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 or 명성황후

재학 작성일 04.12.14 14:4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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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는 세자 책봉을 받은 뒤에는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마다 각각 돈 1천냥과
쌀 한섬, 비단 한필씩을 바쳐 세자의 무병장수를 빌었다고 한다.
국고 1천 2백만냥을 탕진한 것이다.
당시 쌀1석이 1냥 황소 한 마리가 20냥 이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금액인지 알수 있다.
(쌀 1천 200만석 or 황소 6십만 마리를 살수있는 돈 입니다.)


언제나 궁중에 무당들을 불러들여 굿판과 치성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용한 점쟁이에게는 즉석에서 비단 1백필과 돈 1만냥씩을 건네주는둥,
나랏돈을 물쓰듯이 했다.



민비가 정권을 장악한 뒤 이런 식으로 4년이 흐르자 조선의 국고는 바닥 나고
이후 5년간 조선의 문무 백관들은 정부에서 한 푼의 급료도 받지 못하였다.
녹봉을 받지 못하자 관료들은 조선인민의 돈을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았고
조선인민의 삶은 날이갈수록 비참해졌다.

매천야록이나 고종실록을 보면 명성황후는 매관매직을 했고
질투는 장희빈도 심했고 권력욕은 문정왕후 보다 심했다고 한다.

민비는 원자를 얻기 위해 왜 상인에게 많은 왜전(倭錢)을 빌려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제물(祭物)을 뿌려서 탕진했으며, 모자라는 재물을 채우기 위해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리고, 민비가 과연 덕을 지닌 국모인가. 야사는 이렇게 전한다. 민비가 임오군란 때 난을 피해 천신만고 끝에 궁중을 빠져 나와 신행 행렬로 가장하여 한강을 건너 주막에 숨어 있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가마를 들여다보며 딱하게 여겨 “새색시가 민비인지 여우인지 고년 때문에 고생한다”는 말을 했는데, 민비는 이에 앙심을 품었다. 뒷날 환궁하여 그 여인을 찾아내라고 명하니 죽음 앞이라 모두 시치미를 뗐다. 결국 온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요즈음 민비의 입에 실리는 ‘백성’은 위선이고 허구다.
- 매천야록 -

민비와 민씨 정권은 어느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개화 반대를 외치며 임오군란에 참가한 군중은 민비를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나 동학혁명군 모두 민비와 민씨 일파 타도를 외쳤다.
결국 어떤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한 민비는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민비의 정치는 조선의 당면 과제인 자주적 근대화를 지향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바람과는 거리가 있었다. 민비가 집착한 것은 오직 왕권 강화와 왕실의 보존이었는데, 이는 자신의 명예와 부와 권력과 같은 세속적인 욕망을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망 당시만 해도 모든 조선인들에게 저주의 대상이었던
민비가 오늘날 자주 독립의 순교자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 현상은
한국인들이 처해 있는 아이덴티티의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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