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부른 사상 최악의 집단자살
People's Temple
Peoples Temple(인민사원, People's Temple)은
1956년 교주 짐 죤스(Jim Jones or James Warren Jones)에 의해
캘리포니아주 샌프랜시스코에 설립되었다.
"인민사원"은 1978년 남아메리카 가이아나(Republic of Guyana)로
이주하여 914명이 집단자살한 미국 기독교계 신흥종교 컬트교단(Cult)이다.
교주 짐 죤스는 1931년 인디아나 주 교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신적인 백인 우월주의 KKK 단(Ku Klux Klan)의 조직원이었으며, 짐이 12살 때에 집을 나갔다.
남아메리카 가이아나(Republic of Guyana)의 "Jonestown", 집단자살한 시체가 무수히 널려있다.
짐은 독자이기도 해 모친 리네타(Lynetta Putnam Jones)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녀는 보랜티어 활동에 작극적으로 참가하여 약자 구제에 노력했다. 아들에 대해 "태어나면서 성직자"라고 주위에 자랑했다. 모친의 기대대로 그는 어려서 성직자의 길을 걷기 사작했다. 일요일에는 모친과 함께 교회에 다녔다. 8세 때에 성서를 외고, 12살 때에는 근처의 어린이들에게 "분노의 설교"를 하기도 하면서, 세례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짐 죤스(Jim Jones or James Warren Jones, 1931-1978)와 그의 모친 리네타(Lynetta Putnam Jones)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의 주머니는 항상 동전으로 넘쳐났다. 또 그는 동물을 이상할 정도로 좋아했으며, 버려진 개나 고양이를 자주 데리고 왔으나, 이상하게도 그가 데리고 온 동물들은 어느 것이나 수상하게 돌연사로 마감했다. 짐은 이때마다 눈물을 흘리고, 사체를 공손하게 매장하여, 마치 성대한 장의식 같이 치루기도 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고교를 졸업하고, 17살 때에 21살의 간호부 출신의 마세린(Marceline Baldwin)을 만나게 된다. 곧 결혼하여, 인디애나 대학 재학중에 메조디스트(Methodist) 교회의 목사로 근무했다.
인민사원 "레인보우 페밀리"의 프로퍼갠더(Propaganda, 조직적 선전 활동)
당시 그는 메조디스트 파 목사 실습생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조디스트 파를 탈퇴한다. 1957년 방문 판매로 자금을 만든 그는, 자신이 교주로 하는 종교를 만들었다. 간판은 "인민사원"이라고 했다. 당시 인디애나폴리스는 대단히 빠르게 주민이 백인에서 흑인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었다.
"인민사원"은 급속히 사람들을 매료시켜 신자를 끌어 들였다. 그리고 짐에게는 정력적인 설교의 재능과 기묘한 카리스마성이 있었다. 때는 1950년대 말, TV와 라디오는 시민운동과 흑인의 사회참가에 동참하여 미국전토가 동요하고 있던 중에, 짐은 흑인 주민의 관심을 계산하여,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 스스로 사회적 종교 활동가로써 성공했다.
짐은 인종차별 철폐를 호소하는 데모를 주도하여 직접 참가하고 있다.
교회의 규모는 빠르게 성장하여, 1959년에는 마세린과의 사이에 얻은 2명의 자식 이 외에, "인종차별 철폐"를 기치로 그 자신 한국인과 흑인의 소수민족의 어린이를 양자로 삼고 있었다. 그 자신 "레인보우 페밀리"(Rainbow Family)라고 하는 가족을 만들기 시작했다. 도시의 빈곤층을 수용하여,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인디애나폴리스 거리 곳곳에 "인민사원"의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기 시작했다. 그 선전 포스터의 문구에는, 위대한 설교자이며, 예언자이며 그리고 심령치료사이기도 했다. "인민사원"은 가난한 흑인들에게 침대와 식자를 제공하고, 일감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생기는 노동력 집단을 짐은 교묘하게 이용하여, 인민사원으로 돈이 모이도록 비즈니스 기반을 착실히 쌓아갔다.
이 성공은 더 많은 신자를 불러 모았다. 이 가운데는 부유층도 포함되었으며, 인민사원은 눈에 띄게 지역 제일의 규모를 자랑하는 종교단체가 되었다. 성가대만도 100명이 넘는 규모였으며, 일요일 예배에는 군중이 몰려들어 교회의 각종활동에 적극 솔선 참가했다.
캘리포니아 주 유키아(Ukiah)
짐은 인종차별 철폐를 호소하는 데모를 주도, 신좌익의 저항운동에 참가해서 미디어의 주목을 받기 시작해, 시 인권위원회의 의원장에까지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활동과 대조적으로 그의 측근이나 간부들은 모두가 백인들이었다. 일반신자는 압도적으로 흑인이 우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화려한(?) 자금모집은, 차츰 주위로부터 의혹을 불러왔다. 시 직원들은 짐이 심령치료사로써 과도할 정도의 선전을 펼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짐은 이러한 시 직원의 움직임의 징후를 발 빠르게 감지했다. 그는 항상 자신에게 향해지는 각종 트러불에 대해 민감한 남자였다.
