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1
철이: 오늘도 난 도서관의 이젠 내자리로 정해져 버린 좌석에 앉았습니다.
이곳을 내자리로 만든 건 며칠째 내 옆에 앉고 있는 한 여학생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녀는 내 옆좌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많은 시간을 도서관 내 옆자리에서 보냈습니다.
하하 이정도 시간이 되면 그녀는 항상 날 미소짓게 합니다.
또 엎드려 자는군요. 그모습이 참 귀엽습니다.
날은 점점 더워지고 여름방학을 맞이한 학교분위기로
한산한 도서관에서 그녀는 오후를 열람석에 엎드려 잠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멀쩡하게 생긴 이 아가씨가 이제는 침까지 조금 흘렸습니다.
뽀얀 그녀의 목덜미가 아름답습니다.
두껍기만 한 일본어 책을 베개삼아 그녀는 어딘가 꿈나들이를 떠났습니다.
민이: 오늘도 그는 그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며칠전부터 나와 눈이 마주친 멀쩡하게 생긴 남학생하나가 내기억에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매일 도서관을 나왔고 이제는 일정하게 정해진 좌석에 앉고 있습니다.
그의 옆자리는 내자리입니다. 오후가 되면 전 항상 졸음이 옵니다.
오늘같이 방학이라 한산한 도서관 열람석은 잠자기에 너무나 ?윱求?
잠에서 깨어보면 그는 항상 나에게 미소를 줍니다.
호호 오늘도 그는 내가 잠에서 깨었을때 속된말로 머리를 쳐박고 자고 있었습니다.
책상바닥이 상당히 딱딱할텐데
그는 책도 안받치고 그냥 바닥에 머리를 붙이고 잠들어 있습니다.
호호 그의 목에는 제법 큰 점이 두개가 있군요.
철이: 오늘은 그녀가 자리를 오랜시간 비우는 군요.
하기야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공부가 잘 될리 없지요.
나도 커피나 한잔 마시고 와야겠습니다. 아. 그녀가 저기 오는군요.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녀의 잠든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옵니다.
그녀도 커피를 한잔 할려나 봅니다. 내 뒤에 섰군요.
밀크커피를 눌렀습니다.
그러나 커피색깔만 흉내낸 그냥 물이었습니다.
그녀가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습니다.
말리고 싶었습니다만 잘 알지 못하는 사이였기에 그냥 말없이 자판기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녀가 커피를 한모금 마시더니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자기 바로 앞에도 휴지통이 있었는데
그녀는 애써 나쪽에 있는 휴지통에다 그 컵을 버리고 가더군요.
그리고 나에게 못마땅한 눈짓을 보내고 도서관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모습이 귀여웠습니다.
민이: 오늘은 날씨가 참 더웠습니다. 도서관에는 나왔지만 공부는 되질 않는군요.
이런날 애인이라도 있으면 어디 놀러라도 갈텐데 아쉽게도 없네요.
공부는 잘되지 않았습니다.
에어콘이 시원하게 틀어져 있는 커피숍에서 책이나 읽고 와야겠습니다.
옆자리의 남학생은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는척을 하는군요.
하지만 전 알지요.
오전부터 펴져 있는 연습장은 아직 한장도 넘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커피숍에서 홀로 냉커피를 마셨습니다.
다시 도서관에 오니 그가 나와있었습니다.
자판기커피를 뽑아 마실려나 봅니다. 그래 더운커피도 한잔 더 하지뭐.
그의 뒤에 섰습니다. 목에 점이 또 보이길래 웃음이 나왔습니다.
밀크커피를 눌렀는데 커피를 가장한 맹물이더군요.
그도 맹물인걸 알았을텐데 나에게 그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100원이었지만 아깝더군요.
일부러 그녀석 앞에 있는 휴지통에다 따지듯 들고있던 컵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웃어버리더군요.
철이: 그녀는 일어교육과 학생인것 같습니다.
일본어인듯한 말을 중얼거리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중얼거리면 실례가 되지만
뭐 주위에 공부하는 학생도 별로 없었고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기에...
나보다 고학년이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그녀의 일본어 솜씨는 유창해 보였습니다. 나도 뒤지기 싫었습니다.
내 좌석 칸막이에 머리를 박고 연습장에 나조차 전혀 이해가 되지않는
전공 공식들을 그려놓고 담배나 필려고 자리를 떴습니다.
민이: 괜히 앉아 있으니까 또 잠이 오는군요.
책을 폈지만 일본어단어들이 생소했습니다.
