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검색 결과(39);
-
-
-
[영화리뷰] 디스트릭트9 - 안전한, 안전할뿐인.
디스트릭트9은 안전합니다. 그래서 안전할 뿐입니다.
제가 쓴 이 문장을 더 설명하기 위해서,
일단 매트릭스에서도 자주 인용되었던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을 살펴보죠.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 시뮬라시옹(Simulation)이고
모든 실재의 인위적인 대체물을 '시뮬라크르(Simulacra)'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은 다른 아닌 가상실재, 즉 시뮬라크르의 미혹속인 것이다.---
장자의 나비와도 일견 통하는 부분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실제로 전환된다' 이 부분입니다. 장자의 나비는 실재와 파생실제가 혼재된 부분에만 주목했지만, 보드리야르는 파생실제가 언젠가는 실제를 대체한다고 믿고 있는 의미의 부분. 이런 거죠.
그런 의미에서 디스트릭트9은 어떻게 보면 가장 추레한 시민사회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작품 자체가 그런게 아니라, 작품과 작품 외부의 현상들로만 연결지어 보자면, 시민이 실재에 대해 냉담한 모습이 극렬화된 현상이랄까요.
디스트릭트9은 외계인을 차별이라는 주제를 드러내는 요소로 만든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을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업적으로 현명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일단 차별이라는 부당한 모순을 내세워 극을 이끌어나가려는데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극에서 외계인의 역할은 생각보다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외계인이라는 것이 주체로 스며들어오지 못하고 객체로만 남기 때문입니다.
외계인들은 디스트릭트9에서 삶을 영위하지만 그건 우리 지구의 슬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슬럼에서 살아가는 입장들도 첨부되어 주면 좋겠죠.
그런데 문제는 외계인들의 외양과 행동들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그 외계인의 입장에서 심화되고 공유되는 시각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일견 그 브라질의 특수경찰들을 중점으로 맞춘 영화 엘리트 스쿼드에서 보이는 입장과 마찬가지입니다. 외계인은 한 번도 자신들이 처한 입지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상황, 그 외 어떠한 에피소드들도 외계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 골때리는 것은 그런 표현의 입장이 인간들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왜 차별하는지, 어떻게 차별하게 되는지, 뭐가 싫은 건지, 그들과 이야기는 할 수나 있어봤는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 따위는 이미 은하계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차별이라는 주제는 점점 희석되고 안전한 영역으로만 남게 됩니다.
즉, 차별의 폭력적 외양에만 집착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차별은 나쁜 것이라는 단순한 메세지만 전달합니다.
그러다보면 차별이라는 상황의 복합적인 내면들을 무시하게 되버리는 겁니다.
차별을 하는 주체나 차별을 당하는 객체나 다 껍데기만 남는 거구요.
태생 자체가 어차피 사건 위주의 구성으로 흐르게 된 것도 있고, 피터 잭슨이 극비로 했다! 라는 슬로건도 있으니만치 어차피 그렇게 흘러갈 극 구성인것도 뻔히 알고, 나름 역지사지 플롯이나 희생이라는 플롯으로 꾸며넣은 것도 어느 정도 영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차별'을 논한다는 건,
말 그대로 매트릭스의 배터리가 되기 위한 초기단계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실제의 상황을 보죠. 지금 한국에서도 외국인 차별반대 운동과 외국인 차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문제는 서로 다른 측면을 보고 있습니다. 외국인 차별반대쪽은 나름대로 국가시스템화된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깊숙히 자리잡은 미개에 대한 파시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반면 외국인 차별 쪽은 그들이 한국에서 실제적으로 시민에게 해를 입힌 것과 그들이 노동력을 바치고 해외로 빼내는 재화라는 측면을 바라보죠.
이 둘은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없습니다. 아무리 한국 내에서 다문화가정을 만들고 난리를 치고 해도, 그 둘에 대한 문제가 희석되고 어느 정도의 법 혹은 정서라는 접점을 마련하지 않는 한, 이 두 움직임과 견해는 계속 평행선을 달릴 겁니다. 그렇다면 실제 문제에서 이 두 카테고리의 접점은 과연 어떤 것이 마련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외국인들이 이 상황에 어떻게 스며들 수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될 겁니다.
만약 작가가 이러한 부분에서 인간과 에이리언을 다루고, 파고들어갔다면
표현하고자 하는 상황은 훨씬 더 달라졌을 지도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진짜 실재에 내재되어 있는 동인들, 혹은 요소들이 상업적 의도에 의해 배재된 결과물을 가지고 진짜 '차별'을 이야기할 수는 없겠죠. 즉, 차별이란 요소는 그저 그저 포장지에 불과할 뿐 그렇게 큰 의미도 아닐 뿐더러, 무엇보다 논쟁의 핵심들을 지나쳐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일견 봉준호의 괴물을 떠올리게도 하는 구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뮬라시옹을 만들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일단 사람들이 그 주제나마 환기를 해야만 한다는 절박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역설적으로 시민사회의 냉담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구요.
사족 1. 주인공은 아무런 현실의 존재감이 없는 NGO적 띨빵이로 보이다가 역지사지의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다고 역지사지를 제대로 체험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현실에 대한 순응으로 끝나는 것은 그래서 희한합니다. 자신의 급한 상황을 개선해보고자 그렇게 극중에서 노력했던 자가, 결과적으로 자신이 외계인이 된 현실상황에 대해서 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꽃이나 접는다는 게 되려 우습습니다. 그런 캐릭터라면, 이제 좀 더 고뇌의 부분과 함께 외계인에 대한 권익 향상에 대해서 행동하는 장면이라도 나왔어야 할 겁니다.
이런 부분에서 캐릭터들이 껍데기가 되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헉 스포가 되어버렸다)
사족 2. 전 오히려 왓치맨의 메타포들이 훨씬 더 차별이란 명제에 복합적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희한한 건 '그 분'의 작품은 왜 영화로 만들면 당대엔 재미없다가 나중에 씹을 수록 재미가 있는 것인지 ㅋㅋㅋㅋㅋ
사족 3. 더 희한한 건 무기가 정말 대박으로 강한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학살에 실험까지 당하는 외계인?
-
[영화리뷰] 리뷰스크랩.2 '300'-즐겨라, 그대를 위한 전장이리니
이하 글은 egloos에서 활동중인 wideawake님의 블로그 ordinary story에서 발췌한 글임을 밝힙니다.
논산 훈련소에 비가 내린다. 저 땅끝 어딘가부터 스멀스멀 땅거미가 기어오고, 점차 검어지는 하늘 자락 너머로 또 하루가 저물어간다. 그 지리한 매일의 막바지에서, 나는 앞섶에 품은 편지 한 장을 문득 떠올린다. 한달이란 훈련 기간은 짧되, 사회서 떨어진 이*일간의 유배는 너무도 길기만 하다. 아, 정말이지 나는, 이젠 참기 힘들다 하리만치 오래 영화와 떨어져 있었다. 그저 나는 죽었소 복창하기엔 충분하도록 길고 더럭 생각의 끈을 놓아버리기엔 조바심나게 짧은 기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상상하고 또 상상해보는 일 뿐. 내무실 창문 밖으로 어둠을 덧칠하는 빗소리 가운데서, 그저 고맙기만 한 이들이 편지에 띄워준 영화 잡지의 조각조각을 끼워맞춘다. 와이드스크린 위에서 상영될 조도로프스키의 영화를 떠올리고,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신작을 직접 확인하고픈 욕망을 억누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광적인 흥분으로 기다려왔던 잭 스나이더의 '300' 속 전장의 풍경을 그려본다. 지금으로선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스크린 속의 황홀경을 상상하면서.
그리고, 결코 올 것 같지 않던 4월이 왔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휙휙 지나쳐가는 바깥 세상은 잠시도 멈춰서 기다려주지 않았고, 나는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 그리고 '파운틴'을 극장에서 볼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아아 비정한 사회여, 안타까운 시간이여. 진정 울려고 내가 나왔더란 말이냐. 하지만 여기서 잠시, 눈물을 거두고 돌아보자니, 오호라, 아직도 '300' 만은, 잭 스나이더의 전사 300인은 여전히도 박스오피스 정상에 우뚝 선 채 뒤늦게 도착한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 옛날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그랬던 것처럼, 죽음도 물러세울 수 없는 기세를 드높인 채. 그 흩날리는 핏빛 망토 자락이, 서슬 푸른 창날 빛이 문득 아찔하게 눈을 찔러든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이 아드레날린 솟구치는 신화를 아직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그저 황홀할 뿐.
'300'을 둘러싸고 진행된 논쟁에 한발 늦게 와 닿으면서 가장 먼저 당황했던 사실은, 이 영화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품고 있는 (혹은 무의식중에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서구 우월주의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고 있었다. 영화에서와는 달리 페르시아는 당시 유럽 국가들보다 월등한 문명을 이루고 있었고, 자유를 억압하는 폭군과 일그러진 괴물들로 그려진 그들의 이미지는 백인 우월주의의 투영에 다름아니라는 것, 또 약자를 외면하는 불평등과 철저한 군국주의를 기반으로 세워진 스파르타의 싸움은 어리석은 파시즘일 뿐 자유 운운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분명 '300'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관에는 그러한 면들이 있다.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는 '300'의 시선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지 모른다. 거기에다 그러한 거친 면들을 순화시키기엔 시나리오는 단순무식하기 짝이 없으며, 대사들은 지나치게 직선적이고, 극을 지배하는 논리는 편협하기 그지없다. 아마 우리가 아는 어느 다른 감독이 다른 식의 이야기로 이 소재를 풀어냈다면 모든 이가 받아들이기에 좀더 껄끄럽지 않은 작품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반대편으로 옮겨와 말하자면, 오히려 그러하기에 잭 스나이더의 '300'은, 역설적이게도 비로소 이 모든 논쟁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뮤직 비디오계에서 잔뼈가 굵어온 신예 '영화' 감독 잭 스나이더, 그는 데뷔작 '시체들의 새벽' 리메이크판에서 자신의 입지를 분명히 했다. 스스로가 충분하도록 이해하고 자유자재로 써먹을 수 있는 영상을 다루는 기술을, 최대한의 재미를 위해 써먹는다. 거기에 어떤 거창한 철학이나 이유 따위는 필요없다. 그저 관객들을 스크린 속으로 단숨에 빠뜨리는 것. 그에게 영상은 그 자체로 목적일 뿐, 그 어떤 수단이 아니다. 간혹 어느 식자들인가 로메로가 일구어낸 좀비의 메타포를 정신없는 속도 속에 함몰시켰다 비난했다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의미란 결국 말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후대 사람들이 붙이는 것. 내 생각에 그는 그저 로메로의 헤모글로빈 난무하는 좀비 세계가 미치도록 즐거웠던 것 뿐이다. 자기 식대로 재창조한 그 세계가 지금 관객들을 즐겁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 마찬가지로 '300'의 세계 속에 들어선 그에게 이 세계를 둘러싼 그 어떤 정치적인 논쟁 따위는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속에 들끓는 하드보일드한 정서를, 300명의 전사들의 신화를 스크린에 옮겨 놓는데만 관심이 있을 뿐. 그가 청소년기부터 사랑해 마지않았다는, 또 '시체들의 새벽' 이전부터 영화화를 꿈꾸어 왔다는 '300'의 전장 위에서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우직하다.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 극의 매무새를 손보기보다는, 원작 그대로를 밀고 나간다. 영화화를 위해 원작에 없는 요소를 덧붙이는 데 있어, 그는 딱 할 만큼만 한다. 이 신화를 품기에 걸맞는 두 시간 가량의 러닝 타임, 정확히 그 정도만큼만 이야기의 살을 불려둔다. 너무나 '그래도 이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어?' 라는 식의, 성의없어 보일 정도의 툭 던지고 빠지기. 그래, 그리고 그 나머지는? 당연히도, 오로지 이 전장의 풍경을 전시하는데 그대로 쏟아붓는다. 페르시아 대군과 맞선 300인의 스파르타 전사들, 잭 스나이더의 카메라가 춤추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창날과 검끝이 충돌하고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친다. 뼈가 바수어지고 살점이 썰려나가며 핏줄기가 사위를 물들인다. 죽음과 영광이 바로 여기에 있다. 거칠 것 없이 뻗어나가는 검무 위로 지축을 뒤흔드는 헤비메틀의 굉음과 끝을 모르는 카메라 워킹.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을 황홀한 비주얼의 전시, 보이는가. 프랭크 밀러가 종이 위에 그려냈던 세계가, 그 흥분 그대로 스크린 위에서 살아 움직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300'은 결코 잘 만들어진 서사시가 아니다. 위에서 말한 그 어느 감독이 '300'을 다른 의도로, 어떤 종류의 또 다른 철학을 담아 만들어내고자 했다면, 역사 속에서 자유를 위해 싸운 전사들을 말하는 좀더 근사한 서사극이 탄생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러나 그 극의 화법이 매끄러울수록, 그 속에서 자유니 영광이니 하는 이름이 영리하게 포장될수록, 그 때에야 비로소 '300'은 정말이지 가증스런 서구 우월주의를 가득 담은 텍스트가 될 것이다. 그거야말로 프랭크 밀러의 '300'이 아닌. 그 어떤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리라. 나는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300'의 한국어판을 발견한 서점에서 선 자리 그대로 그 책을 읽어치웠다. 그 넓은 프레임에 가득 펼쳐진 정서란 것은 적어도 그 어떤 편가르기가 아닌, 단지 검 한자루에 영광을 걸고 믿는 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내들이 토해내는 숨소리였다. 단 300명의 전사들이 수백만 대군을 상대로 그들이 믿는 바를 한치도 굽히지 않는 풍경이 불러일으키는 정서, 그건 우리가 영웅담과 서사시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쾌감이다. 거기에 그 어떤 종류의 우월주의가 있는가? 편협합이라 부를 것이 끼어들 수 있는 틈이 있는가? 나는 거기에 그런 것은 없다 라고 말하겠다. '300'의 지나치도록 단순한 선악구분이 역겨운가? 그대는 왜 그토록 명쾌한 구분이 환기시키는 그토록 명징한 감정은 보지 못하는가. 잭 스나이더가 최고의 비주얼과 동시에 정치적으로 공정해지길 바라는가. 그건 흡사 켄 로치에게 왜 그런 시선을 지녔으면서 흥행영화를 찍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것과 같다. 그건 이미 잭 스나이더의 영화가, '300'이 아니다.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스타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엔딩 크레딧의 거친 아트웍처럼, 잭 스나이더가 '300'을 통해 불러일으키려 하는 것은 간명할 뿐이다. 흙먼지 자욱한 거칠은 땅 위에 솟구치는 핏방울의 뜨거움을, 검과 방패를 들어올린 전사들의 팽창된 근육을, 죽음과 맞닿는 순간에도 영광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외치는, 죽어가는 사내들의 한껏 폭발하는 하드보일드를 즐겨라. '300'의 전장은 단지 그러한 곳으로 충분하다. 이곳은 그럴 준비가 된, 그대를 위한 전장이다.
