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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동영상] 90년대 한국축구의 전도유망한 축구신동이자 축구천재
'전방으로 찔러 넣는 정확한 패싱과 천부적인 득점감각' '문전 앞 직접 프리킥은 90%이상 골로 연결시키는 정교한 스핀킥' '게임 리더이자 찬스 메이커이며 스트라이커 이기도 한 축구천재' 그리고 90년대 '한국 축구의 희망' 이상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대략 4년간 그를 따라다녔던 수사다. 과장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장담하긴 어렵다. 특히 직접 프리킥을 90% 이상 차서 넣었는지 못넣었는지는 세어본 적이 없으니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기재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 빨리 시들어버린 그의 축구 인생에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다. 일간스포츠 축구팀 박재영 부장은 그를 두고 이렇게 단언한다. "비교가 안된다. 잘하는 선수는 많아도 그처럼 '축구 천재' 소리를 들을만한 선수는 흔치 않다. 앞으로도 어렵다." 김병수는 강원도 홍천초등학교에서 처음 축구화를 신었다. 20년전 일이다. 축구를 잘한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돌았다. 미동 초등학교 천명길 코치가 강원도까지 찾아가 그를 스카우트해왔다. 일단 서울로 오자 '신동 났다'는 소문이 더 빨리 퍼졌다. 포항제철 감독이었던 한홍기 선생은 이 '신동'을 대선수로 키워보겠다고 아예 포철축구단 숙소로 데려갔다. 어린 아이 혼자서 외로움을 탄다고 어머니에게 선수단 식단까지 맡기면서 말이다. 어린 꼬마는 포철 연습장에서 포철 선수들과 연습을 했다. 그의 연습상대는 김철수, 박창선, 최순호, 조태천 같은 당시 쟁쟁한 스타 선수들. 어린 아이가 축구를 조금하니까 그저 귀여워만 했던게 아니었다. 훈련 중에 아저씨들 앞에 나가서 개인기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때론 연습 경기에 투입(?)되어 아저씨들을 제치고 골을 넣기도했다. 포항제철 관계자와 한홍기 감독은 이 어린 천재를 외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브라질 유학이 이미 그 시절에 추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교부 (현 교육부) 방침이 걸림돌이었다. 브라질 축구학교에서 축구 공부를 한 기간은 국내 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학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8년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 당시 한국일보 전상돈 기자(현 스포츠투데이 부국장)는 '한국 축구에 김병수 시대가 오고 있다'며 '한국 축구의 약점으로 지적되던 미드필더의 발굴'이라고 대서특필했다. 경신중학교를 거쳐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이미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축구를 잘 알고 하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지고 있던 경기도 그가 들어가면 어영부영하다 스코어가 뒤집히기 일수였다. '김병수는 자신의 리듬에 게임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선수'라는 말처럼 게임을 조율하는 능력에 관한한 그보다 나은 선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부상을 당했다. 체계적인 선수관리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을리 만무였다. 찜질 몇 번에 주사 한 두대 맞고 중요(?)한 경기랍시고 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발 다쳤으면 왼발로만 차라.'는 소리가 그를 그라운드로 떠밀었다. 대학에 진학한 뒤로 뛰는 날보다는 서 있는 날이, 서 있는 날보다는 앉아 있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의 불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축구의 불운이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 그가 고려대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는 단 네 경기. 그 가운데 세 번이 연세대와의 정기전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정기전용 선수였다'고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보면 그는 방치되어 있었다. 아버님이라도 생존해 계셨다면 축구 선수의 두 다리가 그 지경이 되도록 지켜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님은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들에겐 그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다. 수술비를 마련할 수 없었다. "한 달 이상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쉬는 것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었다. 그러다 경기가 있으면 불려나가 사나흘 연습하고 뛰었다. 91년에는 왼쪽 발목에다 어깨까지 다친 상태에서 경기에 나섰다. 