재수를 했지만 난 아직 일학년이기 때문에 이런 문장들은 읽을수가 없었습니다.
히나가타나 첨부터 다시 외어보기로 결심을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주위에 사람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맘놓고 중얼거릴수 있었습니다.
중얼거리다가 책장도 넘겨보았습니다.
그가 좀 내 중얼거림이 시끄럽게 느껴졌나봅니다.
못참겠다는 듯 책상 칸막이사이로 머리를 박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치. 자기는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그가 자리를 비운 책상의 연습장을 보았습니다. 몰래 넘겨보기도 했습니다.
글씨는 예쁘게 쓰더군요.
무슨과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 어려운 공식들이 적혀있었습니다.
연습장 앞에는 9012** 전자공학과 성혜철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삼학년이구나...
철이: 오늘오후도 그녀는 잠이 들었군요. 제발 침만은 흘리지 말기를...
그래 오늘은 침은 흘리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내자리 한쪽편에 씨씨인듯한 남녀둘이 연애하듯 공부를 했습니다.
부럽기도하고 아니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 옆자리의 그녀는 태연하게 잠자리에 들어있습니다.
내가 일어났을 때 그녀는 가방을 싸가지고 나가더군요.
민이: 오늘은 기분이 나빴습니다.
옆좌석에 씨씨가 앉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척 하는게 참 아니꼽더군요.
그 꼴이 보기 싫어 책상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다 또 잠이 들었습니다. 삐삐가 진동을 하더군요. 뿌듯했습니다.
내 친구들 중에 진동이 되는 삐삐는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옆좌석의 그가 내 삐삐진동을 느꼈으면 했는데
그는 일상처럼 머리를 쳐박고 자고 있었습니다.
전화를 해 보았습니다. 미팅을 하라고 하는군요.
대타로 뛰는게 기분이 별로지만 미팅이 참 설레였던 나이라 바로 승낙을 했지요.
가방을 챙겨서 자리에서 뜰려고 할때쯤 그가 일어나더군요.
쯧쯧 침이나 좀 닦지... 웃음을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미팅은 대타로 나갔다가 남자쪽에서도 한명이 빠져 벤취 신세만 지고 왔습니다.
인연 #2
철이: 오늘은 늦잠을 자버린 관계로 도서관을 오후에 나갔습니다.
내 고정된 자리는 나이든 남자선배가 앉아 있었습니다.
뭔가 히죽거리는 게 기분이 별로 였지요.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잠이 들었군요.
참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깊이 잠들었나봅니다.
아직 침을 흘리고 있지는 않지만 왠지 불안해 보였습니다.
한동안 망설이다가 그녀가 잠들어 있는 자리에다 휴지를 하나 사다가 놓아주었습니다.
옆 좌석의 남학생은 떡대같은게 무식해 보이더군요. 무슨 과인지...
'삭막한 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보니 전자공학과학생이었습니다. 땜쟁이였구만...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분명 내 연습장을 꺼내었는데 표지에 딴 놈 녀석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낯익은 이름이었습니다.
'아! 우리형도 전자공학과 다니는구나'라는 걸 일깨워주는 이름이었습니다.
참 저는 전산과 학생입니다. 그리고 이제 싱싱한 91학번입니다.
이름이 뭘까요?
성계철입니다.
개철이라 부르지 말아주세요.
민이: 오늘은 그보다 내가 먼저 도서관에 왔습니다.
그가 앉아야 할 자리에 떡대같은 아저씨가 앉을려고 하더군요.
'분명 이 자리는 앉을 사람이 있는데요.'라고 말했지만
그 아저씨는 막무가내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흑흑 나쁜 아저씨...
오후가 되니 그가 내 옆에 있었다면 잠이 쉽게 들었을 텐데,
떡대 아저씨 때문에 잠이 쉽게 들지 않더군요.
하지만 오후 도서관실내는 너무 더웠습니다.
떡대 아저씨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조금 눈을 부쳤지요.
일어나서 눈을 떠 옆자리를 보니 눈에 들어온 건
늘 미소짓게 했던 그의 머리 박고 주무시는 모습이 아니라
떡대 아저씨의 히죽거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실망...
책상 위에는 화장지 한 봉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떡대 아저씨의 히죽거리는 모습이 의심스러웠습니다.
혹시 내가 침이라도 흘리지 않았나 걱정이 되어 거울을 보았습니다.
괜찮더군요. 화장한 내 모습이 참 예뻤습니다.
내 화장기술은 언니들 덕분이지요.