원이형작성일 2009-03-01추천 1
-
[영화리뷰] ..젓가락 행진곡
1. 오,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이란게 한없이 가볍고 간사한 것이라서, 아무리 예쁜 얼굴이라도 하루종일 쳐다보고 있으면 질리기 마련이다..영화라고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게되는 국산영화나 헐리우드 영화의 경우 차별화되지 않는 진행 방식이나 스토리에 금세 식상함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래서 영화를 좋아하는 매니아들의 경우 숨겨진 명작(?)을 찾아 방황(?)아닌 방황을 하기 마련인데, 그러다가 자신의 맘에 드는 영화를 발견했을 때 희열이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다.
거두절미하고, 이번에 소개할 <누들>은 이스라엘에서 만들어진 보물같은 영화다...
어깨에 힘 들이지 않고 차분하게 진행해 나가는 스타일이나, 행동(액션?)을 중시하지 않고 표정연기를 포착하는 섬세한 연출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는데, 그래서 자료를 찾아봤더니 아닌게 아니라 여성 감독의 작품!!
<누들>을 찍은 '아일레트 메나헤미'는 < Divorce>로 이스라엘 오스카상이라고 일컬을만한 상을 수상했던 이력이 있는만큼 자국에서는 이름 꽤나 알려진 명사인데, 하지만 정작 그녀가 유명해진건 영화보다는 동부 아시아 지방을 여행했던 체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 < Doing Time, Doing Vipassana>를 통해서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하여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서 Golden Sipre를 수상했으며 미국 범죄와 비행 자문회로부터 PASS Award를 받았다. 그래서 그럴까?
<누들>은 화려한 볼거리 보다는 조밀하게 짜여진 사람과의 관계에 더욱 더 치중한 듯한 느낌을 갖게한다.
따라서 사건 위주로 전개되는 종적인 배열 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 화합의 과정들로 이루어진 횡적인 배열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자칫 이런 배열은 짧은 시간에 메시지를 전달해야하는 영화의 특성상 산만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이 여류감독은 자신의 가진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이런 단점들을 훌륭하게 극복해 나간다..
굳이 <누들> 뿐 아니라 요즘 국내에 소개되는 이스라엘 영화들을 보면 헐리우드 영화들처럼 단편적인 감각에 치중하기 보다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소소한 삶을 주로 다루면서 그들만의 언어로 새롭게 승화시켜 나간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영화에 대한 흥미가 단순히 낯섦이 주는 신선함 때문이 아니라, 꽤나 높은 수준의 퀄리티를 확보하면서 얻게되는 감동이라는 점이다.
나의 경우 영화의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척도는 영화가 주는 감독의 메시지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나서 내가 얻게되는 상상적 경험의 밀도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감독의 전언보다는 그 표현을 내 것으로 되돌려줄 수 있는 강력한 정서적 감염력을 가질 때에 좀더 의미롭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베를린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레몬트리>, <오르>에 이어 3년 만에 칸 영화제의 황금카메라 상을 수상한 <젤리피쉬>, 그리고 이미 국내에 개봉했던 <밴드비지트>등이 매우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는데, 혹 이 영화들을 접할 기회가 있다면 절대 놓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2. 관계가 주는 오묘함..
<누들>은 갑자기 엄마와 생이별하게된 꼬마 이방인의 '엄마 찾아주기' 프로젝트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묘사에 더욱 주력하는 듯한 느낌이다.
스튜어디스로 근무하고 있는 미리(밀리 아비탈)는 두 남편과 아이를 잃었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자신이 '재수없는 여자' 때문이라고 믿는다.
자신이 불행을 부른다는 인식은 세상과 어떤 의미있는 접점도 마련할 수 없다는 자조를 낳게되고, 타인(하물며 가족까지도)과의 관계에 대해여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이렇듯 그녀의 잠재 의식 속에는 세상과 타협을 거부하는 허무주의적 환멸의식이 깊게 자리잡고 있다..
그녀의 까칠한 언니 길라(아낫 왁스만)는 남편과의 불화로 현재 별거 중에 있으며, 동생 미리의 집에서 딸과 함께 얹혀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길라의 남편과 미라는 같은 직장에 근무하면서 서로의 고민을 공유할만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두 자매는 그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고 있다..
따라서 두 자매의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애정 행각을 벌이는 '삼각관계' 쯤으로 오인하기 십상이지만, 정작 안을 들여다보면 훨씬 복잡하고 오묘하다..
예컨데 두 자매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한 '사랑 불감증'을 앓고 있다.
둘은 '방문을 안에서 걸어잠그는' 유폐의식의 심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미리의 경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이별이고 길라의 경우 자신이 선택한 이별에 속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가족이면서도 '소통의 단절'을 느끼는 미묘한 상황이다.
둘은 분명 같은 공간,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조금도 타인의 틈입을 허용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고독한 삶을 힘겹게 견뎌내고 있을 뿐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리와 형부의 관계도 애매하다.
미리가 형부에게 다정하게 대했던 것은 자신이 겪었던 '이별의 아픔'을 언니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상황이었지, 결코 남녀 간 애틋한 마음 때문은 아니다.
따라서 두 자매의 '소통 부재'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부족에서 생긴 오해 때문이라는게 감독의 전언이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길라가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그녀의 별거는 '남편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는 뚜렷한 이유 때문이지만, 다른 사소한 이유들을 갖다 붙이면서 자신의 부정을 은폐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남편'과 동생 미리와의 관계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예컨데 세상의 보편적인 질서를 상징하는 '가족'을 해체할 용기는 자신에게 없고, 다른 핑계 거리를 찾고 있다면 이해가 될까? 그녀는 이 과정에서 정상과 비정상, 참과 거짓의 기준이 마구 뒤섞이고 전도되는 '사랑의 정체'에 대해 '냉소주의'로 일관한다.
가령 그녀가 남편과 결혼하게된 것은 한순간 착시에서 비롯된 잘못된 선택이지만, 그렇다고 그것과 화해하거나 타협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로지 점점 황폐해져가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거나, 혹은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손톱을 기르는 일 뿐이다.
따라서 두 자매가 보여주는 불화 양상이야말로 무기력과 불감증에 빠진 채 소통의 부재를 겪는, 현대인들의 상실감을 보여주는 한 극단이라고 하겠다..
3. 꼬마 이방인
그런 두 자매의 삶에 난데없이 한 이방인 꼬마가 끼어들었다.
생김새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여섯살의 중국인 꼬마..
미리의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가 한시간만 맡아달라 부탁하고선 행방이 묘연하여 떠맡게된 애물덩어리...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인 관계를 풀기도 어려운데, 또 다른 가닥의 인연이 어설프게 끼어들 채비를 하고있는 셈이다.
이놈이 아는 유일한 언어라곤 '나는 중국 어린이입니다'라는 말 뿐..
그나마 언니하곤 같은 세대, 같은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소통 부재의 상황이었지만,
요 꼬맹이는 국적과 언어, 사고방식이 자신들과는 판이하게 달라, 소통 방법 자체를 고민해야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앉은 자리에서 몇시간씩이나 꿈쩍도 하지않고 엄마를 기다리는 의뭉덩어리..
제목으로 사용된 <누들>은 중국인 꼬마가 국수를 곧잘 먹어 미리 가족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하지만 국수의 어원인 'Noodle'이 라틴어 'Nodus(매듭)'에서 온 걸 감안하면 관계의 매듭을 강조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처럼 영화의 초반부는 엄마가 아닌 그 누구와도 소통을 거부하는 꼬마의 반항적인 모습과, '중국어 사전'을 준비하면서까지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미리와 그의 가족들을 대비시키면서 소통이 단절되었을 때의 '답답함'을 설파한다.
이때 미리 가족이 느끼는 '답답함'이란 포크를 사용하던 그들이 처음 젓가락을 접했을 때의 답답함이다.
국수를 포크로 찍어먹을 수는 있지만, 국수는 역시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제격이다.
젓가락은 음식물을 찍어먹는 포크와는 달리 두 짝이 힘을 모아 음식물을 집어드는 도구다..
굳이 비유하자면 포크가 동물의 날카로운 발톱을 연상시킨다면, 새의 부리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은 서양인들에게는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물론 영화에서도 이 장면이 등장한다)
음식들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기 위해선 약간의 정성(?)이 필요한데, 그것은 두 개의 젓가락을 조화롭게 움직이면서 음식을 소중하게 들어올려야한다.
따라서 <누들>이라는 제목에는 위에서 언급한 '관계의 매듭'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만, 음식을 먹는 수단인 젓가락에까지 '너와 나로 대변되는 관계의 미학'으로 의미를 확장시킨 셈이다...
젓가락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선, 가늘고 기다란 막대 한쌍을 서로 어긋나지 않게 잡아야한다.
그리고 그 접점을 가운데 중지를 사용하여 절묘한 균형을 맞춰야하는데, 이때 음식을 들어올리려면 너무 세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은 적절한 힘의 배분이 중요하다.
따라서 감독은 '젓가락 사용'에 동서 문화가 충돌되는 접경지역을 설명하면서, 인간 관계를 어떻게 지속해나갈지에 대한 이중의 재료로 활용했던 것이다..
더구나 감독의 탁월한 센스를 느낄 수 있는 건, '국수 먹는 방법'에까지 메타포로 사용한 점...
미라 가족은 성급하게 국수룰 잘라먹으려고 하지만, 꼬마 이방인의 경우 긴 가닥을 자르지 않고 후루룩 삼킨다..
이런 행위를 두고 '어지럽게 얽힌 인연의 매듭'을 성급히 끊지 말라는 감독의 의도로 해석하려 든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하지만 이 영화의 핵심은 미리와 꼬맹이(누들)간 무차별적 나열로 환기되는 소통 부재의 상황이 아니다.
꼬마의 엄마를 찾아줘야한다는 지상 명제를 두고, 그동안 심각한 소통 장애를 겪었던 가족들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의 과정을 더 주목해야한다.
4. 우리는 만났지만, 우리가 만났을까?
오늘의 인간은 소통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정작 소통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는 기묘한 증상을 앓고 있으며, 이는 인간의 내적 분열의 근원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누들>이 인간 중심적인 시선은 현대에 대한 반성적 사유의 골자가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실은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결국 '소통'을 전제로 한다면, 인간의 소통이야말로 삶의 진실을 구현하는 시발점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언어'가 소통의 전부는 아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언어의 의미는 규정되고 통제받는다..
통제된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것들은 매우 일상적이고, 사무적이며, 실재하는 세계에 맞춰 규정되고 정리된다.
하지만 상세하게 규정된 언어에 담기지 않는 것이 있다..
객관의 세계에 분리되지 않는 주관적인 생각이나, 흔히 우리가 추상명사로 정의하는 감정 같은 것이다...
실제 '언어'로써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려면, 진정한 의미는 실종되고 허무함만 남게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소통을 위해선 일반적으로 규정된 언어 이전에, 상대를 고려하는 진정한 마음이 선행되어야한다...
<누들>에서 중국인 꼬마를 등장시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 할 것이다..
소통이라는 단어는 서로 뜻이 통하여 오해가 없는 것이라고 사전에 나와있다.
소통은 단위가 크든, 적든 관계의 기본 전제라 할만큼 서로의 열린 마음을 요구한다....
서로의 뜻이 통하기 위해선 우선 언어 이전에 상대를 고려하는 마음이 있어야하며, 오해가 없기 위해선 자신도 진실해야하고, 상대도 진실한 것으로 믿어야한다..
<누들>과 미리의 경우 언어의 차이로 인해 생긴 '소통 단절'이지만, 미리와 길라는 서로의 상처와 사연을 드러내기 싫어 마음을 닫아버린 소통의 어려움이다..
따라서 감독은 전자보다 후자의 경우가 더 심각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소통이라는 의미가 결국 '나'라는 존재와 변별되는 누군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면, 이말은 결국 '혼자서 살 수 없다'는 절대불명의 진리와 맞닿아있고, 이것이 바로 상대를 배려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셈이다...
문득 어린 왕자에 나오는 '우리는 만났지만, 우리가 만났을까?'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우리는 나(1인칭)-그것(3인칭)의 관계로 만났지만, 나-너(2인칭)의 관계로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도시는 언제나 사막같았고, 우리는 언제나 외로웠다라는 구절...
외로움의 원인이 '사람이 없음'이 아니라 '사랑이 없음', 즉 '관계의 부재' 때문임을 알려주는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들은 수없이 많은 인연과 만남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지만, 상대를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는 3인칭으로 취급해버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던 건 아닐까?