압박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뒤뚱거리며 뛰었지만 어시스트도 하고 결승골도 넣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런 그의 플레이를 두고 '대단한 투혼'이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그 무책임함에 너무나 화가 났다. 청소년 대표를 거쳐 그가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것은 대통령배(현 코리아컵) 대회를 앞둔 89년 6월. 그런데, 당시 대표팀 이회택 감독은 그의 경기 모습을 본적이 없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내내 놀다가 고연전에나 나오는 선수의 경기장면을 어떻게 보았겠는가. '하도 옆에서 김병수 김병수 해가지고 하는 수 없이 뽑았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그러나, 그의 플레이를 본 이회택 감독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 8월 소련과 미국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너는 무조건 이태리에 데려갈테니 이 길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측에서는 차일피일 미룰뿐 일언반구 이야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해 고연전에 출전했다. "운동하면서 소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딱 한번만이라도 몸이 완전한 상태에서 게임을 해보는 거였어요." 하지만, 그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그의 발목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오른쪽 발목 인대가 1인치, 왼쪽 발목 인대는 0.9인치가 늘어난 상태였다. 90년 1월에 가서야 경찰병원에서 오른쪽 발목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릴적 포철 축구단 숙소에서 만났던 최순호 선배가 수술비 일체를 부담해 주었다. 6월엔 학교측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스쿠바 대학에서 왼쪽 발목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3개월만에 일어났다. 그의 복귀 경기는 다시 고연전. 1년만에 그라운드에 나섰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는 이날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대 2로 고대가 승리. 다음날 스포츠 신문엔 '고대 황금발 김병수 - 비극은 끝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상이 그리 쉽게 고쳐질리 없었다. 부상이 재발한 것이다. 한참을 쉬다가 91년 1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나중엔 다쳐도 감각이 없었어요. 0.6인치가 늘어나면 아주 많이 다친건데 나는 1인치가 늘어났거든요. 삐어도 삔 것 같지 않았어요." 특별한 재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몸도 추스르기 전에 경기에 출전하고, 그러다 같은 부위를 다시 다치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그는 서서히 선수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으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것은 세번째 수술을 받고 꼭 1년 뒤인 92년 1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이었다. 크라머 감독은 처음에 그의 선발을 반대했다. '보지도 못한 선수를 말만 듣고 뽑을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U-17 대표팀부터 그를 지켜본 김삼락 감독의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를 본 순간 세계적인 축구 이론가 디트마르 크라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구인생 50년만에 처음 만난 천재다.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
P.S 요 근래에 맥을 못추는 한국축구 김병수같은 같은 축구천재가 또 한번 나타나길 기원하나
현실적으로 김병수같은 천부적인 능력의 게임메이커와 스트라이커는 국내서 여간 보기 힘들지만......
또 다가오는 남아공월드컵이 조마조마 하지만.... 김병수만큼의 재능과 역량을 가진 플레이메이킹능력과
스트라이커자질까지 구비한 이청용,박주영 같은 한국축구 미래이자 인재가 나타나서 흐뭇하네요...
(Analog&Lp)
몇 번 올라왔던거 같기도 한데 영상은 짤린거 같아서 올려요.
쿠라라네작성일 2010-02-12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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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동영상] 뜨지못한 별 한국 최고의 골잡이 ..
수상내역
수상연도
수상내역
2005
프로축구 골든볼 골든슈 시상식 - 월간(7, 8월) 골든볼
2005
삼성 하우젠 K-리그 대상 공로상, 앙드레김 특별상
2004
제18회 올해의 프로축구 대상 올해의 인기선수
2003
K리그 득점왕
2003
K리그 MVP
2001
올해의 키카골
2000
K리그 골든슈
김도훈
생년월일: 1970년 7월 21일
출생지: 경남 통영시
체격: 183cm 80kg
별명: 갈색폭격기
취미: 골프
가족사항: 3남중 장남, 부인 김민정씨(2004년 8월 15일 결혼)
학교: 유영초-통영중-학성고-연세대
소속: 상무-전북현대-빗셀고베-전북현대-성남일화
포지션: 포워드(FW), 스트라이커
