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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2020년 8월 호국인물: 김홍일 육군 중장
전쟁기념관은 8월의 호국인물로 김홍일(金弘壹) 육군 중장을 선정하였다. 고(故) 김홍일 육군중장은 대한제국 시기인 1898년 9월 23일, 평안북도 용천군 에서 태어났다.그는 계몽주의 독립운동의 본산이었던 오산학교 졸업 후, 황해도 신천의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지만,오산학교 출신자들이 항일운동 혐의로 탄압을 당하자 이를 계기로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하였다. 1920년, 구이저우[貴州]군 소위로 임관 후 무장투쟁이 치열하던 연해주 대한의용군사회에서 근무하였다.1926년 국민혁명군 소령이 된 후, 1927년 용담(龍潭)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1931년에는 상하이 병기창 주임으로서 이봉창·윤봉길에게 폭탄을 제공해 임시정부의 의열 투쟁을 지원하였다. 1938년, 중일전쟁 만가령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 외국인으로서 드물게 국민혁명군 소장으로 진급하였다.그는 임시정부의 권유로, 1945년 한국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하여 광복군의 육성에 힘썼다.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직후, 귀국하여 육군준장으로 특별 임관하였고, 이듬해 소장으로 진급하였다.6·25전쟁이 발발 당시 육군참모학교장이었던 그는 6월 28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서울 북방에서 분산 철수하는국군 부대를 수습하여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그의 지휘를 통해 국군은 한강에서 6일 동안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였고,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고 첫 지상군을 한반도에 파견하는 귀중한 시간을 확보하였다. 7월 4일에는 제1군단장에 취임하여 중부전선의 지연전과 낙동강선 방어 작전을 지휘하였다. 이후 육군종합학교장으로서 초급간부 양성에 전념하던 그는 1951년 3월 중장으로 예편하였다.그리고 대만대사, 외무부장관, 국회의원, 신민당 대표, 광복회장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1980년 8월 8일, 향년 83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정부는 군인으로서 그의 공을 기려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을, 독립운동 유공으로서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그가 타계한 직후인 1980년 8월 11일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로를 드높였다. [출처: 전쟁기념관 https://www.warmemo.or.kr/front/viewAritcle.do] ------------------------------------------------------------------------------------------------ 몇일전 백선엽 현충원 안장 논란때, 대한민국 참군인으로서 유튜브 '황현필 한국사'에서도 언급되신 김홍일 육군 중장님이 2020년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셨습니다 이분이야말로 대한민국 명예원수로 추대되어야 한다고 생각되기에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올립니다
아쿨라작성일 2020-07-31추천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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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재방송) 장군 백선엽 간단 이력
ㅁㅣㅊㅣㄴㄴㅗㅁ들이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긴 했지만,독립군을 상대로 싸운게 아니라 팔로군을 상대로 싸웠으니 민족반역자로 볼 수 없다는 미친 멍멍소리를 시전하고 있길래 여기서 다시 정리해봄. 1.백선엽의 창씨개명명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側)는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죽인바로 그 군인으로, 식민지시절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일본의 군인영웅.백선엽이 우연의 일치로 지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님. 2.백선엽은 1943년 간도특설대로 자원하여 전근하였는데,그는 간도특설대의 설립목적과 활동을 확실히 알고 자원한 것임.자신이 조선독립군과 조선독립을 지원하는 양민들을 상대로 싸울것임을 잘 알고 있었음.