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검색 결과(39)
-
-
[짱공일기장] 두가지 인생 - 99
Channel 0. Finale 1624년 12월 25일 ‘필그림’들이 왕도에서 얻을 것은 대부분 얻었다. 그들의 신경을 거스르던 ‘인종차별주의 단체’를 해산시켰고, 그들의 여정에 필요한 기사단 쪽의 ‘유품상속자’도 합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곳에 온전히 발을 떼기까지는 한 달하고도 7일이나 더 걸렸다.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었거든. “오매 되다 오매 되어......” 리겔은 신음소리를 내며 대기실 소파에 몸을 묻었다. 대기실 천막 너머에는 밝은 햇살의 세계가 있었다. 주설은 멋들어진 드레스를 입고서...... 그녀와 알은체를 하는 사람들과 함께 악수를 하고, 술을 마시고, 포옹을 했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었고, 모두들 그녀를 면죄부를 나눠주는 천사인양 대했다. “니미 정승집 개가 뒤졌나......” 그 모습을 보며 리겔은 입을 삐죽였다. 그의 비상한 기억력으로 주설을 모신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날들을 반추해 보아도...... 지금 저기서 ‘절친’이라도 되는 양 포옹을 하는 이들의 90%는 그녀가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본 사람들이였거든. ‘클라허 타히’에선 그가 승자였는데, ‘운터 브룩’에서는 주설이 승자가 된 것이, 영판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하냐?”“별 귀경헌다.”“별구경?”“아따 니는 대학물 묵었다는 년이 메타포도 모르냐? 요년 이거 가짜 아녀?”“대충 하나 주워들으면 귀에 딱지가 앉을 때 까지 우려먹는구먼.”“그려야 내것이 되제.” 리겔은 껄껄 웃으며 아이리스를 매도했다가.......별안간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리스는 갸우뚱 하며 그에게 퉁을 놓았다. “오늘 상당히 센티멘탈하다?”“나는 늘...... 센치한 남자여. 내 취미 알제? 노을 봄스로 눈물 짓는거.”“뭐라는거지? 아 그리고, 주설씨가 슬슬 나오래, 리본 커팅 한다고.”“아따, 나 같은 넘이 뭐라고......”“그러게 말이다. 너 같은 놈이 뭐라고 주설씨가 ‘이사’까지 시켜주고 말이지.”“아 맞다. 나 인자 승진혔제?”“사장 1명에, 직원 2명인 회사에서 이사 달아봐야......”“잉? 외 사원이 두 명이여? 니랑 로키 갸는......”“우리? 우린 주주지.”“....... 진짜 디졌으면 좋겄다.”“자본주의의 꽃이 주식인거 몰라? 회사 망하고 싶냐?”“그냥 헌 소리여. 근디 말이여.”“응? 뭐?”“언제 디질겨?”“아 맞아. 근데 그거 알아?”“뭐슬?”“오늘 저녁이 선지국인데....... 재료가 너래.”“허허 좆같은 년이 죽여달라구 악을 쓰네잉.” 서로 훈훈하게 악담을 주고받은 둘은, 말없이 무대를 바라봤다. 아이리스는 무대를 보는 리겔의 눈에...... 동경과 슬픔의 감정이 공존하는걸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부럽다 부러버.....”“뭐가?”“주사장 말여. 언제나 빛나는 별 같자네. 며츨 전만 허드래두 뭔 별거지 겉은년이 채용이다 뭐다 한다 싶었는디.”“뭐......너도.”“잉?” ‘언젠간 그렇게 되지 않겠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 했지만, 괜시리 훈훈한 말을 했다간 며칠치 놀림감이 되겠다는 생각에, 아이리스는 그만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냐.”“뭐여? 말을 시작을 혔으면 끝을 내야제.”“너한텐 과분한 덕담이라 안돼.”“씨벌련이......끝까지 지랄이네잉.” Channel 0. Prelude 1624년 11월 24일 “헉!”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뜬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적당히 삭은 나무냄새, 그리고 위태위태하게 삐꺽이는 천장, 그리고 이제 막 물에서 건져올린 것처럼 축축하게 젖은 시트. 그가 지금 있는 곳은 아케르날이었다. “잘 잤어?” 문이 삐꺽 열리면서, 여자가 들어왔다. 몇 달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이제 소녀티를 서서히 벗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보자 긴장이 풀어졌는지 그대로 드러누웠다. “긴 여행이었습니다.”“그래, 그런거 같더라. 꽤나 환영을 받은 모양이었나봐? 피가 장난 아니게 튀던데?”“걸리적거리는 놈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의도 없고.....”“뭐..... 예의 차릴 상황은 아니었겠지. 실제로 만나본 소감은?”“제 짧은 소견으론...... 파멸이 그중에선 제일 낫더군요. 위선은...... 솜씨 좋긴 한데, 좀 더 배워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만...... 어차피 다 아시잖아요?”“지켜본 거랑, 직접 느낀 거랑은 다르지 않겠니? 고생했으니, 식사라도 하지 그래.” 그가 돌아올 것을 알았는지, 식탁에는 2인분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대충 떠 먹는 척만 하는 동안, 남자는 걸신들린 것처럼 정신없이 그릇을 비웠다. “더미를 좀 더 강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아 그래? 지켜보니까 그럭저럭 할 만 한 것 같더니.”“지금이야 그렇지만...... 그들이 더 강해질 것을 상정해 놔야 할테니까요.”“그래 그렇게 하자. 출발은 언제 할 거같디?”“일단..... 그들이 거기에 온 목적을 완전히 달성해야 할 것 같으니 대략 한달정도? 그정도 걸리지 싶습니다. 그 안에 더미를 좀 더 보강하고.....”“......” 남자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여자는 슬그머니 숟가락을 내려놓고, 남자가 하는 말을 찬찬이 경청했다. 그녀는 그것이 퍽 즐거워 보였다. “신이 나나 보구나?”“아.....네?”“이제까진 책임감에 짓눌렸는지 얼굴이 펴질 날이 없었는데...... 지금은 신나서 계획도 다 세우고 있으니 말이야.”“어.....음..... 죄송합니다.”“아냐, 죄송할거 있니? 그..... 너희 조상들이 만든 말 있잖아. ‘소시지도, 먹을거면 웃으면서 먹어라.’였던가?” Channel 1. 로키 1624년 12월 31일 “와..... 로키군 봤어요?” 답답이는 사뭇 흥분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지만, 안타깝게도 말 걸 상대를 잘못 찾은 것이 아닐까 싶다. 내 가슴팍에 박혀있는 이 종잡을 수 없는 피조물 때문에 나는 눈앞을 가득 메우는 숲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일어나질 않았거든. 그녀는 내게 우리 눈앞에 드리워진 숲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자신의 소감을 한참 동안 늘어놓았지만, 내 반응은...... 그녀의 마음에 썩 내키질 않았을 것이다. 답답이는 나의 이런 반응이 별로였는지 이내 자리를 떠나 다른 이들에게로 쪼르르 넘어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녀석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는 없어보였다. 주설은 깃펜을 질겅질겅 씹으며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넘겼고, 리겔의 경우에는..... “오지 마야!”“아니 왜 그리 성질이야?”“니가 열로 와부리면 무게중심이 무너지자네!” 그 덩치가 손을 파르르 떨며 답답이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허 참...... 고소공포증이라니, 저 물결치는 근육이 아까울 지경이로군. 하지만 모처럼만에 리겔놈의 약점거리를 찾은 것이 그녀에게는 퍽 즐거운 일이었는지, 답답이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리겔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녀는 악의가 잔뜩 묻은 즐거움으로 달떠보였다. “덩치 값 좀 하자 근육 돼지야.”“뭐시여?”“에에? 화내는 거야? 여기서 한 번 뛰어볼까?”“하지 마라고!” 답답이와 알샤인은 신이 나서 리겔의 눈앞에서 발을 쿵쿵 굴렀고, 녀석은 손이 햐얘지도록 손잡이를 잡은 채, 도살장 앞의 돼지마냥 꺽꺽거리는 소리를 냈다. “진짜 내리기만 혀라. 너거들 모가지 따가꼬 선지국을 맹글랑께잉.” 다소 유치한 그들만의 잔치에 휘말리고 싶은 마음은 일절 없었기에, 나는 주설의 옆자리에 앉았다. 녀석은 내가 방해꾼이라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신경질적으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방해할 생각 1도 없으니까, 하던거 해.”“그려.” 셋은 낄낄거리면서, 때론 화내면서 하다가 사이좋게 창가에 나란이 앉아서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무르짐 산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리겔도 나머지 놈들이 자리를 복도 쪽으로 옮겨가고 나선 부쩍 용기를 내게 된 모양이었다. “흐미...... 징허네. 귀도 먹먹허지구.”“성도 그렇소?” 알 샤인은 ‘기사단’이라는 짐을 내려놓고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는지, 어설프게나마 리겔의 말투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책임감에 억눌러왔던 ‘프로하기온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조금은 고개를 드는 모양인가보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알바는 아니다. “근데, 시원하게 산을 직선으로 타고 올라가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빙빙 돌아서 가나 몰겄네.”“철도는 노선이 일정 기울기 이상으로 가팔라지면, 제대로 올라갈 수가 없거든요. 크레인으로 끌어서 올리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다소 돌아서 가더라두 완만하게 선로를 놓는게 장기적으론 싸게 먹히제라.”“아아..... 그런 이유가 있었네요.”“왐마 우리 아우님이 기사단 들어감스로 돈찔러준건 아닌갑소잉. 생각보다 총명허네.”“셤보고 들어갔소 셤보고.” 셋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주설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서류뭉치를 슬쩍 엿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건 뭐 말이 ‘서류’지 낙서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지러운 낙서가 한 가득이었다. 서류의 한 가운데에는...... “아이템?”“그려.”“그게 뭐가 문제야? 팔건 많잖아?”“인자는...... 그런 식으로는 힘드니 그렇지 뭐......”“무슨 소린지 알 도리가 없군. 그냥 팔면 되는거 아냐?”“몰르는 소리 말어..... 이 바닥서 제일로 수요가 많은 시장이 어디겄어? 왕도 아니겄냐.”“음..... 그렇겠......지?”“나가 취급허는 물건이...... 암만혀두 사치품인디, 왕도에서나 먹히지 딴데서는 비비기나 할 수 있간?”“음......”“인자는 여그서 물건 팔아제낄 생각을 허지 말구...... 여그서 물건을 띠와서, 왕도에 판매하는 걸루다가 전략을 고쳐야 할겨.”“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을 짓나 했떠니 나름 이유가 있었군.”“근디 그...... 문제가 있다믄...... 기존 유통라인이란게 쫀쫀허게 자리잡구 있을 건디....... 요거를 뚤버내는 게 쉽지는 않겄지.”“.......”“그걸 못 뚫음, 삼민상단은 그냥 지역 브랜드로 끝나는 거여.”“......”“허...... 어디 갑자기 날벼락이나 안 떨어지나.”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12월 31일 열차가 무르짐 산맥의 초입에 이를 때 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사람들에게 ‘가이드’가 빙의되어, ‘필그림’들에게 무르짐 산맥에 대한 이모저모를 소개했었어요. 마치...... 제 자신이 “와...... 이거는 뭐냐?”“어...... 음...... 그게.” 뭐라도 되는줄 아는 것 같은 낯 간지러운 우월감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휴, 정말 열차에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을 짓이었죠. 그래도 라스알게티 출신이라는 것과, ‘수사님’의 거처에 몇 번 왔다갔다 했던 경험을 가졌다는 어드벤티지로 처음에는 자랑스럽게 이것저것을 말해왔지만...... 문제는 저의 얄팍한 경험으로 커버를 치기엔 무르짐 산맥은...... 정말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창조물’이라고 해야 할까요? ‘지형’? 아니 있어봐...... ‘그릇’? 흠..... 생각을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이 거대한 스케일을 가진 장소를 한 단어로 묘사하려고 드는 것 자체가 ‘교만’하다는 절절이 느끼게 됩니다. 확실한건 그래요. 제가 이제껏 알고 있던 무르짐 산맥은 과장 좀 보태면 전체의 0.000001%도 안될거에요. “도가도 비상도여.”“그게 무슨 말이야?”“도를 도라고 말 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도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모습을 더는 묵과할 수 없었는지, 주설씨는 질겅이던 펜을 서류철 안에 끼워두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어요. 오오, 참 타이밍이 좋아요. 그녀가 앉을 즈음에 우리를 실은 열차는 거대한 V자 협곡을 지나가고 있었거든요. 무르짐 산맥의 풍경들은 어느 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가 내려다보는 V자 협곡은...... 백미 중에 백미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누군가가 뜨끈하게 김이 나는 피자에서 딱 한 조각을 떼어다 놓은 것 같은 풍경이었어요. 이런 모양으로 땅이 잘려나갈 수 있다는게 놀라울 뿐이에요. 세계를 창조한 ‘아버님’의 손길이 강력하게 역사하심을 이렇게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가슴이 벅차오르는 한편, 어떻게 보면 엉뚱한 생각이 들었어요. “‘배교자 조르다노’가 화형을 당할 주장을 하기 전에, 지금 우리들이 보는 이 풍경을 봤더라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할 수 없었을 텐데.”라는 생각 말이에요.‘배교자’는 죽었지만, 그의 생각까지 죽은 것은 아니어서......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도 그의 사상이 담긴 찌라시가 학내에 알음알음 돌아다녔다고 했잖아요. 그런 ‘숨은 배교자’들은 자신들의 교조의 생각에 몰두하다보니, “이 세계는 ‘아버님’같은 절대자가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며, 단지 ‘우연’의 산물이었을 뿐이다.”라는 어이없는 소리를 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더군요.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정말 ‘우연’이 이 세계가 만들어졌다면...... 수조안에 흙, 모래, 풀등을 넣고 백날 흔들어보라고 그래요. 과연 지금 제가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 수 있기나 하겠습니까? 이 아름다운 풍경, V자로 잘려나간 거대한 지형...... 이건 ‘누군가’가 의도하고 만들지 않고선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는게 당연해요.‘배교자’들은 우리들 보고 ‘신이나 믿는 머저리들’이라고 잘난 듯이 지껄이지만, 그들의 본질은, 그저 책상에 앉아 턱이나 괴면서 망상을 하는 멍청이들 일거에요. 안 봐도 뻔해요. “도가 뭔데요?”“도 몰러유?”“모르니까 묻죠.”“도는..... 말로는 못혀유.”“뭐에요? 말장난도 아니구.”“말로 설명할 수 있으면 그건 더 이상 도가 아니라구 혔잖아유. 내 생각에 도는...... 말로 이렇다 저렇다 허는게 아니라..... 보고, 느끼는거라 생각혀유. 쩌것처럼.”“야옹.” 으응? 언제 깨어났는지, 트렁크에서 냥사장이 고개를 빼꼼이 꺼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하하, 라스알게티로 돌아오고나선 한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길래, 고향에 온 김에 아주 떠나버렸나 했는데...... 그래도 대접받는 경험을 완전히 떼어놓을 수 없었던 모양이에요. 저는 냥사장이 빠져나오면서 만든 트렁크 틈 사이에 손을 넣어 참치통조림을 꺼냈어요. 그리곤 냥 사장의 입에 넣어주었답니다. 냥사장은 오물거리며 참치 조각을 씹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제 품안에 파고들어왔어요. “그루미엄으로 가야한다고 했죠?”“잉, 아케르날로 갈라믄 거서 가는기 질로 안전하다구 혔슈.”“거기까진 편도로 8일이다. 이런 풍경은 토하도록 볼 텐데 굳이 지금 감탄하...... 으윽!” 로키군이 퉁을 놓으려는 찰나, 우리 뒤쪽에서 우릉우릉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열차가 떨리기 시작했어요.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의 창문으로 가려는 차에...... “엎드려!”
갑과을작성일 2020-05-24추천 0
-
[짱공일기장] 두가지 인생 - 98
Channel 1. 로키 1624년 10월 19일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마치 전날부터 줄을 서고 기다린 사람인양, 토라는 ‘The Cloud’의 셔터를 올리자마자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요 근래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활기가 넘쳤다. 모두가 어둠속에 침잠한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밝은 빛을 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노라니..... 참으로 눈꼴사나웠다. “기쁜 소식이유?”“네. 그동안 오래 기다려 오셨어요. 드디어 찾았습니다. 그놈들 소재지요.” 토라의 말에 주설은 ‘아니 벌써?’라는 얼굴이었다. 음..... 그래, 왕도 외의 도시와 왕도의 시간 관념은 다른 편이니..... 비 왕도권에서 살아온 그녀에겐 ‘그들’의 일 처리속도에 입이 떡 벌어질 법도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토라가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라고 말할 법 했다는 거지 뭐. 첫째론 PBRC는 ‘그들’의 앞마당인 라스알게티에서 행동을 했다는 것. 그리고 둘째론 매주말마다 그 많은 인원을 동원해 가며 난리를 쳤다는 것 이 두 가지를 고려해 볼 때는..... 그들의 일처리 속도가 결코 빠르다고 할 순 없거든. 물론...... 왕도의 시간관념 기준으로 말이다. 그래도 ‘필그림’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려고 하는 ‘그들’의 지부장 앞에서 굳이 이걸 언급해가면서 면박을 주어봤자..... 내게 떨어질 것은 무엇이며 감수해야할 기회비용은 무엇인가. 그냥 계산기 두드릴 것도 없는 간단한 질문이다. 나는 암산에 능했고,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잘 자셨소? 듣자허니 싹수 없는 작것들 소굴을 찾은 거 같던디, 한번 알랴 주시오.”“네. 그놈들은 지금 ‘뷔킴 버그’에 있더군요.”“네? ‘뷔킴 버그’요?” 주설, 리겔과는 달리, 답답이가 화들짝 놀라며 대화에 끼어든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뷔킴 버그’는 ‘운터 브룩’만큼이나 다수의 이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거든. 굳이 구별을 하자면...... ‘운터 브룩’은 ‘라스알하게 계’가 지배적이라면, ‘뷔킴 버그’는 어느 누가 다수라고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족속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운터 브룩’은 쓰레기산에 터를 잡고 있어서 부지가 좁은 반면, ‘뷔킴 버그’는 ‘라스알게티’와 ‘스피카’를 잇는 ‘라스피카 메갈로 폴리스’라인의 한 축을 맡은 위성도시거든. 자연적으로 형성된 여타 도시들과는 달리, 이 도시들은 왕실의 계획 하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래서 도시부지가 넓었고, 자연스럽게 인종의 용광로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인종들이 어울려 살고 있게 되었다. 나는 이에 대해서 주설과 리겔에게 설명해 주었고, 그제서야 그들은 답답이의 반응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다. “똥 묻은 개새끼가, 겨 묻은 개새끼를 욕허구 있었는갑소.”“코메디가 따로 없네유.”“아, 왕도에선 그런 상황을 두고 ‘내로남불’이라고 말해요.”“그게 뭔디?”“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그래, 저게 바로 합리적인 반응일 것이다. “요원들이 대기하고 있어요. 말씀만 하시면 당장이라도 ‘정화작업’을 시작하려고 합니다.”“‘정화작업’이요?”“아 네. 더러운 걸 흔적도 안 남기고 치워버리는 거죠. 뭐...... 그러니까.”“몰살시켜버린다는 것이지.”“네. 맞아요. 그거에요. 말씀만 하시면.”“음..... 아녀유. 솔직히 말 혀서 ‘치워버렸어유.’라는 말만 듣고 있기엔..... 지들이..... 겪은 그..... 마음의..... 기스가 날거 같지는 않거든유. 긍께......”“아아, 직접 현장을 보고 싶다는 거죠?”“그렇쥬. 아 근디.”“네 말씀하세요.”“지들이..... 요게 다가 아니걸랑유. 한 명이 지금 볼일이 있어 밖으로 나갔는디..... 그 친구가 오믄 함께 가시쥬.”“네네 그렇게 하시죠.”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10월 19일 주설씨가 말한 ‘그 친구’는 다름 아닌 알 샤인씨였습니다. 그는 마침 기사단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오는 길이었어요. 이젠 자연인이 되었지만, 그래도 일하던 가락은 있었는지, 그는 ‘The Cloud’에 들어오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토라를 알아본 모양이었어요. “이게..... 아니. 이 사람......”“안녕하세요?” 머뭇머뭇 거리는 그에게 토라는 그녀 특유의 사교적인 웃음으로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는 토라의 손이 마치 지네라도 되는 듯 움찔했지만, 주변의 반응에 입술을 꾹 깨물고 그녀의 손을 맞잡았어요. “아......네. 반갑습니다. 알 샤인이라고 합니다.”“아아 그렇게 되시군요. 저는 토라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악수를 하는 그의 얼굴은 툭 건드리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울상이었습니다. 현직 하샤신..... 그것도 지부장과 마주한 것도 모자라 악수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알 샤인씨에게는 극도로 혐오스러웠겠지요. “콱안! 눈까리 똑바로 안뜨냐? 어디서 내로남불이여 내로남불이?!” 그새 주워들은 ‘내로남불’을 써먹는 리겔의 이죽거림은 덤이었겠습니다. 언뜻 보면 맥락에 안 맞는 예시인가도 하지만, 그간의 일들을 생각한다면...... 맞는 말이긴 하네요. “그려, 그렇게 똑바로 악수를 혀야제. 눈도 마주치고.”“크흡......”“어...... 저랑 악수하는 게 무슨 벌칙 같은 건가요?”“아녀라, 그럴 사정이 있어유.” 토라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그 자리의 어느 누구도...... 이 악수의 맥락을 설명해주지는 않았습니다. 토라는 나를 보며 ‘이게 무슨 일인데?’라고 속삭였어요. 저는 토라에게 귓속말로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토라는 사정을 이해하고 나선 더욱 더 활짝 웃어보이며 알 샤인씨의 손을 흔들었어요. “악당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해요.”“......”“자 그러믄 ‘뷔킴 버그’인가 뭔가로 가 볼려유?”“아 네 좋아요 따라오세요.” ‘The Cloud’밖에 나가보니, 검은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신기한 것이, 마차에...... 말이 없었습니다. 으응? “새로 하나 장만했어요. 이건 자동차라고 하는거에요.”“자동차? 그게 뭐당가요?”“자동으로 움직이는 마차라는 건데요. 말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마차에요.”“음마? 요런 쐿덩이가 혼자 움직인다 이거요? 음마 겁나게 신기허네잉.”“신기하긴 뭐가 신기해. 여기 올 때 기차타고 온 놈이.”“요거랑 고거랑 같다냐. 긍께 요것이 짝은 기차라고 생각허믄 되는 거제잉?”“그렇지.” Channel 1. 로키 토라가 가지고 온 자동차는 우리를 싣고 쭉쭉 뻗은 도로를 달렸다. 도로는 이제 막 포장이 되었는지, 금하나 가지 않고 똑발랐다. 토라는 바람을 맞으며 ‘요게 최근에 건설된 47번 국도라고 해요.’라고 설명했다. 물론..... 아무도 그것에 대해 궁금해 하지는 않았다. ‘뷔킴 버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입간판을 지나자, 도로의 폭은 더욱 넓어졌다. 도로 옆에는 네모반듯한 건물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어있었다. 라스알게티의 우중충한 건축물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중엔 여기에다가 지원을 차릴까봐.”“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근데 일거리는 넉넉하냐 여긴?”“그럼, 온갖 인종들이 뒤섞여 살다보니, 알력다툼이 장난 아닌 걸? 이 도시에 대해서 농담이 있는데 말이야...... 어이쿠!” 갑작스럽게 차가 덜커덩 소리를 내며 흔들리더니, 우리 모두 공중에 붕 떠올라 차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불의의 습격에 모두들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쓰다듬어야 했다. “과속방지턱이 있는 줄은 또 몰랐네.”“말하던 거나 마저 말해봐. 이 도시 농담이 뭔데?”“어..... 음..... 썩 유쾌한 농담은 아냐. 알 샤인씨는 알고 있을 텐데요?”“유쾌하지 않는 농담도 있는갑소? 아야, 그게 뭔디?”“나도 썩 그 농담은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푸르체리마 호수에서는 사람으로 퍼즐을 맞출 수 있다.’일껄요?”“으윽..... 안 그래도 속이 미식거렸는데, 그 말 들으니까 더 메쓰꺼워 지는 거 같아요.”“언니 좀만 참아. 곧 도착해!” 토라의 장담과 달리, 우리는 바퀴가 달린 강철 통 속에서 20분을 더 달려야 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답답이는 샛노래진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인적이 드문 곳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 뒤로 우리는 약 5분간이나 영 듣기 거북한 소리를 애써 못들은 척 해야만 했다. “안 늦게 잘 도착허셨네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빨간 머리가 보였다. “응 좀 밟았어. 주변 통제는 잘 해놨지?”“잉 당연허쥬....... 여그 공뭔덜 섭섭지 말라구 잘 찔러놨어유.” 스벤은 토라에게 상황을 보고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펜릴이 떠오르는 그 머리카락에 반가운 마음이 솟구쳤지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하는 녀석의 태도에 나 역시 어정쩡한 고갯짓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답답이의 손을 잡고 ‘그들’에게서 나올 때에 느꼈던 그 비장한 마음이...... 시간이 지나 이런 어색한 영수증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어색한 재회를 빨리 털어버리려는 듯, 스벤은 평소답지 않은 빠른 템포로 보고를 이어갔다. 녀석의 보고를 종합해 보자면, 이곳은 ‘푸르체리마 호수’와 접하고 있는 ‘포말하우트 공단’이었다. ‘부엔나 꼼미다’에서 시작된 추격에 도망을 거듭하던 데네브 일행은 이곳을 최후의 농성장소로 선택한 모양이더군. 그건 꽤나 영리한 판단이었는데, 물리적으로는 ‘포말하우트 공단’은 공단 건설 초창기 시절의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있고, 관계적으로는 여러 족속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두고 건물들보다도 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지. 즉 이곳은 2개의 유 무형의 장벽이 보호해주는 천혜의 요새 같은 것이다. 배타적이며 자존심이 강한 여러 족속들이 난립한 이곳에 멋도 모르고 발을 디디면 그들의 알력다툼에 휘말려 제대로 발도 못 붙이고 쫓겨나리란 게 그들의 계산속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꽤나 영리한 생각이었지만, 상대가 ‘그들’이라는 걸 간과한 게 녀석들의 문제였다. ‘그들’은 쾌도난마와 같이 빠르게 이곳의 족속들을 정리했고, 이곳의 공무원들이 원하는 바를 적절하게 제공해버렸다. PBRC가 믿던 두 가지 장벽 중에 하나가 허물어져버린 셈이었다. 남은 비빌 언덕이었던 난잡한 구조도, ‘그들’에게 된서리를 맞은 족속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압제자를 어떻게든 빨리 보내겠다는 일념 하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그 많던 건물들 중에 하나를 특정할 수 있게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면 녀석들로선 자신이 믿던 두 개의 장벽 모두가 허물어져버린 채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버린 셈이다. 스벤의 보고를 들으면서, 내가 밑도 끝도 없이 ‘턱없이 강대한 힘을 가진 거대한 존재’에게 개겨 버렸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도로시 년이 아니었다면 감히 시도조차 하기 어려웠겠지. 내가 ‘답답이’와 함께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은 단지 나의 능력 뿐 만이 아니라, 억세게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요원들 쭉 깔아놨으니께...... 신호만 주시믄 언넝 들어가서 털어버릴게유.”“음..... 좋아. 잘 들으셨죠? 이제 말씀만 하시면 저희 요원들이 바로......” 나는 보고를 듣는 도중에 ‘그들’이 특정 지은 건물을 쳐다봤다. 창문도 없었기에 뭐 하나 보일 턱이 없었지만...... 참으로 이상하게도 나는 그 벽 너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강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뭔가 잘못됐나 싶어 다른 곳을 쳐다봤지만,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 강렬한 시선은 여전히 내 피부를 콕콕 찔러댔다. 확실히..... 무언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더 이상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순간 “허억!” 누군가가 내 등 뒤에 얼음을 쏟아 넣은 것 같은 전율감이 들면서 나는 그대로 다리가 풀려버렸다. Channel 2. 아이리스 “주변 단속은 잘 해놨지?”“잉 그러믄 당연허쥬. 주사덜 섭섭지 않게 뽀찌덜 잘 찔러놨으니께, 걱정 안혀두 되유.” 담담하게 보고를 이어가는 스벤과, 보고를 들으며 꼼꼼하게 상황을 체크해나가는 토라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문득 올해 초 한 노인과 나누었던 대화가 불연 듯이 떠올랐습니다. 노인은 제게 ‘휠맨’의 총책을 맡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었고...... 저는 한동안 그 이야기를 곱씹으며 고민에 빠졌었지요. 만약 제가 그때 ‘그래요 제가 한 번 해보죠 뭐.’라고 대답을 했다면...... 지금의 토라 자리엔 제가 서 있었겠지요? 딱히 질투가 나거나, 부럽지는 않아요. 그때의 저는 ‘신념에 따른 선택’을 했었고, 지금도 그 선택에 대해선 후회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상상은 자유니...... 숲속에 있는 두 갈래 길 중에 내가 선택한 길 말고 다른 길을 걸었을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딱히 나쁜 건 아니잖아요? 스벤의 보고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상상의 나래를 한참동안 펼쳐본 결과...... 지부장님의 제안을 받았을 평행 세계의 저는, 지금 토라의 역량에 반에 반도 못할 거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그것도 그것 나름일 테니까요. 저는 저에게 예비된 올바른 길을 갔던 것이고, 토라는 토라의 길을 밟은 것입니다. ‘역사엔 가정이 없다.’는 논제가 이렇게 가슴 절절이 다행스럽게 느껴질 줄은 몰랐어요. 저는 상상속의 손을 흔들며 제 머리위에 뭉게뭉게 피어올랐던 망상의 생각 풍선을 지워나갔습니다. 그런데 “헉!” 로키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풀썩 주저앉았습니다. 저희는 놀라서 그쪽을 바라봤습니다만...... 이상한 것은 그 만이 아니었어요. “히익!” 주설씨와 알 샤인씨도 로키군 만큼이나 덜덜 떨며 휘청거렸답니다. 저와 리겔, 토라와 스벤 모두 그 모습에 어리둥절했어요. “무슨 일이에요?”“저 쪽에...... 뭔가가 우릴 지켜봤어.”“네?” 로키군은 건물을 가리켰습니다만...... 그 행동은 우리에게 ‘아하 그렇구나!’하는 느낌 보단 오히려 ‘저게 무슨 귀신 싯나락 까먹는 소리래?’라는 의문만 가져다주었습니다. 로키군이 가리킨 건물에는 누군가가 우리를 바라볼 창문 따위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들이 무슨 투시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창문도 없는 꽉 막힌 건물에서 어떻게 시선을 느끼는지 참 알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알 수 없는 건....... 로키군 뿐 만 아니라, 주설씨와 알 샤인씨 역시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어요. 아니 셋이서 단체로 헛것이라도 본 걸까요? “생각이 바뀌었어유.”“네? 어떻게......”“여그는 우덜이 직접 들어가겄슈.”“예?” 주설씨의 폭탄선언에, 저와 토라 그리고 스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뜯어말렸어요. 하지만 로키군과 알 샤인씨 마저도 그녀의 주장에 가세를 했어요. “우리 셋이 동시에 그걸 느꼈다면..... 이건 너희같은 ‘일반인’들이 낄 만한 스케일의 것이 아니야.”“언제부터 ‘우리’가 ‘일반인’의 범주에 포함된거지?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토라는 주설씨의 팔을 바라보며 말을 흘렸습니다. 침묵은 짧았지만, 의미는 확실했어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곳에 팔 한쪽이 없는 그녀를 호위도 없이 보낼 순 없다는 거겠지요. 이 부분에서는 다들 논파할 만한 거리가 없었는지, 로키군은 둘 간을 조율해서 ‘나머지는 5분 뒤에 합류하는 것이 어떠겠냐’는 중재안을 내밀었습니다. 토라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그래 뭐 5분 사이에 무슨 일이야 있겠어?’라며 동의를 했습니다만...... 저와 리겔은 달랐어요. 저희 둘은 ‘같은 가족끼리 말이나 되는 소리냐’며 함께 하겠다고 말했지만, 주설씨와 알 샤인씨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여건...... 우덜이 나서야 헐 일이유.” 그 말에 설득력은 없었지만, 그 무게감에 짓눌려 우리는 머뭇머뭇 뒷걸음질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셋은 건물을 둘러싼 하샤신 요원들을 통과해, 문 앞에 섰습니다. 로키군은 ‘알기에바’를, 주설씨는 ‘쉐다르’를, 그리고 알 샤인씨는 ‘카프리조’를 발동했어요. “야......”“네?”“그거, 폭주 시키지 않을 자신 있어?”“이놈...... 거칠긴 하지만, 바보는 아니에요.” Channel 1. 로키 ‘우리’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알기에바’를 최대한 전개했다. 상대의 정체는 알 수가 없지만, 보통 놈은 아닌게 분명한 이상, 이쪽도 방심해선 안 된다. 이 말을 들으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 것이다. 여지껏 내가 말해온 것을 들어왔다면...... 내가 일면식도 없는 존재를 두고 ‘보통놈이 아닐 것이다’라고 속단하는 적을 본 적이 없을테니까. 답답이와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내가 학습한 것이 있다면, 세상일은 4+5=9처럼 마냥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 말이 논리적이지 않고, 뭔가......그래,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이 ‘이성은 버리고 원시 종교 시절로 회귀한 것이냐’라고 비웃을 지도 모르겠는데...... 강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으로 퉁치면 안될까? 아니..... ‘느낌’이라는 단어론 부족하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일단 어디에 짱 박혀있는지는 확인해야겠지? 으...... 이거 영 기분이 별로이긴 한데.” 나는 촉수 하나를 내 눈에 찔러넣었다. 무언가가 쑥 들어오는 불쾌한 기분이 머리통을 훑어내린 뒤에...... 내 촉수들 하나하나의 시야가 내 머릿속에 그대로 들어왔다. 나는 그대로 촉수들을 길게 늘여 건물 이곳 저곳을 훑어나갔다. 1층은...... 먼지와 쓰레기들 뿐이고, 2층은...... 음...... 저 역겨운건 뭐지? 피웅덩이와 갈기갈기 찢긴 시체들인가? 이 안에서 집단 살인극이라도 벌어진 걸까? 3층..... 4층..... 응? 어디에도 녀석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분명 이곳에서 강렬한 시선을 받았는데, 우리가 건물로 들어온 사이에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기라도 한 걸까? 자기 모순적인 발언이겠으나,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없다.’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건물을 더욱 더 촘촘하게 살펴보았다. “아..... 저기 통로가 있는거 같은데?” 편의상 ‘37번 촉수’라고 명명한 촉수가 실마리를 발견했다. 녀석은 1층 바닥을 한참동안 훑으면서, 바닥에 실금이 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그 주변을 한참동안 수색한 결과, 실금 주위에 경첩과 손잡이의 흔적까지 찾아냈다. 저기에 뭐가 있어도 있을 것 같군. 나는 다른 촉수들로 하여금 37번 촉수 근처에 위험요소들이 있는지 확인하도록 했다. 흡사 그물과 같은 감시망 속에서 다행이 위험요소는 감지되지 않았다. “여기다.”“....... 뭔가 으스스 헌디?”“그러게요. 대놓고 ‘숨어있으니까 목숨 보전 잘해라.’라고 경고하는 것 같은걸요?” 주설이 경계를 서는 동안, 나와 알 샤인은 입구를 열었다. 입구 너머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있었고, 그곳을 향해 계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시야의 폭이 넓은 내가 선두에 서고, 주설이 중위를, 마지막으로 알 샤인이 후위를 맡아서 계단을 내려갔다. “와...... 이거 이젠 아무것도 안보이는데요?”“빛도 없는 태초로 돌아가는거 같어유.”“어째 답답이가 전염된거 같은데?”“불안허니 그런거 아니겄냐?”“불안은 공포랑 다르다. 공포는 대상이 있지만, 불안에는 대상이 없어. 그냥 허깨비 같은 감정이지.”“말은 잘 하네요.” 나는 그들에게 시덥잖을지 모르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들’의 일원인 ‘휠맨’들이 하는 일 중에는 ‘히트맨’이 임무를 마치고 난 뒤에 남겨둔 물건들을 회수하는 것도 포함이 되어있다. ‘로타네브’라는 군수산업가와 제휴를 맺기 전, 그들은 장비 하나하나 재활용을 해야 했는데, 특히 날붙이의 경우에는 피가 묻어 장비가 녹이 슬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항상 도금을 해야했다. 그때 사용한 것이 황산이었다. ‘휠맨’들에겐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친구였던 셈이지. ‘황산’ 특유의 유용한 쓰임새 덕분인지, ‘휠맨’들은 황산을 가지고 7행시를 지을 정도였다. 그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7행시는 ‘땅속으로 들어가 보라, 거기서 마음가짐을 바로하면 숨겨진 돌을 발견할 수 있을지니’ (Visita Interiora Terra, Rectificando Occultem Lapidem)였다고 하는군. 어느 소설가의 설정 집에서 그대로 배껴 온 것 같은 시상이었지만, ‘휠맨’들 사이에서 나름 먹물깨나 먹었다는 사람이 제시했던 시상이였던 지라, 그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리에 회자되었고, 급기야는 ‘그들’의 비밀 시설인 ‘Ge-Uters’의 입구를 찾는 실마리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연금술에 미친놈들이 이뤄낸 작은 성과라고나 할까? 이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무저갱의 끝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곳에는 “쉿.” 통로 너머에는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촉수하나를 나의 귀에 꽂고, 나머지 촉수중 하나는 알 샤인에게,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주설의 귀에 꽂았다. 그런 식으로 청각을 공유하면서, 나머지 촉수들을 길게 늘였다. 그것들은 저 너머에 있는 소리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주님이시여. 최후의 순간이 도래하였습니다. 저는 주님의 뜻에 따라 모든 악업을 행하였습니다. 저는 거짓을 이야기 하고, 민족을 불화하게 하였으며, 만인에게 증오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저의 임무는 여기에서 끝이 나는 것입니까?” 데네브의 목소리였다. 구트 그라스에서 ‘승리자’ 행세를 했던 때와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지쳐있었고...... 두려움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촉수를 눈에 찌르지 않아 그의 모습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진실로 말한다. 너는 나머지 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너의 위대함을 기억하는 이는 없을 것이고, 너의 이름과 무덤에 침을 뱉고 저주할 자들만이 태양 아래 남을 것이다. 오로지 어머님만이 너의 헌신과 희생을......” 정체를 알 수 없는 대화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우리 셋은 전율감에 몸을 떨었다. 그것이다. 우리를 덜덜 떨게 만든 존재가...... 그들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그것을 방해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었지만...... 더는 그 대화를 들어선 안 된다는 강한 예감이 우리 셋의 머리를 관통했다. “넘의 집에 왔으니, 인사라도 혀야지?” 주설은 쉐다르의 시위를 물었다. 무형의 화살이 바람을 일으켰다. 주설은 쉐다르를 대화가 들리는 쪽으로 크게 튼 뒤에 살을 날렸다. 바람을 잔뜩 머금은 쉐다르의 화살은 우리와 그들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을 와장창 박살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벽 너머로 데네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막을 때는 수줍은 처녀처럼, 몰아칠 때는 토끼같이 하라’는 어록이 있다. 이걸 우리의 상황에 적용해 본다면...... 그들에게 대비할 찰나의 시간조차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주설이 낸 구멍 속으로 알기에바의 촉수를 밀어넣었고, 알 샤인은 칼을 빼들었다. 나와 알샤인, 그리고 주설은 벽에 난 구멍으로 몰아쳐 들어갔다. “.......뭐 뭐야?”“뭐긴 뭐야? 네놈에게 높은 확률로 다가올 죽음이다.” 알 샤인은 파편을 뚫고 들어가서 데네브를 들이받아 넘어뜨리고, 그의 머리통에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왔.......” 누군가가 데네브와 알 샤인 사이에 끼어들어 검신을 움켜잡았다. “이익......익!” 알 샤인은 기합을 내며 검 손잡이를 그었다. 놀랍게도 알 샤인의 도신을 움켜잡은 그것의 손에서 불꽃이 번쩍번쩍 일어났지만, 그것은 고통에 찬 비명은커녕 덤덤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으아악!” 칼을 잡은 손을 휘돌려, 그대로 알 샤인을 날려버렸다. 알 샤인은 칼과 함께 벽에 쳐박혔다. 삐죽하게 박살난 벽에 부딪혀, 그것에는 알 샤인의 피가 퍽 하고 튀었다. “기다리......” 나는 알 샤인에게 정신이 팔린 녀석을 향해 알기에바를 뻗었다. 