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검색 결과(20)
-
-
[스포츠] KBL) 김승현, 우지원 팟캐스트 내용
김 : 나 NBA 많이 봐서 안다. 모든 NBA선수들이 다 하이파이브 해주는거 아니다 우 : 선수는 경기 끝나면 빨리 라커에 들어가서 감독과 미팅을 해야한다. 그런데 그 수많은 팬들을 다 해드릴순 없다. 선수의 마음이 이해가지만 팬에게 상처를 준거 같아 미안하다. 김 : 팬과 선수 모두의 잘못이다. 어린관객이 뭘 알겠냐. 그 어린관객에게는 이기고 지고는 중요한게 아니다. 단지 선수들이 좋아서 하이파이브 하기위해 기다린것. 그 경기처럼 30점정도 차이나는 경기는 선수들의 의욕이 상실되고 화가난 상태다. 그정도 경기라면 그 아이의 부모가 하이파이브를 못하게 잡았어야 한다. 우 : 선수와 팬의 인식, 문화 차이다. KCC트레이드 이후에 분위기 안좋고 그날은 대패한경기 나였다면 고개도 못들고 땅바닥만 쳐다 봤을것. 못봤을 수도 있다. 많은 팬들의 지적과 비난 서운할것 같다. 그리고 팬들도 서운할 수 있었을것 같다. 김 : 영상을 자세히 보시면 어린팬이 손만 내밀었을뿐 아무 말도 제스처가 없었다. 하이파이브 해주세요 했으면 안해줄 선수 없다. 졌기 때문에 땅바닥보면서 못보고 지나친 선수가 많았던것 같다. 김,우 : 예전에는 졌는데 웃거나 떴떴하게 걷고 있으면 감독, 코치, 프런트에게 찍힘 우 : 선수를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선수들이 일부러 외면하려 한게 아니고 그날 분위기상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을것. 농구팬들이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중략 김 : 진정한 팬이라면 코트에서 열심히 뛰는것을 보는것으로 만족. 사적인 모습까지바라는건 바람직하지 않다. NBA선수들은 팬들과 소통을 잘함. 관객들과의 거리가 가까움. 팬들과 다투는 경우도 잦다. 론 아테스트는 팬하고 치고 받고 싸운적도 있다. 미국문화는 선후배 예의가 없다. 다 친구임. 고로 언행폭력이 많다. 우 : 미국은 하이파이브나 악수 같은건 친구니까 잘해줌. 우리랑 다름 (존댓말, 유교사상). 요새는 감독이랑 하이파이브도 하는데 대학다닐때만해도 감독과 하이파이브해본 기억이 거의 없음. 김 : NBA경기를 자세히 봐라. 전반끝나고 락커갈때보면 어린팬들 하이파이브 해달라고 손 내밀고 있다. 대부분 안하고 그냥 들어간다. 특히 전반을 지고 있는경우는 더 그렇다. 우 : 선수들이 라커가서 감독 코치 지시 받고 빨리 나와야 하기때문에 수많은 팬들과 다 하이파이브 해줄순 없다. 김 : 경기전, 경기후라면 충분히 해줄수 있다. 우 : 팬, 선수 조금씩 바뀌어야한다. 상황을 이해해 주면 좋겠다(하프타임에 선수들이 라커가서 감독 코치 지시 받고 빨리 나와야 하기때문에..... 이런것들) 경기전, 경기후 미팅끝나고 난뒤에는 해줄수 있다. 서로 이해해 주면 더 좋아질수있다. 김 : 선수, 팬 둘다 잘못이다. 그런데 100% 선수들의 잘못으로 몰고 가고있다. 내가 선출이라 그런지 몰라도 대패당한 상황에서는 선수들이 팬을 못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라건아,한정원은 키가 커서 팬을 볼수 있었음. 우 : 라건아는 미국출신이라 자연스럽게 한것 같다. http://cafe.daum.net/ilovenba/1p8S/96188
woos작성일 2020-12-07추천 24
-
-
[엽기유머] 조던 vs 르브론
아저씨들은 왜 르브론보다 '조던'을 더 좋아할까 ▲ NBA 올스타전, 팀 르브론 역전승…제임스 MVP 등극 지난 2월 18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2017-2018 미프로농구(NBA) 올스타전에서, 르브론 제임스(클리블랜드)가 이끄는 '팀 르브론'이 스테픈 커리(골든스테이트)의 '팀 스테픈'에 148-145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사진은 양 팀 통틀어 최다 득점인 29점, 10리바운드, 8어시스트로 팀 승리를 이끌며 통산 3번째 올스타전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된 제임스가 MVP 트로피를 들고 있는 모습. 르브론 제임스가 LA 레이커스에서의 첫 시범 경기를 소화했다. 그리고 이번 시즌에 팀을 옮긴 르브론 제임스가 활약할수록 농구 팬들의 오랜 논쟁이 또 다시 시작될 것이다. 