당시 자유사변등으로 대규모 무장 조선인 항일독립군대는 많이 축소되긴 했지만,소규모 조직으로 또는 동북항일연군소속으로 많이 활동하고 있었음. 즉, 빨치산을 토벌하면서 함께 조선항일독립군도 함께 토벌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음. 위키미디어 간도특설대 항목: https://ko.wikipedia.org/wiki/간도특설대 간도특설대는 간도(間島)에서 반일-반만주국 투쟁(대표적인 조직은 중국 공산당휘하의 동북항일연군)의 활약으로 곤경에 빠진 만주국-일본 당국에 의해 설립되었다. 만주국(滿洲國)의 참의원을 지낸 이범익이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설립하여 대대장 등 몇몇 직위를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채워졌다. 명칭도 이에 유래하였고,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군에 소속되었다.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등 다수의 항일조직은 군대, 관헌 등의 단속과 집단주거 마을건설에 의해 주민과 격리된채 은신하면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맞서 간도 특설대는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되었다. 간도특설대는 1939년에서 1943년까지는 만주국 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동북항일연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1944년과 1945년에는 열하성과 하북성에서 팔로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3.백선엽은 살아생전 자신의 간도특설대 근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음.간도특설대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음. 일본군 입장에서 아무 조선인이나 징발해 같은 조선인을 토벌 시키려다가 반란이라도 나면 더 큰일나기 때문에, 지원자에 한해서 철저히 사상검증 및 같은 민족을 아무렇지 않게 토벌할 수 있는 인물들로 선별해서 만주군 소속으로 만든 부대임. 900명 정도의 소수정예. 종전후 일본인들 입장에선 일본군도 아닌 만주군이었고 일본인의 부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관심도 없었음. 따라서 간도특설대에 대해 아는 일본인은 극소수. 그런데 백선엽이 일본에서 자서전도 쓰고 강연도 많이 다니면서 간도특설대에 대해 자랑스럽게 강연도 많이하고 다니니, 일본인 입장에선 이보다 더 사랑스런 조선인이 없었고, 백선엽의 노력으로 이제는 웬만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 잘 알게 됐음. “백선엽, 日서 ‘간도특설대 강연’, 영웅대접…기록 다 있다”[출처1: 고발뉴스닷컴]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543[출처2: 띥;usa] https://www.ddanziusa.com/news/articleView.html?idxno=4523박 장군은 이날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해방후 박정희 정권 때 일본을 부리나케 드나들면서 강연, 기자회견을 하고 회고록을 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백 장군이 스스로 간도특설대 문제를 부각시켰다며 “일본 사람들에게 명예롭게 임무를 수행했다고 녹음까지 한 것을 내가 입수했다”고 강조했다. 박경석 장군은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친일파와 독립군 장교를 연구했으며 6.25 때 만들어진 ‘가짜 영웅’에 대해 조사해왔다. 특히 백선엽 장군의 숨은 행적을 추적해왔다. 간도특설대는 일본이 만든 소규모 특별 조직으로 일본군 출신이지만 애국적인 생각을 가진 장군들의 제보로 알게 됐다고 한다. 박 장군은 “일본 군국주의가 연변에 있는 조선 독립군, 독립운동가를 소탕하기 위해 만든 특별 조직”이라며 “천명 이내 보병대대 수준이었다”고 했다.박 장군은 “부대장, 참모장이 일본군이고 그 밑의 소대장, 소대원 등 모든 부서는 조선인”이라며 “백선엽 소위, 중위가 근무 했다”고 밝혔다. 친일파들을 연구하는 중에 “이형근 장군, 이한림 장군이 ‘우리가 일본 군대 생활을 어쩔 수 없이 했지만 간도특설대만은 용서받을 수 없다. 간도특설대에 대해서 한번 조사하라’고 말해줬다”고 한다. 그는 “그래서 ‘기왕 연구하는 김에 확실히 해야겠다’고 해서 일본도 가고 만주도 가면서 확실한 근거를 수집했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박정희 정권 당시 백 장군의 일본 내 활동을 알게 된 것. 박 장군은 “일본 사람들게 큰 호응을 받았다, 영웅으로 추켜세웠다”고 말했다. 그는 “백선엽 자신이 조선독립군을 소탕한 것을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얘기를 일본에서 했다”며 “회고록을 비롯해 많은 저서, 기자회견, 연설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다. 4.