1965년 그는 갑짜기 "신의 사자가 방문했다. 세계의 거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핵의 대학살이 다가 오고있다. 그러나 정당한 우리들을 위해 두 곳의 안전한 피난장소가 남아있다. 즉 캘리포니아 주 유키아(Ukiah)와, 브라질 베로 호리존테이다." 라고 지지자에게 설교했다.
1965년 짐은 충실한 신자들 100여명을 데리고 유키아로 이동했다. 유키아에서 그는 성공했다. 1970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이주하여, 예배에는 수 천명의 청중이 모였다.
People's Temple이 "존스타운"에서 저지른 당시의 사건을 다룬 주요 주간지
이때 짐은 오직 천벌을 설교했으며, 병을 치료하고, 이전에 한 것과 같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식사와 숙식을 제공하여, 그리고 싼 비즈니스 용의 노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규모는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그는 지역의 위원회에 참가하여, 정치가와 유대관계가 깊어지고, 야간학교의 교사까지 했다. 이때부터 그는 커다란 다이아몬드의 반지를 끼고, 비싼 악어가죽 구두를 신고, 캐딜락의 고급 승용차를 타는 등 호화로운 여행을 즐겼다. 드디어 그는 지역 시장에 당선되어 국정에 관계하는 정치가의 방문을 받기 시작했다.
짐은 신자들에게 금욕을 설교했으나, 그 자신은 이상할 정도로 왕성한 성욕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 여기에서는 그의 성욕에 관한 기사는 생략. --
그리고 그는 신자들에게 금욕을 철저히 실행하도록 설교하여, 신자간의 결혼에 의한 인간관계를 저지하려고 했다. 어린이들은 부모들과 함께 살지 않도록 격리시켰으며, 가족의 유대관계를 저하시켜, 그리고 개인의 욕망을 없애므로 하여, 신자들의 눈이 오직 "인민사원"으로 만 집중하도록 호도했다. 그 결과 모든 가족이, 모든 신자가, 모든 물건을 인민사원에 기증했다.
Peoples Temple(인민사원, People's Temple) 교주 짐 죤스(Jim Jones)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차츰 짐은 "박해"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설교는 종교박해와 수난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고, 자신을 "아버지인 신"이라고 부르도록 강요하고, "트랜슬레이션"(translation)이라고 하는 독자적인 이론을 자주 설교에 사용했다. 이것은 신자 전원이 "함께 죽음으로, 그 이후에 다른 혹성에서 영원한 행복을 얻게 된다." 라고 하는 기묘한 논리였다. 그러나 그는 이 사고에 사로잡혀 "신을 위해서 죽을 준비를 게을리 하지말라!" 라고 외치며, 집단자살할 의지가 없는 신자들의 리스트까지 만들어, 일일이 지명하면서 규탄했다.
이러한 실체는 존스와 그 일파에 의한 독재단체로, 1977년 경에 드디어 짐의 착취와 부패, 구세주 망상에 진저리가 나 탈퇴하는 신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들의 증언으로 고발기사가 발표되어, 매스콤과 시민은 짐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압력을 받은 존스 자신은, 차츰 대마초 등 약물에 의존하게 되어, 강박관념에서 탈선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남아메리카의 소국, 가이아나 정글로 이주를 결정, 이때부터 극좌사상으로 기울게 되며, 공산주의의 도래를 주장하게 된다.
정식명칭 가이아나 공동 공화국(The Co-operative Republic of Guyana)
수도 : 조지타운 인구 : 751,000명 (세계 162위) 196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그러나 이러한 비난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하 전에 그는 발 빠르게 가이아나로 이동해 버렸다. 가이아나로 이동자금은 100만 달러가 넘었다. 이 자금으로 가이아나에서 1973년 인민사원은 남아메리카의 가이아나 서부 정글에 300에이커(약 367,200평)의 토지를 구입하여 "존스 타운"으로 불리는 마을을 만들어, 외계와 완전히 차단된 상황에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시작했다. 라디오로 전국방송을 실시하여 교단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져, 뒤로 미국에서 많은 신자가 입소하여 약 2,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가이아나 이주 초기의 "존스타운" 건설의 모습
"Jonestown"은 사실상 짐과 백인들로 구성된 소수의 측근이 지배하는 식민지였으며, 흑인신자들은 작열하는 열대지방에서 아침부터 일몰까지 노예와 같이 농경 작업에 종사해야 했다. 부락은 우편과 단파무선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격리되어, 유일한 이런 통신수단도 감시되고 있었다. "존스타운"은 짐 한 사람의 독재국가였던 셈이었다. 신자는 남여별로 구분되어, 어린이들은 부모로부터 격리되어 각종 병으로 고생해야 했다.