서로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응답하며 배려할 때, 비로서 우리가 사는 이세상이 '사물의 세계'에서 '의미와 가치있는 세계'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누들>의 대사 중 '네 언니라서 미안해'라는 길라의 말에 가슴 뻑뻑한 통증을 느꼈던 것은 지금껏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관계'에 대한 반성 때문일 것이다.....★★★★☆
덧붙이는 말 :
엄마를 찾아 떠난 베이징의 레스토랑 이름이 더블 해피니스(이중의 행복)였던 것이 사뭇 의미심장하다....
-
[영화리뷰] 소모와 탕진의 시대에 던지는 경고
1. 풍경의 폐허..
먼 미래...
흥겨운 노래가 흐르면서 카메라는 우주에서 지구로 미끄러지듯이 활강한다..
버드 뷰의 카메라는 금속 파편을 뚫고 잿빛 구름을 지나 흐릿하게 서 있는 거대한 빌딩들을 비추지만, 가만 보면 빌딩들의 모습은 마치 그 외양을 쓰레기로 뒤덮은 듯한 황량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노랫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쓰레기 더미 사이로 움직이는 작은 물체...
누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그 물체는 다름아닌, 가슴에 WALL-E라고 새겨져 있는 작은 로봇..
카메라는 계속하여 이 기이한 물체의 심상찮은 행동을 쫓아가면서 황폐해진 풍경을 비추는데 주력하는데,
초반부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단서를 종합해보면 영화의 배경은 2810년....
당시 쏟아지는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하여 지구인들은 골머리를 앓았던 것 같고, 주유소, 은행에 걸쳐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재벌기업 BnL이 쓰레기 수거/처리용 로봇을 개발했던 것 같다...
WALL-E는 대량생산된 무수한 로봇에게 부여된 단순한 제품명이다.
지구 폐기물 분리수거 로봇이라는 뜻으로 WALL-E , 즉 Waste Allocation Load Lifter-Earth Class의 머리글자를 따서 작명했던 것이다...
그것을 개발한 회사가 거대 기업 바이 앤 라지(Buy n Large)라는 점을 고려하면 월마트를 암시하는 것 같다는 주변의 의견도 들린다.
이렇듯 현대의 문제는 소모와 탕진이 긍정적인 기능을 상실하고, 맹목적인 소비와 남용으로 전락한 데 있다.
현대사회에서 소모와 탕진은 사회적 축제와 분배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끔찍한 사회적 폭력이 되었다.
대량소비, 대량 생산, 대량학살은 본질적으로 같은 말과 행위가 된 것이다.
이 모든 행위의 목적은 단 하나, 자본주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 속에서 무차별적으로 탕진되는 최대의 자원은 인간과 인간의 삶이다.
탕진은 더 거대한 탕진을 낳고, 악순한의 탕진 속에서 생산과 탕진의 차이는 지워진다.
사회에 의해 탕진되면서 스스로를 탕진하는 이중의 불행 속에서 현대인은 파멸과 죽음의 폐쇄 회로에 유폐된다.
자본주의가 양상한 잉여의 욕망들이야말로 진짜 죽음에 맞먹는, 존재의 근거를 사멸하는 무서운 힘이다.
이렇듯 <월E>의 초반부는 죽음의 폐쇄회로에 유폐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황량한 풍경을 묘사한다..
풍경의 폐허는 폐허의 풍경과는 다르다.
폐허의 풍경에서 폐허가 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안의 그 무엇이지만, 풍경의 폐허에서 폐허가 된 것은 풍경 그 자체다..
폐허에도 레벨이 있다면 그 최후 단계는 폐허의 풍경이 아니라, 풍경의 폐허이다.
<월E>에서 보여주는 풍경이 바로 풍경의 폐허이다..
더이상 풍경이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부서질 것도 없는 완벽한 폐허 상태의 지구를 그리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생명'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오로지 영혼이 없는(아니 영혼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로봇 월-E만이 혼자 쓸쓸히 이 버려진 땅덩어리를 지키며 살아갈 뿐이다....
인류가 모두 떠나 버린 지구에 남아 홀로 지구를 지키는 로봇 이야기!
과다한 소비주의로 쓰레기 더미가 되어버린 지구를 전 인류가 떠나면서 청소용 로봇을 풀어놨는데, 700년이 흐른 다음, 모든 로봇이 멈추었는데 단 한대의 로봇이 남아 멀쩡히 청소를 계속한다는 이 기발한 발상은, 1992년 스탠톤 감독을 비롯한 픽사의 창립 멤버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나왔다고 한다...
스탠튼 감독은 '우주에 남겨진 가장 인간적인 존재가 결국은 인간들의 만든 작은 기계'라는 컨셉이 상당히 신선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는데, 하지만 곧바로 영화화되지 못한 채 때를 기다려야 했다..
소재의 특성상 보다 뛰어난 기술력을 요구했으며, 그에 따라 예상되는 제작비 또한 엄청난 규모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픽사의 축척된 기술력은 이 꿈의 프로젝트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고, 올 여름 드디어 우리 앞에 그 실체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월-E>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특히 제작자인 짐 모리스의 노력이 컸다.
그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1,2 편, <진주만>, <어비스>, <해피포터> 시리즈 세편 등을 통해 시각효과의 새 장을 여는데 기여한 인물...
여기에 관객들에게 보다 뛰어난 작품을 선보이려는 픽사의 의지와 맞물리면서 한 차원 높은 시각적 즐거움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2. 폐허의 원인
많은 사람들이 현대 문명이 갖는 폐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문명의 최대 향유자이면서도 비판자인 셈인데, <월-E>의 스토리도 언뜻 이런 현대 문명의 갖는 폐단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 것으로 오인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월-E>가 인간에 의해 창조된 '문명의 부가물임'을 감안한다면 이런 단순한 분류는 실질적인 무엇인가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는 환경 문제만 해도 그렇다..
마치 이 모든 결과가 '문명의 발달' 때문이라고 몰아붙이고 있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그것은 문명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 문명에 휩쓸리면서 관리를 소홀히 한 우리 책임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문명은 모든 실재와 본질적인 의미를 휘발시키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훼손하기 시작한 우리의 두려운 미래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의미를 희석시키고 더 나아가 아예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허상의 세계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을 맹신하는 사람들은 인류의 모든 문제를 과학이 해결해준다고 믿었고, 그것의 맹신과 시행착오를 통해 환경 파괴와 인간 존재에 대한 경시, 폭력과 파괴의 모습으로 변질되었다.
현대에서도 이런 모습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개인정보의 전산화, 디지털문명, 인간복제와 생명공학 등을 통해 유토피아적 환상을 꿈꾸지만 철학적 고민이 빠진 기술문명은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의 절망으로 이끈다.
생활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각종 기계들이 인간들의 행위를 대체하면서 겪게되는 필연적인 정체성 부재현상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본질과 인간 주체의 몰락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문명'을 전범으로 취급하는 것은 곤란하다..
인간의 반성 능력은 이에 대한 다양한 저항 기제를 만들어내고, 그 몰락을 지연시키고 차단하는 노력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핸드폰이나 이메일 사용을 예로 든다면 '공중전화' '우체국' '편지지' 등의 빛바랜 단어와 연관지으면서 이제 추억은 사라졌다고 탄식을 한다..
하지만 추억은 사라지는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새로운 문명 속에서도 얼마든지 추억은 생성되고, 간직될 수도 있다..
다만 우리가 그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비록 희망의 차원일지라도 미래의 시간은 시간의 낯선 변형을 얼마나 슬기롭게 극복하는가에 따라 다른 형태로 흐르게 될 것이기 분명하기 때문이다.
쓰레기 더미로 뒤덮인 황폐한 도시를 오가면서도 오염된 구름 사이 하늘의 별빛을 동경하고, 무욕의 자연을 갈망하는 것은 서로 모순된 자연과 문명이 충돌하지 않기를 바라는 감독의 내면 풍경이다...
그렇다면 <월-E>에서 진정 보여주고 싶었던 폐허는 문명의 발달에 따른 폐허 보다는, 각종 편의를 위해, 혹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인간 본연의 마음을 포기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경고 메시지에 가깝다..
어쩌면 폐허의 풍경 보다는 풍경의 폐허가, 풍경의 폐허보다는 인간 마음의 폐허가 더 심각하다는 감독의 전언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월-E의 러브 스토리가 애뜻하게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 기인하다고 하겠다..
3. 기계 천사 월-E
만일 천사가 존재한다면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까?
눈처럼 하얀 살과, 따뜻한 미소를 지닌, 그리고 겨드랑이에는 영락없이 날개를 단 그런 모습?
하지만 천사 본연의 임무가 인간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기 위함이라면, 더이상 비현실적인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천사의 모습은 시대착오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현대 사회를 가리켜 '기계가 천사가 된 사회'라는 말로 초월적 실재가 금속성의 물질로 현현되는 현 문명의 특징을 명쾌하게 간파한 바 있다..
막대한 기술력과 냉철한 이성을 지는 금속 문명의 시대에, 우리가 상상하는 천사의 모습이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현대의 천사는 차갑게 빛나는 금속의 피부와 정교한 내부 구조를 지닌, 거기에 강력한 엔진까지 탑재했다..
기계의 몸으로 육화한 현대의 천사는 휘황한 상품의 천국에서 일어나 인간의 손을 잡는다.
인간은 '기계 천사'의 헌신적인 수호 속에서 매일 꿈 같은 삶을 구가하고 기계 천사는 최첨단의 실험실에서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한다.
시간을 압축하고 공간을 이동시키는 자동차와 비행기, 무한대의 지식과 환상을 제공해주는 컴퓨터, 어디에 있든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휴대폰, 신이 새긴 생명의 지도를 해석해주는 유전자 기술, 몸의 형태를 원하는 대로 리메이킹해주는 첨단 성형 기구들..
이들을 두고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지는 '천사'가 아니면 달리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심지어는 인류를 파멸에서 구해줄 상상의 구제주마저도 기계 천사의 모습으로 예감된다.
영화 속을 누비는 터니메이터, 로보캅 등의 정의의 전사, 천사들!
이 미래의 기계 천사들은 시간과 공간, 생명의 한계를 가로지르며 사악한 무리에게서 인류를 구원한다.
기계와 천사의 비약적인 일치는 천사의 하강이 아닌, 기계의 눈부신 비상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제 기계는 기계 자체를 넘어, 근대의 메커니즘을 총칭하는 하나의 메타포가 된다.
하지만 '천사'를 창조한 것이 다름아닌 인간이란 전제에 이르고나면, 인간은 바벨탑에 이어 또 한번 신의 영역을 넘본 잘못을 저지른 셈이다..
신이 존재 유무를 떠나, '천사'는 신에 의한 창조물이어야 한다..
이말은 즉, 천사란 인간 정신의 궁극적인 표상으로, 능력에 우선하는 고결하고 순수한 그 무엇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근대의 인간이 신의 영역을 넘본 대가는 엄청난 재앙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기계가 천사가 되기 위해 사용한 모델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기계와 천사는 모두 인간을 변형하여 창조한, 인간의 확장 파일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예전의 우리가 상상하는 천사는 인간에 우선하는 신성함이 있었다면, 현재의 기계는 인간의 대체품으로써, 훼손된 것은 다름아닌 인간 자신이기 때문이다.
결국, 천사란 인간 내부에 스며 있는 신성한 가능성인바, 이 가능성을 기계가 점유함으로써 인간은 저 아름다운 시원의 낙원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월-E는 인간의 마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기계들과는 차별성을 보인다.
기계이면서도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까지 겸비했다.
만일 기계가 천사가 된다면, 월-E야말로 '기계천사'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그렇다면 <월-E>가 어떻게 사랑의 마음을 품게 되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 무척 궁금했었는데, 누군가는 자신의 리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감정은 이성의 버그다...사랑은 학습된 감정의 결과물이다"라고..
월-E는 기본적으로 감정을 갖지 않는 로봇이었는데 혼자 700년을 살아가는 동안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수도 없이 <헬로 돌리>의 비디오를 틀어봤다..
결국 월-E가 사랑하는 감정이 생긴 것은 비디오를 보는 과정에서 학습된 감정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4. 언어의 절제, 그리고 그것이 갖는 미덕..
영화를 이미 본 분이라면 느끼겠지만, 대사없이 진행되는 초반 30분의 진행이야말로 <월-E>의 백미다.
어떻게 인간의 감정을 고스란히 소유하게 되었는지 의문을 따지기 전에 월-E의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가 관객들의 눈을 사로 잡는다..
쓰레기 더미에서 '추억'이 묻어있음직한 낡은 물건들을 분류하는 그의 투박한 손이나, 혹은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면서 사물에 대해 의문점을 갖는 모습 등은, 영락없이 천진한 어린아이의 행동을 닮아있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취급하거나, 버렸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을 하게된다..
또 하나의 의문은 과연 우리에게 언어란 꼭 필요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기계의 차이에 대하여 '사고의 능력'을 이야기한다..
기계는 프로그래밍 된 언어를 사용하면서 논리를 판단하지만, 인간은 순간 주어진 상황에 대처하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하지만, 한낱 물질인 기계가 초월적인 천사를 흡수 통합한 근대의 합병 프로젝트는 이런 차이에 대하여 경이로운 성과를 달성했다...
단순히 0과 1의 조합으로만 이루어진 언어지만, 웬만한 사람보다 훨씬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사고의 능력'으로 구분되던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많이 희미해진 것도 사실이다...
기계는 많은 분야에서 천사의 소임을 훌륭히 해낼 뿐만 아니라, 단지 0과 1의 조합만으로 천사의 텍스트(자연과 우주의 비밀)를 빠르게 번역해 낸다.