대표데뷔: 94년 9월 13일 우크라이나 친선졍기(오버헤드킥 데뷔골)
대표경력: A매치 71경기 30골
K리그경력: 257게임 114골 41도움(통산 최다골)
상세프로필
1989년 대학선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비멤버 선발
1993년 상무 입대, 유니버시아드 대표 선발
1994년 A매치 데뷔, 데뷔골( VS 우크라이나, 서울 동대문)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표
1995년 전북현대 입단, 코리아컵 대표
1996년 아시안컵 대표 출전 2골(인도네시아, 이란)
1997년 프랑스월드컵 지역예선 출전 3골(우즈벡, UAE)
1998년 프랑스월드컵 대표 2경기 출전, J리그 빗셀고베 2년 임대
J리그 빗셀고베 17골(득점8위, 팀내득점1위)
1999년 친선경기 브라질전 결승골(1-0)
J리그 빗셀고베 10골(2년연속 팀내득점1위)
2000년 전북현대와 K리그 최고연봉 계약( 2억7천만원)
K리그 득점왕(27경기출전 15골), 골든슈
시드니 올림픽 대표 출전, 한중-한일전 대표
2001년 K리그 2년연속 최고연봉 계약(3억3500만원)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표 출전
2002년 k리그 3년연속 최고연봉 계약(3억5천5백만원)
제6회 북중미 골드컵 대표 출전
2003년 성남일화 이적, 동아시아 대표 출전
K리그 MVP, 득점왕(28골), 베스트11
2004년 제18회 올해의 프로축구 인기선수상
2005년 K리그 최다골 기록 경신(9월1일, 113골)
푸마 ‘스투’ 프로축구 베스트 공격수 부문 수상
스포츠토토 한국축구대상 특별상
9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 김도훈, 그는 학성고 시절 청소년대표로
활약했으며, 연세대에 재학한후에는 89대학선발과 92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
에 몸담기도 한 엘리트과정을 거친 선수이나 그때까지 김도훈이라는 선수의 존재
가치는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그러다가 93년 상무에 입대했고, 그해 유니버시아드
대표로 선발되어서 득점왕을 수상하고,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국가대표
로 선발되어 데뷔경기인 우크라이나전에서 멋진 오버헤드킥을 성공시키면서 스타탄생
을 예고했다. 그해 94년 춘계실업축구 득점왕을 차지했고, 95년 전북현대에 입단한
김도훈은 그해 코리아컵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그해 9골을 넣으며 성공적인 K리그
데뷔시즌을 보내게 된다. 96아시안컵에 참가하여 조별예선 인도네시아전에서 골을
기록하였고, 8강전 이란전에서 역시 골을 넣었으며 한국대표팀의 2:6 참패를 지켜
봐야 했다. 96애틀랜타 올림픽과 98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을 통해 국민
적인 스타로 떠오른 최용수에 의해 빛을 보지 못했으나 98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
우즈베키스탄전 1골, 마지막경기인 UAE전에서 2골을 성공시키며 대회 3골을
기록, 김도훈이라는 선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98년 J리그 빗셀고베로
임대된 김도훈 선수는 98프랑스월드컵 대표로 출전하여 멕시코전과 네덜란드
전에서 활약, 특히 멕시코전에서 원톱으로 출전하며 팀은 1:3 참패를 당했으나
김도훈은 피파보고서로부터 좋은 평가를 듣게 되었다. 98프랑스월드컵에서 출전
하면서도 그해 17골을 기록, J리그 득점8위의 영광에 오르게 된다. 99년 친선전
에서 세계최강 브라질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한국이 세계최강 브라질 축구를
꺾는 순간을 만들어 낸다. 그해 J리그에서 10골을기록, 98년에 이어 2년연속
팀내 득점랭킹1위를 차지한다. 김도훈의 이같은 활약으로 빗셀고베는 J리그에
잔류할수 있게 되었다. 2000년 전북현대로 복귀한 김도훈은 K리그 최고연봉인
2억7천만원에 계약한다. 그해 k리그에서 27게임 15골로 득점왕을 수상하며,
골든슈를 거머쥔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 참가했으나, 팀이 2승1패의 좋은
성적을 거두고도 조별예선에서 탈락하는 아픔을 지켜봐야했다. 2001년 3억3천500
만원의 2년연속 k리그 최고연봉을 차지한 김도훈은 2001년 올해의 가장 멋진골
을 넣은 선수인 2001 올해의 키카골을 수상하게 된다. 2001컨페더레이션스컵
대표로 출전하는 김도훈은 이듬해 2002년 3억5천5백만원의 3년연속 K리그
최고연봉을 기록하게 된다. 그해 북중미 골드컵에 출전한 김도훈은 2002
한일월드컵 대표팀 승선에는 정말 아쉽게도 실패하고 만다. 대표팀 탈락의
아픔을 겪은 김도훈은 2003년 성남일화로 이적, 그해 40게임 28골 13도움
을 기록하며 K리그 한시즌 최다골 수립과 더불어 10-10 클럽 가입,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면서 K리그 MVP, K리그 득점왕, K리그 베스트11의 3관왕
을 수상하며 최고의 한해를 보내게 된다. 그해 IFFHS 선정 클럽골게터
랭킹 세계13위에 랭크되었고, 동아시아 대표로도 활약한다. 2004년 8월 15일
미술학도인 김민정씨와 결혼한 김도훈은 그해 프로축구 인기선수상을 수상한다.
2005년 9월1일 인천전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K리그 통산 최다골인 113골을
기록한 김도훈 선수는 그해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K리그에서는
통산 257게임 114골 41도움을 기록하였고, A매치에서는 71게임 30골을 기록하며
한국프로축구와 한국대표팀에서 족적을 남긴 김도훈, 보통 A매치에 전념하면 국내
프로리그 활약이 미미하고, 국내프로리그에 전념하면 국가대표 활약이 미미한 법인데
김도훈 선수는 K리그와 A매치에서 모두 족적을 남긴 선수가 되었다.
