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복: 어디에 있는 중국집 가봤어?
맛객: 아니, 중국집 가본지 오래됐다.
오만복: 완전 맛있다니까. 짬뽕이 다른 집과 달라.
맛객: 어떻게 다른데?
오만복: 불에 타서 까만 것이 국물에 보이기도 하는데...
맛객: 불맛 좀 낼 줄 아나보네.
근데 내가 니 입맛을 신뢰 못하겠다.(무관심)
오만복: 지난번에 오전 열한시 이십분에 갔는데 아직 장사를 안 한다는 거야.
그래서 대체 몇시에 먹을 수 있냐고 했더니 열한시 삼십분이라고 하잖아.
맛객: 제법 철학이 있네.
오만복: 주방장이 중국 출신이래나.
맛객: 호오~ 그으래? (호기심 유발) 그럼 짬뽕 한 그릇 배달 시켜봐.
오만복: 배달은 안한대.
맛객: 뭐야? 배달은 안해? (벌떡 일어서며) 내 맘에 쏙이네. 당장에 가보자.
■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은둔의 맛집 태원
조마루길 조마루뼈다귀 건너편에 있는 중국음식점 태원
자타공인 허접한 입맛의 소유자인 오만복의 맛집 제보.
그간의 활약상으로 보아 신뢰도는 별 반개 줄까 말까 할 정도.
하지만 주방장이 화교출신에 배달은 안한다는 정보는 맛객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 집은 조마루길에 있는 태원(泰圓)이었다. 외관은 그냥 저냥이라 사실 여러번 무심코 지나쳤던 집.
맛집블로거로서 외관만 보고 편견에 사로잡힌 내 자신을 책망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테이블 4개에 불과한 아주
소담한 업소였다.
하지만 규모에 걸맞지 않게 럭셔리한 원탁테이블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는데....
우리는 처음에 주문했던 짬뽕을 취소하고 토론끝에 간풍복어를 선택했다.
요리에 술이 빠질 수는 없는 일. 이과두주가 한병에 4천원이다. 산미가 풍부하고 뒷맛이 거칠지 않는게
그동안 맛본 이과두주중에서 가장 출중했다.
△간풍복어 22,000원
잠시 후 간풍복어를 대했다. 눈으로만 봐도 맛이 보인다. 역시나 센불에서 솜씨 있게 볶아낸 간풍복어에는 불맛이
제대로 스며들어 있었다. 고소했지만 느끼함은 없었다. 알맞게 가미된 식초 덕분이기도 했겠지만.
채소는 생채와 숙채의 경계선을 정확하게 지켰다. 채소 특유의 아삭거림은 살렸지만 풋내는 잡아냈다.
이건 신기이다
△ 요리를 주문하자 즉석에서 볶아 만든 짬뽕국물이 나온다. 다른 집의 빨간 국물과 다르다.
맛도 맛이지만 덜어서 먹을 수 있도록 국자와 개인 접시가 나온 점이 맘에 든다.
간풍복어에 따라 나오는 국물은 국수만 빠진 짬뽕이나 마찬가지였다. 끊여놓은 게 아니라 즉석에서 볶아 만든 짬뽕
국물이다. 서비스 국물을 내기 위해 직접 볶는 정성이라니. 정성이 가미된 짬뽕이 어찌 맛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홍합을 비롯한 오징어의 신선도도 아주 그만이다.
양파는 살짝 불에 타 한쪽 면이 갈색 빛을 띄고 있다. 간풍복어도 그렇고 이 집은 프라이팬으로 볶는 솜씨가 특히
뛰어나다는 판단이다. 흔히 불맛이라고 하는데 그게 중국요리의 기본이기도 하겠지만, 그 기본조차 없는 집
무수히 많은 게 현실이다.
△간풍복어 한 점
젊은 부부가 아이와 함께 와서 자리에 앉으며 말한다.
“몇번 먹으러 왔다가 실패했어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점심장사가 끝나면 조리사가 휴식에 들어가고 또 영업을 일찍 마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이집은 종업원도 없이 화교출신의 부부 내외만 일하기에 일이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다.
아저씨는 주방을 아주머니는 홀을 맡지만 면 삶는 것까지는 아주머니 몫인 듯하다.
사람이 돈 욕심 없는 사람 누가 있겠는가마는 이 집은 그것이 절대 가치는 아닌 듯하다.
