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무역회사 대리 이다연(가명·29) 씨의 남자친구는 2명. 속칭 ‘양다리 걸치기’다.
올해 크리스마스이브를 누구와 보낼까. 이 씨는 며칠간 고민하다 최근 새로 사귄 은행원 박모 씨를 선택했다.
박 씨의 안정된 직장 때문이었다. 다른 남자친구는 인물도 헌칠한 데다 3년간 사귀면서 정도 깊이 들었지만 미래가 불투명했다.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지만 학위를 딴다 해도 인생이 풀린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 씨는 “집에서 빨리 시집가라고 성화다. 이제는 양다리 걸치기를 끝내고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달 3일 서울 중앙대에서 열린 ‘2005년 한국여성심리학회 동계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미혼여성의 성(性) 가치관과 결혼관이 갈수록 실리적이고 개방적인 추세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 본보와 SK커뮤니케이션즈의 메신저 서비스인 ‘네이트온’이 학술대회에 맞춰 1만2835명(여자 1만795명, 남자 20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도 이 같은 추세를 입증했다.
공동 설문조사에서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 상대라면 남자의 외모와 경제력 중 어느 쪽을 중시하겠느냐’는 질문에 미혼여성 응답자 9588명 가운데 90%(8619명)가 경제력을 택했다.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도 ‘연애=환상, 결혼=현실’이라는 공식에 충실해 갈수록 실리적으로 바뀌고 있는 세태를 반영했다.
서울 근교 K대 2학년 조현정(가명·21·여) 씨는 “요즘 소개팅이 들어와도 잘생겼는지보다는 돈 많은 집안 출신인지를 먼저 물어본다”며 “외모를 따지는 것은 중딩(중학생)이나 고딩(고등학생)들 소개팅 때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남편감의 경제력을 제1덕목으로 꼽는 세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나 그 정도가 급속도로 심해지고 있는 것. 이제는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결혼하는 순정파는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봤다. ‘외모는 탤런트급, 월수입 200만 원’인 A 씨와 ‘외모는 보통, 월수입 300만 원’인 B 씨 중 누구를 택하겠는가. 미혼여성 9588명 중 압도적 다수인 7429명(77%)이 B 씨를 택했다. A 씨를 선택한 미혼여성은 겨우 187명(2%).
탤런트급 외모의 A 씨는 ‘외모는 보통 이하, 월수입 400만∼500만 원’인 C 씨(1784명,19%)보다 낮은 표를 받았다. ‘외모는 매우 열악, 월수입 500만 원 이상’인 D 씨(188명, 2%)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결혼 상대에 대한 실속 챙기기는 경제력 탐색에 그치지 않는다. 단순한 혼전 성관계가 아닌 상대의 성적인 능력을 알아보는 이른바 ‘속궁합’ 맞춰 보기에도 적극적이었다.
‘당신은 미혼 남녀가 결혼 전 미리 속궁합을 맞춰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미혼여성 응답자 9588명 중 58.9%가 ‘그렇다’, 41.1%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한국여성심리학회에서 발표된 ‘연애관계와 태도에서의 성차(性差)와 집단차이의 보고’(연세대 심리학과 주현덕, 교육학과 박세니) 논문에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혼전순결을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유통회사 직원인 손명희(가명·27) 씨가 그런 경우. 손 씨는 남자친구와 일주일에 한 번 주기적으로 ‘관계’를 맺은 지 1년이 넘었다. 서로 집안 형편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속궁합’이 잘 맞아 내년 봄 결혼할 생각이다.
손 씨는 “친구나 주변에서 성격 차이나 외도 등이 아닌 ‘속궁합’이 잘 안 맞아 이혼하는 커플을 많이 봤다”면서 “행복하게 살려면 서로의 성적 취향도 잘 맞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2005년 한국의 미혼여성은 이처럼 결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실속파’지만 부담 없는 성(性)에 대해서는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이에 대해 많은 기성세대들은 “20대 여성의 성 개방 풍조가 급속히 확산되는 것 같아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서울과 경기 양주시에 있는 한 체인 모텔의 지배인은 “연말연시가 아닌 평소에도 30% 정도는 미혼의 젊은 예약 손님이며 주말 저녁에는 직접 찾아와도 방을 내주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대학원생 김선하(가명·24·여) 씨는 “친구들끼리도 이제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들은 상대방의 과거에 대해서도 연연하지 않는다.
여대생 최정연(가명·22) 씨는 동갑내기 남자친구와 사귄 지 한 달째다. 믿을 만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이 남자는 같은 대학에서만 ‘진지하게’ 사귀던 여자친구가 5명이 넘는다.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과거를 묻는 것은 ‘쿨(Cool)’하지 않잖아요.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못 물어 보겠어요.”
최 씨는 “솔직히 나도 과거 남자 문제에서 떳떳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예비시댁 둘러보고 “안되겠어요”
결혼 8개월째인 김혜경(가명·28) 씨는 “지금 남편이 2대 독자였던 옛날 약혼자보다 수입은 적지만 마음은 훨씬 편하다”며 “차남을 선택하길 잘했다”고 말한다.
김 씨는 고급 식당 주방장으로 일하면서 한 달에 400만 원 이상 수입을 올리는 옛 약혼자와 결혼 직전까지 갔었다. 결혼 생각이 결정적으로 깨진 것은 지난해 2월의 ‘예비 시댁 체험’. 미리 상대 집안의 분위기도 익힐 겸 해서 경남 양산시의 약혼자 부모집에서 주말을 보냈다.
그때 약혼자 부모나 주변 친척 어르신들은 한결같이 “남편이 2대 독자인데 어서 아들을 낳아야지”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김 씨는 돌아오자마자 파혼을 선언했다.
미혼 여성들의 결혼관이 개인주의적이고 실리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요컨대 요즘 미혼여성의 결혼조건에서 경제력이 강력한 플러스 요인이라면 장남은 마이너스 요인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경제력 보상이 뒷받침돼야 플러스-마이너스의 격차를 메울 수 있을까. 본보와 네이트온이 던진 질문에 응답한 여성 1만736명에 따르면 월 100만 원 정도다.
‘학력, 외모, 나이 등 다른 모든 조건이 같고 월수입 300만 원인 장남 A 씨와 월수입 200만 원인 차남 B 씨 중 누구를 택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B 씨를 택하겠다는 응답이 5253명(54.8%)으로, A 씨를 택하겠다는 응답 4335명(45.2%)보다 많았다.
‘월수입 400만 원인 장남 C 씨와 월수입 200만 원인 차남 D 씨 중 누구를 택하겠느냐’는 질문에는 C 씨를 택하겠다는 응답이 71.6%로 훨씬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