일학년치고 나처럼 세련되게 화장한 학생들은 드물걸요.
참 제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전 일어교육과를 다니고 우리 집 네딸 중 셋째입니다.
92학번이지만 재수를 했고 하지만 73년생입니다. 생일이 좀 빠르거든요.
이름은 소수민입니다. 이름 이쁘죠?
혹 소수민족 이런 식으로 이름가지고 놀리면 저 화낼 겁니다.
철이: 곧 이학기가 개강을 할겁니다.
그녀는 오늘도 내 옆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녀는 점점 이뻐지는거 같습니다.
학기가 새로 시작할려고 하니까 도서관에 사람이 빽빽합니다.
이런 날은 메뚜기가 극성이지요. 올해도 풍년이 들어야 할텐데... -_-;;;
친구가 찾아와서 당구를 치자고 꼬셨습니다. 그래 한게임치지 뭐~.
당구를 멋지고 가뿐하게 시범삼아 져주고 도서관에 왔습니다.
아니 근데 이게 왠일이랍니까?
그녀의 자리에는 다른 여학생이 앉아 자고 있었고
내 자리에는 그녀가 앉아 또한 자고 있었습니다. 참 이거 난감하군요.
깨우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마땅히 앉을 빈자리도 없었습니다.
그녀한테 말도 못 거는데 도저히 깨울 수는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커피하나 뽑아 도서관 앞 벤취에 앉아
멀뚱멀뚱 지나가는 사람 쳐다보면서 담배만 피고 있었습니다.
한참 그러고 있었는데 아까 내 자리에서 자던 그녀와
그녀의 자리에서 자던 묘령의 여자가 재잘거리며 도서관을 나오더군요.
또 난감합니다. 앉을 벤취가 마땅한 게 없었나봅니다. 내가 앉아있는 벤취에 앉더군요.
그렇게 도서관에서도 내 옆자리에 앉더니만 벤취에서도 내 옆에 앉고 싶었을까요?
앉아서 참 많이도 재잘거리더군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다고 괜히 담배 피는 나에게 시비를 그녀가 걸었습니다.
별로 연기가 그리로 가지도 않았건만
그녀가 두손으로 연기를 내쪽으로 보내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엔 엄청 기침까지 하더군요.
오버액션이 꼭 경찰청사람들에 나오는 엑스트라 같았습니다.
그냥 일어서 도서관 내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씨 책이나 치워놓고 가지...
민이: 개강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서 도서관이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그는 오늘도 내 옆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오늘도 말없이 공부하는 척 하겠지요.
그가 자리를 비운 뒤 얼마 되지 않아 내 친구가 빈자리 없나 두리 번 거리는 게 보였습니다.
나를 발견하곤 내자리쪽으로 왔습니다.
친구는 메뚜기를 할려나 봅니다.
그래서 내 옆자리에 앉으라고 했지요.
당구치러 갔으니 한시간 안에는 오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아는 사람자리냐고 묻더군요. 당연히 모르는 사람자리라고 말했답니다.
친구가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더군요. 그래서 쬐금 아는 사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친구가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그럴 거면서 도서관은 왜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쳐낸다고 잠이 와 안되겠다며 내 자리 좀 바꿔달라고 하더군요.
할 수 없이 난 자리를 비켜주고 그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오랫동안 그는 돌아오지 않더군요.
당구의 묘미에 빠져버렸나 봅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습니다.
친구가 날 깨웠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구요.
친구가 커피나 한잔하자며 밖으로 나가자고 했습니다.
밖에 나오니 시원했습니다.
도서관 사람이 많았던 탓인지 벤취도 빈자리가 없더군요.
저기 벤취 하나가 한사람만을 앉히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앉긴 했는데 하필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내 옆자리 그였습니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인상을 너무 심어주는거 같았습니다.
친구의 재잘거림이 잘 들리지 않고 있을 때 그를 쫓아낼 구실을 그가 주었습니다.
그가 담배를 피웠거든요.
첨엔 손짓으로 담배연기가 이쪽으로 옴을 표현했지요. 솔직히 연기는 하나도 안왔지만요.
그는 참 무감각한 놈이더군요.
그래서 기침을 했지요. 일부러 하다보니 나중엔 진짜 목이 아파 리얼한 연기가 되더군요.
그제서야 그가 일어나 도서관으로 들어갔습니다.
느긋하게 자리를 잡고 친구와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하다보니 공부하기 싫었습니다.
