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 허생전

abno 작성일 08.03.06 22: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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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 -당구편- 각색:김대아/Lotus

허선생은 회현동에 살았다. 곧장 남산(南山) 밑에 닿으면, 구석진 곳에 월세집이 모여 있는데, 그의
방 한개짜리 월세집은 여름에는 물이 새고, 겨울에는 수도 동파를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허선생
은 당구 공부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밤마다 노래방 도우미로 뛰어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당구를 치지 않으니, 교본만 읽어 무엇합니까?"

허선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이론을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그럼 당구장 카운터 아르바이트라도 못 하시나요?"

"카운터 아르바이트 일은 본래 당구대 닦는 법을 배우지 않았는 걸 어떻게 하겠소?"

"그럼 당구 재료 장사는 못 하시나요?"

"장사는 밑천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당구 교본을 읽더니 기껏 '어떻게 하겠소?' 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아르바이트 일도 못
한다, 장사도 못 한다면, 죽빵(내기당구)이라도 못 치시나요?"

허선생은 읽던 교본을 덮어 놓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당초 이론 공부로 십 년을 기약했는데, 이제 칠 년일걸……."

하고 휙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선생은 거리에 서로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종로로 나가서 시중의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누가 이 근방에서 제일 당구 고수요?"

변씨(卞氏)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허선생이 곧 변씨의 집을 찾아갔다. 허선생은 변씨를 대하여
인사하고 말했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 보려고 하니, 만원을 꾸어 주시기 바랍니다."

변씨는

"그러시오."

하고 당장 만원을 내주었다. 허선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변씨의 문하생들이 나가
는 허선생을 보니 영락 없는 폐인이었다. 늘어난 파란 츄리닝에 면도는 안한지 오래고, 다 떨어진 슬
리퍼에 입에서는 라면 냄새와 소주 냄새가 진동을 했다. 허선생이 나가자, 모두를 어리둥절해서 물었
다.

"저 이를 아시나요?"

"모르지."

"아니, 이제 하루 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만원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
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변씨가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당구비를 빌리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다마 수를 대단
히 선전하고, 신용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은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
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손가락을 보니 큐걸이가 확실하게 잡혀 있었고 눈썰미를 보니 각잡기
와 길 보기에 능할 뿐 아니라 손목이 유연해서 힘 조절에 탁월할 것 같이 보였느니라. 그 사람이 해 보
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 주면 모르되, 이왕 만원
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을 하겠는냐?"

허선생은 만원을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근처 당구장으로 갔다. 그 당구장은
고수들이 마주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7년동안 갈고 닦은 이론을 바탕으로 죽빵을 쳐서 금새
10만원을 땄다.

"만원으로 온갖 당구의 고수들을 물리쳤으니, 우리 나라의 당구계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그리고 10만원중 자장면 값을 제외한 나머지 돈으로 다시금 죽빵을 쳤다. 원 투 쓰리 다 잡아주고도
엄청나게 돈을 땄다. 쉬는 시간에는 당구장 안 밀실에서 포커를 쳐서 몇일 새 순식간에 돈이 오천만원
으로 불어났다.

허선생은 자장면 배달부을 만나 말을 물었다.

"이 근처에 혹시 장사가 잘 안되는 당구장이 없던가?"

"있지요. 언젠가 주문을 받아 서쪽으로 1분 동안을 배달가서 어떤 허름한 당구장에 도착했지요. 당구
대는 잘 닦이지 않아 공이 제대로 굴러가질 않고, 큐대 또한 손질이 제멋대로 되어있는 터라, 손님이
삑사리를 치고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는 대단히 기뻐하며,

"자네가 만약 나를 그 곳에 데려다 준다면 탕수육 한그릇을 주문하겠네."

라고 말하니, 배달부가 그러기로 승낙을 했다.

드디어 자장면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서쪽으로 가서 그 당구장에 이르렀다. 허선생은 문 앞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실망하여 말했다.

"당구대가 열 개도 못 되니 무엇을 해 보겠는가? 그러나 목이 좋고 중국집이 가까우니 단지 잘 나가
는 당구클럽은 될 수 있겠구나."

"당구장에 손님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대체 누구와 더불어 당구 클럽을 만든단 말씀이오?"

배달부의 말이었다.

"공이 있으면 사람이 절로 모인다네. 미모의 아르바이트생이 없을까 두렵지, 손님이 없는 것이야 근
심할 것이 있겠나?"