날카롭고..... 빨라야 한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강한 것...... 그것은 트라이던트와 같은 뾰족한 꼬챙이가 되어 그것의 주위를 빠르게 날아들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녀석은 저주인형마냥 온몸이 침에 콕콕 꿰인 신세가 될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제발...... “퍼버벅!” 대다수의 알기에바는 녀석의 비늘에 튕겨져 나갔지만, 이쯤되니 알기에바도 악에 받쳤는지, 어떻게든 그것의 틈을 찾기위해 내가 시키지 않고 무던이 애를 썼고, 알기에바 몇 가닥이 그것의 비늘 틈을 파고들었다. 지금이다. 나는 알기에바의 촉수를 크게 부풀렸다. 비늘이 벌어졌다. 이전에 튕겨져 나갔던 알기에바를 수복해 녀석의 팔을 움켜잡았다. “음...... 너는 꽤 다루는 편이구.....”“그렇게 여유 부릴 수 없을 텐데?” 알기에바는 녀석의 팔을 게걸스럽게 삼키고 그대로 녹여버렸다. 간만에 알기에바를 그 본질에 맞게 사용한 듯 하다. “자꾸 말 끊으면 나도 화......”“이거 뭐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편인가본데?”“으윽..... 머리통이 깨진거 같은데.”“괜찮으셔유?” 자신의 팔이 녹아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신음소리는커녕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아 보였다. Channel 2. 아이리스 저와 남은 사람들은 가만이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설씨가 그렇게 엄포를 놓았는데 무시하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저는 그저 발만 동동 구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야, 정신 사나븐께 좀 가만 있어봐라잉.”“지는?” 리겔도 저 만큼이나 우리 일행들이 걱정되었는지 손가락에서 피가 나도록 손톱을 질겅질겅 물어뜯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럴진대 하샤신들은...... 그래요 뭐. 그럴 수 있지, 아무리 실용주의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을 배신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들을 돕는 게 달가울 리가 있겠어요? 요원들이 미동도 하지 않고 건물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스벤이나 토라는 ‘여기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듯이 벤치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언니도 좀 와서 마셔.”“아냐. 괜찮아. 마음만 받을게.”“걱정돼서 그래? 괜찮아! 독 안탔어.”“그러니까 더더욱 걱정 되는걸?” 현실성 있는 농담에 안 그래도 없던 입맛이 뚝 떨어져, 저는 그저 마른 침만 삼켰습니다. 리겔은 한참을 더 손톱을 물어뜯다가, 더는 안 되겠는지 그들의 테이블에 앉았어요. “나도 한 잔 줘 보씨요.”“하하, 그래요. 여기 있어요.”“음마, 향이 허버 향기롭소잉? 요거 이름이 뭐시요?”“깔라만시에요.”“아따 고맙소...... 스토옵. 스토옵...... 스톱!” 시간이 지나도 스벤은 넉살이 그대로였는지, 리겔의 잔이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이 깔라만시를 따라주곤 씩 하고 웃어보였습니다. 리겔은 하샤신이 건넨 호의가 기분 나쁘지 않았던지, 역시나 씩 웃으며 차를 후루룩 들이켰어요. “오매 맛이 참 요상지네, 달면서 써브요?”“그렇쥬? 요즘 구하기 힘든거니 양껏 드셔유.”“야 이년아, 니는 안 묵냐?”“됐어.”“지미 생각을 혀 줘도 지랄이네. 쟈꺼 꺼정 나한테 줘보씨요잉. 프로하기온 총독도 지 싫음 그만이제.” 리겔은 차를 한 번 더 받더니, 저를 약 올리듯 눈앞에 찻잔을 흔들며 꿀떡꿀떡 마셔댔어요. 하...... 참아야 합니다. 여기서 저 삼류 양아치의 도발에 넘어가는 건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요. 뒷감당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기에서 제가 소리라도 빽 지르는 날에는 일행들이 돌아왔을 때, 리겔 놈이 저를 두고 얼마나 놀려댈지는 불 보듯이 뻔해요. “큭...... 킥킥.”“음마? 뭐가 그리 웃기시오? 웃길라는 의도는 없었는디?”“아이리스 언니한테 이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요.”“아따 그러요? 시야 좁게 사셨소?”“네 그런가봐요. 전 여지껏 아이리스 언니는 어딜 가도 예쁨만 받는 줄 알았거든요.”“뭐...... 내가 봉께로 쟈가 어딜 가두 알랑방구를 존나게 뀌어 싸니 끔뻑 속아 넘어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요. 그려두 나가 프로하기온 뒷골목 짬밥이 있어븡께로, 한눈에 딱...... 거시기 혀브렀기에 망정이제.”“야, 나 착한 거 맞거든? 너한테만 그러는 거야 너한테만.”“음마? 나한티만 그렸냐? 들었소? 저것이 저러게 사람을 갖다가 차별 한당께요. 명색에 종교인이라는 작자가 사람을 가려브네...... 너그 교주가 니 꼬라지 봐블믄 존나게 좋아하겄다잉?”“이익......” 화는 났지만, 리겔놈의 말에서 구구 절절 뜯어봐도 틀린 말은 없었어요. 아무리 날건달 놈이여도 ‘아드님’께서 활동하셨던 프로하기온 출신이라서 그랬던 걸까요? 그는 걸판지지만, ‘아드님’께서 말씀하셨던 바로 그 비유를 들어 제 행동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버렸고, 그대로 의표가 찔린 저는 아무런 반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야 이거 참 재미있는데요? 아이리스 언니가 신학적 지식에서 밀려버리는 날이 올 줄이야.”“그래..... 내가 리바이고, 바리사이였지..... 이거 참 할 말이 없네.”“그려 마, 실천이 없는 지식은...... 뭐시냐, 부도수표? 그거랑 뭐가 다르겄냐? 담부턴 이 오래비 말씀 잘 듣고......”“내가 이 치욕은 언젠가는.....” 머리로는 수긍했으나, 마음으론 승복할 수 없어, 저는 대놓고는 하지 못했지만 작은 목소리로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두고 봐요. 내가 진짜 저녀석을.......이렇게 복수를 다짐하는 동안, 요원 하나가 스벤과 토라에게 다가와서 무언가를 보고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토라는 반색을 했답니다. “무슨 이야긴데?”“아, 언니도 반가워 할 소식인데. 최근에 그 녀석, 그루미엄으로 출장을 갔었거든. 거기에서 일 처리 잘 하고 돌아 온다네?”“아...... 그래?”“‘우리’랑 떨어져 있으면서 많이 기다려 왔을 텐데 반응이 좀 그렇다?”“아냐...... 잘 살아있으면 됐지 뭘......” 토라의 말을 듣다보니, 스테반 로스차일드씨가 주최하던 파티에서 마주쳤던 그 저주받을 년이 떠올랐습니다. 그년도 그 아이에 대한 소식은 알지 못했었지요. 대륙 제 1의 부잣집 고명딸도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아이는..... 그 빌어먹을 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거에요. 그래, 그 아이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래 뭐...... 어떤 형태로든 살아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으악!” 토라가 씁쓸한 얼굴로 제게 위로의 말을 건네다가, 별안간 터진 폭발에 머리를 감싸쥐었습니다. 토라는 스벤이 재빠르게 나선 덕에 파편을 맞지는 않았지만, 저와 리겔은 우리 앞에 있던 건물이 폭발하면서 날아온 파편을 그대로 뒤집어 써야만 했어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지축이 한참동안 흔들거렸고, 우리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어요. 건물 앞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많지 않아보였습니다만...... 리겔의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그는 파편을 얻어맞아 머리통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고 내 손을 움켜잡았습니다. “뭔 일 난거 같은디? 얼렁 가봐야 쓰겄다.”“응? 어! 그래!” Channel 1. 로키 손이 녹아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는 저 괴물자식의 행동에, 우리는 솔직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주설은 그것의 모습에 자신의 옛 기억이 떠올랐는지 특히나 더 진저리를 치는 것 같았다. 이거...... 이쯤 되니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겠군. “넌 누구지? 데네브의 보디가드라도 되는건가?”“그닥 재미없는 농담을...... 내가 이 저열한 유기물 덩어리를 보호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나? 이 치는 그냥......”“네? 주님?? 이건 말이 조금 다..... 윽!” 그것의 대답은 우리는 물론이고, 데네브까지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이 똥그래져 그것에게 항변을 하려는 순간, 그것은 남은 팔로 데네브의 목을 움켜잡았다. 데네브는 발버둥을 치며 그것에 발길질을 했으나...... 그것은 데네브의 머리통을 자신의 잘려버린 단면에 쳐박아버렸다. 뼈와 뼈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데네브의 머리통이 박살나버렸다. “너네를 끌어들일 미끼정도 밖에 안됐지. 지금은 그......”“아니..... 질문 하나 잘못했다고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냥 단백질 공급원.....”“우욱! 토 할거 같아.” 그것의 어께가 쫙 하고 벌어지더니, 마치 입이라도 되는 양, 데네브의 몸을 와그작 와그작 씹어 삼켰다. 데네브의 몸통이 어느정도 삼켜지자, 미처 삼켜지지 않은 그의 팔과 다리는 마치 그것의 손가락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르가 고어물이 될 줄은 몰랐는데......?”“기가 막힐 노릇이군요. 순수한 라스알게티가 어쩌고 하던 놈들의 대빵이란 작자가, 이런 사람인지 뭔지 구분도 안되는 괴물새끼였다 이거군요.”“세상 살면서...... 말 되는 일을 몇 번이나 겪었다고 새삼.....”“그래 뭐 맞는 말이라 치고...... 넌 누구냐?”“목양견......”“목양견? 양떼를 돌보는 개 말 하는 건가?”“그래..... 나는 ‘어머님’의 뜻이 이 땅에 임재하는 것을 위해 예비된......”“내가 잘못 들은건가?” 뒤에서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리겔과 답답이였다. 이 자식들......괜히 끼어들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건만, 이 두 고집불통들은 내 말을 그냥 대놓고 무시를 해버렸다. 어쨌거나, 그들도 저것이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한 모습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목양견은 갠디? 저건 암만 봐두 개랑은 거리가 멀지 않어? 굳이 거시기 혀보믄...... 도마뱀?” 그 와중에 등장하자마자 뺨을 시원하게 올려 붙여버리는 리겔의 말에 그것은...... 처음으로 감정적이라 할 수 있는 반응을 보였다. “메타포라고는 모르는...... 무식한 불순물이 섞여이......”“아무리 찌꺼기여두 갠줄 아는 도마뱀 보단 난 거 같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리겔의 입담에, 그것은 순간 울컥 했지만......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멘탈을 정리했다. “그래..... 이런 불순물을 섞어놓은 데는 ‘어머님’의 숭고한 뜻이 있겠지...... 창조는 다양성의 어머니일 것.....”“푸핫!” 리겔은 그것이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껄껄 웃으며 녀석에게 독설을 날렸다. “오매 꼬라지 짠허다. 이 상황서두 즈그 애미나 찾고 있네잉. 아야, 기왕 찾는 김에, 빤스도 한 장 가따 달라고 혀라와. 가까븐 미래에 피똥을 존나게 지릴거 겉은디.”“.......” 기왕 선을 넘어버린 김에, 패드립을 시원하게 날려버린 그의 모습에...... 우리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래서 무식한데 신념만 있는 놈 만큼 위험한 건 없는거 같...... “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Channel 2. 아이리스 솔직히 말해서..... “으아악!”“.......”“아야, 뭣들 허냐, 나 죽는다! 나죽어!” 리겔은 뿌린 대로 거뒀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아무리 감정이 상해도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부모님 욕을 해버리는건..... 입이 백개라도 할 말 없는 거죠 뭐. 어쨋거나, 그것의 분노도 참 대단했어요. 그것은 리겔이 던진 마지막 말폭탄에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괴성을 질렀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래..... 뭐 상식적인 선에서 보일 수 있는 반응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상식선을 넘어선건 바로 그 직후였지요. 그가 소리를 지르면서...... 그것의 어께가 별안간 쭉하고 찢어져버린거에요.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었죠. 통상적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고 어께가 찢어지진 않잖아요. ‘턱이 빠지게 하품한다.’라는 말은 있어도, 어께가 찢어지게 소리를 지른다는 말은 없잖아요? 그런데 그 놀라운 일이 바로 우리 눈 앞에서 벌어져 버린 거에요. 어쨌거나, 그것의 어께가 찢어지면서...... 벌어진 틈 사이로 날개가 쫙하고 돋아났습니다. 살 속에서 파묻혀 있다가 튀어나온 만큼...... 그 날개는 피로 잔뜩 얼룩져 있었지요. “적당히 깨우쳐 주려고 돌아가려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너희의 순수성을 위해서라도, 저 불순물을 미리 제거해 버리는게 나을 것 같다. 고마워 하도......” 그것은 날개를 쭉 펼치더니, 리겔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습니다. 그 풍압에 우리 모두의 몸이 휘청일 정도였지요. 리겔은 그 기세를 막아보고자 팔을 'x'자로 겹쳤지만...... 그것은 리겔을 그대로 들아 박아버렸고, 둘은 그대로 벽에 쳐박혔습니다. 내키지 않지만 리겔 녀석을 위해 기도문이라도 읊어줬어야 했을 텐데...... 워낙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입도 떼기 전에 벽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어요. “으윽...... 더럽게 아프잖아.” 기차를 들이박은 듯 한 충격에 ‘이건 누가 봐도 죽을 수 밖에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놀랍게도 그리고 살짝 아쉽게도 리겔은 멀쩡했어요....... 아, 다만 이건 ‘충격에 비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리겔의 머리통을 비롯한 곳곳은 피범벅이 된 상태였습니다. 어쨌거나, 저 징그러운 내구성에 그것도 조금은 놀란 눈치였어요. “저 씨발럼이...... 깜빡이는 켜고 들어와야제 뭣허는 짓이여?”“생각보다 단단한 편이군.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그것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알기에바의 촉수가 그것의 목에 칭칭 감겼어요. “모가지에 절취선 그어졌으니 거기까지 하지?”“.......”“팔 가지고 놀라긴 했지만...... 머리 잘리는데 과연 장사가 있을까?” Channel 1. 로키 혹시나 해서 오해를 할지 몰라 다시 한 번 설명을 하자면, 나는 분명 경고를 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내가 ‘그들’에 속해있을 때부터 나는 늘 이래왔었다. 피에 굶주린 인간 백정이라는 세간의 인식에 대한 반발감이었던 걸까? 어쨌건 나는 피를 볼 상황이 올 때면 늘 그만둘 것을 권했다. 이븐타운에서도 그랬잖아? 하지만 생명존중에 대한 나의 꿈은 번번이 부서지곤 했지. 이쯤되면 뭐랄까...... 클리셰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것은 나의 경고를 무시했다. 경고를 했는데 무시를 하면 뭐...... 어쩔 도리가 없지. 녀석의 목을 절취선 대로 잘라줄 수 밖에. 나는 알기에바에 힘을 주었고, 알기에바의 촉수는 그것의 목에 매끈한 절단면을 남겼다. 그것의 목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대개의 두부 절단 사망자들의 행동이 그러하듯이, 목을 잃어버린 육신은 몇 발자국을 비틀거리며 걷다가...... 힘을 잃고 푹 쓰러졌다. “디진겨?”“생물학적으론 그럴 가능성이 크지?”“별 것도 아닌 것이 뭘 믿고 저렇게 나댄것이여?” 리겔은 놈의 시신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것의 반응은 없었다. 내가 이제까지 해온 이야기들 중에서 ‘공포’라는 장르에 속한 것은 없었으니, 갑자기 시신이 움직일 리는 없을 것이다. “가능성이 크다고 해서 100 퍼센트 그렇다는 보장은 없는거 아......”“우악!” 아니, 이젠 ‘공포물’의 클리셰에까지 도전할 참인건가? 분명 목이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리겔이 몇 차례 톡톡 건드렸을 뿐인데, 그것은 자신을 건드리던 리겔의 다리를 꽉 움켜쥐었다. 어...... 음 이런 상황에 꺼낼 말은 분명 아니겠으나, 언급을 안하고 넘어가다가는 직무유기가 될 거 같기에 ‘굳이’ 언급을 하자면....... 그때 리겔은 ‘나도 모르게 오줌을 지릴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리겔이 어버버 하는 사이에 그것은 리겔의 다리를 잡고 그를 들어올려 사정없이 패대기를 쳤다. 리겔의 입에서 옥수수를 닮은 하얀 물체가 후두둑 튀었다. “나는 죽음과 반대편에 서 있는 존재. 너희의 상식으론 나를 가증스러운 위선자에게 보낼 수......” 잘린 머리가 이야기를 이어가는 모습이 역겨워 보였다. 그건 알 샤인도 의견을 함께 했는지, 녀석이 말을 끝내기 전에, 그것에게 달려들어 녀석의 몸을 반으로 토막내고, 리겔의 다리를 움켜쥔 그 손을 잘라내버렸다. 나는 그것이 더는 개소리를 늘어놓지 못 하도록, 머리를 밟아 으깨버렸다. “공포에 질려있구나.” 으윽...... 분명 머리통을 으스러뜨려버렸음에도, 내 발 아래에 깔려있던 그것은 여전히 아가리를 놀려댔다. 나는 그것을 걷어차 버렸다. “죽음은 나를 정복하지 못한......”“으아악!” 주설은 공포에 반쯤 미쳐버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바로 쉐다르의 시위를 당겨, 남은 잔해들에게 바람살을 쏘아댔다. 알 샤인이 반으로 갈라버린 그것의 육신이 폭죽 터지듯 산산조각이 났다. “이게 너희가 생각하는 죽음의 정의인가? 나를 원자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으깨버리면 내가 ‘생물학적’인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하나보지만......”“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앞서 말했듯이, 죽음은 나를 어쩌지 못한다.” Channel 2. 아이리스 “무서워 말아라. 너희는 ‘어머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비록, 저주받은 가증스런 물건을 상속받았으나, 그로 인하여 너희는 복된 이가 될 것이다. 너희는 어머님을 완전하게 만들 자들이니.” 고깃덩어리가 됐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지만...... 그것의 조각은 하나 하나 모이기 시작하더니, 처음의 그 모습으로 돌아왔어요. 산채로 박살이 난 자가 죽기는커녕,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걸 제 눈으로 똑똑히 본 마당에 ‘두려어 하지 말라.’라니...... 그것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담력’의 기준선이 지나치게 높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깨끗하게 육신을 수복한 그것은 리겔을 쳐다보며 자신의 말을 이어갔습니다. “어머님의 종된 자 나 다비흐가 너에게 말한다. 너는 이 세상 끝 날까지 네가 원하는 것은 머리터럭 하나, 먼지 한 톨도 얻지 못할 것이다. 네가 손을 대는 모든 것은 손아귀 속 모래처럼 사라질 것이고, 네가 사랑하던 자들은 너를 욕하며, 저주하고, 희롱할 것이다.” 모두가 두려움에 질려 입도 못 떼는 상황에서 리겔은...... 달랐어요. “뭐래 씨벌럼이...... 내 운명은 내 것인디 니가 뭐라고 훈수를 두고 지랄이냐?” 리겔은 뚜벅뚜벅 걸어가, 그것의 머리통을 후려쳤어요. 리겔의 일격을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그것은 크게 휘청거렸습니다. “뭐여? 저 기괴한거에는 암스롱또 안 허믄서, 고작 요 주먹질에 휘청거리는거여?”“이..... 씨......발......”“뭔가 맥이 탁 풀려브네, 어려운 말로 하믄, 네넘은 물리적 오류 앞에선 무적일지 몰라두...... 요 간단한 물리적 원리 앞에선 맥도 못 춘다는 거 아녀?”“크윽......” 리겔은 그것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박치기를 하듯 자신의 머리를 그것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일들이 마치 거짓말이라도 되는 듯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지요. “깡패새끼덜이 깡패짓을 어떻게 허는지 아냐?”“......”“의외로 간단혀. ‘은혜는 못 갚아두, 원수는 꼭 갚아븐다. 고로 저새끼를 건들믄 좆되븐다.’ 하는걸 대그빡에 깊이 박아브러야 써. 그려야 다시는 못 개깅께.”“.....”“그걸 기억하며 디져라잉. 이 명제를 갖다가 넘덜이 잊거나 의심을 안 헐라믄, 니는 지금 디져야쓴다.” 리겔은 그것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이어가며 차근차근 그것을 걷어차고, 후려치고....... 짓이겼어요. 그것은 마치...... 사형대 앞에 꽁꽁 묶인 죄수처럼....... 아무런 반항도 하질 못했답니다. 그리고 그것은..... 퉁퉁 불어버린 얼굴을 하며....... 그 자리에 쓰러졌어요. 다신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아오 씨벌! 존나게 덥다!”
갑과을작성일 2020-04-09추천 2
-
[짱공일기장] 두가지 인생 - 77
Channel 1. 로키 주설은 특유의 당당한 걸음걸이로 문을 열어젖혔다. 두꺼운 유리문 너머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좌우로 오와열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있는 엄청난 수의 점포들의 행렬이었다. “......흐읍!” 라스알하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인민을 속이고, 프로하기온에서 총독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녀였지만, 자신이 상상했던 것을 아득히 뛰어넘어버리는 현실의 스케일 앞에서는 완전히 압도되어 신음소리를 토해낼 수 밖에 없었다. “흐미......” 놀라움, 조금 있어보이는 식으로 표현을 하자면 ‘경탄’이라고 하지? 여하튼 이런 종류의 감정은 뜻밖에도 높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봉을 맡은 주설이 무너지자,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던 리겔 역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눈을 돌려 답답이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앞에서 언급했던 두명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상태에 매몰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땠냐고? 감정이 없다라고 자평하기엔 내 ‘비정한 마음’의 균열이 제법 커진 모양인지, 나 역시도 초보적이게 나마 감정을 느끼긴 했다. 하지만, 앞서의 세 명이 느낀 것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할까? 음...... 이렇게 표현하는 게 더 이해가 쉽겠군. 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놀라움을 느낀 지점에 있어서는 세 명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들이 이곳의 압도적인 규모에 놀라움을 느꼈다면, 내가 놀라움을 느낀 이유는 이곳이 “어서 오세요.”“저기...... 청바지 하나 알아보려고 하는데요.”“아 그래요? 청바지는 여기에서부터 여기까지에요. 마음에 드는거 하나 골라보시면 되겠네요.” 일전에 라스알게티 역사와 워터 프런트 역사에서 보았던 풍경과 놀랄 만큼 닮은 동시에 더더욱 놀라울 정도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게 무슨 개소린가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 것이다. 나름 성심성의껏 묘사를 해본다고 했지만, 내 빈천한 언어구사력 때문에 이해하기가 정말 복잡할 것이다. 그래, 일이 복잡해지면, 하나씩 하나씩 문제를 쪼개서 생각하는게 상책이겠지? 닮은 동시에 닮지 않았다면, 닮은 구석은 이렇고, 닮지 않은 구석은 저렇다고 설명한다면 이해가 수월해 질 것이라고 믿어보련다. 닮은 구석이라고 한다면, 하드웨어적인 부분, 그러니까 겉껍데기에 해당되는 부분에 해당된다. 라스알게티와 워터프런트의 역사는 이곳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기둥 하나, 타일 하나에도 수학적인 계산이 숨어있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정확한 위치에 배열이 되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입구 겸 출구에는 소지가 용이하면서도, 사치품에 해당되는 것들을 취급하는 상점들이 배치가 되어있지. 다루는 물건들의 크기가 작은 이유는, 앞으로 이어질 쇼핑에 걸리적 거리지 않기 위함일 것이고, 다루는 물건들이 사치품에 해당되는 것은...... 화려한 고급 상품들이 건물의 얼굴에 해당되는 출입구에 놓임으로서, 건물 외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에대한 경외심을 환기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다른 구석이라고 한다면, 소프트웨어적인 부분, 그러니까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람과 사람간의 의사소통 양식에 있었다. 일전에 언급했겠지만, 역사는 그야말로 인간 면빨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개인적인 공간이 극도로 협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소통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굳이 짚고 넘어가자면, 일 방향적고 확정적인 안내방송만이 향 연기처럼 떠돌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어서오세요. 어떤걸 알아보러 오셨나요?”“네, 슬랙스랑 셔츠하나 알아보려고 왔는데.”“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슬랙스고, 셔츠는...... 이월상품이 세일항목으로 나왔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쌍방향적이면서도, 비확정적인 대화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었다. 각각의 대화들은 메타포와 심리전이라는 화장분 속에서 자신의 본 모습을 철저히 감추고 있었다. 대화를 듣노라면, 고객과 종업원이 말로 하는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거든. 이 비유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백화점은...... 가로 세로로 날카롭게 잘려진 인공의 토양에서, 무질서하고 경계가 모호한 의사소통의 화원이 꾸며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건 내 개인적인 감상일 뿐, 네 명중에 세 명 즉 절대다수가 생각하는 이곳의 이미지는 “욕망을 주춧돌로 삼고, 부의 벽돌을 쌓아올린 거대한 성이네요.” 답답이의 평가만큼 그들의 집단 사유를 집약적으로 담아내는 말이 없다고 생각하려는데, 주설이 별안간 자신의 한 팔로 양 뺨을 찰싹 때리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녀의 눈은 나로선 재단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여그서 너무 멍을 때려버렸구먼, 싸게 움직이자구유. 여그서 숟가락이라두 하나 얹어볼라믄 남들보단 두세배로 뛰어야 되지 않겄슈?” Channel 2. 아이리스 주설씨는 층별 안내문을 찬찬이 읽어나가더니,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를 짚어냈습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8F, 관리 사무소’였어요.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와, 당차게 목적지를 짚어낸 것은 좋았지만...... 8층이라는 숫자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높은 건물을 어느세월에 오르나 하고 걱정하던 찰나에, 리겔이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요 계단같이 생긴거...... 참말루다가 신기허지 않는가?” 그가 가리킨 계단은...... 아니,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의 형상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계단이라고 합의하는 모양을 그대로 빼다 박기는 했지만, 작동 양태는 사회적 합의를 산산이 부수고 있었거든요. 난간을 짚고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야 하는 일반적인 계단과는 달리, 이 계단은....... 놀라지 마세요. 그저 층계에 서 있는 것 만으로도 저절로 위로 올라가더라니까요. “이걸...... 워쩌케 타는 거여?”“글씨...... 잘못 탔다가 고대로 자빠지는거 아녀?” 주설과 리겔은 감히 계단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한참을 고민하는 바람에 우리 뒤에서는 벌써 제법 많은 사람들이 층계를 오르지 못하고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흘끔흘끔 보면서 ‘대체 저 사람들은 안 오르고 뭐하는거지?’하는 반응이었어요. “저...... 죄송합니다. 먼저 타시겠어요?”“진작에 비키지 안비키고 뭐했어요?” 제 말에, 하늘거리는 레이스 옷을 입은 여자는 짜증을 내며 계단에 성큼 올라탔습니다. 그녀의 기술은 제법 유려해서, 쉴새없이 올라가는 데도 불구하고 헛디딤 없이 가볍게 계단에 올라탔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는 계단이 올라가거나 말거나, 층계에는 눈길하나 주지 않고 있었다는거에요. 세상에....... 필요가 기능을 만든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저희는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자동으로 올라가는 이 신기한 계단에 올라탈 수 있었고, 층을 바꿔가면서 몇 번의 연습을 거친 끝에, 아까 그 여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제는 초보티를 벗었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계단에 몸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흐미...... 그냥 계단 하나 새로 파버리지는 사람 골수를 빼묵어버리는 구마잉.” 투덜거리며 층계에서 내려오는 리겔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드디어 8층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층별로 특색있는 상품들이 진열되어있던 여느 층과는 달리, 이 층에서는 단 하나의 거대한 사무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들어가보자고.”“어이 주사장, 잘 할수...... 있겄냐?”“잉. 잘 혀야지. 무조건 말여.”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심지어 로키군 마저도 주설의 어께를 두드릴 정도였어요. 우리 모두의 격려에 그녀는 힘을 얻었는지, 입술을 앙다물고 문을 열었습니다. “뉘시오?” 문을 열자마자 진한 소스냄새가 우리를 향해 훅 끼쳐왔고, 인기척을 느낀 방의 주인의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주설씨를 선두로해서, 우리는 문틈으로 고개를 빠꼼이 쳐들고 방 안을 훑어보았습니다. 방 안은 주인의 취향을 철저히 반영하고 있었어요. 감히 짐작컨대 방의 주인은...... 식물을 제법 사랑하는 사람인 모양이었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마치 라스알하게가 연상되는 초록 물결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거든요. 수녀원 화단에 다양한 식물들을 길렀던 업보인지, 저는 이 방안에 있는 식물들이 제법 낯이 익었습니다. 그 구하기 힘들다는 은방울 꽃에서부터, 소나무 분재와 난초까지...... 이곳은 방이라기 보다는 작은 식물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리고 그 식물들의 한가운데에, 한 남자가 하얀 손수건으로 라스알하게 난의 이파리를 정성스레 닦고 있었습니다. 탁자 위에는 빈 그릇들이 널부러져, 방의 주인이 풍요로운 식사를 이미 끝마쳤음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여그...... 건물 관리사무소 인가유?”“예 그렇소만.” 남자는 방문객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손에 들린 난 이파리를 닦는걸 멈추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그에게 있어서 저 난은 꽤나 중요한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점포 하나 내볼라구 허는디...... 상담 가능하셔유?”“......?” Channel 1. 로키 나는 식물을 가꾸는 인간을 솔직히 좋아하지 않는다. 반대로 동물을 가꾸는 사람은 어떻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 그냥 사람이 싫은거 아니냐고 한다면...... 변명을 해야겠지. 동물을 기르는 사람과 식물을 기르는 사람 둘중에 어느쪽이 더 싫냐고 묻는다면...... 나는 후자를 선택하고자 한다. 적어도 동물은 즉각적인 피드백이라도 있거든. 식물을 가꾸기를 즐겨하는 이들은, 의사소통은커녕 간단한 몸짓조차 못하는 무념무상의 대상에게 온갖 애정을 쏟아붓는다. 그리고선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변명으로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곤 하지 ‘정성을 기울이면 그만큼 잘 자란다.’라고 말이다. 아무리 잘 자란다고 한들, 너른 대지에서 적절한 햇볕과 풍부한 강수, 그리고 자신을 뜯어먹거나 짓밟는 동물들의 수난을 겪는 야생초만 하겠는가. 자신에 대한 내 생각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주설에게 ‘저 사람은 왜 나를 저런 식으로 쳐다보는지 모르겠다.’고 툴툴거렸다. 어쨌거나 노인은 갑작스러운 방문객이 어떤 용건을 가지고 왔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자신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아 혼란스러워 했으나, 주설의 ‘점포 하나를 얻고자 한다.’라는 말에 대충 상황 파악이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말투며 행색이며 보아하니 라스알하게 촌것들 같은데, 공연히 잡동사니 같은 걸 꺼내서 서로의 귀중한 시간을 헛되게 만들지 말자고. 어떤걸 팔 셈인가?” 주설은 노인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을 하는 대신, 캐리어를 열어 그 안에 담겨있던 물건을 꺼내어 보였다. 그것은 청록색의 은은한 색채를 띄는 그릇이었다. 이제야 처음으로 보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기에, 우리는 노인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흘긋흘긋 물건을 훔쳐보았다. 청록색 배경을 하늘삼아, 하얀색의 학들이 열을 지어 날고 있는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딱 보아도, 그녀가 프로하기온에서 선보였던 비단보다 훨씬 더 값어치가 나갈 것이 분명해 보였다. 주설 이녀석...... 프로하기온 총독에게조차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보인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프로하기온에서의 일도 있고 하여, ‘이만하면 저 남자도 껌뻑 넘어가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이 노인은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노인의 눈이 가늘게 떨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외에는 일체의 감정적인 동요를 암시하는 어떤 신체적 반응도 보이지 않았거든. 한번쯤은 물건을 들고 자세히 살펴볼 법도 했지만, 이 사람은 아예 쳐다도보지 않았다. “우린 장물 같은 건 취급 안 해.”“이게 왜 장물이래유?” 오히려 패턴에 말려든 것은 주설 쪽이었다. ‘장물’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그녀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녀의 반응을 본 순간, 나는 일이 텄다는 예감이 들었다. 텄다는게 뭐냐고? 최악의 경우에는 협상이 불발되거나, 아니면 극적으로 성사를 시키더라도 그녀가 요구하는 바를 완전히 관철하기엔 글러먹은 것 같다는 거지 뭐. 협상과는 인연이 없는 내가 그런걸 어떻게 아냐고? 물론 지적대로 협상 쪽은 전공분야가 아니라는건 부인할 수 없지만, 사람과 사람의 심리를 무기 삼는다는 점에서는 ‘의뢰’와 큰 맥락에서 닮은 구석이 많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 성공적인 의뢰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패를 상대보다 조금 늦게 내는 꼼수와, 그 짧은 순간에 상대의 패를 파악하는 눈썰미가 필요하다고. 주설은 적시적소에 패를 내긴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패착은 가위, 바위, 보 중에서 심혈을 기울여 패를 낸 손이 하나라면, 그녀의 상대는 두 개의 손으로 제 2의 패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물론...... 비겁한 처사라고 욕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협상이건 의뢰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중요할 뿐, 수단의 정당성이 중요한건 아니지 않는가. 주설도 자신의 입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어봤다고 주장했으니, 노인의 대답을 통해 자신의 협상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신이 목적을 수정해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기는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지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게 왜 장물이냐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나는 그게 더 의문이구먼.”“정말 몰르니께 요러게 묻는거 아니겄어유? 라스알게티 치덜은 입 하나에 말 두개를 담는갑쥬?” 이런...... 그녀는 새로운 목적마저 제대로 달성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Channel 2. 아이리스 노인과 주설씨가 일으키는 갈등의 정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입을 열면 열수록 강하게 치달아 몇 번이나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게 주식이라면 참 좋을텐데 말이에요. 입을 열 때 마다 상한가의 천장을 가뿐하게 터치를 해대니 말입니다. 참으로 불편한 상황이기 그지없었지만, 이른바 ‘주설주’를 구입한 우리 셋으로서는 이 지독한 상황을 피할수도, 말릴수도 없는 애매한 처지에 놓여있었지요. 주설씨가 마지막으로 내지른 “어디 말 한번 혀봐유. 넘은 쌔가 빠지게 고상혀서 들어온 물건을 덮어놓고 장물이라고 말한 이유를 말여유.” 이 말은 둘 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고, 이후에 노인이 주설씨의 말에 어떤 대답을 꺼내느냐에 따라서, 이어질 국면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느냐가 좌우된다는 것을 우리는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노인을 향해 쏟아졌어요. 노인은 대답대신, 탁자에 널부러진 그릇들을 차곡차곡 모아 한 곳에 몰아넣었습니다. 의외의 행동에 주설씨는 ‘거봐 어차피 근거없는 헛소리였다니까?’라는 투로 우리를 의기양양하게 돌아보았어요. 여기까지만 보면, 주설씨의 승리는 반을 넘어 거의 확실시 되는 듯 했었습니다. 하지만 노인의 행동은, 불리함을 모면하기 위해 공연히 딴청을 부린 것이 아니었어요. 그의 행동은....... 철저하게 “이거 한번 보지 그래?” 계산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까 탁자위에 그릇이 놓여있다고 말했었는데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탁자위에는 신문지가 덮여있었습니다. 아마 식사를 하면서 음식을 탁자위에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깔아두었다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그닥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었는데요, 노인의 행동은 바로 그 신문을 우리의 눈앞에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릇이 떠난 빈 자리를 작은 글씨가 빼곡이 적혀있는 신문기사가 대신했습니다. 노인은 손으로 신문지 한쪽을 쿡 찔러 우리에게 보여주었어요. 신문의 제목을 읽은 저와 로키군 그리고 주설씨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으로 난리가 난 곳에서 도자기를 들여와?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앉았어?”“어......” 기사의 제목은 ‘반란의 화마에 타오르는 라스알하게, 혼돈속의 남동부.’이었어요. 주설씨는 당황해서 예의고 뭐고 할 것 없이 신문을 집어 들어 기사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기사문을 읽어내려가는 눈이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그에 비례해서 그녀의 얼굴은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습니다. 비록 기사문을 함께 읽을 수는 없었지만...... 어떤 내용인지를 짐작하는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녹림당’이 생각해왔던 최상의 시나리오가, 종언을 맞게 된 셈이지요. “난 딱히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말이야...... 내 가게가 굳이 구설수에 휘말리는건 원하지 않아.”“어...... 혁명이 일어난 건 알겄는디...... 상품은 프로하기온에 보관하구 있어유. 물량이 달리는건 걱정하지 않으셔두......” 혁명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순간 그녀도 그리고 나머지 필그림들도 아차 싶었지만, 다행이 노인은 그걸 문제 삼지는 않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양을 짱박아 뒀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란이 장기화 되면 결국 그것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겠나? 향후 수급 계획은 어떻게 되지?”“그것은......” 주설씨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그녀가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물량을 확보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은밀하게 주우씨에게 연락만 하면 될 테니까요.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녀의 사업은......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입으로 프로하기온의 총독을 움직인 그녀였지만, 지금 그녀의 입은....... 그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된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일을 원만하게 잘 처리하던 모습만 봐왔던 우리였던지라...... 그녀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솔직히 말해 충격이었습니다. “손님 가신다. 살펴 드려라.”