K리그 통산 최다골 기록 보유자이자 40-40 클럽의 사나이, 90년대 중반 한국을 대표하는
간판 스트라이커 김도훈, 그도 역시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임에 틀림없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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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동영상] 소문으로 떠돌던 비운의 천재 김병수 플레이 모음.
(한상적인 시저스킥)
(놀라운 패스)
(절묘한 프리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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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그는 누구인가?
'전방으로 찔러 넣는 정확한 패싱과 천부적인 득점감각' '문전 앞 직접 프리킥은 90%이상 골로 연결시키는 정교한 스핀킥' '게임 리더이자 찬스 메이커이며 스트라이커 이기도 한 축구천재' 그리고 90년대 '한국 축구의 희망' 이상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대략 4년간 그를 따라다녔던 수사다. 과장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장담하긴 어렵다. 특히 직접 프리킥을 90% 이상 차서 넣었는지 못넣었는지는 세어본 적이 없으니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기재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 빨리 시들어버린 그의 축구 인생에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다. 일간스포츠 축구팀 박재영 부장은 그를 두고 이렇게 단언한다. "비교가 안된다. 잘하는 선수는 많아도 그같은 축구 천재라 할만한 선수는 절대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것이다" 김병수는 강원도 홍천초등학교에서 처음 축구화를 신었다. 20년전 일이다. 축구를 잘한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돌았다. 미동 초등학교 천명길 코치가 강원도까지 찾아가 그를 스카우트해왔다. 일단 서울로 오자 '신동 났다'는 소문이 더 빨리 퍼졌다. 포항제철 감독이었던 한홍기 선생은 이 '신동'을 대선수로 키워보겠다고 아예 포철축구단 숙소로 데려갔다. 어린 아이 혼자서 외로움을 탄다고 어머니에게 선수단 식단까지 맡기면서 말이다. 어린 꼬마는 포철 연습장에서 포철 선수들과 연습을 했다. 그의 연습상대는 김철수, 박창선, 최순호, 조태천 같은 당시 쟁쟁한 스타 선수들. 어린 아이가 축구를 조금하니까 그저 귀여워만 했던게 결코 아니었다. 훈련 중에 아저씨들 앞에 나가서 개인기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때론 연습 경기에 투입 되어 초등학생이 그 쟁쟁한 프로 선수들을 제치고 골을 넣기도했다. 포항제철 관계자와 한홍기 감독은 이 어린 천재를 외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브라질 유학이 이미 그 시절에 추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교부 (현 교육부) 방침이 걸림돌이었다. 브라질 축구학교에서 축구 공부를 한 기간은 국내 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학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8년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 당시 한국일보 전상돈 기자(현 스포츠투데이 부국장)는 '한국 축구에 김병수 시대가 오고 있다'며 '한국 축구의 약점으로 지적되던 미드필더의 발굴'이라고 대서특필했다. 경신중학교를 거쳐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이미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축구를 잘 알고 하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지고 있던 경기도 그가 들어가면 거의 무조건이다시피 스코어가 뒤집히기 일수였다. '김병수는 자신의 리듬에 게임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선수'라는 말처럼 게임을 조율하는 능력에 관한한 그보다 나은 선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부상을 당했다. 체계적인 선수관리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을리 만무했다. 찜질 몇 번에 주사 한 두대 맞고 중요한 경기랍시고 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발 다쳤으면 왼발로만 차라'며 그를 그라운드로 떠밀었다. 대학에 진학한 뒤로 뛰는 날보다는 서 있는 날이, 서 있는 날보다는 앉아 있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의 불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축구의 불운이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 그가 고려대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는 단 네 경기. 그 가운데 세 번이 연세대와의 정기전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정기전용 선수였다'고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보면 그는 방치되어 있었다. 아버님이라도 생존해 계셨다면 축구 선수의 두 다리가 그 지경이 되도록 지켜*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님은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들에겐 그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다. 수술비를 마련할 수도 없었다. 그냥 쉬는 것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었다. 그러다 경기가 있으면 불려나가 사나흘 연습하고 뛰었다. 91년에는 왼쪽 발목에다 어깨까지 다친 상태에서 경기에 나섰다. 압박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뒤뚱거리며 뛰었지만 어시스트도 하고 결승골도 넣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런 그의 플레이를 두고 '대단한 투혼'이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그 무책임함에 너무나 화가 났다. 청소년 대표를 거쳐 그가 국대에 선발된 것은 대통령배(현 코리아컵) 대회를 앞둔 89년 6월. 그런데 당시 대표팀 이회택 감독은 그의 경기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내내 놀다가 고연전에나 나오는 선수의 경기장면을 어떻게 보았겠는가. '하도 옆에서 김병수 김병수 해가지고 하는 수 없이 뽑았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그러나, 그의 플레이를 본 이회택 감독은 경악 않을 수 없었다. 그 해 8월 소련과 미국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너는 무조건 이태리에 데려갈테니 이 길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측에서는 차일피일 미룰 뿐 일언반구 이야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해 고연전에 출전했다.