백선엽은 제주4.3사태 때 같은 동족을 죽일수 없다는 여수14연대의 여수순천반란사건을 진압했는데, 동생 백인엽과 함께 반란사건과 무관한 양민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임의로 학살했음. 즉, 백선엽과 백인엽 형제의 의식속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민족/동포개념은 없었고,한국인은 그저 아무렇게나 죽여도 되는 떼껄룩 쯤으로 여겼음. (특히 백인엽의 양민과 부하에 대한 즉결 처형방식은 유명함. 나무위키 백인엽 항목을 읽어보기 바람.)1952년 빨치산 소탕작전에선 양민을 거의 학살하지 않았는데, 당시 김성수 부통령이 직접 양민을 학살하지 말아달라는 편지를 백선엽에게 보냈기 때문. 5.한국군의 근간이 되는 4대파벌은 독립군(광복군계), 중국군(국민당군계), 만주군, 일본군(일본육사) 출신들인데, 이중 남한군대에서는 만주군출신들이 많은 두각을 나타냈음.그 이유는 초기한국군대는 미국 군사고문단에 상당히 의존하는 구조였기 때문임. 독립군, 중국군, 일본육사출신들은 이전에는 독자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하던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한국군에게 사사건건 간섭하는 미군사고문과 사이가 안좋았음. 때문에 창군초기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때도 많은 공적을 세우고도 미국 군사고문과 사이가 안좋아 교체된 군인들이 많았음. 반면 만주군의 경우 대부분 일본군사고문이 지도하는 체제로 운영되는 부대였기 때문에,군사고문을 다루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음. 또한 만주군 출신들은 근본적으로 철저한 출세지향적인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영어를 배우는데 열심이었던 반면, 다른 군 출신들은 영어학습에 별로 관심없었음. 자연히 미군사고문들과 소통도 잘되고 그들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는 만주군 출신들이 군의 요직을 독차지하게 됨. ※ 일본육사출신들의 경우는 만주군출신들과는 다르게 주로 남방전선에서 근무하였고, 일본육사를 나와 독립운동한 지청천, 김경석등에 대해 열등한 감정을 가지고 있기도 했음. 많은 일본육사출신들은 해방후 자신들이 일본군에 근무했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고 근신하는 모습을 보여줬음. (일부 ㄸㅗㄹㅏㅇㅣ들이 북한군대도 친일파를 중용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일본육사출신들에 한함. 만주군 출신들은 모두 처단대상이었음.) 만주군 출신들의 경우에는 주요전장이 만주였던 만큼 자신들의 상대가 중국국과 조선항일독립 군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식민지시민으로서 고속출세하기 위해 자원입대한 경우가 많았음. 이들에게 일반 조선인은 그냥 하급 식민시민이고 벌레였음. 해방이후에도 자신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서로 뭉치고 도와주며 오로지 출세만을 지향 했고 힘을 합쳐 과거세탁 함. 한국전쟁당시 만주군 출신들이 용감하게 싸운것은 인정하나, 어차피 적화통일되면 삼족이 멸문지화를 당할 입장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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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백선엽의 자부심의 원천
ㅁㅣㅊㅣㄴㄴㅗㅁ들이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긴 했지만,독립군을 상대로 싸운게 아니라 팔로군을 상대로 싸웠으니 민족반역자로 볼 수 없다는 미친 개소리를 시전하고 있길래 여기서 다시 정리해봄. 1.백선엽의 창씨개명명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側)는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죽인바로 그 군인으로, 식민지시절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일본의 군인영웅.백선엽이 우연의 일치로 지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님. 2.백선엽은 1943년 간도특설대로 자원하여 전근하였는데,그는 간도특설대의 설립목적과 활동을 확실히 알고 자원한 것임.자신이 조선독립군과 조선독립을 지원하는 양민들을 상대로 싸울것임을 잘 알고 있었음. 위키미디어 간도특설대 항목: https://ko.wikipedia.org/wiki/간도특설대 간도특설대는 간도(間島)에서 반일-반만주국 투쟁(대표적인 조직은 중국 공산당휘하의 동북항일연군)의 활약으로 곤경에 빠진 만주국-일본 당국에 의해 설립되었다. 만주국(滿洲國)의 참의원을 지낸 이범익이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설립하여 대대장 등 몇몇 직위를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채워졌다. 명칭도 이에 유래하였고,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군에 소속되었다.