갑과을작성일 2018-11-08추천 0
-
[짱공일기장] 두가지 인생 - 71
Channel 1. 로키 1624년 7월 10일 약 2주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삼민상단의 첫 분점이 문을 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곳이 사실상 본점이나 다름없긴 하지. 라스알하게의 본점은 공식적으로는 삼민혁명의 혁명군에 의해 몰수되었으니까. 뭐...... 비공식적으로는 유 무형의 도움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공식적으로는 그렇다는 거다. 형편은 이전에 비해 단촐 해 졌지만, 주설은 그런 것 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사뭇 우쭐대는 얼굴로 가게 앞에 걸려있는 특허장을 올려다보았으며, 가게에 진열되어있는 상품들을 애정이 뚝뚝묻어나는 얼굴로 쓰다듬었거든. 비록 경제에 관련해서는 크게 아는 바가 없지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이런 구멍가게에 애정을 쏟는지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겉보기엔 다 쓰러져가는 가게이지만, 이 가게는 그녀에게 있어 라스알하게를 넘어서 대륙으로 나가는 첫 걸음을 의미할 테니까...... “아이리스씨는......?”“답답....... 아니, 걔는 방앗간에 떡을 떼러 간다고 했다.”“으응...... 그렇구먼유? 암만 단출혀두 일단 영업장은 차렸으니, 떡 돌리는 건 당연지사쥬. 지가 그런건 깜빡혔네유.”“아무래도 우리 셋 중에서는 붙임성이 제일 좋은 녀석이니까, 그 정도는 눈치껏 한 거겠지. 우리도 일단 투자자니 너를 돕겠지만, 사업의 주인은 너니까...... 다음부터는 좀 더 꼼꼼하게 챙기길 바란다.”“잉 그렇게 할게유.” 주설이 웃는 낯으로 대답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내 자신의 변화에 대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전에는 남이야 어찌 되든 말든 상관없다는 주의였는데, 어쩌다보니 잔소리 비슷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지 않은가. 와 참...... IATP 연수 지명도 받지 못한 수습시절에는 선배랍시고 같잖은 잔소리를 집요하다 싶을정도로 해대던 녀석이 있었다. 그 모습을 정말로 고깝게 여겼던 나는 적어도 저런 새끼처럼 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 선배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줄이야...... 확실히 사람이 입장이 달라지면 변하게 마련인 모양인 것 같다. 첨언하자면, 그때의 그 선배는...... “다녀왔어요!” 그 되먹지 못하 인간에 대한 생각을 펼치려는 차에 답답이가 가게 앞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김을 왈칵왈칵 쏟아내는 떡 광주리가 들려있었다. 나는 녀석의 손에 들린 광주리를 얼른 받아들고 그것을 가판대 빈 곳에 올려두었다. 잠깐 잡았을 뿐인데도 손이 후끈후끈했다. “드디어 열었네요. 떡 돌려야죠?”“잉, 지가 고것은 미처 신경을 못썻는디, 아이리스씨가 일을 야물딱지게 잘 혀줘서 고마워유. 떡 띠어 오는디 돈 쪼깐 쓰셨을 터인디 영수증 청구하셔유.”“에이, 괜찮아요. 이게 뭐 어디 남 일인가? 우리 일도 되는거죠.” 답답이는 특유의 웃음을 지으면서, 내 손을 잡았다. 녀석은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고 소곤소곤 속삭였고, 후끈거리던 내 손은 찬물을 만난 것처럼 차갑게 식었다. “다음부턴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되요.”“무리는 무슨.” 내 말이 뭐가 우스은지는 모르겠지만, 답답이는 씩 웃으며 내 손을 한번 꽉 움켜쥔 뒤에, 손을 놓고 주설과 함께 가게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인테리어를 보며 적잖이 놀랐다. 하긴, 우리가 이 집을 처음 구매할 때만 해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허접스러움에 경악을 했던걸 생각하면, 뽕밭이 바다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만큼이나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제 가게도 열었으니, 다음 행선지로 가는건가요?”“잉...... 그랬으면 좋겄지만, 안직은 아녀유.”“예? 왜요?”“양지의 권력에게는 줄을 대서 이 가게를 열었으니, 인자는 음지의 권력을 휘어잡아야지 않겄슈?”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7월 10일 주설씨가 가게를 보는 동안, 저와 로키군은 페어 게이트 이곳 저곳을 돌면서 가정집을 방문했습니다. 운터브룩까지는 아니지만...... 이곳도 그에 못지 않게 전반적으로 궁기가 감돌았어요. 길이 형성되고 그것을 따라 취락이 형성되는 일반적인 도시와는 달리, 이곳에는 가옥들이 형성되고, 따개비가 바위를 가득 메우는 것처럼 다닥다닥 붙어가다가...... 더 이상 붙을 수 없다고 판단되는 곳에서 길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옥들과 길의 상태는 조악하기 이를데가 없었습니다. “계세요?”“뉘쇼?”“아, 저희는 삼민상단이라구, 요 앞에 새로 가게를 냈거든요. 그래서 인사드리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이를 안은 아낙은 경계심으로 잔뜩 움츠려든 자세로 저희를 맞이했습니다. 무엇이 불안했는지, 그녀는 연신 끽끽거리는 철문을 동앗줄 마냥 꽉 움켜쥐고 있었지요. 그런 태도에 로키군의 한쪽 눈썹이 꿈틀댔지만, 저는 아낙네가 로키군의 행동에 경계를 더 할 새라 재빠르게 그녀 앞에 광주리에 든 떡을 내밀었습니다. “그냥 빈손으로 인사드리면 실례잖아요.”“아이구 그냥 인사를 혀도 될 것을 뭘헌다구 이렇게 준비를 혔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철문을 꽉 움켜쥔 그녀의 손은 어느새 떡을 받아들 준비를 마쳤습니다. 저는 그녀가 놓치지 않도록,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떡을 행주에 싸서 아낙의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나중에 마실 한번 하러 오세요.”“아따 아가씨가 요로코롬 허는디 안가고 배기겄소. 내사 날잡고 한 번 방문 혀야제. 근디 뭔 장사를 허는거요?”“아, 저희는 식료품 가게를 하고 있어요. 그......” 떡 앞에서 허물어지는 그녀의 경계심에, 문이 조금 열려 마당의 모습이 살짝 드러났습니다. 저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마당 안을 살펴보았어요. 그 안에는...... 바깥 만큼이나 지저분해보였습니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쌓아둔 잡동사니들이 집안의 주인들을 구석에다 밀어둘 정도였지요. 문득 본다면 눈살이 찌푸려질 광경이겠지만, 그냥 눈살을 찌푸린다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겠지요. 물론 저는...... “공병이나 폐지도 받으니까, 들고 오세요.”“잉...... 알겄네. 준거는 감사히 잘 묵겄소. 광주리에 떡 쌓인거 보믄 갈질이 한참일 것인디. 욕 보시요.”“감사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니죠. 이렇게 아주머니의 마음을 사로잡고 난 뒤에, 우리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집을 나섰습니다. “밥값은 확실히 하는구먼.”“밥값만 하겠어요. 그 이상을 하는 거지. 세상에 어떤 주주가 이렇게 회사일에 발 벗고 나서겠어요.”“맞는 말이다. 그런데.”“네?”“주설 녀석은 알다가도 모를 녀석인거 같다. 우리한테서 그 집을 살 때만 해도 지독하게 멍청한 줄 알았는데.......”“속으로는 그런 계획까지 치밀하게 짜둔거 말이죠?”“그래. 어쩌면 녀석이 군소리 없이 이 집을 산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걸 계획한 것 같단 말이야.”“.......” 로키군의 말이 공감 되는 것이...... 저희가 떡을 안고 상점을 나서기 전에 주설씨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그녀는 양지의 권력에 ‘줄을 대서’ 가게를 열었다고 표현한 반면에, 음지에 권력에 대해서는 ‘틀어쥔다’라고 표현을 했지요. 그것만 보아도 그녀가 ‘그들’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가 있었어요. 그녀의 계획을 듣다보면, 과연 지금 우리 앞에서 큰 그림을 그리던 그녀가, 불과 두 달 전쯤에 역전광장에서 있었던 마피아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그녀가 맞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제 가정이 맞다면, 그녀는 실로 오래전부터 발톱을 숨겨오고 있었던 거겠죠. 라스알하게인들과 논쟁하지 말라는 격언이...... 이런 점에서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바보스러운 모습을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치밀하고, 계산적이거든요. Channel 1. 로키 1624년 7월 15일 가게는 오픈빨이라는 것이 있어, 처음 1달은 장사가 무척 잘된다고 한다. 이때 사장이 보이는 태도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3년 앞을 결정한다는 이야기가 있더군. 만약 사장이 초기의 성공에 안주하여 연구 개발을 등한시 한다면 전자의 결말에 처할 것이고, 초기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연구 개발에 착수한다면 후자의 경우로, 아니면 그 이상으로 뻗어갈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부레가 없기에 끊임없이 자맥질을 해야 하는 상어처럼, 성공을 위해서는 이끼가 낄 새도 없이 굴러야 한다는 것이 기업가 정신의 기본이라는 건데....... 주설은 노력이라는 것에 한정한다면 앞서의 명제에 제대로 부합하는 인물일 것이다. 다만...... 내가 이렇게 ‘노력에 한정한다면’이라는 단서조항을 단 것에는 이유가 있다. “다시 한 번 해보드라구. 그니께 양아치 새끼덜이 우덜 물건을 툭툭 쳐. 그라믄 어떻게 혀야뎌?”“일단은 경고를 해야지.”“근디 말을 안 들어먹어. 그라믄?”“직무 유기를 하는 귀를 얼굴에서 분리 시켜야지.”“뭔 소리여 시방!”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설은 빽하고 소리를 지르며 쥘부채로 내 어께를 쳤다. 나는 벌겋게 달아올라 열기를 뿜는 내 안쓰러운 어께를 어루만졌다. 못난 주인 때문에 잔뜩 얻어맞은 어께는 내 손가락이 닿기만 해도 찌르는 통증을 호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람이 왤케 폭력적이여? 써비스 몰러? 고런 놈덜도 언젠가는 우덜의 손님이 될지도 몰르는거 아녀?”“지금 니가 나한테 하는 행위도 폭력의 범주에 포함되는거 같은데.”“에헤이! 이거는 지도와 편달이지.” 녀석의 노력은 그 강도와 성실성 만큼은 인정하는 바이지만, 방향성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정받을 만한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북쪽으로 간다고 말하면서 남쪽으로 내달리는 것과 하등 다를바가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마피아를 포섭하는 거랑, 나를 이렇게 후드려 패는 것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나에 대한 폭력을 ‘지도와 편달’로 포장하는 건 또 무엇이고 “근본적으로 그놈들하고 양아치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나 한 거야?”“어.....음...... 그건.” 그녀는 내 질문에 의표가 찔렸는지 쥘부채를 펴 자신의 얼굴을 부쳤다. “감...... 아니겄어?”“.......너 진짜 죽고 싶은 거냐?” 주설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민망했는지, 더욱 과장되게 부채를 부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의뢰와 상관없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것 같다. 하아...... 진짜 내가 무슨 생각으로 녀석의 팔을 잘랐는지 모르겠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치도곤을 내주었을 텐데 말이다. “그럼 이렇게 하는게 어때요?” 더는 이 재미없는 촌극을 가만히 보고 넘길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답답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의 개입에 나의 불안감은 한층 더 깊어졌다. 이 녀석의 입에서 묘책을 가장한 무슨 뻘소리가 나올지가 걱정이었다. “무슨 방법이라두 있는겨?”“일단 주설씨가 마피아들에게 얼굴이 알려진 건 사실이잖아요? 이 가게를 들르는 누군가가 주설씨를 알아본다면...... 그건 높은 확률로 마피아에 소속된 사람일 가능성이 크겠죠.” 답답이의 제안에, 나는 귀가 번쩍 띄였다. 세상에, 저렇게 괜찮은 생각이 어떻게 답답이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설을 바라보았고, 주설의 얼굴에 어린 표정을 보건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거 괜히 억울해지는데? 답답이가 진작에 그 말을 했다면, 내가 굳이 주설에게 얻어맞아가면서 있을 필요가 없지 않았나?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7월 15일 걱정과는 달리 제 제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로키군은 볼이 퉁퉁 부은 채로 ‘진작에 말해줬으면 이렇게 두들겨 맞지는 않지 않았냐.’라며 툴툴댄 것만 빼면 말이죠. 그러면서도, 로키군은 자기 할 몫은 다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제가 낸 제안에 좀 더 디테일을 붙이더라구요. 예를 들자면...... “이거 답답헌디 굳이 써야 허는겨?”“이런 걸 해야 나중에 드러났을 때 임팩트가 사는 거야.”“아니 뭔 깜짝 파티도 아니고...... 나가 갸덜을 굳이 놀래켜야 할 이유는 뭐여?” 주설씨는 그렇게 궁시렁 대면서도 결국 우리가 건네준 부르카를 걸쳤습니다. 아무래도 온몸이 가려지다보니, 그녀의 팔도 또한 보이질 않게 되었습니다. 그녀로서는 일견 콤플렉스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이김에 가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해요. 로키군의 디테일이 더해진 우리의 작전은 이랬습니다. 이곳이 마피아의 수중에 있으니, 이곳에서 가게를 연다면 십중팔구 마피아나, 그들의 영향권 안에 있는 조무래기들이 우리 가게에 높은 확률로 시비를 걸겠지요. 잠깐.......만요. 로키군이 그들을 혼쭐내주면, 아마 원래 무리가 우리를 덮칠거다? 뭐 이렇게 생각한거에요? 저희 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주설씨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우리의 주적은 마피아이지, 그들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조무래기들까진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그들도 언젠가는 우리의 고객이 될거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 보충을 한 거에요. 주설씨의 이른바 ‘감’만으로는 이들이 마피아인지, 아니면 동네 양아치들인지 확신을 할 수 없으니, 안전장치를 하나 마련하자는 거지요. 그건 바로...... “어서오세요.”“어서 오시긴 지미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하더라니, 벌써 안전장치를 이렇게 써볼 기회가 마련이 되네요. 언 듯 보아도 하수인인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이 사내는 우리의 인사에 이빨 사이로 침을 찍 뱉는 걸로 답을 했습니다. 로키군은 물론이고 저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태도였지만, 주설씨는 흔들림이 없었어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브루카로 얼굴을 가린 터라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알 도리가 없긴 했지요. 그는 우리 이야기를 엿듣고 있기라도 했는지, 우리의 예상범위에서 찰싹 달라붙어 한치도 벗어남이 없는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모든 행동들이 ‘어서 내게 시비를 걸어봐라.’라고 사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지요. 주설씨는 우리가 혹여라도 실수를 할 새라 손을 들었고, 우리는 그녀의 신호에 따라 가만히 있었습니다. 청년은 우리를 도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주설씨의 제지 때문인지 쉽지 않았어요. 결국 사내는 가게를 몇 차례 빙빙 돌고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작전을 바꾸기로 했나봐요. 그는 로키군의 눈앞에 떡 버티고 섰습니다. “니가 여그 기도냐?”“기......뭐?”“기도도 모르냐? 본께로 이짝 업계에는 츰인갑네잉.” 예상치 못한 우리의 무지에 남자는 퍽 당황한 듯 하다가, 다시 자신의 페이스를 찾으려는지 로키군의 어께를 툭툭 건드렸습니다. 주설씨는 몰라도 제가 보기에는 이 남자가 보이는 생명경시의 태도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지요. 다만 로키군은 남자와 눈을 마주치는 대신에 주설씨를 흘긋 바라보았습니다. 그녀가 취하는 액션에 따라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 같은데, 그것이 오히려 남자에게는 ‘이 녀석 내 눈을 피하는데?’라는 또 다른 착각을 낳게 만든 모양입니다. 그는 기고만장해져서 로키군에게 어께동무를 하고는 ‘허우대는 멀쩡한거 봉께로 쓸만허겄구만, 인자부터 성이라고 혀라.’라는 낯뜨거운 소리까지 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못한 주설씨가 결국 브루카를 벗었습니다. “손님, 아무리 친근혀두 우리 사원헌티 너무 격없이 허시는거 같은디.......”“.......뭣이여?” 남자는 자신의 말을 잘라먹는 주설씨에게 화를 내려다가, 브루카 안에 감춰져 있던 주설씨의 얼굴을 보자마자, 두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어라......? 이거, 처음부터 우리가 원하던 걸 찾은 건가요? “이 씨벌련이 여그서 잠수타고 있었냐?” Channel 1. 로키 내 앞에 서 있던 이 남자는 세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는 주설을 보는 순간 별생각 없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비정한 마음’의 상태가 영 좋지 않을 때 우리 가게에 나타난 것이었다. 주설은 내게 눈짓을 했고, 나는 곧바로 지시를 실행에 옮겼다. 이 남자는 주설을 보며 주머니칼을 빼들었지만 여기서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녀석이 저지른 결정적인 실수란, 주설을 보는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자신의 얼굴에 무언가가 날아드는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비정한 마음’의 통제를 빗겨난 내 감정 실린 주먹이 녀석의 광대뼈에 묵직한 상흔을 남겼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녀석의 입에서 피가 섞인 침과 함께 하얀 물체가 후두둑 튀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와악!” 녀석은 무언가로 꽉 찬 입에서 나오는 투박한 비명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럭저럭 많은 수의 실전을 통해 경험적으로 깨우친 바가 있다면, 먼저 타격을 가한 쪽에서 자신이 선점한 유리한 고지를 계속해서 유지하려면, 타격을 입은 상대가 정신을 차릴 새를 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사내의 몸 위에 올라타 녀석의 멱살을 잡고 머리를 땅에 두어 차례 찧었다. 녀석의 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니가 초대장을 날라줄 비둘기냐?”“뭔...... 뭔 씹소리여.”“쯧...... 아직 길이 덜 들었구먼.” 기본적인 은유를 모르는 이 낭만 없는 남자에게 나는 뺨을 몇 차례 후려치는 것으로 은유법의 아름다움을 뼈에 사무치도록 새겨 주었다. 녀석의 뺨이 움푹 꺼지는 것으로 보아, 내가 아까 본 하얀 물체가 녀석의 치아였다는 심증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몇 차례의 따귀가 오가자 그는 코 뿐 만 아니라 입에서 피를 질질 흘렸다. “너는 뭐라고?”“나...... 나넌.”“응 말해봐.”“나넌......”“따라해. 나는 비둘기다.”“비둘기다.”“틀렸어.” 나는 녀석의 뺨을 다시 한 번 후려쳤다.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의 눈망울에는 ‘분명 따라하지 않았냐?’라는 억울함 섞인 원망의 감정이 보였지만, 틀린 건 틀린 거다. ‘비둘기다.’라는 말 앞에 ‘나는’이라는 어구를 빼먹지 않았는가. 정확한 문장요소가 결합되지 않으면, 그 뜻은 명료함을 잃고 다의성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선 내게 모욕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 “다시 따라해 봐. 나는 비둘기다.”“나.....나넌 비둘......기다.”“그래,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구먼. 나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말한 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그만하면 의미가 명료하게 전달이 되는군.”“시벌...... 뭐라고 허는거여.”“됐고, 우리 사장이 할 말이 있을 거야. 비둘기면 비둘기답게 편지를 잘 전달해라.” 이만하면 메신저로서 충분히 기능을 할 수 있을 만큼 교육이 됐다고 판단되어, 나는 주설에게 차례를 넘겼다. 남자는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일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는지 연신 씨근덕댔지만, 아까에 비하면 비교적 고분고분하게 주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주설은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마이크가 넘어온 것이 당황스러운 듯 했지만, 이내 헛기침을 하고 메신저에게 자신의 말을 전달했다. “너그 그...... 뭐냐. 패밀리 있지?”“......”“그 패밀리헌티 잘 전달혀. 우리가게는 자릿세고 뭐고 낼 생각 1도 없으니께, 괜히 사람 불러다가 행패부리는 수고같은 건 안하는 게 신간 편할 거라고 말여.”“......”“알겄냐?”“.......”“로키.”“응?”“쩌놈...... 귀가 먹었는 가 본디?”“그래?” 나는 주설의 메타포를 알아듣고 다시 한 번 손을 치켜들었다. Channel 2. 아이리스 로키군이 말했던 이른바 ‘비둘기 론’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효과가 있었습니다. 주설씨의 전언을 안고 갔던 사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많은 수의 동료들을 데리고 돌아왔거든요. 그는 자신이 당한 이른바 ‘부당한 처사’에 대해 엄청난 분노를 느꼈던 모양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야, 씨벌 다 엎어브러!” 분기탱천해서 우리 삼민 상단을 세간 살이 한 조각 남겨놓지 않겠다는 식으로 나설 리가 없을테니까요. 그의 지시에 모두가 와하고 들고일어나 우리 가게를 덮쳤고, 이내 우리가 들여놓은 물건들이 공중으로, 사방으로 날아다녔습니다. 저는 과하다 싶은 그들의 액션에 불안감이 들어 로키군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팔짱을 낀 채로 그들의 모습을 찬찬이 지켜보았습니다. 그가 그랬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어요. 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주설씨가 한 말이 있었거든요. “넘덜이 오믄 암만해두 울 가게를 뒤집어 웊고 지랄을 허겄지. 그려두 로키 니는 가만이 있어야 혀.”“왜 그래야하지? 녀석들이 너라는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지지 않았나?”“대신에 여그 행정체계가 핫바지가 아니란 것두 확실히...... 알게 됐자너? 글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가만이 앉아가지구 멍때리믄 우덜이 상당히 곤란시러워지지. 로키 니는 쟈들이 뒤집어 엎든 말든 그거는 신경 꺼버리구 두 가지를 확인해야 써.”“두 가지? 그게 뭔데?”“첫짼, 전번처럼 시방 와서 뒤집어엎는 넘덜 리더가 누군지 확인해야 한다는 거랑, 둘째는.......” 로키군은 물론이고, 로키군의 옆에 서 있는 저도 눈을 바쁘게 놀리며 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붉은 머리칼을 한 사내...... 그를 찾아야만 해요. “음마? 저게 누구여? 이야...... 반갑다? 이 시벌럼아.” 동료들이 가게를 뒤집어 엎는 것을 구경하던 사내가, 로키군을 발견하자마자 껄껄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맞아요. 바로 그입니다. 프로하기온 역 하차장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로키군에게 제압당했던 바로 그 사내였어요. 그때도 그랬지만, 그날 이후로 더욱 운동에 매진을 했는지, 그의 몸은 한층 더 우락부락해 보였지요. 그는 로키군을 향해 손을 까딱까딱했지만, 로키군과 저는 움직이지 않았어요. 저야 뭐...... 이 공포스러운 상황에 발이 굳어버린 탓이 컸지만, 로키군의 경우는 조금 달랐지요. 로키군은 사내를 보자, 찰흙 두상의 입가를 억지로 끌어올리는 것 같은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반겼습니다. “오래간만이군.”“이야, 이거 전번에 빚을 갚을라구 프로하기온 일대를 이 잡듯이 뒤졌드만 귀신같이 사라져가꼬 내사 입장이 제법 난처했는디 요로코롬 알아서 겨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어야?”“나를 찾았다고? 이 잡듯이? 유머감각과 기억력을 등가 교환한 모양인데, 찾긴 뭘 찾아. 그날 지갑 흘린 것도 모르고 줄행랑을 놓던 놈이.” 로키군의 응수에 그는 머리터럭만큼이나 얼굴이 새빨개졌습니다. 로키군의 신랄한 말이, 그것과 극렬한 대조를 이루는 무표정한 얼굴과 어우러져 그의 감정을 더욱 상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어쨌거나 로키군의 도발은 소기의 성과를 이루어, 그는 성난 코뿔소처럼 로키군에게 내달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주설씨가 계획한 대로에요. 이제 가장 큰 고비만 남은 셈입니다. 로키군의 입장에서는 마뜩잖겠지만, 주설씨가 그리려는 큰 그림을 완성하려면 로키군은 어쩔 수 없이...... 솜씨 없는 요리사가 태워먹은 검은 빵 같은 사내의 주먹이 로키군의 얼굴에 그대로 꽂혔습니다. Channel 1. 로키 주설의 지시는 내게 있어서는 정말로 가혹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저 근육량만 무식하게 키운 저 근육돼지가 자신의 체중을 싣은 주먹을 그대로 맞아야만 한다니 말이다. 일단 아픈 것은 둘째 치더라도, 저렇게 느려터진 주먹에게 뺨을 내준다는 건, 내 직업을 생각하면 모욕이나 다름이 없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이라면, 옛 동료들이 이 통한의 똥꼬쇼를 지켜볼 일이 없다는 거겠지. 만약 이 광경을 펜릴이 본다면...... 성난 코뿔소 드립을 갱신할 새로운 래퍼토리가 탄생했을지도 모르겠다. 주먹이 내게 날아 들어온다. 아니, 뭐...... 저속 재생하는 것 같은 저 느려터진 속도를 생각한다면 ‘날아온다.’는 수식어는 지나치게 과장된 측면이 있으니, 기어들어온다고 수정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예전에 마스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상대가 내게 적의를 품고, 내게 주먹을 휘두르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라고 말이다. 소위 ‘실전파’를 자칭하며 되먹지 않은 이론이나 주절거리는 망상가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그것을 지적하자 마스터는 멋쩍어 하면서 그 발언을 철회한 바가 있는 이른바 ‘흑역사’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흑역사가 진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나저나...... 이거 대체 언제쯤 내가 이 주먹에 맞게 되는걸까? “빠득!” 영겁과 같은 기다림이 끝나고, 드디어 녀석의 주먹이 내 광대뼈에 닿았다. 그래도 두부살 물렁뼈는 아니었는지 녀석의 주먹에 맞은 내 뺨에서는 뼈가 어긋나는 파열음이 났다. 뼈를 부술 정도라...... 저정도면 확실히 주설이 눈독을 들일만 한 것 같다. 머릿속의 수다쟁이가 녀석의 주먹에 대해 품평을 하는 동안, 내 몸은 서서히 떠올랐고, 광대뼈에서 시작된 통증은 한지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처럼 서서히 몸 구석구석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 이거 지독하게 아픈데. 답답이가 회복은 시켜줄 것만 믿고 알겠노라고 했지만,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크악!” 나는 녀석의 주먹을 얻어맞고, 그대로 뒤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다행이 마지막 순간에 얼굴을 튼 덕분에, 턱뼈까지 박살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말을 하는건 무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왼쪽 뺨이 욱씬거렸다. “인자는 니를 찾던 애타는 내 맘을 알아주겄냐?”“그래...... 꽤나 열렬한 사랑을 했구먼...... 근데...... 아오, 이거......어쩌냐?”“뭐가?”“난 남자는 별로 안 좋아 하는데.” 이제 한 대를 맞았으니, 명분이 섰다. 주설은 절대로 상대가 먼저 나를 가격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건드려선 안된다고 당부를 했거든. 아마 법률이 정한 ‘정당방위’를 기대한 모양인데, 이거 정당방위만 따지다가 사람이 먼저 죽을 판이다. 어쨌거나 명분은 명분대로 챙겼으니, 녀석을 두들겨 패도 된다는 이야기겠지? 나는 녀석이 내게 달려들기 전에 재빠르게 그를 향해 내달렸다. 예상치 못한 내 행동에 사내는 그 육중한 몸을 놀려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딴 느려터진 주먹에 맞을 리도 없고, 더 맞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곧게 뻗은 녀석의 팔을 짚고 더욱 높이 도약했다. 녀석의 정수리가 내 발밑에 보였다. 나는 녀석의 관자놀이를 무릎으로 찍었다. 무릎이 찡해지는 것이, 유효한 타격이 들어갔다는 확신을 주었다. 아닌게 아니라 녀석의 고개도 오른쪽으로 홱 꺾였다. 하지만 “나가 말혔지? 니를 존나게 찾았다니께?”“이런 시발.” 녀석은 쓰러지는 와중에 내 발을 잡고 그대로 나를 날려버렸다. 부서진 광대뼈 때문에 눈이 흔들려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착지는 그럭저럭 해냈지만, 거리감이 부족해서 그만 발을 삐어버리고 말았다. 이거 오늘 스타일을 이만저만 구기는게 아니구먼. 애초에 저 거지같은 선빵을 맞는게 아니었다. 주설 이 새끼...... 그래서 나한테 이길 생각은 말고 물고 늘어지기만 하라고 한 건가? ‘비정한 마음’이 좀 더 멀쩡했다면, 돈될일 없는 자존심 따위는 얼른 포기하고 합리적인 공략법을 찾았을 테지만....... 오늘은 이쪽도 영판 컨디션이 별로인지라, 결국 나도 자존심의 유혹에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오늘 병풍 뒤에서 흠향 하는겨?”“누구? 너?”“아니, 니여.” 나는 녀석과 지독하게 치고받고 싸웠다. 아무리 기동성을 빼앗겼다고 했지만, 이제껏 의뢰를 해오던 것과는 정 반대로 임했던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녀석이 때리는 대로 맞았고, 녀석은 녀석대로 내가 후려치는 대로 맞았다. 처음엔 광대뼈가 지독하게 아파왔지만, 몇차례 치고박다보니 이젠 광대뼈가 아팠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하...... 저 근육돼지 새끼. “맷집이 보통이 아닌데?”“나가 여까지 꽁으로 올라왔겄냐? 남부럽지 않게 때려 불라면 남부럽지 않게 쳐 맞아보기도 혀야제.” 결국 녀석에게서 마운트를 빼앗겼고, 녀석은 내게 아낌없이 파운딩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녀석으로서도 공격의 방향성이 한정되어 있었고, 나도 바텀인 상황에서는 굳이 발에 대한 의존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누운 채로 위빙을 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녀석의 공격을 흘려낼 수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였기 때문에, 결국 나는 온몸이 욱신거릴 정도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음마? 성! 짭새 떳는갑소. 인자 정리혀고 갑시다.”“어 그려. 이거...... 아쉽게 됐네잉. 남은 건 할부처리 되냐?” 녀석은 부하의 말에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그건 녀석의 오산이었다. 주설이 그리는 큰 그림을 완성하려면, 나는 이 녀석을 “......미안하지만 고객님, 저희는 현금만 받습니다.” 붙잡아야 한다. 녀석은 내 팔을 뜯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내 악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경찰들이 들이닥쳐 우리들을 체포했고, 녀석은...... 우리를 향해 욕지꺼리를 쏟아내며 경찰에게 끌려갔다. Channel 2. 아이리스 로키군의 희생덕분에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리 가게에 침입해온 마피아들은 이곳의 수비대원들에게 붙들렸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조리 구치소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로키군의 희생이 가치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현행범은 영장을 청구하지 아니한다.’라는 만민법이 이곳 사막의 도시에도 그 효력을 발휘한 덕분이겠지요. 로키군의 얼굴이 이토록 크게 부어오른 것은 처음이었던 지라, ‘과연 효험이 있을까?’ 하는 다소 불경스러운 의문이 들긴 했지만, 다행이도 기도는 곤죽이 된 얼굴도 완전히 복구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문을 읊으며, 아버님의 권능을 행사할 때 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의료법은 지독한 악법인 것 같아요. 로키군의 상처를 수습한 뒤에, 우리는 먼저 구치소로 간 주설씨의 뒤를 따랐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로키군과 몇 달을 지내보니 이전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경시청 건물이, 지금에 와서는 들어가는데 정말 고역스러웠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위조된 신분증이 있으니 별다른 저항이 없지만 아무래도...... 심리적으로는 저항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내가 과연 이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가도 되는 것인가 하는 죄책감과 같은 감정을 안고 문턱을 넘어야만 했습니다. 수비대원의 안내를 받아가며 우리는 취조실로 들어갔습니다. 취조 1실이라는 허름한 명패가 걸린 문에서는 거친 고함소리가 우리의 고막에게 인사를 건넸어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아가며 문너머로 들어가니, 그곳에는 붉은 머리칼의 사내가 결박된 채 의자에 고정되어있었습니다. “하! 씨벌럼년들이 다 모였구만!”“이렇게 보니 나름......반가운데?”“반갑기는 니미 뽕이다 이 새끼야. 그나저나 아주 대단들 하셔? 이런 식으로 우덜헌티 빅엿을 멕일줄은 생각도 못했어야.”“너그들 겉은 양아치 새끼덜 상대할라믄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야지. 거 듣자하니 합의라는 좋은 것이 있다는디...... 해줄까?” 반쯤 약을 올리는 주설씨의 물음에 붉은 머리의 사내는 가운뎃손가락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주설씨도 곤조가 있는 여자라 그런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켜 올라간 그의 가운뎃손가락에 자신의 명함을 끼워 넣고, ‘생각 있으면 연락하세요.’라는 말을 끝으로 우리를 데리고 취조실을 나섰습니다. 문지방 너머로 종이를 박박 찢는 소리와 함께 모공이 송연해지는 고함소리가 거칠게 넘어왔습니다. “잃어버릴 것 없는 놈이라 꽤나 완강한데?”“글씨, 내 생각은 달러...... 엄마 뱃속에서 나온 이상, 잃을 거 없는 넘은 없는거여.” 주설씨는 곧바로 사건을 맡은 담당자를 찾아갔고, 그와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담당자는 그녀에게 시종일관 공손한 태도를 보였고, 그녀는 격조에 맞게 그를 대했다는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주설씨의 요청에 담당관은 자신의 부하직원을 불렀고, 서류더미 속에서 부하직원이 헐레벌떡 달려와 상관에게 쪽지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담당자의 손에서 그녀의 손으로 넘어왔지요. “이건 뭐에요?”“갸가 잃어버릴 지도 모르는 거쥬.”“가족을 건드리겠다는 건가?”“녹림당이 왜 청산에 마을을 맹글었는지 알어? 수년간의 투쟁을 하믄서...... 수많은 변절자가 있었지. 우덜헌티는 권력이나 부에 대한 약속 겉은 걸로는 씨알도 안 멕혔지만...... 가족의 모가지에 칼을 들이대믄 결국은 넘어오게 되더라 이거여.”“효율적인 방법이긴 해. 기약할 수 없는 약속이나 재정적인 손실을 감내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거니까.”“암만.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거 같은 넘덜도, 처자식, 부모성제 앞에서는...... 피가 철철 나게 마련이여.” 쪽지가 가리키는 곳은 ‘라거 하우스’였습니다. 이곳에 대해서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요, 프로하기온에 처음 정착했을 때 로키군이 이곳의 지리를 알아야 한다며 지도를 제게 건네주고 숙달을 시켰었어요. 그때 ‘라거 하우스’라는 명칭을 보고 저는 적잖이 흥분을 했습니다. 라거라면 맥주를 의미하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그곳에 가면 맥주가게가 거리마다 즐비하고,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사막의 더위를 맥주로 날려버리는 장면을 상상했거든요. 저는 로키군에게 라거 하우스에 데려다 달라고 고집을 부렸고, 로키군은 ‘대체 무슨 이유로 저기를 데려다 달라고 하는 거지?’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결국 며칠을 떼를 쓴 끝에 저는 목적을 이룰 수 있었어요. 사막의 더위에 지쳐있던 저는 목을 때리는 맥주의 타격감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큰 꿈은 라거 하우스의 실체를 보자마자 보기 좋게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뭐랄까요? 그곳에는...... 먼지를 뒤집어 쓴 창고 건물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깨달았죠. 우리가 맥주를 지칭하는 ‘라거’라는 단어는 창고에서 유래되었다는 걸 말이에요.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 할 에피소드였지만, 그때의 실망감은......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그 민망함은...... 두 번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계세요?”“뉘셔?” 개업 떡을 돌리는 마음으로 집주인을 부르자, 허름한 창고에서 젊은 여자가 나왔습니다. 그녀는 기름때로 반질반질해진 작업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프로하기온의 여성들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의 머리에 부르카도 걸치지 않고 있었어요. “여기가......그...... 리겔씨의 집인가요?”“맞기는 헌디...... 뉘시유?”“저희는.......”“리겔의 친구입니다.” ‘친구’라는 단어를 언급하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반갑게 맞이하는 게 보통이죠. 그래서 웬만하면 초면사이에는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을 찾게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이번만큼은 저희의 일반적인 상식이 어긋나 버린 모양입니다. 그 마법의 단어를 듣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우거지가 울고 갈 정도로 팍 구겨졌습니다. “뭐요? 그 망나니새끼가 오늘도 거하게 사고라도 쳤소?”“어......그게.”“민티카 이년아! 손님헌티 그게 뭔 말버릇이여! 아이고 우리 아 친구라고 허던디 못난 아덜이라 죄송허요.” 젊은 여자의 뒤를 따라오던 노파는, 앞서오던 여자의 말투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잔뜩 얽은 손으로 그녀의 등을 찰싹 때리고는 우리에게 허리를 굽혀가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 앙상한 몸으로 어찌나 허리를 굽히시던지, 허리가 꺾이는게 아닐까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어요. 노파의 사과에 저와 주설씨는 물론이고 로키군까지 허리를 굽혀 맞절을 했습니다.끝이 보이지 않는 맞절이 간신히 끝을 내고, 노파는 우리에게 ‘우리 아들이 혹시 사고를 쳤습니까?’라고 이야기를 꺼냈어요. 이거 참...... 어머니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하나 난감한 생각이 들던 차에, 주설씨가 별안간 폭탄발언을 꺼냈습니다. “어휴, 아녀유...... 갸가 인자는 맘 잡구 살기로 혔어유. 오늘 여그 온 것두, 갸가 취직했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건디유 뭘.”“잉? 뭐시여? 취직?”“잉. 그려유. 멀쩡히 세금 내는 데여유.”