농구 팬이라면 이미 눈치 챘을 이 논쟁은 사실 지난 9월 1일 미국 CBS 스포츠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어느 정도 답이 나왔었다. 이 오래된 논쟁이 무엇이냐고?바로 마이클 조던과 르브론 제임스 중 누가 더 뛰어난 선수냐는 것이다. 앞서 말한 CBS 스포츠에서 미국 대학 농구 코치 100명 이상에게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는 82%라는 압도적 지지로 마이클 조던이 르브론 제임스보다 많은 표를 받았다. 그러나 18%는 르브론 제임스의 손을 들어주었고 르브론 제임스의 시대는 아직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 이 비율은 분명히 다시 바뀔 가능성도 존재한다.하지만 적어도 내 마음 속 농구 황제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르브론 제임스가 아닌 마이클 조던일 것이다. 마이클 조던의 시대를 경험하지 못하고 르브론 제임스의 시대를 살고 있는 농구팬이라면 이런 내 생각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마이클 조던이 뛰던 시절은 제대로 경기도 볼 수 없었다. 그저 몇 경기 본 것 가지고 마이클 조던을 신격화할 수 있을까.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다.'농구 관련 기사에 마이클 조던이 아닌 르브론 제임스를 지지하는 팬들은 이렇게 말한다. 국내에서는 마이클 조던 경기를 쉽게 접할 수도 없었는데 무조건 마이클 조던 편만 든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때도 NBA 경기를 볼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AFKN이라는 미국 방송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었고 그 당시는 서울 방송이라 불리던 SBS를 통해서도 중요 경기를 시청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를 구해서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 댓글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이런저런 방법으로 그 시절 NBA를 봤다 하더라도 NBA 전 경기를 다 챙겨볼 수 있는 지금에 비하면 분명 많은 경기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니 그들의 주장도 분명 일리 있는 주장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르브론 제임스와 마이클 조던 중 한 명을 고르라면 난 여전히 마이클 조던을 택할 것이다. 대체 왜?2016년 방영되었던 MBC 드라마 <역도 요정 김복주>에서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어떻게 접근할지 고민하는 여자 주인공 김복주(김성경 분)을 향해 정난희(조혜정 분)가 이렇게 말해보라고 조언한다. "메시 좋아하세요?"남자들은 축구를 좋아하며 그 축구를 대표하는 인물이 메시인 만큼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질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 내 마음 속 농구 황제가 왜 영원히 마이클 조던인지 명확해졌다. 만약 1990년대였다면 정난희가 해 준 조언은 이렇게 바뀌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조던 좋아하세요?"즉 내가 살던 1990년대는 마이클 조던의 시대였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마이클 조던'이라는 단어가 오로지 마이클 조던 선수 한 명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는 가히 농구의 시대라 불릴 만했다. 그렇기에 농구를 대표하는 '마이클 조던'이라는 단어에는 단순히 '농구 황제'라는 의미만이 아닌 1990년대 학창 시절을 보냈던 젊은이들의 추억과 삶이 그대로 묻어 있었던 것이다.