가 시외곽으로 철수하는 병력을 향해 총격을 가하다가 사망한 무장시위대들에 대해서도 계엄군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군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피해자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결국 모든 책임은 충돌 자체에 있는 것이다. 충돌을 일으킨 장본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본인은 누구인가? 검찰과 법원과 그리고 이른바 5.18정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장본인이 전두환과 정호용 등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반대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김대중, 복학생들, 재야세력, 유언비어를 퍼트린 세력,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광주시에서 계엄군을 잘못 지휘한 윤흥정과 정웅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편의 주장에 동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독자의 몫이다. 여기에서 숫자가 틀리고 맞는 것은 둘째 문제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계엄군과는 전혀 관계없이 발생한 피해를 전부 계엄군이 다 뒤집어 써왔다는 사실, 계엄군이 수세적 방자였고 시위대가 적극적 공자였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계엄군이 처음부터 광주시민을 싹쓸이 하려고 무자비한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매도되어 온 사실, 그리고 카빈소총 등으로 시민들을 쏘아죽인 사람들에 대한 정체에 대한 것이다. 언론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광주학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망자 수는 결코 한쪽 만에서 일방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쌍방충돌과 쌍방교전에서 발생한 것이다. 부상자 수를 비교하면 더욱 확연해 진다. 민간인 부상자 수는 377명, 군인 부상자수는 117명, 경찰 부상자수는 148명이다. 군경을 합치면 265명이다. 부상자 수의 비율은 민간 대 군경이 1.4: 1인 것이다. 쌍방이 엇비슷한 것이다. 이를 두고 군경이 일방적으로 시민을 공격하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한편 23명의 계엄군 사망자는 5월 20일에 1명, 21일에 3명, 22일에 3명, 23일에 1명, 24일에 11명, 25일에 1명, 27일에 2명, 28일에 1명이다. 21일 전사자는 3여단 16대대의 정관철 중사로 계엄군의 차량에 깔려 즉사했고, 21일 및 22일의 전사자 6명은 계엄군이 철수하는 도중 시위대의 사격을 받아 발생했고, 24일의 11명은 교도대로부터 오인사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리고 나머지 전사자는 광주시 재탈환작전에서 발생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동안 언론들로부터 나온 왜곡되고 산만한 자료들만을 가지고 5.18에 대한 지식을 나름대로 형성해 왔다.5.18을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찬탈하기 위하여 전두환이 일으키고 획책한 광주 말살 작전이라고 믿는 것은 전라도 사람들의 굳은 신앙이다.5공세력을 처벌하기 위해 작성된 검찰의 5.18 수사기록에는 신군부가 광주작전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없고, 광주작전의 지휘계선 상에 있었던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소준열 계엄분소장은 법정에 나와 광주작전에 신군부가 개입한 바 없다고 잘라서 증언했다. 5.18 반란 당시 전두환은 계엄령 하에서 수사반장 임무를 수행했던 2성장군에 불과했다. 5.18은 당시 전두환이 간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전두환과 5.18 사이는 사돈의 팔촌 사이도 아니었다. 5.18 진압은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진종채 2군사령관과 전교사 사령관으로 연결된 군 통수체계에 의해 수행됐다.----------------------------------------------------------------------------------------------------------------------------------꽤 읽어볼만한 글인거 같습니다글 마지막부분처럼 판단은 여러분들의 몫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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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노무현 외교실패! ㅉㅉ
MB의 자원외교, 무모한 도박했나’ 조회수 : 14,599 |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이명박 정부 자원외교’의 가장 큰 문제는 ‘무지’이다. 자원외교 대상 국가가 안고 있는 심각한 정치·군사·경제적 리스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무모한 도박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국유화 바람에 광산 개발 '흔들'MB 자원외교의 허와 실-볼리비아볼리비아는,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의원이 팔순을 바라보는 노구를 이끌고 세 차례나 방문할 정도로,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팀이 집중한 곳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볼리비아는 리튬과 구리로 주목받는 ‘자원의 보고’로 그만큼 국제적인 경쟁도 치열한 곳이다. 이명박 정부도 양해각서(MOU)만 다섯 차례 체결하고 나서야 겨우 볼리비아의 리튬 자원에 접근할 수 있었다. ⓒ청와대사진기자단2009년 5월 이명박 대통령이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2개국 방문에 나서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공기업인 한국광물자원공사는 국내 4개 기업과 컨소시엄(KCC-한국 컨소시엄)을 구성해 볼리비아 최대 규모인 코로코로 구리광산 개발권을 따내는 개가를 올렸다. 또한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이 2010년 8월 한국을 방문해서 이명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등 적어도 ‘볼리비아 자원외교’만은 탄탄대로에 서 있는 듯했다. 그러나 최근 광물자원공사가 구리광산 사업에서 철수할 계획이고 이 때문에 리튬 개발 사업까지 불안해졌다는 식의 소문이 난무한다. 이는 무엇보다 볼리비아의 ‘정치적 리스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지난해 12월30일,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 있는 스페인 소유 전기배급회사 엘렉트로파스와 엘페오 앞에는 경찰이 배치되었다. 이 회사 임직원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국유화를 알리는 경고문이 회사 정문에 붙었다. 볼리비아 정부가 에너지 부문 외국 기업에 대한 국유화를 단행한 것이다.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하루 전날 이 두 회사를 국유화하는 포고령에 서명했다. 모랄레스는 “이번 조치는 에너지 부문에서의 합당한 세원 확보와 낙후된 지방에 대한 전기 공급 개선을 위해 필요하다”라고 국유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원 소유주인 스페인 자본이 적절한 보상을 받는다는 보장은 없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자산평가 결과에 따라 소액을 배상하거나 아예 배상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못 박았다. ⓒAP Photo지난해 12월30일 볼리비아에 있는 스페인 소유 전기배급회사에 경찰이 배치되었다.볼리비아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대다수의 공공서비스 및 자원 공기업을 외국 자본에 넘겨야 했다. 그러나 2000년대 초·중반에 접어들면서 외국 자본의 공공시설 운영에 대한 대중의 반발 분위기가 형성된다. 더욱이 볼리비아는 역사적으로 해외 착취자에게 자원을 약탈당한 뼈아픈 기억이 있다(1500년대 스페인의 잉카제국 황제 처형과 뒤이은 약탈 등). 2005년에는 볼리비아의 노동총연맹(COB)이 천연가스 및 석유의 전면 국유화를 요구하면서 총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남미 좌파의 지도자로 불리는 모랄레스는 이런 분위기를 타고 ‘국가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걸면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더욱이 모랄레스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다. 모랄레스의 ‘멘토’라 할 수 있는 차베스 역시 해외 자본 소유의 석유산업을 국유화한 뒤 그 수익금을 복지에 투입해 서민의 절대적 지지를 얻은 인물이다.이에 따라 모랄레스 대통령은 2006년 1월 집권한 뒤 매년 노동절마다 국유화 조치를 발표한다. 2007년 노동절에는 브라질 기업 소유의 정유시설을, 2008년에는 이탈리아 자본 소유의 통신회사 엔텔을 국유화했다. 2010년 노동절 기념식에서는 서방 자본이 큰 지분을 가진 기업들을 국유화하겠다고 통보했다. 해마다 노동절은, 볼리비아에 투자한 외국 기업들에게는 ‘살생부’가 발표되는 날이다.노동절마다 외국 기업 ‘살생부’ 발표한국 컨소시엄(KCC)은 볼리비아 광업공사인 코미볼과 함께 코로코로 광산 개발을 진행 중이다. 한국 측은 이 프로젝트에 탐사 및 개발비용으로 2억1000만 달러(약 2283억원)를 투자하는 대신 30년간 이 광산의 운영권과 생산물 처분권을 보유하기로 했다. 이익은 한국과 볼리비아가 45대55로 분배한다. 문제는, 언제 국유화 바람이 이 부문까지 불어닥칠지 현재로는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자원개발로 인한 환경오염이 새로운 시빗거리로 떠오르는 중이다. 얼마 전 볼리비아 코차밤바에서 열린 환경보호 관련 국제회의에서는 현지 NGO 및 국제단체들이 자원개발 등 산업화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 회의에서 환경오염의 대표 사례로 떠오른 사업이 바로 볼리비아 포토시 주의 산크리스토발 광산 개발이다. 일본 스미토모 사와 볼리비아 현지 법인이 합작 개발하는 이 광산은, 볼리비아 광물 수출량의 55%를 점유할 정도로 규모가 큰 사업이다. 스미토모는 이 광산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지하수를 50만ℓ나 빼냈는데 이 때문에 일대가 물 부족으로 황폐해졌다는 것이다. 볼리비아 환경론자들은 코로코로 구리광산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2011년부터 반대 활동을 벌였다. 한국 정부와 자본이 리튬 광산을 개발하고 있는 유우니 사막 일대에서도 현지인들이 시위나 도로 봉쇄에 나서는 등 반발이 거세다. 실제로 2010년, 유우니 소금사막을 시찰하러 갔던 한국 대표단이 이 반대 세력들에게 하루 동안 억류된 적도 있다. 볼리비아의 한 환경론자는 “잉카 제국 때부터 수백 년간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자원 개발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어떤 외국 기업도 이런 반대를 무릅쓰고 볼리비아 자원을 캐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떡 줄 콩고 정부 제 코가 석자콩고민주공화국이명박 정부는 2009년 아프리카 서중부의 콩고민주공화국(콩고)과 ‘바나나(Banana)항 개발협력에 대한 양해각서(MO U)’ 및 ‘건설 분야 협력과 관련한 MOU’를 체결한 바 있다. 이른바 ‘패키지 딜’이다. 한국이 콩고에 항구 등 사회간접자본(SOC) 건립을 지원하는 대신 콩고 정부는 한국 측의 코발트·다이아몬드·콜타르·구리 등 자원개발에 협력해야 한다. 그런데 이 콩고민주공화국은 ‘아프리카의 화약고’로 불리는 분쟁의 땅이다. 2003년 종결된 ‘제2차 콩고 전쟁’(1998~2003)에서만 400만명 넘게 사망했다. 그러나 이 ‘죽음의 땅’이 가진 석유 매장량은 무려 1억8000만 배럴에 이른다. 구리·주석·다이아몬드 같은 천연자원도 풍부하며 광대한 열대우림이 있다. 휴대전화나 배터리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광물인 콜타르는 전 세계 생산량의 70%가 콩고에서 나온다. 이런 풍부한 자원을 두고도 콩고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00달러 수준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IMF 기준)다. 이런 천혜의 나라가 최빈국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그 ‘하늘이 내려준 혜택(자원)’ 때문이다. ⓒ뉴시스2008년 3월 콩고에 농업투자를 원하는 한국 투자회사와 콩고 대사관 측의 간담회가 열렸다.콩고의 근대사는 이 나라의 엄청난 자원을 둘러싼 폭력의 역사다. 1880년대 초, 콩고를 점령한 벨기에는 무자비한 착취와 탄압으로 수백만 콩고인을 학살했다. 이렇게 해서 벨기에가 취한 노획물은 생고무로, 이 ‘죽음의 고무’는 벨기에로 가서 자전거 바퀴 등 각종 생필품으로 쓰였다. 콩고는 1960년에 이르러서야 벨기에로부터 독립하지만, 살육은 계속됐다. 1997년 카빌라 대통령이 집권한 뒤 ‘제2차 콩고 전쟁’이 터졌다. 2001년 1월, 카빌라가 경호원에게 암살당한 뒤 그의 아들 조제프 카빌라가 대통령을 승계했으나 지금도 콩고에서는 이름도 생소한 이런저런 반군들이 울창한 밀림 속에서 반정부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방화, 성폭행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해 11월20일, 반군들은 콩고 동부의 주요 상업도시인 고마 시를 점령한 뒤 1600㎞ 떨어진 수도 킨샤사까지 진격하겠다고 콩고 정부를 위협했다. 콩고에는 유엔 평화유지군 1500명이 파견되어 있지만 이들 역시 제구실을 못한다. 콩고 정부와 반군 사이에 개입하기를 꺼리는 것이다. 지난해 5월에는 콩고 주민들이 유엔 평화유지군에 총격을 가해 최소 11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이유는 우습게도(?) 반군이 민간인을 살해하는데도 유엔 평화유지군이 방관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격분해서 오히려 유엔군을 공격한 것이다.그런데 이런 반군 뒤에는 인근 국가인 르완다와 우간다 등이 있다. 이웃 나라들이 반군을 돕는 이유는 결국 자원을 갈취하기 위해서다. 반군들은 콜타르 같은 광물자원을 절취해서 자신들을 지원하는 르완다 같은 나라로 밀반출한다. 콜타르 광산이 없는 르완다가 지난 18개월 동안 콜타르 수출로 2억5000만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었던 비결이다. 반군들은 이런저런 대의명분 때문에 싸운다고 장광설을 늘어놓지만 진정한 이유는 자원이다. 반군들의 목표는 광물 자원이 풍부한 콩고 동부에 대한 통제권인 것이다. 그래서 콩고 광물 자원의 시장성이 높아질수록 반군의 조직과 규모도 커지고 학살이 벌어질 위험 역시 높아진다.유엔, 콩고산 콜타르 매입 제재 나서2010년 6월, 미국 워싱턴에서는 아이폰4 출시에 맞춰 애플에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생산된 광물질을 사용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대중 시위가 벌어졌다. 애플 이외에도 인텔이나 모토로라, 노키아, RIM 등 세계적인 전자회사들이 골치를 앓고 있다. 이 운동을 주도하는 시민단체 ‘이너프(Enough)’는 휴대전화나 컴퓨터 등에 들어가는 주석·텅스텐·탄탈·금 4가지 광물 중 상당량이 현재도 대량학살이 벌어지는 콩고에서 채굴되어 전 세계의 전자부품 회사에 흘러들어간다고 주장했다. 이너프의 관계자는 “당신의 휴대전화에는 콩고산 콜타르가 들어있을 확률이 높다. 당신은 ‘콩고의 눈물’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최근 유엔은 국제적인 IT기업들이 콩고산 불법 콜타르를 매입할 수 없도록 제재에 나섰다. 미국도 콩고 반군의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계획이다. 이에 따르면, 미국에 수출하려는 기업은, ‘콩고와 그 인근 10여 개국 산 광물을 쓰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출해야 한다. 심지어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는 이 같은 내용에 대한 보고를 애플 등 상장 기업들에게 의무화할 예정이다. 콩고 등 분쟁 지역 광물을 사용한 전자제품은 아예 미국 내 유통을 막겠다는 의미다. 콩고 현지 소식통들에 따르면 반군 세력이 갈수록 강해지면서 카빌라 정부의 전복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지난해 11월 반군이 고마 시를 접수하기 불과 며칠 전에 한국 정부 인사들은 장동건 등 유명 배우와 함께 해당 지역을 방문하기까지 했다. 콩고 정부가 부들부들 떠는 상황에서 감행했던 이 행보는 ‘무지’에서 나온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처럼 이명박 정부의 ‘콩고 자원외교’는 ‘허약한 파트너(콩고 정부)’, 상황에 대한 몰이해, 자원개발에 성공한다 해도 그 성과가 국제적 제재에 따라 무산될 수 있는 리스크 등을 무시하고 강행되어 왔다는 점에서 무모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독재자와 손잡고 도박에 다걸기우즈베키스탄1992년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우즈벡)이 무역협정을 체결한 이래 이명박 정부 때처럼 양국 관계가 돈독한 적은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카리모프 대통령의 남다른 친분과 교류가 이를 보여준다. 2012년 9월20일 청와대에서 개최된 단독정상회담에서 카리모프 우즈벡 대통령은 “이번이 일곱 번째 한국 방문이다. 이렇게 자주 방문한 나라는 없었다”라며 한국에 친밀감을 표시했다. 이 중 네 번의 방한이 MB 정부 때 이뤄졌다. 2011년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외교전문에 따르면, 주한 미국 대사관은 이명박 대통령과 카리모프 대통령의 관계를 ‘훌륭한 화학적 결합관계’로 묘사했다.양국 지도자를 이어준 매개체는 표면상으로는 ‘자원’이다. 언뜻 보기에는 한국 기업의 진출을 원하는 우즈벡과 중앙아시아의 풍부한 자원을 원하는 한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내는 그리 단순치 않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20년이 넘게 장기집권 중인 독재자로 전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특히 우즈벡의 악명 높은 고문과 집단학살, 국가 주도적 아동 착취 등을 의식해 서구 기업들은 우즈벡 진출을 꺼린다. ⓒ국무총리실 제공2008년 5월 자원외교 순방에 나선 한승수 국무총리(가운데)가 우즈베키스탄의 광산을 시찰하고 있다.우즈벡 인권 상황 외면하는 정부하지만 한국은 달랐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 세계적 ‘왕따’ 우즈벡에 선뜻 손을 내밀고 끊임없이 투자 아이템을 제시했다. 카리모프 대통령으로서는 우즈벡의 인권 상황을 문제 삼지 않고, 자국의 각종 국책사업에 뛰어드는 한국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2009년 이 대통령이 2박3일 일정으로 우즈벡을 찾았을 때 카리모프 대통령이 모든 일정에 동행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카리모프 대통령의 이 같은 행동을 두고 외교가와 취재진 사이에서 ‘24시간 밀착외교’ ‘스토킹 외교’란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시 방문에서 우즈벡과 △수르길 가스전 개발 협력 △신규 광구 탐사 협력 △알마릭 광산 개발 협력 △나보이 특구건설 지원 등을 약속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 중 광구 탐사와 광산 개발 등은 ‘경제성 부족’으로 이미 종료됐다. 수르길 가스전 개발은 양국 정상이 가장 열성적으로 벌인 사업 중 하나이다. 우즈베키스탄 아랄 해 남쪽에 위치한 수르길 가스전을 개발하고 석유화학 공장을 짓는 사업으로 총사업비가 40억 달러(약 4조3600억원)에 이른다. 그런데 수르길 프로젝트 수주에 결정적 구실을 했던 수출입은행이 2012년 국감에서 호된 질타를 받았다. 우즈베키스탄의 신용등급을 10단계 중 7단계인 D1, 즉 투자 부적격으로 분류해 놓고도 지난해 3월 이 사업에 직접 대출 7억 달러, 채무 보증 3억 달러 등 총 10억 달러의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여신을 승인한 것이다. 2011년 9월20일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은 경제협력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우즈벡 정부로부터 ‘도스트릭(우정)’ 훈장을 받았다. 2008년 한진그룹은 우즈벡 정부와 ‘나보이 국제공항 공동개발 프로젝트’ 계약을 맺고 2009년부터 공항을 위탁경영했다. 대한항공의 위탁경영 이후 나보이 공항의 매출과 위상은 눈에 띄게 높아졌다. 하지만 나보이 공항이 미군의 아프간 전쟁 물자 보급로로 이용됐다는 사실은 우즈벡 정부가 숨기고픈 불편한 진실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카리모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이 내용을 문제 삼은 적은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국제사회는 도대체 한국이 왜 이토록 우즈벡 투자에 몰두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중앙아·독립국가연합(CIS) 전문 인터넷 사이트 ‘유라시아넷’은 지난해 6월5일 “우즈벡의 여러 경제 지표를 보면 한국의 투자자들은 절대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이 우즈베키스탄을 끌어안는 것은 장기적 관점에서의 투자라기보다는 도박에 가깝다”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아.. 미안. 이명박이네~ ㅋㅋ
노동쟁의작성일 2013-02-23추천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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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대통령이 되기까지 -전두환-
대한민국 제11대, 제12대 대통령 전두환(全斗煥) 1931. 1. 18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 율곡면 내천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인 전상우는 의리가 강하여 빚 보증 서줬다가 쫓기는 신세가 된다.어머니인 김점문은 전두환에게 기대가 컸는데, 지나가는 승려가 김점문에게 말하기를"당신의 튀어나온 앞니가 아들의 앞길을 막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곧장 자신의 앞니 3개를 쇠집게로 뽑아버린다전두환의 형인 전열환은 고향친구들과 놀다가 사망,마찬가지로 형인 전규곤은 추락사고로 사망하게 된다전두환이 초등학교에 재학중일 때, 아버지 전상우는 횡포를 부리는 일본 순사를 때려 눕힌다.그러나, 보복이 두려워 그 날로 짐을 싸 일가족을 데리고 만주 지린성으로 피난을 간다.2년 후에 전두환 일가는 귀향했고 전두환은 자신이 다니던 호란보통소학교(현재 존재여부 확인 불가)를 졸업하고대구공업중학교,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한다.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자 고등학생 전두환은 스스로 학교의 야간 순찰을 담당한다.1951년 2월,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학비가 전혀 안 드는 육군종합학교에 진학하려 하였으나형인 전기환이 군에 있는 이유로 부모가 반대하여 진학하지 못 하였다.그러나 전두환은 1951년, 후방에서 국비로 공부할 수 있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전두환은 축구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고, 육사 생도 시절에 골키퍼 포지션을 맡았었다.전두환은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에 축구 국가 대표 감독인 박종환을 불러 작전을 지시할 정도로 축구광이었다.육군사관학교에서 전두환은 노태우를 만나게 된다.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 재학 시절에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을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우연히 육군 대령 이규동의 관저에 드나들다가 이순자를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청혼하여 결혼을 하게 된다.전두환은 자신의 형제들 중 경제력이 가장 나았기에 자신이 부모를 모시게 된다.1959년 2월, 전두환은 미국으로 건너가 특수전 교육, 심리전 교육, 레인저 교육을 받고 귀국한다.1961년 5월 16일, 5.16군사혁명이 발생하자,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인 박정희에게 찾아가서육사 생도가 주도하는 '군사혁명 축하 기념 퍼레이드' 에 대해 허락을 구한다.박정희는 전두환의 요구를 받아들여줬고 퍼레이드는 성공적으로 진행된다.이 일을 계기로 하여 전두환은 박정희의 눈에 들게 된다. 1962년, 전두환은 소령의 계급으로 있었던 때에 하나회를 조직하고 가담해, 군부 내의 인맥라인을 형성한다.박정희가 차지철, 전두환 등 군인 세력을 정치권으로 영입하려 하자차지철 대위는 이에 응해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전두환은 박정희에게"각하, 군 내에서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하나 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며 국회 입성을 포기한다.이에 박정희는 전두환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전두환을 특별히 대하게 되었다.1970년, 전두환은 육군 대령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전두환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이래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다만, 식수가 부족함에도 불가하고 자기 혼자 따뜻한 물로 씻거나암거래 시장에서 무기를 사와 전리품으로 보고하는 등의 오점을 보이기도 했다.정부에서는 전두환에게 훈장을 내리려 했지만, 월남전에서의 전두환의 직속 상관들은 훈장 수여를 반대했었다.1978년, 제1사단의 사단장을 맡게 되었는데 사단장 재직중에 북괴의 제3땅굴을 발견하는 공을 세우게 된다.1979년 3월, 보안사령관이 되어 중앙으로 복귀하게 되었는데 전두환과 차지철은 겉으로는 친해보였으나 속으로는 원수관계였다.그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었던 차지철은 국회로 갔으나, 전두환은 군에 잔류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었다.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하자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를 설치, 진상조사에 나선다.1979년 10월 27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박정희 대통령 암살 혐의로 체포하였다.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은 노태우를 비롯한 하나회 소속 동료들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킨다. (12.12쿠데타)박 대통령 시해 사건 때 현장에 있었던 비서실장 김계원, 계엄사령부 사령관 육군 대장 정승화가 체포되었고이 과정에서 김오랑 육군 소령이 전두환 측 군인이 쏜 총에 맞사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사진에 보이는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신군부의 쿠데타 소식을 접하자"야,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너희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지금 전차를 몰고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다날려버리겠어! 역적놈의 새끼들!"(제5공화국대사)그러나 결국에는 전두환 측에 의해 체포된다.1980년 5월 18일, 518사태(사태