갑과을작성일 2018-07-20추천 0
-
-
[짱공일기장] 두가지 인생 - 65
Channel 1. 로키 1624년 5월 30일 라스알하르게타 진공작전은 성공했다. 주우와 녹림당은 라스알하르게타에 입성했고, 총독은 도주를 시도하다가 시민들에게 붙잡혔다. 공식적으로는 효수라고 하여, 머리가 잘리는 형을 받았다고 발표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총독을 붙잡은 시민들에게 온몸이 찢겨져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다녀왔다.”“다녀오셨어요?” 답답이가 피곤에 절은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녀석은 침대에 누워있는 주설의 머리맡에 앉아, 그녀를 간호하고 있었다. “상태는 어떤거 같아?”“여전해요......” 답답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기사, 녀석으로서도 상당한 스트레스일 것이다. 환자를 돌보는 것도 보통일은 아니겠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밖에 함부로 나가질 못하고 마냥 갇혀있는 상황이 녀석에게는 정말 고통스러운 노릇일 것이다. 녹림당이 점령한 라스알하르게타는, 그간 억눌려온 라스알게티인들과 그 부역자들에 대한 분노가 활화산처럼 터져나오고 있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이들은 라스알하르게타 시민들에게 붙들려 린치를 당했고, 그들의 집은 불탔다. 재산이 약탈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라스알게티인인 답답이가 거리를 걷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그건 그간 라스알게티인들의 부역자 노릇을 해왔던 주설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인지라, 이들은 이 헛간에 며칠째 갇혀있는 신세였다. 나야..... 뭐, 태생적으로는 프로하기온인이니, 넘실거리는 분노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셈인지라, 두 녀석들에 비해서 비교적 자유롭게 내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이 정도면 되겠지?”“음......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면 한 사흘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요?”“사흘이라......” 암시장에서 물건을 조달해왔다. 답답이는 내가 턱없이 적은 양의 물건을 가지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려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거라도 먹을 수 있는게 어디냐라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상황이니까...... 답답이는 내가 사온 물건 중 전투식량에 손을 뻗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라스알게티 군은 참으로 신기한 걸 많이도 만들어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닐 팩에 쌀이 담겨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여기 위쪽에 있는 끈을 당기면...... 순식간에 고열이 발생하면서 끓어오르거든. 그렇게 약 1분을 기다리면 사람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조리가 되거든. 녀석은 그렇게 만든 밥을 삼등분 하였고, 막자사발에 그걸 담아 물을 탔다. “먹어요. 주설씨...... 로키군이 사왔어요.”“.......”“팔을 잃은 건 참 안된 일이지만...... 그렇다고 주설씨의 인생이 끝난 건 아니잖아요. 이걸 먹고 조금이라도 힘을 내야......”“안 먹어유.”“......”“생색내고 싶진 않지만, 이걸 사오느라 내가 한 고생과 비용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을 해보는 게 어때?”“누가 그걸 해달라고 혔슈?”“그렇진 않았지만...... 너는 내게 살려달라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었지.” 답답이는 내 말에 말없이 힐난의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아마 녀석이 내 옆구리를 종주먹으로 때린다고 해도 그만 둘 생각이 없었다. 답답이의 말 대로다. 팔을 한쪽을 잃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을 어느 정도 느끼지만, 언제까지나 비극의 여주인공 행세를 하는 꼴을 지켜봐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죽을 지경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니, 최대한 살아남는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비가 내리는 날 멋모르고 지상으로 기어 나온 지렁이도, 해가 뜨면 어떻게든 자신이 나왔던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친다. 주설은 한쪽 팔을 잃었지만...... 지렁이 보다는 상황이 더 나은 편이 아닌가. 이대로 비탄에 젖어서 자포자기를 한다는 것은...... 모처럼만에 얻은 생에 침을 뱉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땐 내가 미쳤는 갑쥬.”“아닐걸? 내가 그걸 증명해 볼까?”“그만둬요 로키군.”“인간이 왜 비극을 보는지 아나? 그 과정과 결과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낼지 몰라도, 그것이 언젠가는 끝이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삶은 그렇지가 않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든지, ‘오래도록 불행하게 살았습니다.’는 다 개소리야. 슬픔에 젖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감정이라는 일시적인 진폭이 생의 전반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나? 만약 그렇게 계속해서 비탄에 젖어있는 사람을 본다면 난 이런 말을 해 줄 거다. 당장 그딴 발 연기 따윈 집어 치우라고.” 주설은 내 말에 고개를 돌려버렸고, 그 행동이 나를 폭발시켰다. 나는 한쪽 손으로는 답답이의 손에 들려있던 사발을 낚아챘고, 다른 쪽 손으로는 주설의 턱주가리를 움켜잡았다. 녀석은 내 손아귀에서 풀려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나는 결코 한쪽 팔이 없는 사람에게 휘둘릴 정도로 허접한 편은 아니었다. 나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고, 녀석은 고통에 뻐끔뻐끔 입을 달싹였다. 나는 녀석이 입을 벌린 틈에 사발에 담긴 밥을 녀석의 입에 흘려 넣었다. “우웁! 읍! 우으읍!”“나한테 침을 뱉고 욕을 해도 좋다. 하지만 그건 니가 일단 여기 있는 쌀알 한 톨도 남김없이 다 삼키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그만해요!” 답답이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가슴을 탕탕 쳤지만, 나는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련 속 여주인공의 푸념 따윈 더는 들어줄 여유가 없어. 우린 여기에서 탈출을 해야 해.”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5월 30일 로키군의 강제급식에 주설씨는 발버둥을 치며 반항을 했지만, 로키군은 그것을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었고, 결국 그녀는 로키군의 힘에 밀려 그가 먹이는 미음을 꿀떡꿀떡 삼켜야만 했습니다. 저는...... 그 지옥도와 같은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지요. “파하아!”“그래, 결국 그렇게 먹을거. 다음부터는 줄 때 곱게 먹었으면 좋겠다.” 로키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그녀는 조각상 마냥 굳어버려 그 자리에 오도카니 앉아있었습니다. 그녀는 숨을 쉬는지 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미동도 없었지만...... 눈에는...... 빨갛게 열기가 들뜨기 시작했지요. 그녀의 눈에서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저는 그녀를 끌어안고 사과를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있었어요. 나무 등걸을 끌어안는 것 같은 차갑고도 어색한 기분이었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디질 못할 것 같았습니다. 한때나마 불타오르던 창고를 보며 ‘아름답게 타오르네.’라고 생각했던 제 자신이 너무나 미웠거든요. 지독한 부채감이 저를 짓누를 때 마다, 저는 그만큼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안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발버둥을 쳐대도 제 마음은 단 1g도 가벼워지질 않더군요. “이따위 신파극은 그만하자고. 세상이 뒤집혔고, 그것에 휘둘리다보니 뭐가 뭔지 혼란스럽겠지만, 우리가 거기에서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젠 후자를 위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고.”“주설을 찾아라! 그녀를 죽여라!” 로키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헛간 밖에는 성난 군중들의 구호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로키군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지고, 저는 재빠르게 주설씨의 입을 틀어막았어요. 요 며칠간 그녀를 찾는 시민들의 외침에 그녀는 거의 신경쇠약 직전까지 몰렸거든요. 로키군도 눈치있게 그녀의 귀를 막았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우거든요. 마치 ‘나는 여기 있으니, 어서 날 찾아서 죽여 버려라!’라고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저는 눈을 질끈 감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녀가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꽉 틀어막았어요. 그녀는 발버둥을 치며 제 손바닥을 깨물었습니다. 주인을 잘못 만난 죄로, 제 손바닥은 그녀와 저의 촌극에 휘말려 출혈과 지혈을 하루에 몇 번이고 반복을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지요. “......죽여라!”“......하아. 정말 못할 짓이네요 이것도.”“그래, 이곳을 탈출하기만 하면, 그녀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될 거다.”“일단 그렇게 하려면...... 주설씨가 몸이 하루빨리 회복이 되야 할 텐데 말이죠.” 로키군은 우리에게 자신이 알아본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녹림당은 성에 입성한 뒤에, 8군단 휘하의 사단에게 파발을 보냈다고 해요. ‘군단 훈련이 라스알하르게타에 있으니, 혹여나 오해하지 말 것.’이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죠. 아마 그 작전이 먹힌다면, 8군단의 사단들은 일전의 공성전을 훈련 상황으로 인식하게 되겠지요. 물론...... 그건 임시 방편일 뿐, 언제까지나 지속될 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리고, 휘하 사단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라스알하르게타 자체는 평소의 모습으로 빠르게 복귀시켰다고 해요. 프로하기온까지의 열차편도 중단시키지 않았고, 라스알하게의 물자들은 여전히 대륙 종단선을 타고 왕도로 흘러들어가게 끔 말이에요. 그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시간을 최대한 벌겠다는 작전이지만, 그건 주설씨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물건의 오고감이 통제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거니까요. 로키군의 생각은, 그녀가 건강을 회복하고 나면, 암시장에서 만든 위조 신분증을 가지고 이 도시에서 탈출을 하자는 거였어요. 그러한 생각은 우리 뿐 만 아니라, 라스알하게에 상주했던 라스알게티인들, 그리고 그들의 부역자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탈출 경로인 모양이었습니다. “꿀통에 꿀이 떨어지기 전에 최대한 빨아놓는게 맞다고 본다.”“틀린 말은 아닌거 같네요.”“그러니까 주설 너도 얼른......”“탕탕탕!”“......?”“탕탕!”“......뭐...... 뭐죠?”“쉿.” 로키군은 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걸어가서 문틈으로 건너편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주설씨의 입을 막고 최대한 소리를 죽였어요. 문틈을 건너보는 그의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가...... 순식간에 커졌습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있었지만, 저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건 바로...... “좆됐다. 녹림당이야.”“예?”“누군가가 불어버린 모양이야. 야, 일단 저길 열자고!” 로키군은 사뿐하게 우리쪽으로 뛰어들더니, 침대 밑 장판을 열어젖혔습니다. 거기엔 바깥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의 문이 있었거든요. “일이 복잡해졌지만, 지금 바로 탈출을 하자.”“으...... 괜찮겠지요?”“그건 나도 뭐라 말을 못하겠군.” 로키군이 비밀 통로를 여는 동안, 저는 주설씨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녀의 입을 어찌어찌 막는데는 성공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귀를 막지는 못했어요.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소음은 여과없이 그녀의 귀를 타고 흘러들어왔고, 그녀의 치아는 더욱 더 교묘하고 끈질기게 제 손바닥을 물어뜯었어요. 저는 포기하면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기도문을 읊었습니다만....... “아악! 그만 좀 물어요!”“으아아아아아아아아!!”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에서 손을 떼는 순간, 그녀는 그 가냘픈 몸에서 나오리라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휴...... 기차를 몇 번 타보고 나서 그 의미를 절절이 깨닫게 된 메타포 하나가 있는데요. 바로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다.’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녀의 입에서는 기차화통을 찜쪄먹을 정도로 큰 소리가 우렁차게 쏟아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 있어선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죠. “우지직!..... 쾅!” 마른나무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뜯겨져 나가면서 녹림당 당원들이 우리의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칼과 창을 우리에게 들이대며, 더는 반항하지 마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상황이 참으로..... 난감하게 됐습니다만 뭐...... 어쩌겠어요. 얌전히 손을 들고 항복하는 수밖에. Channel 1. 로키 주설은...... 비록 라스알하게 인들에게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 질 수는 없는 존재이겠으나 “여기유?”“잉, 그란거 같네.” 인물은 인물인 모양이다. 그녀 하나를 잡겠다고 이 세평 남짓한 방이 터져나갈 정도로 수많은 병사들이 들이닥친걸 보니 말이다. 그들은 라스알게티 정규군의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약장과 부대표지가 제멋대로였다. 약장은 병장급인데 부대표지는 대대장의 것이었다. 저런 엉터리 짜깁기로 의관을 갖추고 있으니...... 그들의 정체가 확실히 짐작이 갔다. “야 이거..... 못보던 새에 신수가 훤해졌어?”“누구.....?”“시상에...... 안직도 나가 누군지 몰겄어? 나여. 녹림당 행동대장 임꺽정이.” 나를 포박한 이는 다름 아닌 임꺽정이었다. 세상에 옷이 날개고, 지위가 사람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진작부터 들어왔지만, 이토록 한 인물이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더벅머리에 얼굴윤곽이 드러나지 않던 더러운 털복숭이가, 수염을 깎고나니 동인인물이라고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싹 바뀌었다. 수염 때문에 얼굴이 가려져 있어서 알아보지 못했었는데, 그의 얼굴은 개미가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로 갸름한 편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3일 동안 못 보다가 다시 만났을 때는, 눈을 비빌 정도로 성장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 정도면 반칙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는 내 반응이 꽤나 만족스러웠는지 털복숭이 시절에 종종 봐왔던 껄껄거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꽁꽁 묶었다. 삼손은 머리터럭을 자르면 힘을 못쓴다는데, 그건 이 위인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는지, 수염을 깎아도 힘은 그대로였다. 나는 결박이 당한 채 내 주변을 살폈다. 답답이도..... 그리고 주설도 다른 이들에 의해 포박되어 꼼짝없이 붙들렸다. 하아..... 결국 주설 녀석이 비련의 여주인공 행세를 하는 데 장단을 맞춰주느라 도망칠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쌔빠지게 고생이란 고생은 다 허고 이게 뭐여...... 막판에 줄을 잘못서서 이게 뭔 꼴이냐고.”“......” 그는 빈정거림과 동정심이 섞인 투로 내게 말했지만, 나는 그것에 반박은커녕 수긍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답답이 녀석의 고집에 이리저리 휘둘린 내 잘못이다. 진작 이리될 줄 알았으면 피할 수 있을 때 피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질 않았다...... 그건 모두의 안전을 책임진 내가 내 책무를 져버린 것이다. 결국 모든 건 나의 잘못이었다. “주우님 오셔유.” 전령으로 보이는 이가 방에 들이닥치면서 주우의 등장을 알렸고, 임꺽정은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방에 주우가 들어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들어오자마자 방의 공기가 달라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 방에는 악의가 어린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그가 들어오자마자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순식간에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로 승화되었다. 모두들 미동도 하지 않고있다가, 그가 오자마자 임꺽정이 대표로 거수경례를 올렸다. 세상에......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가놈’이라고 빈정거리던 이가 이젠 주우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기세로 손을 들어 올리다니...... 그 짧은 기간 동안 세상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내가 정신줄을 놓은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오셨슈?”“잉...... 야덜은 다 확보 혔슈?”“여따 널어놨구먼유.” 주우는 사뭇 꼿꼿한 태도로 우리를 살펴보았다. 주설은 말할 것도 없고, 답답이도 잔뜩 몸을 웅크렸다. 나로서는..... 그닥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저절로 눈이 땅으로 떨어졌다. “익숙헌 얼굴들이 많이 보이는구먼......” 그는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고, 답답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에...... 주설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주설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동상아...... 참말로 고생혔다.” Channel 2. 아이리스 저는...... 주우씨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동상’이라는 말이...... 제가 생각하는 그 뜻이 맞는 건가요? 동생이 아니라, ‘낮은 온도에 장기간 노출됨에 따라 나타나는 신체적인 손상’을 의미하는 거겠죠? 그렇죠? 저는 제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로키군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얼굴에 어린 표정도...... 제가 느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보였습니다. 저나 로키군이나 그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의 의미에 대해 큰 혼란을 느끼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뭐......뭐?”“오빠아......” 주설씨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있었습니다. 잠깐만요, 이게 지금 무슨 일이냐고요. 반 라스알게티를 기치로 건 녹림당의 리더인 주우씨가, 어떻게 친 라스알게티의 대표격인 주설씨와.......주우씨는 우리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대신, 다급하게 품에서 칼을 꺼내 주설씨의 몸에 감겨있던 결박을 뜯어냈고, 끈이 풀어지자마자 그녀를 끌어안고 꺼이꺼이 오열을 했습니다. 주설씨도 주우씨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지요. “고상혔다...... 고상혔어.” 저와 로키군은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만...... 주변의 녹림당원들의 눈가에 축축한 물기가 맺힌걸 보면, 저희 둘만 모르는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이쯤되면, 우리는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지구 한 바퀴를 돌아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두 사람은...... 사실 남매였던 거였습니다. 극과 극은 서로 상통한다는데...... 바로 그 오래된 명제를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거에요. “쩌그 두 분도 얼렁 풀어 드려유.”“잉......” 임꺽정씨는 우리 둘을 풀어주고는 ‘아까츰에 놀래킬라고 장난으로 헌 것인디...... 먄혀유.’ 라고 주억거렸습니다. 저희 둘은 얼얼한 팔을 문지르며, 감동적이면서도 조금은 기묘한 감을 숨길 수 없는...... 두 사람의 해후를 지켜보았습니다. “많이 놀랐쥬?” 한참 만에 감정을 가라앉힌 주우씨는 조금은 계면쩍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사정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의 긴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녹림당과 삼민상단은 몸통이 같고 머리가 다른..... 쌍두사와 같은 관계였어요. 그의 아버지였던 주운은 라스알하게의 독립을 위해 2가지 전략을 병행하는 투 트랙 전략을 채택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무장 저항단체인 녹림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금줄을 대기위한 삼민상단이었어요. 삼민상단의 경우, 돈을 벌기위해서는 총독부에 선을 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친라스알게티 노선을 전면에 세웠어야 했던 거에요. “그럼...... 저번에 우리가 전해준 브로치가......”“잉..... 대놓구 전달하믄 의심사니께...... 그런 식으로다가 연통을 삼았었쥬.” 주우씨는 주설씨의 어께를 토닥거려주었습니다. 주설씨는 조금 민망한 듯 고개를 수그렸지요. 단 하루도 다 보지 못한 인연이었지만, 제가 본 주설씨는 그렇게 계면쩍어하는 거랑은 거리가 멀었는데, 조금은 새로운 모습을 본 것 같습니다. “지는...... 동상헌티 많은 빚을 졌어유. 울 아부지가 계획을 세우믄서 누가 삼민상단을 맡을지 야그를 혔슈. 그띠 지도 존나게 고민혔쥬. 고거를 맡는 순간 역사의 죄인이 되는 거니께...... 그때 우리 설이가 나선거/유. 지가 허겄다구...... 그 때 지는...... 차마 ‘안뎌.’라는 말이 안 나왔어라....... 존나게 비겁헌거쥬. 동상을 팔아가지구 삼민의 영웅이 된 셈이니께유.” 그 말을 하는 주우씨의 눈빛은...... 회한과 자괴감으로 잔뜩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자조가 섞인 것으로 보일 뿐,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깔끔하게 잘려나간 것 같았어요. 로키군은 그의 말을 듣다가....... 한마디를 했습니다. “그래, 생각해보면 진작에 눈치를 챌 수 도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구름의 자식이...... 비만 있는건 아니잖아?” Channel 1. 로키 주우는 나와 답답이 그리고 주설을 자신의 아비인 주운에게 데리고 갔다. 그는 여전히 혼곤한 잠에 빠져있었다. “그러믄 인자...... 약속대루 계산을..... 혀야 헐틴디...... 아부지가 여전히 깨날 생각을 안하시니 문제여유.”“유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나?”“글씨.... 저희 아부지는 저희에게 혁명에 대한 야그는 혀두...... 그거에 대한 거는 전혀 야그를 안허셨어유.”“애초에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던 거였군.”“그건...... 먄하게 됐슈...... 일단 우덜은 혁명이 우선이었어서...... 댁헌티 솔직허게 다 야그허믄..... 협조를 않을거라구 생각혔쥬.” 주우는 우리에게 자신의 상황과 심정을 솔직히 이야기를 했다. 그래...... 뭐 그 정도면 충분히 자신이 할 해명은 다한 셈이다. 책망을 하고 싶어도 이미 지난 일이고, 결과적으로 잘 된 것이니 왈가왈부를 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문제가 있다면 지금 저렇게 산송장처럼 누워있는 저 못난 아비에게 있는 것이겠지. “그나저나...... 참으로 매정한 아버지로군. 딸이 병/신이 되던 말 던 자기는 잠이나 자야겠다 이건가.”“아니 고거는......”“미안하지만 주우씨. 물론 아버지가 생판 남에게 욕을 먹는 게 불편해보일지는 몰라도...... 로키군이 남을 위해 화를 낸건 이번이 처음이라...... 표현이 다소 서투를 수도 있어요. 이해를 해줬으면 좋겠어요.”“끙...... 알았어유. 나두 하샤신에 대한 야그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으니께...... 그 가심팍에.......” 주우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고, 나와 답답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일단...... 나는 이 노인장에게 볼일이 있으니, 그가 깨날 때 까지는 이 방을 지키고 있어야 할 것 같다.”“아니 뭐 저희 아부지가 일부러 주무시는 것두 아니구......”“우리가 너희에게 바라는 거는 다 들어준 것 같은데? 나도 이 사람에게 받을 물건이 있으니, 그걸 받기전까지는 네놈이 걱정하는 것처럼 위해를 가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내가 이 방을 지키고 있을테니. 일단 둘만 있게 해줬으면 좋겠군.” 주우는 내 말에 반박을 하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는지 알겠다고 한 뒤에, 자신의 아비에게 인사를 하고 답답이와 주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이 방에는 나와......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노인 둘 만이 남았다. “당신의 자식들이 다 나갔고, 이젠 우리 둘 뿐이군...... 어쨌거나, 나는 당신이 욕먹어도 싸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당신은 자식들에게 과제만 남겨주고 자신은 나몰라라 했지. 그 과제로 인해 당신의 딸이 병/신이 되던 말던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어. 나는 인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건 알아.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허둥지둥할지라도 뭐든 하려고 드는 게 부모라는 거 말이야. 그런 점에서 당신은...... 부모로서...... 실격이야.”“......” 내 나름대로 가시 돋친 말을 했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뜰 생각이 없었다. 하긴 생각해보니 참으로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내 말을 듣고 있는지 심지어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확실치 않은 이 노인에게 아무리 악담을 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차라리 라스알하르게타의 석불상과 대화를 나누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실격이라고 혔냐?”“응?” 내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 나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내 앞에서 혼곤한 잠에 빠져있는 이 노인말고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뭐......지? 내가 환청을 들은 걸까? 하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에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을 위해 줄달음질을 쳐댔고, 그 피로가 풀릴 새도 없이 암시장을 쏘다녔으니 피로가 누적 되도 한참 누적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위해 했던 수많은 연구 중에서 인간이 장시간 잠을 자지 못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연구도 있었다. 대부분의 피험자들은 3일을 버티지 못하고 잠에 빠졌다고 하는데...... 그 강제적인 셧다운의 직전에 피험자들은 환청을 비롯한 각종 환각을 경험했고, 그로인해 엄청난 공격성을 보였다고 한...... “이게 환청인거 같냐?”“음......” 이쯤 되면, 확실히 환청은 아니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알기로 환청은...... 맥락 없는 소음이 귀를 울릴 뿐, 구체적인 맥락을 담은 대화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거든...... 나는 내 앞에서 자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분명 내 귓가를 울린 이 소리는 이 노인과 관련이 되어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운을 살펴봤다. 그는 가끔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나타낼 뿐...... 그 이외에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는 분명 나에게 말을 걸었다. 대관절......어떻게? “들어와라......”“......?” 그의 마지막 환청과 더불어서...... 그의 침대에서 베개가 툭하고 떨어졌다. 음..... 베개라...... 나보고 지금...... 잠을 자라는 건가? ......그래 뭐, 늘어지게 한숨 자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됐군. Channel 2. 아이리스 저는 주설씨와 함께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녀는 저와 함께 무릉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어요. 그녀는 마당 한가운데에 높이 자라난 오동나무를 보며, ‘와 이건 내가 진짜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가 심었던 거에요.’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기도 하고, 마을 어귀의 우물에서 물을 마시면서 아침마다 이곳에서 물을 길어다가 밥을 지었다며 추억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그녀와의 추억여행은 논들의 한 가운데에 흘러가는 개천에서 잠시 휴지기를 가졌습니다. 그녀는 강바닥에서 돌을 주워 물수제비를 했습니다. 팔 한쪽을 잃었지만, 그녀는 제법 능숙한 돌팔매질 솜씨를 보여주었어요. 동글동글한 돌은 수면 위를 통통 튀어 오르며 개천 반대편까지 날아갔습니다. “워뗘유? 팔 한 짝 없어두 이만하믄 잘 살겄쥬?”“그래요. 다행이 건강하게 잘 아문 것 같아 다행이에요. 그리고......” 몸이 불편해도 그런 밝은 태도라면 어딜 가도 잘 살 거라는 기원 섞인 덕담은...... 제 입으로 꾹 눌러 삼켜야만 했습니다. 어쨌거나 그녀가 그렇게 된 것에는 저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으니까요. 그런 입장에서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닌...... 결국 저 자신을 위한 것에 불과한걸요. 주설씨는 쭉하고 기지개를 켰다가...... 균형을 잃고 버둥버둥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그녀의 어께를 부축해줬어요. 주설씨는 계면쩍었는지 제 부축을 뿌리쳤습니다. “요거...... 적응할라믄 꽤 걸리겄는디유?”“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니, 그렇게 오래걸리진 않을 거에요.”“그래야쥬. 우덜이 동화책속의 주인공두 아니구...... 야그 끝난다구 우리 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잖아유. 삶은 끝날 때 까지 계속 되는거니께...... 팔 한 짝 없는 것이 아수워두 얼른얼른 적응 혀야쥬.”“당신이 왜 삼민상단을 맡기로 했는지 알 것 같아요.”“잉.....? 그렇게 생각을 혔대유?”“당신이라면,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도, 그걸로 힘들어도 결국은 툭툭 털고 일어날 거라는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거 아니겠어요?”“헤에...... 나럴 그렇게 좋게 봐주믄 고맙긴 헌디...... 쪼금 낯간지럽네유.” 그녀는 조금은 계면쩍어 하다가, 자신의 아버지 주운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왜 그녀의 아버지가 암살자들의 유품을 가지고 계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어요. “처음 아부지를 봤을 때넌...... 정말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같았쥬. 혼자서 그 많은 사람덜을 쓰러뜨리고..... 메치고......꺾어 버렸으니께. 그려두...... 얄미운 건 어쩔 수가 없었슈. 기왕 구해줄거믄...... 그때 그 주막에서 괴기 한 점이라도 주지는 말여. 그걸 나랑 오빠가 한참을 티 나게 쳐다봐두 끝내 주지를 않더라니께유.”“하하, 참 재미있는 분이었네요.”“뭐......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의 구분이 확실한거쥬. 지금도 알지 못하겠는 것이...... 그때 무슨 이유로 우리를 갔다가 도와줬는지...... 끝끝내 말씀을 안하시더라구유.”“그럼 라스알하게 사람들이 식민지배로 고통 받던 것도 처음에는......”“이잉...... 완전 찬바람이 춥다허게 쌩깠었쥬. 그때 그 양반은 당신이랑...... 우리 둘 말고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니께. 그려두 덕분에 호의호식 잘혔쥬. 나가 울 아부지 닮아서 이재가 밝았어서...... 아부지가 또 돈 냄새는 기가 멕히게 잘 맡으셨쥬.” 그리고 그녀는 주운이 라스알하게 혁명...... 아니, 이젠 삼민 혁명이라고 해야겠군요. 거기에 투신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다보니...... 참으로 황당했어요. 세상에, 그게 아무리 귀한 대접을 받는 거라고 하지만, 거기에서 혁명이 시작될 줄이야. 아마 그 사실을 그때 그 관리가 알았더라면...... 아마 그 사람은 땅을 치고 후회를 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고......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을 하다, 마침 떠오른 역사의 애피소드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긴 뭐...... 개 때문에 권좌에서 내려온 여왕도 있는걸요.”“그려두...... 황당한 거는 황당한거쥬. 참...... 난중에 역사학자들도 많이 난감하지 싶어유. 퇴역하고 고향을 찾은 프로하기온의 암살자가 조용히 잘 살고 있다가 별안간 혁명의 대오에 합류했다...... 아마 정신 지대루 박힌 사람이라면 ‘왜?’라는 질문을 안 던질 수가 없을 것인디...... 어느 누가 그거 때문이라고 짐작이나 하겄슈?”“그건 그래요.” 저와 주설씨는 미래의 역사학자들이 골머리를 썩힐 생각에 웃음을 지었습니다.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면...... 그들은 난감함을 느낄게 분명하거든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하겠죠. 그래도 그들중 일부가 진실에 접근을 하게 되다면...... 그들은 이 혁명을 ‘삼민 혁명’이라고 계속 불러야 할지...... 아니면 ‘밀주 혁명’이라고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에 빠지겠지요. “근디...... 울 아부지가 하샤신들의 유품.....?이라고 혔나유? 그걸 가지고 계셨담서유.”“네. 그래서 저희가 이 고장에 온 거에요.”“그게 대관절 뭐하는거래유? 오빠두 야그는 혔다마는 울 아부지는 그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가지구......” 주설씨의 질문에 조금은 저도 난감해졌습니다. 암살자들의 주인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저도 그것을 본 적은 없으니까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에 대해 역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에게 설명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인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제가 아는 바에 대해서는 설명을 해보는 수 밖에...... 저는 암살자의 주인에게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 최대한 사실에 맞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제 말을 들은 그녀는...... 제가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황당함의 크기만큼이나 비슷한 크기의 황당함을 느낀 듯 했어요. “뭐...... 일단 아이리스씨가 말하는 거니께 최대한 믿어보려고 노력은 허겠다마는, 그려두 황당한건 어쩔 수가 없네유. 17세기에 마왕이라니...... 혹시 어디 가서 그런 말은 허지 않는게 좋겄슈. 아무리 좋게 봐줘두 미/친놈년으로밖에 안보일 것 같네유.”
갑과을작성일 2018-04-19추천 0
-
[짱공일기장] 두가지 인생 - 58
Channel 1. 로키 답답이는 내 말에 생각할 거리가 생겼는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언덕 아래에 펼쳐진 취락들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어느 순간부터 녀석을 답답이라고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녀석과 함께하면서 이 여자가 왜 그런 답답한 모습을 보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생각이 많았다. ‘모두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다소 이상론적인 소망이 녀석의 모든 사유와 행동의 기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녀석은 행동을 취하기 전에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해야 반대급부의 사람에게 최소한의 피해가 갈지 곰곰이 생각을 했고, 그 사유에 결론이 내려지면 여지없이 행동에 옮겼다. 그 말을 반대로 하자면, 답답이는 스스로가 납득할 만한 결론을 내리기 전까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거겠지. 즉, 행동력에는 느림이 없었지만, 문제는 사유였다..... 근데 앞서 말한 ‘모두가 다치지 않는다’는 명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행동하는 꼴을 볼 수가 없을 수 밖에...... 예전에 사유와 행동의 관계에 대해서, 프로하기온 출신의 정치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행동하지 않는 정의는 악의 편이다.’라고...... 그 말을 녀석에게 적용한다면, 아마 녀석은 대 마왕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옥에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지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참 아름다운 마을 아니에요?”“음..... 그렇지. 취락의 배치가 조형적으로 균형이 잡혀있으니까. 덧붙여 마을의 토지도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아마 수많은 사유와 시행착오를 거쳐서 만들어진 거겠지.”“아마 라스알하게 지역의 다른 마을들도 이곳과 비슷할 거라 생각해요.”“뭐..... 자세히 알아보진 않았지만, 이런식으로 숲에 둘러 쌓인 폐쇄적인 지역이라면 아마 농업에 기초한 자급자족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 네 말이 옳을 가능성이 높겠군.”“전 이 아름다운 마을이 라스알게티처럼 화마와 폭력에 휩싸이는 것을 막고 싶어요.”“이건 잘 알지. 라스알하게는 대륙의 다른 지역과 달리 자급자족이 잘 되어있는 지역이야. 다른 속주와 달리 중앙의 속주자치 교부금도 거의 받지 않아. 속주에 대한 재정지원의 부담이 큰 왕도로서는, 그동안 효자 노릇하던 라스알하게마저 화마에 휩쓸리게 된다면 입장이 꽤나 난처해 질 거다.”“로키군.”“응.”“어차피 로트 클라우드가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이곳에 좀 더 있으면 안 될까요? 여기에서 있다 보면 분명 평화를 모색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음......” 확신에 찬 답답이의 눈을 보니, 그런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글쎄..... 녀석의 확신과는 별개로 내 생각은 달랐다. 1000여년 가까운 시간동안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겨레가, 결코 평화롭다고 할 수 없는 방법으로 통일되었다. 숙고와 토론, 타협을 전제로 하는, 이른바 절차적 정당성을 갖춘 통합을 해도 마찰을 피할 수 없을 진대,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폭력적이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통합을 이룬다면, 그 마찰의 강도는 오죽하겠는가? 뭐...... 언젠가는 평화를 모색하며, 타협을 이룰 수는 있겠지만, 그건 도도하게 흘러가는 역사라는 강이 가지는 긴 호흡 속에서나 가능할 뿐, 강의 물방울로서 끊임없이 증발하거나 지하에 흡수되는 물 한 방울의 짧은 호흡으로는 그걸 실감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은 평화를 모색할 때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치열한 대립과 갈등 그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 평화에 대한 모색은, 그 이전시대에 벌어지는 폭력과 대립이 여러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할퀴고 난 뒤에나 오를만한 의제다. 내 말을 들은 답답이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마음으론 동의할 수 없었는지, 말없이 마을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걸 보니, 이 마을을 품은 라스알하게가 화마에 휩쓸리는 것이 안타까워 보이는 모양이다. “하나만 묻지. 너는 평화를 모색한다고 했는데, 평화롭게 뭘 어쩔 생각이지?”“네?”“라스알하게의 인민들은 라스알게티로의 독립을 원하고 있을거다. 그런 이들의 염원이 누적되어 녹림당이란 실재를 입게 된 게 아닐까?”“그러니까.....”“너는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롭다는 건 형용사에 불과하다. 그들이 원하는 건 명사야. ‘독립’이냐 ‘속박’이냐 라고. 너는 라스알하게의 인민들이 라스알게티에게서 평화롭게 독립하길 원하는 건가 평화롭게 속박되길 원하는 거냐?”“......” 답답이는 내 말에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또다시 말없이 언덕아래의 취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가 생각에 잠기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내가 옆에서 무슨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자신이 수긍할 때 까지 꿋꿋하게 생각을 이어갈 위인이니까......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 무엇이 있든 간에, 녀석은 자신이 결정한 바를 고집스럽게 밀고 갈 것임을 알기에 나는 녀석이 나름의 답을 찾을 때 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로키군 제가 원하는 건......” Channel 2. 아이리스 “생각해보면 제가 참 많이 건방졌어요.”“......?” 제 말에, 로키군은 ‘이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려고 밑밥을 까는 거지?’하는 불신이 가득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하하, 그가 이런 표정으로 저를 보는걸 보면, 제가 로키군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만큼이나, 그 역시 저를 알아가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네요. 생각해보면, 로키군은..... 툴툴거리긴 하지만, 제가 부린 고집을 다 받아주긴 했지요. ‘당신에 대해 알고 싶다.’라는 말을 들어주기 위해 저를 운터브룩으로 데리고 왔죠. 또, 제가 ‘비정한 마음’에 대해 다가갈 때도 말리기는 했지만, 그 사실을 지부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묵인해주었고요. 그리고...... 기어코 제가 ‘비정한 마음’에 대해 알게 되고, 그로인해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저를 버리는 대신 자신의 식구인 ‘암살자’들을 등지고 저와 함께 프로하기온으로 도망치기까지 했잖아요.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도 많은걸 포기하고 여기까지 온 거에요. 이쯤 되면,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밑밥을 깔아대는지 궁금해 할 텐데요...... 대충 짐작은 했겠지만, 이번에도 저는 로키군을 곤란하게 만들 것 같습니다. “당신 말이 옳아요. 라스알하게의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제가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강요한 거나 다름이 없잖아요. 나한테는 그럴 권리도, 자격도 없는데 말이죠.”“그래. 중요한건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거지.”“프로하기온의 마사다 반란 기억하죠? 저는 근현대사 수업 시간에 그 사건에 대해 배우면서 당시 선생님이 말씀하신 게 기억나요. ‘그들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지만, 그 사건 이후에 프로하기온인들이 당한 처우를 생각하면 자유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라고 하셨어요. 실제로 우리 라스알게티는 반란에 대해서는 무관용의 원칙을 고수하니까요. 근데 그거 알아요? 라스알게티에서도 마사다 반란을 지지하던 사람이 있었다는 거?”“.......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네. 우드로 글래드스턴이라는 사람이에요. 당시 초선의원이었죠. 그는 프로하기온 파병 동의안을 반대하기 위해서 긴 시간동안 연설을 했다고 해요. 그의 연설은 해당 회기의 마지막 안건이었던 파병동의안 채택을 무산시킬 정도로 길어서. 주변 의원들이 끌어내리지 않았다면 연설만 하느라 회기가 종료될 뻔 했다고 해요. 의원들 사이에선 그의 행동이 사략 해적선과 같은 도의 없는 행동이라고 해서, 필리버스터라고 빈정거리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니까요.”“그런 인물이 라스알게티에 있을 줄은 몰랐군.”“그 사람이 한 연설의 요지는 그거에요. 각 민족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국가가 어디에 귀속될 것인지, 어떤 형태의 정치적인 구조를 가질지, 어떤 종교나 경제 체제를 가질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거에요. 즉, 이러한 선택에 타 민족의 간섭이나 개입을 허용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거겠죠.”“지금 같은 시대엔 미.친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데.”“결국 파병동의안이 통과가 됐고, 실제로 그의 주장과 반대되는 세상이 열렸으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건, 전혀 반대되는 세상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주장이 사람들의 마음에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기어코 그는 수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요.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상을 주어진 현실과의 타협을 통해 어느 정도 달성하게 됐죠. 그게, 속주 자치제에요.”“음...... 뉴스로 본거 같긴 하지만, 자세히 읽지는 않았어.”“뭐...... 이름만 들어봐도, 어느 정도 속주에게 자치권을 준다는 거겠죠? 꽤 괜찮은 제도였고, 사람들의 호응도 샀어요. 근데 그게...... 실패로 돌아가게 되요. 1년 전에 암살당했거든요.”“.......”“저는 시대에 너무 앞서나갔다고,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됐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저는 마사다 반란과, 글래드스턴의 암살을 보면서 수긍하고 싶지 않았던 선생님의 그 말을 제 가슴속에 품게 되었던 걸지도 몰라요...... ‘자유는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라는 거...... 그런데 당신 말을 듣고 나니, 제가 진정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아요.”“아, 그만.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거 같아. 그건 하지 말자. 우린 그치들이 라스알하게를 태워먹든 찜 쪄먹든 우리 알바가 아니라고.”“로키군...... 미안해요. 나 진짜 어색한 말 하는 거 알아요. 라스알게티 출신이 이런 말 하는 거 진짜 어색한거겠죠...... 근데, 외면하고 눈 돌리는 건 제 성격에 안 맞는 거 같아요. 우리...... 도와줘요. 대신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도록 우리가 감시하자구요.” 제 말에 로키군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하......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넌 정말 망할 년이야.” Channel 1. 로키 내가 일전에 억하심정으로 답답이에게 ‘망할 년’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지금 이 상황에 직면해보니...... 내가 매우 성급하게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답답이는 망할 년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망할 년이라는 표현은 “손님들 헌티 풀 때기만 대접해 드리는 것이 쪼깐 미안허지만...... 라스알하게 식단이 몸에 좋아유. 백세 도시 라스알하게...... 알쥬? 그게 다...... 음식덕분에 생긴 명성이유.” 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놓은 주우의 부인에게 더 적절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말대로 식탁에는 라스알하게식 식단이 차려져 있었다. 그게 망할 년이라는 표현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냐고? 라스알하게 식단이야. 운터브룩에있을 때 관리인 아주머니가 많이 차려줬기 때문에 익숙하다. 그럼 익숙한 거 먹으니까 좋은 거 아니냐고? 음 굳이 문제를 따지고 들어가자면, 관리인 아주머니가 반찬 투정을 부리는 우리에게 각각의 음식들이 가진 좋은 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해주었다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요것은 뼈를 튼튼하게 해준다.’ ‘요거는 몸의 원기를 북돋는다.’ 등등..... 하지만 아주머니가 가장 강조했던 것은 ‘사람은 본디 잘 묵고, 잘 싸는 게 질이유. 그 혹시나 똥 때리는 걸로 고민 있으면 말혀유. 요거 묵으면 바로 화장실 달려갈겨.’ 건강한 배변활동이었거든. 지금 내 앞에 차려져 있는 음식들은 거의 백이면 백...... 관리인 아주머니가 변비에 좋다고 말했던 것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거든. 우연치고는 어쩜 이렇게 기가 막히게 한 자리에 모여 있을 수 있었을까? 이거 참..... 너무 속이 뻔히 보이는 작태가 아닌가 싶다. “여행하고 그러면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담서유? 그럴 때 측간 가는 거 까지 드물어 봐유..... 바로 변비 되는 거요. 어차피...... 여그에 꽤 있어야 할 거 같은디. 여서 쌀 수 있을 때...... 푹푹 싸는 게...... 질이유.” 부창부수라고 주우도 껄껄 웃으며 자신의 부인의 말을 거들었다. 이 인간들이...... 참자. 이 사람들이 느긋하니까 이렇게 나오는거지, 성격이 급했다면 아마 당장이라도 브로치를 내놓으라고 내 배에 칼을 들이밀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요 로키군......큽. 얼른 먹......큽 고 일 봐야죠.” 답답이도 이들의 허술한 연극이 우스웠지만 내 눈치가 보였는지 웃음을 애써 참아가며 내게 음식을 권했다. 정말 이들의 정성에 보답하는 차원에서라도 진짜 브로치를 삼켜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다. “이봐 주우.”“잉. 보자마자 신호......라도 오는거여유?”“모두가 좋자고 하는 의도인 건 알겠는데, 티가 너무 나게 굴면 그게 호의로 안 보인다고...... 니가 원하는 게 이거 아니야?” 결국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녀석의 앞에서 브로치를 꺼내 흔들어보였다. 그와 부인의 눈이 똥그래졌다. “이게 뭐셔? 분명 뒤꽂이는 샘켰다구 혔는디?”“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고. 그 큰 쇠붙이를 그냥 삼키면 내장이 남아날 것 같아? 내가 삼켰던 건 사탕가게에서 팔던 사탕이었다,” 내 말에 답답이는 더는 참지 못하고 깔깔대며 웃었다. 어찌나 격렬하게 웃던지 녀석은 일순간 균형을 잃고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 할 정도였지. 그녀가 웃든지 말든지 주우내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고, 나는 그들 앞에 브로치를 내려놓았다. “뭐여 그럼...... 굳이 이걸 묵을 필요는 없었는디..... 말을...... 허지 그랬슈.”“말이야 하려고 했지. 받을 걸 받고 말이야. 근데 너의 아비가 저렇게 몸져누워있을지 누가 알았겠냐.”“일단 뭐...... 고맙게 받을게유.” 녀석이 브로치를 챙겨가기 전에, 나는 브로치에 손을 뻗어 내 쪽으로 슬쩍 당겼다. “뭐하는 겨?”“나도 꽤나 뻘짓을 한 거 같은데, 그냥은 주기 그렇지 않나? 조건이 있다.”“아부지 깨나시믄...... 당연히 주겄쥬. 일단 당신도 울 아부지헌티...... 뭘 원하는지도 모르지 않소?”“받을 거 받는 건 당연한 거고. 그거 말고 하나 더 있다.” 나는 말을 꺼내기 앞서 답답이를 살펴봤다. 답답이는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하고자하는 그 혁명인가 나발인가 하는거 말이야...... 그거 우리도 좀 도울 수 있는게 있을까 싶어서 말이야.”“잉? 당신덜이요.....? 당신덜이 왜유?”“나도 딱히 당신들이 라스알하게를 지지든 볶든 상관은 없는 주의였는데, 내 파트너 쪽에서 오지랖이 좀 넓어야 말이지. 당신들이 하려는 일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다치지 않는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아이고 각시가 지법 맘 씀씀이가 따땃......하네유. 외지인이 이렇게 마음써주는 게...... 흔한 일은 아닐틴디..... 알겄슈. 우덜도 최대한으로 민간인헌티 피해 안 가게...... 잘 할게유.”“아니 아니, 말귀를 잘 못 알아들으시네. 우리도 그 혁명인가 뭔가 하는데 참여하겠다 이거다.”“......” 내 말을 끝으로, 주우는 말이 없어졌다. 이 녀석도 답답이처럼 자신이 수긍하는 결론이 나기 전에는 복지부동하는 쪽의 인간인 모양이었다. 그는 말을 하는 대신 손에 들었던 식기를 내려놓고 우리 둘을 찬찬이 살펴보았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여부를 외견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 자였는지, 천천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굳이 피할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별다른 감정의 징후 없이, 내게서 눈을 떼고 답답이를 찬찬이 훑어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답답이는 눈을 피할까 말까 무던히 고민을 한 듯 했지만, 결국 그녀도 꿋꿋하게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응시했다. “하아...... 어렵네유 어려워. 아무리 찬찬이 살펴본다고 헌들...... 나가 무당도 아닌디...... 당신덜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어찌 알겄슈...... 물론 지금 우리 꼬라지에 고양이 손이든...... 