이 때, 종로 근처에 수십명의 백수 처지의 당구장 외상꾼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각 당구장에서 `외
상 금지`를 붙여 외상을 막고자 하였으나 좀처럼 외상이 줄지 않았고, 외상꾼들도 감히 나가 당구를
못쳐서 심심한 판이었다. 허선생이 외상꾼들이 모여있는 만화방을 찾아가서 우두머리를 달래었다.

"당구수지 200 네 명이 편을 먹고 치면 한 팀 앞에 얼마씩 놓고 치지요?"

"한 팀당 400 이지요."

"모두 여자친구가 있소?"

"없소."

"개인 큐대는 있소?"

외상꾼들이 어이없어 웃었다.

"여자친구가 있고 개인 큐대가 있는 놈이 무엇 때문에 괴롭게 외상으로 당구나 친단 말이오?"

"정말 그렇다면, 왜 여자친구를 얻고, 취직를 하여 돈을 벌어 개인큐를 장만하여 떳떳하게 당구 치면
서 여자친구의 응원을 받으며 지내려 하지 않는가? 그럼 외상꾼 소리도 안 듣고 살면서, 기념일에는
커플의 낙(樂)이 있을 것이요, 당구장에서 자장면을 시켜도 외상 안받아주면 어찌할까 걱정을 않고
길이 의식의 요족을 누릴 텐데."

 

"아니, 왜 바라지 않겠소? 다만 일자리가 없고 신용 불량자라 못 할 뿐이지요."

허선생은 웃으며 말했다.

"당구를 치면서 어찌 취직을 걱정할까? 내가 능히 당신들을 위해서 마련할 수 있소. 내가 외상값을
갚아주겠소. 그리고 내일 나의 당구 클럽으로 오시구려."

허선생이 외상꾼와 언약하고 내려가자, 무리들은 모두 그를 미친 놈이라고 비웃었다. 이튿날, 무리들
이 당구장에 나가 보았더니, 과연 허선생이 외상값을 다 갚아준 것이었다. 모두들 대경(大驚)해서 허
선생 앞에 줄지어 절했다.

"오직 허선생의 명령을 따르겠소이다."

"너희들, 앞에 있는 당구공을 있는대로 손에 쥐어 보거라."

이에, 그 백수들이 다투어 당구공을 집어 봤으나, 한 사람이 세 알 이상을 쥐지 못했다.

"너희들, 손이 한껏 세 알도 못 쥐면서 무슨 당구를 치겠느냐? 인제 너희들이 새로운 사람이 되려고
해도, 이름이 신용불량자의 장부에 올랐으니, 갈 곳이 없다.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기다릴 것이니, 한
사람이 이 큐대를 가지고 가서 가서 죽빵으로 돈을 벌어 오너라."

특수제작된 큐대를 건내준 허선생의 말에 그 무리들은 모두 좋다고 흩어져 갔다.

무리들이 빠짐없이 모두 돌아왔다. 허선생이 외상꾼을 몽땅 쓸어 가서 종로 일대 당구장 안에 시끄러
운 일이 없었다.

그들은 큐대와 당구대를 손질하는 법을 배워 다른 당구장으로 출장을 나가 큐대와 당구대를 손질하
여 돈을 벌고, 쓰리쿠션 실력을 갈고 닦아 다른 당구장으로 나가 죽빵을 쳐서 얻은 이익의 10%를 허
선생의 당구클럽으로 환원하였다. 그렇게 해서 자본금 수천만원을 얻게 되었다.

허선생이 탄식하면서,

"이제 나의 조그만 시험이 끝났구나."

하고 이에 무리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너희들 생활이 안정되었으니 이제 나는 떠나련다. 다만, 아이들을 낳거들랑 큐걸이 부터 가르치고,
뽀록을 치거들랑 항상 인사하는 예의를 갖추도록 하여라."

다른 중국집 전단지와 스티커들을 모조리 불사르면서,

"한 당구장에는 하나의 단골 중국집만 있으렸다."

하고 특수 제작된 큐대들을 모두 부러트리며,

"수지가 안맞으면 맞춰서 쳐야지. 이 큐대들을을 우리 나라에도 용납할 곳이 없거늘, 하물며 이런 작
은 당구장에서랴!"

했다. 그리고 포켓 볼을 아는 자들을 골라 모조리 집으로 보내면서,

"이 섬에 화근을 없애야 되지. 당구는 역시 4구와 쓰리쿠션이야."