(事態) [사ː태] 다른 뜻(6건) 맞춤법·표기법
[명사]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이나 상황. 또는 벌어진 일의 상태)가 발생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진압되었고 1980년 8월 6일,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다.최규하 대통령은 하야했고 결국 전두환 혼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전두환은 장충 체육관에서 대의원으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 선거로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된다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간접 선거로 당선된다위키백과를 참조했다고함
예상x응님의 글 첨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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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5.18에 사전적의미~
5월달이 지났는데 짱공유 "정경사"에서 5.18 관련 글이 올라와서 살짝 정리해봅니다~
사전적의미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내용을 꼭 필독 하시길~
사전적의미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혹은 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돼,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1] 당시 광주 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 파괴∙민주화 역행 조치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진압 훈련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과격진압했다. 2011년 5월에는 5·18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ac)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었다.
개요
1979년 10.26 사태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 같은 해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1980년 초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k-공작 계획을 실행하며 언론을 조종·통제했다. 같은 해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돼 국내의 정보 기관을 모두 장악하며 집권을 준비했다. 1980년 5월부터 정치 참여 의도를 드러내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전두환, 신현확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같은 달 국회에서는 계엄 해제 논의, 개헌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정국 운영에 방해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계엄 포고령 10호를 선포해 정치활동 금지령∙휴교령∙언론 보도검열 강화 등의 조치를 내렸다.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의 재야, 야당 인사를 감금하고 군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다. 5월 18일 아침부터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김대중∙김영삼 석방과 신현확∙전두환 퇴진을 외치면서 시위를 했다. 전두환∙노태우 등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는 부마항쟁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 공수부대 등의 계엄군을 동원해 진압했다. 신군부는 1980년 초부터 전 군에 충정훈련을 실시했고, 5월 초부터 군을 사전 이동 배치하고 군대를 투입해 신군부에 반발하는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마쳤다.
5월 18일 16시 이후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운동권과 무관한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은 5월 21일 13시경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후 철수했다. 이 날 저녁 광주광역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자나 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발생했다. 5월 27일 0시를 기해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했으며, 무력으로 도청을 점령했다.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호남 전역에서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그 결과 전두환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은 물론이고, 민주정의당과 연관성이 있는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도 여전히 높다. 당시 신군부는 언론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관제보도를 의무화하도록 해 언론을 장악하고 조종했는데, 미국대사과 주한미군 사령관 등의 관련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 언론이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승인했다는 왜곡 보도를 쏟아내자 학생운동권 내 미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이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비롯,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발생한 각종 민주화 혹은 반미 집회와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신군부 인사를 주축으로 한 제5공화국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 또는 김대중의 사주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왜곡했다. 1988년 제5공화국 비리 청산 분위기와 맞물려 열린 국회 광주진상특위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면서 재평가가 가시화됐으며,[3][4] 1996년 검찰의 수사에 의해 신군부 인사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 의도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책임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1997년 대법원이 5·18, 12·12 진압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됐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피고인(전두환 등)의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대법원은 전두환·정호용·이희성·황영시·주영복 등을 5.18 민주화운동 진압 책임자로 판시했다.[5]
대한민국의 신군부 및 일부 반공주의 우익 세력 등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혹은 김대중의 사주로 일어난 폭동 내지는 소요사태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6], 일부 조선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발생한 대부분의 유혈사태가 단순한 계엄군-시민간의 충돌이 아니라 북조선의 조선인민군 특수부대의 공작으로 발생한 계획적인 테러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설득력이 매우 낮다. 5·18, 광주항쟁(光州抗爭), 광주학살(光州虐殺), 광주사태(光州事態), 광주민중봉기(光州民衆蜂起), 광주시민항쟁(光州市民抗爭), 광주인민봉기(光州人民蜂起) 등의 다른 칭호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편집] 명칭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또는 ‘폭동’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됐다.[7][8] 이는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신군부의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됐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 인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8년 제6공화국이 등장하면서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그렇게 불러 처음 나왔고,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화 됐다. 한편, 신군부의 군사독재와 폭력에 맞선 민중항쟁을 광주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 항쟁’이란 명칭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을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사용됐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다. 기타 중립적인 ‘광주 항쟁’, ‘광주 민중 항쟁’,‘광주 의거’, ’광주 자유 민주 의거’, ’광주 민주 의거’, ’광주 자유 의거’,‘광주 인민 항쟁’ ,‘‘광주 학살’, ‘광주 학살사건’,‘5월 항쟁’,‘5·18 민중항쟁’,‘광주 시민 항쟁',‘광주 민중 항쟁’ ,‘광주 민중 봉기’ ’광주 양민 학살사건’,‘5월 민중 항쟁’,‘5.18 민중 항쟁’ 등의 다른 명칭도 존재한다. 한편 일부 반공주의 보수 세력은 광주민주화운동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광주사태’, ‘광주사건’, ‘광주반란’, ‘광주소요사태’, ‘광주무장폭동’,‘광주폭동’ 등으로도 부른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광주봉기’, ‘광주인민봉기’, '영웅적 광주인민봉기', '광주폭동' 등으로 평가한다.[9][10][11][12]
[편집] 발생 배경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이후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민주적인 헌법으로 되돌아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고, 11월 7일 최규하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해제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됐던 개헌 논의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육군 참모총장)를 체포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0년 2월 신군부 세력은 k-공작계획을 실행해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가고 있었다.
1980년 5월 초순경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13]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해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저항를 탄압하면서 신군부가 정국을 주도하고, 국회 폐쇄와 정치인 체포로 신군부의 안정적인 정국 장악을 담보한다는 것이 시국수습방안 기획 의도였다.
중앙정보부는 일본 내각조사실의 첩보를 토대로 5월 10일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5월 11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북괴남침설’과 같은 첩보는 가치가 없다고 결론내린 상황이였다. 5월 13일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과 미국 국무부의 한 대변인는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해 흘린 정보라고 평가했다.[14]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고 밝혀 신군부가 집권을 정당화 하기 위해 악용했던 ‘북괴남침설’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15]
한편 같은해 5월 중순부터 정부와 국회에서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5월 12일 신민당과 공화당 양당 총무들은 개헌안 접수하고, 비상계엄 해제 등의 정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5월 20일 10시 임시국회의 소집을 공고했다.[16] 같은날 신현확 총리는 국회와 협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개헌 일정을 앞당긴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17]
1980년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의 정치 참여를 반대하기 위해, 지상 서울역 주변에서 학생들의 자발적인 집회가 있었으나 5월 15일 경찰의 진압 소식이 전달되면서 스스로 해산했다. 5월 17일 24시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려 18일 1시 부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같은 날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해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됐고, 6백여 명의 학생·교수·재야인사 등이 체포됐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무장헌병들에 의해 가택 연금됐다. 신군부가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내린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정치 활동 금지·휴교령 등의 민주주의 역행 조치에 항의해, 5월 18일 오전 전남대 학생들은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했고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폭행으로 진압했다. 과격한 부대인 공수부대의 투입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정동의 모략’이란 소주제에서 이미 1980년 1월초 서울 정동 미대사관에서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과 미8군사령관 등이 모여 5·18을 ‘난동’과 ‘소요’로 유발시키려는 음모를 꾸민 뒤 지도인물로 김대중(金大中)씨를 내정했다고 음모 의혹을 제기했다.[18]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과 군부독재자들의 책동에 격분해 들고일어났다.[19] 하지만 1996년 있었던 검찰 수사에 의해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와 시위 진압 계획이 밝혀진 것과 달리[13], 김대중과 미국이 학살의 배후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에 실질적인 증거는 없다.
[편집] 과격진압의 배경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이루어질 조치에 대한 반대 집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전두환(보안사령관)·황영시(육군참모차장)·정호용(특전사령관) 등 신군부 핵심세력은 진압병력 투입 및 강경진압 방침을 결정했다. 시국수습방안은 계엄 확대와 동시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과감한 방법의 타격으로 시위대를 진압한다는 지침이 즉각 실행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20]
1980년 3월 4일 ~ 3월 6일 수경사에서는 '제1차 충정회의'에서 군의 투입을 요하는 사태 발생시 강경한 응징조치가 필요하다고 내려졌으며, 이미 80년 초에 학생 시위가 가열될 것을 대비해 전국 군 부대에 충정훈련이 강도높게 실시됐다. 5월 10일부터 2군사령부에서는 광주·대전 등에 제7공수여단을 배치하는 방안을 의논했다. 5월 14일부터 제31사단은 광주 지역의 주요 보안 목표를 점거했기 시작했으며, 5월 15일 제7공수여단은 광주·대전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광주 시내에서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등 체포 위주로 진압하라는 상부의 지시는 공수부대원들의 과격진압을 부채질했다. 광주에서 시위가 계속되자 계엄부사령관인 육군 참모차장 황영시는 강력하게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5월 18시 23:00부로 2군사령관의 강조사항이 각 공수부대에 지시됐다. 이 지시는 “공수부대 시내 출동, 융통성 있게 운영”하며, “전 가용 작전부대 투입”하여 “주모자 체포”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같은 날 내려진 지시는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하며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토록 지시했다. 이같은 지침은 현장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에게 더욱 더 과격한 진압에 나서게 했다.
계엄사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김대중 연행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불순분자’나 ‘고첩’들의 책동으로 몰아갔다. 5. 21.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에서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다”고 규정했다. 이렇듯 사실을 왜곡한 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시위를 규정하는 상층부의 인식과 지침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요인들 때문에 현장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 또는 시위대를 ‘적’으로 규정했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결과적으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과격진압을 하는 배경이 됐다. [21]
[편집] 전개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던 전남도청 별관
[편집] 전체 개요
[편집] 사건 초기
[편집] 5.17 조치 이전 계엄반대시위
1980년 5월 15일에는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했다.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은 집권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반대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다. 이에 따라 5월 17일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다. 새벽 0시경 보안사령부는 야당 인사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체포해 감금했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국회를 점령해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자정 이후 전국으로 비상계엄령이 확대됐고 광주에 제7공수부대 33대대, 35대대 병력이 도착했다. 제7공수부대는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을 점령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각기 조를 편성해 광주 시내 각 학교의 입구를 지키고 검문검속했다.[22] 계엄포고령 제10호가 선포돼 대학휴교령∙보도검열강화∙정치활동금지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13]
[편집] 대학생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8일 당일 아침 9시 이후, 텔레비젼 방송과 라디오, 신문을 통해 비상계엄 전국확대 소식을 보도했다. 18일 오전전남대학교 학생 100여 명은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원에 항의했다. 이로 인해 대학생과 공수부대원 간 충돌 발생했다. 학생들은 구타당했고 공수부대의 구타에 자극받은 전남대학생 300여명은 교문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투석했고, 일부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했다. 전남대학생 300여명은 가톨릭 회관 집결해 시위했고, 이에 경찰은 최루탄 발사하며 해산했다.
5월 18일 오후 4시 제7공수여단이 시내에 투입됐다.[23] 제7공수여단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검문검색과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24]
이날 희생된 청각장애인 김경철씨는 공수부대에 의한 대표적인 과격진압 사례였다. 그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25]
[편집] 전개 과정
[편집] 광주 시민의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과 고등학생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학생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폭증했고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했다.[25] 일부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 직접 항의를 가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20일 24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22]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다.[26]
[편집] 계엄군의 발포 및 광주 시민 학살
5월 21일 오전 전남도청과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21일 오전 시민 대표는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됐다. 전남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확*로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 철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1일 정오 12시경 전남대 앞·21일 오후 1시경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도청 집단 발포 이후,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수협·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가했고 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25] 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정부는 광주 지역의 시위를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자유 민주화 시위대는 광주mbc 방송국를 방화했다.
[편집] 광주 시민의 항쟁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이 결성됐다. 시민들은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세아자동차에서 차량을 탈취했다. 일부 시민군은 26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됐다.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다. 21일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21일 저녁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전달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오후 7시 보안사에서 전달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이 발표했다.