친구랑 근처 커피숍 가서 마저 재잘거리기로 하고 가방 싸러 도서관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의 자리에서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잘자라 인사를 해주며... 물론 속으로 말입니다. 가방을 챙겼습니다.
가방이 들고 왔을 때보다 왠지 가벼웠습니다.
어머나! 그가 잠든 모습은 예전처럼 책상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책 위에 볼을 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잠시 망설였지만 내일도 그는 저 자리에 앉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나는 그냥 가버리기로
했습니다.
내일 책을 돌려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지요.
내일 책을 돌려주면 내 커피한잔 뽑아주지... 내일 봐요. 호호.
그러며 도서관을 나왔습니다.
그러나 학기시작하고 며칠동안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내 옆에 그가 없으니 허전합니다.
인연 #3
철이: 눈이 떡 마주쳤습니다. 그녀도 이 교양수업을 신청했나봅니다.
책 내놔라. 그럴 줄 알았는데 그냥 밝은 표정만 짓고는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습니다.
이 교양수업 첫날은 그녀한테 죄지은 게 있기 때문에 맨 뒤로가 앉았습니다.
참 강의실이 길더군요.
하얗게 그려지는 건 글자일거고 그 바탕은 칠판이겠지...
그것 밖에는 구분이 되었습니다.
조교가 딱 넉자를 적었을 때 학생들이 그냥 일어서 나가더군요.
그 글자가 궁금해 앞으로 가보았지요.
그녀가 가방을 싸고 있었습니다. 날 쳐다보더군요.
책 내놔라라는 눈빛이 분명했습니다. 책을 새로 하나 사야겠습니다.
칠판에는 '오늘휴강'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좀 크게나 적지...
민이: 그를 다시 보게된 장소는 도서관이 아니라
교양수업을 들을려고 찾아 간 생물대의 한 강의실이었습니다.
넓은 캠퍼스와 수많은 학생들 틈에서
그와 같이 이 수업을 듣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우연일까? 인연일까?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지요.
그가 맨 뒤로 가서 앉더군요. 난 앞에 앉았는데 말입니다.
책을 돌려달라고 할까도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의 자리에 놓고 간 책이라 말하기가 그랬습니다.
이 교양수업은 첫날부터 휴강이었습니다.
게으른 교수인가 봅니다.
예? 교양과목은 보통 첫날은 휴강한다구요?
전에도 말했듯이 전 일학년이에요.
가방을 싸고 있는데 그가 앞으로 왔더군요.
드디어 나한테 책을 줄려고 말을 걸려나 봅니다.
마침 호주머니에 백원짜리 몇 개가 있고 강의실 앞에 자판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칠판을 눈비비고 보더니 휑하니 나가버렸습니다.
야속한 놈... 그 책은 전공책인데...
철이: 학기초라 들뜬 기분 때문에 도서관을 가지 못했지요.
그래서 그녀를 일주일동안 *를 못했습니다.
교양시간이 많이도 기다려지더군요.
그 교양수업이 시작하기 20분전쯤에 강의실로 갔습니다.
앞자리 쪽에 가방을 던져놓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얼마 후면 그녀가 나타나 제 근처에 자리를 잡을거라 기대를 했습니다.
강의실 앞 문 쪽에 시선을 두고 그녀만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구요? 그녀의 모습이 보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침에 얼룩져 버렸던 그녀의 책도 새로 하나 샀습니다. 생각보다 비싸더군요.
한참을 기다렸는데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혹 수강변경이나 해버리지 않았나 걱정도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의 모습을 * 못하고 강의는 시작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를 못 보나 했는데 그건 아니었습니다.
수업이 끝났을 때 복도에서 그녀를 보았습니다. 친구와 같이 있더군요.
친구와 같이 가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 책을 주기는 그랬습니다.
더군다나 그녀의 책이 아니라 새로 산 책이니 말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 다음에 보게되면 주어야 겠습니다.
미안하다는 글도 하나 적어 같이 주어야겠습니다.
민이: 학기초라 여기저기 불려 다녀 도서관을 가지 못했답니다.
이번 주 전공수업은 책없이 강의를 들어야 했습니다.
드디어 한민족의 역사라는 교양과목이 있는 날이 돌아 왔습니다.
그 교양은 그와 같이 듣는 수업이지요.
기대가 됩니다. 교양수업이 시작하기 30분전쯤에 강의실로 갔습니다.
친구가 앞자리도 많이 비었는데 왜 굳이 뒤에가 앉느냐고 따지더군요.
그럴 일이 있단다. 이 기집애야.