그 흔한 짬뽕국물하나 미리 만들어놓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다. 뿐인가, 이 집의 모든 식기는 사기로 되어있다.
배달집의 멜라민 그릇에 담긴 음식과 이집의 음식은 품격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바빠도 짬뽕국물 미리 만들지 않는다
중국음식은 기름과 조미료로 인해 자칫 느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간풍복어만큼은 마지막한 점까지
느끼함은 없다. 기름을 과하지 않게 사용한 게 절묘했다. 접시에 기름이나 국물 한방울 흘러나오지
않은 볶음요리는 거의 처음인 듯하다. 뛰어난 요리를 만나면 기분이 즐겁다.
그 바람에 이과두주를 5병이나 비우고 말았다
△기름이나 채소에서 흘러나온 국물이 거의 묻어있지 않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데 잠시만 기다리란다. 만두를 서비스로 주겠다나. 안 그래도 메뉴판에서 만두를 찾았지만
없었는데 웬 만두라지. 나온 건 군만두였다. 만두 ‘소’는 그저 그랬지만 역시 튀김정도가 탁월했다.
직접 만들었냐고 물어보니 만두는 구입 한 거란다. 그래서 그랬을까? 메뉴판에 넣어 판매하지 않은 이유 말이다.
다른 중국집 같았으면 당연히 메뉴에 올렸겠지만 이 집에서 만두는 서비스용이다.
이것 한 가지만 봐도 그 조리사의 음식철학이 보이지 않는가?
식재의 맛이 오롯이 드러나는 옛날짬뽕
다음날....
다시 찾았다. 중국집을 그리 선호하지 않은 맛객, 자발적으로 이틀 연속 방문이다.
어제 잠시 맛본 짬뽕국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데 어쩌라고. 이번엔 다른데서 먹기 힘든 옛날짬뽕을 주문했다.
△옛날짬뽕 5,500원
옛날짬뽕의 특징으로는 갑오징어와 닭육수, 그리고 맑은 국물을 들 수 있다. 빨간 짬뽕에 익숙한
그대라면 이 낯선 음식에 잠시 당황할 수 도 있다. 그만큼 고춧가루가 든 음식에 우리 국민들은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덕분에 식재의 맛보다는 고춧가루의 자극성이 음식의 주 맛이 되어버렸고,
다양성을 잃어버린 맛의 획일화 속에서 그만큼 미각도 퇴보해버린 것이다.
옛날짬뽕은 추억뿐 아니라 잃어버린 식재의 맛까지 되찾아주고 있다. 국물에서는 닭육수의 구수함이 혀에 착 달라
붙는다. 해물에서는 고유의 풍미가 살아있다.
이처럼 옛날짬뽕에서는 식재의 맛이 솔직담백하게 드러나기에, 좋지 못한 식재로 속일 수는 없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이집 조리장의 식재에 대한 철학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재료가 참 신선하다.
새우만 하더라도 냉동새우가 아니라 생물을 직접 껍질을 벗겨 사용했다. 씹어보면 벌써 육질부터 다르고 새우의
풍미가 드러난다. 갑오징어의 말캉말캉 씹히는 맛은 또 어떻고.
그밖에도 쭈꾸미다리와 오징어, 조개, 표고, 새송이, 양송이 등 각자 고유의 맛과 향이 느껴진다.
△면이 참 순해보인다
거기에 어우러진 면은 맛객이 딱 원하는 정도의 탄력이다. 국물은 담백하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매콤해진다.
칼로 썰어서 넣은 홍고추와 바닥에 깔린 풋고추의 영향 때문이다. 바닥이 보이게끔 국물을 다 비우고 나면
다진 마늘만 남는다. 조미료보다는 닭육수와 마늘 등 천연재료로 낸 맛이기에 그게 느끼하지 않는 비결인 듯하다.
앞으로 이 집에 가서 요리를 종류별로 맛 볼 생각이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부부내외가 딱 소화 할 수 있을 정도의 손님만 받으면서
영업을 해왔는데, 갑자기 손님이 몰려 쉴 틈도 없어지면 어쩌나 해서다.
그보다 방송에서 냄새를 맡지나 않을까 그게 더 큰 문제이다. 그냥 나만의 맛집으로 숨겨둘까?
출처 - 맛있는 인생 글쓴이 - 맛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