그래서 여전히 르브론 제임스가 아닌 마이클 조던을 농구 황제로 부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세대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이야기일 수 있으며 누구나 100%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1990년대를 중고생으로 살았던 한 사람의 그 시절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직도 왜 그리도 마이클 조던을 잊지 못하고 있는 아저씨들이 많은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될 지도 모르니까.1990년대가 정말 농구의 시대였냐고 묻는다면 드라마 하나를 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바로 2013년에 큰 인기를 끌었던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다. 다음은 <응답하라 1994> 홈페이지에 올라온 여자 주인공 성나정(고아라 분)에 대한 설명 부분이다.'컴퓨터 공학과 1학년. 수업엔 늦어도 상민오빠 연습시간은 칼같이 챙기고 전공수업은 빼먹어도 상민오빠의 출석체크엔 목숨을 거는 연대 농구부 아니 정확히는 연대 농구부 이상민 빠순이. 사실 농구경기에도 농구규칙에도 별 관심이 없다.'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농구 규칙도 모르면서 농구 선수를 좋아하는 여자 주인공이 나올 만큼 당시 농구 인기는 대단했다. 그리고 그 농구 인기를 대표하는 대회가 바로 프로 농구가 출범하기 전 열렸던 농구 대잔치였다. 이 대회에는 실업팀과 대학팀들이 참여하여 우승을 가렸다. 그리고 그 당시 농구 선수들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 나온 것처럼 우지원, 이상민 등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는 연세대 농구부가 있었고, 연세대 농구부만큼이나 인기 있었던 연세대의 라이벌 고려대가 있었다. 또한 농구 대통령 허재, 강동희, 김유택 등이 버틴 당시 농구 최강자 실업팀 기아도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당시 농구 인기는 현실 세계에서만 그 힘을 발휘했던 것은 아니다. 현실 세계가 아닌 드라마에서도 농구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1994년 방영된 농구를 소재로 한 드라마 <마지막 승부>는 최고 시청률 48.6%를 기록했었다. 그리고 <마지막 승부>의 인기는 주연이었던 장동건을 확실한 청춘스타로 올려놓기까지 했다. 또한 1992~1996년 주간 만화잡지 <소년챔프>의 별책부록으로 연재된 농구를 주제로 한 만화 <슬램덩크>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직접 농구를 즐기던 중고생들도 많았다. 그 당시 농구 코트가 있는 중학교나 고등학교에는 주말마다 농구를 하려고 나온 학생들로 붐볐었다. 나 역시 중학교와 고등학교 6년 내내 주말이면 거의 농구를 하러 가곤 했었다. 그리고 이렇게 농구 열풍이 불었던 시기는 마이클 조던이 중간에 은퇴를 한 번 했다가 다시 돌아온 시절이 있었지만 3년 연속 NBA 우승(1991-1993, 1996-1998)을 무려 2번이나 이룩한 시대이기도 하다. 즉, 그렇게 농구가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던 시절 농구를 대표하는 상징이 바로 마이클 조던이었던 셈이다. 그랬기에 마이클 조던의 전성기를 함께 한 청춘들은 여전히 어떤 농구 천재가 오더라도 마이클 조던을 능가하는 선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꼭 마이클 조던이 농구를 잘해서라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마이클 조던'이라는 단어가 곧 농구의 시대를 살았던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상징하기에, 그 추억을 꼭 붙들고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
-
-
-
-
-
-
-
[스포츠동영상] 전설의 슛도사 이충희를 아십니까?
중학교 시절만 해도 겨울에는 농구 대잔치 중계를 많이 즐겼습니다. 개인적으로 농구공을 처음 잡고 농구라는
운동을 직접 하게 되었던 때도 중학교 시절.. (중학교 1학년 당시 제 키가 185cm.. 키 크다는 이유로 동네 형들이
농구 경기에 끼워주었고 저도 하면서 상당한 재미를 느꼈었죠. 참고로 그 이후 신기하게도 키는 1cm도 자라지 않았
습니다.....허허)
그 시절 가장 좋아했던 팀은 촌스러운 녹색 유니폼으로 상징되는 현대전자였습니다.