[편집] 광주외곽봉쇄작전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5월 21일 21시 30분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을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27]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송암동 학살을 비롯한 시민 살상 행위가 광주 외곽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편집] 광주 시민의 자치
22일 이후 광주는 군인들에 의해 완전 포위·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됐고 전국 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외신기자들에 의하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치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시민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준다. 다함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광주의 상점가, 금융기관, 백화점에서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었다.[28]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던 이 기간에 광주 시민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켜나갔으며 대치 상태는 26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시민 자치 기간에도 광주 시민의 협력으로 행정기관의 역할이 상당부분 유지됐다. 당시 전라남도부지사 정시채를 비롯한 공무원도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했다. 공직자들은 5.18 당시 양곡 방출이나 부상자 처리 등의 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29][30] 이 기간은 ‘광주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부 지식인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프랑스 시민들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편집] 평화집회
해방광주로 불리는 동안 일부 시민들은 스스로 계엄사에 무기 자진반납을 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하며 계속 무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수차례에 걸친 내부 대책회의와 협상 끝에 계속 무장을 해야 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평화적 시위는 계속됐고 〈애국가〉와 〈울밑에선 봉선화〉 등을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광주 시민은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이 구호는 광주 시민들에 의해 많이 불렀고,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31]
[편집] 광주 재진입 작전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시작됐다. 5월 27일 새벽 2시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발을 사격해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다. 도청 내 일부 시민군은 자진 투항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쟁 의견으로 나뉘어졌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채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시민군 생존자를 체포·연행했고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편집] 미국 측의 반응
대한민국 측은 5월 18일 0시에 시작된 비상계엄 확대 선포 2시간 전에 갑작스럽게 이를 미국에 통보했다. 미국은 한국군 당국이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대학과 국회를 폐쇄하려는 의도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 5월 18일 오전 미국은 서울과 워싱턴에서 계엄령 실시에 대하여 강력하고 맹렬하게 항의했다.[32]
계엄사령부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동원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광주에 투입될 당시나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광주에 투입되었던 한국군의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었던 적이 없다. 20사단의 경우, 10·26 사건에 뒤따를 혼란을 대비한다는 대한민국 측 요청에 따라, 10월 27일 20사단 포병대와 예하 3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 넘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특전사 부대가 광주에 배치된 것을 사전에 몰랐으며, 작전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32]
미국 측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초기에 방관적이었다. 5월 18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주미 대사관으로 부터 미국 국무부로 타전된 전문에서는 광주에 대한 언급이 없다. 5월 20일까지만 해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미국 측의 인식은 막연한 소문에 불과했고, 공수부대의 광주 과잉진압 문제는 서울에서 일어났던 신군부에 의한 정치탄압 사건에 비해 우선 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미국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건 5월 21일 부터 였다. 이 때는 이미 5.18 민주화운동의 비극의 씨앗이 된, 시위 군중에 대한 강압적인 진압이 이뤄진 후 특전사 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시점이었다. 미국은 이후 광주사태에 대한 평가에서 첫 무력 진압이 이루어진 18일이나 27일의 전면 재진압보다는 5월 21일을 사태의 정점으로 파악하고 있다.[33]
5월 21일 이후 미국은 신군부와 신군부에 반대하는 대한민국 국민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입장 표명의 압력을 받았는데,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에 성명서에 포함시킬 항목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우리는 광주에서의 시민 분쟁(civil strife)에 경악하고 있음(alarmed)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극도의 자제심을 발휘,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를 추진할 것을 촉구함
글라이스틴의 제안대로 이튿날인 5월 22일 오전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글라이스틴의 문안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성명을 발표했으나 언론을 통제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신군부는 미국의 이런 입장이 일반에게 전달되는 길을 봉쇄해 버렸다. 글라이스틴과 위컴의 오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군부 측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위컴은 이 일을 두고두고 비난하게 된다.[34]
5월 22일 오후 미국에서 열린 정책 검토 위원회(policy review committee)는 “지금까지 우리가 취해온 행동 이상의 일은 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동의. 우리는 온건한 방법을 선택할 것을 조언했으나, 대한민국 국민이 질서 회복의 필요를 느낄 경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았음”이라는 광주 상황에 대한 방침을 정했다.[35]
5월 23일 글라이스틴과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와 첫 회동을 가졌다. 글라이스틴은 대한민국 측에 5월 17일 계엄령 확대 정책이 미국에 충격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 시위를 확고하게 진압하는 것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정치 탄압을 수반한 것은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결국 광주에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는 데 일조한 것이 틀림없다는 견해를 보였다.[36]
[편집] 날짜별 상세 일지
5월 16일 금요일 이전
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전국 대학생 10~20만 명이 모여 지상 서울역 광장 주변에서 집회.
5월 15일 대학생단체 간부들에 의해 대한민국 경찰의 출동 소식을 사전에 접하고 서서히 해산.
5월 17일 토요일
21시 40분: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23시 00분: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 검속 실시
24시 00분: 5월 17일 0시부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신군부 계엄포고 제10호를 통해 정치활동 금지, 언론검열 강화, 대학교 휴교령 선포. 광주 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7 공수여단 33대대, 35대대 등). 전주 전북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도 잡아들여 폭행. 이 과정에서 대학생 사망자가 1명 발생했다.
전북대 농학과 2년인 이세종(당시 21세)은 5월 17일 12시께 계엄군에 쫓기다 전북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추락사).[37]
새벽 1~2시 경: 보안사령부(사령관 전두환)가 김대중 등 신민당 지도자와 김종필 등 공화당 지도자를 체포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점령. 국회 기능 마비.
5월 18일 일요일
새벽: 계엄군의 무차별 구타와 학살을 일부 시민들이 자진해서 방송으로 알림.
새벽6~8시 경: 계엄군의 구타와 학살에 대항해 학생들이 궐기
오전 08시: 신군부 등이 비상국무회의와 국보위 회의를 개최, 학생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계엄군 투입을 결정
오전 09시: 광주시내에 계엄군 투입 그러나 지연도착
09시 00분~30분: 계엄군의 지연 도착으로 3,7,11공수여단 병력 투입, 전남대학교 교문에 배치
09시 40분: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당함.
10시 00분: 전남대학교 주둔 계엄군을 상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임
10시 15분: 계엄군(공수부대원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항의 시위 진압.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첫 번째 부상자 발생)
10시 20분: 전남대학교 교문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원과 외부에서 학교로 출입하던 대학생 간 충돌 발생. 공수부대의 대학생 구타에 자극받은 대학생들 800여 명이 교문에 배치된 7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돌을 투석, 일부 학생들이 교문을 벗어나 광주 금남로로 이동.
오전 11시 00분: 전남대 300여 명 가톨릭 회관 집결,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 시킴
정오 12시 :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옴.
12시 : 광주 시내에 계엄군 도착. 교문 밖을 쏟아져나온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무장충돌, 지나가는 시민 중 일부를 대학생으로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잡아다 구타, 가혹행위로 확대.
오후 : 학생 구타와 시민 구타에 분노한 대학생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함. 계엄군과 공수부대는 오전에 집단 투석당한 병사들로 자극돼 흥분. 대규모 폭행, 구타, 가혹행위 발생.
15시 40분: 금남로 유동 삼거리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 진압과정에서 시위대로 추정되는 시민들을 잡아다가 구타 및 현장 체포함.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언어 장애인인 김경철 씨 계엄군에게 전신 구타당함.
19시 02분: 계엄사령부, 통행금지령 확대 국내외 방송을 통해 통금 시간을 저녁 9시로 당긴다고 발표.
20시: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무차별 구타에 불안, 흥분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학생들에게 동조.
21시: 계엄사령부 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방송과 라디오를 통해 해산 경고문 발표.
5월 19일 월요일
오전03시 00분: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김경철 씨 병원에서 사망 - 두 번째의 희생자).
09시 30분: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10시 00분: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1공수여단 위력시위 이후 착검한 상태로 진입, 대검으로 인한 자상자 발생. 11공수여단 약 천여 명이 강경 진압을 강행했고, 3~4명이 한 조가 돼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
오후: 시민군이 본진을 갖추기 시작. 쇠파이프와 각목 등으로 무장했으나 무장력이 현저히 낮았음
오후14시 40분: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돼 무리한 진압 작전 전개
15시 00분: 시내 기관장과 유지들, 회의를 하고 시위 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
16시 30분: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 광주 적십자 병원에서 5·18 최초 희생자 청각장애인 김경철 사망.
저녁 20시 00분: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수만 명이 “전두환 타도”와 “신군부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 “신현확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침.
20시: 학생들의 처참한 몰골을 동정한 시민들이 시위에 동참, 2백 대의 택시가 전남도청 앞에 결집,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 시위가 이어짐.
22시: 도청 주변을 가로막은 택시들과 3,7,11공수부대 및 계엄군이 대치, 실랑이를 벌임.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동참
5월 20일 화요일
08시 00분: 고등학생들의 참여에 자극받은 정부는 문교부를 통해 광주 시내 및 전라남도 광산군, 나주군 일대 고등학교에 휴교 조치 하달.
10시 20분: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끌려나와 마구잡이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에 공방전 계속.
18시 4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차량 경적 시위.
20시 0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 및 공수부대원의 진입을 가로막음.
20시 10분: 시위대, 도청으로 서서히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택시와 차량에 가로막힌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
20시 00분: 3공수, 11공수 여단장 실탄 분배 지시 (3공수여단장 실탄 장착 지시, 11공수의 경우 각 각 61대대,62대대가 1000여발 분배)
20시 00분: 실탄분배 과정에서 대검을 사용.
21시 00분: 택시 200여 대와 버스들은 진입로를 차단, 공수부대 및 경찰과 충돌. 일부는 우회해서 감.
21시 05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해 경찰 4명 사망
21시 50분: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mbc 방화
23시 00분: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 사망. 시민 수십 명 부상.
5월 21일 수요일 (이날부터 광주해방구, 해방광주)
00시 35분: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광주역에서 철수하던 계엄군, 대검과 곤봉 등으로 시위대 2명 살해. 계엄군 측 부상자 5명으로 보고.
02시 18분: 시외전화 두절
04시 00분: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
04시 30분: 광주kbs 건물 방화
08시 00분: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진압 명령을 받고 투입된 20사단 병력과 충돌
10시 15분: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함.
11시 10분: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
12시 10분: 전남대 진출을 시도한 시위대가 전남대 앞에 배치된 공수부대원들의 저지에 밀려 신안동 굴다리까지 1km 후퇴. 공수부대의 진압 도중 시민 4명 사망
12시 59분: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13시 00분: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됨.
13시 20분: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이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에 올라가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시작
14시 15분: 도지사, 경찰 헬기에서 시위 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
14시 35분: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 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14시 40분: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15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16시 00분: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16시 43분: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m2 중기관총 2대 설치
17시 30분: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와 광주교도소로 철수
5월 22일 목요일
광주 시내가 계엄군에 의해 고립됨
09시 00분: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10시 30분: 군용 헬기 공중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11시 25분: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12시 00분: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13시 30분: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 항의 수습안 전달
15시 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17시 18분: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 결과 보고
17시 40분: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18시 00분: 20사단이 통합병원 진입로 확보를 위해 1km 전진하며 사격, 작전 중 지역 주민 8명 사망
19시 00분: 동양방송 라디오(현 kbs 제3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기상도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중간조사 결과 뉴스를 보도했다.
21시 30분: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08시 00분: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10시 00분: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10시 15분: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해 총기 회수 작업 시작
11시 45분: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13시 00분: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15시 00분: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
19시 40분: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13시 20분: 11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4명 사망.
14시 20분: 송암동에서 11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 9명 사망 40여명 부상, 오인 총격전 직후 공수부대원이 주변 민가를 수색해 마을 청년 4명 처형.
14시 50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11시 00분: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메시지와 함께 광주민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 원 전달
15시 00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21시 10분: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 발생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 문제 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05시 20분: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08시 00분: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 감행
10시 00분: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4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15시 00분: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상황 브리핑
19시 10분: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처
24시 00분: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월 27일 화요일
02시 00분: 계엄군의 광주 진입
03시 00분: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04시 00분: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0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
05시: 시민군 생존자들 자진해서 자수. 자수 과정에서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 3명을 시민군이 자진해서 체포해 계엄군과 경찰에게 넘겼음.
05시 10분: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
06시 00분: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07시 00분: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08시 50분: 시내전화 통화 재개
[편집] 피해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29주년을 맞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38][39] 검찰은 1994년 사상자 수를 발표했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5.18의 핵심적인 진상은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경찰 및 군인 중 사망자는 경찰 4명, 군인 22명으로, 이들은 1980년 6월 21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안장됐다. (광주광역시가 발표한 통계는 유족이 보상금을 수령한 사망자 수이다. 확실하게 신원이 밝혀졌지만, 보상금을 수령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165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와 부상자회, 5.18기념재단 등 4개 단체가 공식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상이후 사망추정자는 376명 등이다.[40]
1980년대 중반에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과 무차별적인 연행으로 인해 사망자가 2천여 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5.18 종료 직후에 정부에 신고된 사망추정자, 실종추정자는 2천여 명에 달했고, 일부 학생운동권이 이를 인용한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1985년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1980년 당시 사망자 및 실종자로 신고된 인원은 2천 명이 맞다면서, 그중에는 체포 구금된 자, 사망자, 부상입원자, 피신자도 포함돼 있어, 이들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 것이라고 답했다.[41]
5.18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 연구진은 5.18 유공자 중 부상자와 구속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성폭행 피해자나 난민, 고문피해자 등 인권 유린 피해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까닭에 상당수가 ptsd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진행한 오수성 전남대 교수는 “5.18 체험자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당시 충격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재경험하면서 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중독을 함께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42] 또한 이들은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다. 2007년 8월 기준, 5.18 피해자로서 사망한 376명 가운데 39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5.18 피해자의 자살률은 10.4%로 일반인의 약 500배다.[43]
[편집] 연행자 고문 피해
한국인권의료복지센터 부설 ‘고문 정치폭력 피해자를 돕는 모임’은 1980년 5.18 당시 연행 또는 구금됐던 피해자가 1인당 평균 9.5회의 고문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중 물고문, 매달기, 구타, 비생리적 자세 강요, 강제 급식, 밥 굶기기, 의료기회 박탈 등 신체적 고문이 62%를 차지했다. 수면박탈, 복종강요, 지각박탈(암실 가두기) 등 심리적 고문은 38%를 차지했다.[44]
5.18 당시 계엄군에 의해 폭행당하고 트럭에 실려 광주교도소∙상무대에 연행된 광주 시민은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계엄군은“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날로 찍는 ‘닭발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송곳으로 맨살 후벼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고문들을 자행했다.[45]
연행자들은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이미 짜인 각본에 따라 내란음모 선동 등의 죄명으로 수사를 받았다. 특히 신군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상 연관이 없는 김대중과 관련한 내란음모 조작이라는 각본 수사가 이루어졌다. 김대중으로부터 폭동자금을 얼마 받았느냐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잔인한 고문, 구타, 심지어 같은 동료끼리 때리게 하는 비인격적 모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폭거를 자행했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석방이 된 후에도 오랜 시일동안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했다. 이들은 풀려난 후에도 엄청난 공포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46]
정동년 5.18 30주년 기념행사위원장∙고 홍남순 변호사∙고 조아라 광주 ywca 회장∙고 명노근 전남대 교수∙송기숙 전 전남대교수 등의 민주인사들은 상무대 지하 조사실에서 보안대 조사관들의 조사를 받았다. 정동년은 “보안대 조사관들이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를 하면서 무릎 사이에 곤봉을 끼우고 밟고 군홧발로 짓이기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또한 그는 “경찰이나 중앙정보부처럼 기술적인 고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보안대 조사관들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사실을 조작하기 위해 무지막지한 고문을 했다”며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말했다.[47]
[편집] 영향과 평가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정권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1987년 6월 민주항쟁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미국을 한국전쟁 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당시 운동권을 중심으로 해 재고됐다.
1980년 7월 4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다. 서울의 학생시위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조종했다는 명목으로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이는 후에 신군부가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대중 등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미국의 강력한 사면 요청에 따라 감형됐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과 폭도들의 반란으로 조작했다. 하지만 1988년 5공 청문회를 거치고 1995년 12월 21일 국회에서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해, 계엄군의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피해 배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 12. 21.)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 12. 17.)이 제정[48]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비(非)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자유 민주화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또한, 계엄군이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서훈이 취소됐으며 그 자격도 박탈됐다. 또한, 이 일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는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형과 2천억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다.[48]
광주항쟁은 이후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발생한 각종 반미시위 및 반미주의 확산에도 일부 기여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지역 대학생들에 의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약칭 부미방 사건)에도 영향을 미쳤다.[49][50]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구호 중에는 “민주주의를 원하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라는 조항이 제1항 서두에 삽입돼 있다.[49][50] 이후 미국의 광주학살 책임과 전두환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대학생 및 고등학생, 일반 시민들에 의한 반미 시위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지속됐다. 강원대생 성조기 공개 소각사건(1982년 4월), 광주미문화원 2차 방화사건(1982년 11월),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사건(1985년),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사건(1983년 9월), 부산 미국문화원 투석사건(1985년 4월) 등의 원인이 됐다.