여기서 0은 곧 무이며, 1은 유의 최초의 형태임을 환기하면, 기계의 언어가 매우 원형적이며 철학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예컨데 이브라는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월-E의 어눌한 언어로도 이브와 사랑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반증과도 같음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기묘한 감정에 대해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했거나 혹은 남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필요없이 남용하고 탕진되는 언어는 쓰레기와 다름없다.
이때 월-E가 보여주는 쓰레기 처리는 그 행위 자체로 많은 은유를 내포하고 있는데, 뿐만 아니라 월-E가 이브에게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들, 즉, 손을 잡는데 집착하거나 끊어진 이브의 전원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월-E의 모습이야말로 언어가 난무하는 시대에 살면서 행동보다 말이 앞서던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언어의 절제'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월-E'와 바퀴벌레의 교감이다..
둘은 단순히 손을 타고 어깨로 올라가는 것으로 자신들의 감정을 대신한다....
픽사가 '월-E'의 친구로 사람들의 혐오대상인 '바퀴벌레'를 선택한 것은 아마 그들의 지닌 탁월한 생존력 때문일텐데, 바퀴벌레는 가장 성공적인 진화의 예로서 3억5천만년 동안 지구상에 존재해왔다.
인간들이 '쓰레기'라고 생각한 것은 그들에게는 최상의 생존 조건이었던 셈이다..
바로 이런 점, 즉 우리가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그 무엇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픽사는 '바퀴벌레'를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다.
5. 폐허를 이겨내는 방법
모든 것을 사라진 황량한 시간 앞에 평온하고 의연한 자세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그것이 설령 감정이 없는 로봇일지라도....
인간은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자기 자신과도 멀어지게 된다고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빠스'가 말한 바 있다..
이 말을 할 때 빠스는 사랑의 상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사랑을 잃는 것은 인간이 세상에서 길을 잃는 가장 고통스런 방식의 하나다.
이런 연유로 빠스는 '사랑'을 자기 자신인 타자를 찾아 넋을 잃고 고뇌하며 헤매다 마침내 자신에게 돌아가는 치명적 도약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빠스의 명명법대로라면 사랑이라는 치명적 도약의 반대편에 있는 사랑의 상실은 치명적 전락이라고 부를 수 있다. <월-E>에게 있어 견딜 수 없는 것은 지구에 혼자 남아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보다 감정의 교감을 나눌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이때 <월-E>로 하여금, 목적없는 임무가 무료하게 느끼게 하고, 시간과의 평화로운 동행을 깨뜨리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상실한 치명적 전락의 느낌때문이다..
사랑할 무엇인가를 잃은 시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교란하고 방해하는 훼방꾼이다.
이때 시간은 더이상 흐르지 못하고 방향감각을 잃은 채 한곳에서 서성이게 된다.
그런 그에게 미끈하게 생긴, 이브가 등장한다..
자신과는 비교가 안되는 최첨단 신예 병기답게 막강한 화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월-E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은 매끈한 외모 때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정다감한 그녀의 성격 때문도 아니다..
그저 사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눌 누군가가 필요했다는 것...
이브와 함께 있는 시간은 그곳이 설령 폐허로 변한 풍경일지라도 상관 없었다..
이말은 결국 '사랑'이 없는 곳이 바로 폐허와 다름없다는 의미인데, 모든 것이 풍요롭기만 한 액시엄의 생활에서 폐허의 기운이 감지되는 것도 바로 사랑이 실종된 환경에 기인한다..
사랑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회복되는 출발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굳이 이성의 사랑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주변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일...
월-E의 행동에 짜릿한 감동이 수반되는 것은 다름아닌 로봇이면서도 인간 본연의 마음을 잃지 않는데 있다.
기계가 천사의 탈을 쓰고 인간의 몸과 영혼을 삼킨 매피스토펠레스임이 드러난 지금, 유린당한 인간 본성의 귀환은 필연적이고 필수적이다.
물질이 관념을 집어삼킨 시대에 인간 본연의 마음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사랑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탈환이 시작되는 지점이면서 인간이 폐허를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
덧붙이는 말-
월-E 앞에 홀연히 나타나 마음을 사로잡은 이브의 이름은 외계 식물 탐사용 기계를 뜻하는Extra-terrestrial Vegetation Evaluator의 앞 글자에서 따왔다. 더불어 깔끔떠는 귀여운 캐릭터 모(M-O) 역시 미생물 박멸 로봇 Microbe Obliterator이라는 단어에서, 우주정거장의 이름은 자명한 공리를 뜻하는 단어 액시엄(Axiom)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
-
[영화리뷰] [리뷰]나는 전설이다 리뷰 - 스포없습니다.
짱공유에 글을 써보는 건 처음이군요.
제 블로그에 끄적여 놨던 건데 살짝 수정해서 한번 올려봅니다^^
------------------
필자가 현재 캐나다에서 어학연수중이라
자막 없이 본 것이기에 솔직히 대사를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습니다.
그리 대사량이 많지도 않고 플롯이 복잡한 것도 아니어서
영화 전체의 이해엔 무리가 없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원작 소설을 읽어본적도 없기에, 가능하다면 비교분석을 시도해 보고 싶었지만 여의치가 않군요.
소설과는 꽤 많은 차이가 있다던데, 덕분에 책을 사보고 싶어졌습니다.
리처드 매드슨의 '전설적'원작.
표지부터 정체성이 확실하다.
본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영화였던 콘스탄틴. 개인적으로는 참 재밌게 봤었습니다.
물론 묵시록적 액션을 기대하고 갔던 나에겐 약간 배신감 느껴지는 영화긴 했지만
액션 외적인 면에서 꽤 즐거움을 안겨준 작품이었습니다. 즐거운 배신이라고 할까요.
설령 이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길이 남을 명장면을 포함하고 있다는 데는 동의하리라.
영화를 보고 그렇게 크게 웃어본 게 도대체 언제였던가...
그렇다고 코미디 영화라는 건 아니다.
그 영화가 정말 좋았는지 어쨌는지를 떠나, 그런 인상깊은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이
윌 스미스를 앞세워 좀비물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유명한 소설의 영화화를 맡았다 하면
관심을 모으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일단 좀비물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평범한 좀비 영화가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을 기대한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좀비 영화의 블록버스터화라는 건 상당한 무리수가 따르는 일일 겁니다.
좀비라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b급 영화의 상징이라 할 만한 것이고
즐기는 관객층도 그리 넓지 않으니만큼
그런 매니악한 소재로 블록버스터를 만든다는 건 나름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요.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모험적인 시도에 재능이 어느정도 검증된 감독,
현재 헐리웃에서 최고의 티켓파워를 지닌 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윌 스미스의 지명도가 합쳐졌으니 관객들의 기대가 과해진다 한들 나무랄 수야 없겠지요.
저 또한 그런 관객의 하나였고, 그래서 저 역시 평범한 좀비물이 아닌
(하긴 평범한 좀비물이라면 12세 관람가를 받는다는 것부터 이미 불가능)
'뭔가가 있는'충격적인 영화를 기대한 게 사실입니다.
윌선생과 남우견공상급 연기를 보여준 샘君.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에는 약간 못 미쳤습니다.
영화 자체의 재미와 블록버스터로서의 스펙타클, 윌 스미스의 연기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지만, 사람들이 기대한 '그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전개에 관한 언급을 한다면,
줄거리 자체는 좀 허무하다 싶을 만큼 전형적입니다.
물론 조지 로메로 이전에 출판되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모티브를 제공한,
이른바 바이블이라 할 만한 작품의 영화화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물론 이건 제 추측입니다. 서두에도 얘기했지만 전 아직 소설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영화 후반부의 전개는 좀 서둘렀다는 느낌입니다.
맛있는 재료에 양념을 더 넣지 않고 평범하게 만들어 내 왔다고 할까,
아아, 이젠 할 얘기 다 했어. 끝! 이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얘기.
텅 빈 뉴욕이라는, 압도적일 만큼 넓은 공간의 스펙타클과
사방이 흡혈 좀비들로 넘쳐나는 극한 상황의 표현은
한 개인에 대한 불특정 다수의 폭력과 개인의 소외를 말하기엔 부족함 없이 잘 연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돈을 들여 동어반복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언급된 주제가 아닌가 싶네요.
텅 빈 대도시의 스펙타클 역시 이미 [28일 후]같은 영화에서 이미 한 번 써먹은 메타포라
신선도가 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물론 스케일도 훨씬 더 크고 원작 배경이 그러니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하지만.
(그러고 보니 28일 후도 같은 소설 원작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듯)
감독의 전작인 콘스탄틴에 비교해 봤을 때
내러티브의 전개와 연출력은 확실히 한 발 나아가는 데 성공했다 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영화에 기대한 것이 '유망한 신인 상업영화 감독의 한단계 발전한,
그러나 아직 약간 모자란 과도기적 작품'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겁니다.
그런 어중간한 위치의 작품을 기대하기엔
원작의 무게나, 배우의 지명도나, 들어간 돈이나 좀 과한 게 아니었을지.
여러모로 의욕적인 시도라고 보이지만, 결과는 절반뿐인 성공이라고 보여집니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영화가 재미없는 것은 아닙니다.
블록버스터에서 기대할 만한 재미는 충분하고,
윌 스미스의 연기는 그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습니다.
그 이외의 주요 등장인물이라곤 좀비를 제외하면 얼마 나오지도 않는,
다시 말해 주인공과 함께 극을 이끌어갈 만한 비중있는 조연이 전무하다시피한
이 '블록버스터'영화를 혼자서 감당하고 있음에도 무리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군요.
윌 스미스라는 배우의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달까요.
어쨌거나 정말 not alone이긴 했지만영화는 나 혼자 굴렸단 말이다!
어쩌면 비범하다 못해 건방짐까지 느껴지는 위풍당당한 영화 타이틀 덕에
기대치가 더 커졌을지도 모르는 일.
최소한 돈은 아깝지 않은 재미난 블록버스터였지만 거기서 그친,
전설적인 소설 원작의, 전설이라 불리는 남자가 나오는 영화지만,
전설적인 영화는 되지 못한 그런 영화입니다.
아니, 최소한 윌 스미스의 전설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만큼 연기는 참 잘 했으니, 윌 스미스의 팬들이라면 안심하시고 봐도 무방할 듯 합니다.
낙장유입작성일 2007-12-20추천 11
-
-
[영화리뷰] 트랜스포머.. 스토리를 논하지 말라?
트랜스포머.. 스토리를 논하지 말라?
그럼 트랜스포머는 영화가 아니라 무슨 사진연결한 스토리 없는 동영상입니까?
트랜스포머 스토리가 어디가 어때서 스토리 생각하지 말고 장면만 즐기라고 하시는지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이클베이감독이, 특히 흥행영화를 제조하는 미국감독이 전세계를 대상으로
자기 돈도 아닌 자본을 끌어들여 엄청난 영화를 만들 땐
그야말로 키덜트(키드+어덜트-어린애같은 감성과 취미를 가진 어른)적 감각에
가족,사랑,우정,배신,선인의승리 등을 함께 버무려,
그야말로 애들부터 성인까지 모두 다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로 만드는게 블럭버스터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고로.. 이 영화는 가족영화이자 전 세계인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범세계적인 종합세트같은 거죠.. 마이클베이 감독이 정말 스토리 생각안하고 만들었을까요?
아뇨.. 만화의 스토리를 두시간 안에 압축하기 위해 몇 년간을 시나리오 작업에 투자했다는 글을 보면
감독에게 스토리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을겁니다..
그러기에 스토리를 생각할 때, 심오함은 아니더라도
우리들도 원작 트랜스포머를 등에 업고 얼마나 각색을 잘했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거죠..
물론 원작과 똑같이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끔보면 원작에 충실 안해서 실망했다는 리뷰도 있던데요
왜 엔터테인먼트적 예술작품을 만들때 원작과 똑같은 스토리를 따라가야 하죠?
감독과 각색자의 역량에 따라 더 나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고, 제작자도 원작을 능가하게 만들고자 노력할거잖아요..
하지만 원작을 등에 업고 각색을 했기에 스토리도 중요하다는 거죠..
영화라는 장르는 한 요소라도 생각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니까요..
물론 트랜스포머는 재미에 좀 더 중점을 둔 영화라는 건 인정합니다만..
마이클베이 감독과 인터뷰를 하는데 님들에게 마이크가 주어졌다 칩시다..
당신 영화 정말 재밌게 봤다.. 최고였다.. 이런 영화의 스토리에 그 무슨 심오함을 넣으려고 했겠느냐만
스토리는 신경안쓰고 정말 재밌게 봤다.. 라고 말한다면
마이클베이 감독이 뭐라고 할까요?...
전 비판은 비판대로 해야하고, 칭찬은 칭찬대로 해야 한다고 봅니다...
영화는 그야말로 종합예술입니다...
왜 비주얼 좋고 재미있는 영화에 스토리를 언급하면 왜 안될까요?
왜 재미있는 영화는 스토리는 제껴놓아야 할까요?
정말 재미있는 영화라면 알게모르게 스토리도 은연중에 가슴으로 스며들었에 재밌다고 표현하는게 아닌가 합니다..
어떤 장면에선 어이없다고 하는 분들도 많은데요... 영화니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28주후에서 자신이 보균자라고 끝까지 안 밝히다가 점점 더 악화되는 걸 보면서도,
말 못할 사정이 있겠지... 또는 그 상황에선 말 못할 분위기였을거야. 라고 넘어가면 됩니다.
감독판, 디렉터스컷이 왜 나오겠습니까? 감독은 이 장면이 아주 중요하고 스토리를 연결시키는 메타포인데
시간에 쫓기다 보니 짤라야만 했기에, 나중에 자기가 더 보여주고 싶은 씬을 엮어 감독판을 출시하는거잖아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트랜스포머... 스토리가 진부한 건 아니라고 저도 생각해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뻔한 영화도 내용은 뻔하긴 하겠지만 스토리는 괜찮은 영화 많죠..