친구와 커피를 한잔 뽑아 강의실 뒷문 계단 쪽으로 가 잠시 수다를 떨었습니다.
수업이 시작할 무렵 약간은 설레이는 맘으로 강의실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내 근처에 앉아 있을 것만 같았거든요.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 그가 수강변경이나 해버리지 않았나 걱정이 되더군요.
하지만 그건 아니었습니다.
수업이 끝났을 때 저기 앞쪽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도서관에서처럼 일정한 자리에 앉지 않았습니다.
복도에서 그와 마주쳤는데 또 휑하니 가버렸습니다.
아주 모르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분명히 날 알텐데 말입니다.
진짜로 날 모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에이 설마 방학 때 그렇게 도서관에서 자주 보았는데...
책은 그래서 받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그 책은 새로 사야겠습니다.
철이: 오늘 우연찮게 그녀를 만났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친구를 붙잡아 뒷자리를
신세졌었습니다.
사대앞 내리막길을 신나게 내려갔었지요. 지나치는 가을냄새가 상큼했습니다.
그런데 자전거 모는 놈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더니 핸들을 한쪽을 홱 틀었습니다.
어떤 여학생이 갑자기 튀어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하! 그 여학생은 바로 그녀더군요. 다행히 그녀를 치인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자전거 운전한 친구에게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멋모르고 뒷좌석에서 손놓고 있던 나만 공중에 붕 떴다가 한바퀴 굴렀지요.
속력 때문에 난 그녀가 서있던 바로 앞에까지 굴러가 쳐 박혔습니다.
치마입은 그녀의 다리가 참 예쁘더군요. 손바닥에서 피가 났습니다.
하지만 아픈 줄을 몰랐습니다. 왜냐면 쪽팔렸기 때문입니다.
주위에 사람들까지 모여들었습니다. 얼굴을 못 들겠습니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이 무슨 창피냐...
저기 떨어진 내 가방을 주워 들고는 차마 그녀의 얼굴은 쳐다* 못하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자전거 운전수 놈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고 죽어라
뛰었습니다.
민이: 오늘은 큰일날 뻔했습니다.
사대앞 내리막길에서 길 건너편 친구가 부르길래 무심결에 길을 건너다가
급히 내려오는 자전거에 치일 뻔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그 자전거는 내 바로 앞에서 멈추었지만
뒷좌석에 타고 있던 남학생 하나가 날라서 내 바로 앞에 떨어졌습니다.
이런 내 앞에 떨어진 남학생은 바로 그였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 정도로 그는 심각하게 자전거에서 떨어져 굴렀습니다.
갑자기 맘이 아프더군요. 손을 잘못 짚었는지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그는 많이 아팠는지 한동안 얼굴도 못 들었습니다.
난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줄려고 했습니다.
근데 그는 자기와 같이 떨어진 가방을 들고는 단지 주먹만 쥐어보이고
뭐가 급한지 엄청 빠르게 뜀박질하여 멀리 사라져 갔습니다.
손수건을 들고 한동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습니다.
인연 #4
철이: 오늘은 교양수업이 있는 날입니다.
자전거에서 떨어져 생긴 손의 상처는 거의 아물었지만
창피 당했다는 마음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습니다.
그녀 볼일이 막막합니다. 그래도 수업은 들어가야겠지요.
하지만 책은 주지 못하겠습니다. 강의실 앞좌석 한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내 앞자리에는 가방 몇 개만 남겨놓고 주인들은 어디를 나갔나봅니다.
앗 그 가방들의 자리는 그녀 일행들의 자리였습니다.
수업이 시작할 무렵 그녀와 그녀 친구가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와 그 자리에 앉더군요.
좀 멋쩍어 했습니다. 제법 긴 머리 때문에 그녀의 하얀 목은 볼 수가 없었지만
대신 그녀 머리결의 향기를 맡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큰 실수는 하긴 했나봅니다.
그녀가 시위를 하듯 이 수업과 전혀 상관없는
전에 내가 베고 잠이 들어 침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던 그 책과 같은 책을 꺼내어 놓았습니다.
책표지사이에는 크게 9243** 일교과 소수민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소수민은 그녀의 이름인가 봅니다.
하하 그녀는 약간 공주병이 있나봅니다.
저렇게 크게 자기이름을 광고하는걸 보면 말입니다.
내가 사놓은 책과 또한 그녀의 예전 그 책은 이젠 어떡하지요?
이름도 그녀처럼 예쁩니다.
소·수·민.
소수민? 소수민...