2000년 5월 15일에는 미국의 광주학살 을 규탄하는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 등 서울의 여러 대학교 학생 100여 명이 오전 11시경부터 서울 미국 대사관 앞으로 몰려가 항의 집회를 벌렸다.[51] 그들은 미국이 2000년 6월에 열리는 남북최고위급회담에 간섭하고 있으며, 한국전쟁과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때 주민들을 학살했다고 비난하는 프랑카드를 흔들면서 미국 대사관에 기습을 시도, 반미구호를 외쳤다.[51]
[편집] 의의 및 교훈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과 민중의 의지를 대내외에 드러내었고 반민주, 군사독재의 야만성을 세계에 폭로함으로써 군사독재체제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으며,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항쟁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으므로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가열찬 투쟁이 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 저항과 연대로 이어질 때 비로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를 알게 해 주어 통일운동의 계기가 됐다. 미국은 해방 후 줄곧 사실상의 군사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여실히 입증됨으로써, 미국이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팽배해지면서 처음으로 반미 운동이 싹트게 됐고, 자주·통일운동이라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지평이 활짝 열리게 되고, 이후 대한민국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성을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52]
광주 민주화 운동은 다른 국가의 민주화운동에도 영향을 끼쳣다. 일본의 마쓰나가 세이타로 요미우리신문 홍콩 특파원은 중국의 천안문 민주화 운동과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퇴진의 배경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다고 평가하였다.[53]
[편집] 사건 당시 언론에 의한 왜곡
신군부는 보안사를 중심으로 ‘언론반’을 구성해 계엄사령부 보도처의 신문·방송·라디오·잡지 등 모든 매체에 대한 보도검열해 100만 건 이상을 조종 감독했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으로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언론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와 함께 보안사에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표하면서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조치를 내렸고 기자협회 간부 연행 했다. 또한 관제 보도를 의무화하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동아일보, 동아방송, 중앙일보 등은 5월 20일에 경향신문, 문화방송, 합동통신 등의 양심적 언론인들은 사실 보도를 요청했다. 5월 21일에 조선일보는 5월 22일에 5.18 사실 보도, 보도 검열 전면 철폐를 요구하면서 제작 거부를 시작했다.[54] 하지만 신군부는 철저하게 무시했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에 따라 ‘광주소요사태의 조속한 진정과 질서회복 유지를 위해 중진언론인을 초청, 현지실태를 취재토록 유도하고 국민계도를 촉구토록 유도’한다는 명분과 목적 아래,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회부 기자 32명, 국방부 출입기자 17명 등 합계 49명을 2처 2과장 중령 이용린이 인솔해 1980년 5월 24일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6시 40분까지 광주 일원 소요 현장을 취재하도록 했고,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장, 편집국장, 정치부장, 사회부장 각 16명 합계 64명을 4일에 걸쳐 호텔에 초청해 간담회를 가졌다.[54]
5.18 당시 미국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지지했으나,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을 견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미국이 5.18 당시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의 전모를 파악했을 때 글라이스틴 대사는 특전사의 지나친 반응이 비극의 직접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미국 관리들은 그와는 반대로 정부의 통제를 받는 광주의 라디오 방송이 미국 측이 특전사의 광주 파견을 승인했다고 보도하고 있음을 알았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역정보 행위를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하고, 이를 정식으로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를 취소하지 않았다. 또한 보안사의 조종을 받는 대한민국 언론은 미국 관리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전두환을 승인했다”라는 보도를 쏟아내었다. 이러한 신군부에 의한 왜곡 보도는 반미 감정이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55]
[편집] 5·18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은 2011년 5월 25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심의를 통과함에 따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됐다. 5·18 기록물은 9개 주제로 ▲국가기관이 생산한 5·18민주화운동 자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료, 군사법기관 재판자료 ▲시민들이 생산한 성명서, 선언문, 취재수첩, 시민들의 5월일기 ▲사진(흑백필름)자료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 ▲피해자들의 병원치료기록 ▲국회의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회의록(청문회기록) ▲국가의 피해자 보상자료 ▲미국의 5·18 관련 비밀해제 문서 등으로 총 분량은 편철 4271권 85만8904페이지, 흑백필름과 사진 2017컷이다.[56]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가 최종 심사 결과만을 남겨 두고 서석구, 지만원 등 극우 인사는 5·18이 북한군의 학살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네스코 본부에 반대 청원서를 제출했다.[57] 하지만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이들 극우 인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만장일치로 5·18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했다.[58]
유네스코는 5.18 민주화운동이 대한민국 민주화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동아시아 국가들의 냉전 체제를 해체하고 민주화를 이루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59]
[편집] 정치인들의 평가
김대중은 5.18 민주화 운동의 교훈을 “인권침해에 저항한 인권정신, 맨손으로 잔혹한 총칼에 맞섰던 비폭력 정신, 공권력의 공백속에서도 질서의식을 가지고 치안을 지켰던 시민정신, 항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평화정신”이라고 규정하고 “광주의 위대한 정신은 우리만의 자랑이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믿고 숭상하는 전 세계인의 자랑이며 인간승리의 대서사시”라고 평가했다.[60][61]
노무현은 5.18 민주화운동 27주년 기념사에서 “5.18은 역사에 많은 의미를 남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군부와 언론에 의해 폭도로 매도돼 무참히 짓밟혔던 그날의 광주는 목숨이 오가는 극한상황에서도 놀라운 용기와 절제력으로 민주주의 시민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너와 내가 따로 없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주먹밥을 나누었습니다. 시민들의 자치로 완벽한 민주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대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세계 시민항쟁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민주시민의 모범을 남겼습니다.”라고 연설하며 광주를 민주주의의 성지라고 높이 평가했다.[62]
김영삼은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라고 하며,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나. 우리 역사에 길이길이 크게 기록돼야 한다.”며 강도높게 비판하기도 했다.[63]
2007년 8월 박근혜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했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했다.[64]
2008년 5월 18일 이명박 대통령은 제28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참가해 기념사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8년 전 오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숨져간 민주 영령들 앞에 온 국민과 함께 고개 숙여 명복을 빕니다. 그 날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시는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들께도 충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역사의 고비마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 앞장서 온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을 저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크나큰 아픔으로 남았지만, 우리가 지금과 같은 민주화사회를 이루는 데 큰 초석이 됐습니다.”라고 평가했다.[65]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는 “5.18의 민주화 정신은 많은 국가들에게 표본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하며[66] 광주에 대한 애착이 많다고 밝혔다.[67]
레이건 정권 당시 리처드 앨런 미 전 안보보좌관은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대한민국에서 이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사실과 전두환 신군부의 역사 왜곡은 놀라울 정도라고 밝혔다.[68]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이정희는 “독재와 불의에 맞서 자신을 희생하고 공동체를 지킨 고귀한 광주정신은 진보의 원천이자 민주노동당의 뿌리”[69]라며 “과감한 변화로 수권정당, 대안정당으로 발돋움해 진보정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했고[69], “광주의 정치혁명을 전국에서 주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69]
[편집] 일부 극우단체의 주장
1990년대 후반부터 일부 극우단체가 북한의 인민군의 침투 의혹을 제기했다. 지만원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폭동”으로 부르는 한편, 조선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했다.[70] 조선인민군 특수부대 출신자 출신인 자유북한군인연합도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2006년 12월 20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5·18 광주사태는 (북한의)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백색테러이자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을 증명시켜 주는 현장”이라고 주장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광주사태의 발단과 *점은 민주화 봉기였다고 인정하지만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살상되고 끔찍하게 도륙당한 유혈적인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테러행위”라고 주장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들의 주장은 올인코리아, 코나스넷 등의 우파단체들을 통해 선전됐다.[71][72][73] 이날 기자회견에는 지만원, 서정갑 등 올드라이트 인사가 대거 참석했으며, 기자회견 내용을 계기로 '전두환 군부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는 주장도 기자회견의 정치적 배경을 의심케 한다는 주장도 있다.[73]
2008년 6월에는 뉴라이트 연합의 서양사 전공자인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로 부르며, 북한군 개입설을 언급했다.[74] 2008년 10월 서울교회 이종윤 담임목사는‘양심에 꺼리낌없이 힘쓰라’는 주제로 설교 중 4·3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폭력성과 북한 개입설을 설명하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75][76] 이에 대해 기독교계 커뮤니티인 대구성서아카데미에서는 광주 민주항쟁을 직접 겪은 광주시민이 광주민중항쟁은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 시민군이 벌인 항쟁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을 논거로 해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이종윤 목사의 주장을 반박했다.[77][78][79] 광주의 5.18단체들이 10일 성명서를 내고 “주일예배설교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당사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서울교회 이종윤 담임목사는 공식 사과하라”며 항의했다.[75] 이러한 주장 자체가 상식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주장이라는 반박도 대두했다.[80]
일부 보수단체들이 광주민주화운동 시민들에 대해 북한 개입설을 주장해왔던 것과 반대로, 학살을 자행했던 자들이 북한 특수부대라는 보수 단체들의 주장도 있다. 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 한·미우호증진협의회는 "(5·18 당시) 살인자들은 한국군이 아니라 북한이 파견한 600명의 특수부대 군인이었다"라고 주장한다.[81] 그러나 후에 이루어진 취재에 의하면 북한 특수부대 진압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당시 광주에 있었던 사람이 없고, "평양에서 좌천된 당 간부의 얘기를 들었다"는 등의 말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600명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도 이들은 "12.12 5.18 수사기록에 공수부대가 기밀유지하면서 작전을 하는데 정체불명의 300여명 되는 부대가 나타나 군장비와 무기를 빼앗았다. 그리고 비슷한 시점에 300여명이 아시아자동차에서 트럭을 탈취해 무기고를 습격한 사람이 300여명이다. 두 사건을 합하면 600명이라고 추정을 했다."라는 근거를 제시했다. 이들이 북한 특수부대의 진압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들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북한 특수부대 개입설에 대해 김황식 국무총리는 국회 질답에서 "5.18 민주화운동은 역사적으로 심판이 내려졌고 또 우리 국민들도 대다수가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렇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82]
[편집] 극우단체 주장에 대한 비판 및 반론
일부 극우단체 일각에서는 시민군이 광주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하는 계엄군의 학살과 폭력에 맞서 무장했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5·18 민주화 운동을 북한 인민군의 개입에 따른 폭동사태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인민군이 개입했음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실질적인 증거가 전혀 없어서 신빙성은 지극히 낮다.
일부 극우단체는 계엄사 및 제5공화국 정부의 발표를 인용해, 5.18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광주 시민 중에 계엄군이 주로 사용하던 총기인 m16보다 시민군이 주로 사용하던 총기인 카빈에 의한 희생자가 더 많이 있다고 주장한다. 5.18 민주화운동 진압 후 의사·검찰 관계자·보안사 요원이 작성한 사망자 검시 자료 원본에는 m16에 의한 사망자가 카빈에 의한 사망자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6월 중순 보안사 주재로 사체 검안위원회가 열려, 피해자 보상 문제가 제기되면서 공식 발표에서 카빈에 의한 사망자로 분류된 사망자의 숫자가 늘어났다. 당시 군부에서는 m16 총상 사망자는 군에 대항한 것으로 인식돼 폭도로 분류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 의사 2명과 목사는 난동자(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비폭도)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검안위원회에서 최초로 폭도로 분류된 사람은 20여 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해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로 분류됐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인해 사체 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 카빈로 분류된 사망자가 더 많아진 것으로 밝혀졌다.[83]
5·18 당시 계엄군의 작전보고·전투상보에 광주 시민을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국회 광주특위·검찰·국방부는 대한민국 계엄군 기록을 토대로 진상규명을 했다. 진상규명 결과 무차별 연행과 과잉진압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 광주역·전남대·전남도청에서의 집단 발포, 광주외곽봉쇄작전 과정에서 일어난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 통합병원 진로개척 작전, 송암동 학살 사건과 같은 무차별적 발포,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 중 무장시위대에 대한 발포 등이 밝혀졌다. 진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군인들에게 훈장이 주어졌으며 심지어 상부의 지시 없이 발포를 한 군인들까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된 이후 신군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볼 때 대한민국 계엄군에 의한 광주 시민 살해 행위는 분명히 존재했으며,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가 광주 시민들에게 계획적인 테러를 행했다는 주장에는 실질적인 증거가 있을 수 없다.[84]
일부 극우단체는 북한이 5·18을 기념한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북한은 5·18 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 혁명(남조선인민봉기), 6·3 항쟁(남조선청년학생봉기), 6월항쟁(6월 인민항쟁), 부마항쟁(10월 민주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운동 기념하고, 사건이 발발한 날을 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5·18 민주화운동 등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왜곡해서 북한 주민에게 선전한다. 북한에 있을 때 ‘5.18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85] 광주에 취재를 위해 잡입했던 조갑제는 5·18 당시 많이 불리고 큰 박수를 받았던 구호가 “김일성은 오판 말라”면서 5·18이 반공민주화운동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86]
5.18 민주유공자 유족회의 정수만 회장은 2006년 12월 21일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인터뷰에서 북한군 개입설을 반박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에서 “북한군 사망자가 민주화 투사로 둔갑된 사례가 있다.”면서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중 한 명이 북한군이라고 지목을 했는데, 정수만 회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지목된 인물은 1980년 5월 22일 광주국군통합병원 앞에서 20사단 61연대의 작전 도중 사망한 고등학생 임00라고 밝혔다. 당시 사망자 검시 기록을 보면 임00이 끝까지 군을 추격하기에 계엄군이 사살했다고 한다.[87]
5.18 당시 북한의 특이 동향은 없었다. 한미연합사령부와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의 분석에 따르면, 5월 초부터 5월 18일까지 북한의 특이 동향이 감지되지 않았다.[88] 5월 20일 한미연합사령부에서 미국에 보낸 전문을 보면, 그 시점까지 북한군의 어떤 동향도 확인되지 않았다. 5.18을 진압했던 계엄군은 부상자와 연행자 수천명에 대해 조사 과정에서 대공 판단서를 첨부했다. 여기에는 대공 용의점을 철저히 조사해서 대공 유무를 기록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이상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89]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일성이 5.18 민주화운동을 전후해 루마니아를 방문했기 때문에, 북한 당국이 5.18 발발을 사전 예측했다고 보기 어렵다.
1980년 5월 21일 날 오전 8시부로 전라남도 지역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이 됐다. 5월 23일 저녁 전 해양경찰에 해안경계태세 강화지시가 떨어졌다. 전남 일대 전 해안에는 31사단 병력의 이 부대는 대간첩 침투작전 부대 3개 연대가 경계를 했는데, 93연대가 목표지역 해안, 95연대가 고흥 여수 지역 해안, 96연대가 무안 영광 지역 해안경계를 했다. 광주에서 화순으로 빠지는 길은 공수부대 7사단과 11사단이, 나주와 목포, 영광으로 가는 길은 20사단이, 담양 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에는 3사단이 투입돼 광주 외곽을 전부 막고 있었으며 31일에는 해안까지 경계가 강화됐다. 이와 같은 철통경계 속에서 극우단체 주장대로 북한군 600명이 해안으로 침투해서 육로로 빠져나갈 상황이 아니었다.[90] [91]
자유북한군인연합은 탈북자 사이에서 5·18 북한개입설은 상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 조선로동당 비서 황장엽 등 고위급 탈북자들은 5·18 북한개입설을 언급한 적이 없다. 북한 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 탈북군인협회 심신복 회장은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자유북한군인연합의 주장은 현실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92]
1980년 당시 광주는 전라남도 산하의 일개 시로서 서울에서 남쪽으로 300km 정도 떨어진 소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그다지 큰 가치가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북한 측에서 광주에 개입한다고 해서 별다른 이익을 얻거나 대한민국 정부에 커다란 타격을 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과거에 군사분계선 인근 지역에 무장공비가 출몰했을 때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등에서 훨씬 적은 숫자의 병력도 주민신고에 의해 발각되거나 동선이 노출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해안가도 아닌 후방 내륙도시에 상당한 수의 병력을 별 노출없이 침투시켰다는 사실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탈북자 단체의 주장대로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 개입해 시민군과 계엄군 모두에게 피해를 입히는 공작을 자행했다면, 이는 중대한 사안으로서, 당시 신군부가 시민군이 아닌 북한군을 주적으로 삼았어야 한다. 그렇지만 신군부는 시민군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허위 선전을 계속했다는 점에서 탈북자 단체의 주장 역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당시 계엄군이 무고한 시민들까지 닥치는 대로 사살하는 국가폭력을 똑똑히 목격하고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경찰서 등의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저항한 일은 굳이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고도 상식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보수단체의 주장에는 논리적인 허점이 있다는 반론도 있다.
무엇보다도 광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북 군산에 주한 미군 공군 베이스캠프가 있는데다, 시내에서 20~30마일 거리에 위치한 광주광역시 송정동에도 주한 미군이 주둔한 상황에서. 북한군이 정말 개입했다면. 주한 미군 사령부나 미국 정부가 이를 수수방관했을 리가 없었다는 점에서 북한군 개입설은 더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조차도 모르게 북한군이 개입했다면, 오히려 대한민국이 전복될 뻔한 위기를 신군부가 자초했다는 얘기가 되고, 결과적으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우익 단체가 스스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무능과 직무유기를 증명하는 결함이 된다.
11공수여단에서 복무하던 이경남은 “5월 18일, 5월 19일 양일간에 걸친 7공수, 11공수 부대원들의 진압 작전은 오히려 극중(영화 화려한 휴가) 장면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픽션은 아무리 잘 꾸며놓아도 논픽션만 못하다.”라고 말하며 한 중사가 시민군에게 포위되자 옷을 벗어 학생들에게 총을 쏘라고 하자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을 향해 m16 소총으로 사격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시민군은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 광주 민주화 운동은 학살이라고 말했다. 또한, 군부대에서 “좌경용공 빨갱이 새끼들이 공부하기 싫어서 복학생들이 시험 기피하고 그러기 위해서 데모 선동” 등 교육 시켰다고 한다.[93]
[편집] 다른 우파의 주장
2002년 2월 사건의 관련자이기도 한 전두환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라고 규정했다. 전두환은 ‘광주는 어 그것은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라고 규정했으며,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며 반문했다.
2007년 3월 우파 언론인이며 조선일보 원로 기자인 조갑제는 5.18 당시 현장을 취재했었다. 조갑제는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 민주화 운동’이라 평가했고[94],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조선 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들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95] 이에 대해 북한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한 탈북자 단체 및 이에 동조하는 우파 세력이 조갑제를 비난하는 등의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조갑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애국단체들이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96]●광주시민 수십 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기자 수백명들이 취재한 목격자가 많은 사건이다. 5·18을 취재했던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계엄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다.●전국 비상계엄령으로 해안과 항만이 철저히 봉쇄됐다.●전두환 정권 하에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단서가 나오면 확인했을 것이다.●대대 규모 북한군이 개입다면 무장시민에 의한 국군 사망자가 7명에 그칠리 없다.●탈북자 증언은 전언에 불과하며, '내가 광주에 내려왔었다'고 나서도 믿기 힘든 판에 '카더라'란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곤란하다.●김일성이 5월 18일 광주 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 투입했다고 해도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20일 이후일 것이며, 5월 20일부터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됐다.
한편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2004~2006년에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박근혜는 2007년 8월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97]
이명박은 2008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사에서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온 국민과 함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숨져간 민주 영령들"이라고 평가했다.[98]
[편집] 언론 보도
[편집] 대한민국의 언론
조선일보 , 중앙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을 비롯한 대한민국 대부분의 언론사와 방송국은 5.18은 ‘민주화운동’과 ‘민중항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80년 당시 11공수여단 소속 병사였던 이경남 목사는 《당대비평》 1999년 겨울호에 ‘20년 만의 고백-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란 제목의 수기를 통해 “80년 5월21일 도청앞 집단발포는 법원의 최종기록과는 달리 시위대가 아닌 진압군 장갑차가 급히 퇴각하면서 넘어진 군인을 덮쳐 죽게 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99] 또한 진압 당시 죽은 군인들에 대해 “대부분이 동료들의 오인사격에 의해서 죽은 거예요. 두 번에 걸쳐서 오인사격이 있었는데, 광주보병학교와 11공수여단 사이에 5월 24일에 교전이 있었고, 또 한 번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31사단과 교전이 있어서 오인사격으로 죽었지 정작 시위대와 충돌해서 죽은 군인들은 굉장히 소수였어요”라고 증언했다.[100]
지난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 진압군 부대 지휘관들은 암매장이 없었다고 진술한 것과 다르게,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에 의해 2001년 당시 공수부대원이 비무장민간인을사살, 암매장했다는 양심선언이 발표됐다.[101]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김충근 기자는“젊은 여자,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계엄군의)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부위에 집중됐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백주겁탈, 폭력만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떠올랐다.”고 회고했다.[102]
국제신문 김양우 기자는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도청진입이 끝난 직후 도청 안 마당에서 포로로 잡힌 시민군을 계엄군 병사가 때려죽이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고 쓰고 있다.[102]
심재훈 뉴욕타임스 서울 주재기자는 “광주항쟁이 없었다면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다. 광주는 세계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증언을 했다.[103]
중앙일보 광주 주재기자 장재열는 5.18 당시 작성한 수첩에서 “대검으로 찌르고... 여자에게는 속옷만 입히고 마구 때리고 폭행. 집까지 쫓아가 폭행, 도망가는 시위대에 칼 던졌다”라고 당시 상황 회고했다.