꼭 반전이 있어야만 스토리가 괜찮은 건 아닐거고, 또 반전 없어도 스토리 좋은 영화 많은 거 아시죠?
전 트랜스포머의 스토리를 말하라면 원작을 토대로 잘 각색한...
뻔하긴 하지만 나름 괜찮은 스토리라인을 전개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시리즈물로 나온 만화를 2시간 안에 축약,집약해서 넣는다고 생략한 것도 있고, 막판에 좀 달려서 그렇죠..
스토리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농담 한마디한마디 얼마나 많이 신경썼겠습니까?
전세계 동시 개봉되는데, 미국인이니까 미국농담대본을 썼겠지만, 이 정도면 동양인들도 웃을거야.. 라고
추측하면서 최대한 범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만들지 않았겠습니까....?
암튼... 전 그래픽도 좋았고, 스토리도 그 정도면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모두 공감하고 이해할 만한 수준으로 잘 엮었다 생각합니다..
-
-
[짱공일기장] [단편]1+1
머리가 깨질 듯하다, 필시 두개골속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있는 게다. 혹시 종양일까? 암? 아니면 다른 그 어떤 것? 하지만 병원에는 가기가 싫다. 말쑥한 얼굴에 흰 가운의 그들은 왠지 모르게 비위가 상한다. 혹시라도 내게 암입니다. 이런 말을 해버린다면 그 자동 응답기 같은 표정에 코드를 뽑아버릴지도 모른다. 넥타이가 목을 조여 온다. 벌써 몇 번이나 고쳐 맨 것인데, 비싼 것도 별수 없나보다. 모두와 상관없이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그는 별개의 생명체로 맞지 않는 비싼 넥타이나 깨질 것 같은 두통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처음엔 왼손잡이었던 것 같다. 밥을 먹을 때도 글을 쓸 때도 왼손을 썼었다. 그렇지만 커가면서 악수를 하기위해 내밀어야하는 것은 오른손이었다. 군대에서 총도 수류탄도 오른손잡이용이다. 마우스도 오른손이 편하다. 자연스레 습관이 바뀌었다. 나는 오른손잡이이다 . 그것도 아주 편중이 심하다. ‘승인하시겠습니까?’ ‘yes’ ‘클릭’ 꺾어져있는 그래프. 눈이 뻑뻑하다 아마도 눈이 붉게 충혈 됐으리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마우스를 움켜쥔 손, 모니터를 노려본다. 굵직굵직한 꺾인 선들과 글자들 숫자들 인지하지 않아도 스르륵 풀려버리는 기호들, 오른쪽 다리를 슬슬 떤다. 머리가 아프다. -김대리, 정신 사납다고 했지. 다리 떨지 마라 복달아난다.” -아. 예” -거, 나이는 서른이나 먹어서 다리나 덜덜 떨고.......!, 입고 있는 옷이 아깝네! 부장의 잔소리가 ‘휙’하고 날라 온다. 벌써 5년째 부장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저놈은 입고 있는 몇 년 된 양복만큼이나 시시콜콜한 잔소리를 자주한다. 나이는 40대 초반 정도이지만 말투는 동네 이장쯤 되는 듯하다. 물론 상사들에겐 동네이장에서 주인집개 쯤으로 변해버린다. 저번 회식 때 딸랑거리던 그의 행동은 지금도 직원들 사이에 상당한 입담꺼리가 되고 있다. 입을 삐쭉거리며 투덜거려 본다. 내가 입고 있는 이 스트라이프 정장이 나보다 더 인텔리답게 보이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제발 누가 이 깨어질듯 한 두통 좀 없애 줘! 이 것 때문에 정신이 산만하다. 두통이 과거 어느 점에 묶여 탈출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시침이 생각난다. 두통의 몸부림에 따라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도 간절히 널 보내버리고 싶다. 왜, 왜 눈치 채지 못했을 까? 그때 알았어야 했다. 눈앞에 노려보는 이 어려운 기호들처럼 난 그때 그 표정을 보고 이해했어야 했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해명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와 함께 할 때부터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기다리거나 아니면 기다려지거나. 그리고 지금은 끊이지 않는 두통만이 남아있다. 필연적이었을까? 최초를 기억해본다. 지나가던 여자의 흩날리는 머리를 보았다. 갑자기 지희가 참을 수 없이 보고 싶었다. 나는 약혼을 했다. 집에 나의 사랑하는 지희가 있을 것이다. 기분 좋게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왼손을 들어 태양을 가리고 하늘을 보려했다. 손가락 사이로 햇빛이 흘러내리며 반짝거리는 반사광이 보인다. 약혼반지다. 손가락에 동그랗게 말아놓은 이 금속체는 신에게서 지희와 나의 행복을 약속받은 맹약의 상징이라도 되는 양 여겼었다. 바쁘게 발을 놀린다. 이마에 살짝 땀이 맺혔다. 지희가 보고 싶다. 평소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시계는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른생활맨으로 살던 내가 처음으로 회사를 땡땡이 치고 일찍 돌아왔다. 두 시간이나 이른 귀가다. 휴, 하고 숨을 골랐다. 오는 길 동네 어귀에 있는 낙원 화원에서 장미꽃을 좀 샀다. 꽃같이 좋아할 그녀 얼굴이 눈에 선했다.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일부러 전화도 안했다. 알지 못했다. 만약 내가 길에서 그 여자를 보지 않았다면? 평소와 같은 시간에 퇴근을 했더라면 지금과 달랐을까? 현관문이 열려있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거실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빼꼼히 열려있는 문틈 새, 그곳은 침실이었다. 그때 문 틈새로 들리던 환희에 찬 신음소리와 어색한 표정의 남자를 보지 않았다면....... 차라리 보지 말 것을 그랬다. 집에 일찍 가지 말 것을 그랬다. 아니 길에서 그녀를 닮은 긴 머리의 여자를 본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단 한번뿐인 갈림길의 선택에서 난 잘못 길을 들었다. 왜 그랬을 까? 홧김에? 왜? 사랑해 버린 거냐? 여전히 손은 움직이고 일을 하고 평상을 가장한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두통 때문인지 모르겠다. 뿜어져 나오는 그것을 눈알로 돌려 막는다. 삐걱삐걱 돌아가는 눈알. 손. 다시금 덜덜 떠는 다리. 부장의 잔소리, 집에 가면 좀 다를까? 다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지 않을지도..... 여기는 직원화장실이다. 사무실에서 튕겨지듯 도망쳐 나왔다. 니코틴이 나를 부른다. 담배를 꼬나문다. ‘촤르르륵’ 하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이 느껴진다. ‘하아’하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매만진다. 들장미소녀 캔디처럼 외로워도 슬퍼도 울리지 않는 핸드폰, 너도 내 오른손처럼 일을 해야 하지 않겠니? 가끔 오빠 밤이 외로워요 하는 문자 따위 말고는 반응이 없다. 그녀와 연락이 끊긴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왼손목의 타이맥스 시계가 피식 웃는다. 전화를 기다린다. 문자를 기다린다. 묵묵히 시위하는 핸드폰이 야속하기까지 하다. 던져버릴까? 쓸모없는 녀석하고 손을 들어 올린 찰나 ‘드르륵’ 진동이 전해진다. 너무 놀라서 떨어뜨릴 뻔했다. 이게 얼마짜리 인데. 모르는 번호다. 누구지? 그녀이길....... -여보세요’ -아 광고보고 전화 드렸는데요. 룸메이트 구하신다고 하셔서요.’ 하.....역시 아니다 -아...예 열쇠는 관리소에 맡겨놨습니다. 보시려거든 보세요.’ -아뇨, 그냥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바로...’ -그러시죠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이름도 묻지 않는다. 무엇을 하는지 몇 살인지 얼굴도 모른다. 상관없다. 그녀가 나간 그 자릴 누군가 채워놓기만 하면 된다. 그게 누구든 그건 상관없다. 상대도 그런 것 같다. 시계가 7시를 가리켰다. 퇴근을 했다. 집에 그가 와있었다. 묘하게 정제된 공기가 흐른다. 1년여를 같이한 그녀가 나가고 남은 건 붉은 이빨마저 드러내고 있는 이방의 적막함이었다.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녀의 웃음소리, 입던 옷가지 칫솔 또 무엇이 더 있었지? 그런 것은 회상할 틈도 없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하게 비워져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신세 지겠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이날부터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아침이면 눈을 떴고 마우스를 잡고 다리를 떨었다. 시간당 2만원 짜리 내 인생을 차곡차곡 쌓았다. 남자는 무엇으로 얘기하는가? 길가의 구둣방에 착실하게 닦여진 구두의 광택이 눈을 찌른다, 모두가 신사화 검정색이다. 어느 남자는 저 구두를 신고 서류 뭉치들과 씨름하며 있겠지 그렇다면 번쩍거리는 검정구두는 남자를 말하는 것인가? 나는 무엇으로 대변되는가, 그건 달마다 차곡하게 쌓이는 통장의 숫자일까? 내 신발은 검정색 닥터 마틴이다. 1번마 화이트, 2번마 그레이스팟 3번마....... 문득 귀에 경마소리가 들린다. 전자경마장은 이제 어디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대중화 되었다. 동상이몽. 누구는 주체하지 못할 돈과 시간이 지루해서, 혹자는 한방을 노리며, 혹자는 경마의 스릴을 위해 저곳에 들어간다. 나도 홧김에 잭팟이라는 것을 노려본 적이 있다. 믿지 못 할 현장을 목격해 버렸다. 입술이 마른다. 입안이 바작거린다. 목이 마르다. 썩을 목마름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가슴에 우물을 파냈다. 그 우물에선 가만가만한 흐느낌이 들려온다. 난 조용히 그 방을 나왔다. 지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하지 못했던 것 인가? 상대남자도 아무 말이 없다. 물론 저 녀석은 내가 알고 있는 놈이다. 그냥 친구라고 부득부 우길 때 확실하게 잘랐어야했다. 우물에 꾸역꾸역 후회가 차오른다. 왜 하필 내게........내 약혼녀 그리고 상대남자 우린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다. 우리 셋의 모든 말들은 내 가슴의 우물이 모조리 삼켜 버렸다. 난 그냥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알고 있다. 축객령은 그가 아닌 나에게 내려졌다. 그리고 술을 마셨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단지 사거리 앞 횡단보도에서 멍하니 서 있었을 때 신의 계시처럼 들리던 광고만 머리에 선명히 남았을 뿐이었다. 마라톤 러너의 승리의 화관처럼 건물위에 장대하게 얹혀진 브라운관은 내게 계시를 주었다. -당신의 한 시간은 얼마입니까? 잃어버린 시간의 되돌려 드립니다. 지친 듯 주저앉아있는 주부와 적성에 맞지 않는 일로 고민하는 청년이 한숨을 쉬며 한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카피가 뜬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려 드립니다. 아마 무슨 금융 쪽의 관계된 광고였으리라. 그렇지만 난 그것이 신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잃어버린 내 시간을 돌려주세요. “당신도 나라면......아니 이 세상의 누구라도 나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스릴 있는 복수이자 연극으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어떤 본질적인 진리 또는 신에게 하는 시위와도 비슷한 것이다. 이것은 불가항력의 선고적 성향을 띈다.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죄 없는 자 내게 돌을 던져라.” 시간은 흘렀다. 마치 유령이 된 것 마냥 투명해져 갈 때 쯤 두통은 계속되고 온화함을 머금은 햇빛은 나를 투과해 내 뒤의 그림자에게로 떨어졌다. 바로 그때쯤 바람이 온화해지는 겨울이 지난 봄 그때쯤. 깜짝 놀랐다. 설마 내입에서 나온 건 아니겠지, 어슴프레 잠이 들었을 때 무심코 들어버렸다. 존재마저 부정해버리듯 소리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고 내 밤잠은 까마귀 마냥 푸드덕거리며 날아가 버렸다. 그녀의 이름을 들어버렸다. 내가? 네가? 허둥대고 있는 사이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은 화살같이 쏘아져 비산했다. ‘....선희야......’ 튕겨지듯 일어나 그를 흔들어 깨울 참이었는데 언뜻 그의 얼굴엔 눈물이 비쳐졌다. 무슨 꿈이라도 꾸는 걸까? 깨우려던 손이 무색해 졌다. 담배를 꼬나문다. 도망치듯 숨어버리는 담배연기. 이름이 같은 여자일까? 그렇지만 느낌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더욱 심해진 두통만 보아도 그렇다. 혀끝을 내밀면 쓰디쓴 슬픔이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 우물에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커피보다 진득한 그 어떤 것이 차곡차곡 우물을 채워가고 있었다. 마치 대박을 꿈꾸는 로또의 이월금처럼 배설되지 않은 욕구들이 찰랑거렸다. 그 물결에 이지러진 내가 비쳐진다. 이 물은 내 눈물이 쌓인 것이 아니다. 난 웃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신은 또는 진리가 내게 노크할 것을 알고 있었다. 햇빛 찬란한 현대에 깊은 우물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의 룰이 나로 하여금 진리가 노크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이 기다림은 현실이 되었다. 잭팟이다! 정리를 위해 한번은 만나야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지희가 아닌 그녀의 동생이 나왔다. 쌍둥이 동생. 처음엔 아무 생각도 못했다. 이것의 룰에 의해 내게 돌아온 주사위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내 눈엔 되돌아온 약혼반지만 보였다. 이 반지는 상징이었다. 결혼생활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주고 받기위한 일종의 맹세나 선물상자의 열쇠였다. 내 눈 앞에 그것이 되돌아와 있다. -저........ 설한씨. 