개 손이든...... 안 가리고 몽창 빌리고 싶은 심정이다마는, 함부로 덥썩 받기에도...... 그런기, 나가...... 당신 덜을 고작 오늘 츰으로 본 것이 단디, 믿었다가 통수...... 맞으면 워쩌켜유.”“뭐 틀린 말은 아니야. 내가 네 입장이었어도 그런 생각을 했을 거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이 브로치에는 아마 높은 확률로 니가 추구하고자 하는 계획의 적기가 적혀있겠지.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여나 기간이 넉넉하다면 일단 그 기간동안 우리를 지켜보는게 어쩌겠어? 물론 그 전에 주운이 깨어난다면 우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가......” .......라고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뒤통수가 근질근질해졌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답답이가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게 아닌가. 녀석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과, 이마에 깊게 파인 3개의 주름은, 나에게 ‘어디 한번 끝까지 말해보시지?’라고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으음, 그래 메시지를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고 싶지만, 그래도 이미 뱉은 말이 있으니, 니들이 하는 혁명이라는 것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도움을 줄 생각이다.”“......흠.” 주우는 우리의 말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의 부인이 ‘아이구 뭔 식사자리에서 그렇게 심각하게 야그들을 해댄대유. 묵고 살자구 하는 일인디, 묵을 때 만큼은 양껏 들어유.’라고 말하며 식기에 밥을 푹푹 푸는 걸 보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일......단 우리 임자가 하는 말도 맞으니께,..... 밥 묵고...... 찬찬이 생각해 보쥬. 사안이 사안인디...... 지 혼자서 결정하기도 뭣허지 않겄슈?” Channel 2. 아이리스 우리 주변에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면서 오래전부터 전해진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것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지역성’에 대한 우스개소리 인데요. 대표적인 이야기는 이겁니다. ‘라스알게티 가서는 눈 감지 말고, 프로하기온 가서 지갑 꺼내지 말고, 라스알하게 가서 입을 열지 말라,’라는 말이 그거에요. 저는 이런류의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은 사람들의 선입견에 기대는 질낮은 언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발언에 대해서 어느 정도 동감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여그는 방음도 잘 된께로 두 분 주무시는데 불편함은 없을거여유. 좋은 밤 보내시구 낼 뵈유.”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차를 마시고 마을을 한 바퀴 돌고나서 잠자리에 들기까지 그 수많은 시간동안 주우에게 우리가 해왔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가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그는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가는 기미만 보이면 허허 웃으며 다른 화제로 말 머리를 돌려버렸습니다. 쫓고 쫓기는 자의 치열한 머리싸움이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지만, 결국 우리는 패배에 직면하게 되었죠. 주우는 득의연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인사를 한 뒤, 문을 닫고 가버렸습니다. “와...... 정말 보통내기가 아닌데요?”“이래서 라스알하게 놈들 앞에선 입을 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나보다.” 로키군도 주우에게 완전히 질려버렸는지 기지개를 쭉 피며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저도 로키군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에 있어서는 완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어요. 그건 바로 ‘주우는 절대 우리를 끼워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거에요. 아마 로키군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은, 제가 부리는 고집에 장단을 맞춰주려는 것이었을 뿐, 그는 애초부터 ‘반란’에 발을 담글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제 앞에서 ‘안 될 모양이다.’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이래저래 배려심이 많은 남자입니다. “쉽지가 않네요.”“.......”“그래도 사람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직접 참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천장을 보던 로키군은, 계속되는 제 혼잣말에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결심을 했는지 결연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너에겐 매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주우는 자신의 입장에서 해야 할 적절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도와주겠다고 한다면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게 당연했을 거야. 이 자리에 오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배신과 좌절을 마주 했을 테니까...... 지금으로선 우리는 언제 자신의 등 뒤를 노릴지 모르는 놈들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다.”“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저런류의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경험 외엔 잘 믿지 않거든. 그는 내색을 할지 안할지 모르지만, 아마 우리를 계속해서 주시할거야. 스스로가 납득할 때 까지 말이지. 물론 나로서는 그가 확신을 가지기 전까지 모든 일이 끝나면 더욱 좋겠지만 말이야.” 로키군의 솔직한 말에 저는 더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아마 로키군은 주우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볼 때 로키군과 주우는...... 추구하는 바는 조금 다르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는 비슷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타인에게 자신의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삶....... 사느냐 죽느냐의 치열한 현장에서 그들은 ‘자기 자신 외에는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는 도그마를 강요받으며 살아왔겠지요. 타인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당사자의 입장으로선 상당히 고단한 삶이었을 거에요. 다른 듯 닮은 두 사람의 삶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 로키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 어께에 이불을 덮어주었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너는 그냥 네가 했던 대로만 하면 되는 거다. 생각해봐. 너는 반년 전만하더라도 ‘우리’와 함께 생활을 했었어. 그 자체로도 놀라운 일이지만, 너는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그 의심 많은 사람들에게서 스카웃 제의까지 받게 되었잖아?”“하하, 칭찬인거 맞죠? 그때 제가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알아요?”“뭐...... 당시엔 나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어. 네 녀석이 그렇게 적응력이 좋은 인물인 줄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이래서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는 건가 보다.” 로키군은 그때를 생각하다가 킬킬거리며 웃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저도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져서 함께 따라서 웃었어요. “로키군은 생각보다 유식한 거 같아요.”“생각보다?”“뭐, 하는 일 가지고 사람평가하면 안 좋은 건 알지만, 당신 하는 일이 워낙...... 그랬잖아요.”“너도 어떻게 보면 지독한 모순덩어리야. ‘~해서는 안 되는 건 알지만......’ 이라고 해놓고, 독설이란 독설은 다 하는 거 알아?”“에이, 칭찬의 의도로 하는 거잖아요. 일부만 보고 전체를 매도하진 맙시다. 근데 그런 유식한 말들은 어디에서 따로 배우는 거에요?”“음...... 굳이 따지자면 따로 배우는 게 맞긴 해. IATP라고, 통과의례를 거친 요원들이 발령지로 배속되기 전에 요원으로서 기본 소양에 대해 배우는 연수가 있거든.”“아아 그래요? IATP라는게 일종의 교육과정인가보네요?”“개별 요원 훈련 프로그램이라고 하는 건데, 인문교양이나, 자연과학, 그리고 현장실습을 아우르지. 길기도 꽤 길어. 입소부터 수료까지 1년 정도 걸리면 엘리트소릴 들을 정도거든. 성적에 따라서 배속지가 달라지기 때문에 다들 치열하게 공부하는 편이야.”“로키군은 몇 등정도 했어요?”“나야 뭐...... 구체적인 등수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연수생 시절 엘리트 소리 좀 들었지. 라스알게티로 배속된 거 보면 모르겠어?”“그래서 거기에서 뭘 배웠는데요?”“현장실습은 필수교과고, 나머지는 선택과목이야. 총 세 개의 커리큘럼을 선택할 수 있는데, 나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이것’ 때문에...... 사회성이 조금 결여되 있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거든. 인문교양 쪽은 ‘인간학’과 ‘교육사회학’을 선택했고, 자연과학 쪽은 ‘화학’을 선택했어.” IATP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그는 퍽 즐거워 보였습니다. 아마 그때의 기억이 그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추억이었던 모양이에요. Channel 1. 로키 1624년 5월 7일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분명 답답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에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노독이 꽤나 쌓여있었던 모양이다. 스트레칭이라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팔 한쪽이 너무 저려왔다. 왜 그런고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답답이가 내 팔을 베개 삼아 잠을 자고 있었다. “....... 모르겠다.” 굳이 녀석을 깨워가며 스트레칭을 할 것 까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천장의 기둥이 내 눈에 들어왔다. 라스알하게의 건축양식은 꽤나 특이해보였다. 라스알게티나 프로하기온의 건축물들은 천장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그 벽 너머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이 건물은 천장이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걸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거대한 기둥이 가로 누워있고, 그걸 작은 기둥들이 엇갈려가며 떠받들고 있었다. 저 거대한 기둥이 왜 누워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추측컨대 작은 기둥들이 서로를 받칠 수 있는 기준점이 되어주는게 아닐까 싶었다. 무슨 연유로 천장의 구성을 공개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그래도..... 건물 전체가 조금 높아져 보여서 탁 트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참 역설적이지...... 라스알하게 사람들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의뭉스러운 놈들이라고 불리는데, 그들이 사는 집은 자신의 속내를 기탄없이 드러내니 말이다. “음...... 몇 시에요?”“글쎄, 그냥 아침이란 건 확실해.” 내 말에 답답이는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기지개를 쭉 폈다. 팔다리가 쭉쭉 하늘을 향해 치솟으면서, 녀석의 얼굴에는 점차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아..... 답답이는 이런 식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모양이다. 내가 녀석을 지켜보는 중에도 녀석은 내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반복해서 기지개를 켜다가...... 온몸을 쭉 편채로 바들바들 떨다가 툭하고 무너졌다. “잘 잤어요?”“팔이 좀 저리긴 한데.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잘 잔편이지.”“히히. 고마워요. 덕분에 잘 잤네?” 답답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다. 녀석의 입에서 ‘와 정말 예뻐요!’라는 탄성이 터져나오는걸 보면, 라스알하게가 녀석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다. 나는 답답이가 라스알하게의 경치에 빠져있을 동안 이불을 개고 스트레칭을 했다. “와 정말 잘 잤다. 오랜만에 푹 잔 거 같지 않아요?”“여독이 심했나보다. 그리고 여기 공기가 좋은 것도 있고.”“진짜루...... 프로하기온은 매일 모래먼지 섞인 공기를 마셔야 했는데, 여긴 그런게 없잖아요. 그냥 숨을 쉬어도 폐가 뻥 뚫리는 기분이 들어요, 와...... 여기서 쭉 살았음 좋겠다.” 답답이는 싱긋 웃으며, 자신의 옷을 주섬주섬 집어들었다. 이젠 내가 자리를 피해주어야 할 차례인가 보군,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밖에 나가니, 주우가 마당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반토막이 난 나무토막들이 이리저리 널려있었고, 그는 비지땀을 흘려가며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잘 잤슈?”“뭐...... 손님 대접이 나쁘진 않더군.”“이 사람이 정말...... 말 그런식으로 밖에 못해요? 네. 주우씨. 진짜 여긴 천국인거 같아요. 공기도 맑고, 풍경도 아름답고......” 뒤늦게 따라온 답답이는 내 옆구리를 세게 꼬집고는, 주우에게 서글서글하게 다가가 이곳의 경치와 생활 요건에 대한 찬사의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 요즘들어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 유독 나한테만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붙임성이 뚝뚝 떨어지는 답답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껄껄 웃으며 도끼를 내려놓았다. “뭐 지야 딴 동니는 안 가봐서 잘 몰겄는디,..... 외지인들 야그 들어보믄 뭐...... 여그 맨치로 사람 살기 딱 좋은 동니도 없다는거 같기두 허구......”“그런거 같아요. 라스알게티와 프로하기온 모두 살아봤는데, 모두 여기만큼 환경 좋은 쪽은 아니었거든요.” 답답이와 주우가 떠드는 동안, 나는 널려있던 나무토막들을 살펴봤다. 모든 나무토막들의 절단면이 깔끔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요령을 터득한게 아니라면 엄청난 완력으로 나무를 쪼갠 거겠지...... 하나를 보면 열은 안다고, 그가 녹림당의 리더가 된 것이 단순히 로트 클라우드와의 혈연관계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낭구 팬거를 뭐...... 그리..... 신기허다구 보고 있슈?”“나무가 정말 깔끔하게 잘린거 같아서 말이야. 마치 기계로 잘라낸 것 같군.”“여짝에 기계가 어디..... 있겄슈? 다 요령이유..... 요러게 나무를...... 슬쩍 찍어가지고 질을 낸 담에......” 그는 도끼를 나무에 슬쩍 찍어서 박히도록 한 다음 그걸 높이 들어올렸다. “허리에 심을..... 슬쩍 싣어가지고...... 요래..... 찍어부리면....... 워뗘? 깔꼼하쥬?” 도끼날이 나무 조직을 파고드는 소리가 나더니, 깔끔하게 나무토막이 반동강이 났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깔끔하게 나무를 잘라내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말대로 힘이 별로 들이지 않은 것 같았거든. “놀라운 기술을 가지고 있군.”“뭐..... 별거 아녀유. 모르는 넘덜이야....... 밤에 쓸 심꺼정 쏟아 붓고, 담날에 마누라 헌티...... 깨죽도 못 얻어먹지마는. 한 며칠 허믄...... 이밥에 괴깃국이 한상 턱허니 차려져 있는거는 일도 아니유.”“이이가...... 아침 벽두부텀 씨잘떼기 없는 소릴 허구 앉았네,..... 식사 채려놨어유. 얼렁 와유.” 우리가 주우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주우의 부인이 우리를 불렀다.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5월 7일 식탁에 놓여있는 요리들을 보노라니,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습니다. ‘책을 읽는다는건, 작가와 독자가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나누는 끊임없는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라는 말이에요. 요리 앞에 책 이야기를 한다는게 참 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책은 매개에 불과한 거니까...... 책을 요리라는 걸로 치환을 해도 이상할 건 없겠죠. 좀 더 자연스럽게 바꿔볼까요? 제 식대로 말이에요. ‘요리를 먹는다는 건, 요리를 만든 사람과 먹는 사람이 음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나누는 끊임없는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렇게요.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제가 이런 말을 한다는게 주우의 부인이 요리를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던졌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할 텐데요. 맞아요...... 뭐, 본인은 그런 걸 의도하지 않았을 진 몰라도, 어제 저녁에 먹었던 음식을 생각한다면, 저는 지금 제 앞에 차려져 있는 음식들을 통해 주우의 부인이 저희에게 일종의 메시지를 던졌다고 생각해요. 그 메시지란 바로..... ‘어제 저녁에 차린건 예고편이었어.’라고 할까요? “우와...... 이게 다 뭐람.”“손님들 왔잖아유....... 그래서 오랜만에 심 좀 써본거겠쥬.”“이이는 뭔 말을 그렇게 혀유? 갑자기 손님오셨는디 경황이 없어서 새론 못 채리구, 평소 먹던대루 혀봤어유. 더 좋게 대접혔어야 혔는디......먄혀유.” 그녀는 주억거리며 ‘평소 먹던 대로’라는 표현에 유독 강조를 했지만, 별로 믿음이 가진 않았어요. 인간적으로 저렇게 만은 양의 음식을 먹다보면 금방 비만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거든요. 양도 양이었지만, 어느 것부터 손을 대야할지 고민일 정도로 음식들 하나하나가 모두 맛깔나보였습니다. 뭐 어느 걸 먹을지 고민이 든다면..... 다 먹죠 뭐. “오매, 우리 각시는 참 맛깔나게두 묵네.”“진짜 맛있어요. 이건 이름이 뭐에요?”“잉...... 그거슨 게장이라 혀. 아따 외지서...... 와가지구 매운거는...... 잘...... 못 묵을 줄 알았는디. 복시럽게 잘 묵네...... 짐치도 좀 묵을텨?” 주우의 아내는 제 모습이 퍽 좋아보였는지, 두 팔을 걷어 부치면서 직접 손으로 배추 김치를 쭉쭉 찢어서 제 밥그릇에 올려주었습니다. 아아 김치..... 참 오랜만에 먹어봐요. 운터브룩을 나서면서 먹을 기회가 없어 아쉬웠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먹어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뭐라고 부르면 되겄소?”“로키라고 불러. 저 여자는 아이리스고.”“그 뭐냐...... 자네 말이여. 아무리 여행 중이라고 허드래두...... 각시를 너무 굶긴거 아녀?”“나름 호의호식했어. 우리 상황에 알맞게.”“그려? 나가 여태껏..... 살다 살다...... 요로코롬 사람이 음식을...... 게눈 감추듯이 먹는 모습은 첨 보는디?” 주우는 껄껄 웃으면서, 제게 ‘아이고 샥시, 밥은 넉넉항께 눈치 보덜 말구 더 달라고 혀유,’라고 말하곤 제게 물 한잔 떠 주었습니다. 하하..... 참 저도 제가 이렇게 식탐이 심한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 저는 밥을 두 번 더 받아서 먹었답니다. 밥을 다 먹고나니 이제 좀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생겨 식탁을 보니...... 음..... 제가 많은 실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탁은 유독 제가 앉았던 주변에만 그릇이 깨끗하게 비어있었거든요. 그래도 제 모습을 밉게 보질 않는다는걸 느낀게, 주우나, 주우의 부인이나 턱을 괴고 제가 먹는 모습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거든요. 그래도..... 민망한 것은 변하지 않아서, 저는 후다닥 빈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달려갔답니다. “아유 괜잖어유....... 씨끄는건 지가 할랑께,..... 어여 일덜 봐유.”“그래, 그릇만 놓고 이리로 와.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길 해봐야지.” Channel 1. 로키 마스터는 내가 ‘통과의례’를 받기 이전, ‘우리’끼리의 용어로 ‘햇병아리’시절에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돈을 빌려줄 때는 앉아서 빌려주지만, 돈을 받을 때는 무릎 꿇고 받아야 한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무릎을 꿇으려고 해도, 상대는 이리저리 말머리를 돌려대며 도통 빚 이야기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게 지금 현 상황에 우리가 처한 큰 문제다. 주우의 경우도 다를바가 없어서, ‘이야기’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인 점이 있다면, 라스알하게인 남성 특유의 헤어스타일인 ‘상투’라는 것 덕분에, 녀석의 얄미운 머리채를 잡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갑자기 무슨 헤어스타일 이야기냐고? 이런 간단한 메타포도 이해를 하지 못하다니, 당신은 진정 머저리인가? “어이구...... 시간이 벌써 요리 되었네. 나넌 일이 많아가지구...... 그럼 실례 좀 헐게유.”“음...... 그런식으로 나온다? 우린 뭐 시간이 펑펑 남아돌아서 여기에 뭉그적거리고 있는 걸로 보이나?”“일 많은걸 어찌혀유.”“그럼 뭐......” 나는 브로치를 꺼내 그의 눈 앞에 대고 흔들었다. “이게 필요 없다는 걸로 받아들이면 되는건가?”“사람이 너무...... 극단적으로 나오는거 아녀?”“니가 그렇게 피해대면. 우리로선 그렇게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을거 아냐. 할 말 있어? 있으면 앉고.”“......지기럴.” 주우는 결국 자신이 도망칠 방도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얄밉다 싶을 정도로 서글서글했던 그의 눈에 약이 바짝 올라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아마 녀석이 화를 벌컥 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껄껄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르겠군. “그럼..... 우리 정리라는 걸 쫌 해보자구유...... 당신덜이 원하는 것이......”“간단해, 우리도 너네 ‘삼민 혁명’인가 나발인가에 참가하겠다는 것이다.”“기왕이면 평화적인 방법으로 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주우는 답답이가 말한 ‘평화’라는 단어에 쿡 하고 실소를 조금씩 흘리다가, 결국 얼굴을 잔뜩 구겨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주우의 태도에 답답이는 어리둥절해서 ‘저사람 왜 저래요?’라고 내게 속삭였다. 답답이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주우가 왜 저렇게 웃는지 알 것 같았다. 주우는 답답이가 어리둥절해 하거나 말거나 한참을 웃더니 결국 얼굴이 시뻘개져서 꺽꺽거리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샥시가 두 번이나 요런 말을 허는거 보믄...... 샥시도 진심이구먼유...... 좋아유. 내가 그동안은 샥시가 뭔 말을 혀두 요 말은 안할라구 혔는디......나도 속 션이 야그 할게유. 이보 샥시..... 혁명이라는 단어에..... 평화적이라는 말이..... 붙을 수 있을거 같으요?”“아니 그건.....”“우덜들이...... 라스알게티 놈들 헌티...... ‘인자 집으로 가라.’라고 하믄, 라스알게티 놈덜이 갔다가 ‘아이고 미안합니다. 자리 비켜드릴게유.’허구 나간대유? 그럴꺼믄 애초에 이짝으로 쳐들어오질..... 않았겄쥬.”“그러니까......”“먄헌디유. 우덜도 그러고, 라스알게티 저 넘 들도 피를 엔간치 흘렸슈. 그게...... 뭔 말인지 아요? 이제 우리 사이엔...... 악밖에 안 남았다는 거요. 선택지는 딱 둘이요. 우덜이 싹다 디지든가! 쟈들이 싹다 디지든가!” 답답이는 주우의 말을 중단시키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의 눈에는 광기에 가까운 증오가 넘실거렸다. 그는 탁자를 탕탕 두드려가며 자신의 열변을 이어갔고, 답답이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라스알게티 넘덜한테 무너지구 나서....., 우덜도 많은 생각을 혔슈, 그중에는 ‘우덜이 쟈들헌티 무너진 거는 우리의 실력이 모질라서 그런것도 없지 않아 있으니께, 쟈들헌티 독립헐러믄 우덜두...... 배워야 한다구. 쟈들에게서 배울 건 배우자.’라고 하는 넘덜도 있었슈. 그렇게 쟈들헌티 간넘덜이...... 지금 뭐허고 있는지 아쇼? 아조 앞장을 서가지구 우리 삼민덜 등골을 빼묵고 있슈...... 저 이 씨벌럼들이...... 동족의 피를...... 말이여 피를! 빨아 묵고 있다...... 이거여.”“.......”“우린 말여...... 라스알게티 넘덜도 넘덜이지만...... 동족 팔아 배 채우는 넘덜은...... 가만 못 둬유. 혁명이 끝나면 폭력이 없을거 같쥬? 아녀...... 부역자 넘덜 모가지를 다 짤라가지구 설라무네...... 라스알하르게타 앞에 걸어 둘겨. 한넘도 안남기구 말여.” Channel 2. 아이리스 말을 마친 주우는 격한 감정을 달래려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제가 얼마나 안일하게 이 일에 접근을 하려 들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우라는 사람의 서글서글한 모습만 보느라 10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을지, 그리고 그 길에는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희생됐을지.......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그들에게 ‘평화로운 혁명’이라는건...... 단어의 무의미한 나열로 보였겠지요. 저는 로키군을 바라봤습니다만, 로키군은 주우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제게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제게 ‘되지도 않는 일에 더는 힘을 쓰지 말자.’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어요. “미안했어요. 우리가...... 당신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잘난 듯이 ‘평화’라는 단어를 운운했던거 같아요.”“알았음 됐슈.”“근데, 몰라서 실수를 저지른 거였다면...... 알면 되지 않겠어요?”“뭔 소리요?”“제가 당신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평화를 운운한 게 문제라고 치자고요...... 그럼 반대로, 당신 말만 듣고 포기한다면, 그것 역시 당신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멋대로 선택한 거와 다를 바가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 말에 로키군과 주우는 말 없이 제가 한 말을 곱씹었습니다. 그들은 제 말에 일견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감정적으론 제 말에 동의를 하진 않는...... 애매한 상황이었어요. 여기에서 그들의 마음에 변화를 주려면..... 저는 좀 더 과감한 판단을 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요. 어떤 판단을 해야 하나고요? “어......어? 뭐야?”“이거 받아요.”“야, 뭐하는 거야?”“.......”“어차피 우린 여기에 적혀있는 글자가 뭔지도 몰라요. 우리에겐 필요없는 물건이지만, 당신에겐 정말로 필요한 물건이겠죠. 받아요.”“어...... 뭐냐...... 그류. 잘 받을게유.”“우린 이제 남은 패가 없어요. 이걸로 당신은 우릴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해도 무방하다구요. 이걸 당신에게 주는 이유는, 당신이 그만큼 우리에게 신뢰를 보여주었으면 하는게 있어서 그런거에요. 이봐요 주우 당신.”“잉..... 말 허슈.”“지금 내가 ‘평화로운 혁명’을 운운한건 잘못했어요. 거기 적혀져 있는 혁명의 날자가 며칠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간동안...... 여기에서 당신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해줄 순 있나요? 그편이 더 나을걸요? 만약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문서를 주고 난 다음, 이곳을 나가서 라스알하르게타 관청에 당신들을 고발할 지도 모르잖아요.”“건 틀린 말이 아니긴 헌디...... 나가 당신들을 여기서 싹다...... 죽여 버리는 가짓수도 있지 않어유?” 주우의 말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됩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건넌 다리에요. 뒤를 돌아보는건 의미가 없습니다. 앞을 바라보고, 손을 뻗어 잡아내야만 해요. “그럴수도 있겠지만...... 괜찮겠어요? 여기 나와 로키군은 호락호락하게 죽어줄까요? 당신들은 진짜 적인 라스알하게를 공격하기 전에 싸워줄 사람 한명 한명이 소중할 텐데요?” 제 말에 로키군은 주우 몰래 저와 눈을 마주쳤습니다. 그의 표정은....... 뭐랄까 매우 묘해보였어요. 아마 그로서는 제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몰아세우는 것이 낯설어 보였을 거에요. 뭐...... 저 스스로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몇 달 전의 제가 지금의 저를 본다면, ‘이거 껍데기만 똑같지 전혀 다른 사람 같은데?’라고 생각했을 지도 몰라요. 맞아요. 저는 바뀌었습니다. 그게 긍정적으로 바뀐 건지, 부정적으로 바뀐건지 확실하진 않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 제 액션에 주우는 물론이고 로키군도 당혹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는 거에요. “.......끙.” 주우는 제 말에 더는 반박을 못하겠는지 그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로키군은 그의 눈을 피해..... 제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습니다. 하하...... 그에게 칭찬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우리 둘이서 은밀하게 서로를 격려하는 동안, 주우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결국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 했습니다. 뭐 이야기 하는 내용은 결국...... “일단...... 잘 들었어유....... 그려, 샥시가 맞는 말 혔슈. 근디...... 지두 입장은 있어유. 지 혼자서 띡허구 결정할 이야근 아녀유. 그럼...... 오늘 회의에 가서 성제들헌티 당신 덜 입장을 전하겄슈. 처우는...... 그 이후에 결정하는 게 워뗘유?” 타협의 탈을 쓴 백기투항이었죠.
갑과을작성일 2018-01-03추천 0
-
[짱공일기장] 두가지 인생 - 49
Channel 1. 로키 1624년 4월 20일 어제 이야기했던 대로, 우리 둘은 날이 밝은 대로 집을 나와 페어게이트로 갔다. 어제 답답이는 현지인들은 대충 알고 있으니, 땅값이 오를대로 올랐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안전가옥에 오기 전에 복덕방 주인에게 알아본 바, 현지인들 조차도 모를 극비 소식이란게 확인되면서 답답이도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내가 알아본 정보에도 허점은 있다. 우리의 안전가옥이 있는 로딕피크는 페어게이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그래도 거리가 없는건 아니거든. 진짜배기 정보는 아마 페어게이트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에 대해서 답답이에게 설명을 했고, 답답이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 준비기간이니 시세차익은 확실히 얻을 수 있을거라고 이해했다. “로키군.”“응? 왜?”“미안한데, 니캅 좀 꺼내줄 수 있어요? 햇볕이 너무 따가워요.” 나는 가방을 뒤져 니캅을 꺼내 주었고, 답답이는 그것을 허겁지겁 달았다. 그 모습을 보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르짐 산맥의 아래에서 산비를 맞으며 살던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던 곳을 떠나, 풍토가 판이하게 다른 이곳 사막에서 정착을 하려니 오죽 고되겠는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간의 3개월은 답답이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고마워요.”“됐어. 그런 거에 일일이 고마워하지 마.”“알았어요...... 아, 벌써 다 왔네요.”“그러게, 생각보다 일찍 왔는걸?”“그런데 이곳 입구는 괜찮은 거에요? 저걸 저대로 두면 꽤나 위험할 것 같은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덧 페어게이트의 입구에 다다랐다. 답답이가 언급한대로, 이곳의 입구는 꽤나 특이한데, 걸쇠도 없는 두 개의 커다란 문이 기둥처럼 마을 입구에 덩그러니 서있거든. 한때 이곳은 프로하기온으로 들어오는 관문 마을 중에 하나였는데, 아주 오래전 대륙 전체를 휩쓸었던 전쟁의 여파로 문이 막고 있던 성벽 일대가 완전히 박살나버렸다. 사실, 전쟁이 남기고간 흔적은 이것뿐만이 아니라 프로하기온 곳곳에 남아있다. 일부 개발론자들은 이 흔적을 치워버려야 하는거 아니냐고, 왜 이런 노른자위 땅에 흉물스러운 것들을 남겨 두냐고 묻지만, ‘다시는 그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후대가 할 수 있는 건 잊지 않는 것이다.’라는게 대다수 사람들의 중론이다. 페어게이트의 흉물은 그렇게 남겨졌고, 마을의 상징이 된 것이다. “으음,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는 말이군요.”“뭐 비슷한 셈이지.”“그런 깊은 생각을 가진 도시에서 재개발을 하는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거 같은데요?”“뭐...... 내가 결정을 내린게 아니라서 함부로 말하긴 어렵겠지만, 역사는 역사고 돈은 돈이지.” 답답이는 내 말에 웃으면서 내 옆구리를 때렸다. ‘요즘은 농담도 제법 할 줄 아는데요?’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나는 옆구리를 문지르며 답답이와 페어게이트로 들어왔다. 제법 퇴락한 건물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딱 봐도 발로 툭 치면 무너지게 생겼는데요?”“행여라도 진짜 그렇게 하지마라.”“에이, 메타포죠. 정말 제가 툭 친다고 무너지기야 하겠어요?”“내 옆구리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는군.”“이 사람이 정말......” 나는 답답이가 내 옆구리를 한 번 더 때리기 전에, 걸음을 빨리하여 근처의 복덕방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답답이의 발걸음이 들려왔다. 모래바닥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땅을 디디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라면, 녀석이 보통 화가 난게 아닌 듯 했다. 왜인지 모를 웃음이 나면서, 녀석을 좀 더 약올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잡히면 녀석의 분노가 풀릴 때 까지 나를 쥐여박을 것 같아서 나는 좀 더 걸음을 재촉했다. “어여 와....... 아이고, 부부가 금슬이 좋아뵈는구먼.”“이게 금슬이 좋은 걸로 보이시나보군요.” 내 퉁명스러운 대꾸에 복덕방 할머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법 한 것이, 꼬리 빠지게 도망치는 나와, 답답이가 이를 악물고 쫒아오는 답답이의 더러운 추격전이 문설주를 코앞에 두고 기어코 추접스러운 결말로 끝이 나던 차였거든 답답이는 내 머리채를 잡고는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정신없이 찔러대다가, 할머니를 발견하고는 나를 놓아주었다. “젊은께로 그런 장난질도 되는거여. 우리 영감쟁이는 그리 허다가는 붕대 감구 관 짝에 들어갈 판이유.”“뭐시여? 내가 임자보다 하루는 더 살고 갈라니께 나대지좀 마씨요.”“그러슈 나보다 세끼 더 자시고 오슈, 오믄 저승처사 옆에서 때깔 검사 할거유.” 할머니의 말에 구석에서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발끈했고, 이내 둘은 티격태격 다투기 시작했다. 우리의 장난이 뜻하지 않게 두 노인들의 다툼으로 번져나가자, 오히려 우리가 뻘쭘해져서 서로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 그래도 노인이라 체력이 얼마 없었는지 둘은 세 마디 이상 더 하지 못하고 숨만 씩씩거렸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우리를 보곤, 아예 우리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다는 걸 깨닫고는 미안해 했다. “젊은 아가들 앞에서 노인이 추태를 부려버렸구먼. 이래서 늙으면 디져야댜. 근데 임자들은 무슨 일로 온거여?”“집을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할아버지도 숨을 고르고 나서는, 당신도 적적했는지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슥 보더니 ‘아따 늙으니 턱주가리에 구멍 뚫렸는 갑소?’라며 적삼을 꺼내 그의 턱을 닦아주었다. 할아버지는 ‘아따 샥시가 안보이자네!’라며 짜증이 잔뜩 묻은 얼굴로 할머니의 적삼을 뿌리쳤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챙겨줘도 지랄이네.’라고 꿍얼거렸다. 답답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쿡하고 웃어버렸다. 할아버지는 눈이 가늘어졌다. “아따 처자가 허버 고와브요. 옛날 생각나는구먼. 이 할마씨도 젊을 때는 제법었제라.”“기제, 나가 남편하나 잘못만나서 신세 조졌슈.” 서로를 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이 또 다른 싸움이 발발할까 싶어, 나는 재빨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근처에 싼 데 있나 싶어서요.”“아아, 젊은 것들 앞에서 또 쪽실릴 뻔 했구마잉. 싼디야 쌔고 쌨제, 그란디...... 싼디를 찾을라믄 발품을 쪼깐 팔아야 쓸거신디, 괜잖을라나 싶소.”“저희야 상관없어요. 할아버님께서 몸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돌아보죠 뭐.”“아따, 괜자능께 걱정마씨요. 그라고 내가 늙어도 제법 깡깡허요.” Channel 2. 아이리스 예상을 못한바는 아니었지만, ‘늙어도 제법 단단하다.’는 할아버님의 말씀은 희망사항이었다는 게 밝혀진 뒤로, 로키군은 할아버님을 업고 페어게이트 이곳저곳을 돌아야만 했습니다. 저는 로키군의 뒤에 붙어서, 할아버님의 발을 받쳐드리며 뒤를 따랐어요. “아따 낭군 고생시켜서 미안시럽구마잉.”“괜찮아요. 오늘 고생 좀 해야 하거든요.”“양성평등이 하루속히 이 나라와 사회에 자리 잡아야 할 텐데 말이지.” 저는 로키군의 투덜거리는 말을 짐짓 무시하고, 할아버님의 흐트러진 케피에를 바로잡아드렸습니다. 할아버님은 제 손길에 씩 웃으며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이런 참한 샥시랑 함께 거시기 해브는거 보믄 낭군이 제법 복받았는 갑소.”“그렇죠? 제 서방 들으라구 다시 한 번 크게 말씀해 주실 수 있어요?”“압니다. 알아요. 제겐 정말 과분한 여자인걸요.” 할아버님은 로키군의 어께를 툭툭 두드려 주시곤 오른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셨어요. “쩌그만 가면, 오늘 마지막 코스닝께 쪼깐만 더 힘쓰면 되네.”“거 듣던 중 가장 반가운 말이네요.”“근디, 각시랑 살건디 너무 싼 집만 알아보는 거 아닝가? 사람이 돈이 읎어도 가오는 있어야제.”“에이, 괜찮아요. 열심히 돈 모아서 다음 집은 더 큰 데로 가면 되죠. 뭘.”“아따, 자네 서방은 전생에 나라도 구했는 갑소. 혹시나 서방이 섭섭하게 하면, 나한티 오소, 내 잘해 줄랑께.” 할아버님은 기운을 차리셨는지 낄낄 거리며 로키군의 등을 두드리셨습니다. 로키군은 대답대신 할아버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앞에는 이제껏 봐온 집중에서도 가장 허름한 가옥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쪼깐 거시기 헌디, 흙 바르고 하면 살만 할 거시여.”“음..... 저기에 사람이 살긴 살아요?”“살제라. 아야, 인자 내려봐라잉. 이보! 연가 있는가?”“예. 어르신이 무슨 일이유?” 할아버님께서 로키군의 등에 내려서는 뒷짐을 지시고 사람을 불렀습니다. 할아버님의 말에 집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런 허름한 집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리라곤 전혀 예상을 못했답니다. 그곳에는 딱 보아도 궁기가 흐르는 부부와, 꾀죄죄한 차림의 아이들이 열 댓 명이 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자네 근자에 집 내놓지 않았능가, 거시기 허러 왔네.”“아이구 안녕하셔유. 연흥부여유.”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남자는 로키군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이름을 보니, 라스알하게 출신 사람인 모양이에요. 이야기가 옆으로 새나가는 것 같지만, 라스알하게 인은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가난한 처지에 놓여있는 것 같아요. 그점은 참 마음이 아픈 것 같습니다. “전 산냐신이라고 합니다.”“집보러 오셨담서유? 저희가 라스알하게로 돌아갈라는디, 돈이 부족혀서...... 남은 이집이라도 처분혀야 차비라도 나올 참이네유...... 찾아와 주셔서 감사하네유.”“아니, 저는 그냥 일단 보기만.......”“아 이잉, 일단 들어와유.”“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일행들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밖에서 본 만큼이나 안쪽도 제법 낡아있었어요. 밖에서 본 구멍은 안에서 종이로 덕지덕지 막아놓았고, 방문마다 모서리가 깨지지 않은 곳이 없었어요. 흙집이라서 그러겠거니 해도 좀 심하다 싶긴 했지요.제가 집안을 둘러보는 동안, 로키군도 다른 곳에서 집을 둘러보고 있었어요. 고개를 흘끗 돌려보니, 그의 표정도 썩 밝아보이진 않았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산단 말인가?’라는 경악의 감정이 고스란이 드러나 있었답니다. “아따, 허버 꼼꼼시럽게 보는구마잉 내가 시방도 말했듯이, 흙 바르면 살만 하당께라!”“걱정 마셔유, 구멍난디는 지들이 이사가믄서 다 메꿔 놀게유.”“음...... 그게요.”“혹시, 이 근처엔 적당한 진흙 밭이 있습니까?”“진흙밭? 그건 뭐 땀시 그렇소?”“이사 가려면 그 자체로도 바쁠 텐데 흙 바르는 건 저희가 하려고요.”“이잉?”“네? 여보 잠깐만.” 로키군의 말에 저 뿐 만 아니라, 두 사람들의 눈도 휘둥그레졌습니다. 잠깐만요, 이런 다 낡은 집을 산다고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습니다. 근데 그런 생각을 한건 저만이 아니었나 봅니다. 할아버님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두 눈을 찡그리셨고, 흥부라는 분은 멍해져서 입을 떡 벌리셨어요. 딱 보아도 그들 역시 이 집이 나갈거라곤 생각을 하지 못했던 모양이에요. 저는 일단 로키군을 데리고 그들이 우리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로키군.”“이 집을 사자는 거지 뭐.”“이런 다 낡은 집을 사자고요? 제정신이에요?”“집이야 고치면 그만이지.”“아니...... 좋아요. 이 집을 사야하는데 로키군이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대체 이런 다 낡은 집을 왜 사자고 하는거에요?” 정말 말도 안 되는 그의 판단에 화가 나려고 했지만, 저는 화를 표출하기에 앞서 잠깐 심호흡을 했습니다. ‘잠깐 멈춤’이라고 하지요? 감정이 격해질 때는 잠깐의 심호흡을 함으로써 마음을 누그러뜨릴 여유를 가지는 것 말이에요. 물론 그렇게 큰 효과가 나오는건 아니겠지만, 최소한 한 마디의 말을 들어줄 여유만 되더라도 충분하다는게 ‘잠깐 멈춤’기법의 핵심이라고 해요. 확실히 심호흡을 하고나니, 화가 누그러든건 아니지만, 그의 말 한마디의 변명이라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정도는 들더군요. “이 집이 쓰레기 같은 건 나도 알아.”“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요?”“근데, 집의 위치가 제법 괜찮거든. 여긴 이제까지 봐온 곳 중에서 가장 페어게이트의 중심과 가까운 곳이라고. 너도 오면서 봤을거 아니야?”“중심이요?”“그래, 재개발을 한다고 하면, 중심지역에 뭐가 들어서겠어? 여기만큼 땅값의 상승폭이 큰 데를 찾기 어려울 것 같단 말이야.”“.......” ‘잠깐 멈춤’이 확실히 효과가 있는 모양이에요. 그의 말 한 마디를 듣기까지는 많은 인내심을 요구했지만, 한마디가 두 마디가 되는데, 두 마디가 세 마디가 되는 데는 처음보다는 인내심의 방지턱이 많이 낮아지더라고요.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저는 그의 말에 어느정도 설득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단......말이죠?”“거기에, 저 사람들이 뭐랬어? 이사 갈 정도 자금만 있으면 감사하겠다고 하잖아. 이런 노른자위 땅을 그 정도 돈으로 퉁친다면 개발 보상금만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득이 꽤 나갈거라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보이는게 많아진 걸까요? 고개를 돌려보니 할아버님과 흥부씨가 저희를 흘끗흘끗 바라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좋아요...... 로키군의 말대로라면 정말 이사비용만으로도 충분히 큰 이익을 볼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Channel 1. 로키 “겁나게 좋은 일 하는거여. 분명 복으로 돌아올 거시네.”“그렇게 되기를 바래야겠지요.” 답답이의 동의를 받고, 우리는 계약서를 만들기 위해 흥부라는 사람과 함께 복덕방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까봐서 서둘러서 계약서 종이를 가지고 왔고, 흥부라는 자도 품안에서 인감도장을 꺼냈다. 우리는 노인이 계약서를 완성하는 것을 꼼꼼하게 지켜보았다. “자, 보시라고들, 매매자는 연흥부, 매수자는 산냐신과 이슬란. 아따 둘이 공동명의로 하려나 보구마잉. 계약금은 40파운드 걸어놓고, 잔금 379파운드는 매매자 이사 2주 전이니까...... 아야, 니 언제 이사가냐?”“5월 26일이유.”“그려? 그럼 5월 12일에 치르는 걸로 하세. 괜잖은가?”“아 뭐 저희는 괜찮은거 같아요.”“지도 그러구먼유.”“자 그럼 도장들 찍어블자고.” 흥부는 자신이 꺼내놓은 도장을 찍었지만, 우리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일단 도장 자체가 필요없는 삶을 살아왔기도 했지만, 가짜신분으로 사는 처지인지라 당당하게 관청으로 가서 인감도장을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답답이도 그걸 알고 나를 쳐다봤다. “저기 근데요 어르신.”“잉? 말 혀.”“저희가 인감도장을 미처 만들지를 못했는데. 혹시 지장으로 대체 가능할까요?”“뭐...... 인감이 젤로 씨긴 한디. 지장도 받아는 주제. 그래도 신원은 확인을 해야 쓰니까, 사인하고 그 여피다가 지장을 찍으소.”“네....... 여기 찍었습니다.”“잉. 잘혔네.” 할아버지는 두 부의 계약서를 나누어 하나는 나와 답답이에게, 다른 하나는 흥부의 손에 쥐어주었다. 흥부는 내게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와 악수를 나눈 뒤에, 계약금으로 지갑에서 50파운드 지폐를 꺼냈다. 내가 그에게 지폐를 내밀자, 흥부는 적잖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쩌그...... 거스름돈을 드릴 수가 없구만유.”“네?”“미안한데, 딱 40파운드로다가 주실 수는 없는감유?” 거스름돈 10파운드를 줄 수 없다는 게 무슨 말인가하고 그 속사정을 물어보려는 찰나에, 답답이가 내 옆구리를 세게 꼬집었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하면서 별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옆구리를 문지르며 그 고통을 소리 없이 삭이는 동안 답답이는 내 손아귀의 50파운드를 홱 뺏고는 자기 지갑에서 10파운드 지폐 4장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러면 딱 맞죠?”“맞네유. 감사혀유.” 흥부는 그녀에게 허리숙여 인사를 했고, 그녀는 그의 손을 맞잡는 것으로 답례를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니, 그녀가 왜 내 말을 틀어막기 위해 옆구리를 꼬집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에겐 50파운드가 흔한 돈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흥부와 같은 빈자에게는 10파운드마저 만지기 힘들 정도로 큰돈이었던 것이다. 내가 무심코 그에게 던질 뻔한 그 질문은, 그에게 큰 상처가 될 만한 이야기였던 거지. “그걸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네요.” 복덕방을 나와 집으로 가던 도중에, 내가 이해한 바를 설명하니, 답답이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했다. “잘 생긴 사람한테는 못생겼다고 놀려도 되요. 하지만, 못생긴 사람에겐, 못생겼다는 말은 꺼내면 안돼요.”“정말 못생겼으니까?”“그런 셈이죠. 사람에겐 누구나 ‘남들에겐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의 상처가 있게 마련이에요.”“‘남들에겐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의 상처’라...... 너도 그런게 있나?”“있죠. 당연히. 아마 그건 로키군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하는데요.”“글쎄,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 그걸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역린이라고 알아요? 라스알하게에선 용이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는 좋은 동물로 여겨진대요. 그런데 그 용에게는 자신의 몸에 난 비늘들과 반대방향으로 돋아난 단 하나의 비늘이 있다고 하더라고요.”“아, 그 이야긴 들어본 거 같아. 그걸 건드리면 용이 건드린 사람을 바로 물어 죽여 버린다고 했던거 같은데.”“물론 사람사이에선 칼부림이 나진 않겠지만...... 확실히 적이 되겠죠.”“그런게 너도 가지고 있다 이거지?”“그럼요.”“의외네......”“궁금하다고 무턱대고 찾아보려고 하진 마요. 난 당신의 적이 되어봤자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으니까요. 그럼 나만 너무 손해 보는거잖아.” 답답이가 툴툴거리는 얼굴로 사구의 모래를 퍽하고 걷어찼다. 모래는 그녀의 발길질에 공중위로 솟구쳤다가. 그대로 바람을 타고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산 능선을 넘는 구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람 마음이란건 알면 알수록 잘 모르겠어. 친소관계에 따라 열어가는 폭이 달라진다는 것, 친하면 친할수록 그 폭과 깊이가 깊어진다는건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남들에겐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거잖아.”“더 이해하기 어려운거 알려드려요?”“그게 뭔데?” Channel 2. 아이리스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이한테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오히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경우도 있어요.”“진짜로?”“그럼요.”“나 참나. 뭐 그런게 다 있냐?”“그러니까 마음이죠.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마음이라고요.” 제 말을 듣는 로키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로키군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인식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도 하지만, 로키군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감정’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거든요. “완전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데.”“하지만 어느 정도 근거는 있지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은 아마 높은 확률로 또 만날 가능성이 낮잖아요.”“그렇지. 대륙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까.”“사람이 가장 간직하기 괴로운 게 바로 ‘비밀’이래요. 남들이 모르는 걸 혼자서만 알고 있는 건, 처음에는 짜릿함을 주지만, 그 짜릿함만큼 그걸 남들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동시에 작용하거든요. 쉽게 말하면 ‘잘난 체’를 하고 싶은 거겠죠?”“그래서?”“비밀은 말하고 싶은데, 그건 남들에게 알려주고 싶지는 않고......엄청난 딜레마죠.” 저는 잠깐 말을 멈추고 로키군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람 탓에 로키군의 케피에에는 모래가 제법 수북히 쌓였지만, 제 말을 듣는데 정신이 팔린 그는 흘러내린 모래가 이마에 덕지덕지 붙는지도 모르게 제 말에 빠져있었어요. 집중하는 모습은 섹시하지만, 너무 몰두하면 보기 좀 그래요. 저는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묻은 모래를 조심스럽게 털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로키군은 집중이 흐트러진 것이 기분 나빴는지 이맛살을 찌푸리며 제 손을 쳐내더니 모래를 벅벅 문질러 닦아냈어요, “이런 것 쯤은 나도 알아서 해. 날 너무 애기 취급하는 거 같은데.”“칼을 지키는 칼집이라면 이 정돈 기본이죠.”“그나저나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자고...... 잠깐만.” 로키군은 페어게이트 입구에 다다를 때 쯤, 셔벗 좌판을 발견하곤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좌판의 할머니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고 돌아온 그의 손에는 먹음직스러운 셔벗 두 개가 들려있었어요. “뇌물치고는 너무 저렴한 거 아니에요?”“...... 닥치고 주는 대로 처먹어.”“네.” 이맛살을 찌푸리는 그의 미간이 제대로 내 천자를 그리는 것이, 정말 그가 화가 난 모양이에요. 선을 넘는다고 하지요? 저는 실수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곤 셔벗을 스푼 가득히 담아 우걱우걱 먹었습니다. 입안으로 셔벗의 달콤한 맛이 샘물처럼 왈칵 솟아나왔습니다. “그래서 말해봐, 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을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겐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지 말이야.”“가장 가까운 사람은, 가장 자주 보는 사람이기도 해요.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알려준 사람과 그 다음날, 혹은 몇 시간 뒤에 또 본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어색하겠어요?”“음.......”“반대로,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은 만남 이후에 또 다시 만남을 가지기에는 많은 노력과 약속이 필요하겠죠. 즉, 안하면 그만이에요.”“또 볼일이 없으니, 비밀을 말해도 뒤탈이 없을거라 이건가?”“그렇죠.”“음......” 로키군은 제 말을 다 듣고 난 뒤에 말없이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 로키군의 모습은 프로하기온에 온 뒤로 종종 본 적이 있어요. 라스알게티에서의 로키군은 ‘위에서 지시한 대로만 하면 될 뿐, 지시하는 것에 어떠한 의문도 회의도 가져선 안 된다.’라는 입장이었다면, 프로하기온에서의 로키군은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앞두면 깊은 생각에 잠겨들어가더군요. 앞서 셔벗 때처럼, 로키군에게도 넘지 말아야 할선이 있다면, 지금의 로키군에게 말을 걸어보아야 별다른 소득을 거둘 수 없다는 것, 이 두 가지를 지난 석 달 동안 로키군과 함께 하면서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생각에 잠긴 동안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그를 지켜보며 함께 걷는 것입니다. “일견 이해는 되는구먼. 매우 이기적이지만, 그만큼 자연스럽다고 생각해.”“맞아요. 자연스럽다는 게 반드시 옳은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요.”