"Jonestown"의 입구와 신자들의 숙소 건물
"존스타운"에서 지켜야 할 규칙은 무수히 많아, 조금이라도 위반하면 구타당했다. 징벌을 날이 갈수록 심해져, 고문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변모했다. 여성 신자의 징벌은 성적인 폭력으로 자주발전했다. 언제부터인가 집단자살의 예행연습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Jonestown"의 전경
신자들은 사이렌으로 집합하여, 짐이 "독이다."라고 하는 과일 맛의 쥬스를 유유히 마셔야했다. "존스타운" 마지막 해, 이런 예행연습은 무려 43회에 걸쳐 강요되었다. "존스 타운"에서 존스에 의한 신자폭행 사건이 자주 발생하고, 신자의 강제노동 등의 문제가 소문으로 퍼지면서 사회문제로 크게 발전했다.
한편 미국 본토에서는,
그들을 더 이상 가만히 둘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레오 라이언 하원의원(Leo Joseph Ryan, Jr., 민주당, 1925-1978.11.18)
이러한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1978년11월14일 미국 연방의회 레오 라이언(Leo Joseph Ryan, Jr.,) 하원의원은 연벙정부의 개입을 요청했다. 인민사원의 신자가족 그리고 매스컴 관계자를 대동한 19명의 시찰단이 "존스 타운"을 방문해서 이곳의 존스 등 인민사원의 대표자와 회견했다. 짐의 부락안내를 받은 일행은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에 매료되어, "인민사원"에 대한 국내의 평가가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에 근처를 산책하던 기자 한 사람이, 엄중하게 잠긴 건물에서 병에 걸린 노인들이 집단으로 갇힌 건물을 목격하고, 학대의 증거를 발견하였다. 이제까지 호의적이던 인식은 바뀌게 되었다. 라이언 의원이 이것을 지적하자 짐은 상당히 당황하여 신경질적으로 돌변하였다. 일행이 귀국이 다가오자, 탈출을 희망하는 신자가 "우리들을 여기서 탈출 시켜달라."는 가까스로 호소하는데 성공했다.
11월18일에 일연의 시찰을 끝낸 라이언 의원은 귀국 희망자를 미국으로 데려갈 것을 제안하였으며, 존스의 인민사원측은 달갑지 않은 듯 승낙했다. 그러나 라이언 의원 일행이 Kaittuma 공항에서 출발하려는 때에 신자로부터 칼부림을 당하고, 라이언 의원의 시찰단과 16인의 귀국 희망자가, 소형 세스나 비행기 2대에 분승하여 탑승하려는 순간에, 갑짜기 자동차를 타고 접근해온 인민사원의 신자들이 나타나 자동소총으로 총격을 가해 왔다.
이 사건으로 라이언 의원은 총격을 받아 벌집이 되고, NBC TV 기자 등 5명이 사망, 6인용 세스나 비행기 한 대에 탑승한 일행은 가까스로 이륙하였으나, 활주로에는 총탄으로 쓰러진 시체가 널려 있었다. 이 외에 11명이 중경상을 입은 일행은 구출되기까지 하루 밤을 고통과 신음 그리고 공포로 지내야만 했다.
"존스 타운"의 집단자살 현장
이 뒤로 "존스 타운"으로 돌아온 짐은 "최후의 밤"을 개시했다. 타운에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지금까지의 예행연습과 같이, 신자들은 한 줄로 서서 밖으로 나와 그리고 조용히 각자 컵을 받아 들었다. 갖난 아기에게는 청산가리를 깔떼기로 입에 부었다. 어린이들은 어른으로부터 독이든 컵을 받아 마셨다. 갖난 아기와 어린이들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어른들이 독을 마셨다.
A vat of poisoned grape Flavor Aid
독극물 "시안 화합물"을 탄 쥬스 용기
1978년11월18일, 이렇게 하여 신자들은, 존스의 지시로 커다란 솟에 시안 화합물을 넣은 독이 든 음료수를 마시고 각자 집단자살했다. "존스 타운"에서 생활하던 신자의 약 90%에 해당하는 914명이 사망하고, 이 가운데 267명은 18세 이하의 어린이었다. 사망자 가운데는 강제로 자살을 강요해, 300명 정도는 타살되었다고도 보고 있다. 동시에 존스 자신도 가족을 먼저 자살시키고 나서, 자신은 제단 위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 집단자살의 생존자는 167명이었다. 사태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가이나나 군대가 "존스 타운"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였다.
2006년, 당시의 기록영상를 재현하여 다큐멘터리 영화
" Jonestown : The Life and Death of Peoples Temple"이 공개되었다.
- - 종교의 광기 - -
이 제목에 대해......
위의 내용은 모든 종교에 해당된다는 내용을 기술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단체는 경우에 따라 이탈이 발생하며,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다 같이 이해하고자 하는데 의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