했다.

허선생은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외상값 갚을 돈이 없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그러고도 돈이 천만
원이 남았다.

"이건 변씨에게 갚을 것이다."

허선생이 가서 변씨를 보고

"나를 알아보시겠소?"

하고 묻자, 변씨는 놀라 말했다.

"그대의 안색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혹시 만원을 실패 보지 않았소?"

 

허선생이 웃으며,

"재물에 의해서 얼굴에 기름이 도는 것은 당신들 일이오. 만원이 어찌 당구의 도(道)를 살찌게 하겠
소?"

하고, 천만원을 변씨에게 내놓았다.

"내가 하루 아침의 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당구 이론 공부를 중도에 폐하고 말았으니, 당신에게 만원
을 빌렸던 것이 부끄럽소."

변씨는 대경해서 일어나 절하여 사양하고, 십분의 일로 이자를 쳐서 받겠노라 했다. 허선생이 잔뜩
역정을 내어,

"당신은 나를 장사치로 보는가?"

하고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 버렸다.

변씨는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허선생이 남산 밑으로 가서 조그만 월세방로 들어가는 것이 멀리
서 보였다. 한 늙은 노숙자가 근처에서 박스를 까는 것을 보고 변씨가 소주 한 병을 주며 말을 걸었다.

"저 조그만 월세집이 누구의 집이오?"

"허선생의 집이지요. 가난한 형편에 당구 이론 공부만 좋아허더니, 하루 아침에 집을 나가서 3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부인은 허선생이 집을 나간 날 곧바로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갔지요.그
래도 양심이 있는건지 좋아서 정신이 없었던건지 보증금은 안빼갔다더이다."

변씨는 비로소 그의 성이 허씨라는 것을 알고, 탄식하며 돌아갔다.

이튿날, 변씨는 받은 돈을 모두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가서 돌려 주려 했으나, 허선생은 받지 않고 거절
하였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특수 큐대를 버리고 천만원을 받겠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도움으로 살
아가겠소. 당신은 가끔 나를 와서 보고 양식이나 떨어지지 않고 옷이나 입도록 하여 주오. 일생을 그
러면 족하지요. 왜 재물 때문에 당구 정신을 괴롭힐 것이오?"

변씨가 허선생을 여러 가지로 권유하였으나, 끝끝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변씨는 그 때부터 허선생
의 집에 양식이나 옷이 떨어질 때쯤 되면 몸소 찾아가 도와 주었다. 허선생은 그것을 흔연히 받아들였
으나, 혹 많이 가지고 가면 좋지 않은 기색으로,

"나에게 재앙을 갖다 맡기면 어찌하오?"

하였고, 혹 당구장을 가자 하면 아주 반가워하며 서로 자장면을 시켜 먹으며 밤새도록 다리에 힘이
풀릴때 까지 당구를 쳤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나는 동안에 두 사람 사이의 정의가 날로 두터워 갔다. 어느 날, 변씨가 3달 동안
에 어떻게 수천만원이나 되는 돈을 벌었던가를 조용히 물어 보았다. 허선생이 대답하기를,

"그야 가장 알기 쉬운 일이지요. 특수 큐대를 쓰면 당구 수지가 낮아도 묘기 당구까지 칠 수 있는 바,
나의 이론과 함께라면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오. 이름난 당구장을 돌아다니며 죽빵을 치면
어찌 그 돈이 모이지 않겠소? 7년동안 연구한 나의 당구에 대한 극의(極義)라 할 수 있소. 하지만 이
는 무릇 선량한 당구인을 해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후세에 당구인들이 만약 나의 이 방법을 쓴다면
반드시 당구계를 병들게 만들 것이오."

"처음에 내가 선뜻 만원을 꾸어 줄 줄 알고 찾아와 청하였습니까?"

허선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만이 내게 꼭 빌려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능히 만원을 지닌 사람치고는 누구나 다 주었을
것이오. 내 스스로 나의 재주가 족히 많은 돈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운명은 하늘에 매인 것이
니, 낸들 그것을 어찌 알겠소? 그러므로 능히 나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 반드시
더욱더 큰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은 하늘이 일일 텐데 어찌 주지 않겠스? 이미 만원을 빌린 다음에는 그
의 복력에 의지해서 일을 한 까닭으로, 하는 일마다 곧 성공했던 것이고, 만약 내가 사사로이 했었다
면 성패는 알 수 없었겠지요."