갑과을작성일 2017-07-29추천 0
-
[짱공일기장] 두가지 인생 - 37
Channel 1. 로키 1624년 1월 10일 녀석을 내 옆에 앉혀놓고 계속해서 막주를 마시며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려보았지만, 답답이 녀석은 도통 잠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장사가 끝났다는 주모의 말에 답답이를 들쳐매고 좌판을 나서야만 했다.1월의 찬바람에 맞서 싸우며 간신히 지부에 도착하니 괘종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허허, 장장 8시간을 술로 보냈다니........ 펜릴이 살아있었을 때도 이렇게 마신 적은 손에 꼽는데 오랜만에 위업을 달성한 것 같아 정말 기분이 더러웠다. 뭐 이쯤 되면 지부에는 깨어있는 사람이 없는 관계로, 나는 별수 없이 답답이 녀석을 내 방에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침대는 하나 뿐이니, 손님에게 내어주는 수밖에....... 아무리 감정이 없어도, 손님에게 바닥에 자라고 할 정도로 박정하지는 않으니까....... 녀석에게 침대를 내어주니, 딱히 내 몸 하나 뉘일데가 없어, 나는 결국 테이블에 엎드려 선잠을 자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몸이 불편할 때 마다 뒤척이고, 뒤척일 때 마다 깨는 매우 불편한 시간을 한참동안 보내다가....... 이대로 잠을 자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걸 인정하고서 잠에 드는 걸 완전히 포기했을 때는 시계가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래서....... 난 술이 참 싫다. 이대로 녀석이 자는 이 방안에 홀로 깨어있는 것도 참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싶어, 나는 녀석이 깨지 않도록 소리를 죽여 가며 방을 나섰다. 고작 2시간 사이에 복도의 공기가 참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래도 내가 지부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약간의 온기가 들떠있는 듯 했는데, 5시의 복도공기는 온기 조각 하나 없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옷깃 사이로 찬바람이 새어 들어왔고, 그것은 내 몸을 송곳마냥 파고들어 기분 나쁜 한기의 궤적을 남겼다. “어라? 일찍 일어나셨네요. 로키씨?”“아.......네. 잘 주무셨습니까?” 응접실에 가니 아주머니가 졸린 눈을 비비며 응접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녀는 처음에는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내게 다가왔다. “어제 아이리스가 로키씨와 술 한 잔 한다고 했는데........”“아, 걘 지금 제 방에서 자고 있습니다. 어제 술을 진탕 먹어대더니 그만........” 아주머니는 말이 없었지만, 나를 쳐다보는 눈가의 주름이........ 내게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그 메시지는...... “뭘 생각하시든 그건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군요.”“누가 뭐라고 했나요?”“그건 아니긴 한데.......”“이런 짐승 같은......”“네?”“혼잣말이에요.” 그녀는 내게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뭐라고 속살거리다가 나의 추궁에 그대로 얼버무리고는 총총걸음으로 부엌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가버리자 이 큰 응접실에는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뭐....... 어찌 됐든 이곳에는 나뿐이니 이제는 남 눈치 안보고 내 멋대로 해도 된다는 이야기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남들의 시선이 없다고 해서 일탈적이면서 변태적인 행위를 한다거나 하는 그런 성벽은 없던 지라, 나는 응접실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응접실의 벽에는 빈 틈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액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액자에는 여러 가지 그림들이 들어있는데, ‘우리’의 요원들이 의뢰주와 함께 서 있다던지, 아니면 ‘우리’의 요원들이 단체로 서 있는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이 그림들은 그 자체로도 여러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의뢰주에게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하고 어떤 일을 해왔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종의 홍보물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요원들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들을 상기시키거나, 교육을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림은 사건을 담고 있고, 사건은 망각을 덧입으면서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역사’에 어느정도 참여적인 입장이었기에, 몇몇 액자에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여기 오른쪽 위편에 걸려있는 그림에는 나와 펜릴 그리고 찰리의 모습이 담겨있다. 펜릴과 찰리는 반파된 마차 앞에서 해맑은 얼굴로 포즈를 잡으며 서 있고, 나는 그 둘과 떨어져서 무언가를 마시고 있다. 아마...... 이게 내 기억이 맞다면, 이 그림은 한 2년 전쯤에 있었던 의뢰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스트민스터 교구의 수사들 몇을 처리하는 의뢰였었는데, 그땐 나와 펜릴이 팀장으로서 처음 나서는...... 일종의 데뷔전이었을 것이다. 그 의뢰에서 하이라이트라면, 단연코 다리 위를 지나는 마차를 다리째로 폭파시켜서 빼돌리는 것이었다. 와 진짜 그런 정신 나간 짓거리를 정말로 해낼 줄이야. 그때 나와 펜릴은 팀원들을 앉혀놓고 누가 마차위에 올라탈 것인지를 놓고 동전던지기 내기를 했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펜릴의 동전이 가진 비밀을 몰랐으니 난 홀라당 당할 수밖에 없었다........ 참 펜릴은 그 시절에도 지독한 새끼였지. 그리고 저기 왼쪽 아래에 걸려있는 그림에는 토라가 완전히 탈진해버린 채로 타깃의 시신 옆에서 주저앉아있었고, 나는 그런 녀석을 한심하단 눈길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 그래, 이 의뢰도 기억이 나는군. 빈데미아트릭스라고 만년설로 유명한 고장에 은신하고 있는 사이비 종교와 관련된 인물 하나를 처리해 달라는 아주 시시껄렁한 의뢰였다. IATP를 수료한 신규요원들의 업무능력 평가를 겸한 것이었지.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토라는 IATP를 갓 수료한 초짜였던지라 이런 별 것 아닌 의뢰였음에도 꽤나 허둥지둥 댔었다. 나는 그때 당시에 ‘감시관’으로서 녀석을 감시 · 평가하는 입장이었는데 녀석이 너무 허덕거리는 것 같길래, 의뢰 말미에 녀석을 슬쩍 도와주었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건 들통이 나버렸고, 나는 감봉 3개월의 징계를, 그리고 녀석은 내근직으로 행정내신을 당하는 걸로 마무리되었었다. 어찌보면 둘 다에게는 뼈아픈 기억이 아닐 수 없지....... 자존심 강한 토라 녀석은 그 사건으로 나에게 완전히 삐쳐버려서 한동안은 말도 안 걸었었다. 이 외에도 상당수의 액자 속에는, 나라는 인물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개입이 되어있었다. 어찌 보면 나도 ‘우리’의 라스알게티 지부에 어느 정도 지분이 있다는 거겠지? 하지만, 그보다 더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액자들이 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그 액자들의 상당수는....... 이름 모를 ‘선배’들이 자신들의 위업을 기념하며 서 있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의 선배들이 쌓아온 토양위에 지금의 내 세대가 있는 것이고, 우리 세대 역시 미래를 위한 토양이 될 것이다. 먼 미래에, 나라는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나의 흔적은 그림으로서 지부에 남게 될 것이다. 액자를 보며 내 머릿속의 수다쟁이가 떠드는 걸 가만히 두고 있는 차에, 이번에는 지부장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늙으면 새벽잠이 없어진다는 말이 사실인걸까? 그의 손에는 조간신문이 들려있었다. “내 눈이 잘못 된 건가? 이 시간에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슬픈 사연이 있습니다.”“그래? 안 궁금해 해도 서운해 하지 않을 거지?” 내가 대답이 없자, 지부장은 나에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낄낄 웃으며 응접실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한 부 줄까? 여러 개 챙겨왔는데.”“아닙니다.”“그래 그럴 줄 알고 한 부만 챙겨왔어.”“여러 개 챙겨 오셨다면서요.”“뻥이지.”“아 진짜 쫌.......”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1월 10일 눈을 뜨자마자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초원위에 드리운 푸른 하늘과 구름 대신 나무판자가 정교하게 짜맞춰진 천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누워있던 것은 풀밭이 아닌 이불이었고요. 저는 기억이 잘려나간 뒤에 찾아오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한참동안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마치 발이 닿지 않는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현실 감각을 잃고 공중에 동동 떠다니던 제가 실낱같게나마 정신 줄을 붙잡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입김 덕분이었습니다. 벌어진 입에서 나온 뜨거운 숨은 1월 냉골방 속의 공기와 만나 언어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형태로 제 눈앞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랐습니다. 하지만 그 입김도 차디찬 공기 속에 이내 보이지 않는 무의 영역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무형의 탄생, 확장 그리고 쇠퇴와 소멸의 과정을 지켜보다보니, 혼란 속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제 정신이 시나브로 두 땅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실 감각을 잃은 동안 저는 한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혹은 ‘대관절 내가 무슨 일을 겪은 거지?’라는 도저히 정답을 내릴 수 없는 곤란한 난제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현실 감각이 땅에 발을 디디면서 하나의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꿈....... 이었구나.” 제가 내린 결론에 부연을 하려는 것일까요? 천장을 보던 제 눈가가 별안간 뿌옇게 흐려졌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시야를 가렸나 궁금하여 그쪽을 바라보니, 한 줄기 햇살이 성에가 잔뜩 끼어있는 창문에 아스라이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밤은 지났고, 이 땅에 아침이 찾아온 것입니다. 현실에 땅을 디디게 되었지만, 제가 모르는 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마지막으로 내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허둥지둥하며 종종걸음을 치고 싶다는 생각은 털끝만치도 들지 않았습니다. 아주머니가 제게 잔소리를 한 바가지를 쏟아 부을지도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아무려면 어때?’라는 대담한 생각만이 제 머릿속에 슬금슬금 피어올랐습니다. 아니, 하다못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싶지 않았다는 게 정확했겠지요. 어쨌거나, 현실은 현실이기에, 저는 한참동안 이불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 거린 끝에 느릿느릿 침대에서 나와서 흐트러진 이불을 깨끗이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누군가가 이 방에 갑작스럽게 뛰어 들어와도 ‘방금 나가려고 했어요.’라고 변명의 말을 할 수 있겠죠? 물론........ 그 말을 믿어줄 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걸요.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생각해보면, 눈을 뜬 시점부터, 제가 이렇게 헛웃음을 터뜨리기 까지 보여준 일련의 사고흐름은........ 평소의 저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나태’하고 ‘무책임’한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곳에’있는 저는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런 생각을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는 게 참 재미있지 않나요? 저는 이불에서 기어 나올 때 만큼이나 느릿느릿하게 일어나서 다시 한 번 거울 앞에서 옷을 천천이 벗어보았습니다. 여전히 저는 도로시씨의 잘린 목을 들고 기뻐서 춤을 추고 있었지요. 제 생각의 변화, 그리고 제 행동의 변화는....... 아마 이 백도를 수원지 삼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여전히 나쁜 년이네 나.” 타브리스씨와의 대화는 제게 있어서 그동안 집요하게 피해왔던 화두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도로시씨를 질투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런 감정을 유발하게 만든 건 바로 로키군이었지요. 이젠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녀가 로키군과 가까이 하고, 친근하게 대하는 것이 싫었어요.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또 다른 가지를 쳐서, 저는 토라씨의 관계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한 달 동안 제가 토라씨와 시간을 보내면서 토라씨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토라씨가 제가 가진 좋은 점을 찾아내더라도, 저희 둘은 결코 ‘완벽한’ 의미로서 친하게 지내는 건 어려울 겁니다. 왜냐하면 토라씨도 저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로키군과 친근하게 대하는 걸 결코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요. 씁쓸하지만....... 그게 진실입니다. 전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었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사람들에게 ‘좋은’사람으로 남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 하다는걸 깨달았습니다. 같은 대상을 추구하는데 그것의 양이 한정되어있다면, 다툼이 일어나는 건 연역적으로도 오류가 없을 뿐 더러, 이제까지의 역사를 귀납적으로 돌아보아도....... 그러한 현상이 반복되어 왔었거든요. 작은 것은 분쟁, 큰 것은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조상들 때부터 극복하지 못하고 밟아올 수 밖에 없던 전철, 아니 진흙탕 개싸움에 뛰어드는 격임에도 불구하고, 슬프다거나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홀가분해졌다고 해야겠지요. 추한 구석이라고 피해온 것조차도 내 것임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사람으로 남기를 포기하고 미움 받을 각오까지 다지는 것, 그것은 제게 묘한 쾌감을 주었습니다. “........” 저는 이 수도승의 방과 같은 곳에서, 책장에 꽂힌 책 한권을 꺼내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림책이었나봐요. 참...... 로키군이 그림책이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책에는 새 한 마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그림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처음 본 삽화이지만, 뭔가 묘한 공감이 들어 저는 그것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새의 모습이, 지금의 제 모습과 많이 닮아보였거든요. 어미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동물이든, 알을 깨고 나오는 동물이든, 주변을 의식할 수 있다면, 모태든 알이든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세계였을 것입니다. 그 나름의 규칙이 있었을 것이고, 그걸 통해 모범적이냐 반항적이냐를 가를 수 있었을 거에요. 하지만 그들은 결국 모태 혹은 알에서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기존의 세계에서 탈출한 그들에게 있어서 이전의 규범은 더 이상 그들을 구속할 수가 없을 겁니다. 또한, 어미 뱃속에서 나온 뒤에도 여전히 뱃속에 규칙을 운운한다면 참 웃기는 일이겠죠? 그들은 이전의 세계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세계의 규칙을 새로이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제가 알을 깨고 나오는 새와 저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가진 추한 감정을 인정했고, 더 이상은 그걸 배척하거나 외면하지 않을 거거든요. 그런다고 지금까지 제가 가진 모습을 한 순간에 모두 버릴 수는 없겠죠. 저는 새로운 규칙을 ‘배워야’하니까요. 그리고 언젠가는........ “........” 저는 로키군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요.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 중에서 제가 공감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리고 제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혹시나 그에게 결여된 것이 있고, 제가 그 것을 채워줄 수 있다면.......정말 행복할 겁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저는 “우선.” 비정한 마음이란 것에 대해서 더 확실히 알아야 하겠죠. Channel 1. 로키 지부장은 나를 놀려먹었다는 것이 정말 뿌듯했는지 낄낄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럴 때 보면 참 속편한 양반이 아닐 수 없다. 지부의 운명이 풍전등화인 상황인데 이렇게 낄낄거릴 수 있다는 건, 보통 멘탈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 하긴, 그 정도 배짱이 있으니까 지부장자리를 해먹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하여튼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캐릭터다. “왜? 뭐?”“아닙니다.”“아니긴...... 나를 무슨 신기한 동물 보듯이 봐놓고 아니라고 빡빡 우기냐?”“.........”“뭐가 신기한데?” 지부장의 채근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속에 있던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뭐....... 입장이 난처해질 만한 말은 에둘러서 표현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가 보통 멘탈은 아닌 거 같다는 요지는 확실히 전달했던 것 같다. 그는 내 말을 듣는 그 순간만큼은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는 한참을 가만히 내 말을 곱씹었다. “뭐....... 나라고 속 없이 웃고만 있겠냐. 나도 걱정이 있다고.”“그런게 전혀 티를 안 내는 게 신기하다는 겁니다.”“리더의 고뇌라고 해두자. 솔직히 생각해봐라. 지부가 어려움에 처했는데, 지부장이란 인간은 한숨 푹푹 쉬면서 좆됐다 좆됐다. 하고 돌아다녀봐라. 너네가 힘이 나겠어?”“글.......쎄요?”“아아, 그래 너한테 ‘감정’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미안하다. 내 잘못이지.”“........”“이거 잘 봐봐.” 지부장은 나를 한심하단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신문의 표지를 턱 가리켰다. 1면의 탑기사에는 한 남자가 곤죽이 되어 거리 구석에 쳐박혀 있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음....... 최근에 의뢰가 있었나요? 전 기억이 없는데.”“그러게. 내가 알기로도 그런데.” 그와 나는 한참동안 신문의 사진을 바라보았지만....... 사진에서는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이런 류의 사건이 이 도시에 한 두 건이냐.’라고 신경을 끄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그는 신문을 더 읽을 생각이 없어졌는지 신문을 반으로 접은 뒤에 나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서로 할 일도 없는거 같은데 이야기나 하자고.”“좋지요. 무슨 주제에 대해 이야길 하시려고요?”“뭐...... 도로시?” 지부장의 말을 듣다보니, 그가 이제까지 해온 것들- 나를 놀리거나, 신문의 기사를 의미없이 펼쳐보인다거나 하는-은 모두 이 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타이밍에 해야 할지를 계산하고 고민해왔다는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딴 소리가 되겠지만, 감정이 있다는건 이렇게 비효율적이다. 해야 할 말이 있으면 이것저것 재지 않고 하면 되는데, 이른바 체면 혹은 분위기라는 것 때문에 이야기를 해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계산하고 앉아있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작태란 말인가. 내가 지부장의 태도에 대해 이런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동안 그는 팔장을 끼고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놀랐어. 네가 찰리를 데리고 올거라는 기대는 안했고 다른 누군가를 데리고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게 도로시일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 도로시년이 이곳에 왔을 때 지부장과의 대화를 들으면서 대충 짐작은 했지만, 그 역시도 도로시가 여간 탐탁치 못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 미친년이 이곳에 해놓은 짓거리를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은게 더 이상한 노릇이겠지. 참 그러고보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살다 살다 도로시를 옹호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나중에 도로시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쨌거나, 내가 데리고 온 녀석이니, 녀석을 옹호하는 것 역시 내 몫이 될 것이다. “솔직히....... 녀석이 이곳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저 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본인마저도 잘 알고 있는바 일겁니다. 하지만, 지부장님도 아시다시피 녀석이 미친년일진 몰라도....... 무능한 녀석은 결코 아니죠.”“하지만 도로시가 지부에서 쫓겨날 때........”“맞아요. 실수가 있었죠. 그게 녀석이 받은 가장 치명타일겁니다. 그게 하필 녀석이 자랑하는 ‘과감성’ 때문에 벌어진 거니까요. 그래서 군소리 없이 이곳에서 나갔던 걸겁니다.”“그래, 도로시는 너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경향이 있어. 그게 우리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을거다.” 모두 맞는 소리다. 솔직히 지부장이 이런 말을 할 때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답이 보이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녀석을 옹호해야만 한다. 그게....... 내가 해야 할 도리이니까. “일단...... 시선을 좀 바꿔보죠. 녀석의 성향에서 잠깐 눈을 돌려서 지금의 상황을 보자 이겁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든 변수를 고려하는 신중함과 더불어서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과감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파티 플래너의 신중함과 도로시의 과감성이 만난다면......”“........” 나는 말을 이어가다가 문득 지부장이 반응이 없어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내 열변에도 지부장은 고개만 숙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어른벌레가 빠져나가 버린 번데기와 같이 빈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그는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걸까? “지부장님?”“.......그래, 너야 감정이 없는 녀석이라 네 말에 사심이라곤 들어있을 턱이 없을테니, 그 말을 믿어보도록 하마. 그럼 도로시가 우리가 낸 숙제를 얼마나 잘 해결하는지 기다려보도록 하자고.”“감사합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지부장의 말에 나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했다. 이제 남은 건 도로시가 스스로를 위해 최선을 다하길 비는 것이겠지.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응접실에 인기척이 났다. 나와 지부장은 마치 부정한 행위를 하다 들킨 사람마냥 화닥닥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 말씀들 나누고 계셨네요. 방해해서 죄송해요.”“아닙니다. 뭐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었는데요. 그런데 둘이서 무슨 일로......?”“아침 찬거리 좀 사려고요. 새벽시장을 가려는 차였어요.”“아아....... 잘 다녀오세요.” 답답이와 아주머니가 장바구니를 든 채로 우리를 멀뚱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Channel 2. 아이리스 우리는 모두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딛으며 살아갑니다. 상징, 표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기호학자라고 했던거 같은데, 그 사람들에 따르면 여러 문화권들을 통틀어 하늘은 ‘이상’을, 땅은 ‘현실’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메타포라고해요. 앞서 말했던 말을 그들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자면....... 우리는 이상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현실에 기반 해야 한다는 거겠지요? 그 이야기를 지금의 저에게 적용을 해보자면....... 앞서 로키군에 대해 알고 싶지만 한편으론 제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이유인 ‘일’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걸 거에요. 그런 이유로....... “어 춥다. 옷 잘 입었지?”“그럼요.”“응? 근데 너....... 장갑 좀 따뜻해 보이는데? 이런 건 또 언제 산거야?”“기가 막히죠? 핸드메이드에요.”“......내꺼는?”“인생사 셀프 아니겠어요?”“말을 말아야지 원.” 서로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저희는 도깨비 시장으로 내려갔습니다. 다행이 로키군과 술 한 잔 하러 갈 때처럼 바람이 심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새벽의 차분한 분위기만큼이나 산동네의 공기도 바람 한 점 없이 착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저는 바람 불지 않는 날씨가 참 좋습니다. 이런 날씨에 바람마저 불면 온몸이 박살날거 같으니 싫어하지만, 그건 제가 바람 불지 않는 날씨를 좋아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지요. 싫어하지 않는다는 게 좋아 한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요. 제가 바람이 불지 않는 추운 날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람이 부는 날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거든요. “.......하아아.”“.......”“호오오.......”“고만 좀 해라 쫌.”“이거 진짜로 신기하지 않아요?” 진귀한 경험이라 함은.......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서 이 공기중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거랍니다. 음....... 생각보다 별거 아닌가요? 난 정말 신기하던데?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입김을 내는 것도 기술이 있다고요. 예를 들어볼까요? 입을 ‘오’발음을 내듯이 동그랗게 만들고서 입김을 만들면, 입김이 빠르게 나오면서 기차의 연기같이 나온다면, 반대로 입을 ‘으’발음을 내듯이 길쭉하게 만들고서 입김을 뿜으면, 김이 느리게 나오면서 물안개 같이 입에서 흘러나온답니다. 물안개 같은 입김이 제 얼굴이나 몸을 휘감을 때는 제가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곤 합니다. 뭐랄까...... 영적인....... 아우라가 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아주머니가 제게 하듯이 제 이런 모습이 때로는 남들의 푸념을 살 때도 있긴 한데, 뭐 어떤가요? 이 새벽에 아주머니 말고 누가 또 나타나겠습니까? “어......으응?”“........예?”“아! 아아!”“누구......세요?” 역시........ 사람일은 아무도 모르니, 함부로 단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왠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도깨비 시장에서 나오다가 저를 보시고는 알은체를 하셨네요. 혼자서 즐기는 작은 즐거움이 남에게 들킨 것 같은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건 둘째 치더라도, 저로서는 처음 보는 분이 저를 알아본다는 것에서 오는 궁금함이 더 컸던 것 같았습니다. 이 분은 대관절 누구이시기에 저를 저토록 어색하게 알아보는 걸까요? “저런....... 기억이 안나시나 보구나. 어제 저녁에 로키 녀석하고 저희 좌판에 오셨었잖아요.”“어......음......아.......아아!” 아주머니의 말씀에 걸레를 쥐어짜는 느낌으로 제 기억을 쥐어짜보니........ 역시 마른오징어도 쥐어짜면 물이 나오는 게 맞는 소리였던 걸까요? 촛불이 훅 꺼지듯이 사라졌던 기억의 구석에서 육덕졌던 주모아주머니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기억이 납니다. ‘그’ 로키군에게 장난을 쳐댔던 재미있던 아주머니........ 왜 이런 인상적인 캐릭터를 기억하지 못했던 걸까요? 아주머니에 대해 죄송한 마음에 저는 다소 과장되게 아주머니의 알은체에 답례를 했습니다.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뭐 놓고 온거라도 있나?”“아니에요. 여기 이분하고 새벽장을 보려고 왔거든요.” 주모님은 아주머니와 함께 서로 약간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에, 제게 고개를 돌렸습니다. 저를 보는 주모님의 얼굴은....... 조금은 놀랍다는 느낌이 묻어있었습니다. “역시.......젊음이 좋긴 좋아.”“네?”“어제 그렇게 떡이 되도록 술을 먹고도 이렇게 아침에 장을 볼 수 있잖아요.”“떡........이요?”“아, 기억 안나요? 자기 진짜 엄청났었는데.”“엄청........났다고요?”“하하........ 기억이 안나나 보구나. 그럼 뭐 어쩔 수 없긴 한데........ 아쉽네요. 정말 주모인생 20년에 그런 명장면은 본 적이 없었거든요.”“아.......그랬나요?” 아주머니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저희 일행에게 손을 흔들며 산동네 아래로 내려가셨고, 저희는 도깨비 시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역시나 새벽장답게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생선의 비릿한 냄새와 채소의 풋풋한 냄새가 뒤섞이는 장소........ 1월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연의 선물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대륙의 동맥이라는 광활한 철도 덕분이겠지요. 광활한 대륙의 남쪽 끝에서 나는 과실이 이렇게 라스알게티까지 오게 될 수 있는 것,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게 하는 것, 과학과 기술이라는 건 정말 사람에게 풍요로운 선물을 가져다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뭐할 거에요?”“글쎄....... 오늘이 납일이니까, 납평전골이나 해먹을까?” 납일.......이라.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아주머니가 말씀하시는게 무슨 말인가 헷갈릴 때가 많았어요. 무슨 날짜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처음 듣는 소리니 원........ 사람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다고 하지요?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그럴 때 제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을 텐데요. 하나는 그것을 무시하거나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이 있을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라도 그것에 대해 알려고 덤벼드는 것이겠지요. 저는 후자를 택했었고....... 이제는 아주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요. 인종의 용광로라는 라스알게티이니 만큼, 이 도시에는 다양한 인종들이 보편성의 기둥에 기대면서도 각자의 다양성을 지키며 살고있습니다. 운터브룩은 라스알하게 출신의 주민들이 모여사는 편인데, 라스알하게 유민들은 날짜를 헤아릴 때, 태양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달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은 1월 10일이지만, 그들의 방식대로 하면 12월 1일이에요. 그 날을 특별히 납일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저번에는 동지라고 해서 팥죽을 쑤어서 먹었는데, 이번에는 고기를 만들어 먹는 전통이 있나보네요. “그럼 푸줏간을 가야겠는데요?”“아니지 아니야. 거긴 집짐승 고기를 파는 데잖니. 오늘 같은 날은 바로 저길 가야 한다구.” 아주머니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가죽으로 된 옷을 입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아저씨가 손질된 고기를 바닥에 널어놓고서 앉아있었습니다. “납일날에는 산짐승 고기를 먹어야 한다구.”“아...... 그래요?”“이 언니 따라갈라면 아직 멀었구나.”“뭐가 그렇게 엄격해요?” ============================================================================================================ 너무 긴 시간동안 연재를 하지 못한 점 정말 죄송합니다. ㅜㅜ
갑과을작성일 2016-09-11추천 0
-
[영화리뷰] 주토피아 재밌네요
디즈니 차냥해!!인상에 남는 대사는 "맹수들은 빠르지만 총보다 빠르진 않다.".너도 나도 총 앞에서는 그냥 한방.....포식자도 한방, 피식자도 한방.초기 스토리는 팬들에게 "주디스토피아"로 불리우는 벨웨더의 유토피아 스토리로 추정된다죠.초기버전 이야기도 유머스럽게 진행되었다면 그것도 나름 재미있었을 것 같네요. 대신 드립이 하나 더 늘었겠지만.....코렁탕이라던가. 예전 동물농장에서였던가, 다른데서였던가 토끼도 진퉁 야생 토끼의 경우 꽤 사납다는 내용이 방영되었었습니다. 가끔 아주 낮은 확률로 토끼 농장에서 그런 반골이 등장해 다른 토끼들은 물론 주인까지 피가 날 정도로 물어뜯는다고.좀 상관 없는 이야기까지 하자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상징되는 식물들도 자신들의 포식자인 초식동물들이 사냥당해죽어가는 비명에 성장이 촉진된다는 구밀복검스러운 연구결과도 있다고 하죠.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는 몰라도 일단 식물들이 동물에게 먹히기만 한다고 착한건 절대 아닙니다.....식물들 끼리도 생존경쟁이 치열하고 스스로 내부에서 독도 합성해내는 독종들이죠.다음웹툰 "오늘은 자체휴강[클릭]"에도 피식자 영양이 포식자 치타를 어떻게 "살해"하는지 나오는 등 자연과학에서도 강자와 약자의 관계가 더이상 선함과 악함의 이분법으로 볼 수 없다는건 중론이 된지 오래입니다.작품 말미에 나온 가젤의 말 처럼 세상은 단순하지 않죠. 심지어 "편견"조차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편견의 옳고 그름 이전에 그게 형성된 과정과 배경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흔한 사례가 빈익빈 부익부와 범죄의 상관관계, 그로인해 생긴 편견이 그렇죠.이런 편견이 차별로 이어지면 악순환만 부른다는 것을 누구나 알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마냥 부정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게현실입니다. 하지만 이 복잡함 속에서 편견과 차별에 대한 정의 하나는 단순명쾌하게 내린다는게 이 아동 애니메이션의 장점이기도 하겠네요. "그건 무식하고 무책임한 짓이었어." 주토피아 작중에서는 자신들은 동물들이었으나 문명을 일구고 이성적으로 진화했다는 자화자찬과 그럼에도 근본은야수이며 어떤 이유로든 DNA속의 야생성이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다는 자아비판이 병존합니다.그리고 이 평행선을 달리던 두 주장은 클라이막스의 "박물관 추격전"에서 절묘하게 하나로 화합을 이룹니다!이 작품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주제는 그 부분에 다 함축되었다 봐도 좋을 겁니다....제가 보기에는요.제가 본 중 가장 세련된 메타포이자 메시지 전달 연출이었다 평할렵니다.특히 소품으로 이용된 여러 동물 박제의 혼종 오브제는 그야말로 더이상 포식자도, 피식자도 아닌 주토피아 혼종들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하나의 아이콘이라 봐도 될 정도. 인류의 진화사를 생물학적, 사회학적으로 보면 "도구를 든 혼종"으로 볼 수 있기에 이는 정말 많은걸 생각하게 합니다. 약간의 계기만 주어지면 서슴없이 넥타이를 맨 체 야만성을 드러낼 우리들이 바로 그런 혼종이기 때문이죠.박물관은 그런 과거를 되새기고 발전된 현재를 돌아보는 장소로서 최적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벌어진 쇼는 초반의 학예회 장명과 이어지는 훌륭한 수미상관을 연출해냅니다.고대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차별의 역사의 반복은 인간이 아무리 발전해도 DNA에 새겨진 야만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겨울왕국"의 엘사가 어쩌면 성소수자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었죠.확실히 차별과 역차별 하면 빠질 수 없는게 젠더의 문제겠네요.제가 제대로 본게 맞다면 작중 경찰관들중 주인공 주디 홉스만이 유일한 여성 캐릭터였습니다. 흑막의 경우는 계속 차별 받아온 결과 제대로 흑화해 역차별을 정의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그리고 주토피아의 심볼격 아이돌 "가젤"은 여성으로 보이지만 뿔의 형태가 암컷 보다는 수컷에 가까운 것이라 성별논란이 좀 일기도 했었습니다. 이 작품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말 그대로 뿔달린 미니스커트 캐릭터가 나와도 이상할게 없으니 더욱 의미심장하게보이기도 하네요.성차별과 역차별 외에도 캐릭터들이 동물의 형태로 대체되었기에 지역차별, 인종차별, 종교차별, 빈부차별, 학력차별, 정치이념 차별 등 별의별 것에 다 대응이 가능해지겠네요. 손가락질을 하면 손가락 세개가 자신을 향한다는 말 처럼 편견은 결국 쌍방향으로 작용하기 마련이고 그로인한 차별의 프레임에 갇히는 것은 서로 마찬가지인 것이겠죠. 아무튼 그동안 동물우화를 얕잡아왔던 제 자신을 이 기회에 반성 하렵니다.....오오....동물우화, 오오.....인간이 아닌 동물의 모습으로 캐릭터들을 만듦으로서 사회의 불편한 점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마법이 펼쳐졌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렇듯 사회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의 편견과 소수를 차지하는 이들의 관계는 정말 여러 종류의 사회담론에 적용이 가능하다는 점도 포식자와 피식자 동물 캐릭터들의 절묘한 점이겠군요.물론 이 작품도 비판할 여지가 없지는 않을겁니다.제 개인적으로는 중간 중간 좀 대사가 많은 부분에서 텐션이 약간 늘어진다던가 햄스터들은 꼭 멍청함의 상징으로 희생되어야 했는가, 인터스텔라도 그렇고 농부 취급이 왜 이런가, 주디가 닉에게 사과할때 눈물을 쏟은게 오히려 억지감동으로 느껴지는 감이 있는 등의 소소한 불만이 있긴 합니다.....만, 배부른 투정이란 생각이 들 만큼 전체적인 짜임이 상당히 밀도있고전개도 매끄럽게 이어저 기승전결을 완성도 있게 찍어내었습니다.특히 주디의 쫑긋대는 분홍 코가 아주 뿅가 죽겠더군요. 긴 글이었지만 결론은 이겁니다. 주디의 분홍색 코가 뿅가 죽겠어요.
맷돌창법작성일 2016-05-25추천 6
-
[영화리뷰] 나를 찾아줘와 남북전쟁
_나를 찾아줘와 남북전쟁 _ 에이미가 총을 샀던 빈민가에 경찰이 찾아 갔을때, 어떤 한 약쟁이 노숙자가 중얼댄다. 바로 남북전쟁 당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에이미와 닉던이 처음 만났을때, 에이미는 자신의 소개를 퀴즈로 내면서 보기를 세가지 낸다. c가 정답으로 '잡지기고가'이다. 나머지 a,b의 보기가 의미심장한데, '조각가'와 '군 지도자'.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의 영웅들인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데이비스', '토머스 잭슨 장군'과 '로버트 리 장군'의 모습이 조각되어 새겨진 스톤마운틴을 연상케 한다. 어디서 왔냐는 그레타의 질문에 에이미는 뉴욕토박이지만, 뉴올리언스(미국남부)에서 왔다고 대답한다. 에이미의 뉴올리언스출신 간접언급은 영화내에 2번 더 등장한다. 뉴올리언스(미국남부)는 남북 전쟁 시절 설탕(sugar)과 목화(cotton)의 수출로 엄청난 부를 가져다 줬다. 에이미에게 설탕(첫키스)과 목화(결혼 2주년 선물)는 뉴올리언스(미국남부)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 준것처럼, 행복을 의미하는 핵심적이고 중요한 메타포이다. 그레타는 뱀의 문양이 그려진 깁스를 하고 미국국기 옷을 입은 남자와 에이미의 돈을 갈취하는데, 북부함대가 남부해안을 장악하여 유럽에 설탕과 목화 수출의 뱃길을 끊어버린 아나콘다 작전과 비슷한 모양새다. (전쟁당시 남부연맹은 전혀 다른 국기를 쓰고 있었다) 에이미는 자신이 원하는 남성상을 상대에게 강요한다, 그것들 중에 제일 많이 언급 되는것이 넥타이다. 마치 노예들이 목에 차던 쇠고랑같아 보인다. 넥타이를 거부했던 타미는 강/간범으로 몰리고, 넥타이를 강요조차 못했던 갑부 콜링스는 칼로 목을 그어버린다. 넥타이는 노예제도의 상징이다. 닉던은 초반엔 전혀 정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우유부단하고 카메라앞에서 바보처럼 웃으며 온 미국인들의 증오를 사게된다. 그리고는 '흑인' 변호사를 만나면서 굉장히 정치적으로 돌변한다. 닉던은 마지막 승부수로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영화내내 한번도 보이지 않던, 에이미에게 받은 넥타이를 맨다. 그것은 은밀하고 치밀한 정치적 계산으로써, 대통령 당선연설 당시 노예문제에 소극적이었던 링컨이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노예해방을 전면에 내세웠던 이미지와 오버랩된다. 남북분열로 위기를 맞던 링컨이 노예해방과 전쟁승리로 미국국민들의 추앙을 받았던것처럼, 인터뷰후 닉던은 미국인들이 열광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된다.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닉던에게 안긴 에이미의 모습은 전쟁에서 패한 패잔병, 즉 남부연방이 미국연방에 항복하는것을 상징한다. 에이미는 닉던이 싫어하던 넥타이를 포기하고 그가 원하던 임신을 선물한다. 그리고 여러 행사와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경제문제는 해결되었다는것을 확신할 수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가 과연 해결되고 둘은 행복할까의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것은 남북전쟁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넥타이(쇠고랑)만 안보일뿐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마고의 울음으로 앞으로의 비극을 예상한다. 인간관계의 가장 최소단위인 '부부'의 비극적 결혼생활에 미국 최대 내전, 남북전쟁의 정치적 요소를 곳곳에 배치해 놓음으로써 정치성이 극단에 치닫은 현대적 인간관계를 가감없이 냉정하게 보여주고자 했던게 아닐까. _남성중심적 결혼관을 바탕으로 감상을 유도한 감독의 의도_ 관객은 후반에 피칠갑이 되어 나타난 에이미를 보며 영화의 끝에 보이는 끔찍하도록 냉소적인 결혼생활의 원인이 에이미의 엽기적인 자작극이라 생각하지만, 최초 사건의 시작, 즉 자작극이자 스스로의 사형선고와 같은 그녀의 실종은 우리가 사소하게 취급하며 지나쳐버린 닉의 '외도'탓이다. 에이미가 꾸며낸 닉의 나사빠진 결혼생활, 낭비벽, 학대, 공포, 위협, 폭력 그리고 임신한 아내를 살해 했을지 모르는 나쁜놈의 이미지가, '외도'라는 결정적인 단서를 관객으로 하여금 철저히 상쇄시킨다. 에이미는 도망 후 머무르던 숙소에서 그레타에게 자연스럽게 고백한다. 닉을 저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설탕을 맞으며 키스했던 그들의 처음과 똑같은 모양새로 눈이오는 거리에서 다른여자에게 키스하는 닉의 모습. 그레타의 표현처럼 "들었던 가장 역겨운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에이미에겐 아내로서 또 여자로서 사형선고와 마찬가지였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무슨짓을 한걸까?"라며 두번씩이나 '서로'를 강조한다. 허나 관객은 핵심을 놓치고, 닉의 '외도'와 에이미의 '자작극'중 '외도'는 금새 잊고 에이미만 '미/친년'으로 기억할뿐이다. 이것은 여성이 주도권을 잡게 되는 결혼생활(남녀관계)을 끔찍하게 냉소적으로 보여주면서 여성관객까지도 남성중심적으로 영화를 기억하게 하는, 관객의 태도와 심리에도 깊숙히 개입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엿보인다.