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등 다수의 항일조직은 군대, 관헌 등의 단속과 집단주거 마을건설에 의해 주민과 격리된채 은신하면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맞서 간도 특설대는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되었다. 간도특설대는 1939년에서 1943년까지는 만주국 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동북항일연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1944년과 1945년에는 열하성과 하북성에서 팔로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3.백선엽은 살아생전 자신의 간도특설대 근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음.간도특설대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음. 일본군 입장에서 아무 조선인이나 데려다 같은 조선인을 토벌 시키려다 반란이라도 나면 큰일나기 때문에, 지원자에 한해서 철저히 사상검증 및 같은 민족을 아무렇지 않게 토벌할 수 있는 인물들로 선별해서 만주군 소속으로 만든 부대임. 900명 정도의 소수정예. 종전후 일본인들 입장에선 일본군도 아닌 만주군이었고 일본인의 부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관심도 없었음. 따라서 간도특설대에 대해 아는 일본인은 극소수. 그런데 백선엽이 일본에서 자서전도 쓰고 강연도 많이 다니면서 간도특설대에 대해 자랑스럽게 강연도 많이하고 다니니, 일본인 입장에선 이보다 더 사랑스런 조선인이 없었고, 백선엽의 노력으로 이제는 웬만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 잘 알게 됐음. “백선엽, 日서 ‘간도특설대 강연’, 영웅대접…기록 다 있다”[출처1: 고발뉴스닷컴]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543[출처2: 띥;usa] https://www.ddanziusa.com/news/articleView.html?idxno=4523박 장군은 이날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해방후 박정희 정권 때 일본을 부리나케 드나들면서 강연, 기자회견을 하고 회고록을 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백 장군이 스스로 간도특설대 문제를 부각시켰다며 “일본 사람들에게 명예롭게 임무를 수행했다고 녹음까지 한 것을 내가 입수했다”고 강조했다. 박경석 장군은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친일파와 독립군 장교를 연구했으며 6.25 때 만들어진 ‘가짜 영웅’에 대해 조사해왔다. 특히 백선엽 장군의 숨은 행적을 추적해왔다. 간도특설대는 일본이 만든 소규모 특별 조직으로 일본군 출신이지만 애국적인 생각을 가진 장군들의 제보로 알게 됐다고 한다. 박 장군은 “일본 군국주의가 연변에 있는 조선 독립군, 독립운동가를 소탕하기 위해 만든 특별 조직”이라며 “천명 이내 보병대대 수준이었다”고 했다.박 장군은 “부대장, 참모장이 일본군이고 그 밑의 소대장, 소대원 등 모든 부서는 조선인”이라며 “백선엽 소위, 중위가 근무 했다”고 밝혔다. 친일파들을 연구하는 중에 “이형근 장군, 이한림 장군이 ‘우리가 일본 군대 생활을 어쩔 수 없이 했지만 간도특설대만은 용서받을 수 없다. 간도특설대에 대해서 한번 조사하라’고 말해줬다”고 한다. 그는 “그래서 ‘기왕 연구하는 김에 확실히 해야겠다’고 해서 일본도 가고 만주도 가면서 확실한 근거를 수집했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박정희 정권 당시 백 장군의 일본 내 활동을 알게 된 것. 박 장군은 “일본 사람들게 큰 호응을 받았다, 영웅으로 추켜세웠다”고 말했다. 그는 “백선엽 자신이 조선독립군을 소탕한 것을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얘기를 일본에서 했다”며 “회고록을 비롯해 많은 저서, 기자회견, 연설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다. 4.백선엽은 제주4.3사태 때 같은 동족을 죽일수 없다는 여수14연대의 여수순천반란사건을 진압했는데, 동생 백인엽과 함께 반란사건과 무관한 양민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임의로 학살했음. 즉, 백선엽과 백인엽 형제의 의식속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민족/동포개념은 없었고,한국인은 그저 아무렇게나 죽여도 되는 떼껄룩 쯤으로 여겼음. (특히 백인엽의 양민과 부하에 대한 즉결 처형방식은 유명함. 나무위키 백인엽 항목을 읽어보기 바람.)1952년 빨치산 소탕작전에선 양민을 거의 학살하지 않았는데, 당시 김성수 부통령이 직접 양민을 학살하지 말아달라는 편지를 백선엽에게 보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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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간단히 알아보는 백선엽장군 이력