현대 전자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선수로서 작은 신장이지만 재빠른 스텝과 3점 라인(당시에는 없었음) 언저리에서
드러눕다시피 던지는 페이드 어웨이 슛을 구사하며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준 이충희 선수 때문이었습니다.
농구 대잔치 시절의 기록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는 곳이 없는 것 같아서 이충희 선수가 전*를 구가하였던 80년대
의 구체적인 시즌 기록을 언급하기는 힘들지만 대충의 기억만 정리해도 득점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선수
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이미 최고의 슈터로 인정받으며 고려대의 49연승을 이끌었던 이충희 선수가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
로 보여준 것은 아마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농구 결승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대회에서 한국 농구는 20년 만
에 만리장성 중국을 넘어서며 아시아 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요. 이 경기에서 이충희 선수는 30점을 몰아넣으
며 한국이 금메달을 따는데 최고의 수훈을 세우게 됩니다.(당시에는 3점슛이 없었던 시기였죠. 이런 상황에서 외곽에
서 주로 득점을 하는 이충희 선수가 30점을 넣었다는 것은 엄청난 폭발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흐음.... 지금부터 이름 뒤에 선수 및 감독이라는 호칭은 생략하겠습니다.
이후 현대 전자에 입단한 이충희는 중앙대와의 경기에서 60득점을 기록하며 최고 득점 기록을 갈아치웁니다.
(이전까지 한경기 최다 득점 기록은 이충희 이전에 신동파가 기록한 57득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60득점
이상 경기를 몇번 보여준 이충희는 명지대와의 경기에서 국내 한 경기 최다 득점인 69득점의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이 때 플레이 타임이 33분 정도였다고 그러네요. '풀타임을 소화했다면~'이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참고로 kbl 최다
득점 기록은 밀어주기 파문으로 얼룩진 우지원의 70득점입니다. 그리고 농구 대잔치 외의 아마 대회에서의 최다 득점
은 1987년 전국 체전에서 최철권이 세운 97득점입니다.)
농구 대잔치 시절 이충희는 국내 농구 선수 중 최초로 4000득점을 돌파한 선수였으며(아마 4412점 정도였던 것 같습
니다. 물론 이충희 보다 커리어를 더 지속한 고 김현준이 이후 이 기록을 깨게됩니다만 그 이전까지 최다 득점 기록
은 이충희였습니다.) 커리어 기간 내내 국내 리그와 국가대표를 오가며 쉬지를 못했던 이충희는 80년대 후반부터 무
릎이 고장나며 하향세를 겪게 되고 비슷한 시기에 허재를 중심으로 김유택, 한기범, 강정수, 정덕화 등으로 무장한
사기 유닛 기아 자동차의 등장으로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당시 기아 자동차의 정덕화는 이충희 전담 수비수로 명성을 날리며 주가를 올리게 되는데 정덕화의 수비력이 뛰어
났던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 시기 이충희는 이미 정상적인 몸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훗날 당시 현대전자의 감독이었던 정광석 감독은 그 몸 상태로 뛰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고 말했다는군요.)
1992년 국내에서 현역 은퇴를 선언한 이충희는 대만으로 건너가 홍쿠오팀의 플레잉 코치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충희가 입단하기 전 6위에 머물렀던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대만팬들로부터 신사수(神射手)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게 됩니다.
농구 대잔치 시절 이충희는 현대전자의 우승을 이끌며 83~85년까지 mvp를 3회 수상하였고, 5시즌 연속 득점왕, 1982
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87년 abc 대회 mvp 등의 화려한 경력을 남겼습니다.
