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팔이(딸의 애칭)가 가훈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받아왔다. 궁리끝에 떠오른 한마디 '미워도 다시 한 번'. 얼마나 좋은가. 식구끼리 친구끼리 연인끼리 죽도록 싸우고 나서도 돌아서서 조용히 이렇게 읊조릴 수 있다면. 그런데 그 말은 영화 제목만이 아니라 거창고등학교 어느 교실의 급훈이란 걸 알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가훈을 표절할 수는 없는 일... 몇 시간 후 마침내 나는 이런문장을 백지에 적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었다. '아니면 말고'.
나는 말했다. 뭐든지 멋대로 한번 저질러보는 거야. 그랬는데 분위기 썰렁해지면 그때 이 말을 쿨하게 중얼거려주는 거지. 종팔이는 정말 좋아했다. 본래 아이들이란 늘 멋대로 한번 저질러 보고 싶어 미치는 인종 아니던가. 하지만 역시 어른들은 달랐다. 이튿날 종팔이는 선생님께서 '세상에 뭐 이딴 가훈이 다 있냐' 며 새 걸 받아오든가 아니면 뭔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들어 오라셨다고 전했다. 나는 한번 정한 가훈을 무를 수는 없다면서 이렇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덧붙였다.
"현대인들은 자기 의지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매우 오만한 태도다. 세상에는 의지만 갖고 이룰 수 없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닥쳐오는 좌절감을 어쩔 것인가.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툭툭 털어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이 경쟁 만능의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건 포기의 철학, 체념의 사상 아닌가. 이 아빠도 <복수는 나의것>으로 네 친구의 아빠(곽경택 감독)가 만든 영화 <친구>를 능가하는 흥행 신기록을 세우고 싶었으나 끝내 1/20밖에 안 되는 성적으로 끝마쳐야 했을 때 바로 그렇게 뇌까렸던 것이다. '아니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