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행금지해제(通行禁止解除)
1945년 9월부터 37년간 계속된 야간 통행금지조치가 1982년 1월 5일 해제되었다.
제5공화국 정부는 자유 보장 및 군*권의 억압심리 해소 차원으로 지난 37년간 계속된 야간 통행금지 조치 해제를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1982년 1월 5일 새벽 4시를 기해 일부 전방 및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 단행 조치했다.
1982년 1월 5일 새벽 4시를 기해 1945년 9월부터 37년간 계속된 야간 통행금지 조치가 일부 전방의 접적지역과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일제히 해제되었다. 이로써 그 동안 유보되었던 국민의 권리가 회복되었고, 인신 자유의 구속 수단이 줄어들었으며, 한국 사회는 군*권의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서 다양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첫걸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야간 통행금지는 1945년 9월, 미국의 군정사령관 존 r.하지(john r. hodge) 중장의 군정포고 1호가 발동되면서 시작된 이래, 빈곤 속에서 횡행하는 범죄를 줄이는 등 순기능도 있기는 했지만, 국민의 야간생활 통제는 물론 인신(人身)을 구속하는 수단 등으로 작용함으로써 순기능보다 훨씬 많은 반발과 역기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존속한 군국주의의 산물로서, 그 동안 이승만(李承晩) 독재정권과 박정희(朴正熙) 군*권의 국민통제 수단으로 널리 이용되는 등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그러던 차에 1981년 3월 출범한 제5공화국의 전두환(全斗煥) 군*권은 비정상적인 정권 탈환에 따른 국민의 반발을 무마시키려는 속내를 감춘 채 시의 적절하게 야간 통행금지조치 해제계획을 진행하였다. 1981년 11월 19일,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민주한국당·국민당이 만장일치로 야간 통행금지 해제건의안을 채택하기로 합의하고, 그해 12월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건의안을 통과시킨 뒤, 이듬해 1월 5일 드디어 해제조치를 단행하였다. 야간 통행금지의 상징인 서대문 로터리를 가로막았던 육중한 바리케이드가 걷히고, 이 해제조치에 연이어 중고교생의 두발 자율화와 교복 자율화가 시행됨으로써 자유화·대중화 시대의 바람이 일어 인적이 끊어졌던 한밤의 거리가 인파로 넘치고, 중고교생들의 장발이 늘어나는 등 새로운 사회 풍속도가 나타났다
1981년 크리스마스 마지막 야간통금이 있던 날 밤, 시청 앞 서소문입구 버스정류장에 줄지어 서있는 시민들의 모습
통금으로 차량과 인적이 끊긴 서울역 앞
1982년 1월 5일 명동
밤이 시작됐을 때 기념 사진을 찍는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다.
밤을 호흡하려는 시민들이 명동을 누볐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남산을 1시간30분 정도 돌아보는 ‘시내 야경관광’ 입간판이 거리에 나왔다.
1982년 1월4일 자정, 해방 이후 37년 만에 처음으로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다.
물론 통금 시절에도 서울의 밤은 있었다.
그것은 분단된 시간이었다.
밤 12시까지의 ‘숏타임’과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 4시까지의 ‘긴 밤’ 서비스는
당시 서울의 밤을 지배하는 두 얼굴이었다.
서민들은 숏타임과 긴 밤 가운데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했다.
그 경계를 넘나들며 자정 이후의 서울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은
정치인, 고급 관료, 경찰, 그리고 기자들 뿐 .
“통금에 쫓겨 여관에 가면 베니어판으로 된 칸막이 옆에서
‘이럴 거면 왜 따라왔어’ 하는 소리까지 들렸어요.”
연극연출가 정일성의 회고다.
서울의 밤문화는 일제강점기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서울의 밤문화 변천사를 말해준다.
가장 중대한 고비는 통금 해제다.
서민들은 이때부터 서울의 밤거리를 공식적으로 접수했다.
통금 해제 직후인 1982년 2월6일, 서울극장에서 심야영화가 처음으로 선보였는데
개봉작이 영화배우 안소영 주연의 '애마부인'이었다.
첫날 밤, 1500석의 서울극장에 5천여명의 관객이 몰렸고
극장 유리창이 깨지는 소동 끝에 경찰이 출동했다.
통금 해제는 서울 밤의 색깔과 공기를 바꿔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