5·18 민중항쟁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를 지낸 서청원은 9박 10일간 광주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취재한 경험을 바탕으로 〈5·18 광주항쟁 특파원 리포트〉를 공동 발간했다. 그는 “5·18 민중항쟁이 정치에 입문(민한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며 “당시 신문에 5·18 기사가 나가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당시 취재기자들과 함께 책을 발간했다”고 말했다.
[편집] 외신 언론 및 외신 기자
1980년 5월 25일 afp 통신은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라고 전세계에 타전했다.[104]
프랑스의 언론사 르 몽드 지의 기자 필립 퐁스는 1980년 5월 27일의 아침의 광주는 죽음의 도시와 같았으며 그 때 당시 상황을 학살이라고 증언했다.[105]
일본의 마쓰나가 세이타로 요미우리 신문 홍콩 특파원은 “광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진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80년대 후반 민주화가 이뤄진 것은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지도자들 마음속에 광주항쟁 정신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은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의 붕괴와 중국 천안문 사건에도 영향을 주었다.”라고 평가했다.[106][107]
샘 제임슨 미국 ap통신 기자는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1980년 광주의 3일간 군대 만행으로 빚은 희생보다 더 큰 것은 없었다. 군대의 만행은 이내 7일 간의 광주 사태로 치달았다.”라고 보도하면서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들은 광주 소재 (주)한국화약 창고의 다이너마이트 탈취 같은 시위자들의 과격한 행동을 강조했고, 군대의 잔인한 행동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수년 동안 많은 남한인과 몇 명의 미국인은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들춰냈다. 미국은 사실상 비난 또는 적어도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라고 5.18을 왜곡한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을 비판했다.[108]
블레들리 마틴 미국 볼티모어 선 서울 특파원은 “나는 지난 25년 동안의 기자생활 중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국의 강청 등 4인방 재판, 그리고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 암살 이후 폭동과 살인사건 등을 취재해 왔다. 그러나 나는 ‘광주’의 참상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건이 나의 기억 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한 마디로 나는 ‘광주’라고 대답한다.”라고 증언한다 또 “광주항쟁 기간 동안 단 하루밖에 광주에 머물지 않았지만, 1980년 5월 26일 그날 하루만으로도 바로 죽음을 걸고 폭압에 맞서 투쟁했던 용감한 광주시민들의 모습이 나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광주야말로 나의 기자로서의 경력 중 가장 감동적인 경험을 제공해준 곳이었다.”라고 5.18을 높이 평가했다.[109][108]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한 의료관련 연구개발회사 이사인 데이비드 돌린거는 5.18 광주항쟁 당시 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며 “사후 유골이라도 광주에 묻고 싶다”고 밝혔다.[110]
미국의 프리랜서 기자 도널드 커크는 “광주 민주화 항쟁은 대한민국 사회가 겪었던 정치적인 사건의 전환점이기도 하다”고 말한 뒤 “이 사건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높이 평가했다.[111]
독일인 프리랜서 사진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마티아스 라이는 “나는 외국인지만 역사의 한복판에서 고통받았던 광주 시민을 만났을 때 뜨거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며 “세계인들도 나처럼 5.18 역사를 배운다면 뜨거운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12]
한국전쟁 이후 서울 상주특파원으로 일한 최초의 서양 기자인 노먼 소프는 “광주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길고 긴 투쟁의 일부분이다. 앞세대가 자유선거를 확립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우려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지금 젊은 세대가 배우고 진심으로 감사하길 바란다”며 “지금은 언론계에서 은퇴했지만 민주화운동 때 대한민국 정부의 많은 압력에도 저를 비롯한 많은 헌신적인 기자들이 외국 독자들에게 대한민국 상황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시민을 진압하던 군인들의 잔혹함이 시위를 촉발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외국 잡지나 신문을 대한민국에 들여오는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이 배포 전 모든 자료를 검열했다. 광주에 대한 기사나 전두환을 비판하는 기사 등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을 때는 배포 전 지면에서 빠졌다. 외신 기자들이 쓰는 기사도 감시의 대상이었다. 주거비자가 나오는 것도 몇 달씩 걸려 30일마다 출입국을 반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113]
독일 제1공영방송 ard-ndr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그 참상을 서방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또 그 해 9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판결을 받자 항의표시로 “기로에 선 대한민국”이란 제목의 4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필름에 담았다. “내 생애에서 한번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도 이렇듯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114]
테리 앤더슨 ap 통신 기자 (당시 la타임스 일본총국장)은 5.18에 대해 “5·18은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었다.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찬 시민들 앞에서 시위대를 추격하며 곤봉으로 때리고, 최루탄은 물론 총까지 쏘았다. 공수부대원들은 상점과 시내버스 안까지 쫓아가서 젊은이들을 잡아 끌어냈다. 광주는 분노로 일어섰다.”라고 진술했다.[115][116]
미국 볼티모어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1994년 월간 ‘샘이 깊은 물’에 기고한 글에서 윤상원의 외신 기자회견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독일 남부독일신문 기자인 히일셔는 “5.18 당시 부상자들이 너무 많아 부상자들을 수용할 병실이 부족했다”고 회고했다. 전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노먼 누트 타프 역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절박해 보였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117]
뉴욕타임스의 서울 특파원 헨리 스코트 스톡스는 “1415년 아쟁쿠르에서 있었던 육박전을 연상하게 한다”면서 “육군 병사들이 착검된 총을 가지고 인간을 도륙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500년을 더듬을 수 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118]
[편집] 학계의 평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인류 역사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지. 무기가 수천 정이 풀렸는데 강도 사건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물자가 부족했지만 아무도 매점매석한 사람이 없었고. 그게 바로 대동세상이죠. 그때를 생각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어요.”라고 강연했다.[119]
조지 카치아피카스 미국 웬트워스공대 교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미래 사회에 자유라는 빛을 던져준 사건’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은 독재정권에서 민주화로 가는 역사의 지렛대였으며, 그 에너지는 전 세계에 강하게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120]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2005년 영국 bbc방송 인터넷판에 보도된 논평에서 “광주에서의 경험으로 한국인들은 독재로부터 탈출과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을 연관짓게 됐다”는 견해를 밝혔다.[120]
에드워드 베이커 전 미국 하버드대 엔칭 연구소 부소장도 2005년 12월 김대중 도서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독재와 미국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를 바꾸는 대한민국 근대사의 전환점'으로 5.18을 기술하기도 했다.[120]
[편집] 인권, 시민운동가들의 평가
광주인권상 수상자인 태국의 시민운동가 겸 인권운동가 앙카나 닐라파이지트씨는 “힘 없는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이 주는 감동은 믿기지 않을 만큼이었다”며 “5.18과 이후 광주의 인권운동은 세계적으로 본받을 만한 사례”라고 밝혔다.[120]
2005년 수상자인 와르다 하피즈 인도네시아 도시빈민협의회 사무총장은 “5.18 이후 대한민국의 인권발전은 아시아 인권활동가의 표본이자 목표”라고 높이 평가했다.[120] 2003년 수상자인 단데니야 g. 자얀티 스리랑카 실종자기념회 대표는 “나에게 5.18은 인권투쟁을 위한 훌륭한 영감의 원천”이라고 치켜 세웠다.[120]
5.18기념재단에서 국제인턴으로 활동하고 있는 필리핀 인권운동가 페드로 라혼은 “5.18의 역사는 결코 잊혀지지 않고 많은 나라에 전파돼야 한다”며 “광주시민들은 자유를 쟁취한 정신을 마음 깊이 지키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자극할 수 있도록 새로운 도전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120]
바울 슈나이스 목사는 "광주는 깨어 있는 양심과 열린 눈으로 불의와 폭력에 저항하라는 경고인 동시에 격려이며, 폭력, 전쟁,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함께 뭉쳤던 새 역사의 출발점이었다"며 "이런 광주에 대한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21]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서 5.18의 정신과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122]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에도 김 추기경은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가슴아팠던 일은 광주의 5월”이라고 말하며 고통스러운 심경을 밝혀왔다. 그는 언젠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을 때가 그때였다. 사태가 그대로 알려지지도 않고…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지만 먹혀들어가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은 것 같으니까…”라고 안타까웠던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123]
1984년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방문지는 광주였다. 교황은 경호를 맡은 청와대 경호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5.18의 상징 장소인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을 돌아 미사장소였던 광주 무등경기장으로 이동했다. 교황은 ‘용서’라는 주제의 미사를 통해 “광주시민과 같은 특별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은 용서가 어려울 수도 있다”며 광주시민들을 보듬었다.[124]
[편집] 관련 판결
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사회 각계 각층에서 불법적으로 집권한 신군부 인사를 고소·고발을 했다. 1995년 7월 검찰은 5.18 사건에 대해 전두환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국을 장악할 의도가 있었고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 것이 확인됐지만,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내란죄·반란죄 여부를 따지지 않고 불기소 처분했다. 1995년 12월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인용결정을 내렸다. 같은 달 검찰에 특별수사부가 설치돼 12.21 사건과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고, 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해 12.12 사건, 5.18 사건 공소시효 정지 규정을 두었다. 5.18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 23일, 검찰은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전격적으로 기소했다.
1997년 대법원은 두 전 대통령 및 다른 피의자들이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했다. 이에 따라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는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대중 정권에 의해 징역형은 사면됐으나, 추징금은 현재까지 내고 있다.[125]
또한, 광주 민주화 운동의 관련자를 숨겨 준 천주교 신부에 대해 정당행위를 부정, 범인은닉죄로 처벌한 판례(1983년)가 있다. 이회창 대법관이 참여한 재판이며, 황인철 변호사 등이 변호한 사건이 있다.[126][127]
[편집] 5.18 사건 대법원 판결
1997년 대법원은 성공한 쿠데타의 가벌성에 대해 “피고인들의 정권장악을 통해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헌법질서하에서는 헌법에 의한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한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라고 분명하게 적시했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관계를 다음과 같이 확정지었다.[128]
피고인들이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시국수습 방안의 실행을 모의하고,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한 후,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이나 총개머리판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는 등으로 시위자에게 부상을 입히고 도망하는 시위자를 점포나 건물 안까지 추격해 대량으로 연행하는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였으며, 이와같은 난폭한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함으로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후 일부 시민의 무장저항이 일어났으며, 나아가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귀중한 국민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시급하게 재진입작전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안될 상황이나 또는 광주시민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고도 볼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위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계엄군에게 광주재진입작전을 강행하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시민을 사망하게 하였다.[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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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만 해도 어마어마한 정보군요~~~
5.18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하는 분들 적어도 사전적 의미는 읽고 말씀들을 하시는건지.....
그냥 보수 언론이나 카더라~~통신만 읽고 말씀 하시는 건지....
문명이 아니라면 사전검색만 해보세요~~
어설픈 지식으로 폭동으로 몰아세우시지 마시고~~
그거 아시죠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기 전에 전국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는거~~
에휴 ~~~~이른바 보수를 지향하시는분들 해도해도 너무하시는거 아니신가?
이제는 사전적 의미도 바꿔버리실려고 그러시나??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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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인권말살의 현장 삼청교육대
삼청교육대는 대한민국의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0년 8월 4일, 사회악일소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에 의한 삼청5호계획에 따라 설치된 군대식 기관 또는 그 사건을 뜻하는데 일반적으로, 그 설치 목적과는 달리,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폭력 및 인권유린 사례로 여겨진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방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총 사망자는 57명으로 병사 36 구타 10 총기사고 3 안전사고 2 자살 2 미상 1
이상입니다.
질병 가운데서는 폐염증, 폐렴 9명, 급성심부전증 7명, 기도폐쇠 4명, 복막염 3명, 간경화증 3명, 뇌출혈 2명, 그리고 뇌암, 궤양성대장염, 폐기흥, 소장폐쇄, 폐결핵, 심내막염 및 전색증, 만성심부전증, 장관내출혈이 각각 1명. 그러나 후에 노태우정권이 피해사례 접수를 시작했을 때 접수된 추가건수에 따르면 군부대내 사망 54명 후유증 사망 397명 부상/상해 2786명 의 추가 피해자가 있었는데 노태우정권은 이에 대한 보상 및 명예회복을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았고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내건 단체 소송은 현재까지도 "시효가 지났다"라는 이유로 성과를 못하다가 <삼청교육명예회복및보상에관한법률>이 2003년12월29일 16대국회에서 재적의원 206명 중, 반대 2표, 기권11표, 찬성 193표로 통과되었습니다.
그리하여 2004년 1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관보에 실려 공식적으로 제정되었다.
1980년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와 당시 이회성 계엄사령관의 '계엄포고령 13호' 발표에 이어 '삼청5로계획'이라는 이름하에 진행되었습니다
폭력범과 사회풍토문란사범을 소탕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무자비한 인권탄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해 8월부터 수많은 '범죄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 1981년 1월까지 총 6만 755명을 체포하고 보안사령부, 중앙정보부, 헌병대요원과요원과 검찰, 경찰서, 지역정화위원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A,B,C,D의 4등급으로 분류하여 A급 3252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였고 B급 C급 3만 9786명은 4주 교육 후 6개월 복역케 한 다음 2주 교육하여 훈계방면하였으며 D급 1만 7717명은 경찰에서 훈계방면하였습니다
당시 삼청교육대 조교로 근무한 분의 글
내 나이 49,,거의 반백년은 산셈이다. 비 오는 날이면 가만히 회한에 젖는때가 있다. 지금으로 부터, 24년전,,,삼청교육대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본의아니게, 줄 잘못 섰다가 조교로 차출이되었고,,, 우리 부대에는 충청도 병력이 들어왔었다.
그런데 한사람앞에 세사람씩 때려죽이라는 명령이다.그들은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니,,죽이는 연습을 하란다'어수룩하게,,,엄벙덤벙 두들겨 패니까,,,'
조교들 회식이라면서,,술을 마구먹인다,,그리곤 패란다.........기막힌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무고하게 두들겨맞으면서,,빤히 쳐다보는 대부분 선량한 교육생 들의 괴로운 눈동자를 쳐다보면,섬찟한 공포의 소름을 느끼곤했다.
이래선 않되는데,,하면서도,교육생들을 많이 쥐어패지않으면,내가 맞는다는 것때문에,,,, 어쩔수없었다. 시키는데로 잘해도 때리고,못하면 더때리고,,, 진짜와야할 사람보다는, 노동일 하다가,,막걸리 한잔 걸치고, 흥얼대면서 늦은 밤길에 집에가다가,,붙잡혀온 사람이 훨씬 많았다.
혹시라도 몸에 문신이있으면, 영락없이 끌려오고, 어지간한 사람이면 신원조회해보곤 하소연할만한 뒷줄이 없는것이 확인되면,못된 순사들 실적에 맞추기위해 끌려온것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다가 사진촬영이라도 할려면,,몸집이 크고 인물 더럽고 문신이 새겨진 사람들을 앞줄에 세워놓고, 목봉체조를 시키곤했었다.그런 장면이 뉴스시간에 화면에 나올때는, 대한민국의 불량배들을 모조리 골라잡아 새사람 만드는 훌륭한 정책으로 국민들은 오인하기 십상이었고,,,,,,,, 그들은 몸이 아파도 가만히 참는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혹시라도,,배탈이 심하다는 교육생이 있으면, 설사약을 먹여서,,아래바지가 온통 똥물에 젖어 줄줄흐르게 만들었고, 치질이 심해져서 제대로 걷지못한다는 사람이 생기면 하얀색 세멘트를 물에 이겨서,,항문에 붙여주곤, 항문이 헤어터져 울고 기어다니는 교육생이 생기곤 했을때,,,,, 우리는 하늘을 부끄러워했다.
그러던 어느날, 화장실뒤에서 몇사람 교육생이 모여서, 길에서 주운 담배꽁초를 돌려가며 피우다가, 나에게 적발이되었다. 그들은 덜덜 떨고있었다. 거의 삶을 포기한 표정으로,,나에게 살려달라고 모두들 두손모아 빌고있는거다.
모두 나에겐, 큰 형이나 삼촌은 되고도 남을만한 사람들이,,,, 갑자기 나는 소리지르곤말았다. 그렇게도 담배들이 피우고 싶어요,,, (느닷없이 오늘 밤이라도 하늘에서 담배라도 떨어지면, 맛있게 피워~~~~~!)
그리곤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날밤, 나는 화랑담배 한보루를 그들의 내무반 천막에 집어 던졌다 ,,,,,,,,,,,그런데 이틑날 아침 훈련중에, 좌로굴러 우로굴러 훈련받던중 어느 교육생의 주머니에서, 화랑담배 한곽이 튀어나오구야 말았다.
상황이 생긴것이다. 불벼락의 교육대장의 욕설과 협박속에,,모든 조교단의 희생을 막기위해 내가 자수를했다. `제가 담배한보루를 던져주었습니다.
나는 그날밤, 비가 쏟아지는 연병장에서 흙탕물을 뒹굴며,,,한도없고 끝도없는 매를 맞아야했다. 엉망이되어 망가져가는 나를 쳐다보는, 교육생들은 분명히 울고있었다.
,,,,,,,,,,
세월이 지나고보니, 정말 용서받기 힘든 짓들을 국가에서 저지른거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희생자였다.