갓터벨트작성일 2015-01-09추천 4
-
[짱공일기장] 두가지 인생 - 16
Channel 1. 로키 1623년 11월 17일 오늘도 뉴 빌리지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뉴 빌리지에 사람이 많은게 어제 오늘일이 아닌데 왜 굳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느냐고? 뉴 빌리지에 사람이 다니긴 다니되,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소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한 사내가 뉴 빌리지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붉은 공존’ 상에 올라서서 거리에 운집해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은 그의 얼굴을 얼룩지게 만들고 있었고, 주먹을 쥔 그의 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근육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해 나타내는 하나의 형태는, 그가 지금 분노하고 있음을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에 후렴구를 넣는 것처럼 하나된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니요! 우리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개성과 패션의 중심지답게, 뉴 빌리지의 사람들의 옷은 모두 제각각이다. 마치 바닥에 흩어진 쌀 겨 같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런 모래알 같은 그들이 단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목에 붉은 리본을 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저께, 단 하루의 파업만으로 수천의 노동자들이 직위해제를 당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직장에서 쫒겨나게 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철도의 민영화를 반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들 국가의 기간인 철도를 일개 개인에게 맡긴다면 우리는 과연 안녕들 하게 되겠습니까?”“아니요!” 그가 목청을 높여 뭔가를 부르짖는데, 나는 도저히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을 도리가 없다. 왜 자꾸 나의 안부를 묻는 것일까? 철도를 개인의 소유로 하는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걸 타지 않으면 되는게 아닌가? 요즘 영업용 마차도 슬슬 대중교통으로 편입된다고 하는데 철도가 싫으면 마차를 타면 되는 것이 아닌가? 앞장서서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던 청년은 ‘붉은 공존’에서 내려와 걷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그의 뒤를 우르르 따른다. 이제껏 뉴 빌리지 거리를 수없이 오갔지만,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걷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별도의 지령이 있을 때 까지 이들을 좀 더 지켜보려고 하는데, 때마침 찰리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녀석은 이미 몇몇 요원들을 더 만나러 다녔었는지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3분 뒤에 시작하래.”“오케이.”“.........아오 숨차 죽겠다. 시대가 어떤 시댄데 그냥 무전기 사용하지는 왜 되지도 않은 파발을 사용하는거야?”“아무래도, 보안상의 문제 때문이 아닐까? 숨어들어갔는데 무전기 소리가 들리면 딱 몰매 맞기 십상이지 뭐.”“아무튼....... 이젠 내 할 일 다 끝냈으니, 난 이만 들어갈게. 고생해라.”“그래, 수고했어. 끝나고 봅시다.” 찰리는 헐떡이면서 골목길의 어둠 너머로 사라진다. 나는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요원들을 살펴본다. 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걸로 보아, 긴장이라던지, 두려움이라던지를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한심하다. 일당백으로 훈련을 받은 이들이 무장도 하지 않은 일개 시민들에게 겁을 먹는 꼴이라니. 기회가 될 때 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정말이지 감정이란 것은 영판 쓸모가 없다. 어쨌거나, 나는 그렇지 않지만 그들은 감정에 종속되어있으니........ 감정적인 문제는 감정적인 것으로 해결을 지어야지. 요약을 하자면, 두려움에는 두려움으로 대응을 해야 효과적일 것이다. “어이, 이리 와봐.”“......네?” 어리버리해보이는 신입요원 하나가 자신을 불렀냐는 제스쳐를 취하며 내게로 온다. 그들은 지금 비록 두려움에 사로잡혀있긴 하지만, 오랜 훈련의 덕분인지 충성심만은 몸에 배어있다. 그는 나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나는 팔을 뻗어, 그의 뺨을 세게 때린다. “왜......왜 그러십니까?” 그는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살펴본다. 왜긴 왜겠어? 희생양이 하나 필요한 것이지. 마침 너는 운이 좋지 않게 나에게 걸렸을 뿐인거고. 물론, 이 생각을 그 친구에게 전해주지 않고 나는 무작정 그를 두들겨 팬다. 그는 윽윽 소리를 내며 버티다가 결국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몸을 웅크린다. 나는 그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을 때 까지 그를 두들겨 팬다. 그의 동료들은 더욱더 두려움에 떨며 나를 바라본다. 그들은 겁에 질려 나를 말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잘 봤지? 오늘 여기에서 물러서면 너 네들은 지금 이 친구처럼 된다. 시위대에게 붙들려 몰매를 맞는게 두렵다면.......” 희생양은 엉금엉금 자신의 동료들에게 돌아가려고 한다. 나는 그를 못본척 하면서, 그의 손을 발로 짓밟는다. 그는 소리를 죽이려고 애를 쓰지만, 입술을 깨문 그 사이로 비명소리가 새어나간다. “나한테 지금처럼 두들겨 맞으면 되.”“.........” 다시 녀석들을 보니, 이제 녀석들의 얼굴에는 다른 양식의 긴장감이 흐른다. 근육의 궤적이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 얼추 먹힌 모양이다. 이제 그들은 시위대 대신에 나를 두려워한다. “자, 출발하자.” Channel 2. 아이리스 1623년 11월 17일 “냥사장! 넌 따라오지 말고 방에 얌전히 있어야되. 알았지?”“야옹!” 냥사장은 제 말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 도도하면서 제멋대로인 작은 피조물은 제가 하는 말에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문으로 또박또박 걸어가더니, 그 앞에 털퍼덕 주저앉아버립니다. 에휴....... 한숨이 나오네요. 이 아이는 대관절 누구를 닮았길래 이렇게 고집이 센 걸까요? 문 앞에 엄격하게 주저앉은 냥사장의 모습을 보니, 전략을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탁을 해서 되지도 않고, 엄포를 놔도 되지 않는다면........ 녀석이 좋아하는 것으로 꼬셔내는 수 밖에요. 저는 책상위에 놓여진 쥐 모양의 인형을 꺼내듭니다. 후후, 이거라면 냥사장을 함락시킬 수 있겠지요. “냥사장~ 여기 한번 볼래요? 우와, 여기 먹음직스러운 쥐가 있네요?”“...........” 냥사장은 쥐 인형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눈빛이 흔들립니다. 그렇지, 제 아무리 고집이 세다고 한들, 이렇게 보암직스럽고 먹음직스러운 미끼가 있는데 별 수 있겠습니까? “우루루 쮸쮸쮸~”“.........” 하지만 냥사장의 눈빛은 뒤이어 몇 차례 더 흔들리다가....... 흔들림이 가라앉아버립니다........ 뭐죠? 이 상황? 당황스럽다 못해, 11월의 한복판에 식은땀이 날 지경입니다. 평정심을 되찾은 냥사장은 ‘다른거 더 없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저도 모르게, 좌절감에 고개가 푹 수그러듭니다. 세상에...... 냥사장이 인형을 거부하다니요! 이것은 한 개체에게는 하나의 작은 반항이지만, 전 고양이과에게 있어서는 큰 도약입니다. 방금의 사건으로 인해, 인류는 고양이라는 이종의 생물을 다룰 수 있는 하나의 카드를 상실해버린 셈입니다. 냥사장은 딴 생각을 집어치우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양칼지게 제 손을 햘퀴더니 턱으로 문을 가리킵니다. 어차피 그걸론 택도 없으니, 문 밖으로 어서 날 데리고 나가자는 거겠지요. 저는 결국 냥사장에게 굴복을 하고, 냥사장을 데리고 나가기 위해 녀석을 품안에 품으려고 했지만........ 녀석은 또 다시 앙칼지게 제 손을 햘퀴어버립니다. “아야! 냥사장! 할퀸데 또 햘퀴면 진짜 아프다구!” 이 녀석은 제가 문을 열 수 있도록 몸을 슬쩍 틀어주었다가, 문이 열리는 순간 쪼르르 문 밖으로 나갑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친구입니다. 제게 모든 것을 의존하는가 하면 또 어떻게 보면 독립적이고....... 이 친구를 뭐라고 정의내리는건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시도하는 것인거 같아요.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는 그렇습니다. 문 밖으로 나가니 마르다 수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수녀님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어려있었습니다. “고양이는 왜 데리고 오셨어요?”“죄송합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이 아이가 도통 남아있으려고 하지 않아서요.”“응석을 받아주기엔 좀 위험한 곳이라........” 전 냥사장을 원망스럽게 쏘아보았지만, 이 아이는 우리이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는지, 아니면 알아듣지 못한 척을 하는 것인지 녀석들은 천연덕스럽게 하품을 합니다. 마르다 수녀님도, 녀석의 태도에 기가 질려서인지 한숨을 푹 쉬더니 한마디 하십니다. “냥이가 저렇게 나오니 어쩔수가 없네요. 대신에 아이리스 수녀님이 냥이의 주인이니까. 꼭 책임감 있게 관리해주셔요.”“네, 알겠습니다.” 마르다 수녀님에게 허락이 떨어진 것이 그리도 좋은지, 냥사장은 제 치맛자락을 잡고 깡충깡충 뜁니다. 이제야 제 품에 안기고 싶었던 걸까요? 저는 허리를 굽혀 녀석을 안아주기 위해 팔을 벌리는데......... 녀석은 또 다시 제 손을 앙칼지게 햘큅니다. 아니, 이 녀석은 도대체 저보고 뭘 어쩌길 바라는 걸까요? 이젠 억울해지기까지 합니다. 마르다 수녀님은 냥사장과 제가 벌이는 상황극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마르다 수녀님은 슬랩스틱 코미디 종류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냥사장은 마르다 수녀님이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더니, 이제는 마르다 수녀님의 치맛자락을 잡고 펄쩍거립니다. 마르다 수녀님은 저에게서 교훈을 얻지 못하셨는지, 냥사장에게 허리를 숙이는 과오를 범합니.......엥? 이번에는 냥사장은 그녀의 손을 햘퀴는 대신에, 얌전히 품안에 안깁니다. 세상에.......뭐 저런 놈이 다있지요? 이게 역사 속에 사장된 걸로 알고 있는 인종차별이라는 것인 모양입니다. 마르다 수녀님은 냥사장과 눈을 마주치면서 기분 좋게 웃음을 짓고, 냥사장도 기분이 그리도 좋았는지 마르다 수녀님의 품속에서 기분좋게 가르릉 소리를 냅니다. 어리석은 친구....... 우리가 어디로 갈지 안다면, 절대로 따라나서지 않았을 텐데..... 고아원 앞마당엔 벌써 제법 많은 수녀님들이 모여계시고, 그 사이로 수사님들의 모습이 드문드문하게 보입니다. 아마, 나머지 분들은 먼저 떠나셨겠지요. 어린 복사님들은 성구를 챙겨들고 있습니다. 성구를 끌어안은 그의 모습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두려우세요 복사님?”“음.......” 복사님은 무슨 대답을 해야하나 하며 잠시 고민을 하다가, 저를 똑바로 올려다봅니다.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죠.”“그럼 왜 두려운걸 무릅쓰고 그곳으로 가려고 하시는거에요?”“아무래도...... 두려운거랑, 해야하는 거랑은 다른 것이니까요.” 채 소년티를 벗지 못한 이 친구가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쳤을까요? 그 모습을 보니,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 프로하기온의 군벌들이 소년병들을 뽑아서 자신의 군대에 끌어들였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 나이대의 소년이라면....... 자신의 신념에 모든걸 걸 수 있을 정도로 맹목적이기 때문일 거에요. 저는 소년 복사님에게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이야기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사님....... 당신 나이또래의 사람중에서 당신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거에요. 그만큼 당신은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랍니다. 하지만....... 부탁하나만 해도 될까요? 가급적이면 감정에 이끌려서 무모한 짓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말려들게 하지 말구요. 그리고...... 만약 복사님의 목숨이 위험한 것 같으면 있는 힘껏 달아나세요.”Channel 1. 로키 거리의 행인들은 선두에 선 청년을 따라서 저마다의 목소리를 높여 구호를 외친다. “민영화가 웬말이냐! 공공재를 국민에게!”“민영화가 웬말이냐! 공공재를 국민에게!” 사람들의 입에서 퍼지는 구호는 성난 파도처럼 뉴 빌리지 시내를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우리는 품속에 각종 진압용 장비를 숨기고 그들의 뒤를 따른다. 막상 군중의 틈바구니 속에 끼어있자니, 나 자신이 성이난 파도가 몰아치는 태풍의 한 복판에 던져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장엄한 행렬은 어느덧 로열 퓨너럴에 다다른다. 그곳에는 경찰과 군대가 바리게이트를 친 채로 군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군경을 보자 흥분을 하여 더욱 더 목청을 높인다. “민영화가 웬말이냐! 공공재를 국민에게!”“민영화가 웬말이냐! 공공재를 국민에게!” 시위 진압대의 선봉에 서 있는 자가 메가폰을 들고 군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집회는 뉴 빌리지 일대에만 신고 잡혀있었습니다. 지금 이 바리게이트를 넘어 로열 퓨너럴에 접어드는 순간부터 여러분들의 집회는 불법집회가 됩니다! 지금 당장 해산을 하시거나, 집회를 이어가고자 하신다면 뉴 빌리지로 돌아가십시오. 이 말을 무시하는 행위는 집회와 시위에 대한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진압하도록 하겠습니다.” .........신호가 왔다. 나는 내 주위의 요원들에게 눈짓을 보낸다. 이들은 내 신호를 접수하고, 군중들 사이에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다. 이러한 행위는 총 2가지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의도를 설명하려면....... 말이 좀 길어지는데, 알고 싶다면 들어도 좋다. 3의 법칙이란 게 있다. 한 사람은 독립된 인간이고, 두 사람부터는 인간관계를 갖기 시작하며, 세 사람부터는 집단을 구성하게 된다. 따라서, 세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하나의 행동을 취하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여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 심리를 네 글자 경귀를 만들기 좋아하는 라스알하게 인들은 ‘삼인성호’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소리다. 어쨌거나, 우리의 심리전이 먹혀들었는지, 몇몇 사람들이 우리를 따라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이 얼마나 평화롭고 교묘한 생각인가! 그리고 군중이란 것은 이 얼마나 나약하단 말인가. 그래, 군중이란 그렇다. 아무리 물을 뿌려 뭉쳐놔도, 결국은 모래알이나 다름이 없다. 물이 마르면 그대로 부스러지는게 그 운명이다. “경관님들은 안녕들 하십니까?” ..........이런, 저 청년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말라가는 모랫더미에 다시금 물을 끼얹고 있다. 그의 언행은 꽤나 교묘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물러서지 맙시다.’라는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지지 않았다. 그냥 인사말을 건넸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모든 이에게 ‘물러서지 맙시다.’라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했다. 이러한 메타포는........ 상당히 유혹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청년의 외침과,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우리 요원들 사이에서 우왕좌왕 하더니...... 다시 결연하게 마음을 다지고 새로운 구호를 외친다. “경관님들은 안녕들 하십니까?” 경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두 번째 국면에 접어들었으니, 우리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 행위의 두 번째 의도를 실행에 옮겨야 할 것 같다. 상황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그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당연지사일 것이다. Channel 2. 아이리스 뉴 빌리지에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아니, 아니, 말해놓고 나니까 아주 멍청한 소리를 했다는걸 깨달았습니다. 뉴 빌리지는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걸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한 ‘양’적인 측면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이었던 거였어요. 평소에는 뉴 빌리지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각자 갈 길을 가지요. 서로에게 아는 척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그런데 오늘 이 시간만큼은 평소와 달리, 생판 처음 본 사람들과 무언가를 나누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 뜻을 나누거나....... 그러니까, 제가 무슨 말을 하고싶은지 알겠지요? 평소와 같았지만 분명코 평소와 달랐습니다. 참 미안해요........ 언어를 전달하는 사람의 언어적인 능력이 이토록 떨어지니, 언어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언어능력을 믿는 다는 말로 떠넘겨버리니 말이에요. 냥사장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이 낯설었는지, 제 품안에서 불안하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발톱에 날을 세워 제 가슴을 햘퀴기까지 했답니다. 저는 고개를 숙여 냥사장의 귀에 대고 ‘걱정하지 마요 냥사장. 모두들 당신을 해치지 않는 사람이랍니다.’라고 말해주었지요. 그래도 나름 함께한 시간이 많을 거라 의사소통이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냥사장은 제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겁에 질려 제 가슴을 꽉 잡았답니다. 냥사장의 불안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는 마르다 수녀님과 함께 약속한 장소로 갔습니다. 그곳은 몇 달전 거지아저씨와 복권방 사장님이 실랑이를 벌이던 가판대였어요. 그때는 사장님이 퍽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저희를 위해 선뜻 장소를 빌려주셨답니다. 이래서 사람을 단지 몇가지 사건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되는 모양이에요. 그곳에 도착해서 주변을 살펴보니, ‘정의구현 사제단’이라 써 있는 플랜카드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고, 간이 미사장이 절반 가까이 세팅되고 있었습니다. 아, 저기 보니까 페터와 캐시가 보이는군요. 그쪽으로 다가가니, 그들도 저희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아! 누나 왔어? 좀 늦었네.”“미안 미안, 냥사장이 도통 남아있으려고 하질 않아서 이렇게 데리고 와버렸지 뭐야.” 캐시와 페터는 제 가슴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냥사장에게 인사를 건네지만, 역시나 냥사장은 고개를 팩 돌려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참....... 주인을 민망하게 만드는 특기가 있는 반려동물이에요. 아니, 그걸 떠나서 이 네발의 피조물은 자신을 반려동물이라고 인지하기나 할까요? 문제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 왔었어?”“우리야 한 시간 전부터 했지 뭐. 와 근데 날씨 진짜 춥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해맑게 웃는 두 아이를 보노라니, 마음이 짠해집니다. 무슨 이유로 이 아이들이 추운 겨울날 거리에 나와서 의자를 옮기고 있어야 하는 걸까요.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요....... 왜 이 어린 아이들이 세상을 바꾸는데 ‘동원’이 되어야 하는 걸까요. 이 고사리 손을 빌려야 할 정도로 우리 ‘어른’들이 이토록 나약할 수 있는 걸까요....... 참 미안하다는 생각 뿐입니다. “잠시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10분 뒤에 시국 미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미사에 참가할 의사가 있으신 자매 형제분들께서는 좌석을 세팅하는 것을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10 분 뒤에 시국 미사를........” 아련하게 들려오는 안내 방송에, 저희들은 화들짝 정신이 들어 의자를 나르기로 합니다. 어느 정도 세팅이 되었다곤 하지만. 10분 만에 모든 세팅을 끝마치려면........ 정말 말 그대로 ‘고양이 손을 빌려야 할 지도.’모르거든요.안내 방송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 때문이었을까요? 수사님과 수녀님들 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행인들 까지도 정말 두손을 걷어부치고 의자를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역할 분담이 순식간에 이루어졌죠. 몇몇은 쌓여있는 의자를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고, 어떤 이들은 의자를 받아 세팅이 필요한 곳으로 나르며, 다른 사람은 의자를 받아 줄을 세우고 배치해놓았거든요. 저도 의자를 받아서 세팅이 필요한 곳으로 나르는 중에, 문득 걸음을 멈춰 개미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의 물결을 바라봅니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제가 뉴 빌리지를 정의내릴 때 사용했던 단어인 ‘카오스’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캡슐속에 쌓인 인간들이 각자의 목표를 향해 나가는 본능의 물결이 아니라, 캡슐을 깨고 나온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역할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니까요. 오늘만큼은 뉴 빌리지를 묘사할 때 카오스의 반댓말인 ‘코스모스’를 사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처럼만에.......... 저는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생명이 약동하고 있어요.
갑과을작성일 2014-02-13추천 0
-
[짱공일기장] 두가지 인생 - 12
Channel 1. 로키 우리는 도로시로부터 건네받은 패용증을 들고 수상 관저에 도착한다. 비구름에 달이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가로등의 등불이 희미하게나마 관저의 모습을 비춘다.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곧게 뻗어나가 하늘로 치솟은 직선의 모습에, 우리는 잠깐 말을 잃는다. 사람의 신장은 2m를 넘지 않는데, 이 작은 유기물이 만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스케일을 한참 벗어나게 거대하다. 그리고 더욱 대단한 것은, 이 거대한 건축물을 이루고 있는 것은 가로 210 세로 100 높이 60mm의 자그마한 입방체라는 것이다. 티끌을 모아 거대한 산을 이룬다는 오랜 옛말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산물을 올려다보는 우리가 의심스러웠는지, 그곳을 지키고있던 경비병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떤 용무로 방문하셨습니까?” 우리는 대답대신에 그에게 패용증을 네민다. 그는 그것을 한참동안 살펴본 뒤에, 우리에게 거수경례를 한다. 이러고보니 감회가 새롭다. 단지 가죽패를 보여주었을 뿐인데, 수비대로부터 경례를 받다니, 우리가 그들과 맺어온 지난날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장면이 분명하다. “수상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희가 내문까지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의 안내를 따라 외문을 통과해 관저 안으로 들어간다. 쇠로된 외문을 통과하니 정원이 나온다. 정원에는 역대 수상들의 모습을 조각해놓은 환조상이 줄을 맞춰 늘어 서 있고, 그 사이로 조경수와 연못이 나름대로의 계산에 입각해 배치되어있었다. 그 속사정을 모르니, 배치에 내재된 계산속을 완전히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얼핏 보기에는 관저의 겉모습만큼이나 직선의 정결한 느낌이 느껴진다. 우리는 정원을 지나 내문으로 들어섰고, 경비병은 내문 앞에서 우리를 놓아두고 자신의 근무지로 돌아간다. 우리는 목조로 이루어진 거대한 내문을 두드린다. Channel 2. 아이리스 수사님은 내일 좀 더 열심히 하자며 먼저 들어가셨지만, 저는 잠자리에 들어가는 대신에 숙소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대로 잠자리에 들어가 봤자, 두발을 쭉 펴고 잘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밤하늘에는 여전히 비구름이 부슬비를 뿌리고, 달은 구름사이에 가려 빛을 잃었습니다. 저는 한참동안 저녁비를 바라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연기마냥 흩어져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았던 생각이, 저녁비를 지켜보는 중에 서서히 뭉치고 얼개를 맺어 하나의 실체처럼 명확해졌습니다. 뭐....... 솔직히 말해 그렇게 거창한 생각은 아니었고요, 그냥....... 뭐랄까. 일종의 감상이라고 해야하는게 맞겠네요. 전 ‘원장수녀님이 젊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이곳에는 비가 내리던 날이 있었겠지?’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가 알기론, 원장수녀님은 이곳에서 ‘구마 사역’을 사사받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기도력을 통한 치료가 금지되어있지 않았기에, 그녀는 지금보다 좀더 자유롭고, 그리고 충분히 몰두할 수 있는 환경에서 구마 사역을 사사받았을 것입니다. 배경이 어쨌건 간에, 그녀는 이곳에서 구마사역을 사사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 하나의 팩트에서 상상을 좀더 가미해, 그녀가 이곳에 머무르는 기간에도 오늘밤과 같이 비가내리는 밤이 한번쯤은 있지 않았을까요? 구름이 달을 가린 이 어두운 밤에 쉼없이 쏟아지는 부슬비를 바라보면서, 그때의 원장수녀님은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을 취하셨을까요? 한 사람의 일생이라는 팩트를 가지고 나름의 생각을 하는 것을 ‘재해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하는 것은 팩트를 넘어선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의 과정을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신을 차려보니, 잠시나마 명확한 실체처럼 느껴졌던 생각이 다시금 흩어져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사고를 도구로 하는 정신노동은 집중을 지속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에서 나름의 고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저를 수도원으로 보내면서 새로운 원장수녀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오르네요. ‘너는 훌륭한 교사가 될 수도 있고,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도 있으며, 훌륭한 성직자나, 멋진 배우가 될 수 있어. 하지만 그건 가능성에 불과할 뿐이란다. 가능성을 실현시키려면......... 우선 해봐야 한단다. 교사가 되려면 가르쳐야하고, 소설가가 되려면 일단 글을 써봐야 하며, 배우가 되려면 연기를 해보아야 하는 법이지.’ .........그래요. 일단 뭐라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Channel 1. 로키 내문이 열리고, 이 집의 관리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우리를 맞이해준다. 그는 우리를 응접실로 데리고 간 뒤에, 비서관을 불러오겠노라고 하고는 자리를 떴다.우리는 그가 자리를 뜬 사이에, 파티플래너가 작성한 ‘킬링 리스트’를 꺼낸다. “일단 메인 타깃은........ 수상이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스벤은 긴장이 되는지 마른침을 삼킨다. 스벤은 기본기가 뛰어나고, 눈치가 빠르며, 임기응변에 능하다는 점에서 유능한 요원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다만, 녀석의 실력에 비해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긴장을 곧잘 타곤 하는게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단점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경험의 부족은 경험으로 메꾸는 것이니까. 시간이 흐르면 녀석은 아주 훌륭한 요원으로 거듭날 것이다. 내가 보증한다. 어쨌거나, 이번 심사의 성공여부는, 관리인이 시간을 비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있다. 물론 토라가 했지만, 이제까지의 승진 심사를 분석해보니, 크로스로서 가장 요구되는 능력은 한정된 자원을 활용해,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플랜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말하자면, 임기응변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토라의 분석결과를 듣고 나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합리적인 평가란 말인가. 피지컬이나 멘탈이라던지, 하는 것들은 요원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이 두 가지만 있어도 훌륭한 요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크로스라면......... 그보다 적어도 한 단계 더 격조 높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우리’는 상황에 대한 통찰로 보았고, 그것은 정확했다. 수많은 나라가 이 대륙에서 나고 졌지만, ‘우리’는 변함없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역사적인 사고로까지 내 의식의 폭이 넓어졌다는게 놀랍다. 확실히 토라는 나를 귀찮게 하긴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이것만큼은 확실히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녀가 내게 영향을 받은 것도 있겠지만, 반대로 나 역시 그녀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파티플래너가 제공한 또 다른 자료인, ‘수상 관저 내부 지도’를 살펴본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응접실은 1층, 중앙 계단에서 그리 멀지 않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8층에 수상 집무실이 있다. 중앙계단에서 오른쪽으로 쭉 들어가면 맨 끝방이다. 각 층에는 경비가 둘 정도 배치가 되어있고, 특별히 집무실이 있는 8층에는 3명의 경비가 더 있다고 나와있다. 아무래도, 이 건물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사람들이겠지. 이들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 할 것 같다. “집무실이 너무 높은데 있는 것 같은데..........” 스벤의 걱정이 이해도 된다. 타깃의 위치는 탈출로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유유히 걸어서 탈출하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해결이 불가능한 의뢰는 없다. 승자는 방법을 찾는다면, 패자는 핑곗거리를 찾게 마련이다. 분명 해결책은 존재한다. “스벤, 한 장 더 줘봐.”“어떤걸 말하는거야?”“내부 설계도 말이야. 배관이라던지 수도관 같은 것의 배치도가 있을거다.” 스벤은 봉투를 뒤져 내가 요구한 지도를 건네준다. 파티 플래너가 제법 센스가 있었는지, 이 지도는 미농지로 되어있다. 나는 내부 설계도를 수상관저 지도와 겹쳐본다. 그래, 이렇게 하고나니 모든 것이 더욱 선명해진다. 이제는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있겠다. 그래, 이렇게 라면 무리 없이 의뢰를 성공으로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Channel 2. 아이리스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일단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마음만 앞섰을 뿐,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한 것은 딱히 없었기에 저는 수도원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수사님들이 경작하는 작물들이 자라는 밭을 거닐기도 하고, 이곳의 흙으로 돌아가신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있는 묘지를 둘러보기도 하다가........ 이제 제 발걸음은 어느 폐허에 다다릅니다. 지금의 수도원 건물은 수도원이 처음 지어지던 그 당시에 지어진건 아니라고 해요. 천년 가까이 되는 오랜 옛날에 그러니까........ 첫 번째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어둠의 별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숭배소를 지었다고 해요. 중립의 시대가 끝나고 대륙이 전란에 휩싸이면서 이 숭배소는 그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고 해요. 마지막으로 아버님의 사도들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면서, 예전의 숭배소를 헐어내고, 그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수도원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곳을 거닐다보니, 하얀색 돌무더기 사이로 이름 모를 풀들이 돋아나, 왜인지 모르게 특별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뭐랄까........ 이런 말을 한다고 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마치 ‘풀밭위에 숨을 거둔 거인의 유해 근처를 거닐고 있는’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때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던 거인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 흔적이 오간데가 없고, 백골만 훵덩하니 남은거죠. 저는 그 위를 거닐며 감상에 젖는 역사학도인 셈이고요. 참 우습죠? 물론 이 건축물이 실제로 거인의 백골일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구색을 갖춘 메타포라고 생각해요. 꽤나 퇴락했지만, 이 돌무더기의 크기 하나하나와 함께, 돌무더기가 놓여진 배치를 보노라면, 지금의 수도원만한, 아니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거대한 크기의 건축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자그마한 인간이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향을 그리듯이 하나의 거대한 피조물을 만든 셈입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피조물을 이루는 것은 순백의 돌 판입니다. 천년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 매끄러움은 그 당시의 기술력, 생활양식을 고려하건대, 감히 인간의 솜씨라기보다는 신의 손을 빌었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저는 피조물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쯤에 뒤를 돌아 ‘거인의 백골’을 돌아다봅니다. 다 무너진 건물에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실례될 수도 있겠지만, 이 건물은........ 폐허가 되었기에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이곳의 돌무더기 하나하나에서 저는 한때 이곳에 몸을 담았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영화로웠을 한때, 영광의 수훈, 역사의 현장에 함께함의 자부심, 그리고 뼈에 사무쳐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치욕스러운 퇴락........ 그 기억들을 올바르게 재해석 해낼지는 의문이지만, 천년의 세월을 지나 그 감회를 나누고자 하는 이의 마음을 조금씩 적시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는 제 손길은 시나브로 외계에서 내부로 옮겨져, 다시 한 번 기억속의 한 장면으로 향합니다. 저는 눈을 감고, 그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원장수녀님의 거칠고 투박한 손이, 작지만 꼬질꼬질하게 때가 앉고 상처로 짓물러버린 한 소녀의 발에 얹어집니다. 이제는 굳이 눈을 뜨지 않더라도 알 것 같습니다. 제 손에서 피어오르는 초록색 인광이 감겨진 제 눈꺼풀 사이로 들어오고 있으니까요. 마치 저의 두 손에 초록색 빛을 발하는 태양이 일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드님의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는 아드님이 오셨을 때 함께하지 않은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아드님을 보았다 하니, 디두모는 ‘내가 그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 하니라. 여드레가 지나,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디두모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힐 때 아드님이 오사, 인사하고, 디두모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네밀어 보라.’라 하더라. 디두모는 그의 얼굴을 만지며 ‘당신은 나의 주인이다.’ 하니, 아드님이 말씀하길 ‘너는 나를 본 후에 믿는구나.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너보다 더 복될 것이다.’ 하시니라. Channel 1. 로키 스벤과 탈출 루트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 하고나서, 장비를 정비하는데, 관리인이 비서관을 데리고 왔다. 그녀는 꽤나 섹시해보이는 여자였다. 스벤은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가........ 비서관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피해버린다. 덕분에 ‘감정이란 것은 의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금언을 다시 한 번 상기할 수 있었다.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우리는 아까 외문에서 경비병에게 했던 그대로 그녀에게 패용증을 건넨다. 그것을 살펴보는 그녀는 아주 잠깐 입술이 일그러졌다가....... 다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관리인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관리인은 허리숙여 인사를 하고는 응접실을 나선다. “하하,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그녀는 사교적인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손을 네민다. 스벤은 얼씨구나하고 그녀의 손을 움쥔다. “그런데....... 조금 의외네요? 저는 이런 일을 하시는 분들은 좀 더 뭐랄까....... 우락부락하게 생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런......” 그녀는 우리를 위 아래로 훑어보다가 싱긋 웃는다. “내 타입 들이 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딱 좋다. 완전 좋아.”“.......” 나는 그녀의 말에 달리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꽤나 불편하다. 감정이 없기에, 이렇게 감정이 녹아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그녀는 우리에게 수상의 위치를 다시 확인시켜주고, 집무실을 지키는 3명의 가드를 비롯해 여타 안전장치에 대해 일러주고는, 은밀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당신들이 원하면, 그들을 밖으로 내보낼 수도 있어요.”“.........”“괜찮습니다.” 스벤은 나를 뜨악하게 쳐다본다.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라는 표정이다. 나는 스벤과 이 여자를 설득하기 위해, 내 주장을 관철시켜야 할 것 같은 필요성을 느꼈다. “굳이 눈에 띄는 짓을 벌이는 건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수사관들의 시선이 비서관님에게 향할 수도 있으니까요.” 스벤은 어느정도 수긍을 한 듯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호의가 보기좋게 거절당한 것이 퍽 불쾌했는지, 자신의 눈을 치켜뜨고 나를 응시한다. 나는 딱히 눈을 피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서로를 바라본다. 내가 알기론, 그녀의 역할은 우리를 타깃으로 배달시키는 것 까지다. 자신의 역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월권이다. 월권의 결과가 성공으로 돌아가더라도 공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뿐더러, 만약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 화살은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굳이 처음보는 사람에게 그런 고부담을 지울 필요가 없지 않은가.그녀는 한참동안 나의 눈을 응시하다가...... 눈을 피하더니 한숨을 쉰다. “좋아요. 닭모가지를 자르는데는 닭잡는 칼을 써야죠. 전문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닭잡는 칼’이라는 표현이 거슬렸는지, 스벤의 눈썹이 일순간 꿈틀한다. 아무래도 그녀는 우리를 도발하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지만, 그녀의 노력은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스벤에게는 그녀의 전략이 효과적으로 먹혀들어갔을지는 몰라도, 감정이 없는 내게는 그냥 언어의 나열에 불과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며, 그녀의 의도를 읽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나의 눈을 보면서 무엇을 읽어냈기에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포기했던 것일까? “그럼,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수상님이 계신 곳으로 당신들을 데리고 갈게요.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떠한 도움도 제게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거에요.” Channel 2. 아이리스 저는 마음속의 확신이 어그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조심스럽게 눈을 떠 봅니다. 제 손에는 여전히 초록색의 빛을 발하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제 자신이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이 불을 어떻게 꺼야 하는 걸까요? 성령의 불은 밝히기가 어렵지만, 동시에 껄 사그라들게 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뭔가 불경한 생각을 해봐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불을 끄듯이 입으로 호호 불어보아야 하는 걸까요? 저는 손안의 불을 바라보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피곤함을 느끼고 ‘불길이 그냥 사그라들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불길이 조금 사그라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모습을 보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손을 조금 흔들어보니, 와! 제 손안의 불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제 두 손을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정말 신기하고 위대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저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짜릿함에 몸을 부르르 떱니다. 솔직히...... 처음입니다. 제가 무언가를 원했고, 그리고 그것이 이렇게 보란 듯이 성공했습니다. “축하한다. 아이리스.” 뒤를 돌아보니, 수사님이 저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얼굴도 밝게 상기되어있었습니다. “기분이 어때?”“글쎄요........ 말로 표현하기가 힘드네요. 마음속에 무언가가 가득차서 흘러넘치는 것 같아요. 양 손이 저릿저릿하기도 하고, 지금 당장 힘껏 뛰어오르면 하늘에 머리가 닿을 것 같기도 하고요.”“그래, 어떤 기분인지는 잘 알겠구나. 생각보다 디테일한걸? 하지만, 네가 이것 하나는 알고 넘어갔으면 좋겠구나. 지금 네 손을 살펴 보거라.” 수사님의 말을 따라서, 저는 제 손을 바라봅니다. 제 손에 무엇이 있다는 걸까요? 손등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손바닥에 무언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손바닥을 뒤집어보니, 그곳에는....... “아.......”“그래, 이제 발견했느냐?”“어........ 제 손이 왜 이런거죠?”“이건 성흔이라고 하는 것이란다. 간단히 말하자면, 신게서 너를 선택했다는 증표라고 생각하면 된단다.”“성흔.......” 제 손은 정확히 말하자면, 제 손바닥은 뭐랄까....... 잔뜩 쪼그라들었습니다. 불에 데어서 화상을 입었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물에 퉁퉁 불어버렸다고 해야 할까요. 확실한건 제 손이 흉하게 일그러져 버렸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 손이 그닥 예쁜 편은 아니었지만......... 이건 좀 충격이네요. 제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수사님이 제 어께에 손을 얹습니다. 저를 바라보시는 수사님의 얼굴은....... 담담함과, 연민이........ 뒤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권능은 바로 이것에서 출발한단다. 내가 사역을 함에 있어서 교만함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걸 기억하고있니? 앞으로 너는 지금 얻은 이 권능을 발휘하겠지만, 그건 너의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란다. 단지, 신이 너를 ‘선택’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일 뿐이지......... 너는 이 권능을 값없이 얻었으니, 이제 그것을 대가없이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것이란다. 성흔을 보며, 그 사실을 언제까지나 잊지 말도록 하거라.” Channel 1. 로키 비서의 안내를 따라 중앙 현관을 오르고 올라, 우리는 마침내 수상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무실의 가드들은 그녀의 눈짓을 보더니 우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집무실의 나무문이 열리고,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서류더미의 한 가운데에 앉아있는 노인장이 있었다. 과중한 업무 탓인지, 그의 피부는 거칠거칠해 보였고 깊게 패인 눈에는 그늘이 드리워져있었다. 그는 서류철을 살펴보는데 정신이 없어서 우리가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손님을 이렇게 맞이하는게 예의가 아니란걸 알지만 용서해 주시겠소? 요즘 따라 일들이 마구잡이로 덤벼들어서 말이오.” 우리는 그가 서류철에서 눈을 떼지 않으리란걸 확신하고, 더 이상 눈치볼 것도 없겠다 싶어서 당장 장비를 꺼냈다. 그는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흰 종이 너머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음........ 설계도에 따르면, 이쪽 벽이 회반죽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번 확인을 해볼까? 역시나 가볍게 두드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속이 빈 물체에서 나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의뢰가 끝난 뒤의 이야기는 바로 이 장소에서 시작될 것이다. 방안의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끝날 동안 우리의 ‘착한 타깃’은 서류를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다. 장비도 모두 정비했고, 탈출 루트도 확인했겠다, 이젠 더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 나는 스벤에게 눈짓을 한다. 스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무실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는다. 그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손잡이는 하얀 성에로 서서히 덥혀 완전히 얼어붙어버린다. 문고리를 얼리는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 돼었을 때, 스벤은 손잡이를 내리친다. 얼어붙은 문고리는 퍽하는 소리를 내며 박살나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소리에 드디어 그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우리를 바라본다........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서류 너머로 그를 죽이려는 암살자 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말이다. 나는 타깃이 상황을 파악해 대처하기 전에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입을 테이핑 해 버린다. 스벤은 나를 도와 그의 수족을 결박한다. “당신의 악행에 천벌을 내리기 위해 왔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의 기색이 드러난다. 내가 그를 제압하는 동안, 스벤은 서류더미를 뒤져 결재가 완료된 서류를 하나 찾아낸다. 서류의 상단 중앙에는 ‘외국과의 통상을 위한 법률 개정안’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이 서류는 우리가 가져가도록 하겠다.” 수상의 시선이 그 서류로 서서히 옮겨지는가 싶더니,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그의 얼굴 근육이 움직이면서 하나의 표정을 만들어낸다. 아까만 하더라도 ‘공포’로 가득했던 그의 얼굴은 이제 ‘경멸’의 감정으로 가득 찬 것 같다. 수상은, 제 얼굴의 표정을 바꾼 것 뿐 만 아니라 무언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테이프로 봉해진 입을 오물오물 거린다. 무언가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그의 말을 들어줄 생각도, 그리고 그럴 이유도 없다. 일을 빠르게 마치기 위해, 나는 그의 명치에 칼을 몇 대 쑤셔박는다.그러자, 그의 코에서는 붉은 선지피가 쏟아진다. 그리고 뒤이어 그의 얼굴근육이 또 다시 변화를 일으킨다. 이번에 그의 얼굴근육이 지시하는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지금 이 상황과는 별 상관없는 딴 소리를 잠깐 해보자면........ 이런 종류의 직업에 오랫동안 종사하다보면, 지금과 같은 반응을 심심찮게 마주하곤 한다. 요원들끼리의 말로는 ‘꽃갯질경의 선물’이라고 하는데........ 왜 꽃갯질경이인고 하면, 그 꽃의 꽃말이 ‘놀라움’이라는 것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선물이라 함은, 이러한 반응을 타깃에게서 이끌어 낸다는건 ‘의뢰가 거의 성공에 다다랐다.’라고 여기기 때문이다..........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냥 한낱 미신일 뿐이다.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싶어하는 요원들의 바람이 죽어가는 이들이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을 만나고, 더불어 꽃말에 관심이 있던 한 요원의 입담이 슬쩍 숟가락을 올려놓음으로써 한편의 도시전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꽃갯질경이의 선물을 받다보면 문득 이런 생각에 잠기곤 했었다. 수많은 타깃들은 왜 생의 마지막에 놀라움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자신의 목숨이 마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소유물 중 하나라고 생각한 모양인걸까? 하지만, 자신의 목숨은 값을 치르지 않고 얻은 것이다. 값없이 얻은 것을 빼앗긴다고 해서 놀랄 이유는 없지 않는가. Channel 2. 아이리스 수사님은 졸리다고 하품을 삼키며 들어가시고, 저는 또 다시 혼자 남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상념이 수사님 대신에 말벗을 자처하여, 저는 거인의 백골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깁니다. ‘값없이 얻었으니, 대가 없이 베풀어라........’ 가만히 보면 표현이 참 기가 막히지 않나요? 무릎을 치게 만드는 촌철살인의 표상이자, 사역을 질어진 자들의 비애와 고뇌가 묻어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이 짧은 말은 사역자로서 삶의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사람을 가리지 말고 베풀어야 하며, 끊임없이 겸손해야 합니다. 이런 명제는 남은 생의 시간동안 제가 행할 모든 기사는 ‘나’라는 사람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님께서 저를 빌려서 행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기사를 기다리는 이를 외면하는 것은 아버님의 사역을 ‘직무유기’한다는 것이고, 사람들의 감사를 거절치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님에게 돌아갈 감사를 ‘횡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화된 신....... 그것이 바로 사역자로서의 삶의 본질이겠죠. 한편으론 이건 ‘사역자’들의 비애와도 연결될 것입니다. 탈 맥락적으로 심판하기에 앞서 내부자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역자도 결국은 하나의 ‘사람’일 뿐입니다. 때리면 아프고, 찔리면 피가 납니다....... 표현이 조금 과격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은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사역자도 사람이기에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를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의 신학은....... 사람의 욕구를 ‘욕망’이라고 정의내리고 이를 따르는 것을 경계해 왔습니다. 당시 신학자들이 만든 대표적인 터부는 바로 ‘7대 종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오만, 나태, 질투, 분노, 탐욕, 식욕, 성욕이 그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7이라는 수가 ‘완전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7대 종죄는 한마디로 ‘완전한 악’을 의미한다고 보면 되요. 그렇게 숫자를 정해놓고 그것에 여러 부덕함을 끼워맞추다보니, 그 면면을 살펴보다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식욕과 성욕이 그것이에요. 먼저 식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물론 시대가 바뀌어 그런 면이 없잖아 있겠으나 요즘은 식욕이 죄악시 되지 않고 있잖아요. 제 주변에도 식욕이 왕성한 이가 제법 많고, 이들은 자신이 대식가임을 숨기거나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식성을 조금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고요. 거리를 가 보아도, 꽤나 육덕진 몸을 질질 끌고 다니는 이들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아마....... 7대 종죄에서 식욕을 포함시킨 이가 지금의 거리 풍경을 본다면......... 종말의 표지가 거리에 즐비하다며 기절초풍할 노릇이었을 겁니다. 더더군다나, 대학에서 배운 인류학 시간을 떠올린다면, 예전에는 식욕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나 싶어요. 그루미엄 근처의 동굴에서 고대의 조각품으로 보이는 작품이 발견되었는데, 매우 육덕진 여성의 모습이었다고 해요. 풍만함 속에서 풍요를 찾았다나? 성욕도 마찬가지겠습니다. 17세기인 지금은 수많은 이들이 자유롭게 연애를 합니다. 남녀의 서로다름이 만들어낸 근원적인 호기심은,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욕망을 낳게되요. 오히려 그것을 죄악시하는 바람에 지금도 지우기 어려운 수많은 악습들이 생겨났고, 그것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악습의 대부분은 여성들을 타깃으로 삼아서,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종속되도록 만들어버렸죠. 뭐........ 요즘은 남녀가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나아가긴 했지만 말입니다. 비록 7대 악에는 제외되었지만, 명예욕은 ‘값없이 받았으니, 대가없이 베풀어라.’라는 도그마에 갇혀 오랜 세월동안 인간의 의식에서 억압받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툭 터놓고 말을 해보자구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싶어하는 것,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요? 메슬로우라는 학자는 인간의 욕구를 총 5가지의 위계를 갖추고 있는 계층적 시스템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하위단계의 욕구가 충족되면, 상위 단계의 욕구를 추구하는 쪽으로 움직이노라고 시스템의 운용원리를 밝히기도 했죠. 간단히 설명해 볼까요? 사람들은 궁지에 몰렸을 때,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 물, 산소, 음식을 우선적으로 추구한다고 합니다. 이걸 ‘생존의 욕구’라고 해요. 그것이 충족되면 그 다음단계인 ‘안전의 욕구’를 추구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디엔가로 소속되어 물리적 안정감을 느끼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안정감을 얻게 되면 비로소, 자신의 반쪽을 찾고자 합니다. 그걸 ‘소속과 안정감의 욕구.’라고 합니다. 여기에까지 충족을 하게되면,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존경에 대한 욕구’랍니다. 존경을 받기위해 분투한 결과가 ‘명예’라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것일까요?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존경 받기를 포기한다면, 과연 이 사회가 발전을 하겠느냐 말입니다.
갑과을작성일 2014-01-26추천 0
-
[짱공일기장] 두가지 인생 - 01
짱공에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네요. 다른 곳에서 연재하고 있는 소설을 여기서 연재해보려고 합니다. 가급적이면 주 2회 연재를 하도록 해보겠습니다.
====================================================================================================
Channel 1. 로키
1623년 3월 26일
요새 들어 봄이라고 노릇노릇한 햇살이 땅을 덥히나 싶었는데 오늘은 꽃샘추위가 불어 닥쳐와 내 옷깃을 파고든다. 나도 모르게 어께가 움츠러드는 그런 날씨다. 기차 플랫폼에는 나뿐만 아니라 제법 많은 사람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플랫폼에는 가끔가다 들려오는 역내 직원의 안내방송만 들릴 뿐,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들어볼 수가 없다. 일 방향적인 전달은 있을지언정, 쌍 방향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없다.
이윽고 열차가 왔고, 나는 그 안을 바라본다. 유리 안에는 사람들이 마치 면발인양 뒤섞여있다. 그리고 그 36.5℃짜리 면발이 내뱉는 물기에 유리창은 뿌연 김이 서려있다. 보기 만해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몇 사람 빠져나가지 않은 그 지옥과 같은 곳에 사람들은 별다른 불만 없이 꾸역꾸역 들어간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말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놀랍기 그지없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일을 아무런 불평 없이 행하는 것일까. 심지어는 자발적으로 세계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이렇게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는 것은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놀랍고 그리고 한심하다.
열차 안은 역시나 사람의 팔과 다리가 잔뜩 엉켜있어 마치 면발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속에 들어가도 플랫폼만큼이나 조용하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열차 내 방송만 제외한다면 마치 진공에 가까운 곳에 버려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내 버릇이 가끔 그렇다. 내 입은 과묵한 친구이지만, 내 머릿속은 세상 어떤 수다쟁이보다 말이 많고 산만해서, 한번 페이스에 말려들면 스스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만큼 많은 말을 늘어놓고는 한다. 오늘도 그런 경우여서, 다음 정류장은 워터 프론트 역이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 나서야 간신이 정신을 차리고 열차에서 허겁지겁 내릴 수 있었다. 오늘은 오랜만의 외근이다. 어제 퇴근시간에 다음날 있을 외근을 준비하는 동안, 지부장은 내게 ‘약속시간에 1분 일찍 올 때마다 1점씩 먹고 들어간다.’라고 말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약속시간에 15분 늦게 도착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리고 나는 해냈다.
워터 프론트 역은 역에 들어가고 나가는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이곳 역시 출근시간에 야외라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죽음 같은 침묵만 감돈다.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역사 구석에 있는 개방형 화장실로 향한다. 이곳은 출근시간 애연가들의 작은 쉼터다. 저 근처로 가보니까 입구 근처에 몸에 착 감기는 양복을 걸친 양복쟁이와, 때가진 점퍼로 제 몸을 간신히 가린 노숙자가 나란이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 둘은 한때 같은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월은 흘렀고 그들이 걸친 옷이 증언해 주듯이 그들은 각자의 인생행로를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담배를 피운다. 1파운드 35센트짜리 담배, 납세자의 형편에 따라서 세금을 내는 것이 공정한 조세의 원칙이라고 하지만, 담배에 있어서는 간접세율을 적용을 받는 게 어쩌면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노숙자와 양복쟁이를 보며 내 머리가 하는 수다를 듣노라니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알은체를 한다. 아, 오늘도 찰리와 합을 맞추는 모양이다.