변씨가 이번에는 딴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 서울의 당구인들이 제주도의 당구인(주1) 들에게 당했던 치욕을 씻어 보고자하니, 지금이야말
로 실력 있는 서울의 당구인이 팔뚝을 뽐내고 일어설 때가 아니겠소? 선생의 그 재주로 어찌 괴롭게
파묻혀 지내려 하십니까?"

"어허, 자고로 묻혀 지낸 사람이 한둘이었겠소? 우선, 연신내 김** 같은 분은 인천에서 조차 원 투 쓰
리 다 잡아주고 쳐도 능히 이길 사람이 없는 인물이었건만 큐대만 손질하다 늙어 죽었고, 응암동 뽀록
거사(뽀록居士) 유** 같은 분은 삑사리만으로 당구 10000수지와 겨루어 이길만한 재능이 있었건만 근
처 당구장에서 음료수만 축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당구인들은 가히 알만한 것들이지요. 나는 특
수 규대를 잘 사용 하는 사람이라, 내가 벌 수 있는 돈이 족히 아홉개의 당구장을 살 만하였으되 부러
트리고 돌아온 것은, 들키면 손목이 부러지기 때문이었지요."

변씨는 한숨만 내쉬고 돌아갔다.

변씨는 본래 제주도 당구계를 치자는 남벌론의 대두인 서울 당구계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공선생과
잘 아는 사이였다. 공선생이 당시 서울 당구 협회장이 되어서 변씨에게 동네 당구장에 혹시 쓸 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변씨가 허선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공선생은 깜짝 놀라면서,

"기이하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던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제가 그 분과 상종해서 3년이 지나도록 여태껏 이름도 모르옵니다."

"그인 이인(異人)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

밤에 공선생은 변씨만 데리고 걸어서 허선생을 찾아갔다. 변씨는 공선생을 문 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
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허선생을 보고 공선생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허선생은 못 들은
체하고,

"당신은 자장면이나 어서 배달 시키시오."

했다. 그리하여 즐겁게 자장면을 먹는는 것이었다. 변씨는 공선생을 밖에 오래 서 있게 하는 것이 민
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허선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공선
생이 방에 들어와도 허선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공선생은 몸둘 곳을 몰라하며 서울에서
독한 당구인을 구하는 뜻을 설명하자, 허선생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당구수지가 얼마나 되느냐?"

"20000점이오."

"그렇다면 너는 가야시는 기본이겠군. 내가 공 두개를 당구대 구석에 박아 둘테니 네가 그 공 두개 쓰
리쿠션으로 쳐서 그 반대편 구석에 다시 가야시을 만들 수 있겠느냐?"

공선생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이(第二)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했다.

"나는 원래 '제이'라는 것은 모른다. 가수는 알아도……."

하고 허선생은 외면하다가, 공선생의 간청에 못 이겨 말을 이었다.

"그럼 맛세이로 투 가락 빵꾸를 친 연후에 공이 떡이 되도록 모을 수 있겠는가?"

이 대장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공을 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무릇, 천하의 당구 고수가 되려거든 먼저 천하의 고수들과 접촉하여 결탁하지 않고는 안 되고, 남의
지역 당구장을 치려면 먼저 당구 수지를 속이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제주도가 갑자
기 천하의 짠 당구 수지가 되어서 제주도 출신 당구인들과는 친근해지지 못하는 판에, 서울이 다른 지
역보다 무른 당구 수지가 되어 우리를 가장 깔보는 터이다. 지금의 당구 수지를 속이고 학생시절의 짜
디 짠 당구 수지로 칠 것을 허용해 줄 것을 간청하면, 저들도 반드시 당구 수지가 무른 것을 아는 터
라 기뻐 승낙할 것이다. 그리고 서울의 고수들을 가려 뽑아 제주도 사투리을 익히게 하고 주민등록을
옮겨 제주도의 실정을 정탐하는 한편, 당구 수지를 어지럽히면 천하를 뒤집고 예전의 그 수치를 씻을
수 있을 것이다."

공선생은 힘없이 말했다.

"서울 당구인들이 모두 조심스럽게 자신의 당구 수지를 지키는데, 누가 뽀록구 인척 공을 치고 실력
을 숨기려 하겠습니까?"