면죄자작성일 2011-06-01추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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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삼청교육대!당시 조교의 끔찍한 증언
삼청교육대는 대한민국의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0년 8월 4일, 사회악일소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에 의한 삼청5호계획에 따라 설치된 군대식 기관 또는 그 사건을 뜻하는데 일반적으로, 그 설치 목적과는 달리,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폭력 및 인권유린 사례로 여겨진고 있습니다.대한민국 국방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총 사망자는 57명으로 병사 36 구타 10 총기사고 3 안전사고 2 자살 2 미상 1이상입니다. 질병 가운데서는 폐염증, 폐렴 9명, 급성심부전증 7명, 기도폐쇠 4명, 복막염 3명, 간경화증 3명, 뇌출혈 2명, 그리고 뇌암, 궤양성대장염, 폐기흥, 소장폐쇄, 폐결핵, 심내막염 및 전색증, 만성심부전증, 장관내출혈이 각각 1명. 그러나 후에 노태우정권이 피해사례 접수를 시작했을 때 접수된 추가건수에 따르면 군부대내 사망 54명 후유증 사망 397명 부상/상해 2786명 의 추가 피해자가 있었는데 노태우정권은 이에 대한 보상 및 명예회복을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았고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내건 단체 소송은 현재까지도 "시효가 지났다"라는 이유로 성과를 못하다가 <삼청교육명예회복및보상에관한법률>이 2003년12월29일 16대국회에서 재적의원 206명 중, 반대 2표, 기권11표, 찬성 193표로 통과되었습니다. 그리하여 2004년 1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관보에 실려 공식적으로 제정되었다.1980년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와 당시 이회성 계엄사령관의 '계엄포고령 13호' 발표에 이어 '삼청5로계획'이라는 이름하에 진행되었습니다폭력범과 사회풍토문란사범을 소탕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무자비한 인권탄압이 이루어졌습니다.그해 8월부터 수많은 '범죄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1981년 1월까지 총 6만 755명을 체포하고 보안사령부, 중앙정보부, 헌병대요원과요원과 검찰, 경찰서, 지역정화위원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A,B,C,D의 4등급으로 분류하여 A급 3252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였고 B급 C급 3만 9786명은 4주 교육 후 6개월 복역케 한 다음 2주 교육하여 훈계방면하였으며 D급 1만 7717명은 경찰에서 훈계방면하였습니다당시 삼청교육대 조교로 근무한 분의 글 내 나이 49,,거의 반백년은 산셈이다. 비 오는 날이면 가만히 회한에 젖는때가 있다. 지금으로 부터, 24년전,,,삼청교육대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본의아니게, 줄 잘못 섰다가 조교로 차출이되었고,,, 우리 부대에는 충청도 병력이 들어왔었다. 그런데 한사람앞에 세사람씩 때려죽이라는 명령이다.그들은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니,,죽이는 연습을 하란다'어수룩하게,,,엄벙덤벙 두들겨 패니까,,,' 조교들 회식이라면서,,술을 마구먹인다,,그리곤 패란다.........기막힌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무고하게 두들겨맞으면서,,빤히 쳐다보는 대부분 선량한 교육생 들의 괴로운 눈동자를 쳐다보면,섬찟한 공포의 소름을 느끼곤했다. 이래선 않되는데,,하면서도,교육생들을 많이 쥐어패지않으면,내가 맞는다는 것때문에,,,,어쩔수없었다. 시키는데로 잘해도 때리고,못하면 더때리고,,, 진짜와야할 사람보다는, 노동일 하다가,,막걸리 한잔 걸치고, 흥얼대면서 늦은 밤길에 집에가다가,,붙잡혀온 사람이 훨씬 많았다. 혹시라도 몸에 문신이있으면, 영락없이 끌려오고, 어지간한 사람이면 신원조회해보곤 하소연할만한 뒷줄이 없는것이 확인되면,못된 순사들 실적에 맞추기위해 끌려온것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다가 사진촬영이라도 할려면,,몸집이 크고 인물 더럽고 문신이 새겨진 사람들을 앞줄에 세워놓고, 목봉체조를 시키곤했었다.그런 장면이 뉴스시간에 화면에 나올때는, 대한민국의 불량배들을 모조리 골라잡아 새사람 만드는 훌륭한 정책으로 국민들은 오인하기 십상이었고,,,,,,,, 그들은 몸이 아파도 가만히 참는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혹시라도,,배탈이 심하다는 교육생이 있으면, 설사약을 먹여서,,아래바지가 온통 똥물에 젖어 줄줄흐르게 만들었고, 치질이 심해져서 제대로 걷지못한다는 사람이 생기면 하얀색 세멘트를 물에 이겨서,,항문에 붙여주곤, 똥꼬가 헤어터져 울고 기어다니는 교육생이 생기곤 했을때,,,,,우리는 하늘을 부끄러워했다. 그러던 어느날, 화장실뒤에서 몇사람 교육생이 모여서, 길에서 주운 담배꽁초를 돌려가며 피우다가, 나에게 적발이되었다. 그들은 덜덜 떨고있었다. 거의 삶을 포기한 표정으로,,나에게 살려달라고 모두들 두손모아 빌고있는거다. 모두 나에겐, 큰 형이나 삼촌은 되고도 남을만한 사람들이,,,, 갑자기 나는 소리지르곤말았다. 그렇게도 담배들이 피우고 싶어요,,, (느닷없이 오늘 밤이라도 하늘에서 담배라도 떨어지면, 맛있게 피워~~~~~!) 그리곤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날밤, 나는 화랑담배 한보루를 그들의 내무반 천막에 집어 던졌다 ,,,,,,,,,,,그런데 이틑날 아침 훈련중에, 좌로굴러 우로굴러 훈련받던중 어느 교육생의 주머니에서, 화랑담배 한곽이 튀어나오구야 말았다. 상황이 생긴것이다. 불벼락의 교육대장의 욕설과 협박속에,,모든 조교단의 희생을 막기위해 내가 자수를했다. `제가 담배한보루를 던져주었습니다. 나는 그날밤, 비가 쏟아지는 연병장에서 흙탕물을 뒹굴며,,,한도없고 끝도없는 매를 맞아야했다. 엉망이되어 망가져가는 나를 쳐다보는, 교육생들은 분명히 울고있었다. ,,,,,,,,,, 세월이 지나고보니, 정말 용서받기 힘든 짓들을 국가에서 저지른거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희생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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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난 오늘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네.....
오늘 전 알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군요....그저 놀랍단 말 외에는 할말이없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죠......
감정적으로 우린 이렇게 당했습니다 라고만 하지 말고, 당시 통계 자료나 문서 근거 자료를 갖고 오세요. 또한 만주와 중국에
서 있었던 참변과 전쟁범죄들은 일제 치하의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선인들은 일제의 황군으로 중국
인들을 학살하고 다녔습니다. 우리가 오히려 반성해야지요.
초기 정부에서 친일파 등용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일제시대 조선반도 내에 있던 사람들 90%는 친
일파였습니다. 오히려 독립운동이 반도 내의 상식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지요. 3.1운동이 최초이자 최후의 반도 내 독립운동입
니다. 주도층은 일본의 조건을 수락하고 친일로 변절했지요.태평양전쟁이 끝나고 갓 독립했을 당시에 반도 내 조선인들은 김구의 존재도 몰랐습니다. 김구 선생이 누군데? 중국이라던
데. 수준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나 참.. 일제 치하 조선 반도 내에 있던 사람들 죄다 친일파라 봐도 무리가 없다까요? 무슨 기회주의자? 닛폰 반자이! 하면 친
일파 시켜 줍니까? ㅋㅋㅋ 님이 친일파라고 부르는 사람도 모두 뼈를 깎는 공부를 통해 시험을 합격하고 정식 관료가 된 사람
입니다만. 오히려 이런 사람들을 자랑스러워 해야지요. 일본인들과 경쟁에서 이기고 조선인으로써 자랑스럽게 관료에 합격하
거나 대학에 진학했을 경우, 그것이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마을에선 잔치를 했구요.그리고 광복군이 진격해서 조선을 독립시킨다? 죄송합니다만 좀 황당하네요. 광복군이 당시 조선 내 경찰서 하나 뚫고 지나갔
을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님 어디서 부터 반박을 해야할지 도저히 감도 안잡히고 반박을 해야할 이유마져 느껴지지 않는군요.....
여러분 이분 말대로 님이 친일파라고 부르는 사람도 모두 뼈를 깎는 공부를 통해 시험을 합격하고 정식 관료가 된 사람
입니다만. 오히려 이런 사람들을 자랑스러워 해야지요. 일본인들과 경쟁에서 이기고 조선인으로써 자랑스럽게 관료에 합격하
거나 대학에 진학했을 경우, 그것이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마을에선 잔치를 했구요.
이런식이니 이완용이도 영웅이고 송병준도 영웅이군요.....
그냥 대단하단 말 밖에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어떻게하면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죠? 심히 정신과 치료를 권장하는 바입니다....
당신과 대화를 나누려했으나 일말의 가치도 못느껴 잠이나 청하려 하오.....
더 솔직히 말해 당신 미,친,놈 같소.....그리고 무섭소.....
아참.....위키백과에 나온 친일에 대한 설명이오......
잘 읽어 보구려.....당신 말대로라면 위키백과도 고쳐야 겠구려......
어원 [편집]
임종국이 지은 《친일문학론》이란 책에서 처음으로 “친일파”라는 말이 나온다. 당시 친일파라는 명칭은 부일배가 사회 지도
층으로서 기득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부일배라는 표현 대신에 사용했다. 이것이 굳어져, 부일은 “일본을 (적극적으로) 돕
다”, 친일은 “일본과 친하다”라는 말뜻과는 달리, 오히려 부일보다 친일이 더 나쁜 행위로 여겨지고 있다.
기준과 대상 [편집]
일본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지일파이나 학일파, 극일을 주장하는 극일파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개념이다.
보통 일본인은 친일파라고 부르지 않으며, 한국어에서는 많은 경우 한국인으로 그 범위를 한정한다.
친일 행위 및 친일파의 기준, 범위나 대상 설정 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한 자와 한일병합 당
시 고위 관직자 만을 대상으로 하는가, 창씨개명자 및 소극적인 친일행위자, 민족개량주의자 등도 포함하는가의 여부 등 그
쟁점은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체제 하에서 수동적인 친일 행위를 한 사람은 친일파로 볼 수 없으며, 생존을
위해 소극적으로 협력한 정도는 이른바 반민족행위와는 다르게 봐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 역시 결국은 똑같은
친일행위라고 반박한다.
친일의 가장 중요한 기준점은 "자발성"이라는게 일반적인 관점이다. 따라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이런 "자발성"에 따라 친
일의 유무를 가리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또는 만주군관학교 출신들
과 같은 자발적으로 일제에 복무한 장교들은 친일인명사전에 개시하고 있으나, 학병 출신들과 같이 지원을 가장한 징병된 사
람들은 친일인명사전에 개시하지 않고있다. 일제말기에 일제는 초급 장교 수가 부족해지면서, 지원제를 가장해 강제적으로
조선인 대학생들을 징병했기 때문이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창씨 개명의 경우 강제로 이루어졌기에 이를 친일로 보
고 있지 않다.
크게 보자면 1948년 반민특위가 지목한 조사 대상자와 1990년 이후 임종국이 친일파로 발굴, 설정한 인원을 친일파로 간주한
다. 2005년 8월, 친일인명사전편찬 위원회가 독자적으로 인정한 일제강점기 친일파 3,090명의 본명을 적은 목록을 책으로 출
판하여, 책에 실린 인물이나 유족으로부터 반발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는 2006년 12월 6일,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
원회가 106명을 적은 명부를 확정했다. 그러나 이 역시 대상과 유족 등의 반발의 여지가 남아있다.
국가별 역사 [편집]
중국 [편집]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중일전쟁 & 제2차 세계 대전 기간동안 일본제국에 협력한 부일 중국인들이 많았다. 이들을 한간
漢奸)이라 부르는데, 중일전쟁이후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모두 사형 등으로 처벌한 바가 있다. 일본에 의한 친일괴뢰 정부였
던 왕징웨이 정권에 참여한 고위관리 대다수는 국민당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만주국의 고위관리들은 중화인민공화국에 의
해 모두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푸이 등 일부는 후에 사면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편집]
정부 수립 이전 군정기부터 친일파나 지주를 처벌했다. 그러나 세계적 무용가였던 최승희나 남로당 간부 리승엽, 북한의 농림
상을 맡은 인정식 같은 공산주의 국가 수립에 동조하는 친일파들은 북한정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최승희가 친일파라는 주
장은 확실하지 않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내 서열 10위였던 장헌근, 김정제, 조일명 등 많은 친일파들이 조선민주주
의인민공화국 정권에 참여하였다. 또한 초급장교, 특히 공군 장교 경우, 일본제국군, 만주군 출신의 친일파들을 많이 등용하
여 조선인민군에 편입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친일 반민족 청산 및 친일파 처벌은 했으나, 그 의도는 김일성의 반대
정적세력들을 제거하기위한 정치적인 수단 용도로 이용했다.
대한민국 [편집]
대한제국 시절 한일병합에 적극 찬성하거나 참여한 자와 당시 고위 관직자 근무자 등 일제 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한, 즉 당시
일본의 정책을 지지하거나 이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을 말한다. 나라에 공적을 쌓은 것이 아닌 친일행위를 해서 토지를 취
득했고, 이를 통하여 부를 축적한 자들도 있었다.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심판과 정의를 바로 잡는 원론적 의도는 좋지만,
일단 친일에 대한 구체적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며 정치적 이해관계와 의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등 중립성이 훼손되는 부
분도 있다. 특히 인물에 대한 구체적 정황을 아는 사람도 현 세대에 거의 생존해 있지 않다는 점, 그로 인해 확실히 드러난 증
거도 없이 친일파라는 족쇄를 씌워 대한민국에 공헌한 사람들마저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경우도 발생되고 있는 것은 문제점
으로 지적되고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곧 이어 미군이 한반도 이남지역에 입성하여 군정을 선포하였는데, '맥아더 포고령'을 통해 과거 일
제시대때 부역행위한 관료출신이나 경찰,군인출신들을 대거 등용함으로써 친일파세력들은 득세를 하게된다. 1948년 대한민
국 정부 수립이후, 제헌 국회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해 친
일파 청산을 시도했으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권력기반이 된 친일파나 친일파의 조직적인 방해로 무산되었다. 반민특위를
해산 시킬 목적으로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 습격사건을 꾸미기도 하였다.[1]과거에 일제에 충성을 바치던 상당수 친일
파들은 해방이후 처벌을 받기는커녕 정치적 지지세력이 있어야 했던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여 철저히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극
우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일부는 특히 경찰과 군인쪽에 친일출신들은 이승만으로부터 '반공투사'로 칭송받는등 대한민국 정
부수립 이후 제1공화국때 주요직을 겸직하며 그들의 권위를 누린 자들이 많았다.
2005년 12월 8일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가결, 29일에 공포되었다. 친일파라고 인정된 인물이
반민족행위의 대가로 취득하였다고 판단되는 특정 재산을 후손 등이 상속했더라도 적법한 절차로 몰수하거나 환불 취소조치
를 하는 것으로, 이 법에 따라 세워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친일파와 그 재산을 조사해 몰수 대상을 결정했다.
당시 열린우리당 소속 149명 전원과 민주노동당 소속 10명 전원은 법안에 서명했으나,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은 121명 중 6
명을 제외하고는 이 법안 발의에 대해 서명을 하지 않거나 거부하였다. [2] 보수주의 정권인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를 비롯한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통폐합하거나 폐지하였다. [3]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식 대회를 열었는데, 이 과정에서 보수단체와 마찰을 빚어 설전을 두
고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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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삼청교육대부활 이라니?
삼청교육대는 대한민국의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0년 8월 4일, 사회악일소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에 의한 삼청5호계획에 따라 설치된 군대식 기관 또는 그 사건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그 설치 목적과는 달리,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폭력 및 인권유린 사례로 여겨진다.
대상
이 작전은 대외비로 진행되어 구 전과자 및 우범 불량배의 목록을 미리 조사한 뒤 진행되었다. 첫 목표는 20,022명으로 정해졌으나, 형사들, 경찰서들 사이의 경쟁이 붙어 후에는 머리 숫자 채우기 식으로 검거가 진행되었다. 군/경 합동으로 영장 없이 검거된 시민들의 수는 6만명을 넘었다.[1]
이후 검거된 사람들은 A, B, C, D의 네 등급으로 나누는 "심사" 과정을 거쳤으나, 심사 과정에서 검거된 당사자의 의견이 반영될 곳은 없었으며, 다음과 같이 분류, 조치되었다. 이중 B, C급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삼청교육대의 주 대상이었다.
A급: 조직 폭력배/공갈치기패의 수괴 및 중간간부. 상습폭력. 실형 2범이상. 흉기소지. 강도. 절도. 밀수. 마약현행범.
군사재판
B급: 조직 폭력배/공갈치기패의 행동대원. 기타 경제/정치 폭력배. 상습도박. 사기꾼. 폭력우범자. 강도. 절도. 밀수. 마약. 재범 위험이 있는 전과자.
4주 순화교육 후 근로봉사
C급: 폭력 사실이 경미하고 우발적. B급중 정상이 참작된 자.
4주 순화교육
D급: 초범. 사안이 경미한 정상적인 학생 및 소년. 직업과 주소지가 일정해 개선 가능성이 뚜렷한 자.
훈방
그러나 이는 서류상에 명시되어있는 내용일 뿐이며 실제로는 불시검문시 신분증을 미지참했다는 이유만으로 B급으로 분류되어 삼청교육대로 검거되기도 했다.
삼청교육대 운용
경찰에서 인계된 39786명이 군에 인계될 무렵에는 39742명으로, 44명이 이미 사라져 있었다.
삼청교육대는 본래 4주간의 순화교육 프로그램일 뿐이었다. 입소 초기에는 장교들과 사단장들이 "4주 후에 보내준다", "훈련 잘 받으면 일찍 간다" 등의 말로 안심시키며, 동시에 '시범 케이스'로 무작위로 골라낸 훈련생들에게 가혹행위를 일삼았다. 약속한 4주가 지나도 훈련생들은 풀려가지 않았다.
B급 10016명은 이후 20여개 부대에 분산 수용되어 "근로봉사", 즉 노역에 동원되었다. 이 근로봉사는 훈련생들이 자원한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군인들의 강요에 자원서를 강제로 쓰게 된 것이었다.