퍼뜩 낯이 익으면서도 낯 설은 그녀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시계가 4시를 가리켰다. 거대한 바다위에 외딴 섬처럼 떠있는 반지에서 보지 못하던 것을 바다에서 보았다. 아니 정확히 바다에 비춰진 그녀의 눈에서 보았다. 사람의 시선은 때론 말보다 더욱 진심을 얘기할 때가 있다. 1980년대 벽에 급히 휘갈겨 쓴 민주주의 만세처럼 말이다. 말이나 글자만이 기호의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언제부터 그녀가 날 사랑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 눈빛이 그 시선이 동정을 말하던 것인지 사랑을 말하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로부터 진리가 내게 노크한 그 순간 나는 문을 열고 사랑을 받아들였다. 아마도 사랑이었으리라 짐작한다. 누구였던 간에 말이다. -선..희씨죠? 이 반지 껴주세요. 난 웃었다. 우린 하루가 멀다 않고 만났다. 마치 그래선 안되는 것처럼 누가 법으로 그렇게 정해놓기라도 한 모양으로 말이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지 그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처음으로 룸메이트에게 관심을 가졌다. 의도적으로 친해지고 싶었다. 그날 밤의 일은 담배의 타르와 같이 간 속에 넣어두었다.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말을 꺼낼 기회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중력 했다. 그리고 두렵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가 먼저 술을 사들고 들어왔다. 난 의례히 나와 친해지려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술을 마주해도 말이 없었다. 묵묵히 주거니 받거니 하기를 몇 번. 그가 물었다. -선희는 어떻게 알고계시는 거지요? 그녀의 이름이 또 나왔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마치 그의 입은 원래부터 그 이름을 부르기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눈은 소주만큼이나 깊었다. -아, 그걸 어떻게? 쓸데없는 질문이다. 그는 확실하게 물어오고 있다. -자면서 아무개의 이름이나 부르진 않습니다. 그것도 눈물을 흘리면서는 더더욱 아니지요. 그런데 그 이름이 제겐 낯선 이름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직설적인 물음. 마치 떼인 돈을 받으러온 일수 같다. 당당한 말투다. 그런데 설마, 나도 그랬단 말인가? 나도 그처럼 밤중에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붙잡았었나? 요즘 유난히 눈꼽이 많이 낀다 생각했었다만. 뭐 숨길 것도 없다. 나 역시 상당히 궁금한게 많은 터였다. -그녀의 남자친구였다. 아주 최근까지. -.......... 자연스레 반말이 나왔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승리자의 거만함 같은 것이 배어나왔다. -일부러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설마 승리자라니! 하!- 그의 얼굴은 짐작했었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우린 서로의 얼굴을 모른다 뿐이지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했으니까, 미치도록 질투해 마지않던 남자가 눈앞에 있다. 우린 다시 말이 없어졌다. 대신 술병이 늘어갔다. 그리고 시간당 2만원짜리 내시간도 꾸역꾸역 흘러갔다. 잠이 들었었다보다 그리고 생각했던 말을 내뱉었다 4만원짜리다. -........나갈꺼냐.......? -그래야하나?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이집은 맘에 들고 내가 모르는 선희의 추억도 있고 또 선희를 잃어버린 너도 있다. 나갈거냐? -그래 나가야지, 일 나가야지. 내 삶만큼이나 중요한 통장의 숫자들을 꼭꼭 매우기 위해 시간당 2만원을 벌기위해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메고 마우스를 잡고 기호들과 씨름하며 다릴 덜덜 떨어야지, 그래야지. 아참! 너도 알다시피 난 차였다. 그리고 보다시피 여기에 사랑의 주억거림이 될 것들은 깨끗하게 정리됐지. -그래 뭐가 그래 란 것일까? 설마 내가 느끼지 못하는 그녀의 온기를 저 녀석이 느낄 리가 없지 않은가!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그녀가 나가고 나서 바로 침대를 버렸다. 그리고 새로 이층침대를 구입했다. 책장이 붙은 작은 책상이 하나있는데 원래 그곳은 그녀의 화장대 겸 사색의 장이었다. 그녀가 나가면서 깨끗이 비워졌고 문학도서 대신 경제생활, 주간 낚시 maxim 등 전혀 손이 가지 않는 책들을 구해다가 박아놓았다. 옷장대신 커다란 가로 형 옷걸이가 하나있고 그 옆에 빨래 건조대가 있다. 아, 저 건조대는 그녀가 사온 것인데 왜 그냥 놓고 갔는지 모르겠다. 냉장고는 룸메가 새로 들어오면서 이미 깨끗이 청소 후 비워 놓았다. 약간의 식기와 컵, 아.......그녀의 입술이 닿던 컵이 남아있다. 내일 나갈 때 버려야지.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그녀도 나도 동의 한 바이다. 목소리는 한 톤도(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었다. 묵묵하게 도마뱀이 꼬리 자르듯 아이가 나이가 차면 젖니를 빼내듯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마치 자연의 섭리인양.......어느 날 퇴근해보니 깨끗하게 정리됐었을 뿐이었다. 날이 밝았다. 서로의 비밀을 공유했지만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원래 불편한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가끔 그녀석이 술을 사들고 오는 날이면 우린 한 가지에 대해 얘기한다. 정치도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도 아닌 한 여자에 대한 얘기이다. -넌 어떻게 헤어졌냐? -난 말이지 그냥 문자로 딱하니 왔어 그만하자고, -어? 나돈데. -헤어지기 몇 일전쯤에 그녀와 쇼핑을 했었거든. 아! 빼먹을 뻔 했군. 우린 몰래 사귀는 사이였어. 거짓에 산다고나 할까? 카프카가 했던 말 알지? 아? 그래 뭐 암튼 그러다가 백화점에서 아는 남자를 만났단 말이지. 그런데 말야 아무리 관객이 몇 안되는 거짓에 사는 사이였어도 말야. 슬며시 손이 놓아지고 거리가 생기더군 그것까진 이해하겠는데. 그 표정이라니. 음...수음하다 걸린 사춘기의 남학생? 이제 이해가나? 그런 표정이더라고 그가 뚜벅뚜벅 걸어 나간 다음에 까지도 말이야 어색하게 떨리는 손하며 안절부절 안절부절 그때 그녀의 이해되지 않는 단어들을 난 어찌 해서든 이해했어야했어. -하..참 예 한번 적나라하군. 그래서 헤어진 거였군.......아마 11월 13이던가? 마자. 그날이야 나도 그날 헤어졌는데....... -아! 이미 알고 있어. 난 그녀석의 얘기를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난 상당히 최근까지 그녀의 남친이었고 그녀에게 집착이라 할만큼 했으니 말이다. -아...그래. 입 아프게 얘기할 필요 없어서 좋군. 사실 나도 알고 있었어. -...그래....시간이란건 아주 두껍게 쌓이지. 그리고 그에 대한 단상 역시도 말이야. -세상이 다 테제이고 메타포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 것에 네가 들어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야 그렇지? -그래, 듣고 보니 그렇군. 네 시간은 시간당 2만원? -응, 지금은 시간당 2만원이야 이런 묘한 공존은 희극을 연상케 했다. 우연이라 하기엔 그 당위성이 너무나 명백한 작가의 농간. 주사위는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 걸까? 내가 손을 내밀었던 것은, 내가 만지고 내가 키스했던 것은 선희였지만 선희를 향한 욕망과도 같은 어떤 메타포였을 것이었다. 그래서 난 그녀와 육체적인 관계를 거부했다. 아마 그때 본 불륜의 상처가 트라우마가 되어 그런 것 일수도 있다. 어쨌든 섹스만은 기피했다. 선희는 남친도 있었지만- 그것 역시 내가 선희를 선택하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별로 그것은 쾌념치 않았다. 아니 상관없었다. 그런 장애를 가진 사랑이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게 만들었다.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 사랑을 분리해서 소유했다. 그리고 육체적인 사랑의 대상은 내방에서 묵고 있는 저 남자다. 나중에 그에게 들었던 사실이었지만 그와 사랑을 나눌 때는 키스만은 피했다고 한다. 이유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고 또 며칠이 흘렀다. 어느 만화가의 말따라 이대로 가면 내 통장은 참으로 촉촉해 지리라. 여전히 핸드폰을 매만진다. 캔디 같은 핸드폰 말이다. 봄이 점점 더 짙어진다. 사방이 꽃내음이다. 그리고 내속에선 썩은 내가 난다 곪다 못해 썩어버린 상처다. 문득 참을 수 없는 성욕이 일었다. 고양이 수염같이 늘어지게 따스한 봄날의 오후 난 미친 듯 탐닉 할 ‘꺼리’를 찾았다. 두 눈은 벌겋고 다리는 덜덜 떨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녀의 목소릴 게걸스레 탐닉하고 싶다. 강제와 폭력성으로 매도된 에로티카 시티에 살고 있는 주민처럼 난 파괴로 진리를 잉태하고 싶다. 두통이 더욱 심해진다. 여기가 어디더라, 아! 술집이다. 나는 퇴근하자마자 단란주점에 왔다. 코를 찌르는 술 냄새, 나한테서 나는 것일까? 소리, 아, 그래 소리가 멎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화면조정시간의 티비처럼 띠~하는 신호음만 머리에 울린다. 아마도 술을 마신 두통이 소릴 지르나보다. 무릎위에 낯선 체중이 느껴진다. 누가 올라타 있나? 어쩐지 포근하다. 눈을 감은 저편에 태초의 유토피아가 펼쳐져있겠지. 그곳으로 가야한다. 길에서 벗어나야해. 고통과 슬픔만이 범람하는 이 동굴에서 마법의 틈바구니로 나를 보내주어. 매일같이 마주해야하는 우물 같은 동굴의 벽은 매일처럼 나를 죽이고 녹인단 말이다. 나를 둘러싼 이 어둠을 찢어내야 한다.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어. 손을 뻗는다. 많이도 필요 없다. 딱 여성의 비너스를 연상시키는 작은 ‘틈’만 있으면, 그것을 터뜨리면 난 그곳으로 갈 수 있어. 태초의 유토피아. 우리들의 프로방스, 오! 벌거벗은 하나의 아담이여. 슬며시 눈을 떴다. 빛이다. 여신이다. 나의 갈빗대를 취한 하와다!! 아니다. 사물이 눈에 들어온다. 몸에 실려 있는 체중의 주인은 나의 하와가 아닌 낯선 뱀이다. 곳곳에 웃음이 넘쳐난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꽤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웃음, 저것은 ‘문’이 아니다 ‘비너스’가 아니다. 토악질이 올라온다. 눈물이 난다. 두통이 더욱 심해졌다. 나의 촉촉한 통장은 정욕으로 가득 찬 살덩어리를 불러냈다. -술을 마셨군. 여자도 함께. 돈 주고 샀구나? 집에 돌아오니 그가 있다. 그 한마디는 지금 나를 대변한다. 그리고 나를 쏘아보는 눈. -더러운 새끼. 놀랐다. 아니 화가 났다. -내가 뭘 하든 뭔 상관이야. 밤마다 변태처럼 상상하고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건 너가 아니고 누구냐. 더러운 새끼는 너다. 말로는 플라토닉, 진정한 사랑, 순수한 진리라면서 밤마다 사출되는 곰팡이 같은 허연것은 뭐란 말이다. 난 그것보단 났지 정당하게 돈을 주고 욕정을 배설했을 뿐이야.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닌 ㄸ... 말보다 빠르게 그의 주먹이 다가왔다. 눈에 불이 번쩍한다. ‘번쩍’ 눈이 부시다. 날이 심술궂어 보일정도로 좋다. 나를 밖으로 떠민다. 전화해서 그녀를 졸랐다. 일산으로 자전거를 타러갔다. 우리는 오천원을 주고 2인용 자전거를 탔다. 선희는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한다. 예전에는 한번 심하게 넘어져 까지고 부어오른 적도 있다. 그래서 그녀를 내 뒤에 태우고 신나게 페달을 밟았다. 바람이 시원하다. 호수 표면에 부서지는 빛의 잔향이 시큼하다. 갑자기 커피빈의 뉴욕치즈케익이 먹고 싶다. -커피빈 가자. 얼티메이트도 마시고 싶고 뉴욕치즈케익도 먹고 싶어. -그래? 갑가기 왜? 히히 그래 가자. 나도 마시고 싶어. 그럼 난 음.......카페모카 마실테야. 북적거리는 라페스타 사이를 날 듯 도망쳐 커피빈의 안락한 의자로 날아들었다. 커피를 마셨다. 케익을 먹었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랑은 메타포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사랑 본질은 그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것은 우주의 빅뱅과도 비슷한 것이다. 작은 폭발 하나가 빅뱅을 일으켜 우주라는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폭발은 중요하지만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다. 다시 한번 선희의 얼굴을 쳐다본다. -선희야 사랑해. 그녀는 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놀라는 듯 의외가 담긴 눈빛, 약간의 침묵 그리고 - I do! 그녀의 입술에선 모카맛이 났다. 내 입술에선 치즈맛이 날까? 다시 한 번 눈앞이 번쩍 한다. 어질어질하다. 정신이 없다. 나도 힘껏 주먹을 뻗는다. 또 다시 별이 번쩍, 맞은 건지 때린 건지 모르게 주먹도 아프고 몸의 여기저기도 아프고 두통은 더 심해졌고 또........가슴이 아팠다. 서로 말이 없어졌다. 한참을 쳐다보았다. 수 만 마디의 말보다 침묵을 경청함으로 서로를 비난했다. 그리고...... -그녀를 망친건 너야 (그녀의 육체를 소유한 내가 말한다) -그래 그녀를 몰아낸 건 우리야 (그녀의 정신을 소유한 내가 말한다) -........ -나가. -아니 네가 나가 -아니 나가자. 어서 이곳을 나가자.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어도 이해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알고 있어도 모른척했던 우리 앞에 놓여진 벽. 그것은 여기다. 태고의 낙원, 유토피아, 그녀를 우리 속에서 썩게 할 수 없다. 이제 놓아주어야 한다. -나가자 -나가자 길이 8cm 폭은 2cm정도 되는 시퍼렇게 서글픈 칼이 앞에 놓였다. 칼의 손잡이를 쥐었다. 목에서 비스듬히 쇄골 안쪽으로 가볍게 찔러 넣기만 하면 끝이다. 이 작은 틈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가자 -응 영화 제목처럼 너를 나의 운명이라 여겼다. 태고의 인간 아담에게서 신은 갈빗대를 뽑아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펄떡이는 살덩이(심장)를 넣어 놓았다. 여자에게 넣은 갈빗대는 그 심장의 메타포. 그것이 인연이라는 것이라 여겼다. 이별을 통한 성숙은 생각 할 수 없었다. 그럼 차라리 퇴보하고 말리라 생각했었어. 그래서 그런 집착일지도 모르는 바보 같은 화해를 웃어넘길 수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두 번의 이별 두개의 문자를 받았을 때. 그때마다 난 화살 맞은 새 마냥 바르르 떨며 덜컥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한손은 두통에 시달리는 머리를 쥐고 그렇게 숨을 죽였었다. 내가 도망치는 걸까? 동굴위에 던져졌다는 이유만으로 어쩔 수 없이 살기엔 이 봄이 너무 아름답다. 너도 이제 자유하렴. 내속에서 썩지 말고 말이야. 이젠 이곳을 나갈 때가 되었다. 지금 2cm남짓한 틈으로 집착도 파괴도 욕정도 내 생명도 빠져나가. 느낄 수 있어. 이 순간에도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쳐다보며, 들을 수 없는 네 목소리를 회상하며 이 봄날에 난 죽는다. 저기 그녀가 버리고 간 대형거울에 비치는 녀석의 등 뒤에도 처연하게 붉은 장미 한 송이가 피어나고 있다. 너는 나, 나는 너 우리의 이름은 김설한, -한명의 여자 한명의 남자 두 번의 이별과 한 번의 죽음.-
