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자가용으로도 사용한 국산 1호 자동차 C발
1950년대 재생한 미군 지프에 톱을 씌워 사용하던 지프 자가용
2차대전과 한국전쟁으로 우리나라는 극심한 자동차 부족 현상을 겪었다. 다행이 유엔군 군용차들이 불하되어 1960년대 후반까지 군용 폐차 재생자동차 시대를 맞았다. 1955년 최무성 씨 삼형제가 첫 국산차 ‘C발’을 개발하고 새나라자동차가 설립되면서 마이카 시대가 열리는 듯했으나 정부의 자가용 억제 정책으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으나 2차대전 중 일본군의 강제 징발로 자동차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도시는 물론 지방에서도 트럭이 버스역할까지 했으나 시골사람들이 도시행 차를 타기란 가뭄에 콩 나듯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차들도 대부분 고물자동차들이어서 두세 대를 분해해 쓸 만한 부속품들만 모아 한 대로 짜깁기하는가 하면, 일본군이 남기고 간 군용트럭을 불하받아 개조해 사용했다. 그러다가 1940년대 말 미군과 미군 가족들이 타던 미국제 승용차들이 자가용이나 택시로 이용되면서 서서히 신식 자동차 시대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우리나라의 자동차는 또다시 수난을 당한다. 1953년 전쟁이 끝났을 때는 전쟁 전 보유대수 1만6,000여 대의 70%가 없어져 극심한 자동차 부족현상을 겪었다. 다행이 유엔군들이 가지고 들어온 군용 폐차들이 불하되기 시작해 한국 자동차의 생명을 다시 이어주었다.
이때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군용 폐차 재생자동차 시대가 열렸다. 자가용차는 드럼통을 펴서 톱을 만들어 씌우고 검은색을 칠한 지프 일색이었다. 일부 특권층 사람들이 미군 가족들을 통해 미국에서 들여온 승용차를 자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 시절은 승용차 고갈시대나 다름없었다. 1950년대 후반에는 대통령, 장관, vip들도 거의 지프를 타고 다녔다. 지프는 자가용차 외에도 소방차, 앰뷸런스, 경찰차 등으로 이용되었다.
1960년대 자가용 증가 억제와 수입차 붐
대부분의 자가용차가 미군 지프 재생차였는데, 그나마도 수요를 충당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정비업자가 있었으니, 바로 서울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 씨 삼형제다. 이들은 1955년 비록 지프의 개조형이긴 하지만 우리 손으로 만든 엔진을 얹은 첫 국산차인 ‘C발’(始發)을 개발했다. C발은 그해 10월 창경궁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에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아 인기를 끌면서 1963년까지 2,800여 대를 생산, 자가용과 택시 고갈을 해소시켜 주었다. 군용 폐차를 재생한 지프나 C발차는 부호와 연예인, 고급 관리들의 자가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수요가 달려 돈이 있어도 마음대로 살 수 없을 만큼 귀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정부는 경제개발정책을 수립해 적극 추진했다. 새마을운동과 중화학공업진흥정책으로 우리의 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특히 정부의 적극적인 자동차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역사상 처음으로 경기도 부평에 현대식 승용차 제조공장인 (주)새나라자동차공업이 설립되었다. 1,200cc 엔진의 일본제 소형차 ‘새나라’가 생산되어 비로소 짜깁기가 아닌 순정품 승용차를 타게 되었다. 앙증맞고 예쁘장해서 양장미인차라 불렀던 새나라는 자가용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연예인, 의사, 변호사, 상류층 여성들의 자가용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국산차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 들어 마이카 붐이 이는 듯했으나 또다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자가용의 급격한 증가는 경제발전에 보탬이 안 될 뿐 아니라 에너지 낭비와 교통난을 가중시키고 외환사정을 악화시킨다는 이유로 정부가 1968년 9월 ‘자가용 승용차의 억제’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자가용을 살 때 자립저축을 하도록 강제했으며, 당시 신진자동차에서 생산하던 800cc 퍼블리카는 10만 원, 1,500cc 코로나와 코티나는 20만 원, 고급차인 2,000cc 크라운은 30만 원의 도로공채를 의무적으로 사도록 했다. 이와 함께 신규 등록대수도 제한해 자동차 회사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1968년에 신진과 현대가 1만4,000대의 승용차를 생산했으나 정부에서는 관용, 영업용, 자가용 등을 합쳐 1만 대밖에 신규등록을 허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절 자가용은 상류층이나 특권층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1960년대 마이카족은 재벌을 포함한 경제인이 가장 많고 정치가와 고급관리, 변호사 그리고 영화배우, 가수, 탤런트 등의 연예인 순이었다. 돈을 많이 벌었거나 직책에 따라 자동적으로 차를 받은 고급관리, 남편의 수입과 지위에 따라 자가용을 가진 부인들, 그리고 바쁜 일정 때문에 자가용을 이용하는 유명 연예인들이 마이카족을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국산차는 중산층 이상이, 수입차는 재벌이나 톱스타들이 주로 탔다.
한편 당시는 정부가 수입차 수입을 금지했던 때라 고급 수입차를 사기가 아주 어려웠다. 연간 200만 달러 이상의 수출업체에 특혜로 주는 수입쿼터로 들여오는 것이 가장 많았으며, 외교관이나 그 가족들 또는 주한 미국인들이 타던 차를 인수하거나 외국에 살던 한국인이 타다가 이삿짐과 함께 들여온 것을 사는 방법이 있었다.
광복 후 처음으로 고급 수입차를 탄 재벌은 삼성물산 이병철 회장이다. 그는 벤츠 300 sel과 1969년형 캐딜락 리무진을 타다가 벤츠 600으로 바꾸었다. 이밖에도 동명목재의 강석진 사장은 벤츠 600, 극동해운의 남궁연 사장은 1968년형 롤스로이스, 쌍용양희 김성곤 사장은 1967년형 캐딜락을 탔다.
고급관리 중에서는 정일권 국무총리가 1967년형 뷰익, 민복기 대법원장과 박경원 내무부장관이 1967년형 링컨을 탔다. 연예인으로는 영화배우 문희가 1962년형 폭스바겐, 김진규·김보애 부부가 포드,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시보레 왜건을 탔다. 국산차인 새나라, 코로나, 코티나 등은 이미자, 김세레나, 김상희, 현미, 패티김 등 가수들이 주로 사용했다.
월래 명칭을 사용하니깐 금지어라고 나와서 C발 이렇게 했습니다 참고하세요 ^^
자료제공 : 월간 자동차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