1981년 1월 24일 24시부로 비상계엄은 해제되었으나, 그 중 7478명은 1~5년 사이의 "보호감호처분"을 받아 계속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피해및 보상
대한민국 국방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총 사망자는 57명으로:
병사 36
구타 10
총기사고 3
안전사고 2
자살 2
미상 1
이상이다. 질병 가운데서는 폐염증, 폐렴 9명, 급성심부전증 7명, 기도폐쇠 4명, 복막염 3명, 간경화증 3명, 뇌출혈 2명, 그리고 뇌암, 궤양성대장염, 폐기흥, 소장폐쇄, 폐결핵, 심내막염 및 전색증, 만성심부전증, 장관내출혈이 각각 1명이다.
그러나 후에 노태우정권이 피해사례 접수를 시작했을 때 접수된 추가건수에 따르면:
군부대내 사망 54명
후유증 사망 397명
부상/상해 2786명
의 추가 피해자가 있었다. 노태우정권은 이에 대한 보상 및 명예회복을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내건 단체 소송은 현재까지도 "시효가 지났다"라는 이유로 성과를 못하다가 <삼청교육명예회복및보상에관한법률>이 2003년12월29일 16대국회에서 재적의원 206명 중, 반대 2표, 기권11표, 찬성 193표로 통과되었다. 그리하여 2004년 1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관보에 실려 공식적으로 제정되었다.
최근에 이런 삼청교육대를 부활하자는 일부 사람들이 있어서
여기저기서 자료가져와서 만들어 봤습니다.
자신의 자유와 인권을 스스로 버리는 이런 조
치를 다시 부활하자고 하는게 엽기입니다.
참고로 자료는 위키피디아에서..
캐시플로작성일 2010-03-08추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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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삼국지 정사 하후돈전
외꾸눈의 칼잡이가 아닌 사람냄새 물씬나는 옆집아저씨 같은 하후돈의 이야기.
하후돈(夏侯惇) 자는 원양(元讓)
이분은 삼국지연의에 의해 빛을 보고 또한 삼국지연의에 의해 평생을 어둠속에 살아야 했던 사람이라 생각한다.
"유비에게 관우가 있다면 조조에겐 하후돈이있다!"..라는 말로 비유하기엔, 어딘가 묘하게 모자라 보이고, 무신(武神)관우와 비교되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독자에게 바보취급당하는 하후돈.
조조와 친척관계이면서도 그 혈연은 유비와 관우의 '俠과 義'의 사이만 못하고 무용역시 관우를 따라갈 수 없기에 우리는 그를 "2인자 집단의 대표"라고 기억하게 된 것이다.
-> 이게 좀 웃기다. 관우는 유비와 별개, 혹은 유비를 뛰어넘는 포스와 존재감을 보여주는데 비해서, 하후돈은 단독 2인자도 아닌 '2인자 집단'의 구성원중 선두, 혹은 한명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나름 생각해 보던데, 유비가 공명과 법정을 얻기전까지 관우는 능력이나 서열면에서 유비군의 넘버1이었던 반면, 조조는 세력을 키우는 와중에 흡수한 천하의 기재들이 너무 많아 그곳에 파묻힌 느낌이다. 물론 촉한공정론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하지만 사실은 어떠한가.
관우는 군공은 많으나 형주를 다스리면서 위정자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으며, 그 빛나는 자부심을 차치하더라도 (부)사인과 미방이 저항없이 항복한바로 보아 약간의 인격적인 결함 또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테클 사절, 전 관공 존경합니다) 하후돈은 살점튀는 전장에서의 군공과 무예는 관우보다못하더라도 뛰어난 인덕과 성품으로 군 전체를 이끌었던 장수였으며, 실명이후 병사의 통솔과 후방에서 병참을 지원함은 물론, 내정면에서도 우수한 성과를 올렸다. 그야말로 솔선수범의 자세로 군과 민의 모범이자 사랑을 받은 올라운드 플레이어라 말할 수 있다.
삼국지의 저평가주(그래도 블루칩이지!) 하후돈. 이제 그를 다시보자!!
P.S 더불어 그의 부장 한호(삼국지 연의에서는 장사태수 한현의 동생으로 나오지만 사실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도 재조명 받아야할 인물이다. 이런면에선 KOEI가 노력한다는게 물씬 느껴지는구만!
경극의 하후돈 분장
중국에선 파란색이 좋은 의미가 아니기때문에..
이로 유추해보건데 역시 악당을 보임.
하후돈은 자가 원양(元讓)이고 패국 초현 사람이며, 하후영(夏侯?)의 후예다. 열네 살 때, 어떤 사람이 그의 스승을 모독하자 하후돈은 그를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강직한 기개가 알려졌다.(기개도 좋지만 그래도 살인인데..) 조조가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하후돈은 비장(裨將)이 되어 정벌에 따라나섰다. 조조가 분무장군이 되었을 때(190), 하후돈을 사마로 임명하여 단독으로 군사를 이끌고 백마(白馬) 일대에 주둔하도록 하였고, 곧 절충교위(折衝校尉)로 승진시켰으며 동군태수에 제수하였다. 조조가 도겸을 정벌하면서 하후돈을 복양(?陽)에 머무르게 하여 수비를 맡겼다.->차후에도 나오지만 하후돈은 역시 연의나 진 삼국무쌍에서 처럼 저돌적인 맹장형의 스타일은 아닌것으로 보인다. 인재보는 눈은 유비와 더불어 삼국시대 1,2위를 다투던 조맹덕은 그를 최전선보다는 후방에서 군,민을 안정시키는 역할에 충실하도록 한것으로 보인다. 누구보다 믿을만한 듬직한 이미지의 인재라는 이미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역시 코에이 삼국지에서 하후돈 무력이 날이 갈수록 낮아지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장막이 모반하여 여포를 맞아들일 때, 조조의 가족들은 아직 견성에 있었다. 하후돈은 여포가 조씨 가족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간단하게 무장한 군사를 이끌고 성으로 달려가는 도중에 여포와 마주쳐 전투를 벌였다. 여포는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 북으로 들어가서 하후돈 군사들이 남겨둔 군수품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그 후 여포는 여러 장수들을 위장 투항시켜 힘을 합쳐 하후돈을 사로잡아 인질로 삼고 보물과 교환할 것을 요구하니 하후돈 군중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하후돈의 부장 한호(韓浩)가 병사들을 지휘하여 하후돈 군영의 문을 지키게 하고, 군감과 여러 장수들을 소집하여 각 부의 사병들이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단속하게 하고서야 모든 진영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그런 연후에 한호 등은 하후돈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인질을 잡고 있는 자들을 꾸짖어 말했다.“너희들은 흉악한 반역자들이면서 감히 대장군을 인질로 하여 협박하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또한 우리들은 왕명을 받들어 반역한 도적을 토벌하고 있는데 어찌 장군 한 사람 때문에 함부로 너희들 말에 따를 수 있겠는가?”이렇게 말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하후돈에게 말했다.“이것은 국법이니 저희들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그리고는 병사들을 불러 인질을 잡고 있는 자들을 공격했다. 인질을 잡고 있던 자들이 당황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우리들은 다만 재물을 빌려가고자 할 뿐입니다.”한호는 이 자들을 여러 번 책망하고 모두 베어버렸다. 하후돈이 위험에서 벗어난 후 조조는 사건의 전말을 듣고 한호에게 말했다.
“그대의 이러한 점은 만세의 모범으로 삼을 만하오.”이에 법령을 공포하여, 지금 이후로 인질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힘을 합쳐 공격하고 인질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이로부터 인질을 잡아 협박하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리더따라 팀원도 닮는다. 사적인 감정앞에 대의와 법규를 준수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동생이 장사태수 한현의 동생으로 나오니.. 진위여부는 가릴 수 없지만..
조조가 서주에서 돌아오자 하후돈은 대군을 좇아 여포를 정벌하는 도중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왼쪽 눈에 부상을 입었다.(1) 그후 하후돈은 또 진류(陳留)ㆍ제음(濟陰)태수를 겸임하였고, 건무장군의 직위가 더하여지고 고안향후에 봉해졌다. 그 당시 큰 가뭄과 병충이 일어나자, 하후돈은 곧 태수의 물을 끊어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몸소 흙을 지고 장사들을 인솔하여 모내기를 권장하였으므로 그곳의 백성들은 그에 의해 이로움을 보았다. 하후돈은 후에 하남윤으로 전임되었다. 조조가 하북을 평정할 때, 대장군이 되어 후방을 방어했다. 하북 원소의 업성이 함락되자 복파장군으로 승진했으나 여전히 하남윤을 맡았고, 그의 판단에 따라서 적절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법령에 구애받지 않도록 허락을 받았다.-> 하후돈을 무척이나 좋아한 조조는 그에게 지속적이고 빠른 승진을 시켜준다. 하후돈이라는 인간자체를 좋아한것에 더해 안정되지 않은 기반을 다진 성과가 영역 확장보다 더 나은 성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건안 12년(207)에 조정에서는 하후돈의 앞뒤 공적을 기록하고 식읍 1천8백 호를 추가하여 이전의 것과 합쳐 2천5백 호가 되게 했다. 건안 21년(216)에 조조를 따라 손권을 정벌하고 돌아온 조조는 하후돈을 26군의 도독으로 삼아 거소(居巢)에 머물게 했다. 그에게 각종 악기와 가기(歌妓)를 주고, 포고령을 내렸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대장 위강(魏絳)은 융족과 강화한 공적으로 금석(金石)으로 만든 악기를 상으로 받았는데, 하물며 장군에게 있어서랴! ― 건안24년(219)에 조조는 군대를 마피(摩陂)에 주둔시키고, 하후돈을 불러 항상 수레에 함께 타고 행동했으며, 특별히 친근하고 존중하는 것을 보였으며 침상까지 출입하도록 하였으니, 다른 여러 장수 중에서 그와 비길 자가 없었다. 하후돈은 전장군(前將軍)에 임명되었고,(2) 제군(諸軍)을 지휘하여 수춘(壽春)으로 귀환했고, 군영을 옮겨 소릉(召陵)에 주둔시켰다. 문제가 왕위에 오르자 하후돈을 대장군에 임명했으나, 몇 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 조조가 이렇게 하후돈을 중시했던 이유를 생각해보자. 앞서말한 내정에 있어서의 치적이 첫번째 일 것이고, 친족이자 친구에 대한 예우가 두번째 일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덧 붙이자면 그의 인간됨이 타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감탄, 그리고 모두가 이러한 장수가 되라는 '매사마골'의 전략적인 의도 또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너무 순수하지 못한가?-_-;
중국하남성에 있다는 하후돈, 하후연묘에 서있는 석상. 눈이 있는걸로 봐선 하후돈?
하후돈은 비록 군중(軍中)에 있었으나, 스승을 직접 영접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성격은 청렴하고 검소했으며, 남는 재물이 있으면 곧 사람들에게 나누어 베풀었고, 부족하면 관청에서 도움을 받았으며, 재산 관리를 일로 삼지는 않았다. 하후돈의 시호는 충후(忠侯)이며, 아들 하후충(夏侯忠)이 후사를 이었다.(3) 문제는 하후돈의 공훈을 헤아려서 그의 아들 전부를 제후로 봉해주려고 하후돈의 식읍에서 1천 호를 내어 일곱 아들과 두 손자에게 나누어 주었고, 작위는 모두 관내후(關內侯)를 내렸다.-> 국가 1급 공무원이 되어서도 배움앞에 겸손함을 잃지 않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하는 자세를 보인다. 재산 관리를 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에 있어선 큰 문제가 되겠지만-_-;
하후돈의 동생 하후렴(夏侯廉)과 둘째 아들 하후무(夏侯楙)(4)는 스스로의 공로로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이전에 조조는 자기 딸을 하후무에게 시집보냈으니, 곧 청하공주(靑河公主)이다. 하후무는 시중상서(侍中尙書)와 안서진동장군(安西鎭東將軍)을 역임했으며, 가절(假節)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었다. 하후충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하후이(夏侯?)가 후사를 이었고, 하후이가 죽자 하후이의 아들 하후소(夏侯?)가 뒤를 이었다.->하후돈은 삼국지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자식복이 없다. 명예까진 좋은데 능력이 안습이다. 원소는 원상이라는 싸움꾼 자식이라도 있었고, 유표도 투항했지만 유종이라는 총기있는 자식을 두었다. 하후무.. 부마(황제의 사위)라는 큰 직위에 올랐건만 촉군에게 캐관광. '출정했다'.. 이후 기술이 없다. 덧붙여 하후무는 삼국지11 F4(무능력 4인방)에서도 유선을 압도하는 에이스 기질을 보여준다. 내년쯤 나올 삼국무쌍6엔 숨겨진 케릭터로 하후무좀 만들어줬으면 좋겠어. 아.. 잠깐.. 눈물좀 닦고..
한호(韓浩)는 하내 사람이다. 패국의 사환(史渙)과 한호는 모두 충의와 무용으로 이름을 날렸다. 한호의 관직은 중호군(中護軍)까지 이르렀고, 사환은 중령군(中領軍)까지 올랐으며, 모두 황제의 근위병을 관장하고 열후에 봉해졌다.-> 사실 한호에 대한 기술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한호가 조조군의 핵심기반이었던 '둔전제'를 제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장으로 전장에 나가고, 내치에 힘썼던 장수. 조운과 등지 콤비에 쌍을 이룰 올라운드 콤비가 바로 하후돈, 한호가 아닐까.
건모2작성일 2009-11-04추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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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당신이 근대사를 잘알고있다면..논하고싶다..
1945년 해방 에서부터 1948년 대한민국 건국 까지의 약 3년이라는 공백기간에 당시 사람들을
어느나라 사람으로 봐야 하나?? 조선인??일본인??미국인??대한제국??한국??무국적??
1. 45년 일본은 패전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돌아갔다.(일본의로부터 해방돼었다.)
2. 대한민국 건국은 1948년 이다
3. 45년 일본이패전하고 바로 미국이 들어왔다. (맥아더가 발표한 포고령1.2호에 따르면 1호.미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의 지위로 한반도에 들어가게될것이며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2호.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없이 사형이나 그밖의 형벌에 처한다.)
4.조선 고종 34년(1897)에 새로 정한 국호(國號). 왕을 황제라 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하고10월 12일 환구단에서 나라의 이름을 대한제국이라 했다. 즉 , 이날부터 조선은 사라지고 대한제국이 생겨났나(1899년 8월 17일에 반포된 대한제국의 헌법적 법전의 명칭은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였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강제체결되고, 같은 해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국호는 강제적으로 다시 조선으로 바뀌었다) 일제시대 라고 하면 한일합방(1910년)부터죠 그렇다면 고종이 대한제국 을 선포한게 앞서있는데. 근대사 책을 보면 조선인 이라고 씌여있고
당시시대 사람들의 생각에도 조선 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더군요. 대한제국을 선포할떄 프랑스.러시아 는 황제가 직접 축하 하였으며 영국.미국.독일
등은 간접적으로 승인 의사를 표시했는데도 말이죠.어떤책에는
그렇다면 대한제국-식민지-독립-식민지-건국 이런식 이라는 건데.. 3년간의 공백에는 어떤 나라라고 봐야 할까요??
1945년 미군정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설립한 조선인민공화국은 물론이고, 1919년 상하이에서 설립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결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과 당수 김구라는 개인자격으로 입국하였을 뿐입니다.(즉 나라 만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뜻)
정부설립시 헌법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정 국가이다'라는 헌법 전문을 통해 대한제국의 현재성을 부정했다.즉 대한제국은 망한 나라이다.('대한'이란 '위대한 한민족'이란 뜻 대한민국이란 '위대한 한민족의 민주국가'란 뜻이며, (대한제국은 왕정국가이며 군주제)(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의 공화제) 이거 몰라서 대한민국이 대한제국 승계받았네 어쩃네 알고있는 사람도 많고 아에 몰르는 사람이 많다는게 슬픔니다.민족과 역사는 계승했으나, 정부자체를 계승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꿨놨더니. 한일합방으로 나라는 망하고 강제적으로 조선으로 다시 바꼈다(강제로 다시 바뀌었던 조선인 이라고 봐야하나??아니면 공식지명인 대한제국인 이라 봐야 하나??)
일제시대가 지속돼고 일본의패전과 함께 해방이 왔다. 그렇다면 앞전 국가는 어디라고 봐야하나?? 강제적으로 다시 바뀐 조선?? 아니면 대내외 적으로 인정한 대한제국??
또한 미군정(신탁통치) 이떄는 건국전이기도 하거니와 포고령 1호를 보면 미국의 식민지 였다고 봐도 무방하다..그렇다면 미국인인가??? (뭐 어차피 식미지 만들려고 했다가 공산주의 떄문에 나라 돌려준꼴이지만)
종전과 동시에, 조선 총독부는 일장기를 내려, 태극기를 달았습니다.이것은, 일본이 조선의 통치권을 돼돌려주었다고 하는 일을 증명할수도 있습니다..그렇다면 조선의 자치권이 회복되었다고 볼수도 있다
그러나, 그 해의 9월 8일에 미군이 진주 했을 때, 내걸어 있던 태극기를 내리게 하고 일장기를 내걸게 했습니다.미국의 인식으로는, 조선은 일본의 일부라고 생각하고있었다고 봐도 무방할까요?