근데 속으로만 중얼거린다는 게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더니 "예?"라고 그랬습니다.
하하 그것이 그녀와의 첫 대화였습니다.
때마침 교수가 우리 민족은 동북아의 소수민족 만주족이 한반도 쪽으로 남하하여...
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난 그녀에게 "족."이라고 대답해 주었지요.
뭔가 기분 나쁘다는 인상을 나에게 주더니
아까 그녀의 이름이 적힌 그 책에다 무언가 적고는 나에게 잘 보이는 쪽으로 옮겨놓더군요.
그 책을 보았습니다.
그 책에는 새로이 여덟자가 적혀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새로 산 책"
책 내놔란 무언의 시위란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책을 안 들고 왔는데 어떡하지요?
그렇게 그날은 그녀의 바로 뒷자리에서 교양수업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제 도서관처럼 이 자리를 제 고정자리로 할렵니다.
민이: 오늘은 교양수업이 있는 날입니다.
그때 자전거사건 이후로 아직 그를 못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를 볼 수 있겠군요.
손은 괜찮을까요?
이번엔 혹시나 하고 앞자리에다 자리를 맡았습니다.
그가 저번에 앉았던 바로 앞자리입니다.
그에게 내가 그가 앉았던 자리근처에 자리를 잡았다는 인상은 주기 싫었기에
친구를 꼬셔서 커피를 마시러 나갔습니다.
강의실로 돌아와보니 반갑게도 그는 내 바로 뒷좌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도 이 교양수업은 출석을 부르지 않는군요.
수강생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교수는 출석부를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는 아직 내 이름을 모를 것입니다. 난 책에다 이름을 적지 않습니다.
단지 글자를 알아 볼 수 없는 사인만 해놓지요.
그러나 난 그에게 내 이름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교수가 출석을 불렀다면 굳이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될텐데...
그가 주지 않아 새로 산 책에다 크게 이름을 적어 밖으로 내어놓았습니다.
충분히 그가 이 책의 내 이름을 볼 수 있을 겁니다.
호호 역시 그는 내 이름을 보았나봅니다.
소리는 작았지만 분명 그의 입에서 내 이름 석자가 불리어 졌습니다.
나도 모르게 뒤돌아 "예?"라고 답해버렸지요.
에그 쑥스러워라...
근데 그는 약간 멋쩍은 듯 멀뚱거리더니 "족"이라고 답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교수가 강의하는 내용에서 소수민족이라는 단어를 듣고서야
그가 내 이름가지고 놀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좀 분했습니다.
책도 안 돌려주고 그가 좀 얄밉더군요.
그래서 책에다 다시 열네자를 썼습니다.
"네가 주지 않아 할 수 없이 새로 산 책"
앞에 여섯 글자는 연필로 아주 작게 썼습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 지워버렸구요. 내가 무슨 짓 하나 모르겠습니다.
자기 이름은 뭐 그렇게 좋나? 혜철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구나...
그가 좀 얄미웠던 건 사실이지만 다음 주부터 이 자리는 제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철이: 수요일 오후가 한가롭습니다.
가을이라 사내 가슴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큰일이군요.
이럴 때면 아무 여자나 막 좋아해 버리는 습성이 있는데... 하하! ^^ 그녀가 있었군요.
그때 자전거를 태워준 녀석을 꼬셔 사대앞 벤취에 앉아 커피를 마셨습니다. 낭만이 있더군요.
녀석이 왜 하필이면 사대앞이냐고 따지더군요.
이쁜 여학생들이 많은 예술대나 생물대쪽으로 가자고 그랬습니다.
하하 녀석아 여기도 예쁜 여학생이 많다네...
혹시 그녀가 사대쪽에서 나오지나 않을까
친구와 이야기하면서도 계속 눈은 사대건물 현관 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그러고 있었는데 벤취 뒤쪽에서 누군가 나를 스쳐지나 사대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가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 모습이 너무 가을적입니다.
머릿결이 여린 바람에 날리고 벌써 떨어져 버리는 나뭇잎하나가
그녀의 눈망울처럼 내 앞에 내려앉더군요. 눈이 마주쳤습니다.
좀 쑥스럽더군요. 그녀와 난 잘 마주치는거 같습니다. 애써 태연한 척 담배를 찾아 꺼내어
물었습니다.
하하. 부끄럽습니다.
뭘 그렇게 쳐다봅니까? 빨리 가세요. 책은 나중에 꼭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려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사대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민이: 수요일 오전은 여유롭습니다. 오전엔 수업이 없기 때문입니다.