"운동하면서 소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딱 한번만이라도 몸이 완전한 상태에서 게임을 해보는 거였어요." 하지만 그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그의 발목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오른쪽 발목 인대가 1인치, 왼쪽 발목 인대는 0.9인치가 늘어난 상태였다. 90년 1월에 가서야 경찰병원에서 오른쪽 발목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릴적 포철 축구단 숙소에서 만났던 최순호 선수가 수술비 일체를 부담해 주었다. 6월엔 학교측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스쿠바 대학에서 왼쪽 발목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3개월만에 일어났다. 그의 복귀 경기는 다시 고연전. 1년만에 그라운드에 나섰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는 이날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대 2로 고대가 승리. 다음날 스포츠 신문엔 '고대 황금발 김병수 - 비극은 끝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상이 그리 쉽게 고쳐질리 없었다. 부상이 재발한 것이다. 한참을 쉬다가 91년 1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나중엔 다쳐도 감각이 없었어요. 0.6인치가 늘어나면 아주 많이 다친건데 나는 1인치가 늘어났거든요. 삐어도 삔 것 같지 않았어요." 특별한 재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몸도 추스르기 전에 경기에 출전하고, 그러다 같은 부위를 다시 다치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그는 서서히 선수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으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것은 세번째 수술을 받고 꼭 1년 뒤인 92년 1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이었다. 크라머 감독은 처음에 그의 선발을 반대했다. '*도 못한 선수를 말만 듣고 뽑을수는 없다 더군다나 부상중인 선수라는데 멀보고 뽑으라는거냐'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u-17 대표팀부터 그를 지켜본 김삼락 감독의 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를 본 순간 세계적인 축구 이론가이자 수도 없는 세계적인 선수를 키우고 봐왔던 디트마르 크라머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축구 50년 평생동안 여러 선수들을 키우고 봐왔지만 내 평생에 진정 천재라고 생각했던 선수가 딱 한명 있었다. 그 선수는 그 후 6년후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었다. 김병수는 그를 더 능가하는 천재다. 내 평생 이런 천재는 난생 처음이다. 그를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
참고로 크라머가 언급한 진정 천재라고 생각했던 그 선수는 디에고 마라도나란 선수이다. 그보다 더 높게 보았으니 김병수가 어느정도였을지는 짐작이 간다김병수는 ?택♣?몸으로 절뚝거리며 일본전 결승골을 비롯 92 올림픽때 맹활약하였다. 그후 일본 프로팀에서 그를 불렀고 그는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에 가서 병원 검사 결과에서 그의 불행은 또 다시 시작되었다. "어떻게 이 몸으로 축구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간다. 서 있기도 힘들 정도일텐데 어떻게 뛸 수가 있었는지. 축구 선수로써 그는 이미 너무 망가져 있다." 그 결과 내용을 본 일본 관계자들은 결국 그에 대한 스카우트를 포기해 버렸다.
김병수는 일본에서 고립되어 버렸다. 그는 돈이 없어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도 없었다. 그의 존재는 점점 잊혀져가고 한국은 그를 버렸다. 학원축구가 그의 몸을 망가뜨리고 결국 일본땅에 버려버린 것이다.
미래가 촉망되던 희대의 천재는 이렇게 몸과 마음에 온통 상처를 받고 선수로써의 생명은 거기서 끝나버렸다.그는 누구보다도 성실했으며 인간적으로도 너무나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하기만한 축구밖에 모르던 선수였다.
만약 그가 남아 있었다면 어느정도의 선수가 되어 있었을까? 많은 축구 관계자들은 역대 한국 최고의 미드필더를 넘어서 세계에서도 최고 수준에 미드필더가 됐을 거라는데 이견이 없다.
현재 아시아에 나카다란 미드필더가 유명하지만 최소한 김병수가 나카다보단 훨씬 뛰어난 선수가 됐을 거란 게 일반적인 견해다.
탑아트작성일 2007-11-03추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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