Channel 2. 아이리스
1623년 3월 26일
겨우내 하늘을 완전히 뒤덮은 추위가 시나브로 가시면서 노릇노릇한 태양이 대지를 감싸는가 싶었는데, 동장군의 마지막 숨결이라는 꽃샘추위가 이곳 이스트민스터로 찾아왔습니다. 겨울이 다 지난줄 알고 봄옷을 내놓는 바람에 애꿎은 원생들만 낭패를 입었습니다. 어께를 맞대고 삼삼오오 모여 학교로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노라니 정말로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일어난 페터를 보내고 아이들의 공동 침실로 들어갑니다. 역시나, 침대에는 잔뜩 구겨진 이불이며 잠옷들이 산사태의 잔해처럼 쌓여있었습니다. 제 하루는 이렇게 아이들이 남겨둔 허물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각기 다른 색채를 가진 아이들이라 그런지, 이불들이나 옷가지들이 널 부러진 모습도 각양각색입니다. 하지만, 모두들 깨끗한 정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똑같더군요.
전 빨아야 할 것은 바구니에 담고, 개어야 할 것은 개어가는 식으로 정리를 해나갑니다. 이젠 이런 것도 오래하다 보니, 기술이란 게 늘어서 이젠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네요. 사실 이외에 더욱 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걸요.
얼추 정리를 끝내고 빨래바구니에 담긴 세탁물을 세탁실에 옮긴 뒤에, 저는 본당으로 올라갑니다. 벌써 많은 신도와 수녀님들이 머리에 베일을 얹고 미사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사도신경을 외는 걸 보니, 아직 미사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네요, 서둘러 온 보람이 있었습니다. 허리가 구부정한 사제님이 수전증으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서 복음서를 봉독해 주십니다. 낮고 담담한 음색에 담긴 이야기는 사람의 아드님이 대중에게 설파할 때 사용되었던 이야기 한 토막 이었죠.
아버지에게 있어서 걱정거리였던 불효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상속받아 먼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아들은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소모하다가 결국 거지로 전락해 버리죠. 낯 두꺼운 그 아들은 결국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탕아를 꾸짖고 벌하는 대신 당신의 반지를 끼어주고 그를 위한 잔치를 벌입니다.
‘인간에 대한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이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메타포라는 걸 머릿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하도 들었던 이야기였던 모양인지 저는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제 감흥을 표현합니다. 반면, 무엇이 그리 슬픈지 맞은편에 앉은 자매님들의 새빨개진 눈에서는 훔칠 새도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립니다.
어떤 이가 그러더군요. ‘세상은 단 하나의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수만큼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사람들이 세계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각자’, ‘나름대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그 의미부여의 재료는 바로 자신의 과거 경험이고요. 다시 정리하자면, 사람들은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살며, 그 과거에 따라서 사람들은 세계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기에, 세상은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같은 일이 두 사람에게 닥친다고 하더라도, 어떤 이는 감사를, 또 다른 이는 원망을 늘어놓게 되겠죠.
그래서인걸까요? 저는 눈물을 글썽이는 형제, 자매님을 보노라니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Channel 1. 로키
찰리는 싱긋 웃더니 ‘선생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담배 한 개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라고 묻는다. 나는 담배 몇 개비를 곽에서 집어 그에게 건넨다. 그는 호들갑스럽게 기뻐하며 공손하게 두 손으로 담배를 쥔 내 손을 어루만진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쪽지가 이젠 내 손에 들려있다. 그는 고개 숙여 인사하며 내게 속삭인다.
“지옥에서 꼭 한잔 합시다.”
나는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내 손에 쥐여진 메모지를 펼친다. 메모지에는 7110이라는 숫자가 적혀있다. 나는 메모지의 내용을 확인한 뒤에 로터리 너머 전당포로 걸어간다. 이번엔 도로시가 나를 맞아준다. 그녀는 마약에 절어있는 것처럼 언제나 눈이 풀려있는 문신쟁이이다. 오늘도 눈만큼이나 혀가 풀려버린 목소리로 내게 손을 흔들며 알은체를 한다.
“어이, 로키 오랜만이네. 이번에는 워터프론트로 파견 온거야?”
“..........”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그녀에게 종이쪽지를 건넸다. 그녀는 종이쪽지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쭉 하고 기지개를 켠다.
“급할 거 있어? 일단 자리에 앉으라구. 커피나 한잔 할래 자기?”
그녀는 질문과 동시에 커피를 내와 내 무르팍에 가져다 둔다. 극단적으로 마이페이스인지라, 나에게 제안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통보를 하는 것인지 때로는 분간이 되지 않는 화법을 구사하는 게 그녀의 특징이다. 그래도, 근본이 나쁘진 않아 남에게 뭔가를 대접하는 걸 좋아하는 것이 나로 하여금 그녀를 미워하지 못하게 만든다. 겉보기에는 멍청한 것 같지만, 아마 능구렁이 100마리를 뱃속에 넣어두고 다닐 여자다.
커피를 홀짝이는 동안, 그녀는 캐비닛장으로 걸어가서 메모에 적힌 번호와 일치하는 캐비닛을 찾아 물건을 꺼내 내게 건네준다. 봉투에는 잘 벼려진 잭나이프와 장갑, 그리고 푸른색 약병이 들려있다.
“내가 자기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만, 규정이니까 하도록 할게. 약은 캡슐로 되어있으니까 의뢰가 시작되기 직전에 물었다가 의뢰가 끝나면 입에서 빼도록 해, 만약에 체포되겠다 싶으면 주저 없이 그걸 깨물어. 그렇게 하면.”
“진짜로 지옥에서 한잔하게 되겠지.”
“그리고 장기 털이범들은 다른 시체를 챙겨 갈테고.”
그녀는 키득거리며 웃는다. 대상이 누가 되던지 간에 사람의 죽음은 그 자체로 그녀에게 즐거움을 주는 모양이다.
“내게 죽지 않기를 기도할건가?”
“기도가 무슨 소용이겠어, 자긴 어차피 이번에도 성공할 텐데 뭐........ 굳이 기도를 해주길 바란다면, 자기가 살짝 곤란해지는 쪽으로 기도해볼거야. 자긴 매력적인 남자긴 하지만, 너무 뻔해. 그런 남자는 완전 재미없지 않아? 자기가 나랑 좀 더 친밀해지고 싶으면, 그렇게 기도하길 바라던가.”
“뭐래, 미친년이?”
내말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꺄르륵 하고 웃는다. 그녀는 본성은 착한 것이 분명하지만, 타인의 고통이나 죽음을 즐거워하고, 자신에게 욕을 하는 것에 기뻐한다. 확실히 말해......... 그녀는 정상이 아닌 것 같다. 하기사, 내가 ‘정상’을 운운할만한 입장은 되지 못한다만 말이다.
Channel 2. 아이리스
제 하루는 아침 미사가 끝난 뒤에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저는 본당을 나서, 같은 장소에 배속 받은 동료 수녀와 함께 사역 장소로 향합니다. 미리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 교구에서는 석 달을 간격으로 장소를 바꿔가며 사역을 수행하고는 합니다. 저는 이번 회기에 빈민 구제소에서 사역을 수행하기로 되어있습니다.
백만의 사람들이 사는 이 거대한 라스알게티라는 도시에는,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소위 ‘빈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살고 있습니다. 어찌나 많이 살고 있던지, 라스알게티에는 빈민층들이 주민의 다수를 이루는 장소, 즉 ‘빈민가’ 혹은 ‘할렘가’가 이 도시에 있습니다. 아마 다섯 군데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곳을 사람들은 5대 우범지역이라고 부르죠. 이 빈민구제소는 바로 그 5대 우범지역중 하나에 자리잡고 있고요.
이 구제소의 건물은 퍽 노후되어 있어서, 농담을 즐겨하는 이들은 이 건물을 가리켜 ‘발로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것 같다.’라고 묘사하고는 합니다. 사실,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한 농담이긴 해요. 건물의 외벽에 금이 쩍쩍 가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몇 군데는 쥐가 파먹은 것처럼 벽이 떨어져 나가긴 했거든요.
내가 봐도 이곳에는 발길도 주기 싫어 보이지만, 언제나 이곳은 만원사례입니다. 그들이 병들고 도움이 필요할 때, 등을 비빌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이곳뿐이거든요. 매일 아침 이곳으로 출근 할 때면, 우리보다도 먼저 도착해서 페인트가 다 떨어진 벽에 기대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는 합니다. 처음에는 죄송한 마음에 출근시간을 앞당겨 보기도 했지만, 어느 시간대에 출근을 하더라도, 항상 이분들은 저희를 기다리곤 했어요. 이곳에서 밤을 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라구요. 결국은 저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정상적인 시간에 출근하게 되더군요.
당신들은 가난한 자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의 아드님은 가난한 자들을 지칭해 이렇게 말씀 하셨죠. ‘가난한 자들은 행복하다. 천국이 바로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라고요. 하지만, 제가 그 천국의 주인들을 보다보면, ‘그들이 빨리 자신의 소유를 찾기 위해 떠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곤 하더군요. 그 정도로 그들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비참합니다. 물론 자신의 소유를 찾기 위해 천국으로 떠나는 대신에, 현세에서 이 가난의 사슬을 끊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들이 퍽 많습니다. 아니, 제가 잘못 말했군요. 소위 빈민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이 도시에 사는 어떤 계층보다도 더 근면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경우는, 냉정하게 말하자면 많지 않습니다. 아니, 거의 없어요. 대부분은 자신의 노력에 훨씬 못 미치는 대가를 받으며 실컷 혹사만 당하다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몸이 상해, 버려지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슬프게도 거의 그런 경우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그들을 ‘죽지 않을 정도로.’ 치료를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기도력을 이용한 치료에 대해서는 강한 법적 규제가 걸려있거든요. 저는 이곳에 처음 배치되었을 때, 중견 수녀님이 19년간 다리를 움직이지 못했던 보행 장애인을 기도력으로 일으키는 것을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녀님을 다음날부터 이곳에서 볼 수가 없었죠. 그것을 본 누군가가 그녀를 고발했거든요. 그녀가 경찰에게 끌려가던 날 수많은 자매님들이 그녀를 위로하러 모였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비열한 것도, 악한 것도 신의 섭리에 합당하기만 하다면 선에 귀결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신의 섭리에 어긋난 모양인가 보죠.”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녀는 이 일을 하면서, 법적인 규제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그것에 대한 항의이자 자신의 마지막 봉사로서 그런 기적을 행한 것이었습니다.
갑과을작성일 2013-12-04추천 4
-
[영화리뷰] 쏠쿡열촤. 메타포의 메타포에 의한 메타포를 위한 영화.
퍼런옷을 벗어던진 캡틴의 새로운 영화 개척!하지만 봉준호와 박찬욱이 출동한다면??장르는 뭐예요~ 랄랄 라랄라~ 이영화는 가족영화도 아니고 오락영화도 아닙니다...신발...근데 난 그걸 몰랐어...모르고 여자친구랑 웃으며 들어갔어....잘만든 영화야...... 존나 잘만들었어....근데 내가 보려던 영화는 아니었어.......이영화는 메타포의 메타포에 의한 메타포를 위한 영화입니다.는 아니고........................하고자 하는 말은 따로 있습니다.뭐?? 배우가 마음에 안드니?? ㄴㄴ.... 기 승 전 콜라......영화는 잘 만든 영화, 즉, 감독이 원하고자하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잘 담아낸 훌륭한 영화입니다.문제는 이야기의 흐름에 있지요진지를 깊게 뭍혀내며 꼬리칸 사람의 애환을 담아내면서 액쑌을 가미한 도입부,방패도 없이 열차의 대가리로 향하는 캡틴.....좋아요, 좋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건요...레벨 디자인을 우습게 아쎄열?여기서 말하는 레벨 디자인은, 설정이 아닌 배경입니다, 게임 레벨 디자인을 말하는거아니냐구요? 맞습니다. 뭐 그런거죠.(설정은 이미 설정 덕후 스탭들이 삽을 깊게 파놔서 이야기 할거리도 없구요)문제는 이야기의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등장인물이 살아숨쉴 배경에 관한거죠1. 빙하기와 맞먹는 추위에 보수수리가 필요없는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것 같은 철로요?2. 근데 그걸 전세계로 이어놨다구요?3. 그런 기술수준으로 기차를 만들었으니 오죽 튼튼하니까 닥치고 보라구요??그게 아니구요~영화보는 내내 얘들 생각이 나더라~~~~~ 는 거죠"윌리... 이게 뭐죠..." "애들아......? 닥치고 그냥 봐........"그래요, 칸칸의 설정과 칸을 넘어가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싶다는거죠,자세한 내용은 슷뽀가 되니....대충 말하자면궂이~~ 먹는 음식재료를 보여주면서궂이~~ 해산물까지 보여주면서 칰힌 비프도 보여주면서사람들이 사는공간, 그외의 배경설정,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람들의 대사따위가 1g도 들어있지 않다는거죠.영화가 길어져서라구요?? 원래 이런거라구요??그렇다는거죠, 그말씀을 드리고 싶은거죠.이영화는친절한 영화가 아닙니다.친절한 금자씨를 연상케하는 뜬금포 캐릭터와 뜬금 전개가 너무 불편한 영화입니다.물론 이정도 수준은 아닙니다영화를 보시던, 보셨던 분들이 느꼈던, 뜬금없는 설정들이 바로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풀어내는 도구였나? 싶기도 하지만찰리와 촥헐릿 공장에서나 볼법한 레벨디자인이, 너무 이질적으로 다가온다는 겁니다...그래... ㅅㅂ 그렇다 치자... 다 좋다... 로 받아들이면서 느낄 수 있는 장르가 여퀴에 또 있지요 냄쿵민쑤?은유와 s/f....!!은유와 빵타지은유와 복쑤!!!너무 익숙한 콜라보의 모습이지요?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즤, 올뽀이, 복수는 내꺼!!!!!!!!!!!!!이쯤되면 눈치 채셨겠지만박찬욱 감독이 제작에 참여?했다는거죠박찬욱감독 영화를 너무 재밌게 본 저는, 이 정보를 알지 못하고 갔지요.왜냐? 나도 바뻐...사람이야.... 일도 해야혀...여튼 영화는 시종일관이러고 자빠져 있다는겁니다, 대충 아시겠지요?설정은 내가 했고, 레벨디자인도 내가 했는데, 이해는 니네가 해.이런 영화라는거죠.........난 몰랐지.......알았으면 마음먹고 봤을걸....... 참 편했을걸...결론이요??존박 냉면 성애자라는 이야기를 본적이 있습니다, 매우 웃겼지요? 전 이 영화를 메타포 성애자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헠헠...메..메타포로 가버렸!!리뷰를 마칩니다...
-
[자유·수다] 북한에서 제작된 여군사진모음앱
북한에서 제작된 앱이라고 합니다.
각종 북한 여군들 사진이 많이 담겨 있네요 여군들 얼굴이..
남남북녀라는 말이 확 와닫지는 않는군요
▲ ‘fotopedia north korea’애플리케이션 슬라이드 사진 화면 캡처
요즘 남한 여성들 워낙 성형수술 받는 사례들이 많아지고.. 화장법도 세련되졌고..
요즘 케이블 티비에서 90년대 사극을 가끔 보는데요
그당시 여주인공들은 뭐 성형안해도 이뻣기때문에 지금 주인공 맡는 여배우들과 비교할 대상이 아닌 것 같고
외모 관리를 그다지 할 필요 없는 그 당시시녀역할들이나 그외 여성 단역들 얼굴과
요즘 시대극 여성 단역들
얼굴이 다들 왜이리 달라보이던지요 요즘은 시녀역할이나 단역 하는 여성들도 다들 이쁜 편이던데 ㅎㅎ 화장법과 성형이 한몫했겠죠
그건 그렇고 왠지... 앱속에 최첨단 해킹 바이러스나 위치추적을 심어 놨을것 같은 생각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아이폰용 ‘fotopedia north korea’애플리케이션 메인 화면 캡처
북한 사진 1000여점을 볼 수 있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이 등장했다. 이 앱의 이름은 ‘fotopedia north korea’로 아이폰은 앱스토어에서 다운받아 설치하면 ‘북한’이라는 아이콘이 바탕화면에 나타난다. 실행을 시키면 여행 시작하기, 슬라이드쇼, 즐겨찾기 등 3개 메뉴를 골라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 슬라이드 속 사진들은 예술적 미학으로 승화시킨 북한 여성을 비롯한 교통경찰, 의료, 매체, 관광, 종교, 금수산기념궁전, 포스터, 평양직할시 거리, 김일성, 북한 어린이 등 다양하다. 특히 이번 앱에서 선보인 북한 사진들은 위치정보를 담고 있어 감상 중에 지구 모양의 메타포를 누르면 구글의 위성사진으로 촬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5일 미국의소리(VOA) 방송은 “스마트폰 앱을 공급하는 포토피디아(Fotopedia)가 최근 북한편을 출시했다”며 “프랑스의 에릭 라프로그 전문 사진작가가 지난 2008년부터 4차례에 걸쳐 방북해 찍은 사진 1000여점을 담고 있다”고 전했다. 포토피디아의 크리스토프 달리걸프 부사장은 VOA와 인터뷰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북한 내부를 그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 앱을 출시했다”며 “지난달 30일 프랑스에서는 모든 아이폰 앱 가운데 포토피디아 북한편이 다운로드 순위 1위를 차지했다”고 말했다.VOA는 “포토피디아는 앞서 ‘파리(Paris)’ ‘버마의 꿈’ 등 여러 사진 앱을 출시해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3만여명이 이용했다”며 “다운로드 수가 100만회에 이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앱을 다운로드 받아 사용해 본 한 네티즌은 “잘 만들어진 애플리케이션”이라면서 “남한과 다를바 없는 그들의 모습들이 무척 인상적”이라고 사용감을 밝혔다. 앱스토어에서 ‘fotopedia north korea’로 검색해 설치할 수 있고 다운로드는 무료다.
▲ 아이폰용 ‘fotopedia north korea’애플리케이션 슬라이드 사진 화면 캡처
▲ ‘fotopedia north korea’애플리케이션 슬라이드 사진 화면 캡처
▲ ‘fotopedia north korea’애플리케이션 슬라이드 사진 화면 캡처
▲ ‘fotopedia north korea’애플리케이션 슬라이드 사진 화면 캡처
▲ ‘fotopedia north korea’애플리케이션 내 구글 위성사진 보기 화면 캡처
코털소작성일 2011-07-06추천 2
-
[정치·경제·사회] 북한에서 제작된 여군사진모음앱
북한에서 제작된 앱이라고 합니다.
각종 북한 여군들 사진이 많이 담겨 있네요 여군들 얼굴이..
남남북녀라는 말이 확 와닫지는 않는군요
▲ ‘fotopedia north korea’애플리케이션 슬라이드 사진 화면 캡처
요즘 남한 여성들 워낙 성형수술 받는 사례들이 많아지고.. 화장법도 세련되졌고..
요즘 케이블 티비에서 90년대 사극을 가끔 보는데요
그당시 여주인공들은 뭐 성형안해도 이뻣기때문에 지금 주인공 맡는 여배우들과 비교할 대상이 아닌 것 같고
외모 관리를 그다지 할 필요 없는 그 당시시녀역할들이나 그외 여성 단역들 얼굴과
요즘 시대극 여성 단역들
얼굴이 다들 왜이리 달라보이던지요 요즘은 시녀역할이나 단역 하는 여성들도 다들 이쁜 편이던데 ㅎㅎ 화장법과 성형이 한몫했겠죠
그건 그렇고 왠지... 앱속에 최첨단 해킹 바이러스나 위치추적을 심어 놨을것 같은 생각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아이폰용 ‘fotopedia north korea’애플리케이션 메인 화면 캡처
북한 사진 1000여점을 볼 수 있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이 등장했다. 이 앱의 이름은 ‘fotopedia north korea’로 아이폰은 앱스토어에서 다운받아 설치하면 ‘북한’이라는 아이콘이 바탕화면에 나타난다. 실행을 시키면 여행 시작하기, 슬라이드쇼, 즐겨찾기 등 3개 메뉴를 골라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 슬라이드 속 사진들은 예술적 미학으로 승화시킨 북한 여성을 비롯한 교통경찰, 의료, 매체, 관광, 종교, 금수산기념궁전, 포스터, 평양직할시 거리, 김일성, 북한 어린이 등 다양하다. 특히 이번 앱에서 선보인 북한 사진들은 위치정보를 담고 있어 감상 중에 지구 모양의 메타포를 누르면 구글의 위성사진으로 촬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5일 미국의소리(VOA) 방송은 “스마트폰 앱을 공급하는 포토피디아(Fotopedia)가 최근 북한편을 출시했다”며 “프랑스의 에릭 라프로그 전문 사진작가가 지난 2008년부터 4차례에 걸쳐 방북해 찍은 사진 1000여점을 담고 있다”고 전했다. 포토피디아의 크리스토프 달리걸프 부사장은 VOA와 인터뷰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북한 내부를 그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 앱을 출시했다”며 “지난달 30일 프랑스에서는 모든 아이폰 앱 가운데 포토피디아 북한편이 다운로드 순위 1위를 차지했다”고 말했다.VOA는 “포토피디아는 앞서 ‘파리(Paris)’ ‘버마의 꿈’ 등 여러 사진 앱을 출시해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3만여명이 이용했다”며 “다운로드 수가 100만회에 이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앱을 다운로드 받아 사용해 본 한 네티즌은 “잘 만들어진 애플리케이션”이라면서 “남한과 다를바 없는 그들의 모습들이 무척 인상적”이라고 사용감을 밝혔다. 앱스토어에서 ‘fotopedia north korea’로 검색해 설치할 수 있고 다운로드는 무료다.
▲ 아이폰용 ‘fotopedia north korea’애플리케이션 슬라이드 사진 화면 캡처
▲ ‘fotopedia north korea’애플리케이션 슬라이드 사진 화면 캡처
▲ ‘fotopedia north korea’애플리케이션 슬라이드 사진 화면 캡처
▲ ‘fotopedia north korea’애플리케이션 슬라이드 사진 화면 캡처
▲ ‘fotopedia north korea’애플리케이션 내 구글 위성사진 보기 화면 캡처
코털소작성일 2011-07-06추천 1
-
[엽기유머] 헐리우드의 SF극작가
쥘 베른 jules verne (1828–1905)
쥘 베른(좌). 조르주 멜리어스의 [월세계 여행](우).'sf 문학의 아버지'라는 위상에 걸맞게,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은 아마도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많이 영상으로 옮겨진 작가일 것이다. 그 시작은 자그마치 109년 전. 조르주 멜리어스가 쥘 베른의 원작을 느슨하게 각색한 [월세계 여행](1902)을 내놓으면서부터, 베른과 영화의 만남은 시작된다. 할리우드가 처음으로 베른의 작품을 영화화한 건 1905년. 무성영화 [해저 2만리]가 그 시작이었고, 베른이 1870년에 쓴 소설 [해저 2만리]은 이후로도 tv와 스크린을 통해 수 차례 영화화된다. 할리우드에서 만든 [해저 2만리]의 첫 장편 버전은 1916년에 나왔다. 무성영화였는데, 스튜어트 페이턴 감독은 원작의 진지한 톤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해저 2만리]와 그 속편 격인 [신비의 섬]의 플롯을 묶어서 각색했다.
무성영화 [해저 2만리](좌). 디즈니가 제작한 [해저 2만리](우).이 영화는 미국영화 사상 최초로 수중 촬영을 했고, 노틸러스 호의 모형도 실제 크기로 제작했다. 좀 더 기술적으로 발전한 [해저 2만리]는 1954년에 나온다. 월트 디즈니가 제작한 [해저 2만리]는 당시로서는 엄청났던 5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였고, 제임스 메이슨이나 커크 더글러스 등의 스타가 출연하는 대작이었다. 쥘 베른의 작품들 중 할리우드의 관심을 끌었던 또 한 편의 원작은 바로 1864년에 나온 [지구 속 여행]. 할리우드에선 1959년에 처음 영화화되었고(한글 제목은 [마그마 탐험대]), 이후 여러 차례 tv 영화로 만들어지다가 2008년에 3d 영화인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가 나왔다.
[마그마 탐험대](좌)와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우). 모두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을 영화화한 작품이다.스팀펑크 스타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sf 소설은 아니지만 [80일간의 세계일주]도 할리우드가 매우 사랑했던 아이템. 최근 [신비의 섬]이 다시 영화화되었으며,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2013년 개봉을 예정으로 [해저 2만리: 캡틴 네모]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쥘 베른은 아직도 할리우드의 중요한 작가인 셈.
h.g. 웰스 h.g. wells (1866–1946)
h.g. 웰스(좌). 그의 증손자인 사이먼 웰스(우)는 [타임머신]을 영화화했다.조르주 멜리어스가 [월세계 여행]을 만들면서 참조했던 건 쥘 베른의 작품만은 아니었다. 그는 h.g. 웰스가 1901년에 쓴 [달의 첫 인간]에도 영감을 받았고, 베른과 웰스가 만난 작품이 바로 [월세계 여행]이었던 셈이다. 초기 sf의 양대 산맥이었던 베른과 웰스. 한때 베른은 후배인 웰스의 작품이 지나치게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한 적도 있었는데, 베른이 실현 가능한 미래를 상상했다면 웰스의 상상은 조금은 황당했다(베른이 상상했던 해저 여행이 지금은 가능하지만, 웰스가 생각한 타임머신이나 투명인간은 아직도 불가능하다). 웰스 스스로도 "내 작품에 등장하는 발명들은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 중 영화화된 주요작들은 이른바 'sf 로맨스'로 불렸던 6편의 작품들 중 4편과 [다가올 세계]. 여기서 sf 로맨스는 [타임머신](1895), [닥터 모로의 섬](1896), [투명인간](1897), [우주 전쟁](1898), [잠든 자가 깨어날 때](1899), [달의 첫 인간](1901) 등 6편으로, 앞의 네 작품은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1960년(좌)과 2002년(우)의 [타임머신].[타임머신]은 1960년 조지 팰 감독에 의해 본격적으로 영화화되었다. 웰스가 19세기 말에 등장한 영화 장치의 영향을 받아 타임머신의 이미지를 떠올렸는데, 영화에서는 빅토리아 시대의 공상과 모던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다. 2002년엔 h.g. 웰스의 증손자인 사이먼 웰스 감독이 [타임 머신]을 연출했는데, 그는 이 영화에서 원작의 색채를 상당 부분 바꾸어, 타임머신을 발명하게 된 이유를 죽은 여자친구를 다시 보기 위한 것으로 설정해 멜로적인 컨셉트를 강화했다. [닥터 모로의 섬]은 세 번에 걸쳐 영화화되었다. 이 소설은 무신론자이며 다윈의 진화론에 심취했던 웰스의 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으로, 많은 공격을 받았으나 작가 자신은 "내가 쓴 소설 중 최고"라고 맞섰던 작품. 첫 영화화인 얼 c. 켄트 감독의 [닥터 모로의 dna](1933)은 억압되거나 인식되지 못한 섹슈얼리티의 테마가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미국의 검열이 강화되기 전에 만들어졌기에 그 표현이 강렬하다.
1996년에 만들어진 [닥터 모로의 dna](좌). 1933년에 나온 [투명인간](우).1977년에 만들어진 돈 테일러 감독의 [닥터 모로의 dna]는 으스스한 분위기는 많이 제거되었다. 모로 역의 버트 랭커스터는 과학자라기보다는 종교적 사제처럼 보이며, [혹성 탈출](1968)로 인정받은 존 챔버스의 특수분장이 인상적이다.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의 [닥터 모로의 dna](1996)는, 인간의 야수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웰스의 원작과 뜻을 같이 하지만 소설의 엑기스로 평가되었던 수술 장면을 대부분 삭제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소설 발간 100주년을 기념한 작품이다. [투명인간]은 1933년, [프랑켄슈타인](1931)으로 유명한 제임스 웨일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이후 웰스에 의해 만들어진 '투명인간' 컨셉트는 수많은 영화에 등장하는데 [투명인간의 귀환](1940) [투명 여성](1940) 등의 고전에 이어 최근작으로는 존 카펜터 감독의 [투명 인간의 사랑](1992)과 폴 버호벤 감독의 [할로우 맨](2000) 등이 있었다.
1953년(좌)과 2005년(우)의 [우주 전쟁].[우주 전쟁]은 1953년에 바이런 허스킨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사실 파라마운트 영화사는 1930년에 러시아(구 소련)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에게 [우주 전쟁]의 영화화를 제안했지만 거절 당했고, 1938년엔 오슨 웰스의 머큐리 극단에서도 시도했으나, 결국은 1953년에 와서야 스크린에 옮겨질 수 있었다. 하지만 [우주 전쟁]은 소설이 나온 지 108년 만에야 제대로 영화화되며, 그 주인공은 스티븐 스필버그였다. 혹자는 스필버그의 최고작으로 꼽은 [우주 전쟁](2005)은 최고의 오락 영화이면서 동시에 강한 정서적 효과를 주는 작품이다. 1933년, 웰스가 67세에 쓴 [다가올 세상]은 3년 후 윌리엄 캐머런 멘지스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로 오스카를 수상한 미술감독 출신인 멘지스 감독은 영화 [다가올 세상](1936)에서 원작을 꼼꼼하게 시각화하며 뛰어난 디테일을 보여준다. 직접 각색되지 않더라도 수많은 영화, tv 시리즈, 애니메이션 등에 영감을 주었고, 이후의 문학과 철학 등에 영향을 미쳤던 웰스의 작품은 할리우드에서 아직도 현재진행형, 1978년에 영화화되었던 [신의 음식]이 최근에 다시 만들어져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로버트 a. 하인라인 robert a. heinlein (1907–1988)
로버트 a. 하인라인(좌). 그의 소설 중 처음으로 영화화되었던 [데스티네이션 문]의 포스터(우).작가로서의 명성에 비해 로버트 a. 하인라인과 할리우드의 만남이 빈번한 건 아니었다. 처음으로 영화화된 작품은 1947년에 쓴 [로켓선 갈릴레오 rocketship galileo]. [데스티네이션 문 destination moon](1950)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2차 대전 때 해군에 복무했던 하인라인은 제대 후 왕성한 집필 활동을 선보이는데, 1948년에 쓴 청소년용 sf인 [스페이스 카데트]는 tv 시리즈인 [톰 코베트, 스페이스 카데트](1950~55)로 제작되어 6년 동안 큰 인기를 끌었다.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레드 플래닛](1994)도 하인라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 그의 소설인 [퍼핏 마스터]는 sf 호러인 [에이리언 마스터](1994)로 만들어졌다.
[에이리언 마스터](좌)와 [스타쉽 트루퍼스](우).아무래도 하인라인과 할리우드의 가장 완벽한 만남은 [스타쉽 트루퍼스](1997)일 듯. 1959년에 나온 소설로, 폴 버호벤 감독은 "어린 시절 하인라인의 소설 [스타쉽 트루퍼스]를 읽은 후 단 한 번도 이 소설의 이미지를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영화는 소설보다 좀 더 미래적인 이미지다. 하인라인의 소설이 친구에게 자랑하기 위해 군대를 택한 소년이 군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 소설의 느낌이 있었다면, 버호벤의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는 미래 군인과 외계 군단의 대결에 초점을 맞춘 완벽한 블록버스터다.
잭 피니 jack finney (1911–1995)
잭 피니의 모습(좌). [바디 스내처]의 첫 영화화인 [우주의 침입자]의 오프닝 크레디트(우).sf와 스릴러를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썼지만, 잭 피니라는 이름은 할리우드에서 sf 작가로 통하며, 이것은 그가 1955년에 [콜리어스]라는 잡지에 연재를 시작한 [바디 스내처] 때문이다. 1950년대, 197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007년. 반 세기 동안 네 번에 걸쳐 끊임없이 영화화된 [바디 스내처]는,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그릇이 넓은 영화. 존재의 진실성을 믿지 못하는 '카그라스 증후군'(capgras syndrome)이 sf의 상상력과 호러의 악몽을 만난 [바디 스내처]가 드러내는 본질적 공포는 '표면과 본질의 불균형'이기도 하다 잭 피니의 소설이 나온 지 1년 만에, 돈 시겔 감독은 [우주의 침입자](1956)을 내놓는다. 원작 소설의 설정은 어느 죽어가는 행성의 생명체들이 태양열을 에너지 삼아 우주 공간을 떠돌아다니다 지구에 정착해, 지구의 생명체들을 강탈한다는 것. 그들은 지구의 에너지를 모두 소모한 후 그들은 다른 행성으로 옮겨간다. 돈 시겔은 원작의 sf 요소를 배제하고 호러의 성격을 강화했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우주의 침입자](1956) [우주의 침입자](1978) [보디 에일리언] [인베이젼].[우주의 침입자](1956)가 매카시즘에 대한 메타포였다면, 1970년대에 나온 필립 카우프먼 감독의 [우주의 침입자](1978)는 미국 사회가 병들어 있음을 드러내는, '포스트 워터게이트' 시대의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엔 '생명 과학에 대한 의심'이라는 테마가 있는데, 1950년대 버전에서 핵 공포가 느껴진다면, 1970년대 버전에선 유전자 조작이라는 부분을 드러낸다. 아벨 페라라 감독은 [보디 에일리언](1993)에서 걸프 전쟁을 드러내며 생화학전을 암시한다면, 2007년에 나온 [인베이젼]에선 포스트 9.11 시대의 징후가 느껴진다. 이 영화는 테러 이후 미국과 미국인들이 지니게 된 호전적 경향을 보여주며, 마지막 장면에선 바그다드에서 또 83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막을 내린다.
아서 c. 클라크 arthur c. clarke (1917–2008)
아서 c. 클라크(좌)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우).과학적인 설득력을 갖춘 그의 소설들은 인간의 미래에 관한 지적인 우화들을 논리적으로 조화시키는, 탄탄한 기본기의 작품들. 하지만 그가 대중과 친숙해진 결정적 계기는, 소설이 아니라 영화였다. 1964년에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를 끝낸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차기작 아이템은 다음과 같았다. "대부분의 우주 비행사와 몇몇 과학자들은 우주가 생명체로 우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다. 생명체 중 많은 수가 지구인과 같은 수준의 지성을 지녔거나 우리보다 우월한데, 이것은 인간의 지성이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좌)와 [2010 우주 여행](우).그는 당대 최고의 sf 작가 중 한 명인 아서 c. 클라크를 찾아갔고, 클라크는 그에게 [센티넬 the sentinel]이라는 단편을 건넨다. 과거 bbc 방송국의 공모전에 냈다가 후보작 명단에도 못 올랐던 이 소설은, 이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9. 이하 [2001])의 달 장면을 이룬다. 이후 클라크와 큐브릭은 서로 의견을 교환했고, 시나리오와 소설이 동시에 진행되는 특이한 창작 순서를 거쳤다. 아서 c. 클라크는 [2001] 이후 3권의 속편을 발표했다. 1982년의 [2010]과 1988년의 [2061]과 1997년의 [3001]. 피터 하이엄스 감독의 [2010 우주 여행](1984)은 [2010]을 영화화 한 작품으로 디스커버리 호 사고가 발생한 지 9년이 지난 어느 날, 디스커버리 호의 재생 훈련을 받은 3명의 엔지니어가 목성 탐사에서 미지의 지성체를 발견한 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파괴되는 이야기다. 그가 1949년에 쓴 단편 [브레이킹 스트레인 breaking strain]은 [데드 트랩 trapped in space](1994)로 영화화되기도. 현재 2013년 개봉 예정으로 클라크의 걸작 중 하나인 [라마]의 영화화가 진행 중. 한때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이름이 언급되었으나 핀처는 [해저 2만리] 프로젝트로 마음을 돌린 상황이다.
레이 브래드베리 ray bradbury(1920~ )
레이 브래드베이(좌)와 [화씨 451]의 한 장면(우).프랑스의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이 만든 [화씨 451](1966)의 원작자인 레이 브래드베리는, 할리우드와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작업해온 작가다. 먼저 인연을 맺은 쪽은 tv. 1950년대 초부터 수많은 tv 시리즈에 원안을 제공하거나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화씨 451] 이후에, 할리우드에서도 그의 소설이 영화로 각색되기 시작하는데, [일러스트레이티드 맨](1969)은 그 본격적 시작. [이상한 실종](1983)은 자신의 소설인 [사악한 것이 온다 something wicked this way comes]를 직접 각색한 작품으로, sf라기보다는 판타지 스릴러에 더 가깝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좌)과 [이상한 실종](우).1985년엔 그가 시나리오를 쓰는 [레이 브래드베리 극장]이 tv 시리즈로 만들어지기도. 1992년까지 8년 동안 지속되었다. 한편 그는 존 휴스턴 감독의 부탁으로 허먼 멜빌의 [모비딕] 각색 작업을 하기도 했는데, 그 과정과 영화 제작기 등을 담은 세미 픽션인 [그린 쉐도우, 화이트 웨일 green shadows, white whale]을 쓰기도 했다. 마이클 무어가 [화씨 9/11]을 내놓았을 땐, 자신의 소설 제목을 패러디한 것에 불쾌함을 드러내며 제목을 바꿔주기를 요구했으나, 이미 마케팅이 진행된 상황이어서 불가능했다는 후문.
아이작 아시모프 isaac asimov (1920–1992)
아이작 아시모프(좌). 1944년 해군에서 로버트 하인라인과 함께 복무할 때의 모습(우). 사진 속에서 오른쪽이 아시모프다.로버트 하인라인, 아서 c. 클라크 등과 함께 sf 문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아이작 아시모프는 1939년에 첫 작품을 낸 후 다양한 장르에 걸쳐 엄청난 양의 책을 썼지만, 영화와의 인연은 그렇게 깊지 못했다. 아시모프의 작품이 제대로 영화화된 건, 그가 죽은 지 7년이 되는 1999년의 [바이센테니얼 맨]. 소설 [바이센테이얼맨]과 [양자 인간 the positronic man]을 조합해 만든 영화로, 하인 로봇으로 제작된 앤드류(로빈 윌리엄스)가 사랑을 배우고, 훗날 진짜 인간이 되기 위해 몇 백 년간의 긴 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이센테니얼 맨](좌)과 [아이, 로봇](우).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아이, 로봇](2004)은 아시모프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 아시모프에 의해 만들어진 '로봇의 3원칙'이 영화의 뼈대다. 사실 직접적으로 영화화된 소설은 적지만, 수많은 로봇 영화의 근간이 아시모프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리처드 매드슨 richard matheson (1926~ )
리처드 매드슨(좌). [놀랍도록 줄어든 사나이](우).sf는 물론 판타지 소설을 통해서도 할리우드와 꾸준한 관계를 맺어온 리처드 매드슨이 최근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나는 전설이다](2007)였지만, 이전에도 매드슨의 소설은 종종 영화화되곤 했다. 그의 소설은 최근작 보다는 1980년 이전의 초기작들이 주로 영화화되었는데, 그 시작은 1956년에 쓴 [줄어드는 남자]를 영화화한 [놀랍도록 줄어든 사나이](1957). 이후 [환상 특급](1959~64)를 비롯한 수많은 tv 시리즈에 스토리를 제공했던 매드슨은 아예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와 각색자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오메가 맨](좌)과 [나는 전설이다](우)sf가 아닌 판타지 로맨스 소설도 영화화되었는데, 1975년에 쓴 [시간 여행자의 사랑]은 [사랑의 은하수](1980)로, 1978년에 쓴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같은 이름으로 1998년에 영화화되었다. 한편 매드슨이 1954년에 쓴 [나는 전설이다]는 네 번에 걸쳐 영화화되었는데, 1964년에 이탈리아에서 영화화된 이후 1971년에 보리스 시걸 감독이 [오메가 맨]을 내놓았고, 2007년엔 dvd 시장으로 직행한 [아이 엠 오메가]가 있었다. 대부분 알고 있는 [나는 전설이다]의 영화 버전은 윌 스미스 주연의 2007년 작품이다.
필립 k. 딕 philip k. dick (1928–1982)
필립 k. 딕(좌). [블레이드 러너](우).그가 세상을 떠난 1982년, 리들리 스코트의 [블레이드 러너]는 세상에 나왔다. 그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가 원작. 흥행엔 실패했지만 조금씩 컬트적인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10년 후 디렉터스 컷이 나오면서 필립 k. 딕이라는 이름은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에 어린 동생의 죽음을 경험한 후,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 존 캠벨의 sf 소설을 탐독하던 소년이었던 필립 k. 딕. 하지만 그는 낮엔 먹고 살기 위해 일하고, 밤엔 글을 쓰기 각성제를 복용하며, 결국은 편집증에 시달린다.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정체성의 혼란, 통제된 사회에 대한 강박, 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비전 등은 작가의 이러한 삶으로부터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그는 cia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습격을 받은 후 결국은 캐나다로 갔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좌)와 [스캐너 다클리](우).살아 있을 땐 작가로서 그다지 평가 받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이 드높여진 건 할리우드가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블레이드 러너]의 복원 전에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를 영화화한 [토탈 리콜](1990)이 나왔고, 1995년엔 [스크리머스]가 만들어졌다. 본격적인 재조명은 21세기 들어서 시작되었다. [임포스터](2002)를 시작으로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는 결정타였고, [페이첵](2003)이 이어졌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로토스코핑 방식으로 [스캐너 다클리](2006)를 영화화했고, 그 다음은 [넥스트](2007)였다. 그리고 올해, [컨트롤러]가 관객과 만났다.
마이클 크라이튼 michael crichton (1942~2008)
마이클 크라이튼(좌). [이색지대](우)3년 전 세상을 떠난 마이클 크라이튼은 한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가이자, tv 시리즈 [er]의 제작자이기도 했다(크라이튼은 하버드 의대 출신이다). 그의 소설이 처음으로 영화화된 건 [안드로메다의 위기](1971). 정체 불명의 외계 물질에 의해 전*이 생겨난다는 설정이다. 할리우드에서 그의 이름을 확고하게 다진 계기는 원작자로서가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으로서였다. 1972년에 tv 영화에서 첫 연출 경험을 가진 그는 [이색지대 westworld](1973)와 [죽음의 가스 coma](1978)의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감독으로서는 그다지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그의 제자리는 역시 작가. 그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걸친 탁월한 지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를 다룬 여러 장르의 소설을 써 대중의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화화를 염두에 둔 시각적인 소설로 할리우드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스피어](좌)와 [쥬라기 공원](우).
[쥬라기 공원](1993)은 그의 흥행 파워가 대폭발을 일으킨 작품. [콩고](1995) [잃어버린 세계](1997) [스피어](1998) 등의 sf가 이어지면서 그는 할리우드의 '파워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트위스터](1996)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sf 이외의 장르에서도 크라이튼은 중요한 작가였는데, [떠오르는 태양](1993) [폭로](1994) 등이 화제를 모았고, 최근엔 [타임라인](2003)이 있었다. 그가 쓴 [이색지대]가 2012년 개봉 예정으로 리메이크된다는 소문. 러셀 크로가 주연을 맡는다.
출처 : 네이버
카라메롱작성일 2011-03-23추천 6
-
문서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