일본이 조선의 통치권을 돼돌려준 일을 미국에 부정되었으므로, 아직 그 무렵은 조선은 일본의 일부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그렇다면 일본인??인가)
그렇다면 이떄 이땅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무었인가?? 자신들을 어느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또 지금시대 우리는 이 3년간을 어느나라 라고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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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라트비아
라트비아 (latvia) 유럽 북동부 발트해(海)의 동해안에 있는 나라. 위치 : 발트해 동부 면적 : 6만 4610㎢ 인구 : 242만 8000명(1999) 인구밀도 : 37.6명/㎢(1999) 수도 : 리가 정체 : 공화제 공용어 : 라트비아어 통화 : 라트 환율 : 0.58라트 = 1달러(1999) 1인당 국민총생산 : 2,430달러(1997) 면적 6만 4610㎢. 인구 242만 8000명(1999). 인구밀도 37.6명/㎢(19990. 정식명칭은 라트비아공화국(republic of latvia)이다. 수도는 리가이고 공용어는 라트비아어이다. 북쪽은 에스토니아, 남쪽은 리투아니아, 동쪽은 러시아 연방과 접하고, 남동쪽은 벨로루시와 국경을 이룬다. 발트3국(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의 하나로서 위치·인구·영역의 규모에서 세 나라의 중간이다. 발트3국은 동쪽 배후에 러시아 연방을 업고 발트해로 나아가는 지리적 위치에 있고, 라트비아는 좋은 항구가 발달한 리가만(灣)을 안고 있어 발트3국의 중심적 위치에 있다. 현재의 영역은 1945년 러시아에 할양된 파탈로포 지역을 제외하면 1940년의 영역과 동일하다. 라트비아의 자연 라트비아의 지형은 지질구조상 선캄브리아 동유럽평원의 일부를 형성하며, 대체로 평탄한 저지와 높지 않은 구릉으로 이루어진 파랑성 평야이다. 구릉은 빙하가 이루어 놓은 빙퇴석이 많다. 지형에 따른 지역구분은 해안저지와 서부, 중앙, 동부 내륙지역이 있다. 해안저지는 발트해와 리가만을 둘러싼 평야지대로 해안은 단조롭지만 몇몇 자연항이 발달하였다. 서부는 쿨사고지에 파랑성 기복이 나타나지만 대체로 평탄하다. 중앙부는 남서부의 평야에서부터 라트비아 최고봉인 312m의 고지에까지 높지 않은 기복이 있는 지역이다. 동부지역은 벨로루시 남동부에서 인접하는 고지대이며 1,000개 이상의 빙하성 호수가 있다. 1만 2,000개 이상의 하천이 있지만, 주요 수로는 중앙부를 흘러 리가만으로 들어가는 다우가바(서드비나)강(江)과 동부 고지대에서 발원한 가우자강이 있다. 기후는 해양의 영향으로 해안은 해양성 기후를 나타내 온난하나, 내륙부는 습윤 대륙성 기후로 겨울이 긴 편이다. 1월 평균기온은 서부 해안이 -2.6℃, 내륙은 -6.6℃를 나타낸다. 7월 평균기온은 해안이 16.8℃, 내륙이 17.6℃로 서늘한 편이다. 수도 리가의 평균 연강수량은 567mm이며 6, 7, 8월에 많다. 고위도에 위치하여 증발량에 비하여 강수량이 많기 때문에 습지가 많고 토양은 갈색 포드졸이다. 영토의 2/3 이상이 삼림·목초지, 방목지, 습지, 황무지 등이다. 우랄산맥 서쪽에서 북유럽으로 전개되는 유럽혼합림지대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어 삼림이 발달하였는데 소나무·*나무·자작나무가 주요 수종이다. 라트비아의 주민 1998년말 현재 라트비아의 인구구성은 전체 인구의 56.65%가 라트비아계이며, 러시아계가 30.33%, 벨로루시계가 4.33%, 우크라이나계가 2.73%, 2.25%가 폴란드계이다. 1935년의 라트비아인 비중 75.5 %에 비하면 러시아계의 유입과 라트비아계의 출생률 감소로 라트비아계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다. 도시거주 인구의 비중은 1996년 현재 73%에 달하며 전체 인구의 거의 50%가 리가와 그 주변 지역에 거주한다. 라트비아는 1988년 공용어를 러시아어로부터 라트비아어로 바꾸었다. 라트비아어는 인도-유럽어족으로서 발틱어의 일원이다. 라트비아의 민족문제는 최대 소수민족인 러시아계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소련의 지배시기에 라트비아인에 비해 특권적 위치로 이주해 들어온 러시아계는 라트비아의 러시아화 정책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9년 발효한 라트비아 공식 국가공용어법에서는 국가공무원에게 3년 안에 라트비아어를 익힐 것과 중등 고등교육기관에서 라트비아어를 점진적으로 익힐 것을 요구하였다. 또 1991년 라트비아 최고회의는 1940년 이후에 이민온 사람들에게는 16년 이상 라트비아에 거주하고 라트비아어를 말할 줄 알며, 충성을 맹세하고 다른 시민권을 포기하는 자에게만 시민권을 허용한다는 법안을 채택하였다. 라트비아의 주요 종교는 그리스도교이다. 대부분의 라트비아계는 전통적으로 루터교이며, 젊은 세대들 가운데는 다른 개신교파를 따르는 이들도 많다. 라트비아의 러시아 정교 신자는 대부분 러시아계이다. 라트비아의 역사 1290년 게르만족 상인과 선교기사단이 라트비아를 침입하여 리보니아국을 건립하였다. 게르만인은 도시지역에서 상인 무역인들로 활동하고 시골에서는 봉건귀족으로 행세하였다. 16세기까지 수도 리가는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의 주요 구성도시였다. 또 이 시기에 종교개혁과 루터교가 라트비아에 수용되었다. 1591년 리보니아는 분열하여 폴란드에 사실상 종속되었다가 1629년에 스웨덴에 점령되었다. 러시아와 스웨덴의 전쟁 결과로 1721년에는 대부분의 라트비아 영토는 러시아 통치하에 들어갔다.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는 독립을 선포하고 소련은 라트비아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1922년 라트비아는 민주주의 정부를 도입하는 헌법을 채택하였다. 곧이어 국내적으로 농지개혁을 시행하고 서유럽에 대한 농산물 수출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세계경제불황과 함께, 의회가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1934년 수상 칼리스 울마니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위주의 통치를 시행하였다. 1929년 체결된 독·소불가침조약하에서 라트비아는 소련과 상호원조조약으로 라트비아 내 소련 군사기지를 허용토록 강요받았다. 1940년 소련의 압력으로 라트비아는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언하고, 그해 8월에는 소연방에 가입하였다. 1941년 독일이 점령하여 독일군은 1944년까지 주둔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소비에트 라트비아가 재건되고 라트비아 공산당의 독재하에 소비에트화 과정이 진행되었다. 공산당 주도하에 금속, 기계공업의 도입과 화학공업의 발달과 함께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 강요된 산업화는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의 이민유입을 촉진하여 독립 이후 민족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공업부문의 급격한 발전은 농업부문을 정체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1950년대 초에 이르러 대부분의 사유 토지는 정책에 의하여 집단농장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산업화에 의한 경제적 독립성 증대는 라트비아 공산당 내에서 보다 큰 문화적 자율성을 요구하는 운동을 점증시켰다. 라트비아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의 재생은 라트비아어를 라트비아공화국 내의 지배적 언어로 유지할 필요성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의식의 성장은 점차 라트비아 문화와 문학의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족주의 운동이 고조되고 반소시위도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개방정책은 소련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촉진하였다. 1988년에 들어와 광범위한 반소 독립세력들이 ‘라트비아 인민전선(lpf)’을 형성하였는데 여기에는 지도적인 반정부세력뿐 아니라 라트비아 공산당 급진파도 합류하여 약 25만의 규모를 가진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조직으로 발전하였다. 1989년 8월에는 발트3국이 공동으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전체길이 620km에 달하는 ‘인간 사슬’ 시위를 벌여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의 몰로토프·리히트호펜 비밀의정서에 의한 소련 편입을 무효선언하도록 요구하였다. 1988년 라트비아 국어·국기와 같은 국가독립의 상징을 고안하는 것이 합법화되고 완전한 정치적·경제적 독립을 주장하는 라트비아 민족독립운동이 인민전선을 주도하게 되었다. 1989년 선거에서는 라트비아 인민전선 후보들이 의회 34석 중 26석을 획득하였다. 비슷한 독립운동이 이웃 발트 국가인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에서도 전개됨에 따라, 최고소비에트는 주권과 경제적 독립선언을 채택하는 데 이르렀다. 1989년 12월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라트비아 인민전선 후보들이 75%를 득표함에 따라 비(非)라트비아계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라트비아 민족주의는 확고부동의 것이 되었다. 1990년 1월 라트비아 최고소비에트는 공산당의 권력독점에 종언을 선언하고 소연방에 가입을 요청한 1940년의 의회결의를 비난하면서, 그 이전의 국기·국가문장 그리고 국가를 부활시켰다. 1990년 최고소비에트 선거에서 여러 정파로 구성된 라트비아 인민전선 구성원들이 전체의석 201석 가운데 131석을 차지하였고 선거 후 이름도 최고회의로 바꾸었다. 59석을 차지한 라트비아 공산당도 분열하여 독립지지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었다. 1990년 5월 1일 최고회의에 대립하는 라트비아 의회가 비공식적 선거를 통하여 소집되었다. 특히 의회는 1940년 독립 당시 시민과 그 후손만을 유권자로 한정하였는데, 급진적 독립운동단체인 ‘라트비아 민족독립운동(niml)’이 의회를 지배하였다. 의회는 라트비아를 점령상태로 선언하고 독립에 의한 점령상태 해결과 소련군의 철수를 채택하였다. 라트비아의 독립선언은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보다 늦은 것이지만, 소련 당국을 자극하여 독립선언 무효화 포고령을 내리게 하였다. 1990년 12월까지 라트비아 내 비 라트비아계의 항의와 파업이 계속되고, 1991년 1월에는 소비에트 통치를 재건하려는 파와 독립파 간의 무력충돌이 있었다. 1991년 3월 구소련 9개 공화국에 의하여 제안된 신연방조약 참여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 반대하여, 그 대신에 “민주적이고 독립된 라트비아를 원하는가?”라는 국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75%가 독립을 지지한 결과가 나왔다. 1991년 8월 소련 공산당계가 권력장악을 시도하는 쿠데타를 행하였으나, 긴급 소집된 최고회의에 의하여 실패하고, 완전독립의 선언, 공산당 불법화, 친공산당계 인사 체포 등의 조치가 시행되었다. 라트비아의 정치 1991년 8월 21일 선언된 라트비아 독립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라트비아의 독립을 신속하게 승인하자 소련국가평의회도 1991년 9월 승인하였다. 또 라트비아는 9월 17일 유엔에도 가입하였다. 완전독립에도 불구하고 라트비아 시민권에 관한 심각한 정치적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최고회의는 1940년 이전부터 시민이었던 자와 그 후손에게는 자동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하지만, 다른 주민에게는 귀화를 신청하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많은 러시아계와 다른 슬라브계는 16년 이상 라트비아 거주와 라트비아어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는 귀화조건에 항의하고 있다. 정치제도는 단원제인 100석의 최고회의가 의회체로서 최고기관이다. 1998년 10월 선거에서 라트비아의 길(lc) 21석, 국민당(tp) 24석, 조국과자유당(tb/lnnik) 17석, 사회민주동맹(lsd) 14석, 국가화합당(tsp) 16석, 신당(jp) 8석을 각각 차지하였다. 현재 대통령은 비케-프레이베르가로 1999년 6월에 최고회의에 의해 선출 되었다. 라트비아의 경제 라트비아는 소연방시대에 비록 소비에트 중앙계획경제에 연계된 상태이지만, 라트비아의 경제는 크게 발전하였다. 공업화로 농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8년 기준으로 7%이며, 농업인구는 16%에 지나지 않는다. 주된 농업부문은 낙농업과 돼지사육이다. 주요 작물은 곡물·감자·사탕무·채소·과일 등이다. 공업생산이 1998년 기준으로 국민총생산의 28%를 차지하고, 고용의 41%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 공업부문은 기계제조·금속, 그리고 화학 및 석유화학산업이다. 라트비아는 이탄과 약간의 철광을 제외하면 자연자원이 매우 빈약하기 때문에 원료는 수입에 주로 의존한다. 수출액은 1998년 기준 19억 달러로서, 주요 품목은 목재와 목재품, 기계 장비류의 순이다. 라트비아는 목재·목재가공품 외 cis(독립국가연합:구소련)에서 수입하는 철·석유제품을 서양에 재수출하거나, 다른 지역으로부터 반입되는 원료로 생산되는 과학장비 기계, 그리고 많은 소비재 상품을 다시 다른 지역(주로 서양)으로 수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라트비아의 무역상대국은 1990년대에는 러시아를 비롯한 과거 소연방 국가들이 64.1%로 주를 이루었는데, 독립 이후에도 라트비아의 수입품은 cis에의 의존도가 여전히 증대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1980년대 후반 외국무역의 자유화에 따라 외국 상대국과의 접촉이 증대되고 합작회사의 설립이 급증하고 있다. 1990년대 초 라트비아 정부는 시장경제 도입을 의도하는 개혁을 추진하고, 라트비아 통화인 라트를 발행하였다. 지금 라트비아 경제는 독립을 획득한 이후, 러시아 및 구소연방국가와의 연계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보다 넓은 세계로 국가경제를 통합시켜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1997년 현재 수출 상대국은 러시아 21%, 독일 14%, 영국 14%, 스웨덴 8%이다. 수입 상대국은 러시아 16%, 독일 16%, 핀란드 10%, 스웨덴 8%이다. 라트비아의 경제-교통 라트비아의 자랑은 무엇보다도 러시아라는 거대한 육지를 배후지로 하고 발트해에 면한 리가만에 좋은 항구를 가진 입지적 장점이다. 라트비아는 원료자원은 매우 빈약하나 발트해의 좋은 항구와 이를 러시아와 연결하는 철도·도로망을 잘 갖추고 있어 특히 소련 지배하에서 급속히 공업화되었다. 라트비아의 수도이자 최대의 항구인 리가항은 다우가바강 하구에서 15km 상류에 있는데, 수심이 10m이며 19개의 부두를 가지고 수출입 화물을 주로 취급하고 있다. 겨울에는 결빙하는 단점이 있으나 쇄빙선를 활용하여 운항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러시아 원유수출이 벤스필스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고 1993년 1,630만톤이 수출되었다. 근래에 컨테이너 터미널이 건설되어 시베리아 철도를 통하여 극동의 나호트카와 리가항이 연결됨으로써 화물취급량이 크게 증대되고 있다. 제2항구인 벤트스필스항은 러시아 석유수출항으로 유명하다. 발트해 연안에는 많은 휴양지가 있다. 1997년 현재 도로 연장은 55,942㎞이고, 포장율은 38.3%이다. 철도연장은 2,406㎞로 전화율은 11.2%이다. 라트비아의 사회 라트비아는 1918년부터 포괄적인 초등교육 체제를 도입하였다. 소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됨에 따라 소련의 교육제도가 도입되었다. 1988년부터 라트비아어가 주된 교육 언어로 채택되었고, 국어로 됨에 따라 모든 학생들에게 라트비아어 교육이 필수과정으로 되었다. 1997년 현재 리가기술대학과 라트비아대학을 비롯한 18개 고등교육기관과 5만 1,500명의 학생이 고등교육기관에 등록 되어 있다. 1989년 당시 의료서비스에 대한 지출이 국민소득의 3.6%에 달하고 병상수는 1만 명당 147개였다. 의사 비율이 국민 200명당 1인의 세계 최고수준으로 세계적 의료복지수준을 갖추고 있다. 사회복지는 국가가 책임지고 있다. 1992년 현재 176개의 병원과 인구 만명당 병상수는 130개이며 의사 수는 인구 만명당 41명이다. 1993년 65만 7,700명이 사회복지의 수혜 혜택을 받고 있다. 환경 악화는 1980년대 대두한 사회운동 및 정치집단의 주요 운동주제였다. 다우가바강에 대한 오염, 공장배출물과 라트비아 주둔 러시아군에 의하여 발생되는 공해가 환경단체의 주요 관심사이다. 1996년 현재 도시화율은 73%이며, 수도 리가의 인구는 91만 455명이다. 다른 주요 도시는 다우 가필스(124,910), 리에파야(114,486), 에가바(74,105) 등이다. 라트비아의 문화 라트비아어는 리투아니아와 마찬가지로 인도유럽계 언어의 발틱줄기에 속한다. 라트비아어로 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1585년에 출간된 교리문답집에서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러시아인과 다른 슬라브계 사람들의 유입으로 인하여 라트비아 주민의 거의 절반이 라트비아어를 쓰지 않고 있다. 대신 대부분의 라트비아인들은 러시아어나 독일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라트비아 문화는 민속문화와 그들의 땅에 대한 애착에서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 의식을 가끔 고대관습과 섞이기도 하며 이교도 상징들의 흔적이 가끔 응용예술 분야에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고대민요는 19세기 중반에 크리스자니스 바론스(krisjanis barons)에 의하여 최초로 수집되고 출판되었다. 1888년 안드레지스 펌퍼스(andrejs pumpurs)의 방대한 서사시 lacplesis의 출판은 현대 라트비아 문화의 여명을 밝혔다. 자니스 라이니스(janis rainis)는 라트비아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작가이다. 현재의 유명한 라트비아 시인 이만츠 지오도니스(imants ziedonis)는 라트비아 문화의 발전을 위해 기금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라트비아에는 대부분 리가 (riga)시에 많은 수의 극장, 오페라단, 교향악단, 서커스단이 있다. 라트비아의 과학기술 1991년 라트비아의 라텔콤이 민영화되었고, 20년간의 공중전화 독점 운영권을 확보하였다. 우편, 통신, 방송 등에 대한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곳은 교통부 산하의 통신과이다. 통신 사업자로는 1992년 공중망 사업자로 설립된 라텔레콤이 있고, 51%의 지분을 정부가 소유하고 있다. 1996년 현재 본회선수는 74만 회선이고, 회선 보급률은 29.8%이다. 2004년까지 전화 보급률을 36%로 올릴 계획을 진행 중이다. 1997년말 현재 라텔레콤은 22만 40 디지털회선을 포함한 74만 8,000회선을 운용하고 있다. 독립직후, 모든 국제망은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경유하였으나, 1995년 국제 교환기가 도입되어 1996년부터 가입자들은 직접 국제 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셀룰러 전화 가입자수는 1998년 현재 8만 4,600명이고, 보급률은 3.2%이다. 인터넷망은 두개의 사용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저가의 학술망이고, 다른 하나는 초고속망으로 노르딕 넷을 경유하여 접속이 가능하다. 1997년말 현재 약 30개의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가 있다. 전국방송을 실시하는 방송사는 민영방송사인 라트비아 인디펜던트 텔레비전(lnt)과 공영방송사인 라트비자스 발스트스 텔레비지아(ltv1, ltv2)가 있다. 지역방송사는 민영방송사인 리가스 tv가 있다. 라트비아의 한국과의 관계 라트비아와 한국은 라트비아의 독립 직후인 1991년 10월 22일 외교관계를 맺었다. 1995년 4월에 정종욱 대통령 특사가 라트비아를 방문하였고 1996년 발디스 비르카브스 라트비아 외무장관이 방한 하였다. 1996년 양국간에 투자 보장협정이 체결되었다. 1997년 대(對)한국 수출은 314만 달러, 수입은 1,002만 달러이고 주요 수출품목은 수산물, 화학제품등이다. 수입품목은 자동차, 섬유류, 계측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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