허선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소위 당구 수지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공 두개만 알아서 맞춰 이기면 되는것을 가지고 한번에 몇
개를 칠 수 있다며 자칭 당구 고수라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은 데가 있는냐? 공이 다르고 당구대가 다
르면 컨디션에 따라 수지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쵸크 가루에 공이 튀어 흘러가다 맞을 수도 있는데 대
체 무엇을 가지고 당구 수지라 한단 말인가? 나는 부인의 바가지를 피하기 위해서 특수 제작된 사기
성 짙은 큐대로 치는 사기당구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뽀록거사 유**은 당구비를 아끼기 위해서
뽀록을 치고도 미안한 마음에 다음 공을 일부러 안 치는 일이 없었다. 이제 대명(大明)을 위해 제주도
를 치겠다 하면서, 그까짓 당구 수지 하나를 아끼단 말인가?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당구계의 황제라 하겠는가? 당구계의 황제라는 게 참으로 이렇
단 말이냐? 너 같은 자는 큐대로 손목을 부러트려야 할 것이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쇠로 만든 연습용 큐대를 찾아서 때리려 했다. 공선생은 놀라서 일어나 급히 도
망쳐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집이 텅 비어 있고, 허선생은 간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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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밝혀진 바로 허선생의 이름은 술어(術御) 라고 합디다..(By mAXIMA)
코쟁이 양키들 이름으로는 허슬러라고도 합디다. -_-

 

부록)

*주1) 제주도의 당구 수지는 엄청나게 인색하기로 유명함. 즉, 같은 당구수지라면 제주도의 당구인
은 실력이 더 대단하다는 뜻임.

당구 용어 설명 - 표준어가 아닌 용어가 많지만 재미를 위해 본문에서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다마 : 당구공

다마 수 : 당구 수지

삑사리 : 큐대가 잘 손질이 되지 않아 공이 큐대에 맞아도 바로 굴러가지 않는 현상을 이릅니다. 흔
히 '따악'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나지 않고 '삑'하는 소리가 난다 하여 이를 삑사리라 부릅니다. 당구장
에서만 볼 수 있는것이 아니고 가끔은 립싱크 하던 가수들이 라이브 한답시고 설칠때 나오기도 합니다.

뽀록,뽀록구 : 의도하지 않았는데 맞아 들어가는 공

죽빵 : 내기당구를 칭하는 것으로, 통상 3구(쓰리 쿠션)으로 칩니다. 보통 당구 시합 자체를 가지고 내
기를 거는 것이 아니고, 게임중 맞아 들어가는 공의 종류에 따라 돈을 얼마씩 정하고 그때마다 돈이
오고 가는 즐거운 게임을 뜻합니다.

4구 : 적색 공 2개, 백색 공 2개로 치는 당구를 뜻하며 백색공 1개로 나머지 적색공 2개를 맞추면 득점
을 하는 게임으로 백색공으로 또 다른 백색 공을 맞추거나, 아무 공도 맞추지 못하면 파울을 받게 됩
니다.

3구 : 적색 공, 황색 공, 백색 공의 3개의 공으로 치는 당구를 뜻하며, 백색 공, 또는 황색 공으로 나머
지 두 공을 맞추는 게임인데 맞춰야 할 두 공이 다 맞기 전에 자신이 큐대로 친 공이 당구대의 쿠션을
3회 이상 맞춰야 득점이 이루어 지는 게임입니다.

쓰리쿠션 : 맞춰야 할 두 공이 다 맞기 전에 자신이 큐대로 친 공이 당구대의 쿠션을 3회 이상 맞추는
것을 의미.

가야시 : 공을 모으는 것을 이릅니다.

가락 : 공을 맞추기 전 쿠션을 먼저 맞추는 것을 이릅니다. 보통, 원 가락, 투 가락, 쓰리 가락 등으로
말하며, 명시된 숫자만큼 먼저 쿠션을 맞추는 것을 이르는 용어입니다. 흔히 같이 쓰이는 말로 “빵
꾸” 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는 공과 쿠션 사이로 공을 넣는다고 해서 붙여진 용어입니다.

떡 : 공 두개가 서로 빈 틈 없이 붙으면 “떡이 되었다.” 라고 이르게 됩니다.

맛세이 : 큐대를 세워서 공을 찍어치는 고난이도의 기술을 말하며, 보통 당구장에서는 300이하는 맛
세이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익숙하지 않은 자가 맛세이를 시도하게 되면 당구대의 천이 찢
어질 우려가 크기 때문이며, 필자 또한 군 복무 시절 맛세이를 연습하다가 당구대 천을 찢어놓아 심하
게 얼차려를 받은 슬픈 기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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