점심이 다가와서야 천천히 집을 나섰지요. 이크.! 잘못하면 수업에 늦겠습니다.
오늘따라 길이 너무 막힙니다. 이런 교통사고가 났군요.
체증은 접촉사고가 난 승용차와 택시 때문이었습니다.
그 두 자동차가 길을 비켜주지 않아 길이 막혔습니다. 수업시작시간은 이미 지났군요.
학교에 도착하자 마자 급히 뛰었습니다. 숨이 찹니다. 이제 걸어가야겠습니다.
사대앞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벤취에 앉은 두 남학생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한 사람의 뒷모습은 낯이 익은 모습이군요. 벤취를 지나치다가 뒤를 돌아 봤습니다.
그였습니다.
벌써 떨어져버리는 낙엽이 그가 앉은 벤취에 몇 개가 내려앉습니다.
그 모습이 가을날의 동화 같습니다. 어색한 듯 담배를 문 모습마저 정겹게 보입니다.
수업엔 늦었지만 그 보상이라도 하듯 사대앞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호호 뭘 그렇게 멀뚱멀뚱 쳐다보세요?
알았어요. 전 이만 수업에 들어가 볼께요.
인연 #5
철이: 교양수업 강의실에 난 저번 주에 앉았던 자리에 가방을 풀고 앉았습니다.
얼마 안있어 그녀가 나타나더군요.
날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내 바로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운 머리칼의 향내가 오늘의 나를 기쁘게 합니다.
오늘은 그녀의 책을 가져왔지만 또 주지는 못 할겁니다.
예전에 미안하다는 말 몇 자 적은 편지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앞자리의 그녀 책의 이름도 보았습니다.
가을입니다. 가을은 언제나 사내의 마음을 설레게 하나봅니다.
문득 편지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의 학과와 학번과 이름을 아는데 그녀한테 편지를 못 보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그녀한테 편지나 보내 볼랍니다. 아마 편지지에 내 이름을 적지는 못할 겁니다.
그냥 우연히 그대를 보고 마음이 이끌린 사내라고만 적어야겠습니다.
민이: 오늘은 교양수업이 있는 날입니다.
강의실엔 그가 먼저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습니다.
홀로 앉아 있지만 외롭게 보이진 않습니다. 그렇지요 내 마음이 끌렸으니 말입니다.
강의를 듣다가 창가에 이는 바람소리가 정겨운 색으로 들어옵니다.
그의 앞에 앉아 시를 한편 적었습니다. 그는 잘 모르겠지요.
내가 적은 공책의 시를...
오늘도 그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휑하니 나가버렸습니다.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그를 알게될 날이 오겠지요.
철이: 드디어 그녀에게 보낼 나의 첫 편지를 썼습니다.
옆 좌석에 그녀는 없었지만 오늘은 제법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 있었습니다.
남들은 공부를 한줄 알겠지만 사실은 편지를 썼지요.
늦은 밤 사대 수위아저씨의 눈을 피해 일교과 편지함 일학년란에다 넣어두었습니다.
그녀가 저 편지를 보아야 할텐데 말입니다.
글자를 좀더 크게 쓸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충성! 수위아저씨 저 임무마치고 철수합니다. 열심히 티비를 보십시오.
가을은 이제 제모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서울의 하늘이 많이 맑아졌습니다.
남쪽 하늘에 시리우스란 적색거성의 별빛이 오늘은 보입니다.
민이: 오늘 전공수업을 듣는데 친구가 편지 하나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분명 나한테 온 것은 맞는데 누가 보냈을까요? 이름이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강의를 듣다말고 편지 내용을 읽었습니다.
우연히 내 마음에 내려앉은 소녀에게 보냅니다.
호호. 아직 이런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누굴까? 나의 눈에 자주 띤 모르는 남학생이 있었던가?
우리과 학생은 아닐까? 그리고 혹시 그는 아닐까?
하지만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낯선 편지였지만 기분은 좋군요.
캠퍼스는 가을빛으로 이제 변해가고 있습니다.
철이: 이번 주 교양시간에도 난 그녀의 뒤에 앉았습니다.
편지를 보낸 탓인지 조금은 다른 날보다 그녀의 뒷좌석에 앉기가 쑥스러웠습니다.
그녀는 나의 편지를 보았을까요?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었습니다.
친구와 다정하게 속삭이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사랑스럽습니다.
가을이라 그렇겠지요?