괴의비명작성일 2007-02-05추천 2
-
-
[무서운글터] 안성진님에 대한 답변
우선 싸우는 분위기가 아닌토론의 분위기가 되도록 수고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면서 글을 답니다.저에대해선 기독교로 생각하시려면 그렇게 생각하시도록 하시고아니시라면 아니라고 생각하면됩니다.정경, 외경, 위경은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성경 66권으로 구성된 개신교에서는 이를 정경이라고 하고나머지는 모두 위경, 외경으로 구분합니다.카톨릭에선정경 66권을 포함한 외경중 소수를 정경에 포함시켰습니다.위경은 거짓이거나 위험한 내용을 배제한 사본으로서그수가 불분명합니다. (적게 3천종 이상)우선 저는 개신교 이후의 성경관에대해선 회의적입니다.(무엇이 진실인지 알수 없는 경우가 많기때문입니다)구약에서도 정경 외경을 나눴었는데.. 이는안성진님이 말씀하신 얌니야 보다 훨씬 먼저 나뉘게 됩니다.얌니아는 이미 a. d 90으로서 제가 보는 성경관에선 이미 회의적 시대로 넘어갑니다.그 훨씬 이전 22권을 정경으로 구분합니다 (토라 포함)시기는 대략 b.c 5~6세기로 잡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하고 지배받는 기점)하지만 얌니야에선 다시 정경을 24권으로 분리하는데그 구성은 율 법(토라)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예언서(네비임) ; (1)전예언자 -- 수, 삿, 사무엘(상하), 왕(상하) (2)후예언자 -- 사, 렘, 에제키엘, 12소예언서 성문서(케스빔) ; 시 잠 욥 가 룻 애가 전 에스델 단 에즈라 느 대(상하)로 됩니다.자세한 분류법은 제가 기억이 확실히 안나서대강 쓰면 오히려 논란의 여지가 있기때문에 적지 않겠습니다.간단한 이야기는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지고 왜졌을까를 판단하던 도중성경을 잘못 인식한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판단을 하게 되고그결과 성경 정경을 재정립하기에 이릅니다.이때 정경을 재정립하는 기준으로 8가지정도의 척도를 세우고정경을 골라냅니다. 그후 탈무드에 기록을 합니다.확실히 기억나는 것중 하나는 '바벨론 이전에 쓰여진 히브리어로 쓰여진 사본'이었던것 같습니다.자료를 찾거나 확실한 기억이 나면 추가하겠습니다.-----------------------------------------------------------------------음 이제 논지를 바꿔서노아의 아들에 관한 이야깁니다.우선 함의 아들 구스에 대해서 이야길 하자면 이런거 같습니다.'곰이랑 호랑이랑 동굴에 들어가서 100 일동안 인간이 되길 소원했지만호랑이는 포기하고 곰은 21일만에 인간이 되었더라'단군 설화의 일부를 일축한 것입니다.이미 정설로는 '곰부족과 호랑이부족이 농경을 터득하는 과정을 그린 신화' 이며곰부족만 농경에 성공하였다. 로 판단됩니다.물론 21일은 곰부족이 농경을 배우는데 걸린 시간의 정확한 일수는 아닐 뿐더러완전 추상적인 시간의 개념일것입니다. (21일 만에 식물일 배제 획득이면 좀 ;;)저는 성경도 그런 견해가 아닐까합니다. (물론 아닐까 한다라는 판단도 위험한 것이지만)창세기 7일중 4일까진 '해' 도 없었습니다.'일' 이라는 시간의 개념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라는 시간 단위를 넣은것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떵그러니 우주만들고 뭐만들고 뭐만들고 뭐하고 인간만들고 쉬셨다.라기보다는 체계적인 순서를 부여하기 위해서 '일' 이라는 챕터를 둔것이지이를 '시간' 자체로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라고 봅니다.마찬가지로함의 아들 구스가 매우 검더라 라는 말은그냥 구스가 검었기때문에 저말을 쓴 것은 아닐것입니다.역시 피부가 검었기 때문에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가 또 없기때문입니다.(검었기때문에 등장한 이름이라면 몇번이고 등장할 수 있었겠죠 간단한 예로'하나님과 동행한 인생' 들은 애녹을 포함하여 몇번이고 재등장합니다)여튼 구스의 아들들은 전부 아프리카가 근간이 되는 국가들로 내려갑니다.이러한 과정을 그냥 한 가족의 가장은 피부가 검고 아들들은 아프리카 국가로 내려갔나보다할수도 있겠지만신화의 성격을 고려했을때 특징을 말한 걸수도 있지 않을까합니다.예를들어서셈과 야벳과 함이 각각 '자손이 번성'하고길을 떠났다고 나옵니다.셈은 동쪽 야벳은 서쪽함은 집을 지키고근데 '자손이 번성' 한다는게 1세대만으로 되는 일일까요구지 1세대나 당대의 특성을 살리고 싶었다면 '가족이 번창하고' 나 '자식을 많이 낳고나'이러한 특성을 써 넣을것 같습니다.적어도 3~5세대는 거쳐야 번성이란 말을 할 수 있을거 같습니다 (이도 적지만)제가 볼때는 '아들들'은 그당대와 자손들의 큰 특징을 (곰과 호랑이같은) 설명해주는메타포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
[영화리뷰] [김기덕의 나쁜 남자]에 대해 예전에 감독(김기덕)과 교류하였던 글
- 영화내공 : 상상초월 예전에 김기덕의 영화 '나쁜남자'를 보고 내가 느낀 감동과 충격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영화를 통해 깊은 대화를 시도하는 감독으로서의 장선우감독과 그 한참 이전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등을 보고 영화라는 장르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나에게...김기덕은 본격적으로 영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의사소통방식의 충격적 폭과 깊이를 진지하게 진행한 감독이었기 때문이다.나는 김기덕 감독을 한사람의 감독으로 아주 깊은 애정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영화를 통해 참된 '소통', '대화'에 도달하려 발버둥치는 감독....모든 예술은 '대화'에 도전하는 투쟁이다.그것은 기존의 대화 틀에 도전하며, 보다 진정한 새로운 틀과 양식으로 그리고 새로운 깊이있는 대화에로 도전하는 예술이다.영화가 예술일 수 있다면, 이런 예술 본래적 목적에 도전하는 아방가드한 감독들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며, 그 감독은 그만한 시대정신적 사유에 도달해 있어야 하고, 그런 감독은 당연히 인간의 근본문제들, 철학, 종교적 주제에 대한 민감한 주제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김기덕은 그런 감독들 중에 하나이며, 그 소양에 있어서 아주 알찬 감독중 하나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여하튼 최근에 김기덕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술자리가 아니라, 공적 자리에서 그만 매스미디어를 향해 내뱉음으로 당하고 있는 여러 낭패와 상처에 대해 들었다.오해할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다만, 이 짱공유 영화 리뷰 계시판에 내 말에 공감하는 그리고 '대화'할 수 있는 고수들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보고자 이전에 썼던 '나쁜남자'에 대한 글을 올려본다.이글은 나쁜남자 영화 홈페이지에 올렸었고, 김기덕은 이 글에 답글을 달았었다.그 답글의 내용은 나 자신에게도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었다.김기덕은 신학교 출신의 신학도였으며, 그의 친구는 맹인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했고, 그 스스로는 지독한 피부병으로 고생하다가 기도원에서 기도하던 중 병고침을 받은 경험도 있었다는 것.그리고 그가 나쁜남자를 만들기 까지 모든 영화는 '종교영화'였다는 것. 등.......그는 내 글(아래에 붙여둔...)을 읽고, 울면서 그 답글을 쓰고 있다고 말하였었다......그의 가슴 속에는, 절망과 상처 가득한 세상에 대한 종교적 해답을 구하는 '한'과 '아픔'이 있다는 것을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모두가 다 이런 문제에 관심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무도가 다 종교적 해답을 구할 만큼 삶의 고통과 아픔을 보지는 못한다는 것.......----------이하 '나쁜남자'에 대한 해석.... -------------------------------------김기덕의 영화는 지금껃 나를 매우 당황하게 해온 영화들이었다. 그는 고통을 매우 중요한 주제로 그리고 수단으로 사용한다. 고통이라는 영화 시리즈를 만들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던 때가 대학교 2학년 때 였다. 그런데 김기덕의 영화는 나의 그러한 모든 생각들을 아낌 없이, 때로는 조금 넘치게 표현하는 영화들이었다. 악어, 섬, 야생동물보호구역, 수취인불명, 나쁜남자, 파란대문? 나쁜남자는 특히 그 마지막 부분에 나온 영화음악으로 사용된 노래가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허거덕. 혹시나 하였던 예감이 적중하는 듯한 섬찟함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다시 생각해 보아도 영화를 보며 느낀 내 예감이 맞는것 같았다. 그 노래는 복음성가로 널리 불리는 노래였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눈앞에 어려운 일보네. 주님 앞에 이몸을 맞길 때 슬픔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면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다정스래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고3때부터 즐겨불렀던 복음성가였다.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을 단련시키시는 방법이 김기덕의 영화처럼, 그런 패턴을 어느정도 느끼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하늘보좌버리고 이 땅위에 말 구유에서 태어나 이스라엘의 가장 천한 동네 갈릴리에서 자라시고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부활하시는 주님.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대표적인 사람을 들라면 바울이 아닐까? 유다인 중에 유다인이요, 로마 시민이었던 그가 예수를 만난 후 그 모든 인간적인 비전과 장래를 버린다. 그리고 그는 쫓기는 자, 두들겨 맞는 자, 결국에는 죄수가 되어 사형장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하였다. 김기덕은 개인적으로 그런 유사한 경험을 한듯하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것이었는지, 그리고 그걸 염두에 두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그런 뉘앙스가 있었다. 어쩜 그는 고상한 미술학도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영화판에 어떤 계기로 들어오게 되었고, 현실 영화판에서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였을 지도, 영화가 표현한 것 처럼 창녀가 되는 경험...... 그리고 그는 그를 이렇게 더럽고 추잡하고 천하게 여기던 창녀촌같은 세상 가운데서 살게 한 그 "나쁜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필요로 하는 그 "나쁜남자"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극중에 선아를 사랑하는 여러 남자들이 나온다. 맨처음 나온 그녀의 대학생 연인, 그의 사랑은 포시랍다. 함께 쇼핑하고 군것질하고 여관앞에서 실랑이 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나쁜남자가 선아를 갖기 위해 구성한 작은 시련 앞에서 무너진다. 선아를 사랑한 또다른 남자가 있다. 바로 "나쁜남자"의 제자, 똘마니, 꼬봉이었던 사람이다. 그의 사랑은 선아의 육체와 그녀가 여대생이었다는 데에 근거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집요하지도, 강력하지도 않다. 그저 힘없이 그녀를 그 표면적 고통의 장소인 창녀촌에서 탈출시키는 것에서 그친다. 그리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그리고 다시 잡혀온 선아를 무력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그친다. 나쁜남자는 선아로 부터 완전한 사랑을 얻기 위한 한가지 목적에 강력하게 집착한다. 그는 그녀의 육체를 얻는 것보다, 그녀의 사랑을 얻는 것을 갈구한다. 진실한 사랑을 얻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한다. 그 노력을 그려놓은 감독의 극적 테크닉이 돋보인다. 그것은 거울을 사이에 둔 사랑이었다. 거울 뒤에서 그녀의 모든 삶을 지켜보는 나쁜남자는 그녀가 그를 진실로 사랑하기까지 자신이 모든 것을 보고 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선아는 처음에는 나쁜남자를 멸시한다. 