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 여자 때문에 술 마신다

7423946 작성일 09.12.12 14: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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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있을 때, 나를 아는 동년배들은 가끔 묻곤 했었다.

 

"너는 여자들의 신세타령이 그렇게도 좋으냐?"

"타령만큼 좋은 게 어디 있냐. 그 타령을 교과서에 실으면 학문이 되는 거다."

"까고 있네. 넌 인마, 여자를 좋아하는 거야. 틈만 보였다 하면 어떻게 해보려고. 그래서 그렇게 눈을 벌겋게 뜨고 귀를 쫑긋거리는 거라고, 아니냐?"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 여자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나는 알지 못했고 굳이 알고자 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나는 여자를 참 많이 좋아한다. 그들의 웃는 소리를, 웃다가 갑자기 흘리는 슬픈 눈물을, 멍석만 깔아주면 끝도 없이 풀어놓는 대하드라마 이야기를 좋아한다.

 

언제부터 그런 취미를 누리기 시작했는가는 나도 모른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머니를 아버지로부터 구해내겠다는 어리석은 꿈을 꾸던 사춘기 무렵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어머니의 삶에서부터 비롯된 내 술버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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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갓난아기였던 시절, 벌거벗은 아들을 안고 찍은 사진 속의 어머니는 요정 같았다. 요정이 술꾼 남자에게 잡혀서 고생을 한다는 동화책 같은 상상이 아마 꽤 오랜 기간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급기야 구해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찌감치 가출을 해서 셋방을 얻는 등 나름 동분서주도 했었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그것이 얼토당토 않은 망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아마 세상 모든 여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여자들의 이야기는 그 삶의 세세한 부분에 들어가면 나이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어머니와 닮은 데가 있었다. 시집간 고모나 이모 혹은 사촌 누나들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든 조금씩 묻어 있다는 느낌이어서 낯설지가 않고, 지나치게 경이롭지도 않고 다만 친근할 뿐이었다. 친숙하다 보니 고개를 끄덕거리는 횟수도 많고 입에서 절로 터지는 한숨과 탄식소리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익숙하지만 새롭고, 다르면서도 같은 이야기라고 하면 말이 좀 되려는지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는 대개 술자리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하긴 어떤 여자가 술기운도 없이 자신의 내력을 남자 앞에 늘어놓을 수 있으랴.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술도 없이 멀뚱하게 앉아서 듣고만 있을 수 있으랴. 그런 때의 술은, 술이 술을 부르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술을 청하는 형국이 된다. 때문에 술을 마셔도 잘 취하지가 않는다.

 

"저런 나쁜" 소리를 지르며 주먹으로 탁자를 치기도 하고, 지금 당장 쫓아가서 그 나쁜 인간을 잡아 죽이자는 듯 벌떡 일어서기도 하는 둥, 몇 번 흥분을 하다 보면 내가 술을 마시는지 물을 마시는지 거의 의식을 못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나의 술버릇은 본격적으로 가동된다.

 

마치 내 안에 거대한 창고가 있어서, 술도 넣고 이야기도 넣고 이야기의 주인공까지도 넣어둘 수 있다는 듯이, 그야말로 머리와 가슴이 혼연일체가 되어, 눈으로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야기를 멈춘다거나 딴 생각에 빠질 틈을 주지 않고 집요하게 쳐다보면서, 귀로는 이야기를 듣고, 손으로는 끝도 없이 마치 로봇처럼 술 따르기를 반복하며, 입으로는 "응", "응", "그래서", "아 참", "어떻게 그럴 수가" 등등 추임새를 넣어가며 틈틈이 술 한 모금씩을 마셔대는 것이다.

이거 참 공감간다 ,,,,

모르는 여자의 하소연에도 울컥, 한잔 술을 부르고

 

IE001143108_STD.jpg btn_rcm_s.gif btn_blog_s.gif btn_detail_s.gif▲ 여자들의 이야기는 그 삶의 세세한 부분에 들어가면 나이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어머니와 닮은 데가 있었다. 사진은 <생활의 발견> 중 한 장면. ⓒ 미라신코리아 icon_tag.gif술버릇

진지하고 진실한 이야기는 술도 취하지 않게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술이 취해 떨어진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 술은 어디로 갔는가. 자리가 끝나고, 이야기의 주인과도 헤어지고 나면, 그때 비로소 술은 나 여기 있다 하는 듯이 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는데, 그렇다고 필름이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의식은 오히려 갈수록 말똥말똥해지는 것 같은데 몸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예전 같지가 않다.

 

세상이라는 것이 단번에 번쩍 들어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것처럼 자잘해 보이고, 가로수나 전봇대 같은 것들은 손가락만 살짝 튕겨도 날아가 버릴 듯이 가벼운 무슨 이쑤시개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나는 "이 기막힌 이야기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째 이렇게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냐" 등등 소리를 질러가며 이쑤시개 같은 것을 발로 걷어차기도 하고, 두 팔을 휘둘러 뿌리치기도 하고, 머리로 헤딩을 하기도 하며 밤거리를 걷고, 걷고, 또 걷는데, 그래도 어쨌든 집에까지는 잘 들어간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면, 손가락이 부러졌거나 발목이 삐어 퉁퉁 부어 있거나, 이마가 찢어져 있거나 혹은 코피가 흘러 몸이 온통 게딱지처럼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는 이러지 말자, 술 마시면서 이야기 듣지 말자, 아니 여자를 보면 그냥 눈을 감아 버리자, 어쩌고 맹세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웬걸, 세상 인구의 절반은 여자이고, 여자마다 각기 다른 슬픔과 억울함과 불합리를 인식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내가 피하면 어디로 얼마나 피할 것인가.

 

하다못해 밥집에서 밥을 먹다가도 주인이든 종업원이든 부지중에 한숨을 내쉰다거나 창밖을 멀거니 보고 있다거나 하면 뭐라고 한 마디쯤 아는 체를 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그 사람이 응대를 안 해주면 그대로 끝나지만 대응을 해주면 이야기를 유도하게 되는데 그렇게 일단 자리가 만들어지면 예외 없이 술을 청하게 된다. 그러면 내가 그날 무엇을 하던 중이었던가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로 "아아, 네에", "그렇군요", "어쩌고" 추임새를 넣어가며 하루를 좋게 망치고 마는 것이었다.

 

 참,,,,,  그 놈의 술 이라는게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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