민이: 그는 지금 내 뒤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아직 내가 가을을 타고 있는 것을 모르나 봅니다. 그의 볼펜 구르는 소리가 애처롭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친구가 수업이 무료했던지 속삭였습니다.
그 속삭임 속에는 그에 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전에부터 일정하게 뒷좌석에 앉는 그가 친구에게도 눈에 들어왔나 봅니다.
자기 때문에 저 자리에 앉는거 같다고 합니다.
후.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친구의 모습은 참 예뻤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아니겠지요. 친구 때문에 그가 저 자리에 계속 앉는다고는 생각하기 싫습니다.
도서관에서부터 봐왔지만
그는 자리를 정하면 계속 같은 자리를 고집한다는 것을 난 이미 알고 있습니다.
철이: 일요일날 학교에 왔습니다. 편지지도 들고 왔지요.
오늘은 예전에 그녀 옆에 앉던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내 옆자리에 없습니다.
웬 떡대같은 놈이 아침부터 이를 갈고 자고 있습니다. 깰 생각을 않는군요.
오전 내내 이가는 소리를 들으며 편지를 썼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로 꽉 찬 도서관 풍경도 아름답겠지만
학생들이 별로 없는 한산한 분위기의 열람실에서 이렇게 철모르고 자는 놈과
꽃 편지지에다 짝사랑의 편지 쓰는 놈의 모습도 미소띠게하는 풍경 같은데 그렇지 않으세요?
점심 먹기 전에 사대에 편지지를 갖다 놓았습니다.
편지를 무사히 갖다놓고 나오니 기분이 ?윱求?
히죽히죽 웃고 나오다가 사대 앞에서 하하 그녀와 눈이 떡 마주쳤네요.
아무래도 오늘 그녀가 편지를 발견한다면 그 편지 쓴 놈이 나란 걸 알게되겠군요.
쪽팔립니다. 또 죽어라 뛰어야겠습니다. 잠시간의 눈맞춤 뒤에 난 뛰었습니다.
가을바람 색깔은 점점 짙어만 갑니다.
민이: 오늘은 일요일이지만 학교를 나갔습니다.
별로 동아리활동은 안 했지만은 과내 어학동아리에서 오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를 사대앞에서 보았습니다. 일요일날 여기는 무슨 일일까요?
나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뭔가 어색한 표정을 짓습니다.
자주 마주쳤는데 눈인사나 해줄까 했는데 그는 전에 자전거에서 떨어졌을 때처럼
잠시 내 앞에 머물다 육상선수처럼 뛰어 나를 지나쳐 가버렸습니다. 뛰는걸 좋아하나 봅니다.
동아리 방을 들어갈려고 했습니다만 우리과 편지함 옆에
동아리의 모임장소가 학교앞 무슨 찻집이니 그리로 오라는 내용의 포스트가 붙어 있었습니다.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겠군요.
철이: 한동안 편지는 못 보내겠습니다.
편지를 쓰기 시작한지 두번째만에 들켜버린거 같아 부끄럽습니다.
오늘은 화요일입니다. 학생식당 양식메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하 그녀는 내 눈에 잘 띠는군요.
학생식당 몇 테이블 건너 내 맞은편에 앉은 여학생이 낯이 익길래 봤더니 그녀의
친구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또 뒷모습이군요. 난 그녀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더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나와 같이 밥을 먹던 친구가 그녀의 친구를 보더니 '이쁘다.' 그럽니다.
하하 녀석아 그 맞은편에 앉은 여학생은 더 이쁘다네.
내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그녀가 이쪽으로 고개를 한번 돌렸습니다.
친구는 그녀의 친구가 더 이쁘다는군요.
내 친구는 눈이 삐었나봅니다.
그녀가 이번에도 내 편지지를 받았을까요?
그랬다면 내가보냈다는 걸 알까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들켰던 말건
계속 내 마음의 조각 같은 편지를 계속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이: 과친구하나가 어제부터 있었는데 안 찾아갔다며 편지를 건네주었습니다.
또 무기명이군요.
그 편지에는 내가 좋다느니 사랑의 감정이 생겼다느니 하는 연애편지 같은 내용이 아니라
차분하게 자기마음과 자기마음 속의 내 모습을 시처럼 적어간 내용의 글이 담겨 있었습니다.
누굴까? 궁금하군요.
두번째로 온 것으로 봐서 몇 번 더 이 편지의 주인은 이런 짓을 계속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한번 만나자고 하겠지요.
학생식당에서 친구가 교양과목의 남학생이 저기 보인다며 눈웃음을 짓더군요.
고개를 돌려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