그녀는 맑고 청순한 여대생이고 나쁜남자는 머리를 빡빡 깎은 험상궂게 생긴 양아치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런 멸시에 나쁜남자는 강제 키스로 응수한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그녀의 대학생 남자친구가 있는 중에 행한 그의 돌발 행동은 행인들의 몰매를 자초한다. 그리고 선아의 침뱉음. 그러나, 그렇게 당당하던 아의 자존심과 미래를 지탱해주던 것들은 나쁜남자의 음모로 힘없이 붕괴된다. 잠깐의 소매치기 조작과 누명쒸움과 신체포기각서를 근거로 한 사채업자의 협력으로 그녀는 간단하게 그 모든 자존심과 미래를 잃어버린다.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단돈 1200만원에 그녀는 창녀가 된다. 소매치기 혐의로 파출소 가는 것이 무서워서 우선 일을 무마하려고 사채를 썼고, 신체포기 각서를 썼던 것이 화근이었다. 참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서점에 책 위에 떨어져 있는 지갑에 손을 댄 것이 빌미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쁘고 청순한 미대여학생에서 "이썅년이"가 된다. 가혹한 강간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일은 이 세상에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다. 6만원짜리. 6만원짜리 인생. 6만원짜리 육체. 6만원짜리 자존심. 6만원짜리 미래였던 것이다. 세상은 실제로 그러하지 않은가? 참혹한 세상에서 그 참혹한 현실이 엄연히 벌어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모르고 있었기에 느끼지 못했을 뿐, 우리들의 안전은 참으로 그렇게 연약한 보호막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절망은 나쁜남자의 음모를 고자질하는 그의 꼬봉에 의해 분노로 변한다. 다시 빰때리기. 나쁜남자는 빰을 맞고만 있다. 그러나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세상은 강력한 힘으로 그녀를 가두고 있었다. 거울 뒤에서 나쁜남자는 그녀가 당하는 모든 일을 다 보았다. 그는 대마초를 피우며 그 고통을 견딘다. 정말 처절한 표현이다. 음.... 나쁜남자는 그녀가 서점에서 훔치려 했던 책을 그녀에게 선물한다. 그의 음모로 자신이 창녀가 된 것을 깨달은 선아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절망한다. 절망과 고통을 느낄 때 마다 선아는 거울을 본다. 거울 뒤에는 나쁜남자가 있으나 선아는 그를 보지 못한다. 꼬봉은 그녀를 사랑한다며 그녀를 탈출시킨다. 나쁜남자는 그녀와 꼬봉의 대화를 거울뒤에서 다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집앞에서 그녀를 다시 납치한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바닷가로 간다. 그 바닷가는 신비한 곳이다. 붉은 원피스의 여인은 선아의 또다른 모습이다. 그것은 마치 나쁜남자가 이미 그녀와 똑같은 외모의 옛 애인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쁜남자가 단순한 한기가 아님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다겹의 의미층이 표현되어지는 장소다. 그 붉은 원피스의 그녀는 미래의 선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녀가 선아에게 남긴 얼굴부분만 찢어진 사진. 그것은 그녀가 나쁜남자와 자기의 관계를 깨달아 가는 도구가 된다. 다시 사창가로 돌아온 선아. 선아는 그 사진을 거울에 붙혀둔다. 거울은 reflection의 도구이다. 자신의 모습을 보는 도구이다.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그 도구 뒤에 자신을 사랑하여 이자리로 이끈 그가 있다. 참 놀라운 표현이지 않은가? 절망한 그녀는 창녀가 된다. 창녀가 된다. 창녀가 된다. 창녀가 있는 나라에 사니 창녀가 된 그녀의 현실이 정말 아프게 느껴졌다. 나쁜남자는 술을 먹고 취한다. 그리고 그녀의 방에 찾아간다.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잠든다. 그녀는 침대 밑에서 잠들고 나쁜남자는 침대 위에 잠든다. 아침이 되고 그는 새로운 하루를 맞는다. 그녀는 그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낀다. 창녀가 되게 해서라도 자기를 사랑하는 나쁜남자. 정말 충격적인 부분이었다. 참혹한 세상이 일상임을 감독은 보여준다. 참혹한 창녀촌이 그 지저분한 세계가 바로 우리들의 일상임을 그는 보여준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창녀촌을 욕하며 더럽다 하는 우리들의 생존방식은 어떠한가? 반찬거리로 파를 다듬는 창녀들의 대낯 일상은 아름답고 평화롭게까지 보인다. 그곳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선아는 파를 다듬는 창녀들과 합류하여 파를 다듬는다. 묘한 감동을 주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그 동네를 접수하려고 등장하는 깡패가 있다. 나쁜남자는 저들과 싸우다 부상을 입는다. 선아는 피를 흘리는 나쁜남자를 보며 표정이 일그러진다. 부상당한 나쁜남자는 벽돌을 든 깡패를 종이를 접어 만든 칼로 간단히 무찌른다. 종이칼에 찔린 깡패는 유리칼로 보복한다. 유리칼에 찔려 쓰러진 나쁜남자를 선아는 다시 일그러진 표정으로 쳐다본다. 나쁜남자도 쓰러지며 선아를 쳐다본다. 회복되어 돌아온 나쁜남자. 선아는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나쁜남자의 세계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쁜남자는 부하의 보복살인을 자신이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다. 나쁜남자가 살인죄로 감옥에 가고 장사도 하지 않고, 전전긍긍하던 선아가 면회를 온다. 감옥에서 나오라며 욕을하고 절규한다. 돌아가는 길에 부하가 선아에게 사창가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나쁜남자가 말했다며, 아무데로나 자유롭게 가라고 하지만 선아는 사창가로 돌아온다. 가책을 느낀 부하는 사창가에 와서 거들먹거리며 돈을 뜯는 형사를 폭행하고 감옥에 간다. 전과가 있는 나쁜남자. 사형을 언도받는다. 사형장에 끌려가는 나쁜남자. 부하는 그 감옥에 함께 있다가 자신이 진짜 살인범임을 극적으로 밝힌다. 출옥하는 나쁜남자. 거울 방에 들어간다. 선아는 울고 있다. 여자 포주가 들어와서 나쁜남자가 출감했음을 알린다. 선아는 거울에 붙은 사진을 보며 기뻐하며 운다. 그때, 나쁜남자는 라이타 불빛을 켠다. 선아는 비로소 나쁜남자를 본다. 둘은 포옹한다. 이 다음이 압권이었다. 나쁜남자는 선아를 맨 처음 만났던 명동의 벤치로 다시 데리고 간다. 이제 놔주는 것이다. 충격적인 부분이었다. 묘한 느낌이었다. 이건 무슨 불교적인 냄새가 확 나는 부분이었다. 깨달음의 과정을 한수 가르치고 제자리로 돌려놓는 무슨 도사같은 느낌이 드는 부분이었다. 나쁜남자는 선아에게 충분히 보여준 것이다. 충분히. 자기 자신을. 자기가 사는 세상을. 그리고 헤어진다. 선아는 집으로 가지 않는다.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국도를 따라 걸어간다. 사창가로 돌아온 나쁜남자에게 꼬봉이 대든다. 다른 부하의 감옥간 일과 선아를 놓아준 것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때 대드는 꼬봉을 때려주며 유일하였던 나쁜남자의 대사가 나온다. "깡패섀끼가 사랑은 무슨 사랑이야"(목에 난 칼자욱, 성대를 다친 모양, 제대로 나지 않는 쉰 목소리로 겨우 내뱉는 이 대사 진짜 감동적인 대사였다.) 강에서 오줌을 누는 나쁜남자를 죽도록 얻어맞은 꼬봉이 칼로 찌른다. 쓰러지며 칼을 숨겨주는 나쁜남자. 이 다음이 묘한 부분이다. 제자, 부하의 배신으로 칼에 맞아 죽은 줄 알았던 나쁜남자 살아난다. (마치 예수처럼...)아침에 그냥 깼다. 강가에서(강가라는 이 설정도 참 재미있는 설정이다... 강이 문학적으로 갖고 있는 메타포는 삶과 죽음의 경계, 넘어갈 수 없는 심연으로서의 한계 같언 것이다.... 이 것은 곧 이후 스토리의 전개는 초월적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그리고 그는 어디론가로 간다. 선아도 어디론가 간다. 둘은 그 바닷가에서 만난다. (부활한 예수가 그 제자들을 갈릴리 바닷가에서 만났듯이....)그 사진에 있었던 그 옷을 사서 입고 만난다. 그들이 앉아 있는 그 모습은 바로 선아가 옛적에 이 바닷가에서 와서 줏었던 그 사진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리고 이들은 트럭을 하나 마련한다. 뒤 짐칸에 침대를 사서 놓고, 여행을 떠난다. 바닷가 뱃사람들에게 몸을 팔고, 나온 선아에게 나쁜남자 담배를 권한다. 담배 한대를 피우고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난다. 이 대목에서 앞에 말한 그 노래가 나온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 마다, 눈 앞에 어려운 일보내" 개사 되었던 그 독일 노래, 원곡 가사를 써드리겠다. Carola - Blott En Dag 오직 하루.. 오직 하루 한 순간만 / 나의 아버지의 손안에서 쉬는 모든 것들이 / 그 속에서 위안을 얻는 / 내가 아이로서 무엇을 갈망할 수 있겠는가 / 그는 내게 어머니의 마음을 갖게 하시고 / 그는 매일 매일 자비로움과 부드러움을 주시네 / 고통을 기쁨으로 만드는 / 그는 매일 내게 가까이 계시네 / 특별한 순간에는 특별한 자비를 베푸시네 / 일상의 근심을 대신 지시고 / 힘과 조언이라는 두 이름의 그 사람 / 그의 모든 값진 재산을 지키시고 / 모두를 보살피시네 / 당신의 날처럼 힘과 물질들을 / 그가 약속하셨네 / 편하고 고요하게 쉬게 하소서 / 사랑하는 아버지의 약속 안에서 / 값진 관의 위안을 헛되게 하지 마시고 / 내게 하셨던 약속대로 / 주여 도와 주소서 내게 일어나는 일들이 / 당신의 믿음직한 아버지의 손에서 / 단지 하루, 한 순간만 /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난 여기서 미치는 줄 알았다. 김기덕은 항상 그렇지만, 또다시 영화 전체의 이 기막히고 충격적인 스토리를 하나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난 이것이 그의 일종의 신앙고백이라고 본다. 모든 스토리가 매타포였던 것이다. 매우 처절한 그의 신앙고백이었다고 본다. 매춘으로 삶을 표현한 그의 정서는 정말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이라는 첨언으로 그는 삶을 긍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사랑하는 이가 누구일까? 나는 그 부분이 애매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감독에게도 이부분은 애매할 것이다.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주는 어떤 힘, 신을 암시하는 것일 것이다. 그에게 자신의 삶을 이끌어준 그 신적인 존재는 "나쁜남자"같은 존재였던 것이 아닐까? 그에게 하나님은 "나쁜남자"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사실 그런면이 있긴하다. 안락함과 살얼음같은 평안에 안주하며, 처절한 투쟁을 벌이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현실을 외면하며 살다가, 그분에게 사로잡혀 생의 비참한 현실, 이 세상의 죄악된 현실을 알게 되고, 그 속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로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전환하게 되는 과정이 비유적으로 비슷하기는 하다. 그러나, 단지 매춘일까? 그분이 우리에게 권하시는 일이. 단지 매춘일까? 난 이 질문을 그 감독에게 던지고 싶다. 단지 매춘일까? 친구. 그것은 자신의 또다른 안락을 혹은, 무력함을 합리화하려는 여운남기기가 아닐까? 신이 우리들에게 허용하시는 일이, 그분의 하시는 일이 매춘으로 비유될 수 있는 것일까?
김현슥작성일 2006-08-22추천 1
-
[영화리뷰] 지구를 지켜라!!!
- 영화내공 : 상상초월 나는 이 영화를 의자에 비스듬히 눕는 자세로 기대앉아서 발은 앞자리 의자에 대충걸쳐둔, 불량한 태도로 보기 시작했다가 끝 날때는 일어나 앉아서 정자세로 앉아서 거의 울먹이면서.... 정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이 영화 만든 감독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감동과 감사와 사랑에 가슴이 막 터질껏 같으면서... 여하튼 그런 감동 끝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치면서 자막 다 올라가고 우주를 날아다니는 텔레비에서 나오는 영상까지 다 보며 끝냈던 그런 영화였다.이 영화 아직 못 본 분들이 있다면 초강추하는데, 그리고, 정말 충고하는데, 이 영화 꼭 보세요.이런 영화가 한국에서 흥행을 못했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대충, 허접한 에스에푸물 생각하고 나도 이 영화 봤는데, 그런것이 아니다.정말 훌륭한 영화다. 이거.그리고 정말 의미심장한 메타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영화다.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감독이 한국인이라는 것은, 신의 축복이며,물론 이런 영화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는 한국 현실이 돗가튼 것이지만,그래도, 이 아픈 현실 속에서도, 이런 초 매가톤 급 초월과 유모로 그 아픔을 재해석하고,사람에 대한, 동포에 대한, 따뜻한 애정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여하튼 정말 훌륭한 대작이다. 꼭 보시기를 !!!!영화감상 나눌 수 있는 계시판을 찾다가 이 곳에 와 보니 영화감상 고수들이 꽤들 있는 것 같아, 나 김현슥이 이 계시판에 또아리 틀기로 작정하고 기념으로 올리는 첫번째 영화추천.지구를 지켜라!! 이다.다들 이 영화보고 열렬히 감사하시기를 !!!조국에 희망은 있다.이런 착한 사람들이 아직 있다는 사실.그리고 이런 착한 사람들에게 자기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돈 대주는 영화사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 !!!대한민국 만세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는데...반말해서 죄송함다. 꾸뻑.
김현슥작성일 2006-08-11추천 10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