백선엽:1920년생1939년: 평양사범학교 졸업 ← 식민조선의 수재들만 가는 3대 사범학교(경성,평양,대구)였음. 뒤에 서술하는 경력을 보면 인성이 망가진 수재의 전형적인 삶을 보여줌. ※ 3대 사범학교는 일단 입학하면 학비, 숙식이 모두 무료에 매월 용돈까지 받았고, 살기 어려운 식민지시대에 안정적인 교사까지 될 수 있었기에 수재들만 입학했음. 식민지시대 3대 사범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엄청난 존경을 받았음. 대구사범학교를 나온 박정희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만군출신들이 괜히 보살펴준것이 아님. 1941년: 만주 봉천군관학교 진학: 본격 친일부역자의 길로 들어섬. ←창씨개명명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側)는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죽인 바로 그 군인으로 우연의 일치로 지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님. 젊은 백선엽의 친일부역결의가 옅보이는 대목. 1943년: 간도특설대 전근, 해방때까지 근무 ← 식민조선부역자들로만 만들어진 부대로 조선독립군과 중국팔로군 및 양민을 상대로 한 잔혹한 토벌작전으로 악명높았음.※ 1983년 일본에서 일본어로 간도특설대 회고자서전을 출간( 『?ゲリラ?―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대게릴라전 ― 미국은 왜 졌는가?)』(하라쇼보(原書房) 출간) - "동포에게 총을 겨눈것은 사실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죽을 때까지 반성없음)1945년: 해방뒤 조만식선생의 비서생활 (비서들 중 한명)하다가, 김일성정권이 친일파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이기 시작하자 12월 남쪽으로 내려옴.※ 김일성 정권의 친일파 처단도 꽤 잔혹했음. 적극적인 친일파뿐아니라 공산주의 사상에 맞지 않는 부자들도 함께 처단함.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삼. 이들이 원한에 사무쳐 남한으로 내려와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는 서북청년단을 조직하고, 이들역시 잔인하게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살육함. 남한의 살아남은 친일파들이 이용하기에 딱 좋은 집단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소비됨.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방경비대입대. 제주4.3사태시 동족을 토벌할 수 없다고 국군이 반란을 일으킨 여순반란사건시 백인엽(백선엽의 개막장 동생), 김종원(일본헌병출신 개막장. 일본도로 양민 참수해 머리를 모아 미군사고문에게 선물로 줌)과 함께 각각 여수 순천지역 민간인 학살 주도.1949년: 남로당 간부로 체포되어 사형구형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박정희를 무죄방면시켜 줌. 1950년: 한국전쟁시 낙동강전선 다부동 전투로 전쟁영웅이 되고, 이후 평양점령 및 중공군의 춘계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 미군과의 사이가 좋았고 군사적능력도 뛰어나 미군의 찬사를 받음. 1952년: 휴전협상 기간 중 빨치산 토벌에 혁혁한 전공을 세움. 양민학살을 하지 말아달라는 김성수 부통령의 서한때문인지 공비들의 투항을 유도하고 양민학살은 최소한으로 막았음.1953년(33세): 한국군 최초 4성장군(육군대장). 박정희의 장군진급에 큰 도움을 줌.1957년: 윤군참모총장1959년: 합동참모의장1960년: 419후 예편, 중화민국대사.1962년: 박정희 군사쿠데타 이후, 그의 국내군인맥을 두려워한 박정희가 국내복귀를 막아 10년간 외국생활.1969년~1980년: 교통부장관, 충주비료사장, 호남비료사장, 한국종합화학 사장역임 1969년~2020년: 동생 백인엽과 함께 선인학원 재단을 만들어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축재. 강남의 2천억원짜리 건물을 현금으로 사들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백선엽일가의 건물로 추정되는 사진은 인터넷에 나옴) ※ 동생인 인간말종 백인엽은 식민지시대 일본메이지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수재로, 인성이 갖춰지지 않은 수재가 어느정도까지 인간말종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아마도 우병우, 김기춘의 대선배급. 궁금하면 나무위키 백인엽편을 참고할 것.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주의주장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특설대에서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지고 토벌에 임하였다"白善燁 (1993). 『?ゲリラ?―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原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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