이충희의 농구 대잔치 시절 평균 득점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년도
경기
총 득점
평균 득점
1983
26
642
24.6
1984
21
687
32.71
1985
13
434
33.38
1986
23
695
30.21
1987
14
473
33.78
1988
21
629
29.95
1989
14
439
31.35
1990
19
339
17.84
1991
14
74
5.28
총
165 경기 출장
4412
26.7
90, 91년 시즌 이충희는 이미 손가락 부상과 한계에 다다른 무릎으로 인해 풀타임 출전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승부처에서 투입되는 식스맨 정도의 역할만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두 시즌을 제외하고 농구 대잔치에서 보여준
이충희의 득점력은 지금 봐도 엄청난 것이죠. 1988년 12월 17일에 이충희는 통산 3000득점을 돌파하게되는데 3000
점을 돌파하는데까지 99경기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이 시기까지 이충희의 평균 득점은 30.5득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충희라는 이름 석자는 세계 남자 선수권 대회의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계 선수권 대회에 한국이
참가한 것은 총 6차례입니다. 통산 성적은 9승 30패. 1970년에 처음 출전하였고, 그 대회에서 기록한 11위가 역대 최
고 성적입니다.
이충희는 1986년 대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45점을 올렸습니다. 이 기록은 세계 선수권 역사상 한 경기 최다 득점
공동 6위에 해당되는 기록입니다.(당시 한국팀은 전반전에 브라질을 상대로 37점을 기록하였습니다. 이중 36득점이
이충희가 기록한 것이고 1점은 이문규의 자유투였습니다.) 당시 대회에서 이충희는 득점 랭킹 2위에 올랐습니다.
이 대회가 끝나고 이충희는 nba 댈러스 마베릭스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게 되었으나, 82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병역 혜택을 받았던 이충희는 당시 병역 혜택 시점부터 5년 동안 해외 진출 금지라는 병역특례규정에 발목이 잡혀
nba 진출에는 실패하게 됩니다. 잠시 이야기의 폭을 넓히면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눈에 띄는 성적을 남긴 적이 없는
한국 남자 농구 대표팀이지만 득점 부분에 있어서는 그 역사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선수가 두 명 더 있습니다.
슈터 계보에서 첫번째로 꼽히는 신동파는 1970년 세계 선수권에서 8경기 동안 평균 32.6 득점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역대 대회 통산 평균 득점 2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당연히 1970년 세계 선수권 대회 득점 1위는 신동파였습니다. 그리고 1990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
에서 허재는 이집트전에서 62득점을 퍼부으며 한국의 유일한 1승을 이끌었습니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세계 선수권 역대 단일 경기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종종 국내 농구 관련 글들을 보다보면 가장 많이 일어나는 논쟁이 이충희와 허재 중 누가 최고인가라는 논쟁일 것입
니다. 농구 선수로서의 완성도는 당연히 허재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두 선수 모두 레전드로 부족함이 없는
실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수라는 생각이 드네요. 누가 최고냐라는 논쟁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
다. 전*도 달랐고요. 동시에 플레이 스타일과 포지션 등의 문제를 고려하면 이충희와 허재의 비교는 무의미하다
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를 최고라 주장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로 인해 또다른 레전드들을 폄하
하고 깎아내리는 것은 틀린게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
앞서 첨부한 영상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유고 슬라비아를 상대로 한 경기 모습입니다. 단신으로 저 장대숲을
누비며 돌파와 외곽슛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득점을 올리는 모습은 지금 봐도 인상적이네요.
농구 선수로서 뛰어난 신체 조건도 아니었고 이충희의 시력 이야기야 워낙에 유명한 이야기니까 새삼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겠죠. 그런 핸디캡의 극복은 결국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겠지요.
포스팅에 이용된 정보들은 마이데일리, 점프볼의 기사와 후추닷컴 명예의 전당을 참고로 했습니다.
(출처 - kaga4467.egloos.com)
-
-
-
-
-
-
-
-
문서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